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 마태복음 18:21-35
제목 : 선교적 삶을 향한 보내심(21) - 용서의 삶을 살라
21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2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35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저희들에게 또 귀한 날 복된 날 거룩한 날 허락하시고
주의 전에 나와 경배하며 왕이신 나의 하나님을 찬양케 하시니 감사합니다.
아버지, 이제 말씀 듣습니다.
왕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여 주시옵소서.
주의 종들이 듣겠사오니, 성령님 말씀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1. 들어가는 말 : 영화 "밀양" 이야기
지난 2007년에 만들어진 작품으로 칸 영화제의 수상작으로도 크게 주목을 받았던 한국영화가 하나 있습니다.
영화의 제목은 "밀양", 아마 많은 분들이 보셨을 겁니다.
이 "밀양"이라는 작품은 우리에게 용서라는 주제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주인공 신애는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남편의 고향인 밀양에서 세 살 짜리 아들과 아들과 함께 새로운 삶을 시작합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웅변학원 원장이 그 아들을 유괴해서 죽이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신애는 고통의 나날을 보내며 주위에서 교회에 다녀 보라는 권유를 받게 됩니다.
그래서 찾아간 교회에서 그녀는 대성통곡을 하지요.
그리고, 그 이후로 아주 자연스럽게 신애는 교회 성도들을 통해서 위안도 받고 또 신앙심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신앙심이 깊어지면서 그녀의 얼굴에는 미소가 다시 드리우게 되었고, 고요하고 평화로운 빛을 발하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그녀는 자신의 아들을 죽인 범인을 용서해 주기로 결심을 하고
살인범에게 그를 용서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꽃을 사 들고 교도소를 찾아 갑니다.
그리고, 살인범과 마주 한 신애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전해 주려고 왔다고 말하지요.
그런데, 범인은 신애에게 하나님 아버지의 이야기를 듣게 돼서 너무 감사하다고 말하면서
신애보다 더 훨씬 평온한 모습으로 자신도 믿음을 가지게 되었고,
하나님께서 이미 자신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었다고 말합니다.
그 순간, 신애는 살인범의 그 표정과 말에 충격을 받고 혼란스러움에 빠지게 됩니다.
그녀는 자신의 용서와 상관없이 이미 하나님께서 그를 용서해 주셨다는 사실에 분노를 느끼며,
그 마음에 심한 갈등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목사님에게 내가 그 인간을 용서하기도 전에 어떻게 하나님이 먼저 용서할 수 있느냐고 울부짖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다시 망가지기 시작하지요.
그렇게 영화는 계속 됩니다.
우리는 이 영화를 통해서 용서의 문제가 정말 말처럼 그렇게 쉽지 않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되지요.
그렇다면, 과연 용서란 무엇입니까?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오늘 이 비유의 말씀을 통해서 두 주에 걸쳐서
우리가 왜 용서를 해야 하고, 또 어떻게 용서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함께 생각하면서 주님의 음성에 순종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2. 본문의 배경
오늘 본문은 베드로의 용서에 관한 질문으로부터 시작되고 있습니다.
21절에,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아마도 이 때 베드로는 스스로 자기의 제안이 매우 너그러운 제안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 유대 랍비들의 전통과 가르침에 의하면, 세 번까지는 용서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일곱 번을 제안을 했으니, 당시 종교 지도자들이 최고로 허용한 것보다 두 배 이상을 제안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22절에, "일곱 번이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도 하라" 고 대답하셨지요.
예수님의 이 대답은 일곱 번에 일흔 번, 즉 490회 용서하라는 수치를 말씀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용서에는 정해진 한도가 없다는 뜻입니다.
아직 용서의 횟수를 세고 있는 사람은, 용서하지 않겠다는 것을 의미하지요.
그런데, 일곱 번에 일흔 번까지도 해라
이것은 카운트 하라는 게 아녜요. 한 번, 두 번, 세 번, 490번까지 하라는 말씀이 아니지요.
