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련소에 훈련 받을 때였다
너무나 배가 고팠다. 적은 밥에 하루 종일 뛰고 나면 기진맥진 이였다.
식사 후에는 항상 P.X 에서 삼립 크림빵과 팥빵 2개를 먹어야 견딜 수 있었다.
밤에는 근무시간에 먹으려고 관물대 피복 속에 넣어두었다.
가끔 쥐들이 먹었고 또 그들이 가져갔다.
하루는 부스럭 소리에 눈을 떠보니 옆 친구가 뒤지고 있었다.
마치 자기 관물대 마냥...
눈이 마주쳤다. 한마디 말없이 그냥 잤다.
다음날 미안하다고 사과를 했다.
시골에서 일하며 고봉밥을 먹던 친구들은 배가 고파 살수가 없었다.
가끔 짬밥 통에서 손으로 먹는 모습을 보았다.
그때부터 두 개를 하나씩 나누어 먹었다.
그리고 부족한 부분은 수도 물로 배를 채웠다.
그 후 마음 문을 열고 서로 의지하면서 잘 지냈다.
내가 분실물이 있을 땐 악착같이 잘 채워 주었다.
친구는 김제 시골에 사는데 논밭이 적어 남의 집 일을 다니며 살았고
터미널 부근에서 주로 소매치기로 거의 시간을 보낸다고 솔직히 말했다.
광주 포병학교 3개월 특과교육까지 함께 갔다.
포병학교에 가니 밥은 많이 주어서 배고픔은 없었는데
삼례 사는 송호림 장군이 공식적으로 구타를 장려해서
매일 맞고 살아야 했다. 대포를 다루는 곳이라 군기가 엄했다.
그러나 배가 불러서 살 것 같았다
어려움이나 힘이 들 때는 서로 의지하면서 지냈다
심한 기압을 받고 화장실 뒤에서 서로 허리 마사지도 해주고
수돗가에서 눈물을 닦으면서 서로 용기를 돋아주기도 했다.
서로 힘들고 어려움 속에서 정이 많이 들었다.
제대하고 보일러나 냉동기술을 배우기로 약속을 했다.
기술만이 평생 살길이라는 것을 충분히 이해를 시켰다.
3개월 교육이 끝나고 자대 배치를 받았다.
송정리에서 야간 군용열차를 타고 친구는 강원도 전방으로 가고
나는 증평으로 배치를 받았다.
자정이 지난 어둠속에서 조치원역에서 헤어져야 했다.
굳게 악수하면서 포옹하고 눈물이 핑 돌았다.
힘들고 어려움 속에서 정이 많이 들었다.
제대하고 향토사단에서 꼭 만나자고 약속을 했다
군 생활 할 때 가끔 생각이 났지만 ,어디에 근무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제대하고 향토사단 소집 날 만날 것을 기대하고 35사단에 갔다.
잔뜩 기다리고 있는데 보이지 안했다. 시간이 끝날 때 까지 보이지 안했다.
무슨 영문도 모르겠고 동기들에게 물었더니만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했다.
월남전에서 사망했다는 것 이였다. 기대한 만큼이나 가슴이 미어졌다.
동기들 중 3분의 1은 보이지 안했다 마지막 월남전이 치열한 시기였다.
친구는 내무반에서 갈등이 심해서 소대장과 고참병을 죽이고
자신도 자살을 했다는 것 이였다.
몇 일전에 다낭에 다녀왔다.
다낭은 우리군 청용부대가 주둔했던 곳이다
친구는 이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3일 동안 어두운 밤에 미케비치 해변을 바라보면서 친구 생각이 많이 났다.
하루도 맥주를 마시지 않고는 잠을 잘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