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개리 25개의 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3.1. 양동리(良洞里)[편집]
주촌면에서 가장 서쪽에 위치한다.
양동(良洞), 신전(新田), 가곡(歌谷)마을로 구성되며, 502전경부대가 위치한 냉정마을도 양동리에 속했는데 몇년전 행정구역개편으로 장유면으로 편입되었다.
양동리에는 양동산성, 양동리 고분군을 비롯한 역사, 문화 유산들이 많으며 특히 양동리 고분출토 유물들은 고대 김해지역에 자리 잡았던 가야사회의 "국가적 성격"을 짐작할 수 있게 해주며, 대성동 고분군 출토 유물들과 함께 가야의 역사와 문화를 복원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2004년 7월 23일부로 양동리 고분군은 국가사적 제454호로 승격 지정되었다.
양동리는 원래 사양곡 또는 노래실이라고 하여 가곡리였는데 조선 후기 철종 때 양동(어진마을)으로 고쳤다고 한다.
3.2. 농소리(農所里)[편집]
주촌면에서 가장 남쪽에 위치한다.
옛날 농사짓는 농소가 있었다고 농소리이며 농소란 옛날 세력가들의 농장이다.
내삼천 하류와 조만강 사이에 형성된 삼각주와 남향의 아늑한 구릉지에 이루어진 마을로써 농소(農所), 사덕(砂德) 2개 마을이 있다.
사덕은 내삼천 하류의 모래등 위에 새로 생긴 마을이며 주촌의 끝마을이다. 농소마을 뒷편 야산 조만강가 쪽엔 임진왜란 때 왜군들이 쌓았다는 농소 왜성의 흔적이 있다. 이 지역은 고대로부터 수로교통, 전략의 요충지이기 때문에 가락국 시대 때부터 성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일대의 패총들과 주변지역에 분포하는 여러 유적들이 그것을 말해준다. 농소리는 땅이 기름지고 들이 평탄하여 농사짓기에 아주 적합한 지역이다. 1982~1984에는 기계화 영농부문에 모범마을로 총리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남해고속도로 서김해 나들목과 인접하고 있다.
3.3. 원지리(元支里)[편집]
대리(大里), 석칠(石七), 국계(菊溪), 내연(內蓮) 4개의 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대리는 옛날에 부자들이 많이 사는 큰동네였다고 하며 북쪽에 대리골(언각골), 동쪽에 고래새 저수지가 있다. 그 옆 야산에는 가락국 시대 고분이 밀집한 원지리(대리) 고분군이 있다. 석칠은 마을 앞들에 7개의 큰 돌(고인돌)이 있다 하여 생긴 이름이고 국계는 시냇가에 들국화가 많다 하여 생긴 이름이며 이세사효각이 있다. 내연은 안연말, 즉 천곡리 연지(연말)마을 안쪽에 있다고 해서 내연이다.
난개발로 유명한 김해시답게, 논과 밭, 공장, 주택이 한데 어우러진(...) 모습을 볼 수 있다. 바로 옆에 신도시가 개발 중이기에 이 일대는 향후 정비되지 않을까 하는 추측이 나온다.
3.4. 덕암리(德岩里)[편집]
덕암리는 선지리와 원지리 북서쪽에 위치한 덕암(德岩), 용곡(龍谷), 옥천(玉泉) 3개 마을과옥천마을에 속하는 점골을 말하며 최근 덕암산업단지가 조성되면서 많은 기업체가 들어서 있다.
덕암이라는 이름은 임진왜란 때 흥해 최씨 형제가 피난와 살면서 후진을 가르쳤다고 하며 뒷산의 바위를 형제바위(덕바위), 동네를 덕암촌으로 부른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용곡마을은 두 청룡봉 사이에 있는 마을이라서 용곡이다. 절골이라 불리는 마을 뒷산에 덕운사가 있다. 옥천은 마을 뒷산 계곡 이름이 옥계인데, 옥계 맑은 물이 흐른다고 옥수골, 즉 옥천이다.
