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02. 17 수행 일지
오래된 영화인데 '집으로' 라는 영화를 봤다.
영화 속 외할머니가 잠시 맡겨진 손주를 한 없이 사랑으로 보듬으며 아이가 점점 속이 깊어지고 착한 모습이 드러나는 것을 보며,
모임 등록 초기 당시 상대가 어떻든 부처님으로 대하다 보면 부처님이 되어 갈 것입니다. 라 하신 말씀이 생각났다.
그 당시는 상대가 부처님과 정반대같은데 어떻게 부처님으로 대할 수가 있지? 그랬는데,
내가 부처님이 되지 못해서 상대방도 부처님으로 대할 수 없었구나 싶었다.
그런 큰 사랑이란 믿음이 영화 곳곳에서 보며,
나를 또 돌아보고 생각하며 눈물이 났다.
할머니에게 더럽다해도 함부로 하고 원망하고 말썽을 부리고 떼써도 미안해라는 뜻 가슴앞을 동글동글 3번 돌리며 하는 수화는, 너무 아름다웠다.
아픈 것을 찌들까 얼른 닦아내며 여전히 깨끗이 활짝 마음의 문을 여는 것과 수화는 너무 닮았다.
3번 깨달음의 숫자이자... 3은 무엇을 떠 받치기에 4보다 가장 이상적인 것으로 알고 있다.
꼭지점 피라미드 모두 3의 형태로 구성되어지고,
참, 빛기둥의 12개 중의 중심축이 3개 라 하셨고,
붙임
(빛기둥 이야기는 이번 올라온 글을 보고 의문이 생겨 질문드렸는데 선사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보고 깜빡 잊어버렸는데요.
집으로 영화에서 미안해란 뜻으로 3번 가슴앞에 나선형으로 돌리는 수화 이야기하다
3개가 중심축 빛기둥 말씀이 생각나 수행일지에 달아둡니다.^^()
내용은 이와 같습니다.
각기 저마다에 따라 보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하네요.
선사님 성기 통로 빛기둥은 총 12개 그중에 3개가 중심 축 같고
그 외에는 서로 어우러져 있다고 하셨고,
또 있는데요. 전체를 하나로 볼 수도 있다고 합니다.
보기에 따라서 보는 사람에 따라 달리 보일 수도 있다 하셨습니다.()
다시 이야기로 돌아와서
집으로 영화는 주인공 아이가 시골에 몇달간 외할머니와 머무는 동안 많이 바뀌고 성장하는 감동적인 이야기인데,
선사님을 만나서 많이 바뀌고 성장하는 내가 스쳤다. ㅜㅜ 죄송하고 감사합니다.
1. 걸림과 장애를 통해 수행하라.
최근에 어떤 불편함이 있었는데, 영청을 통해 대화를 시도해도 대답을 들을 수 없었다.
보이지 않는 쪽도,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있는 것과 비슷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를 들면 나는 어떤 사람과 미묘히 오해나 불편이 있는 것 같다. 나는 이유를 모르지만 이유를 막론하고 그것을 풀고 싶다. 잘 지내고 싶다. 그런 마음이 있을때,
물론 저절로 자연스럽게 서로간에 녹듯 풀릴 수도 있겠지만 일단 내 마음을 상대에 대하여 열어두어야 하고, 상대가 마음을 열지 않아도 나에 대한 마음을 열 때까지 기다리며 열어두어야 한다.
그런 과정에 대화를 시도할 기회가 되어야 풀 확률이 더 높아지고, 대화를 시도해도 서로 마음이 열려 오고가는 말이나 제스추어들이 부딪히지 않고 마음이 서로간에 서로 열려 있는 그대로 흐르듯 서로간에 들어 가면 원만히 풀려지게 소통이 일어나고 풀려지는 것과 같다.
보이지 않는 쪽도 그랬다.
내가 묻는 다고 대화를 시도한다고 바로 되는 게 아닐 때에는 어느 정도의 시간이 되어야 대답해 주는 경우도 있다.
이번 일은 내가 영청들을 삭제 시킨 것에 대하여 일어난 것이었다.
