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사상에서 가져온 대만의 카이 인 앤리슨 헤이가 국입순얏센대 교수님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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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과 기독교의 역할
서론
한국전쟁을 연구하는 미국의 역사가들은 지난 60년 동안 주로 한국전쟁의 정치적, 군사적, 외교적 측면에 초점을 맞추었고, 대개 종교적 측면은 간과해왔다. 필자의 연구는, 불교가 주류를 차지하던 한국이 어떻게 세계에서 가장 기독교화된 국가 중 하나로 변모했는지 살펴보고 한국전쟁 중 기독교의 중추적인 역할을 밝혀냈다. 전쟁은 물리적, 환경적 측면만이 아니라 전통적인 경제, 사회, 종교적 질서에도 영향을 미치며 광범위한 파괴를 일으켰다. 기독교의 영향, 특히 전쟁 중 반공 기독교 신학의 부상은 한국의 지도자들과 지지자들이 국가와 공산주의의 투쟁을 바라보는 시각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전쟁이 끝난 후인 1953년에 새로운 질서가 등장했다. 기독교 단체와 기관들은 강력한 지원 네트워크를 구축하여 전후 대한민국을 재편하는 데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 글에서는 기독교의 여섯 가지 중요한 측면을 논의하고 한국전쟁의 기원, 전개, 결과에서 기독교의 상대적 중요성을 분석한다. 특히 한국의 안과 밖에서 기독교의 역할, 특히 미국 선교사들과 그 후원자들의 영향을 포괄적으로 개관함으로써 한국전쟁 역사학이 가진 공백을 언급할 것이다. 전쟁은 한국에서 기독교의 영향력을 확대하는 독특한 환경을 조성하여 정치, 교육, 사회 서비스 및 공공 이데올로기에 스며들게 했다. 교회는 새롭고 현대적인 대한민국을 재건하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으며 사회 각 분야에 걸쳐 원조를 제공했다. 미국과 세계 교회의 재정 지원과 구호 물품은 신속한 재건에 크게 기여했으며, 한국교회를 활성화하여 전후 수십 년 동안 이루어진 급속한 성장의 발판을 마련하도록 했다.
한국 독립을 위한 투쟁에서 기독교의 역할
문화사학자 크리스티나 클라인(Christina Klein)은 개신교 선교 운동이 미국의 가치와 제도를 전파하고 다른 국가를 미국의 삶의 방식에 맞게 변화시키는 것을 목표로 미국 중심의 국제주의를 조장했다고 강조한다.1 이러한 접근 방식은 처음에는 개종과 관련이 있었고 나중에는 학교, 대학, 병원 건설로 확대되었다. 한국의 경우, 미국 개신교 선교사들은 19세기 후반에 이러한 노력을 시작했다. 1910년 한일합병 당시 한국의 개신교 선교사는 207명, 개신교 교회는 1,700개, 교인 수는 약 16만 명에 달했다. 또한 1,600개의 미션스쿨이 약 13만 명의 학생을 담당하고 있었다.2 이것은 미국의 가치와 제도가 개신교 선교사들의 활동을 통하여 동아시아에 어떻게 이식되었는지를 보여준다.
미션스쿨과 교회는 한국에서 서구의 이념과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인 새로운 민족주의 세대를 형성하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특히 훗날 1948년에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 된 이승만(1875-1965)은 이러한 기관들의 영향을 받았다. 한국 독립을 위한 계획을 설명한 그의 영향력 있는 저서 『독립정신』은 한국 민족주의자들 사이에서 널리 회람되었다. 이승만은 식민지 시대에 ‘기독교 민족주의자’ 그룹을 이끌었다. 이 운동의 다른 영향력 있는 인물로는 안창호, 김규식, 조만식, 길선주, 윤치호, 임영신(Louise Im), 김활란(Helen Kim) 등이 있다. 일부는 해방 전에 세상을 떠났지만 이승만, 김규식, 조만식은 해방 후 주요 정치 지도자로 부상했다. 교육을 강조하고, 미국과의 긴밀한 동맹을 추구하며, 효과적인 외교를 펼치고, 기독교적 가치를 수용한 이승만의 근대 한국에 대한 비전은 한국전쟁 발발 전 좌파와 우파 간의 정치적 역학 관계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일본의 식민지배와 씨름하던 한국에서는 다른 아시아 국가에 만연한 반서구 정서와 달리 민족주의가 독특한 방향으로 나아갔다. 미션스쿨과 교회는 한국 젊은이들에게 민족주의를 함양하는 안식처가 되었고 민족 해방을 주장하는 플랫폼 역할을 했다. 일본의 한국 침략이 심해지면서 한국인의 정체성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개인 및 민족 구원의 필요가 절실해졌다.
