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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편 1장 :뜻밖의 경험
청주 도립병원의 제2병동 맨 끝에는 마당이 있는데 그곳에
수술 찌꺼기들을 태우는 화장실이 있고 그 옆애는 시체를 두는
시체실이 있습니다.
거의 매일 죽어가는 사람들이 있어서
시체실에는 늘 시체가 있습니다.
그때는 `영안실`이라 하지 않고 `시체실`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마당에서는 자주 시체의 부검검사가 있는데
간호학교 학생들이 선생님이 시체를 해부하며
설명을 하면 열심히 듣습니다.
한번은 12살 먹은 소년이 친구와 싸우다가 가위로 눈을 찔려
죽었는데 의사가 집게로 아이의 뱃가죽을 찝어 들어올리고
가위로 푹 찔러 뱃가죽을 오립니다.
그러자 바람이 들어간 창자가 마치 고무풍선처럼
마구 삐져나와 배를 덮습니다.
그리고 다시 창자를 마구 구겨 넣고 뱃가죽을 듬성듬성 꿰매는데
얼마나 비린내가 나는지 나는 우웩 우웩 게욱질을 합니다.
다음에는 면도칼로 귀옆의 머리를 동그랗게 금을 긋고
머리 가죽을 아래위로 조금 벗겨내고 톱으로 해골을 썹니다.
그리고 쇠붙이 같은 끌을 해골 양쪽에 까우도 망치로 톡톡 치자
반쪼가리 해골이 떨어집니다.
그러자 마치 비닐에 쌓인 묵처럼 골이 흔들리는데
의사는 가운데를 찢어 뇌를 살펴 봅니다.
"가위 끝이 뇌를 건들여 사망했다"라고 사인츨 발표 하는데
울타리 밖에서는 그 아이의 어머니가 통곡을 합니다.
의사는 다시 해골을 씌우고 머리가죽을 듬성듬성 꿰매고 끝을 냅니다.
간호사학생들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자세히 봅니다.
간호원실 옆에는 식당이 있고 그 옆에는 창고가 있는데
항상 자물통이 걸려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자물통이 열려 있기에 내가 들어가 보니
그곳은 어린아기가 태내에서 생겨나는 모습들이 순서적으로
알콜병에 담겨져 있습니다.
손가락 만한 아이로 부터 다 자란 아이까지 다 보관되어 있는데
설명서가 모두 일본말로 적혀 있는 것을 보니 일제시대에
다 준비한 것 같습니다.
거기에는 또 우리 몸의 모든 장기들이 알콜병에 담겨져 있고
사람의 손과 발도 있는데 소름이 끼칠만큼 무섭습니다.
남자와 여자들의 성기도 있고 사람의 머리도 알콜에 담겨 있는데
나는 너무 무서워 다시는 그 근처도 얼신 거리지 못합니다.
나는 형과 함께 식당에서 밥을 먹는데
점심은 쌀과 우유를 끓인 죽을 먹습니다.
쉬는 시간에는 식당 아줌마들과 북한에서 내려온 노무자들이
햇볕에 앉아 서로 이야기하고 농담도 하는데,
한 나이든 남자가 바지의 단추를 잠그지 않았는지
발기된 성기가 갑자기 밖으로 삐저나와
모두 박장대소하며 즐거워 합니다.
우리 병싱이 6호실인데 옆의 5호실에는 북한에서 넘어온
매우 잘생긴 아저씨가 입원해 있는데 의사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병실 앞만 지나가면 송장냄새가 진동합니다.
그곳에는 16살된 예쁜 딸이 있는데 아버지의 병간호를 합니다.
어머니가 없고 두 부녀만 있는데 딸이 너무 예쁘고
아주 섹시해보여 그 소녀를 한 번 본 남자들은 나이에 관계없이
다시 그 소녀를 보게 되면, 다시 보고 싶은지 그 병실 주위에는
늘 별별 남자들이 다 기웃거리고 배회합니다.
나 역시 18살된 청년이기에 그 소녀를 만나기만 하면
숨이 막할 정도가 되어 버립니다.
그러던 소녀가 어느날 집에 들어오지 않았고
그 후에도 들어오지 않았는데 소문에는 군인 헌병과
눈이 맞아 도망갔다는 이야기가 들려 옵니다.
그렇게 1954년이 다 지나가고 1955년이 돌아왔습니다.
어느날 작은 형이 "세근아 " "응?"
"북문로 3가에 성당이 있잖아?"
"응"
"지금 미국신부님이 계신데, 네 이야기를 하며 도와 달라고 하자,
너를 데려오라고 하시는구나"
"왜?"
"도와주시려나봐, 내일 나하고 같이 가자"
제3편 1장 끝
제3편 2장:작은 형이 나를 데리고 북문로 3가의 성당으로 가다.
1955년 1월
충청북도는 우리나라 노기남 서울대교구 주교님께서 ,
미국의 메리놀회 외방전교회에 관리를 맡기셨습니다.
그리하여 충북이 각지방과 청주에는 미국 메리놀 신부님들이
파견되어 사목을 하고 계셨습니다.
충북에는 아직 주교님이 없으시지만 앞으로 주교님이 되실
파디 신부님이 청주에 단 하나밖에 없는 성당에 계시고
충북 교구를 관리하십니다.
그러나 청주에는 성당이 하나밖에 없는데
북한에서 사목을 하시던 미국 메리놀 신부인
노 (Joseph Gibbons)신부님이 본당신부님으로 오셨고,
북한에서 내려오실때 한국인 지학순 (다니엘)신부님을 데리고
오셨고 그분이 보좌 신부님 이십니다.