하나님의 용서에는 한계가 없다 하는 뜻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이 놀라운 말씀을 뒷받침 하려고 하나의 이야기를 들려 주시는데,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용서할 줄 모르는 종의 비유입니다.
어떤 사람이 왕에게 일만 달란트를 빚 졌는데,
그 빚은 그 당시 온 가족이 다 노예로 팔려 가고, 평생을 노력해도 갚을 수 없는 그런 돈이었어요.
이 빚을 오늘날의 기준으로 환산을 해 보면 무려 4억 달러, 한국 돈으로 5천 억 이상이 되는 돈입니다.
그러니, 이런 빚을 한 사람이 어떻게 갚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종은 왕에게 엎드려 참아 달라고 간절히 호소하지요.
이에 왕은 그를 긍휼히(불쌍히) 여겨서 그를 놓아주고 모든 빚을 탕감해 주었습니다.
그는 엄청난 은혜, 하늘만큼 땅 만큼의 은혜를 입은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에 일어납니다.
이렇게 헤아릴 수 없는 무한대의 빚을 탕감 받은 이 종이 자기에게 작은 빚은 진 동료를 만나서 그 동료의 멱살을 잡습니다.
그리고는 그를 감옥에 넣어버리고 말지요. 그런데 그 동료는 그에게 백 데나리온의 빚을 지고 있었습니다.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품삯입니다. 그러므로, 제가 계산해 봤어요.
작년, 2022년 한 시간 최저임금이 9,160원이예요. 그럼 하루 8시간 일하면
하루 품삯이 최저임금 73,280원이죠. 그러니까 100 데나리온은 약 780만원 정도입니다.
5천억을 탕감 받은 사람이 자기에게 700만원 빚 진 동료를 감옥에 가둬버린 거예요.
그 소식을 들은 왕은 분노하며 그 종을 다시 불러서,
"너는 나의 엄청난 긍휼을 힘입어 무한대의 돈을 탕감 받았는데,
어떻게 네 동료에게 그렇게 모질고 인색하게 대했느냐?" 책망을 하고
그를 도로 옥에 가두고 그 빚을 다 갚으라고 명령을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 비유를 말씀한 끝에(35절에),
(마 18:35)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말씀하셨어요.
우리는 이 비유를 파악하는데 큰 어려움을 느끼지 않습니다.
분명해요. 이 비유에서 왕은 하나님을 의미하고, 종은 우리 모두를 지칭합니다.
일만 달란트는 우리가 하나님께 진 무한대의 사랑과 용서의 빚을 말하는 거지요.
그러므로, 이 이야기는 누군가의 이야기가 아니라, 주님께서 이 시간 우리 모두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즉, "너희가 하나님으로부터 무한대의 사랑과 용서를 받았으니,
그 사랑과 용서를 먼저 받은 너희들도 이제 나아가 그렇게 용서의 삶을 살아야 된다" 이 말씀예요.
이게 지금 예수님의 비유의 핵심 내용입니다.
용서의 삶을 사는 것, 이것이 바로 오늘 그리스도인들이 살아야 할 선교적 삶의 모습이라 하는 거지요.
3. 용서란 무엇인가?
그렇다면, 주님께서 이 비유를 통해서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용서란 무엇입니까?
왕은 이 사람의 엄청난 빚을 탕감해 주었어요. 이 이야기에서 빚의 탕감은 곧 용서의 핵심입니다.
그리고 본문에서 "용서"라는 단어로 사용된 헬라어 "아피에미"라는 말은
법적으로 무죄를 선언하거나 빚을 면제해 준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 단어는 성경에서 상대방이 자신에게 잘못한 것은 분명하지만,
그 잘못에 대해서 더이상 개의치 않고 잘못하지 않았을 때와 똑같이 대한다 하는 의미로 주로 사용이 됐어요.
