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타부따 누빠싸나'라는 말이 있습니다. 원인과 결과의 연속으로 생겨나는 과정들을 주시함으로써 있는 그대로 바르게, 그 생
겨나는 과정을 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강한 흐릿함, 불분명함이라는 '싸모하'라는 것이 세세 생생에 우리들을 깊숙이 찌
르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깊숙이 찌르고 있는 것처럼 깊이 들어와 있는 것이, 집착하는 것의 하나입니다. 이것은 알지
못함이라고 하는 종류의 집착입니다.
지금 예를 들어서 나타나는 대상들을 그때그때 바로 알지 못하게 되면, 일분이면 60초, 그래서 60번이라고 가정해 보아도, 5분
이면 300번, 한 시간이면 3천 6백 번입니다. 하루가 24시간이니 24에 3천 6백을 곱한다고 하면 엄청난 숫자가 될 것입니다. 이
렇게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이라는 '싸모하'라고 하는 강한 흐릿함, 불분명함이 매우 크고 두텁게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 것을
'싸모하'라고 부릅니다. 이 것이 너무 두텁고 너무 깊숙이 찌르고 있기 때문에, 세세 생생 알지 못하는 것들이 계속해서 생겨나
게 되고, 이로 인해서 잘못 알게 되고, 잘못 믿게 되는 것도 따라 오게 됩니다. 그래서 매 순간 현재 나타나는 대상을 바로 그 순
간에 주시함으로써 바르게 알 수 있게 될 때, 조금 전 '야타부따 누빠싸나'라는 말처럼 생겨나는 과정들을 있는 그대로 바르게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어 질 때 '싸모하'라고 하는 크고 두터운 종류의 흐릿함, 불분명함, 알지 못하는 것들은 생
겨날 수 없게 되고, 제거 될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세세 생생에서 끌어당기고 집착 해온 것과 같은, 찌르고 있는 듯한 것을 대체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것을 선업 적인
요소로 대체 하고자 하면 이 것을 대체 할 수 있는 선업적인 요소에는 4가지가 있습니다. 즉, '삳다', 신심과 '사띠', 알아차림과
'사마디', 집중과 '빤냐', 지혜입니다. 이러한 4가지로 대체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이 4가지가 바른 법 바른 대상 위에 들
어가는 것과 같은 법입니다. 이 4가지에 대해서는 사실 얼마 전에 이미 설명했었습니다. 그래서 '삳다'라고 하는 신심은 믿어야
할 만한 대상ㅇ르 믿음으로서, 그리고 받아들임으로서 그 대상 안에 들어가는 것과 같고, '사띠', 알아차림은 나타나는 모든 대
상들을 그 위에 머무르는 듯, 붙는 듯 함으로서 그 대상 위에 빠져들어 가는 듯 함으로써 들어가는 것과 같다 했습니다. 이렇게
대상 안에 들어가는 것과 같은 것이 언제나 있어야 한다고도 말했습니다. '사마디', 집중은 대상 위에 모여서 들어가는 것과 같
으며, '빤냐', 지혜는 알아야 할 법들을 빈틈없이 봄으로서, 그 안에 들어가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것들로 대체 해주
어야 하는 데, 이 것이 선업 적인 요소 중에서 들어가는 것과 같은 법이라고 이렇게 설명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