1919년 3월 독립선언서 서명자 33인 중 한 사람인 평양의 장로교 목사 길선주는 메시아적 민족주의가 담긴 설교를 전했다. 그는 교회와 개별 기독교인을 ‘특별한 집단’, 곧 고난에 처한 국가를 구출할 운명을 지닌 존재로 여겼다. 길선주는 한국 독립의 열쇠가 전 민족의 복음화에 있다고 주장하면서 기독교를 서구 종교에서 한민족과 한국의 것 그리고 한국의 신성한 소명으로 전환시켰다. 그의 설교는 식민지 시대 한국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조선신학’으로 불렸다.3 교회는 ‘민족 운동과 민족 구원을 위한 중심지’로 발전했고, 어려운 시기에 의미 있는 영향력을 끼치고자 하는 개인들을 끌어모았다.4
한국교회의 성장을 억압하려는 일제 식민 정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는 한반도 전역, 특히 정치 중심지인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북부 지방을 중심으로 꾸준히 확산되었다. 서북부 지역에만 1,000개의 장로교회가 있었고, 10만 명 이상의 기독교인이 있었다. 특히 평안남도, 평안북도, 황해남도 등 서북부 3개 도에는 한국 전체 기독교 인구의 약 4분의 1이 거주하고 있었다.
한국의 변화의 시작은 기독교 교육, ‘조선신학’의 부상, 기독교 네트워크의 구축으로 대변되는 식민지 시대 기독교의 성장에서 시작되었다. 1945년 해방 이후, 한국의 미래에 대한 다양한 비전이 등장했는데, 이 비전들은 식민지 경험의 복잡한 여파를 반영한 것이었다. 앨런 밀렛(Allan R. Millett)은 남한과 북한이 현대 한국에 대한 서로 다른 비전을 상징한다고 말했다.5 식민지 시대에 중추적인 역할을 했던 기독교는 해방 이후 그리고 한국전쟁 기간에도 자연스럽게 활발한 활동을 이어갔다. 이념적, 정치적 차이는 갈등을 형성했는데, 이는 곧 역사적, 종교적, 정치적 요인들 간에 복잡한 상호작용이 있었음을 드러낸다.
반공 세력으로서 기독교의 역할
한국전쟁과 냉전의 역사에서 기독교의 영향력은 오랫동안 간과되어 왔다. 2008년 윌리엄 인보든(William Inboden)은 미국의 냉전 이데올로기를 형성하는 데 기독교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강조했다. 인보든은 중국을 구원하려는 미국의 노력에 초점을 맞춘 반면, 필자의 연구는 한국에서 기독교의 반공 정서가 어떻게 번성했는지 강력한 사례를 제시함으로써 그 간극을 메운다.6 한국전쟁 전 북쪽으로부터의 기독교 난민 탈출은 남한 사회의 반공 정서와 우파 진영의 도덕적 입지를 강화시켰다. 수정주의자들은 이승만을 우파의 주요 악당으로 묘사하면서 전쟁 전 이승만의 높은 인기를 간과하고 그가 북쪽 피난민들의 충성을 이끌어낼 수 있었던 진짜 이유를 파헤치지 못했다.
게다가 이 난민들은 북쪽의 공산당 치하에서 행해진 기독교 박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기독교인과 선교사들 사이에서 반러시아 및 반공주의 정서를 부추겼다.7 1947년 좌파와 우파 사이의 권력 투쟁이 격화되면서 이러한 감정은 더욱 심화되었다. 선교사들과 한국교회 지도자들은 북쪽 난민들과 남쪽의 폭력 희생자들과의 교류에 영향을 받아 우익으로 지지를 옮겼다. 이들은 공산주의의 팽창에 저항하고자 하는 동기에서 한국의 구원을 아시아 전체의 상징으로 여기고서 반공과 친기독교적 성향을 강하게 띠는 이승만과 남한의 민주정부 수립을 지지하는 데 힘을 모았다. 기독교는 중요한 반공 이데올로기 세력으로 부상하여 1948년 이후 영혼을 위한 전투(battle for souls)에 참여하며 한국을 공산주의의 영향력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감리교 선교사인 윌리엄 쇼(William E. Shaw)는 이러한 정서를 반영한 인물로, 기독교 중심의 민주주의의 승리가 세계의 중요한 지역에서 미국과 민주주의 국가들의 전략적 동맹을 확보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8
