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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지문너머(2) / 위용환
간밤에 도깨비에게 홀린 것인지 실제한 상황이었는지 도무지 가늠이 가지 않았다. 그래서 어제 밤에 만졌던 견직물 잠옷이 걸려있는지 아무리 둘러봐도 보이지 않고 혹시 그녀의 입술이나 얼굴에 자신의 체취나 흔적이 있는지를 살펴보고 냄새를 맡아도 냄새나 자취를 알아낸 것이 없었다.
그녀와 단둘이서 한 집에 있다는 것이 여간 마음 쓰이고 똑 바로 쳐다 볼 용기도 나지 않았다. 밖으로 나왔다.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그리고 멀리 시골에 있는 아내와 아이가 생각나며 또한 보고 싶었다. 참 우스운 일이다 무슨 장한 일을 했다고 아내와 자식을 떠올린단 말인가 아이러니한 현상이었다.
남산 육교 앞에 섰다. 여기저기 박보(博譜) 장기판이 벌려졌고 묘수풀이 바둑판도 벌려졌다. 점잖게 한복으로 의관을 정제(整齊)한 사주관상 택일을 보는 사람도 몇 군데 있다. 한쪽에서는 야바위꾼의 호객 소리가 요란했다.
‘돈 놓고 돈 먹기 여기다 저기다 말씀마시고 자 돈 걸어요 세배요 세배 드려요’
하는 호객소리에 따라 컵 세 개를 엎어 놓고 그 안에 하얀 주사위를 보여줬다 감췄다를 현란한 솜씨로 연출하는 곳 바로 옆에 있는 장기판, 그가 평소 즐기던 박보 장기판 앞에 둘러선 사람들 사이로 그의 머리도 비집고 들어가 한쪽 공간을 차지했다.
그도 잘 아는 박보였다. 그런데 돈을 건 사람의 수순이 틀린 것 아닌가 자신도 모르게 훈수를 뒀다. 그러자 갑자기 분위기가 험해지는 것 같더니 둘러선 사람들 중에 건장한 사람이 어깨를 툭툭 치면서 한다는 말이
‘가던 길 가쇼’
사뭇 위협조였다. 물론 시비를 하자면 그도 힘으로 밀릴성 싶지는 않았으나 다툴 마음이 없었다. 그가 한 훈수가 정답이었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둘러선 사람들의 주머니를 털 목적으로 박보장기판을 벌렸는데 그가 영업방해를 직접적으로 한 셈이었다. 둘러선 사람들 중에는 바람잡이들이 몇 명 있다는 것도 물론 뒤 늦게 알았다.
남산 공원으로 올라갔다. 호객하는 창녀 한 명이 오빠 놀다가요 하면서 팔장을 끼는 것이 아닌가 주머니도 앏았지만 그녀와 어울릴 마음이 없었다. 뿌리치고 걸어가니 뒤에서 야 고자야 하고 도발을 했다. 그들의 상투적인 상술인 것이다. 돌아보거나 뭐라고 대꾸하면 영락없이 걸려든다. 유혹과 시비의 양면 작전을 펼치는 그녀들의 수법을 알지 못하면 낭패를 당하는 경우가 종종 생긴다. 손자병법에도 격장지계((激將之計)니 성동격서(聲東擊西)니 하는 계책이 있는데, 알고 쓰는 것인지 모르고 쓰는 것인지는 확인할 길은 없으나 사람들의 생각이나 사는 모습이 예나 지금이나 엇비슷한 모양이다.
하늘에 아리랑이가 어른거리고 시야는 강 건너 영등포가 스모그에 쌓여 희미하게 보였다. 곱게 핀 남산공원의 꽃도 가로수의 싱그러움도 그를 위로해 주지 못했다. 찜찜한 감정을 털어버리려고 나온 것이 오히려 박보장기판의 훈수 한 번 때문에 더 우울했다.
남대문 시장 노천 식당에서 점심을 해결하고, 공원 깊숙이 들어갔다. 소나무 숲 사이의 신록이 꽃보다 곱다. 초록의 솔잎과 연초록의 신록이 그리고 봄꽃이 참 잘 어울려서 한 폭의 수채화를 그려놓은 것 같았다. 이름 모르는 나무의 어린잎은 무척 인상적이었다. 저렇게 고운 새로 난 잎도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때는 몰랐지만 한 참 참 뒤에야 신갈나무의 어린잎이라 것을 알았다.
