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에 관한 시모음 71)
봄은 눈치가 없다 /임영준
엉겹결에
그녀를 피했다
별안간 속삭거려
당황스럽기만 했다
주눅 들어 움츠린 어깨를
빤히 바라보면서
헤실헤실 끼어드는 그녀는
정말 눈치가 없다
봄 작별 /未松 오보영
어느새 널 보내야할 시간
늘 환한 얼굴로 반겨주었는데
산뜻한 향기 내어 감싸주었는데..
이제는 널 가슴에 품어 안고
다시 만날 그때를
기다려야 하는가보다
고운 모습 내내
그리고 있어야 하는가보다
봄에게 /안숙자
찬바람 휘감고 도는
비탈길을 지나
그대 어디쯤 오시는지
두꺼운 외투 자락을 젖히며
성에 낀 가슴에 대고
호오, 입김을 불어 편지를 써요
실핏줄 같은 발가락
얼음장을 딛고
숨골 여린 머리로
어둠을 헤치며 봄볕에 서는 날
두 발을 감싸고
언 손을 녹이려
아지랑이 피어나도록
들판에 불을 놓아야겠어요
봄 /신미균
날씨가 풀리면서
들판이 시끄러워지는 것은
식물도 저마다 할 말이 있기 때문입니다
바위취는 바위취대로 소곤거리고
쥐오줌풀은 쥐오줌풀대로 중얼거리고
광대수염은 광대수염대로 버벅거리고
목소리의 크기도 다르고
색깔도 다릅니다만
땅속에선 듣는 이가 없어
못한 이야기들을
바깥에 나온 김에
원 없이 쏟아내고 있습니다
들어보면 별로 중요할 것도 없는
사소한 이야기들이지만
입 냄새 풍겨가며
열심히 떠들어대고 있습니다
봄, 봄 /박형권
두 젊음이 다리 끝에서 아지랑이를 피워올린다
연애질 하고 있다
눈빛 마주칠 때 참꽃 피고
손닿을 듯 할 때 개나리 벙글어지고
내일 들에서 쑥 캐는데
너 나올래
불쑥 오지 말고
늑대처럼 침 흘리며 빙글빙글 둘러서 다가올래, 할 때
목련꽃 흐드러지고
동네가 눈을 틔우는 마늘 싹 만해서
봄비 기다리는 마루 끝에 앉아서도
아닌 체 서로 끌어당기는 모양이
한눈에 들어온다
나의 좋은 시절도 복숭아꽃 피었고 복숭아 털 같은 최루탄 사이를 이리
저리 피해 다니며
잘 모르는 자유, 노래하다 지치고
전자석처럼
문득 나를 끌어당기는 여자가 있었다
이제는 예쁘게 노는 모습에 참으로 눈이 부시기 시작하는 나이
해줄 것은 없고 시계를 한 시간씩 되돌려놓으면 그것도 부질없다
봄은 노루꼬리보다 짧으니 힘껏 하는 만큼 해보라고 말해주고 싶고
속마음은 제비꽃처럼 부리가 뾰로통해지고
그때 그 나이인 저 아이들 믿고
봄을 맡겨도
괜찮을까 하며
겨울이 능구렁이 꼬랑지를 담부랑에 남긴다 누구나 한번쯤은
꽃봉오리로 팬티를 해 입고 싶은
봄이
쑥 캐는 년 궁둥짝만큼 염치없다
봄은 저 아이들 연애질하게 오는 것이니 행여 나비처럼도 밟지 마시라
봄, 봄 해봐도 젊음 속의 봄 만한 게 없다
봄 /안영희
1
꽃장수의 수레가
내 방 창 밑으로
화분을 가즈런히 부려 놓은 아침
햇살과 눈시울에 물들어 오는
철쭉 꽃빛
네가 보고 싶어
나는 돌아서서 열무김치를 담갔다
우우우, 일어서는 그리움의 새 순들 분질러
소금을 지르고
칼을 들어 풋고추 파 마늘 잘게 다졌다
톱밥처럼 썰어
속으로 삭이는 이 안간힘
꽃빛의 고춧가루 한 사발 퍼담아
이 봄날 나는 열무김치를 담갔다
2
열쇠 꾸러미를 풀고
그 중 큰 것을 골라
맨 처음 당신은
大地의 문에 꽂았다
강물 풀리고
마른 풀 숲 차고 오르는 할미새
그리고
우리들의 눈물에다
엷은 물감을
풀기 시작하는
당신.