3.5. 천곡리(泉谷里)[편집]
지리적으로 주촌면의 중간지점에 위치하며 천곡(泉谷), 연지(蓮旨), 용덕(龍德) 3개마을로 이루어져 있으며, 현재 주촌면의 행정 중심 마을이다.(면사무소, 파출소, 우체국, 농협 등 소재)
천곡은 뒤산에 샘이 많다고 해서 새미실 즉 천곡이다. 천연기념물 제307호로 지정된 이팝나무와 가락국 시대에 쌓은 것으로 알려진 천곡산성이 있다. 연지마을은 청동기 시대의 무덤인 대형 고인돌이 남아있는 것으로 봐서 가락국 시대 이전부터 생겨난 아주 오래된 마을임을 알 수 있다. 마을 뒷골짜기를 불당골이라고 한다. 용덕은 용산과 덕교마을을 합하여 생겨난 이름인데, 선지쪽에서 보면 산세가 용을 닮았으며, 덕교는 마을앞 길이 조선시대의 국도인 자연도였는데 흥동쪽과 주촌을 연결하는 돌다리의 이름이 덕교(德橋)였다. 덕교가 덕다리 - 떳다리로 변하여 재미있는 전설까지 생겨난 듯 하다. 지금도 덕교 자리엔 돌다리 기둥과 난간들이 물속에 잠겨있다.
3.6. 내삼리(內三里)[편집]
내삼리는 내삼(內三), 원당(院塘) 2개 마을과 원당에 속하는 자현을 말하며, 옛 주촌초등학교가 위치한다.
내삼 마을은 옛날에 삼내(三川)라고 했으며, 내삼과 덕암 그리고 진례면의 경계에 있는 우리지역에서 가장 높은 봉인 황새봉에서부터 지역의 중간 지점에 위치한주지봉(주주봉)자락까지면적도 가장 넓고인구도 가장 많다.
가락국 시대에 임금님께 진상하던 쌀을 생산하던 현곡전이 있었으며, 조선조 인조반정의 주역 김자점에 관한 설화가 있는 내삼연못이 학교 앞에 있다. 인조실록에 "김자점의 손자 세룡(인조임금의 부마)과 인조의 외딸인 효명옹주(김자점의 손부)의 전장(농장, 별장)이 김해부에 있었는데, 주민들에게 민폐를 많이 끼쳐 원성이 자자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내삼마을 안쪽 황새봉 자락 깊은 골엔 아름다운 폭포가 있는데 높이 30m가량의 2단 폭포이며 숲이 울창해 항상 수량이 일정하다. 김해읍지에 능동폭포, 삼계폭포, 내삼(三川)폭포가 함께 기록되어 있다.
3.7. 선지리(仙池里)[편집]
김해시에서 넘어오는 주촌의 관문으로 선지못을 중심으로 동선(東仙),서선(西仙),내선(內仙) 3개마을로 이루어지며 주동초등학교, 선지사등이 소재한다.
수백년 전까지는 번성한 포구였다고 한다. "주동초등학교"의 "주동"은 주지봉(주주봉)동쪽이라는 뜻이며, 100여년 전 구한말의 선지, 원지, 덕암, 천곡 4개리의 행정명칭이 "주동면"이었다. 그래서 "주동초등학교"라고 한다. 선지사 출토 명문기와편에 새겨진 "仙地寺"란 글을 볼 때 선지란 지명은 천년 이상된 아주 오래된 지명임을 알 수 있다.
3.8. 망덕리(望德里)[편집]
망덕리는 내삼리 원당마을 자현과, 장유면 유하리 후포마을, 농소리와 경계하고 있으며 처음엔 신답리였다가 1914년 신답, 신기를 합하여 망덕리가 되었다. 현재 망덕(望德), 신답(新畓), 신기(新基) 3개 마을로 형성되어 있으며 옛날엔 남해의 바닷물이 조만강을 거슬러 마을 앞까지 올라왔다고 한다. 내삼천에서 흙, 모래 등이 떠 내려와 쌓이고 싸여 새로운 논을 형성하였다 하여 신답이라고 하고 들판 한가운데 새로 생긴 마을이라 하여 새각단 즉 신기마을이라고 하는데, 조선 후기 고종 때 김해 김씨들이 옮겨와 정착하고 마을을 이루었다고 한다. 전통적으로 넓고 기름진 망덕리 들판에서는 각종 고등소채류와 품질 좋은 쌀이 많이 생산되고 있다.