영청들이 점점 개인 소장용으로 바뀌어 간 요즘
어떤 영청처럼 소중히 간직하고
나중 귀하게 쓰여질 것이 있고, 나중 귀하게 쓰여질 지 아닐지 모르지만 소중히 보관하라는 게 있다.
또 가지고 있거라. 하는 것도 있고, 요근래에는 (거의 줄었지만) 올려도 무방하다는 게 있고, 시험 테스트나 어떤 이유로 일어났기에 지우거라 하는 것들이 많은데,
지우거라 들려 지웠지만 보이지 않는 쪽도 각처의 입장이 다름으로 일이 생기기도 하는 것이다.
보이나 보이지 않으나 고루 살펴 원만한지 보는 게 중요한 것 같다.
그리고 필요한 것인가? 이롭게 하기 위한 것인가? 바른 것인가? 이것을 살펴
적지 말고 흘려야 하는 것들은 보내거나 생각의식으로만 속으로 하고 흘러가야 할 것들이 있기에,
지금은 어쩜 향후 언제까지는 드러내는 결실보다는 내밀히 익어가야 하는 시기를 보내야 할지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그러기 위해서는 업을 내려놓고 녹이고 녹이며,
해야 할 바를 보다 더 깊숙히 나로 살펴가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시점에서 올라가야하는 만큼 이제는 내게 필요한 것은 현실적인 요건에서 어떻게 하면 집중을 하고 수행을 할 수 있는 시간적 환경적 걸림과 장애속에서도 효율적으로 흔들림없이 해나갈 수 있는가? 이것이 내가 지금 보고 풀어가야 할 것 같다.
하나의 걸림이 발생하면 이어진 걸림의 만파가 생기고
하나의 걸림을 풀어내면 이어진 풀림의 순풍이 흐르니
할 수 있는 한 원만한 것을 살펴 원만히 이루려 해야 하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제 금요모임 참석으로 좌선하기 시작하는데,
아이 학교 여자 친구에게서 문자가 왔다.
수요일 목요일 오후 늦게 같이 어린이 댄스를 다니는데,
"이모 00이 댄스 엄청 잘 춰요. ^^" 이랬다.
내가 이뻐하는 아이다. 이 아이도 나를 무척 따르지만,
발렌타인 데이에 그 친구에게 우리 애가 초콜릿 박스 선물까지 받아 왔길래 너무 고마워서 나도 무엇을 해 줄까 생각하던 참이었는데..^^
우리 애는 비만으로 가는 중이라 나름 살찌는 것 덜 먹이고 운동시키려고 이번 겨울방학 시작하며 그 친구 엄마와 이야기하고 둘이 같이 댄스수업을 넣었다.
우리애는 처음이고 유연성이 매우 부족하고 남자 아이인데도 나름 박자와 포인트 흐름을 따라 걸그룹 아이돌의 댄스를 꽤나 어울리게 소화하고 있었다.
그것을 보고 댄스는 음악이 흐르는 것에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feel 중요하고 배우며 습득하는 동작들에
그 느낌을 몸으로 함께 인식 표현하는 것이 되어지면 하나의 동작을 표현해도 꽤 느낌있게 따라가듯 표현되어지는 것 같다.
사실 댄스선생님께서도 키도 작고 많이 통통하신데 느낌이 꽤나 세련되게 잘 추신다.
그런 것을 보고 우리가 영청을 듣거나 수행을 하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어떤 생각을 일으킨다거나 영감을 받아 그것이 어떤 결과물로 이루어지기까지
어떤 말로 표현 못 할 보이지 않는 곳의 흐르는 것에
feel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흐르며 나의 동작이나 생각회로나 어떤 마음의 감정적 흐름에 자연히 흐르는 것에 각기 개인들의 개성에 의해 표현되어 지는 것 같다.
임0숙 선생님과는 모임때마다 곁에서 식사하기에 따로 덧글을 달지 않고 한 생각 메모장만 간략히 쓰고 어제도 임0숙 선생님과 조0순 선생님과 식사하며 함께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내가 임0숙 선생님 글에 인상 깊었던 남는 내용이
새벽에 흠뻑 빠져 몇시간을 선사님의 노래를 듣고 있었다. 라 하신 내용이 있었다.