1950년 4월 이승만 대통령은, 밥 피어스(Bob Pierce) 목사와의 면담에서 미국 선교사들의 훈련을 받은 한국교회 지도자들이 공산주의 폭력의 주요 표적이 될 위험이 임박했다는 우려를 표명했다. 이승만은 한국의 지속적인 자유를 위해 미군의 보호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두 달 후 존 포스터 덜레스(John Foster Dulles)가 방한했을 때 이승만 정부와 선교사 커뮤니티는 한국 안보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덜레스가 미국에 긍정적인 메시지를 전달하고 한국의 종교적, 정치적 자유를 위한 투쟁에 더 많은 지지를 보내주기를 바랐다.9
한국교회를 지키기 위한 비국가 행위자들(Non-state Actors)로서의 미국 선교사들의 역할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때, 한국에 있던 미국 민간인 1,500명 중 300명이 선교사와 그 부양가족이었다. 전쟁으로 인해 개성에 있던 미국 감리교 선교사 6명이 피랍되었고, 모든 외국인들은 체류할지 피난할지 결정해야 했다. 17명의 장로교 선교사들은 위험에도 불구하고 미국교회를 대표하고 부산 방어선 내에서 한국인을 돕기 위해 남아 있기로 결정했다. 미군과 협력한 이 ‘잔류’ 선교사들은 다른 곳으로 피난 갔다가 돌아온 선교사들 및 그 가족들과 함께 유엔군의 이동을 따라 인천에서 서울로, 서울에서 평양으로, 평양에서 흥남으로, 마지막으로 흥남에서 다시 부산으로 피난을 떠났다. 이 시기는 고난과 위험, 고통으로 점철된 시기였지만, 선교사들은 이 중요한 시기에 유엔의 전쟁 활동을 지원하고 한국교회를 지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첫째, 잔류 선교사 그룹은 다양한 역량으로 한국전쟁을 지원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특히 호러스 G. 언더우드(Horace G. Ⅱ Underwood 또는 Hedge Underwood)는 호러스 H. 언더우드(Horace H. Underwood)의 장남으로 해군 장교로 정식 입대하여 인천상륙작전에 참여하고 판문점 휴전 협상에서 통역관으로 활동하는 등 큰 공헌을 했다. 그의 동생인 존 언더우드(John T. Underwood)는 오산-청주-대전 지역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대전 지역에서 육군 정찰대를 지도했다. 선교사들은 필요한 경우 종종 통역을 요청받기도 했는데, 예를 들어 프란시스 킨슬러(Francis Kinsler)는 유엔 관리들과 함께 대구를 방문했고, 해리 힐(Harry Hill)은 미군의 북한군 포로 심문을 도왔다. 이들은 모두 전쟁의 참상을 목격했고, 서울 탈환 전투 중 전사한 그들의 ‘자식들’(kids) 중 한 명인 빌 쇼(Bill H. Shaw)를 비롯한 동료 미군들의 죽음을 슬퍼하며 전쟁의 참상을 증언했다.10
둘째, 기회가 생기자 잔류 선교사들은 유엔군과 함께 북쪽으로 이동하여 철의 장막 뒤의 삶[공산주의 체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편집자]에 대한 통찰력을 얻었다. 최초의 선교사 자녀인 하워드 모펫(Howard Moffett) 중위(의사)는 자신의 출생지인 평양시에 도착했다. 원래 62만 5,000명의 주민이 살던 평양시는 유엔군을 맞이할 때 절반만 남아 있었다. 이 중 85%가 기독교인이었다.11 또 다른 선교사 자녀인 리처드 언더우드(Richard Underwood) 중위, 해롤드 보켈(Harold Voelkel), 민간인 군목 윌리엄 쇼(William Shaw)도 나중에 유엔군과 함께 도착했다. 에드워드 아담스(Edward Adams), 힐(Hill), 아치볼드 캠벨(Archibald Campbell), 킨슬러(Kinsler) 등 다른 민간인 선교사들과 5명의 월남한 목회자들(윤하영 목사, 한경직 목사, 이인식 목사, 김양선 목사, 유호준 목사)도 평양에 도착했다. 생존한 목회자와 교회 장로들과의 만남에서 그들은 공산주의 치하에서의 삶에 대한 반복되는 이야기를 들었다.12 북한의 가톨릭교회는 모든 사제를 잃었고, 150여 명의 한국 개신교 목사들이 사라졌다. 의사, 교사, 숙련된 기술자들도 공산주의자들의 처형 대상이 되었으며, 유엔군은 들판, 지하실, 얕은 집단 무덤에서 시신을 발견하기도 했다. 북한 지도자들이 없어진 상황에 대한 보켈(Voelkel)의 보고서는 1950년 12월 9일 「프레즈비테리언 라이프」(Presbyterian Life)에 게재되었고, 이후 1951년 4월 2일에는 「타임」(Time)에 실렸다.