아이들 그룹과외 지도할 시간이 임박해서 그녀의집으로 돌아왔다. 지인의 도움으로 초등학교 6학년 학생 7명을 맡아서 가르친 지 벌써 두 달째다 그녀의 아들이 일곱 아이들 중에서 제일 성적이 우수한 아이다. 그렇지만 반에서 하위 정도의 실력이었다.
오늘 밤에도 무슨 일이 있을는지 알 수 없고, 밤은 시작 됐는데 착잡했다. 어제밤 같은 일 반복된다면 어떻게 대처할지 그녀가 오늘밤에도 또 오려는지 아니면 그 자신이 먼저 건너가야 하는 것인지 도무지 생각과 행동의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장지문 너머에서는 아무런 힌트나 싸인이 넘어오지 않았다. 에라! 모르겠다하는 마음으로 두 팔을 깍지 껴서 베고 상황을 봐서 대처하려고 벌러덩 누워 버렸다.
첫날 사건 이후로 벌써 달포가 지났다. 당장의 빵문제와 취업의 어러움에 짓눌려서 감히 발동하지 못하던 남성이 잠을 깬 것이다. 아랫도리가 뻐근하고 새벽이면 더욱 달래기가 어려웠다. ‘새벽에 남성이 아무런 반응이 없다면 절대로 딸을 주지 말라’고 했다던 가, 분명 피 끓는 청년으로 모순된 현실에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장지문을 열면 해결될 것 같은데 그도 자신이 서지 않았다. 어쩌면 강간범 또는 강간미수범이 될지도 모르잖은가 말이다. 한 편으로는 그에게 기회를 주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아침마다 통금 해제 사이렌이 울리면 인근의 장충단공원으로 나가 무작정 달리기를 했다. 등에 땀이 흠뻑 날 때까지 아니 잡념이 없어질 때까지 달렸다. 그리고 상쾌한 기분으로 집에 들어왔으나 집에 들어옴과 동시에 잡념이 그를 사로잡았다.
그렇게 봐서 그런지 그녀의 얼굴이 야위어 보였다. 얼굴이 해쓱해지고 전체적으로 힘이 없어 보여 마치 환자로 연상됐다. 두 사람은 그날 밤 일을 일체 입 밖에 내지 않고 아무 일 없었던 듯 지냈지만 금호는 몹시 불안정한 상태였다. 먼저 말을 꺼내지도 못하고 그냥 지내자니 스물아홉의 젊음이 잠을 설치게 했다. 삼십 대 후반 독신녀의 나긋나긋한 그 입술과 감미롭던 혀가 환영으로 떠오르고 불쏘시개가 되어 그의 몸을 달구곤 했다. 나이차가 세 터울 정도 쯤 돼보여서 이사 오기 전엔 그에게 걸 맞는 이성으로 생각하지 않았었다.
그랬는데 이제는 이성으로 느껴지고 그녀의 숨소리와 조그만 동작도 신경이 쓰이고 먼저 대시할까도 생각하게 됐다. 거처를 옮기자니 그도 마련이 없다. 그리고 밤이면 그녀의 육체가 몽환처럼 떠올랐다. 부드럽던 잠옷, 그 속의 속살과 그 내음, 감미롭고 대담했던 입맞춤을 떠올리고는 장지문에 몇 번인가 손을 댔다가 그만두기를 반복했다. 그러다 보면 자정이 넘도록 잠을 이루지 못한 날이 거듭되곤 했다. 그룹으로 과외를 받던 애들도 성적이 오르지 않아서 그런지 거의 안 나왔다.
어느덧 여름 방학이 됐다. 그룹과외를 그만뒀다. 여기저기 취직자리를 알아보았으나 마땅치 않아서 고민 중인 참에 그녀에게서 한 가지 제의가 들어왔다. 마침 그녀의 친정 쪽의 친척한 사람이 육군본부 부관감실의 과장이었다. 혹시 군속으로 근무해볼 생각이 없느냐는 것이었다. 당시의 형편에 ‘불감청(不敢請)이언정 고소원(固所願)’이었다. 원서를 내고 시험을 보고 합격했다.