즉, 이것은 형벌을 경감하거나 유보한다는 뜻이 아니라 완전히 사면해 준다 하는 뜻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할 것이 한 가지 있어요. 굉장히 중요한 개념인데,
이 사면의; 개념에 암시되어 있듯이 용서에는 늘 대가가 따른다는 사실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이 이야기에서 왕이 종의 그 무한대의 빚을 탕감해 주었다는 것은
그로 인한 엄청난 손해를 왕 자신이 부담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 우리가 돈을 빌린 뒤에 갚을 수 없게 되었을 때에 채권자가 우리의 빚을 탕감해 준다면,
이는 손해를 채권자가 부담한다는 뜻이잖아요..
빚을 탕감해 주는 채권자는 채무자 대신 자신이 빚을 갚거나, 아니면 자신이 부담을 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서 친구가 자동차를 빌려서 나갔는데, 그 친구가 운전미숙으로 그만 큰 자동차 사고를 냈어요.
차가 폐차될 정도였어요. 그런데 그는 재정적으로 그걸 보상할 능력이 없어요.
그때 내가 그 친구에게 아이 괜찮다고 하면서 용서한다는 것은 뭘 의미하지요? 그 대가를 내가 치르겠다 하는 것과 같아요.
즉, 내가 그 친구를 용서해 준 대가는 내가 돈을 들여서 새 차를 사든지, 아니면 내가 자동차 없이 살아야 합니다.
그 친구를 용서해 준다는 것은 그 대가를 내가 다 치르겠다는 거예요. 그게 용서입니다.
그게 지금 성경이 사용하는 "용서"라는 단어의 뜻입니다.
그러므로, 용서에는 가해자 몫의 형벌이나 부채를 피해자인 내가 감당한다는 의미가 그 속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게 성경이 말하는 용서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인류 역사상 채권자가 채무자의 엄청난 빚을 가장 크게 변제해 준 전무후무한 사건이 있었는데,
여러분은 그 사건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리고 그 사건이 어디에서 일어났는지 아십니까?
그 사건은 바로 저 이천 년 전에 갈보리 십자가 위에서 일어났습니다.
갈보리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께서 온 인류의 죄를 대신 지시고 당신의 피값으로 우리를 속량해 주셨습니다.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이 사실을 사도 바울이 이렇게 선언했지요.
(엡 1:7)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 "죄의 용서를 받았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흘리신 물과 피로써 죄의 사함을(용서함을) 받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 기억하시지요?
"다 이루었다" - 다 이루었다는 말씀예요.
무슨 뜻입니까? "테텔레스타이!" - "죄값을 다 치루었다", "빚을 다 갚았다" 그런 뜻입니다.
무엇으로 우리의 죄값을 다 치루어 주셨다구요? - 예수님의 생명으로... 당신의 생명으로...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죄와 사망 가운데 죽어가고 있는 우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오늘 왕이 그를 불쌍히 여겼다, 측은히 여겼다 그랬지요?
그 단어가 무슨 뜻입니까? 지난 번에 우리 부흥회 때도 이 말씀 들었지요..
어머니의 자궁 속에 있는 태아를 보호하려는 그 지극한 사랑의 마음, 어머니의 마음,
엄마가 코로나에 걸렸어요. 임신 했어요. 약을 먹어야 되는데,
태아 때문에 자궁 속에 있는 태아 때문에 엄마가 약을 먹지 않고 버티는 거예요. 이게 긍휼입니다. 이게 긍휼의 마음입니다.
죄와 사망 가운데 죽어가고 있는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하나님께서 당신의 외아들의 생명으로
우리의 죄의 값을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빚을 대신 갚아 주셨습니다. 이게 속량의 뜻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들을 용서하시기 위하여 당신의 가장 사랑하시는 아들의 희생이라는 가장 큰 대가를 치루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하나님의 엄청난 희생의 사랑을 아십니까?
그리고 하나님의 이 자기희생적 사랑에 감사하고 감격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우리의 그 어떤 것을 통해서도 우리의 죄의 문제를 해결함 받고 구원받을 수 없었습니다.