7. 관련 설화 및 이야기[편집]
7.1. 내삼지[편집]
김해시 주촌면 옛 주촌초등학교 앞에 위치한 연못인 내삼지는 인조 때 권세가였던 김자점과 관련된 이야기가 전해지고있다.
김자점이 한참 득세할 때에 주촌면에 그의 저택이 있었다고 한다. 어느 날 도사가 찾아와서 나무로 만든 기러기를 김자점에게 주면서 "이 기러기가 깃이 나서 하늘로 날아가면, 그대가 왕의 자리에 오를 수 있을 것이다."고 말한 뒤에 사라져 버렸다.
김자점은 이 말을 듣고 고민하고 있던 중, 나무 기러기에 깃이 나기 시작하여 공중으로 날아오르려고 하였다. 김자점은 때가 왔다고 판단하여 성급하게 역적을 모의하다가 발각되어 실패로 돌아가고 결국 죽임을 당하였다 한다.
그 후 마을 사람들이 그의 집터를 파서 연못을 만들었는데 그 연못을 '내삼지'라 하고 연못 가운데 있는 언덕은 김자점의 무덤이라고 남겨둔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김자점은 실제로 서울 출신으로 김해에 내려온 적은 없었다. 다만 김자점의 손자 며느리 이면서 인조의 딸인 효명옹주가 주촌면에 토지와 별장을 소유하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7.2. 떳다리[편집]
주촌면 농소리 조만강 하류에 위치했던 덕교를 떳다리라고 불렀다.[4]
떳다리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이야기가 전해진다.
옛날 이좌수로 불리는 사람이 있었는데 성격이 고약하여 사람들은 불만이 많았다. 그러나 이좌수가 두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 눈이 마주친 사람은 그대로 구부러진다고 하여 두려워하였다.
이좌수는 본래 승려들이 공양을 하러 오면 문전박대하기로 유명하였다. 어느날 이좌수에게 노승이 찾아와 '대감, 앞으로 집안이 잘 될 수있는 방법이 있습니다.'라고 하였는데 때마침 집안 대대로 과거에 떨어지던 차라 그 말에 솔깃한 이좌수는 노승을 집안으로 맞이하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노승은 '대곡 고개를 넘어가면 떳다리가 있는데 이 다리는 사람의 힘으로 도저히 만들 수 없는 다리요. 그런데 이 다리를 없애면 당신의 아들이 대과에 장원급제 할 수 있을 것이오.'라고 하였고 이좌수는 일꾼 20명을 뽑아 떳다리를 무너뜨리고자 하였다.
그런데 다리위에 커다란 구렁이가 버티고 있었고 이좌수는 구렁이를 향해 두 눈을 똑바로하여 쳐다보았다. 한참후에 구렁이는 다리아래에 빠져죽었고 결국 다리를 뜯어내고 말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좌수가 죽고 이후 이좌수집에 뱀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뱀들이 계속나타나자 이좌수 식구들은 더 이상 버티내지 못하고 다른곳으로 도망갔다고 한다.
떳다리는 비가 아무리 많이 와도 다리가 강위에 그대로 떠 있었고 옛날부터 이 다리는 견고해서 아무리 부수려고 해도 파괴할 수 없었다고 한다. 어느 날 초라한 도사가 지나가다가 이 말을 듣고 주먹으로 돌 하나를 뽑아내니 떳다리는 무너지고 말았다고 한다. 이 도사는 떳다리 서쪽 약 100m쯤 되는곳에 비석을 세우면서 '이 비석의 복판에 금이 가면 내가 죽은것으로 알라'하고 길을 떠났는데, 약 20년 뒤에 비석가운데 금이가서 두 동강이 나버렸다고 한다.
《김해지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