한편, 평양에서 미군은 통치할 자격을 갖춘 주민을 찾는 데 어려움을 겪었고, 모펫 중위와 보켈 군목은 유엔군 정부를 도와줄 반공주의자를 찾기 위해 기독교 공동체에 도움을 요청했다. 이에 대해 공산주의 지지자들은 선교사들과 접촉하고 유엔과 협력하는 사람들을 블랙리스트에 올려 기독교인들을 반역자로 낙인찍었다.13 중국의 참전으로 전세가 유엔에 불리하게 돌아서자, 선교사들은 북한에 있던 기독교 지도자들을 긴급히 대피시키는 데 도움을 주었다.
공산군이 남하하여 서울에 가까워지자 선교사들은 트럭, 기차, 배를 이용해 목회자와 가족, 기독교 공동체 전체가 부산으로 피난할 수 있도록 조율했다. 선교사들은 목회자들이 남쪽에서 계속 사역할 수 있도록 지원하기 위해 경상남도 도지사 양성봉이 지정한 난민센터를 설립하여 목회자 가족들에게 중요한 피난처를 제공했다. 기독교 성직자들을 피난시키기 위해 노력하면서 남한에서 토착 교회 지도력을 보존하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14 전쟁터에서 선교사들의 존재감은 영웅담을 만들어냈으며, 한국에 대한 인도주의적 구호를 열렬히 지지하도록 만들었다. 선교사들은 긍정적인 여론에 힘입어 「타임」 기자, 「라이프」(Life) 사진기자, 미국 방송사 작가들의 관심 대상이 되었으며, 이들은 보도를 위해 필요한 정보를 찾으려 했다. 「프레즈비테리언 라이프」의 편집자 로버트 캐디건(Robert J. Cadigan)을 비롯한 종교 기자들도 평양을 방문하여 북한 내 기독교 교회의 영향력에 대해 긍정적인 보도를 내보냈다. 한 연합 언론은 러시아 점령기 동안 공산주의 선전의 신뢰성에 가장 강력한 도전을 제기한 선교사들을 칭찬했다.15 윌리엄 유(William Yoo)는 미국인들이 한국을 전쟁으로 폐허가 된 가난한 나라로 인식한 데에는 기독교 선교사들과 군인들이 지대한 역할을 했다고 강조했다.16 이 시기 미국교회와 교인들의 반응은 향후 한국 기독교의 발전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기독교 구호 활동을 지원한 미국(및 서구) 교회의 역할
한국전쟁으로 인해 폐허가 되어 의식주가 광범위하게 부족하게 된 상황은 전례 없는 선교 확장 기회를 제공했다. 미국교회 지도자들은 신속하게 대응했고, 교파를 초월한 회의에서는 다음과 같은 합의가 도출되었다. “기독교적 관심은 한국에서의 기독교 구호를 위한 조직적인 노력으로 표현되어야 한다.” 장로교 선교위원회는 체류 중인 선교사들에게 “자금이 필요하다면 사용해라. 우리는 어떻게든 돈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약속했다.17 신문과 기독교 잡지에 선교사와 난민에 대한 보도가 자주 등장하면서 미국 종교 뉴스는 한국인의 고통을 두드러지게 다루었다. 밥 피어스(Bob Pierce) 목사가 제작한 두 편의 인상적인 기독교 다큐멘터리 영화 〈38선〉(The 38th Parallel, 1951)과 〈화염〉(The Flames, 1952)은 참혹한 현실, 특히 여성과 아동의 고통을 묘사하여 한국 구호 활동에 대한 열기를 널리 확산시켰다. 이러한 열정은 월드비전(World Vision) 설립에 기여했다.
각 교단은 현금과 의류 기부 캠페인을 시작했고, 12월에는 기독교세계봉사회(Church World Service)의 ‘한 시간의 위대한 나눔’을 통해 공동의 노력을 기울였다. 미국과 캐나다 전역의 교회와 기독교 단체들은 장로교, 감리교, 기독교세계봉사회, 구세군, 가톨릭 구호 서비스, 메리놀 시스터즈 등 다양한 구호 단체에 기금을 보내며 이에 호응했다. 1950년 11월부터 1951년 2월까지 기독교세계봉사회는 한국의 기독교 난민을 돕기 위해 22만 3,000파운드의 천과 9만 5,000파운드의 식량을 수송했다. 영국과 호주 교회들의 기부금도 부산에 도착했다.18 전쟁 상황이 급격히 악화되어 북쪽 피난민들이 남쪽으로 대거 유입되자 22개 교단 단체가 한국을 위한 특별 헌금을 요청했다.19
한국전쟁 기간 동안 구호 단체들은 구호 활동에 ‘한국’을 붙이면 대중의 반응이 매우 관대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미국교회의 지원을 받은 선교사들의 구호 활동은 한국의 기독교와 교회에 대한 인식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한국과 한국인을 바라보는 미국인들의 시각에도 영향을 미쳤다. 전쟁은 아시아에서 공산주의를 억제하려는 미국의 의지를 더욱 확고히 하고 한국에 대한 가부장적 시각을 강화했다.