형이 다음날 나를 데리고 청주시 북문로 3가의 성당으로 갔는데,
나는 전에 어머니따라 수도 없이 왔던 곳입니다.
성당은 아주 작고 납작해 보이는 양철집인데 200명이들어가면
가득 찰 조그만 성당입니다.
그 옆에는 작은 붉은 2층집이 있는데 본당신부님과 보좌신부님과
또 다른 중국에 있다가 오신 월쉬(Wolsh) 신부님이 머무시는 방입니다.
그리고 그 이층집 옆에는 단층집이 있는데 주교님 대행 일을
하시는 파디(Pardy )신부님이 계시고, 문 수사님과
또 다른 수사님이 파디신부님을 도와주십니다.
내가 국민학교 4학년때는 이곳에 한국인 구신부님이 계셨는데,
그분은 어린이들을 무척 사랑하시고 교리와 음악을 가르쳐 주고 싶어하시며,
성당 가까운곳에 사는 아이들에게 학교가 끝나면
성당에 오라고 하셨습니다.
나는 그때부터 내가 다니던 교동국민학교에서 공부가 끝나면
성당으로 달려갑니다.
그러면 구 신부님은 우리에게 교리를 가르쳐 주시고
노래를 가르쳐 주시는데
이딸리아의 싼타루치아
오 솔레미오
나폴리
등의 혀도 안돌아가는 어려운 세계 명곡을 가르쳐 주시는데 ,
우리들은 학교종이 땡땡땡 어서모이자 , 같은 동요를 배웠는데
구 신부님은 그런 어려운 곡들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처음에는 무척 어렵더니 자꾸 하니까 괜찮아 집니다.
그리고 미국 민요를 가장 많이 배웠는데
'오!수산나
스와니강물
올드 불랙죠
켄터키 옛집
옛날에 금잔디 동산의 메기'라는 곡들을 배웠습니다.
우리가 6.25 전쟁을 겪고 돌아와보니 구 신부님은 없고
미국 메리놀 신부님만이 계십니다.
성당 마당에는 고목이 된 버드나무가 3그루가 있었고 ,
또 고목의 느티나무가 2그루가 있었습니다.
작은 형이 나를 데리고 사제관으로 들어가니
이층에서 노신부님이
`천신이 보하매 제2위강생 오주의 겸덕을 본 받읍시다,
아베 아베 아베마리아` 성가를 흥얼거리며 마치 빵빵한
고무 풍선이 튕겨져 내려오듯 오시는데, 나는 미국신부님이
나 보다 작아 보이지만 마치 공이 굴러오는것 같아
깜짝 놀랐습니다.
"안녕하세요? 난 노신부요"라고 하시며 내게 손을 내밉니다.
나는 얼떨결에 신부님 손을 잡으며
"저는 정세근 임마누엘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형으로부터 이야기 다 들었습니다."라고 하시며
나를 바라보시는데 키는 작고 터질듯이 빵빵하지만 신부님의
두 눈이 불이 타오르듯 이글 거리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시며
"아무 걱정하지 마세요 잘 될 것입니다"라고 하십니다.
잠시후에 이층에서 또 한분의 신부님이 내려오시는데
한국인 신부님이십니다.
"이분은 지학순 보좌신부입니다."라고 노신부님이 소개를 하자
지 신부님은 나를 보시며
"안녕"
한마디 하시고 밖으로 나가십니다.
제3편 2장 끝
(계속해서 제3편 3장이 연재되오니 많은 구독 바랍니다.)
제3편 3장 :내가 성당 청소를 하다.
노신부님은 나를 데리고 밖으로 나가시더니
성당 뒤쪽 동네로 가십니다.
그곳에는 남편을 잃은 부인이 나 만한 아들 하나와
국민학교 2학년인 딸을 데리고 사는데,
노 신부님은 천주교 신자 가정이 어려운 3명의 남자중학생을
이 집에 하숙을 시키는데 나도 함께 여기서 지내라고 합니다.
그 세명의 중학생들은 이 집에서 아주 편안한 생활을 하며
학교에 다닙니다.
그런데 그 3명의 아이들 중에 '베드로'라는 아이가 좀 까다로운데
말이 무척 빠르고 얼마나 빠른지 입에서 침이 튀어 나오고
항상 좋은 말이 아니고 남을 욕하는 말뿐입니다.
그리고 나를 만만하게 보고 나를 괴롭히기 시작하는데
그냥 가만 있는데도 발로 툭툭 차거나 주먹으로 치거나
나를 밀치거나 욕을 하는 것이 너무 심하자 ,
한 아이가 신부님에게 고자질을 합니다.
신부님이 노발대발 하여 그의 어머니를 오게 하시더니
아이를 당장 데려가라고 호통을 치십니다.
그 후 나는 아주 편하게 지내는데
어느날 노신부님이
"임마누엘!"
"예 신부님"
내일 부터 성당 청소하세요"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다음날 부터 나는 성당을 청소하고
마당과 화장실까지 청소를 합니다.
며칠 후 노 신부님은
"임마누엘!"
"예 신부님"
"우리방과 지 신부님 방도 청소하세요'
"예"
나는 나무실과 교리방과 신부님의 화장실 까지 다 청소합니다.
그리고 아직 추운 겨울이라서 성당 난로에 불을 때는데
어느날 트럭에 통나무 자른 것을 가득 싣고 와서
성당 뒷마당에 내려 놓습니다.
나는그 나무를 매일 도끼로 쪼갭니다.
어느날 노 신부님은 또
"임마누엘!"
"예 신부님"
"아침 5시 반에 성당 문을 여세요, 그리고 6시에 삼종을 치세요"
라고 하십니다.
나는 새벽 5시에 성당에 가서 문을 열고 6시에 삼종을 치는데
마당에 종각이 있어서 줄을 잡아당 기면 종소리가 납니다.