이것은 노래의 에너지에 나를 내려 놓고 활짝 열리어
그 에너지의 흐름에 feel을 자연스럽게 받아 들이고
흐른다. 이것인 것이다.
나도 선사님 노래를 모임 등록시점에는 무서울 때 우리집과 나를 수호하시는 느낌에 ^^ 혼자 있을 때 틀며 무서움을 떨치곤 했었는데, 설레임, 환희같은 느낌, 이러한 느낌들이 쌓이고 쌓이며 다른 것들과 더해 공부에 빠지게 하고 공부를 즐겁게 하게 하는데, 믿음의 시작으로 이끌게 한 것 같다.
이것은 노래를 통한 선사님에 대해 마음이 열림이고, 위세계들의 에너지가 담기고 이어지는 것들에 그 역시 마음의 열림을 통해 몸의 열림으로 흘러들어 노래를 통해 빠져들고 젖어들고 그것이 나를 바뀌게 하고 그러는 것 같다.
이것은 나의 주관적 느낌과 체험적 생각이라 정답이 아닐 수 있지만 오늘의 생각으로 기록해둔다,
그래서 수행 초기에는 드문드문 노래도 잘 듣지 않았으니,
위세계 소통이 그만큼 잘 이루어지는데 그런 부분에서 부족하고 부족함은 믿음의 불균형과 부재를 잇고,
그 이후 보다 더 노래도 듣고 법문도 듣고, 글도 읽으며 점점 더 문이 열리듯 믿음도 흘러들어오고 열리고 커져온 것 같다.
나는 가장 걱정없이 조금 소리도 키우고 마음편히 들을 기회는 혼자 운전할 때 가장 몰입할 수 있는데,
집에서도 아무도 없을 때에 현실의 할 일을 우선하다보니 왔다갔다 조금은 건성으로 듣곤 하는데,
앞으로는 할일은 조금 다 내려두고 잠시라도 집에서도 편히 몰입해 듣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잠에 빠져버리기 전에...
그래서 이주 후에는 아이 방학이 끝나니 그때에 내 시간을 내어 보다 더 주변을 신경쓰지 않은 채 긴장을 다 이완시키고 들어 봐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전에는 영청이 어떠한 상황속에서도 저절로 들리고 상황이 또 대부분 쓸 수 있게끔 신기하게 막간의 시간을 만들어주시듯 그래서 내 현실적 요건속에서도 감사하게도 많은 이야기들을 전달할 수 있었으나,
최근에는 조금 쓰려면 남편이 휴대폰 내려놓고 무엇을 해달라한다거나, 아이가 도움을 요청한다거나, 휴대폰을 이제 막 들었는데 전화나 누군가에 의해 멈추게 되기도 하는데,
...
그래서 조금 들리다 현재의식 현실 생각의 움직임, 현실적 행위에 의해 조용히 사라지곤 한다.
분명히 나는 공부 이전과 공부 시작시기의 나를 두고 볼 때 이전보다 여러 업들을 해결해 가고 있고,
(이건 현실이 타고난 복과 받아야 할 장애와 걸림이란 양단적 측면에서 받아야 했을 삶의 장애와 걸림이 점점 더 완만해지고 양호해지는 것으로 증명 확신하고)
이전보다는 많은 것들에 새로운 생각, 시선으로 깨어나고 있고, 좋아하고 푹 빠져 살듯이 하던 것들에 여여해진 것들이 많다.
그럼에도 그래서 적어도 나를 두고 보았을 때에는 예전은 저절로 상황이 이루어져 무념인 상태에 먼저 흘러들어오고 소통되었었다면
최근으로 흐르면서는 선사님께서 그간 많이 오르시는 세계들과의 특성인지 내가 그러한 단계가 되거나 혹은 어떤 다른 이유가 있는지
소통에 있어서 자연히 이루어지는 것도 있겠지만 사실 혼자 있을 때도 현실적 일들을 처리하느라 따로 의식을 안하니,
예전엔 저절로 이루어졌다면, 지금은 보다 더 적극적으로 내가 소통에 다가서고 생각 의식을 일으켜야 하는 게 느껴지고, 소통에 보다 더 적극적이어야 하는 게 느껴진다.