궁극적으로 기독교 구호 프로그램은 주로 한국 기독교 공동체에 혜택을 주었다. 기독교 사회봉사를 강조하고, 한국과 미국 간의 유대를 강화하며, 서구 교회와의 연계를 촉진하는 이 프로그램은 미국의 기독교 모델을 바탕으로 새로운 한국을 건설하고자 했다.20 외국의 자금 지원은 전후 한국에서 기독교 성직자 양성과 기독교 기관의 확장을 촉진하여 한국이 중국과 일본을 대신하여 동아시아에서 미국 가부장주의의 주요 수혜국이 되는 전환을 가져왔다. 그 결과 기독교는 전후 한국에서 정치, 경제, 종교, 사회에 영향을 미치는 지배적인 세력으로 부상했다.
구호 및 전쟁 노력의 극대화를 위한 한국교회와 기독교 성직자의 역할
한국전쟁은 전통적 신앙을 약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가부장제에 기반한 전통적인 경제-사회적 규범을 붕괴시켰다. 사찰은 폐허가 되고 마을은 황폐해졌으며 많은 이들이 군대에 징집되는 등 사람들은 삶의 격변을 겪었다. 한국 정부의 취약성으로 인해 즉각적인 구호 활동이 어려웠고, 전통적인 가족 혈통 네트워크는 긴급 상황에서 효과적인 지원을 제공하지 못했다. 전통적인 신념 체계와 종교 네트워크는 갑작스러운 경제적, 사회적, 정신적 격변에 대처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1950년대 내내 이러한 지원의 공백 속에서 교회와 성직자들이 전쟁으로 폐허가 된 나라에 새로운 영감과 희망을 제공하기 위해 등장했다.
한국전쟁 당시 구호 활동을 조직한 선교사들은 실무에서는 한국 기독교인들에게 크게 의존했다. [구호품의 배포 등 실제 구호업무에 나선 것은 한국인들이었다는 의미-편집자] 1950년 7월, 기독교세계봉사회의 승인을 받은 에드워드 아담스(Edward Adams) 목사는 부산에서 최초의 기독교 구호 활동을 시작했다. 킨슬러 목사와 아담스 목사가 이끄는 한국 구호 활동가들은 한국군이 자신들의 차량을 탈취하는 것을 막기 위해 대구를 주요 구호 센터로 삼고 지역 교회를 배급소로 활용했다. 주로 식량과 같은 구호물자를 나누어주었는데, 비기독교인에게는 기독교 소책자를, 기독교인에게는 복음서나 신약성서를 함께 배포했다.21 선교사들은 지역 교회를 위해 물품을 남겨 지역 사회를 지원했으며, 교회 파괴와 리더십 상실에도 불구하고 전쟁 중에도 기독교의 지속적인 성장에 기여했다.
1950년 10월, 미국의 교회들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를 통해 한국에 기독교구호위원회를 설립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산하의 이 위원회는 요구 사항을 파악하고, 국제선교협의회(IMC)와 세계교회협의회(WCC)에 기금과 물자를 보고하며 기독교 구호 활동을 관리했다. 그러나 공산군이 서울을 재점령하면서 기독교 공동체는 혼란에 빠졌다. 교회 공동체를 인도할 책임은 남쪽으로 성공적으로 탈출한 사람들에게 맡겨졌다. 한경직 목사의 주도로 이들은 대전에서 ‘대한기독교구국회’를 결성했다.22 대한기독교구국회는 전쟁 지원 활동으로 명성을 얻었다. 회원들은 정보 수집과 피난민을 위한 즉각적인 구호를 위해 네트워크를 구축했다.