"임마누엘!"
"예 신부님"
신부님이 라틴어로 된 복사책을 하나 주시며
책을 외우라고 합니다.
거기에는 신부님과 주고 받아야 할 기도문이 모두 라틴어인데
그때는 신부님이 모두 라틴어로 미사를 드리십니다.
신자들에게 등을 보이시고 재단을 향하여 미사를 드립니다.
복사책에는 긴 통화의 기도와 사도신경까지 있는데
그걸 다 외우라고 합니다.
나는 혀도 잘 안 돌아가는데 이걸 어떻게 다 외우는가?
걱정하며 그래도 외우느라고 애를 먹습니다.
Ad deum gui redlficat uven tutem meam
미사 시작할때 제단 아래에세 신부님이 제단을 향해
무슨 기도문을 하시면 복사가 이렇게 대답해야 합니다.
그리고 다음에는
Guia deus meus porti tuto mea kware mere....
confite ordeo omnipodenti ....
첫 미사는 신자들의 아이들이 합니다.
그러나 미사후 다른 신부님의 복사는 다 내가 해야 합니다.
제3편 3장 끝
(계속해서 제3편 4장이 연재되오니 많은 구독 바랍니다.)
제3편 4장 :내가 학교에 들어가다.
보좌신부님이신 지학순 다니엘 신부님은 나와 함께
아주 먼 청주시 모충동 신자의 집에 성체를 모시고 갑니다.
신부님은 낡은 찦차를 몰고 가는데 그때의 청주시 도로는
모두 비포장도로입니다.
차가 마구 튀어 오르는데 지신부님의 운전솜씨는
제가 보기에도 매우 거칠어 보입니다.
성체를 주시고 이제 돌아가는데 신부님이 실수하여
차를 논으로 꾸러 박습니다.
"썅 ! "신부님이 신경질을 부립니다.
동네 사람들이 모여 차를 간신히 끌어 냅니다.
지신부님은 나에게 납작한 물통(요담프 라는 일본말)을
하나 주시며 뜨거운 물을 담아 침대속에 넣어달라고 하십니다.
나는 너무 뜨거워 수건에 싸 들고 신부님 방에 들어가서
침대속에 집어 놓고 수건은 빼왔습니다.
나중에 신부님은
"수건으로 싸서 집어넣어야지 내가 발을 뎃잖아?"라고 하시며
호통을 치십니다.
제가 이렇게 늘 생각이 모자랍니다.
지신부님은 제단에 꽃이 없으면 나에게 야단을 치십니다.
"제단에 꽃도 없이 어떻게 미사를 드리느냐?!"
그렇다고 하여 나에게 꽃을 사 오라고 돈을 주는 것도 아니고,
나는 청주시내를 돌아다니며 남의 집안에 심어 놓은 꽃이
보이면 들어가 사정사정하여 한두개를 얻어와서
다른 나무 이파리와 함께 꽃을 꽂습니다.
그런일이 나에게는 무척 힘이 듭니다.
지신부님은 로마로 유학을 떠나셨고 노 신부님은 인사이동으로
다른 곳으로 가셨고 청주에는 나귀엘 모 신부님이 새로 오셨는데
키가 장때 같습니다.
1956년 봄에 나는 청주 청원 야간 중학교에 입학을 하였습니다.
낮에는 성당에서 일을 하고 저녁 5시에는 학교에 갑니다.
내 나이가 이미 19살인데 다른 아이들은 대부분 20살이 넘습니다.
6.25 전쟁으로 공부할 시간을 놓친 학생들입니다.
그들은 거의 모두 직장생활을 하면서 야간학교에 다니고
그들도 6.25의 참사를 다 경험한 친구들이기에
서로 사랑하고 이해 해 주는 좋은 친구들 입니다.
성당에서 주는 월급은 매우 적어 생활하기에 어렵습니다.
내가 하숙비를 내고나 면 용돈으로 쓸 돈 조차 모자랍니다.
그래도 나는 불평 한마디 하지 않고 열심히 일 하며
미국 신부님들로부터 신앙을 배우고 남을 사랑하고 규칙을
잘 지키는 법도 배우고 미국 사람들의 민주적인 모습도 배웁니다.
그때부터 미국의 NCWC 가톨릭 구호기관에서는
한국에 어마어마한 `구호물자`를 보내기 시작합니다.
구호물자는 여러종류가 있는데 거의 대부분이
밀가루
옥수수가루
우유가루
식용유
뻐터
치즈
통조림
옷
과자도 있는데, 통조림과 귀한 것들은
청주까지 도착하기 전에 중간에서 다 사라져 버립니다.
나는 봄이 왔기에 성당의 밭에 화단을 하나 만듭니다.
그리고 그 화단에 꽃씨를 뿌립니다.
제3편 4장 끝
제3편5장:내가 피아노를 배우다.
성당의 화단에 꽃씨가 잘 자라고 ,나는 분홍색 월계꽃인
장미가지를 하나 얻어다가 밭에 꽂아 뿌리를 내어 잘 자랍니다.
그리고 지난 가을에 청주 중앙공원에 놀러 갔었을때
라일락 씨가 많이 열려 나는 그씨를 받아 두었는데,
그 씨를 심자 라일락 싹이 잘 나옵니다.
우리 성당에서는 한달에 2번이나 3번 구호물자를 주는데
각 동사무소에 공문을 보내어 어려운 사람들을
보내 달라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옵니다.
그리고 천주교신자들만 줄 때도 있습니다.
미국인들은 입던 옷들을 깨끗이 빨아 대림질을 하고
정성껏 포장하여 보내줍니다.