퇴근 하면은 그녀 애들의 공부를 돌봐 주기로 하고 눌러 있게 됐다. 즉 입주 과외선생이다. 여건상 그렇게 밖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녀의 변화가 별로 없고 장지문을 언제 넘었느냐는 듯이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육군 6급 군속으로 취직을 했다. 마침 통계학을 전공한 까닭으로 자동자료 처리과에 배속됐다. 약칭으로 자처과라고 하는 곳은 당시 첨단 설비인 집적회로의 대형컴퓨터를 설치하고 육군내의 모든 통계를 생산하던 과였다. 종이에 구멍을 뚫어서 빛을 비춰서 자료를 읽고 처리하던 방식으로 종이 카드에는 12스테지˟ 80칼럼이 있어 거기에 뚤린 구멍에 따라 정보를 읽고 저장하고 연산하여 출력 했다. 장비가 크기도 했지만 운용 요원은 상당히 많았다. 종이에 키펀치를 이용해서 구멍을 뚫는 천공수 오류를 검사하는 검공수가 백 명도 더 있었는데 그들이 전부 여자였다. 어떤 이는 꽃밭에서 산다고 부러워하기도 했다.
신입직원 회식자리에서 그는 만취했다. 집에 어떻게 왔는지 몰랐다. 머리가 아프고 갈증이 났다. 실눈을 뜨고 방안을 둘러보니 낯익은 방이었다. 누군가의 인기척을 느끼고는 계속해서 자는 척했다.
‘일어났어요 여기 꿀물 타왔으니 마시고 정신 차려요’
형숙모의 목소리였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 꿀 물 그릇을 내려놓고 조용히 문을 닫았다. 미안한 마음에 일어나지 못하고 눈을 뜨거나 대답을 못했다. 도대체가 어떻게 집에까지 왔는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자초지종을 알아야 사과라도 하고 변명이라도 늘어놓을 것인데 도무지 기억이 가물거릴 뿐이었다. 창문 너머로 그녀의 밝은 목소리가 다시 들려와 연상은 끊겼다.
‘나 교회 다녀올 테니 일어나서 식사해요 밥 차려 놨어요’
집을 나가는지 대문닫는 소리가 들렸다. 겨우 안심을 하고 그녀가 나가는 소리를 듣고서야 일어났다. 지난밤의 일을 물어보려고 애들이 있는지 아랫방 문을 열어봤으나 아무도 없었다. 주일학교에라도 간 모양이었다. 다행이다 하는 안도의 한숨을 쉬고, 어제밤의 일을 아무리 연상을 해봐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누구에게라도 물어야 될 것 같은데 애들도 없고 물어 볼 사람이 없었다.,
그녀에게 더욱 민망한 꼴이 됐다. 그렇잖아도 지난번 사건 뒤로는 대면하기가 서먹서먹하고 불편했는데 어제 밤에 실수를 한 듯했다. 아직 월급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얼마간의 용돈을 빌려서 쓰고 있는데 그 돈으로 회식을 하고 만취해서 들어왔으니 면목이 없었다. 밥맛도 없고 교회에서 돌아오면 얼굴을 마주하기가 어려울 것 같아 무작정 집을 나왔다.
어디로 갈까 한참 생각하다가 천호동 방향 버스를 탔다. 그때 까지도 목적지가 정해진 곳이 없었으나 천호동 다리를 건너면서야 저기로 가야겠다고 작정했다. 광나루 수영장으로 향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광나루 건너 암사동 강변이었으나 보통 광나루 수영장이라고 불렸다. 봄에 성동구청에서 공개입찰을 할 때 후배 영재가 탈의장 한자릴 낙찰 받은 것이 기억나 거기로 갔다. 물론 그전에 만나서 탈의장 자리를 알아놨었기에 더듬거리지 않고 찾아 갈 수가 있었다. 사람 좋은 영재가 웃으면서 반가이 맞아준다.
‘형 연락도 없이 어떻게 왔어요’
‘응 그냥 왔다. 언제 개장 했냐’
‘일 주일 전에 개장 했어요’
‘수영 할래요 저쪽으로 들어가서 옷 갈아입어요’
‘아직 좀 빠르지 않냐’
‘어제는 튜브가 없어서 못 빌려줬어요’
‘그래 다행이다’
수영복으로 갈아 있었고 물속으로 들어갔다. 더들어가지 말라는 로프가 있었지만 그 너머로 헤엄쳐 갔다. 감시탑에서 안전요원이 호르라기를 불고 확성기에서 돌아오라는 방송이 나왔다. 그렇잖아도 강심 쪽으로 나가니까 수온이 갑자기 차가워져서 돌아오려던 참이었다. 사람들의 시선을 받고 파견 나온 경찰관에게 불려갔다. 작년여름에 아르바이트로 수상안전요원을 했기 때문에 안면이 있는 경찰관이었다. 알만한 분이 왜 그래요 하고는 더 이상 채근하지 않았다.
집에 들어가려니 쑥스럽고 민망했다. 집 앞에서 아이스크림 한 통을 사들고 들어갔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그냥 아이스크림 봉지만 내밀었다.
