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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이맘 때가 되면 이관술이라는 이름을 검색합니다. 올해도 언론은 아무런 관심이 없습니다. 저라도 학암 이관술 선생의 이름을 새겨봅니다.
이관술은 부잣집에서 태어나 일본 유학을 마치고 조선에 돌아와 교사가 됩니다. (동경 고등사범, 현재의 국립 쓰쿠바대) 학생들이 독립운동을 하다 퇴학당하자 학생들과 함께 합니다. (경성학생시위, 동덕여고 동맹휴학) 옥살이와 징역이 반복되는 고단한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땜장이가 되었다가, 고물상이 되었다, 넝마주이, 거지 행세도 하며 수배를 피해 전국을 돌아다닙니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는 신출귀몰한 도피생활이 당시 신문에도 보도됩니다.
악명 높은 노덕술에게 고문을 당했는데, 끝끝내 불지 않아 몸을 망치고 마는 투사였습니다. 폐가 망가져 각혈을 하면서도, 조직을 만들고 반전운동을 했습니다. 수배 당하고 풍찬노숙을 하며 몸은 더 망가집니다. 대전역에서 넝마주이를 하다 광복을 맞이합니다.
혁명가 답지않게 친화력과 낙천성으로 인해 신망이 높았나 봅니다. 광복 직후 중도성향 잡지 선구에서 민족 지도자 여론 조사를 했는데, 여운형, 이승만, 김구, 박헌영에 이어 그 이름이 꼽히기도 합니다. 농담 잘하고 인정 많은 성품이었습니다. 딱딱한 박헌영도 이관술과 함께 있을 때는 농담을 던집니다. 덕분에 이관술의 집이 남로당의 아지트가 되었습니다.
이때까지 공산당은 불법이 아니었습니다. 1946년 미군정의 여론조사에서는 77%가 공산당을 지지하는 걸로 나옵니다.
(問) 3) 귀하의 찬성하는 것은 어느 것입니까?
(가) 자본주의 1,189인(14%)
(나) 사회주의 6,037인(70%)
(다) 공산주의 574인(7%)
(라) 모릅니다 653인(8%)
/군정청 여론국 동아일보 1946.8.13
해방 8개월 뒤인 1946년 5월. 정판사 사건이 터집니다. 남로당이 일제가 남겨두고 간 조선은행권 징크판으로 위폐를 발행했다고 알려진 사건입니다. 미군정은 남로당에게 혐의를 돌립니다. 찍어낸 위폐도 44,000원에서 1,200만원으로 부풀립니다. 정말 남로당이 위폐를 찍어냈는가. 이건 한국 근대사의 대표적인 미스터리중 하나였습니다.
최근 연구되는 추세로 보면 미군정청의 조작극에 가깝습니다.
찍은 위폐가 증거일 텐데, 그 증거도 없습니다. 당시 제시된 증거는 찍은 돈이 아니라, 한국은행에 보관된 위폐 두 장입니다. 야인시대에서는 위폐를 찍는 현장을 발각하는 걸로 나오죠. 그런 일은 없습니다. 공소장은 임의로 변경됩니다. 검찰 공소장에는 첫 인쇄일이 10월 하순이라고 두루뭉실 표시되었지만, 알리바이가 입증되자 판사는 10월 중순이라고 임의로 공소장을 변경해 판결을 내립니다. 범행을 할 이유도 없습니다. 77%의 지지를 받고 있으니 박흥식 등 당대의 재벌이 공산당에 줄을 대려 했습니다.
1946년 7월, 이관술은 무기징역형을 선고 받습니다. 그렇게 4년이 지나 1950년 7월 3일. 오늘로부터 74년 전입니다. 이날 골령골에서는 대학살이 일어납니다. 형무소에 있던 좌익, 보도연맹원 2천 명 이상이 죽었습니다. 학암 이관술 선생은 첫번째 희생자가 되었습니다. 향년 48세였습니다.
이관술의 삶을 들여다보면 호치민이 떠오릅니다. 낙천적인 민족주의자로 험한 시기에 맹렬하게 투쟁을 했고, 시대적 환경에 따라 공산주의자가 되었습니다. 험하고 궂은 일은 도맡아 하며 주위의 존경을 받아 조직의 중추가 되었습니다. 그러니 호치민이 끝내 베트남을 공산화했듯, 이관술같이 인간적인 지도자가 있었으면 남한도 공산화가 되었을지도 모르죠.
그러나 그 영향력만으로 사람을 잡아 죽일 수는 없죠. 일제 강점기 중에서도 가장 험악했던 시기에 투쟁과 옥살이를 하고, 해방후 불과 8개월만에 다시 잡혀간 것입니다 공산주의 활동을 했다고 하나 일제 강점기 치하였고, 남로당이 합법 정당인 시기에 국한됩니다. 도피하려 했다면 얼마든 월북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까지도 위폐범이자 빨갱이로 몰려 명예회복이 되지 않으니 안타깝습니다. 학암 이관술 선생의 명복을 빕니다.
전문 출처로
https://dprime.kr/g2/bbs/board.php?bo_table=comm&wr_id=26953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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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럽게도 몰랐습니다.
소드님들과 공유하고 싶어서 퍼왔어요.
+) 그당시 공산주의는 불법이 아니였고 민족주의에 가까운 성격이였지 현재의 공산주의와는 다르다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기억할게요 이관술 선생님
정말 감사합니다. 기억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기억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ㅠㅠ
감사합니다. 잊지 않겠습니다.
좋은글 감사합니다 이관술선생님도 감사합니다
그놈의 반공때문에 잊혀져간 독립투사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르긔 학술적으로도 반쪽짜리 연구가 많을거긔 문학이나 역사나
222 이게 너무 안타깝긔 사이라도 나쁘지 않으면 통일 전 이런 분야만큼은 반드시 공동연구하자고 추진해볼텐데ㅜ
33 그러게요 안타까운 일이긔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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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기억하겠습니다.
이관술! 잊지 않을게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이관술 선생님 잊지 않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글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잘읽었습니다 감사해요. 잊지않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저는 처음 알게됐어요
감사합니다!! 잊지않을게요
잊지않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잊지 않을게요
가슴 아프네요 이런 식으로 알려지지 않은 분들이 얼마나 많을지.....감사합니다 이관술 선생님 기억하겠습니다
잊지 않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