옷 둥치는 하도 크고 무거워
장정들 두 사람이 간신히 들 정도 입니다.
그 옷 둥치를 하나 풀어 놓으면 선더미 같습니다.
한국인들은 그동안 의류기술과 염색 기술이 아직 발달되지 않아
각 농촌 가정에서는 목화를 심어 실을 뽑아 물레를 돌려
실을 짜서 광목을 만들고, 그 광목으로 바지저고리를 만들어
입기에 전국의 한국인들의 옷은 수천년동안 변하지 않아
하얗게 입습니다.
염색 기술도 없어서 대부분 흰옷을 만들어 입는데
미국의 옷들은 한번도 보지못한 옷감들이고,
또 색깔이 눈이부실만큼 화려 한데
한국인들이 구호물자 옷을 입으면 금방 티가나서 사람들이
"저 사람 구호물자 입었다"라고 흉을 봅니다.
그게 어디 흉을 볼일인가?
오히려 부러워 할 일이나, 한국인들은 중국의 유교사상을
일찌기 받아들여 체질화되어 항상 남의 이목이나 체면에 신경을 씁니다.
그리하여 그 좋은 옷을 꺼멓게 염색을 하여 입는데
나라고 한국 사람이 아닌가? 나도 염색을 하여 입습니다.
구호물자 덕분에 천주교 신자들이 부쩍 늘어납니다.
1956년때는 한국이 너무 가난하여 6.7월의 보릿고개를 넘지 못해
굶어 죽는 시람들이 많습니다.
6.25 전쟁이 끝난지 6년이 지났건만
이승만 대통령은 나라를 부강시킬 어떤 능력도 없습니다.
미국에서 살았고 미국의 교육을 받았기에 한다는 소리가
"농사지을 때 똥을 주지말고 비료와 풀을 거름으로
만들어 주어라"고 합니다.
그러나 똥은 한국인들의 가장 중요한 비료입니다.
위생관념이 없어 이승만의 말은 맞는 말이지만,
수천년 사용해온 거름인데 그것을 없애라고 하는 말을
들을 농민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심지어는 농민이 지게에 항아리를 지고 다니며
"똥 퍼!"라고 외치는데 똥을 돈으로 삽니다.
나는 낮에는 성당일을 하랴 밤에는 학교 공부하랴
정신이 없습니다.
그런데 성당의 올갠 소리가 너무 좋고
성가단들이 내는 아름다운 성가소리에
`나도 올갠을 치고 싶다`라는 생각에 서점에 들러
`올갠교본`을 사서 혼자 배우기 시작합니다.
3개월만에 올갠교본을 다 떼었습니다.
그리고 올갠을 조금씩 칠줄 알게 되면서 성가책도 치면서
음악에 점점 빠져들어갔고
그때는 청주시에는 피아노 학원이없었을 때인데
청주시 수동에 이화여대를 나온 여자가
집에서 피아노를 가르칩니다.
그래서 나도 피아노를 배우고 싶어 그때부터 점심시간을
이용하여 피아노를 배우게 되는데 이것은 내가 음악에
눈을 뜨게 되는 대 사건입니다.
제3편 5장 끝
제3편 6장:1956년 대의 교육과 오늘날의 교육
내가 야간 중학교 2학년이 되었을때와 지금의 중학생 교육이나 다른교육을 비교하게 됩니다.그동안 수십년이 지났다고 하여 지금의 교육이 더 훌륭하고 그때의 교육이 잘못되었는가? 한 번 비교 해 봅니다. 그때는 국사와 세계사를 배우고 지리도 배우는데, 세계의 나라이름과 수도가 어디인지를 배웁니다. 생물학 시간에는 개구리 해부하는 것을 배웁니다. 개구리가 죽었는데도 심장이 뛰는 것을 보며 심장이 얼마나 특별히 만들어 졌는가를 알게 됩니다. 그리고 습자(붓글씨)도 배웠습니다. 또한 반공 교육도 배우고 도덕과 윤리도 배우고 효도와 어른에 대한 교육으로 신사숙녀의 개념도 배웁니다. (그런 교육은 후에 김대중과 노무현과 이해찬 시대에 다 없어짐) 국어 시간에는 외국의 명작과 국내의 문학에 대하여 공부하는데 국어선생님이 "오 헨리의 `마지막 잎새`에 관하여 연구해오라" 고 까지 하여 우리는 그 책을 밤새도록 읽고 다음날 발표를 합니다. 또 선생님은 모파상의 `그 여자의 일생`이란 책을 읽고 감상문을 써 오라고 합니다. 선생님은 우리에게 詩 쓰는 법을 가르치시고 작문을 짓는 법도 가르쳐 주십니다. 음악시간에는 세계 명곡을 가르쳐 주시고 합창을 하는데 '즐거운 곳에서는 날 오라 하여도'의 Sweet home 노래를 합창으로 불렀고 `오빠생각과 뻐꾸기 노래도 합창으로 불렀습니다. 그리고 `코르붕겐`이란 시창연습하는 음악도 배웠는데 #과 ♭이 6개 붙은 곡들을 계명으로 부르는 방법도 배웠는데, 그때 배운 것 때문에 지금도 아무리 어려운 곡이라 할지라도 악보만 보면 바로 부를 수 있고 피아노를 칠 수 있습니다. 자 ! 지금의 교육은 어떤가? 우리가 배운 그런것은 거의 없습니다. 오직 대학 시험을 위한 공부뿐입니다. 그러니 아이들이 머리는 그런 일에만 발달하고 경쟁력만 배우게 되어 인간교육이란 전혀 없기에 `아이들은 똑똑하지만 어른을 공경하고 남을 존중하는 정신은 퇴색해 버립니다. 그러니 그런식의 교육을 받은 정치인, 언론인, 법관들의 인격이 별로 좋지 않아 나라가 휘청거리면 맨날 서로 비난하고 잔꾀만 부리느라고 조그만 나라가 분단이 된채 70년이 지나도 그것 하나 해결하려 하지 못합니다. 