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울드레서는 우리가 만들어가는 소중한 공간입니다.
댓글 작성 시 타인에 대한 배려와 책임을 다해주세요.
분석글이기 때문에 에밀리 브론테의 소설 <워더링 하이츠(폭풍의 언덕>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오래된 고전 소설이긴 하지만 그래도 스포일러를 원치 않으신 분들은 뒤로가기를 눌러주세요.
# 들어가며
<Wuthering Heights>, 우리나라에서는 <폭풍의 언덕>이라는 제목으로 유명한 에밀리 브론테의 소설은 지금까지도 사람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고전 명작 중 하나다. 그러나 부정적인 평가들도 많다. 특히 캐서린 언쇼(이후에 에드가 린턴과 결혼하여 캐서린 린턴으로 이름이 바뀐다)의 캐릭터성에 대한 비난이 많다.왜냐하면 히스클리프가 그녀에게 보여주는 집착과도 같은 처절한 사랑과 복수심에 공감할수록 캐서린이 에드가와 결혼한 이유가 그저 자신의 계급을 지키고 싶었던 속물적인 여성으로 비춰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작품을 잘못 해석하여 벌어진 오해에 가깝다. 오늘은 캐서린 언쇼에 대한 오해를 바로잡으며 그럼 우리가 어떻게 <폭풍의 언덕>을 읽어야 하는지에 대해 알려주겠다.
# 우리가 서술자 넬리 딘을 신뢰하는 이유
일단 <폭풍의 언덕>을 읽어본 독자들이라면 알겠지만, 원작에서는 소설의 서사를 두 명의 서술자가 풀어낸다. 스러시크로스 그레인지에 전세 내어 입주한 세입자 록우드가 서술자로 등장하고, 그에게 이 근방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가정부 넬리 딘이 록우드에게 말해주는 액자식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두 서술자 중에서 넬리 딘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호감형 인물"이다. 그녀는 히스클리프가 힌들리에게 구박 당하는 모습을 보고 가엾게 생각하여 그를 돕고, 힌들리가 술에 빠져 있을 때 그의 아들 헤어턴을 정성을 담아 기르는 따뜻한 마음씨를 가지고 있으며, 힌들리에게 맞서기도 하는 용기까지 갖춘 인물이다. 기본적으로 이런 좋은 인품에 가정부로 일하면서 캐서린, 히스클리프, 힌들리, 에드가 린턴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인물이기 때문에 독자들은 그녀를 믿을만한 서술자라고 생각하게 된다(물론 상대적으로 허술해 보이는 서술자인 록우드의 덕도 있다). 그래서 독자들은 자연스럽게 그녀의 시각으로 알려준 이야기와 다른 인물들에 대한 평가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게 된다. 하지만 이야기를 그녀가 본 시각으로만 따라가면, 캐서린 언쇼에 대한 그녀의 선입견도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기 때문에 이 부분에서 수많은 독자들이 오류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 우리가 서술자 넬리 딘의 이야기를 비판적으로 바라봐야 하는 이유
문학 작품을 읽을 때 가장 먼저 체크해야 할 부분은 이야기의 시점이 누구인지를 파악해야 한다. 전지적 작가 시점이라면 상대적으로 다른 시점보다 편파적인 면이 적지만(편파적으로 서술을 하더라도 독자들에게 티가 많이 난다), 다른 시점의 경우에는 글을 읽으면서 사건의 재구성을 해볼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소설 속의 인물도 인간과 똑같다. 그들도 자신만의 생각이 있고, 그에 따라 다른 인물들에 대한 선입견도 존재한다. 그래서 A라는 인물이 B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다는 언급이 나왔을 때, A가 B에 대해서 말하는 평가들은 중립적이지 않기 때문에 독자들은 B가 어떤 인물인지 다시 한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넬리 딘의 케이스도 이와 같다.
넬리 딘은 록우드에게 옛날 이야기를 하면서 "어린 시절이 지나고 난 다음부터 캐시를 좋아하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하는 대목이 있다. 다시 말해 넬리는 캐서린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는 것을 드러냈기 때문에 그녀가 아무리 호감형 인물이라고 해도 더 이상 중립적인 서술자로서의 지위는 잃어버리게 된다. 따라서 그녀의 캐서린에 대한 평가는 모두 제외해야 하고, 독자들은 캐서린의 행동에 대해 언급한 부분만 따로 놓고 그녀의 진짜 심리는 어땠는지 다시 파악해야 한다. 예시를 하나 들어보자.