이것도 나에게 이쯤에서 더 기준과 관문이 높아진 믿음의 정도와 믿음으로 행하는 행을 더 해야하는 시점이라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믿음이 빛의 시작점이요. 가는 길의 과정이요. 완성의 완성점이니, 믿음은 활짝 열리어 받아들이는 것에 있고, 빛길을 열고 가는 힘이요. 가장 중요한 행을 일으키고 실천하게 하는 믿음의 뜻과 의지를 보다 더 행해야 하는 게 맞는 시기이라 그런가 조심스럽게 생각해보지만, 잘 모르겠지만 이유야 어떻든 내가 보다 더 적극적 실천을 통해 공부하되 바깥보다 안을 깊숙히 들어와 살펴야 하는 시기의 시작인것 같다.
금요모임 저녁 식사 때 내 수행일지는 내가 쓰면서도 나도 모르게 일기가 되어 간다고 말씀드렸다.
임0숙 선생님과 조0순 선생님께서 일지에 대해 격려해주셔 감사했다. 감사합니다.
또 여러 도움과 따뜻한 마음 주시는 모두 감사합니다.
선사님 덕분에 내가 이렇게 바뀌어 기적들 모두 감사합니다.
오늘의 몸의 상태,
어제 금요에너지받고 일어나니 등쪽이 많이 아팠다.
종종 온 몸 안쪽이 흔들리는 느낌.
잠에 취해 외출 후 오후 낮잠.
어제는 좌선시간 뿐아니라, 법문을 들으면서도 집에 오면서도 머리가 저절로 움직이고 흔들리는 경험.
수신과 몸청소는 같이 하기는 주의!
왜냐면 방향이 서로 다르기에 엇갈릴 수 있으니 아예 각기 따로 하기.
이틀간 운동을 안 해서 내일은 조금이라도 걷기하기.
선사님 글 다시 읽어봅니다.
통하고 싶다면 마음의 문을 열어놓아야 한다.
(위 세계도 마찬가지로 )
통하고 싶은 사람이 먼저, 그리고 그 다음에 통하고 싶은 상대방이 마음의 문을 열어놓기를 바래며 기다려야 한다.
자기 자신도 마음의 문이 상대방에게 열려 있고 상대방도 자기 자신에게 마음의 문이 열려 있다면 서로 간에 통하게 된다.
(서로 간에 마음의 문이 열려 있으면 소통이 이루어진다. 에너지가 저절로 소통이 이루어진다.)
통하고 싶다면서 마음의 문을 스스로 열어놓지 않는다면 어떻게 통하고자 하는 것과 통할 수 있겠는가? 통하고 싶은 것이 이미 문이 열려 있다면 이쪽에서만 마음의 문을 열면 통할 수 있다. 문제는 통하고 싶을 때 상대방과 상관없이 자기 자신이 먼저 마음의 문이 열려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과제다.
서로 간에 원만하게 통하고 싶으냐.
그러면 먼저 마음의 문을 열고 자기 자신에게 흘러들어 오는 것들을 받아들이며 이해하고 배려하라.
그러면 더불어 하나가 되어 원만하게 통하게 된다.
마음의 문을 열면 통하게 되어 있다. 닫혀 있어서는 통할 수 없다.
이와 같이 누군가와 통하기 위해서는 통하고자 하는 누군가에게 마음의 문이 열려 있어야 통할 수 있다.
열린 마음의 문으로 서로 간에 흘러들어 오고 가는 모든 것들을 서로 간에 받아들이며 이해하고 배려할 때 더불어 하나가 된다.
(보이나 보이지 않으나 소통하고 싶으면 이것을 믿으면 될 것 같다.)
통하고 싶으냐 그러면 마음을 열어라. / 칠통 조규일
마음의 문이 열려 있는 만큼 통(通)한다.