교육이란 국가 100년 대계인데 그 주요성을 깨달은 자가 별로 없습니다. 더구나 나는 성당에서 미국신부님의 언행으로 부터 미국 정신을 배우고 신앙을 배우는데 나에게는 다시 없을 좋은 기회입니다. 로마로 유학가셨던 지학순 신부님이 돌아와서 주교님이 되시고 원주교구로 가셨습니다. 나귀엘모 신부님도 주교가 되시어 인천 교구로 가시고 청주의 파디신부님도 주교가 되시어 청주 교구가 정식으로 출범합니다. 구호물자로 신자들이 급증하여 청주에는 내덕동에 주교좌 대성당이 세워지고 수동에도 성당이 세워지고 이제 서운동에도 성당을 지을 계획을 세웁니다. 나는 수많은 미국신부님들을 알게 되면서 많은 경험을 합니다. 내가 심은 화단의 꽃들은 해마다 많이 피어 성당 제단에 꽃은 떨어지지 않습니다. 장미꽃이 주교관 울타리가 매우 아름답게 피어 오르는데, 내가 그 꽃을 몇개 자르려 하자 파디 주교님이 자르지 못하게 합니다. `아유, 나는 주님을 더 기쁘게 하려고 하는데` 파디주교님은 꽃을 무척 좋아하십니다. 라일락꽃도 해마다 활짝피면서 그 향기가 성당 마당에 가득합니다. 성당 마당의 버드나무를 다 잘라버렸고 지금은 느티나무 2그루만 아름다운 위용을 뽑내고 있는데, 가을에 고목의 느티나무가 단풍이 들면 매우 아름답게 변모하는데 맨 위에는 마치 불에 타는듯 빛이 나고 가운데는 설명하기 어려운 화려함으로 가득하고 밑에는 큰 둥치를 감싸듯이 보이는데 나는 다른 느티나무에서는 그런 모습을 전혀 볼 수가 없습니다. 나는 고등학교 3학년이 되었습니다. 제3편 6장 끝 제3편 7장: 대 혼란의 시대의 한국 |
6.25 전쟁 후 10년이 흘렀건만 이승만 대통령은 바보같고 허수아비 같은
사람이기에 국가 건설이나 경제개발 따위에 관하여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틈을 이용하여 북한에서는 계속 간첩들을 남파하여 사회를 혼란시키는데
거기에 대한 대책 없이 자기의 정권유지에만 신경을 쓰고 ,또한 정부관리들
조차 이승만을 이용하며 자기들 뜻대로 나라를 이끌어가려고 하는데
가장 악랄한 자가 내무부 장관입니다.
그는 이승만이 영구 집권하도록 온갖 술수를 부려 정권유지에만 신경을 쓰지만,
국민들이 점점 깨어나면서, 이승만에 대하여 불신을 하며 데모를 하기
시작합니다.
그것을 이용하는 자들이 바로 좌빨들인 공산주의자들 입니다.
북한 공산주의자들의 생리는 남한이 무너지도록 하기위해 사회혼란을
가중시키는 `심리전`을 펴는데 익숙하지만 ,남한 정부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데모의 규모가 커지자 경찰들이 최루탄을 터뜨립니다.
그럴수록 학생들의 저항은 더욱 거세집니다.
마산 앞바다에서 눈에 최루탄이 박한 한 소년이 발견되자 마산시민들이
분노하여 마산 경찰서를 불태워 버리고 그 도화선이 서울로 옮겨져
고려대학생들이 데모를 하는데 경찰이 발포를 시작합니다.
언론에서 정부를 비난하자 최내무부장관이
"총은 쏘라고 준것!"이라는 말을 하며 자기의 합리성을 주장합니다.
그러자 고려대 교수들이 "학생들의 피에 보답하자"하며
모두 데모를 하게되고, 거기에 서울 시민들이 모두 데모에 합류하자
1960년 4.19 혁명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제서야 이승만은"국민이 원한다면 하야 하겠다"라고 하며
대통령자리에서 물러납니다.
나는 그 무렵 음대에 가려고 음악공부에 전심전력을 하는데,
그때는 음악이면 음악, 미술이면 미술, 무용이면 무용 하나만 잘 해도
대학에 갈 수가 있는때 였습니다.
그러나 나는 음악 공부만 하느라고 다른 공부는 제쳐둔 상태이기에
공부하기가 너무 힘이 들었습니다.
나는 그동안 피아노를 열심히 배워, 바흐,모짜르트, 베에토벤,쇼팽 곡을
칠정도 이고 나는 장래 오케스트라의 지휘자가 되고 싶어서
음악선생님들을 쫓아다니며 화성학을 배우고 카운터 포인트를 배우고,
바흐, 모짜르트, 베에토벤과 쇼팽의 곡을 분석하는 것을 배우고,
지휘법을 배우고,작곡법을 배우고,악기 편성법을 배우느라고
정신이 없던 때입니다.
1961년에 학교를 졸업을 합니다.
그리고 한 해 더 공부하여 내년에 대학에 가려고 합니다.
나는 그동안 청주시 서운동에 성당이 생겨
이제까지 일하던 문로 성당은 페쇄되어 그리로 이사를 갑니다.
전에 일하던 북문로 성당보다 10배는 더 커서, 나의 할 일도 그만큼 늘어나
너무 힘이 들지만, 나는 성당은 나의 집이며 나의 생명 같은 곳이기에
늘 최선을 다하여 일을 합니다.