# 색안경을 벗고 인물을 재평가 해보기(예시)
캐서린과 넬리가 에드가 린턴과 결혼하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장면을 살펴보자. 캐서린은 넬리에게 자신이 히스클리프를 위해 에드가 린턴과 결혼할 것이라고 말하지만, 그것은 히스클리프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 행동이라며 넬리가 비난하자 이렇게 말한다.
"....내가 이 세상에서 맛본 크나큰 고통들은 모두 히스클리프가 당한 고통이었어. 처음부터 그 고통 하나하나를 지켜봤고 겪어 냈지. 살아오는 동안 내 생각의 가장 큰 몫이 바로 히스클리프였어. 모든 것이 소멸해도 그가 남는다면 나는 계속 존재해. 그러나 다른 모든 것은 있되 그가 사라진다면 우주는 아주 낯선 곳이 되고 말 거야. 내가 그 일부라고 생각할 수도 없을 거야. 린턴에 대한 나의 사랑은 숲의 잎사귀와 같아. 겨울이 되면 나무들의 모습이 달라지듯 세월이 흐르면 달라지리라는 걸 난 잘 알고 있어. 그러나 히스클리프에 대한 사랑은 나무 아래 놓여 있는 영원한 바위와 같아. 눈에 보이는 기쁨의 근원은 아니더라도 없어서는 안 되는 거야. 넬리, 내가 바로 히스클리프야.... (후략)"
<워더링 하이츠> 을유문화사 번역본에서 발췌
이 말을 하고 울먹거리며 넬리에게 안기려는 캐서린을 넬리는 밀쳐내며 그녀의 이야기를 터무니없다고 하며 이런 독설을 날린다.
"아가씨의 그 말 같지도 않은 말을 이해하려고 해 보면, 아가씨는 결혼과 함께 떠맡아야 할 의무가 뭔지도 모른다는 확신이 드네요. 그렇지 않다면 사람의 도리도 모르는 막돼먹은 계집아이에 지나지 않은 거죠."
이 상황은 넬리의 시각으로 보면 에드가 린턴과 결혼할 것이라며 히스클리프를 위한 것이라고 말하는 캐서린의 모습이 위선적이며 철없는 어린아이처럼 그려진다. 그러나 캐서린에 대한 넬리의 부정적인 시선들을 걷어내고 다시 한번 이 대사를 살펴보자. 과연 캐서린은 철없는 어린아이에 불과할까?
캐서린의 대사를 보면 오직 히스클리프에 대한 생각밖에 없다. 그녀는 히스클리프가 자신의 오빠인 힌들리에게 학대 당하는 것이 가장 고통스럽다고 말하며, 마지막에는 히스클리프를 자신과 동일시할 정도로 각별하게 생각한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러나,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히스클리프와 결혼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둘이 결혼을 하더라도 상황이 달라지는 것이 없기 때문에 히스클리프는 여전히 힌들리에게 괴롭힘을 받고, 자신은 그를 지켜줄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히스클리프를 자신이 지켜주기 위해 에드가 린턴과 결혼하기로 마음을 먹은 것이다. 비록 그렇게 한다면 그녀와 히스클리프의 사랑은 결혼으로 이루어지지 못하게 되지만, 자신이 린턴가의 도움을 받아 힌들리로부터 히스클리프를 지켜줄 수 있는 방패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녀의 선택은 절대 두 남자 사이에서 저울질을 하고 있는 고약한 심보에서 나온 것도 아니고, 둘 다 가지고 싶다며 떼쓰는 어린아이의 허무맹랑한 소리도 아니다. 오히려 캐서린의 결심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자신까지도 던질 수 있는 자기희생에 가까우며, 사랑하는 이의 행복을 기원하는 성숙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 글을 마치며
이런 맥락으로 소설 속의 장면들을 하나하나 재평가를 해보면 이때까지 읽었던 <폭풍의 언덕>이 다르게 느껴질 것이다. 예를 들어, 말괄량이와 같던 그녀의 성격이 왜 히스클리프가 떠난 시기에는 정숙하고 병약한 부인이 되어버렸는지, 혹은 넬리가 히스클리프가 다시 돌아오기 전까지는 린턴 부부가 정말 행복했다는 이야기가 과연 사실인지를 다시 살펴봐야하니까. 이처럼 <폭풍의 언덕>말고도 우리는 소설을 읽을 때 서술자가 과연 믿을만한 사람인지 계속 확인해볼 필요가 있다. <폭풍의 언덕>을 그동안 잘못 읽은 것 같다고 느낀다면, 다시 한번 읽으며 수수께끼들을 풀어서 넬리 딘의 이야기 속에서 새로운 깨달음을 얻는 흥미로운 독서를 해보길 바란다.