봄 /이자규
오로지 닫을 수 없는 정적에 홀로 젖어서 볼 일
갑오징어의 수컷을 향해 발산하는 먹물 빛깔의 유혹이거나
곰쥐의 야행성을 피해 소라 껍질 밤을 지난
소라 새우의 아침이거나
속절없이 한 너울 이울지는 하늘
삼엄하게 엄습하는 발화를 흔들며 적요가 들고 난다
오로지 놓쳐버린 어제의 그늘에서 바라볼 일
뜨거운 이마로 아픈 아이의 할딱이는 목을 적셔주는 순간이거나
바라보기도 안쓰럽고 미안한 한낮
앙감질하던 햇빛이 사과나무의 텅 빈 가지마다
땀 흘리는 장렬한 투쟁, 손톱 불의 새빨간 저, 저,
꽃눈,
언 땅 밑 어두운 곳의 노동에서 가꾸어나간
슬기의 깃발
“아가 너 어디서 왔니”
봄, 그리고 로망스 /(宵火)고은영
어둠 사이로 은근히 울리는
그대 목소리엔
늘 익숙한 외로움이 묻어 있다
외로운 거니? 내가 묻는다
앞으로
어떤 여유를 가져야 하나
생각해요
그리고
그대가 지난 흔적에도
어제는 꽃 비가 내렸다
사실 이 봄에
꽃들의 웃음과 더불어
나는 씩씩하지만
그림자는 언제나 쓸쓸하더라
그러게 모든 건 찰나이다
꽃 비 사이로 그대의 발자국은
점점 트릿해져 가는데
띄엄띄엄 마지 못해 입을 열던
그대의 입술로 목련이 지고
벚꽃도 화르르 지고 있다
다시 피는 봄 /안경애
지금도
그 마음 그대로 남아
너무나 곱고
너무나 예쁘게
가슴 뛰던 착한 마음
바람이 건드리면
건드리는 대로
햇살이 건드려도
건드리는 대로
그렇게 살아
곱디고운 수를 놓듯
내 안에 스민 봄빛
수줍은 듯
까르르 웃던 멋진 설렘
두런두런 일어서고
다시 피는 봄처럼
후리지야 그 노오란 정렬
가슴 사이사이 스미어
사랑으로 사르리라
봄 /임보
막 개학한 3월의 여자대학 앞은 왁자합니다
조잘대는 말소리며 보도 불럭을 두드리는 구두소리며……
그러나 귀보다 더 혼란스런 것은 눈입니다
마치 경쟁이나 하듯 짧아진 스커트 아래로
눈부시게 뻗친 건각들의 움직임은 황홀합니다
대리석 조각처럼 늘씬한 다리들 틈에
더러 알통이 드러난 짧은 다리도 보이고
신전의 기둥처럼 볼륨 있는 다리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건 그것대로 괜찮습니다
준치나 청어가 노는 마당에 복쟁이가 끼면
매끈한 놈들을 더욱 돋보이게 하듯
변화가 있어 좋습니다
처녀들의 치마가 짧아지는 것을 탓할 일이 아닙니다
저렇게 예쁜 다리들을 옷 속에 감추어 두라고요?
천만의 만만의 말씀입니다
추한 것을 드러내 보인 것은 공덕이 아니지만
아름다움을 드러내 보인 것은 보시이지 않습니까?
봄 소묘 /임우성
오메오메에 가짠시러라
아직 손도 다 못 펼쳤시야 귀여운거어
산책길 함께 걷던 여우가
뒤처져 동동거리며 호들갑
돌아가 보니 무심히 지나쳐 온
돌담 밑 키 작은 단풍나무
참으로 찌잔스럽게 잎싹을 피우고 있네
빛깔만은 깜찍하게 뚜렷한 연두
꼬드라져 손가락도 펼치지 못한
여리고 어설픈 잎새
여우가 손끝으로 살살 건드려 보네
차아암 요것들 차암
추운 겨울 할딱 벗고
신치럼고 있는거 같드만
속내는 지할짓거리 다 하고 있었구마안
여우 귓볼에 따뜻한 봄 햇살이
솜털마냥 보드랍게 머물고 있네.
봄이오는 날 /신성호
남녘에 아지랑이 손짓하고
냇가에 수양버들 움트는 날
새 봄이 구름타고
지난 해의 기억을 찾아
입춘대길 건양다경 기원하며
한해의 축복으로 찾아오는 날
삼라만상 긴 잠에서 일어나
생명의 용틀림이 시작되는 날이어라
봄은 가슴으로 /권선환
껍질보다 마음이
먼저 달구어져 있는,
저마다
속으로 부풀러
용암처럼 끓어오르는
이월의 열정이여
닿지 않고
보는 것만으로도
나는 벌써
꽃이 되었네.
봄이 와요 /鞍山백원기
개울에 얼음 녹아
동장군 자리 뜨니
구름 타고 비 오시고
징검다리 건너서
파랗게 봄이 와요
이맘때면
어김없이 오는 봄
햇살 바라보는 나목들이
낯선 몸짓으로 화답할 때
태연히 웃으며 와요
머지않아
벼랑 끝에서도 꽃은 피고
어린 새 노랫소리 아름답겠죠
궁금해 신 신고 나서면
아직은 쌀쌀한 겨울바람
몇 밤 지나 잦아들면
오색찬란한 꽃의 향연
넘치게 베풀겠지요
봄 /이시영
오리들이 아주 연약한 연둣빛 풀밭 위를 조심조심 걷고 있다.
작년 겨울 폭설 속에 무자비하게 파묻혔던 바로 그 따스했던 족속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