이승만이 물러나자 미국 대사를 지내던 장면박사가 국무총리가 됩니다.
그분은 천주교 신자로써 미국의 민주주의를 보고 배운 분이시기에
한국에도 훌륭한 민주주의를 세우려고 노력하며,
또한 미국의 도움으로 경제개발 사업을 준비합니다.
그러나 북한 간첩들이 그를 그냥 두지 않습니다.
사회를 극도로 혼란스럽게 만들어
"어서 잘 살게 해달라!"고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도록 유도하여
국회의원들이 데모를 하고, 더 나아가 경찰들이 대모하는 사태까지
이르게 됩니다.
"좀 기다려 주시오 시간이 필요 합니다."라고 장면총리는 호소하였으나
그들은 더욱 우리나라를 쓰러뜨리기위해 계속 괴롭힙니다.
이때 박정희 장군이 이 어려운 한국 사회의 문제가 뭔지를 깨닫고
북한의 위협이 목전에 와 있음을 알고 군사 쿠테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고 사회를 혼란스럽게 만든 자들을 모조리 잡아들입니다.
소위 말하는 5.16 혁명입니다.
제3편 7장 끝
제3편 8장:나에게 한꺼번에 닥쳐온 불행 (1)
서운동 성당의 초대신부님은 미국 메리놀 신학교에서 갖 신부가 되신
유(Fred, Luhmann신부님이십니다.
그분은 남자도 반할만큼 아름답게 생겨서 여자들이 한번만 봐도
그만 사족을 쓰지 못할 만큼 이상한 매력을 가지신 분입니다.
성당 근처의 구멍가게 아주머니는
"아유 난 저 잘생긴 신부님만 보면 몸이 오그라들어요"
라고 까지 합니다.
유신부님은 정이 많으신 분이고 한국인을 무척 사랑하십니다.
그분이 한국인들을 체계적으로 돕고 싶어 사회학을 더 공부하기위해
미국으로 가셨고 후임으로 등치가 크고 후덕하게 생기신
길(James Gilligan) 신부님이 오셨습니다.
그는 차기 주교님 물망에 올랐다고 하지만 그의 하는 일을 보면
그건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데, 그는 전부터 데리고 다니는 식모가
하나 있는데 길 신부님은 다른 한국 사람들은 일체 믿지 못하고
오직 식모의 말만을 믿는다고 합니다.
식모는 신부님의 밥이나 해 주면 되지만 본당 일에까지 관여를 합니다.
남자 회징님이신 고안드레아 회장님,
북한에서 오신 임데레사 회장님 (그의 두 아들은 주교와 신부가 되다),
최로살리아회장님,
운전사,
그리고 내가,
모두 식모때문에 힘들어 합니다.
성탄이 돌아오면 내가 이미 크리스마스 츄리를 만들고
구유를 만드는 책임자인데 식모가 보고서
"볼품이 없어요 바닥에는 푸른 이끼를 깔아야 해요"라고 합니다.
곧 길신부님이 오셔서 앵무새같이 지껄입니다.
"볼품이 없어요 푸른 이끼를 깔아야 합니다."라고 하여
운전사를 시켜 그 엄동설한에 산에 가서 이끼를 걷어 옵니다.
신자들은 영육에 관한 어려움이 생기면 신부님을 찾아와서
상담을 하는데 이제까지 관례가 되어 있습니다.
어느날 한 부인이 와서 신부님을 면화를 하고 싶다고 하여,
내가 길신부님에게 알리자 길 신부님은 그 커다란 코를 부인의 얼굴에
바짝 드리밀며, 눈을 똥그랗게 뜨고 덤벼들듯이
"뭡니까? 뭡니까?"라고 꼭 두번씩 반복합니다.
부인이 너무 무서워 눈물을 흘리며 도망을 칩니다.
이런일이 가능한가?
상식적으로 있을 수도 없는 일입니다.
나는 참다못해 이런 사실들을 종이에 적어
청주교구 북문로의 파디주교님에게 보냈습니다.
그러자 주교님으로부터 담장이 왔는데
"그건 신부와 당신과의 관계일 뿐입니다."라는 것이 아닌가?
나는 기가막혀 다시 편지를 썼는데 다른 일들까지
아주 자세히 적었습니다.
그러자 길신부가 주교님에게 불려가서 호되게 야단을 맞았다고
그곳에서 일 하시는 분에게 들었습니다.
"주교님에게 편지 보냈어요?"
"예"
"왜 주교님에게 편지를 했습니까?"
라고 길신부가 나를 힐란합니다.
"신부님은 그동안 신자들에게 잘 했다고 생각하십니까?"
"내가 뭣을 잘못했습니까?"
나는 그 하나하나를 들어서 지적하였고
"한국에 오셨으면 한국인이 되어야지요"라고 하자
"난 미국인이요 한국인이 될 수 없어요"
"그렇지요 그러나 한국인을 이해하셔야지요"
"......................."
그러니 내가 길 신부로부터 사랑을 빋을리가 없습니다.
길 신부님은 새로운 사무장을 하나 뽑았는데 내가 하던일을
새 사무장이 하라고 합니다.
내가 나가달라고 은근히 압박을 하는 것입니다.
제3편 8장 끝
제3편 9장:상상도 못할 일들이 일어나다.
길 신부님은 주교물망에 올라서 그런지 자주 출장을 가시는데
그러면 다른 신부님이 잠깐 오셔서 미사를 드려 주십니다.
한번은 진천의 고신부님이 오셨는데 그분은 한국인들을 무척 사랑하시고
젊은이들과 이야기 하시기를 매우 좋아하십니다.