ㅊㅊ
https://m.fmkorea.com/6619019357
https://www.dmitory.com/issue/326330366
첫댓글 와 저도 책 읽을때 히스클리프를 버리고 간 캐서린이 정말 이해가 안됐는데.. 이게 넬리의 시점에서 봐서 그런거였군여? 흥미롭내..책 다시 읽어보고 싶긔
흥미로운 시각이긔 그런데 린튼과의 결혼이 어떻게 히스클리프를 지킬수 있는 길인 건지는 납득이 안되긔 설사 히스클리프를 하인으로 데려가 오빠 눈에서 벗어나게 한다한들 히스클리프가 다른 사람과 혼인한 캐서린을 고통없이 곁에서 지켜볼수 있을리 만무하고요, 히스클리프는 맘만 먹으면 힌들리로부터 진작에 도망가 타지로 떠날 수도 있었겠지만 캐시때문에 남았던걸텐데 말이긔. 물론 둘이 같이 야반도주는 못했을거긔 히스클리프 혼자면 몰라도 캐서린까지 같이 도망가면 힌들리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추격해 잡아왔을테니까요
린턴네가 훨씬 부자에 잘살았기 때문인 것 같긔. 귀족, 계급 같은 게 아직 남아 있던 시대라서요. 린턴이랑 결혼하면 언쇼가 보다 높은 지위를 얻게 되고 남편을 등에 업고 오빠에게 이래라저래라 할 수 있는 위치가 되니까 힌들리에게 히스클리프 괴롭히지 말라고 명령(?)할 수 있었던 거 아닐까 싶긔. 저도 읽은지 오래 되서 가물가물하긴 해요
@이강인의왼발 아무리 한쪽이 사회적 지위가 더 높아도 남의 집 사용인 처우에 감놔라 배놔라 할 권한이 있었을까요 뭔가 금전 관계가 있으면 가능할 수도 있겠네요 물론 캐서린한테 힌들리가 더 이상 함부로 하진 못했을거긔
요즘 읽고 있어서 넘 반가운 글이긔!!전 후반으로 갈수록 헤어튼이 젤 안 됐더라긔ㅠㅠ아직 뒤에 좀 남았는데 오늘 다 읽고 게시글 다시 읽어봐야겠긔~재밌는글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오 다시 읽어봐야겠긔
글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캐시가 유아적인 인물이고 어른이 되어서도 일관되게 철없는 행동을 한다고 생각하긔 캐시는 히스클리프를 진심으로 사랑하는건 맞는데 그렇다고 히스클리프를 위해 자신을 희생할 생각은 없던 이기적인 인물이긔 린턴과의 결혼도 자기 편하게 살려고 선택한거라고 보긔 그런데 그게 캐시라는 인물의 매력이에요 감정적이고 미성숙하지만 그래서 끌리는 인물이긔
전 캐시가 히스클리프를 사랑한건 맞는데 린튼이랑 결혼하면서 자아 실현 했다고 생각하긔.
그래도 못놓고 앓다 죽었지만... 히스클리프 돌아왔을때 셋이 살고 싶어하지 않았긔? 시누랑 결혼한다고 하니까 질투 폭발하고.
넬리의 시선으로 글을 읽었기 때문에 저런 의견도 오 그럴수 있구나 싶긔. 다시 한번 읽어봐야겠긔.
여기 몇몇 댓글들처럼 캐서린이 성숙하다는 것엔 전혀 동의 못하겠긔 오히려 저 대사에서 “내가 바로 히스클리프야” 라는 부분은 캐서린의 감정이 유아기의 그것과 비슷하다는 걸 보여주는 것 같긔 어린애들이 엄마와 자신을 동일시해서 엄마가 울면 따라 울고 엄마가 웃으면 따라 웃는 실험도 있었잖아요 자신과 히스클리프를 각각의 독립된 인격체로 보지 못하고 “내가 너고, 네가 나다”라는 사랑의 방식 자체가 굉장히 비성숙하고 유아적이긔 그래서 숙명적으로 파국을 맞을 수밖에 없던 사랑이었지 않을까 싶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