‘아침도 안 먹고 왜 이제야 와요’
‘예 그렇게 됐습니다 면목 없습니다’
‘뭐가 면목 없다는 거에요’
어제 내가 실수하지 않았나요‘
‘들어와서는 바로 잠들었는데 무슨 실수라니요 그건 것 없었어요’
아무래도 거짓말을 하는 것 같았다.
‘아무튼 어디 갔다가 이제야 오느냐구요’
광나루 수영장에 갔었다고 말했더니 혼자만 가는 법이 어디 있느냐고 힐난이다
여자 혼자서 아들을 기르려면 어려움이 많다. 가령 목욕탕에 혼자 보내야하는데 아직 어린남자애는 혼자 보내면 제대로 목욕 못하고 오기가 일수다. 반대로 남자혼자 딸을 기르려면 이 또한 어려움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방학을 했으니 아이들을 수영장에 대려고 가달라는 것이었다. 다음 주일에는 꼭 같이 가기로 약속을 했다. 지은 죄가 있으니 싫다거나 좋다고 할 수가 없었다. 장소는 여기저기를 거론했으나 결국은 인천 송도 해수욕장으로 정했다.
아침이면 운동을 하는 것을 안 세 식구가 먼저 나와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골목길을 돌아 나오는데 형숙이 불쑥 나타서는 하는 말이 아빠였다. 몹시 생경했다. 그녀도 놀라는 눈치였다. 뜬금없이 아빠라니 주위를 둘러봤다. 새벽이라서 행인은 없었다. 그리고 하는 말이 아빠 한 달에 하루만 우리 아빠 해 줘요 하는 것이 아닌가, 그녀를 건너다 봤다. 아마 그들끼리는 그런 말들이 오간 적이 있었든 모양이었다. 세 사람의 눈이 그를 주시하면서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야 남자이니 개의치 않는다고 해도 여자인 그녀에게 누를 끼지는 것 같아 선뜻 대답을 못했다. 책임지지도 못하면서 소문만 이상하게 나면 큰일이다 싶어서였다. 타협을 봤다. 결과로 아는 사람 있는 곳에서나 살고 있는 동내에서는 안 되지만,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는 곳에서 한 달에 딱 하루만 아빠라고 불러도 된다고 허락을 했다.
애들이 좋아라고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아빠 하면서 안겼다. 다섯 살 그리고 돌이 갓 지났던 남매가 칠 년 동안 단 한 번도 아빠를 본 적이 없고 부정을 못 느끼고 자란 것을 안 금호는 애들이 몹시 측은했다. 또 한 번 양보하여 그날과 해수욕 가는 날까지 포함해서 그달에는 두 번 아빠 해 주기로 했다. 그녀는 처음에는 당황하는 것 같더니 고맙다고 오히려 사례를 했다.
일주일이 금방 지나갔다. 새벽부터 부산하게 김밥을 싸고 간식을 준비하고 한껏 달뜬 분위기였다. 수영복과 물안경이며 갈아입을 옷들을 챙겨들고 종각 옆에 있는 인천행 직행버스 터미널로 나가서 시외버스를 탔다.
송도해수욕장은 밀물 때 들어온 물을 가둬 두고 해수욕을 하는 해수욕장인데 그런대로 물도 깨끗한 편이었다. 수문 쪽을 제외하고 둥그렇게 모래사장을 만들어 놨는데 뻘 물이 일지 않아 수영을 하기가 좋았다. 호수 같은 곳이라서 파도가 없다. 그러니 파도를 타는 스릴은 없었으나 수영하기는 제격이었다. 물 가까운 곳에 있는 파라솔을 하나 빌렸다.
그리고는 탈의장에서 수영복으로 갈아입고들 나왔다. 그녀는 빨간 비키니 수영복을 입고 짧게 자른 단발머리에 같은 색의 수영모자를 썼는데 참 잘 어울렸다. 혹시 연예인이 아니세요. 싸인 한 장 해주세요 하고 농담을 던졌다. 아니 농담만은 아니었다. 송도 수영장안에서 그녀를 능가할 미녀는 아직 보이지 않았다. 금호는 보라색 수영복에 보라색 수영모를 쓰고 멋있게 자란 누르스름한 가슴수염을 드러내고 훤칠한 키에 미스터 코리아 선발대회에서나 봄직한 몸매와 카리스마가 넘쳤다. 옷을 입고 있을 때는 느끼지 못하던 남성미을 맘껏 발산하고 있어 단연 돋보였다. (계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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