통하고 싶으냐 그러면 마음을 열어라.
세상과 통하고 싶은 만큼
세상을 향해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한다.
그러면 마음의 문을 연 만큼 세상과 통할 것이다.
깨닫고 싶다고 말을 하면서 마음의 문을 열지 않는다면 이는 깨달음을 말로만 깨달으려고 할 뿐, 실천적 행을 통하여 깨달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깨달음은 우주 일체와 하나가 되는 것이다. 우주 일체와 하나가 되려고 하면서 스스로 막혀 있다면 어떻게 통할 수 있으랴. 우주 일체와 하나가 되려면 그 어느 것이든 통하지 않는 것 없이 모두 다 통하여 있어야 한다.
나 이외의 모든 것들은 막힘 없이 통하여 있다. 내가 있음으로 나로 인하여 통하여 있지 못하는 것이다. 내가 나를 버리고 나라고 하는 내 안에서 밖으로 확 트여 나라고 하는 경계가 무너지고 안팎 없이 통할 때 깨달음이 온다. 여기서 통한다 할 때 통하는 것은 무엇이 통하겠는가? 마음이다. 마음이 무엇으로 통하는가? 허공으로 통하는 것이며 공의 성품으로 같아지는 것이다.
깨달음은 통함에 있는 것이다. 깨달음은 막힘에 있는 것이 아니라 통함에 있다. 통하지 않고 깨달을 수가 없다.
통함이란 이쪽과 저쪽이 서로 열려 있음이다. 열려 있음이란 걸림이 없고 장애가 없이 서로 간에 자유롭게 왕래하며 소통할 수 있음이다. 닫혀 있음이란 걸림이든 장애든 막힘이 있어 서로 간에 자유롭게 왕래할 수 없음이다. 서로 간에 자유롭게 왕래할 수 없음이란 이쪽과 저쪽이 서로 통하지 못함이고, 서로 간에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음이란 이쪽과 저쪽 서로 간에 통하여 있음이다.
그 몸 안팎으로 하나로 통하게 하고 있는 문이 몇 개 있는가? 살펴 보라. 그 문은 육체란 몸 속에서 그대 몸 안팎으로 통하게 하기 위한 문이다. 그 문 중 어느 하나라도 막히면 불편하고 막히는 것이 많은 만큼 몸 속에서 살기가 어렵고 전부다 막히면 몸 속에서 살 수가 없다. 이와 같이 막힘은 죽음이고 통함은 살아 있음이다. 막힘은 억압이고 분리며 떨어짐이지만 통함은 자유고 합쳐지는 것이며 하나가 되는 것이다.
어떤 사람과 통하고 싶다면 통하고 싶은 그 사람에게 마음의 문을 열어놓아야 통할 수 있다. 마음의 문도 열어놓지 않고서 통하려 한다면 즉 막힌 상태로 어떻게 통할 수 있으랴. 통하고 싶다면 마음의 문을 열어놓아야 한다. 통하고 싶은 사람이 먼저, 그리고 그 다음에 통하고 싶은 상대방이 마음의 문을 열어놓기를 바래며 기다려야 한다. 자기 자신도 마음의 문이 상대방에게 열려 있고 상대방도 자기 자신에게 마음의 문이 열려 있다면 서로 간에 통하게 된다.
통하고 싶다면서 마음의 문을 스스로 열어놓지 않는다면 어떻게 통하고자 하는 것과 통할 수 있겠는가? 통하고 싶은 것이 이미 문이 열려 있다면 이쪽에서만 마음의 문을 열면 통할 수 있다. 문제는 통하고 싶을 때 상대방과 상관없이 자기 자신이 먼저 마음의 문이 열려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과제다.
서로 간에 원만하게 통하고 싶으냐. 그러면 먼저 마음의 문을 열고 자기 자신에게 흘러들어 오는 것들을 받아드리며 이해하고 배려하라. 그러면 더불어 하나가 되어 원만하게 통하게 된다. 마음의 문을 열면 통하게 되어 있다. 닫혀 있어서는 통할 수 없다.