저녁에는 성당 뜨락에 나와 청년들과 노래도 부르고
이야기도 해 주시는데 고신부님은 미국에서 오실 때
The sound of music을 봤다고 하며 우리에게
주제곡 Do re mi 송 노래를 가르쳐 주십니다.
Do a deer afemail dear , Re a drup up golden sun ,
Mi a name.....
나는 집에 가서 기타를 가지고 와서 반주를 해 드리자 무척 좋아하십니다.
나는 신부님을 위하여 미국 국가를 연주해 드리자 깜짝 놀라시며
다시 한 번 더 연주해 달라고 하십니다.
그무렵에 우리나라 사람들은 Dm 와 A코드만 가지고 모든 유행가를
반주하는데 사람들은 잘 한다고 하지만 음악을 공부한 제가 보기에는
순 엉터리입니다.
그분이 가시고, 다음에는 현신부라고 키가 작은 미국신부님이 오셨는데
"임마누엘씨 당산에 올라가 교도소 사진 좀 찍어다 주세요"라고 하시는데
어떻게 당산을 다 알고, 그곳에 교도소가 있는줄 아는지, 이상한 생각이
들었습니다.그는 아마 미국 CIA요원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내가 당산에 올라가 밑을 내려다 보니 교도소 전체가 한 눈에 보입니다.
그러나 차마 나는 사진을 찍지 못하였는데 그것은 금방 발각이 되어
문제가 생길 것 같았습니다.
"신부님 사진을 못 찍었는데요"라고 하자
신부님은 "괜찮아요"라고 하십니다.
다음날 그가 수녀님 두분과 고안드레아 회장님과 공소를 다녀오십니다
공소란 시골의 천주교 신자들의 모임입니다.
현신부님은 운전 솜씨가 겁이 날 정도로 빠르게 몰며
더구나 길 가장자리로 차를 몰아 자칫 가로수에 부딛칠 수
있을 것 같아 나는 겁이 납니다.
더구나 1964년 무렵에는 도로가 모두 비포장도로 입니다.
포항 수녀원에서 갖 수녀가 되신 마리아 수녀가 신부님 옆자리에 앉아
피곤하여 문에 기대어 잠이듭니다.
수녀님이 잠결에 문이 열리는 키를 건드립니다.
문이 열리면서 수녀님이 밖으로 굴러 떨어지는 순간,
문이 가로수에 드리받아 문이 세차게 닫치면서 수녀님의 머리를 쳤습니다.
수녀님의 머리가 박살이 났고 그 자리에서 즉사하셨습니다.
서운동 성당이 발칵 되집어졌고 포항 복자수녀원도 뒤집어 졌습니다.
그리고 밤새 40여명의 수녀님들이 달려옵니다.
출장가신 길신부님도 달려 오십니다.
신자들이 밤새워 시신을 앞에두고 기도를 합니다.
다음날에는 수녀님의 장례 미사가 있는데 나는 이층에 올라가
Reguiem 라틴어 그레고리안 성가를 연주하면
아래층에서 수녀님들이 성가를 부르십니다.
나는 눈물이 앞을 가려 악보와 올갠이 보이지 않아도
나는 이미 이 곡을 150번 이상을 연주하였기에
악보 없이도 다 연주할 수 있습니다.
나는 미국 신부님으로부터 그레고리안 성가 연주법을 배웠고,
또 화음을 배웠기에 그레고리안 성가를 반주하는데 어려움은 없습니다.
미사가 끝나자 이번에는 신부님이 갑바를 어깨에 두르고
수녀님의 관앞에서 성수를 뿌리고 향을 피우며 `사도예절`을 하며
또 길고 어려운 그레고리안 성가를 부릅니다.
모든 행사가 다 끝나자 포항 수녀님들이
"누가 올갠 연주를 하였느냐?"며 찾으러 다닙니다.
"전데요?"라고 내가 말 하자
"어머나, 성가 반주를 너무 잘 하시어 도대체 누가 연주하나
궁금하였는데 우리는 그런 연주를 처음 들어봐요,
아주 훌륭하게 해 주시어 감사합니다."라고 하십니다.
그레고리안 반주법은 마치 바흐를 치는 듯이 해야합니다.
박정희가 군복을 벗고 민간인으로 대통령이 되었고
학교 교육방침도 많이 바뀌었는데, 대학에 들어가려면
먼저 국가 예비고사에 합격을 해야만 자기가 원하는 대학에 갈 수 있도록
방침을 바꾸어 버리는 바람에, 나는 음대진학을 포기해야만 했습니다.
제3편9장 끝
제3편 10장:길 신부님이 나를 도둑 누명을 씌우다.
1964년인가 5년인가할때 길 신부님은 여름 휴가를 가셨습니다.
그리고 토요일에 돌아오셨는데 나는 다른 곳에서
화단에 물을 주고 있을때 입니다.
그때는 땅이 거칠어 성당을 빙 둘러싼 화단에 매일 물을 주어야 하는데
울타리 옆에 뚜껑을 덮은 웅덩이가 있어서 밑으로 내려가 바께스로
물을 퍼 올려야 합니다.
내가 좀 똑독했더라면 신부님에게
"물을 퍼 올리는 모터와 호스로 연결해 주세요"라고 부탁을 드릴 수도
있었겠지만 나는 항상 누구에게 부탁하는 성격이 아니고
그냥 묵묵히 일만하는 어리석은 자입니다.
내가 하루에 물을 100바께쓰를 길러 올라와야 하는데
너무 힘이 들어 나중에는 축 늘어집니다.
"길 신부님이 오래"
사무장 강요셉이 신부님이 휴가에서 돌아오셨다고 합니다.
내가 신부님 방으로 들어가자 거기에는
청주 경찰서 형사 7명이 와 있었습니다.