한국전쟁 당시 한국군의 낮은 사기는 심각한 문제로 여겨졌다. 선교사들과 교회 지도자들은 미국 모델을 본받아 한국군에 군종단을 창설할 것을 주장했다. 감리교 선교사였던 쇼 군목은 이승만 대통령과 이 아이디어를 논의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자금 문제와 국회의 반대 가능성 때문에 민간이 지원하는 기독교 군종단 창설을 제안했다. 선교사들과 한국 성직자들은 정교분리 원칙에 대한 미국 교단의 초기 회의적인 반응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의 계획을 지지했다. 가톨릭과 장로교 선교부의 지원으로 이 계획은 탄력을 받았다. 1951년 1월, 쇼 군목과 캐롤 신부는 대구에 군목학교를 설립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2월에 39명의 한국인 기독교 목사들이 ‘민간인 군목 자격’을 얻어 졸업했다. 4월에는 국회가 군종단을 승인하고 1968년까지 기독교적 성격을 유지하면서 정식 군종단을 위한 초기 자금을 지원했다. 선교사들은 한국인 군목의 가족에게 보조금을 지급하는 특별 프로젝트를 시작하여 더 많은 성직자들이 군종단에 합류하도록 독려했다.23
한국교회와 기독교계는 전쟁 중에 자기 지역을 떠나고 교회 건물이 훼손되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한국군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그들은 정부의 동원 노력을 지원하고, 군인들을 위로했으며, 기독교 군종단 설립을 지지하기도 했다.24 특히 이승만 대통령을 친기독교적 성향 때문에 지지하던 기독교계는 1952년 대통령 선거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기독교계는 3,500개 교회와 70만 명의 신도로 구성된 한국교회선거대책위원회를 결성하여 이승만의 재선을 위해 자원을 동원했다. 선거는 기독교와 반기독교의 종교적 싸움이라는 프레임으로 전개되었다.25 이승만은 부통령 후보 함태영을 지지했는데, 두 후보 모두 큰 승리를 거두었다.26
한마디로 서구 교회와 미국 선교사, 기독교 단체의 지원을 받아 한국전쟁 중 기독교 군종단이 창설된 것은 한국에서 기독교가 성장하는 데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 획기적인 사건은 군인들에게만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니라 지배층 내에서도 기독교가 강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냉전 기간에 형성된 기독교 공동체와 엘리트층 사이의 지속적인 파트너십은 전후 한국 기독교의 부흥에 기여했다.
전쟁 기간 중 복음 전도의 역할
혼란으로 점철된 전쟁은 대중 전도를 위한 적절한 기회를 제공했다. 피난민들이 대거 밀집한 난민촌과 포로수용소는 전도자들에게 두 가지 주요 플랫폼을 제공했다. 남한 피난민, 북쪽에서 새로 온 피난민, 전쟁 포로 등 다양한 청중이 모여들었다.
1950년 8월 부산 방어선을 따라 전투가 안정화되면서 장로교 선교부는 피난민 목회자들을 피난민 사역에 활용하기 시작했다. 선교부는 교파에 관계없이 기독교 성직자와 전도자 가족에게 식량과 쉼터를 제공하는 구호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이 전략은 전도자들의 자발적인 정신을 유지하는 동시에 전후 한국 전역에서 교회 출석률이 잠재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월급은 지급되지 않았지만, 생필품을 제공함으로써 여러 교파에 속한 상당수의 기독교 전도자들을 격려할 수 있었다. 선교사들은 피난민들에게 구호 서비스를 제공함으로써 피난민 사역을 펼쳤다. 선교사들은 난민 밀집 지역에 대형 텐트를 설치하여 임시 예배당, 구호소, 구호 시설로 사용했다. 하워드 모펫 박사는 군과의 인맥을 활용하여 각 선교스테이션에 필수 의약품을 공급했다. 종파를 초월한 이러한 노력은 난민 캠프의 환경을 개선했을 뿐만 아니라 난민들 간의 관계를 재건하여 사회적 격변 속에서 공동체 재건을 촉진했다. 이러한 복음주의적 사역은 살아남은 한국교회의 회복에 기여했다.27
북쪽에서 기독교인들이 대거 유입되면서 남쪽의 교회는 크게 성장했다. 1945년부터 1953년 사이에 약 7만 5,000명의 북한 개신교인이 남쪽으로 이주했으며, 이는 전체 북한 개신교 인구의 35-40%를 차지했다. 반공 정서가 강하고 열렬한 전도를 특징으로 하는 이 기독교인들은 서울 영락교회 건축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중국 공산당이 서울을 위협하는 동안 북부 피난민들이 남쪽으로 퍼져나갔고, 이들은 더욱 전도하여 남부 여러 도시에 새로운 영락 지교회와 다른 교회들을 설립하게 되었다. 부산이 과밀해지자 한국 정부는 북쪽 피난민들을 거제와 제주도로 이주시켜 새로운 복음 전파의 기회를 만들었다. 전통적으로 반기독교적인 제주에 180명의 목회자와 9,663명의 기독교인을 포함한 약 14만 8,000명의 난민이 도착하면서 변화가 촉발되었다. 반공 정서를 공유한 난민들은 교회와 학교를 새로 세웠고, 국제 기독교 단체들은 구호 물품을 제공했다. 제주도는 전쟁 후 눈에 띄게 친기독교적인 변화를 겪었고, 이는 다른 지역에서도 비슷한 변화가 일어날 수 있음을 시사한 것이다.28
전쟁 초기 두 달 동안 한국군이 포로들을 관리했지만, 유엔은 동래에서 약 1,000명의 포로들을 심문하고 그들에게 설교하기 위해 선교사들의 도움을 요청했다. 인천상륙작전 이후 포로 수는 1만 1,000명으로 늘어났고 1950년 12월에는 약 15만 명으로 급속히 증가했다. 포로들을 효과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대부분의 포로들은 거제도로 이송되었다. 미국 장로교 선교부의 선교사 윌리엄 커(William C. Kerr) 박사와 덱스터 루츠(Dexter Lutz) 박사가 미 극동사령부에 고용되어 유엔의 목표에 대한 이해와 인식을 높이고 포로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지원하며 선교사 군목들이 제공하는 종교 서비스를 포함하는 ‘민간인 정보 및 교육’ 프로그램을 이끌게 되었다.