이와 같이 누군가와 통하기 위해서는 통하고자 하는 누군가에게 마음의 문이 열려 있어야 통할 수 있다. 열린 마음의 문으로 서로 간에 흘러들어 오고 가는 모든 것들을 서로 간에 받아드리며 이해하고 배려할 때 더불어 하나가 된다. 이와 같이 세상과 통하기 위해서는 세상을 향해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한다. 그래야 세상과 하나가 될 수 있다. 우주 일체와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우주 일체를 향해 마음의 문이 열려 있어야 하고 우주 일체와 통해야 한다. 우주 일체와 통하지 않고서는 우주 일체와 하나가 되지 못한다.
깨달음은 우주 일체와 하나가 되는 것이다. 수행을 통하여 우주 일체와 하나가 되기 위해서 수행하면서 어느 부분이든 닫혀 있는 부분이 있거나 막혀 있는 부분이 있다면 그것으로 인하여 통할 수 없다. 통하기 위해서 걸림과 장애를 제거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수행이다.
우주 있는 그대로 통하여 있고 깨달아 있다. 다만 수행하는 자기 자신이 막혀 있고 통하지 못할 뿐이다. 통하기만 하면 깨닫는 것이다. 통하기 위해서 수행하면서 마음의 문을 닫고 통하려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깨달음을 증득할 수 있겠는가?
통함은 받아드림이다. 이유도 없고 조건도 없고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드리는 것이다. 허공이 이러하다. 허공을 보라. 허공을 그 무엇을 갔다 놓는다고 뭐라 하고 그 무엇을 부순다 해도 뭐라고 하는가? 허공은 있는 그대로 받아드린다. 그리고 있는 그대로 포용하고 보듬으며 감싸안는다. 통함의 마음이 허공의 마음이고 허공의 마음이 통함의 마음이다.
통함의 마음에는 사랑이 가득하고 자비가 가득하다. 마치 허공과 같이 허공이 그러하듯 허공이란 것의 마음이 그러하다. 사랑이 가득하고 자비가 가득하다.
보살의 마음은 허공의 마음이고 허공의 마음은 부처님 마음이다. 부처님 마음이 내 마음이고 내 마음이 보살의 마음이며 허공의 마음이며 허공이 곧 마음이다. 걸리고 막히고 장애를 갖고 있으면 내 마음이고 네 마음이 있는 것이다. 걸리고 막히고 장애가 없는 마음은 허공의 마음이고 허공의 마음이 보살의 마음이고 부처님 마음이다.
깨닫고자 한다면 무엇보다 먼저 마음의 문을 열어라. 마음 공부가 별거 아니다. 마음의 문을 열어놓는 것이 마음 공부다. 깨달음 별거 아니다. 막힘 없이 통하여 있음이다. 통하기 위해서는 마음이 열려야 한다.
우주 일체와 하나가 되고자 한다면 우주 일체와 하나가 되도록 걸림 없이 통하라. 우주 일체와 하나가 되지 못하고 우주 일체와 통하여 있지 않다면 우주 일체와 통하도록 걸림과 막힘의 장애를 하나하나 제거하고 우주 일체와 하나하나 통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통할 수 없다.
우주 일체와 통하고 싶으면 걸림 없이 우주 일체와 다 통해야 한다. 막힘 없이 통하여 있어야 한다. 이웃과 주변과 세상과 우주와... 그래야 우주 일체와 통할 수 있다.
나라고 하는 상(相)이 사라지고 공(空:허공)이 되어 사방 팔방 시방으로 통했을 때 깨달음을 증득하는 것이다. 깨달으면 통하느냐 통하면 깨닫느냐 묻는다면 무엇이 먼저랄 것 없이 깨달으면 통하고 통하면 깨닫는다 하리다. 어느 하나 걸림이 있다면 걸림이 있는 장애로부터 통할 수 없다.
깨닫고 싶으냐 그러면 통하라. 통하고 싶으냐 그러면 마음의 문을 열어라. 그리고 어느 것 하나 장애나 걸림을 갖지 말고 사방 팔방 시방으로 확 통해야 한다.
2010. 01. 08 14:34
향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