"임마누엘, 여기 캐비넷 안의 돈 못봤어요?"라고 하시는게 아닌가?
"예? 돈이 없어졌어요? 저는 거기에 돈이 있는줄도 모르는데요?"
신부님이 형사에게 가서 뭐라고 하자 형사 하나가
"당신 집에 좀 가 봅시다"라고 합니다.
나는 형사 한 명을 데리고 성당 가까운 석교동 자취방으로 왔습니다.
방 하나 부엌이 하나 달린 작은 집입니다.
형사는 오자마자 아궁이 속을 들여다 봅니다.
그리고 방으로 들어와서 이불 속과 천정을 흔들어 보기도 하고
모두 조사를 하기에
"지금 저를 의심하는겁니까?"라고 하자 형사가 나를 노려보며
"신부님이 당신을 용의자로 지목했다면 당신이 법인이야 !"라고
하는게 아닌가?
"헉 말도 안돼 !"
그당시는 몰랐지만 미국은 민주주의가 고도로 발달된 나라이고
범죄의 증거가 없이는 사람을 함부로 의심하지 않는다고 알았습니다.
다음날은 주일입니다.
나는 10시 반 교중미사에서 이층에서 성가단 지휘를 합니다.
미시가 끝나고 내려오자 어제의 그 형사가
길신부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가 나를 보더니
"나 하고 경찰서로 갑시다"라고 하는게 아닌가?
길신부가 나를 경찰로 넘긴 것인데 말도 안되는 일입니다.
더구나 신부라는 자가 아무 증거도 없이 나를 경찰에 넘기다니 !
내가 다리불구자라서 수갑을 채우지 않고,
나를 앞장 세워 2km의 청주경찰서로 연행을 합니다
청주 경찰서 사무실인지 홀인지 무척 넓고 경찰들과 일반인들이 많습니다.
형사가 나를 의자에 앉으라고 하고는 나를 무섭게 노려보며
주먹으로 책상을 꽝 하고 내려치면서
"야 이 도둑놈의 새끼야 ! 나를 너무 힘들게 하지 말고 어서 불어 이쌔끼야 !"
라고 소리치는데 나는 너무 무서워 눈물이 쑥 빠졌습니다.
제3편 10장 끝
제3편 11장:마지막 종결장
그 후 나는 성당에 사표를 내고 10년이나 내집처럼 일 하던 성당을 떠나
무작정 서울로 올라옵니다.
나는 취직하려고 노력했으나, 키도작고, 다리를 절고, 말도 더듬고,
배운것도 없고 뭐 하나 좋아보이는 것도 없고, 아무 기술도 없어,
10년간 노숙자 생활을 합니다.
"내가 이러고도 살아야 할 가치가 있는가?"
나는 자살을 합니다.
그런데 서울 대교구의 김택구 신부님이 나를 살려 주셨습니다.
그리고 내가 피아노를 배운 것을 아시고 피아노를 가르치게 해주십니다.
내가 꼭 10년을 하고 1988년 1월 9일 50세의 노총각으로
강원도 깊은 오지마을 산골로 이사를 갑니다.
그곳에서 3년후 전혀 예상도 못한 한 처녀와 만나 성당에서 결혼을 합니다.
그리고 두 아들을 얻습니다.
어느날 한 통의 전화가 걸려옵니다.
그는 내가 청주를 떠나던 1965년의 서운동 성당의
이 아가다 원장 수녀님이셨습니다.
"그때 왜 저에게 말씀하시지 그랬어요?"
"이건 제 개인의 일인데 뭐하러 이야기 합니까?"라고 하자
수녀님은
"아녜요 이는 청주 서운동 모든 신자들의 일이에요,
신자들이 길 신부를 내 쫓았어요"
"헉 !"
"그리고 그때 돈을 훔쳐간 자가 사무장 강요셉이었어요"
라고 하시는게 아닌가?
그리고 수녀님이 그 험한 산골 오지에 있는 우리집을 다녀 가셨습니다.
이미 수십년이 지난후였습니다.
* * *
지난해 겨울 2018년 12월에
그러니까 지금부터 한달 전입니다.
서울시 광진구에는 `미국 메리놀 외방전교회 한국지부`가 있습니다.
지금 그곳의 원장 신부님이 제가 잘 아는
전에 청주 수동의 주임신부이셨던
함 제랄드 신부님이 그곳의 주임신부로 계십니다.
이름이 함제도 입니다.
내가 함신부님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길신부님으로부터 도둑 누명을 쓰고
아직 그 멍에를 벗지 못하고 있다고 하며
길신부가 지금 어디에 게시냐고 묻자
함신부님으로부터 답장이 왔습니다.
"길신부는 여러해 전에 죽었습니다.
제가 대신 사과 드립니다."라고 하십니다.
내 목에 씌워 준 멍에를 벗겨주어야 할 자가 바로 길신부님이신데
그냥 죽다니 !
하느님이 기뻐하실 것인가?
그가 비록 회개 하셨다고 하여 하느님이 기뻐하실 분이신가?
왜 나를 찾지 못했는가?
내 인생이 처참하게 일그러지고 목숨까지 끊었는대
하느님이 기뻐하실 것인가?
나는 그를 전부터 용서했지만 굴레는 아직도 목에 걸려 있습니다.
제3편 끝
(계속해서 제4편 1장이 연재되오니 많은 구독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2019년3월2일(토) 형광등등 씀
캐나다 몬트리올 累家에서
청송(靑松) 카페지기 베드로 문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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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수고하셨습니다
고마워요.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조건이 충족 되었으면 Upgrade 해 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고마워요.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조건이 충족 되었으면 Upgrade 해 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