1951년 3월부터 1952년 6월까지 보켈 군목은 전라도 지역의 선교사 존 탤미지(John E. Talmage), 브루스 커밍(Bruce A. Cumming)과 함께 거제에서 포로들을 위한 종교 활동을 조직했다. 각 수용소에는 교회 천막이 설치되어 개신교 신자들이 집사와 장로를 선출하고 기도회를 열고 개인 전도에 참여했다. 군목들은 자발적인 집회를 조직하여 수백 명, 때로는 수천 명의 포로들을 모았다. 처음에는 공산주의자로 오해를 받았던 임한상 목사는 민간인 포로로 재분류되어 성서, 찬송가, 전도지 등을 제공받아 사역을 시작했고, 포로들 사이에서 인기를 얻게 되었다. 보켈 군목과 임 목사는 여러 수용소에 성경강습소를 설립하고 매주 예배와 기도 모임을 열었다. 총 642명의 포로수용소 수감자가 석방 후 신학교에 관심을 표명했다. 성경강습소 졸업생들은 전후 남한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아 전쟁 중 사망한 사람들의 리더십 공백을 메웠다.
포로수용소에서 개종자가 급증하자 공산주의자들은 종교 활동을 위협으로 간주하고 군목의 설교를 금지하려고 했다. 공산주의 포로들은 특히 보켈의 예배에 참석하는 기독교인 포로들을 공격했다. 1952년 9월 17일 85호 수용소의 공산당 수감자들은 쿠데타를 일으켜 기독교인 6명을 포함한 비공산당 지도자들을 살해했다. 이 사건에서 85호 수용소와 다른 수용소의 기독교인들은 북한으로 돌아가는 것보다 죽는 것을 선호한다는 내용의 탄원서에 직접 서명했다. 이 혈서 탄원서는 평화 회담에서 강력한 선전 도구가 되었고, 기독교인들은 송환 반대 반공 시위를 주도했다.29 포로 송환 논쟁의 종교적 차원은 공산당 치하에서 박해나 죽음에 직면한 전향 포로들에 대한 유엔의 도덕적 의무를 고조시켰다. 해리 트루먼(Harry Truman) 대통령은 휴전을 위해 포로들을 송환해야 하는 윤리적 딜레마를 강조했다. 전쟁을 끝내고 싶었지만 9만 5,382명의 미송환 포로 상당수로 인해 드와이트 아이젠하워(Dwight Eisenhower) 대통령 아래 미국은 송환 불가 원칙을 고수할 수밖에 없었고, 간접적으로 분쟁이 1년 더 연장되었다.
결론
한국전쟁과 미국의 개입은 한국에서 기독교가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특별한 기회를 제공했다. 전쟁 전에도 기독교는 한국에 뿌리를 내렸지만 1950년의 위기는 기회의 순간이 되었다. 전쟁터에서 공산주의자들로부터 기독교인들을 구출한 미국 선교사들은 지역 주민과 군대 사이의 연결고리 역할을 하며 한국의 기독교를 지켜냈다. 선교사들의 노력은 국제적인 관심을 끌었고, 구호 및 종교 활동가들의 유입으로 이어져 전후 기독교가 빠르게 성장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 기독교 기관은 전쟁으로 파괴된 전통적인 기관을 대체하여 정치, 교육, 사회 서비스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기독교는 전후 대한민국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세력으로 부상했다.
주(註)
1 Christina Klein, Cold War Orientalism Asia in the Middlebrow Imagination, 1945-1961 (Berkeley, CA: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2003), 30.
2 Takayoshi Matsuo and S. Takiguchi, “The Japanese Protestants in Korea, Part One: The Missionary Activity of the Japan Congregational Church in Korea,” Modern Asian Studies 13 (1979): 419.
3 In Soo Kim, Protestants and the Formation of Modern Korean Nationalism, 1885-1920 (New York: Peter Lang, 1996), 123.
4 Kyong Bae Min, “On the Question of Understanding Korean Churches,” The Northeast Asia Journal of Theology 25-25 (1980): 126.
5 Allan R. Millett, The War for Korea, 1945-1950 A House Burning (Lawrence: University Press of Kansas, 2005), 5.
6 William Inboden, Religion and American Foreign Policy, 1945-1960: The Soul of Containment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8), 9.
7 Marie Borden Knox, “Dear Friends across the Pacific” letter, 7 March 1949, Presbyterian Church (U.S.A.), Department of History, Montreat, North Carolina.
8 William E. Shaw, Korea At the Crossroads (New York: The Methodist Church Editorial Department, 1950), 5.
9 Jongsuk Chay, Unequal Partners in Peace and War Republic of Korea and the United States, 1948-1953 (Westport, CT: Prager Publishers, 2002), 167-168.
10 Kai Yin Allison Haga, “An Overlooked Dimension of the Korean War: The Role of Christianity and American Missionaries in the Rise of Korean Nationalism, Anti-Colonialism, and Eventual Civil War, 1884-1953” (Ph.D. Diss., The College of William and Mary, 2007), 470.
11 Charles H. Briscoe, “The UN Occupation of P’yongyang,” Veritas 8, no.1 (2010): 64, 78(accessed 5 March 2023, https://arsof-history.org/articles/v6n1_pyongyang_page_1.html).
12 군목 Harold Voelkel의 편지, 1950년 10월 29일, 김흥수 엮음, 『WCC도서관 소장 한국교회사 자료집: 한국전쟁 편』(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03), 146-147.
13 Letter from Chaplain Harold Voelkel, 19 November 1950, Presbyterian Church Archives, Record Group 140, Box 18, Folder 15-Presbyterian Historical Society, Philadelphia.
14 Letter from James Philip to his Dad, 25 December 1950, Presbyterian Church Archives, Record Group 140, Box 18, Folder 15-Presbyterian Historical Society, Philadelphia.
15 The Church in Korea: All the News Is Not Bad,” Presbyterian Life, 11 November 1950, 15.
16 William Yoo, American Missionaries, Korean Protestants, and the Changing Shape of World Christianity, 1884-1965 (Oxon, UK: Routledge, 2017).
17 Harry A. Rhodes and Archibald Campbell eds., History of Korean Mission Presbyterian Church in the USA Vol.2 1935-1959 (New York: The United Presbyterian Church in the U.S.A., 1964), 45.
18 김흥수, “한국전쟁 시기 기독교 외원단체의 구호활동,” 「한국기독교와 역사」 23 (2005. 9): 105-108.
19 “US Church Mission Help Korean Homeless,” The Sunday Messenger, 11 February 1951.
20 Arnold B. Vaught, “Relief and Rehabilitation,” Report to Korea Planning Con-ference (October 13-14, 1953), World Council of Churches Library (CCIA Country Files: Asia-Korea 1953-1973), Geneva, Switzerland.
21 Letter from Edward Adams, 21 July 1950, Presbyterian Church Archives, Record Group 140, Box 18, Folder 14-Presbyterian Historical Society, Philadelphia.
22 Letter from Rev. Kyung chik Han, 12 August 1950, Presbyterian Church Archives, Record Group 140, Box 16, Folder 37-Presbyterian Historical Society, Philadelphia.
23 Letter from Rev. Ned Adams to Dr. John Smith, 24 April 1951, Presbyterian Church Archives, Record Group 193, Box 1, Folder 3-Presbyterian Historical Society, Philadelphia.
24 윤은석, “6·25 전쟁 당시 한국 민간 개신교회의 역할: 군대와 관련하여,” 「한국군사학논집」 제75권 제1호 (2019): 25-53.
25 Chung-Shin, Park, Protestantism and Politics in Korea (University of Washing-ton Press, 2003), 179.
26 Hakjoon Kim, “Yim, Lousie (Im Yong-sin 1899-1977),” in Encyclopedia of the Korean War A Political, Social, and Military History, ed. Spencer C. Tucker (New York: Checkmark Books, 2002), 541.
27 Letter from Edward Adams, 1 September 1950, Presbyterian Church Archives, Record Group 140, Box 16, Folder 37-Presbyterian Historical Society, Philadelphia.
28 Gwon, “Reframing Christianity on Cheju during the Korean War,” 94-97.
29 Harold Voelkel, Behind Barbed Wire in Korea (Grand Rapids, MI: Zondervan Publishing House, 1953), 11-13, 28-29.
카이 인 앨리슨 헤이가|홍콩대학교와 미국 윌리엄 앤 메리대학교(Ph.D.)에서 미국 역사학을 전공하였다. 저서로 『6·25전쟁과 미국 선교사』(북코리아, 2023)가 있다. 현재 대만의 국립순얏센대학교(國立中山大學校) 사회과학대학에서 동아시아에서의 국제관계를 가르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