만 달란트의 빚 진 종처럼, 우리는 우리가 가진 그 어떤 것으로도 그 죄로 인한 부채를 갚을 수가 없었고,
죄와 사망으로부터 자유함을 얻을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는 불가능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자신이 육신을 입고 오셔서
십자가 위에서 형벌을 받으시고 우리가 갚아야 될 모든 빚을 다 갚아 주셨어요.
"테 텔레스타이!" - "다 이루었다" 전액지불! 아멘!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었고, 지금 이 은혜의 자리에 있게 된 것입니다. 아멘!
4. 왜 용서해야 하는가?
1) 하나님께서 가장 값비싼 대가를 치루고 우리를 먼저 용서하셨기 때문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렇다면, 이렇게 하나님 아버지의 일방적인 용서의 은혜를 통해서 구원 받은 우리는 이제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까?
대답은 자명하지요.. 바로 우리들도 이제 서로 용서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시기 위하여
세상의 그 무엇으로도 비교할 수 없고, 바꿀 수 없는 가장 값비싼 대가를 치르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무 조건 없이 일방적인 용서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정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이 무조건적인 용서 받은 것을 진정 깨닫고 정말 감사한다면,
우리는 당연히 용서의 삶을 살아야지요.
따라서 만약 우리가 여전히 내 마음 속에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않고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아직도 하나님의 십자가에서의 그 대속사건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는 증거일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 이게 누구 얘기가 아닙니다. 내 얘기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용조 목사님은, "우리 신앙의 바로미터는 바로 용서이고,
내가 진정 그리스도인인가 하는 것은 이 용서의 문 앞에 섰을 때 내가 어떻게 하는가로 드러난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므로 용서의 삶을 사는 것은 십자가의 은혜로 죄사함 받은 하나님의 자녀임이 가장 뚜렷하게 드러나는 증거이기도 하고,
선교적 삶의 또 하나의 중요한 모습이기도 합니다.
또, 우리가 용서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은, 먼저 용서함을 받은 우리를 향하신
너무나도 분명한 주님의 뜻, 주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엡 4:32)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아멘!
(골 3:13)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너는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라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라" 아멘!
* 용서에 관한 모든 성경의 말씀들을 보면 거의 다 명령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다 명령형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런 말씀들이 우리에게 분명히 요구하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 아버지의 한량없는 자비와 용서를 먼저 받은 우리들도 이제는
우리 옆의 형제 자매들과 화해하고 서로 용서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거지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용서해 주심과 같이 이제 우리들도 서로 용서해야 한다는 말씀이지요.
죄인들을 용서하기 위해서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이 모든 진노를 다 받으시고 물과 피를 흘리신 주님을 본받아
우리도 기꺼이 우리 자신을 내어주는 대가를 치르며 용서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하는 말씀입니다.
진실로 용서는 죄로 인하여 죽을 수 밖에 없는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하나님이 사용하신 최선의 방법이었어요.
용서는 하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 죄인들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입니다.
그렇다면, 이 최고의 선물을 거저 받은 우리들도 이 선물을 이웃과 함께 거저 나누어야 하지 않습니까!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 주님이 말씀하셨어요.
그러므로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는 도저히 갚을 수 없는 죄를 용서받은 우리는 이제 마땅히 용서의 자리로 나아가야 됩니다.
내가 용납할 수 없고, 용서할 수 없는 사람들조차도
우리가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용서의 은혜로서 용납하고 용서할 수 있어야 된다,
물론, 이 용서가 정말 말처럼 쉽지 않지요.
우리가 용서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앞서 말씀드린 대로, 용서함을 위한 대가를 기꺼이 내가 감당해야 하기 때문에 그래요.
그런데 용서는 내가 그 대가를 감당하는 거리 그랬어요. 그래서 용서가 쉽지 않지요.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용서하기 위해서 외아들 예수님의 생명을 희생하셨듯이 용서에는 늘 대가가 따르기 때문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저히 갚을 수 없는 부채를, 먼저 면제 받은 우리는 용서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어떻게 용서할까?
다음 주에 좀 더 자세히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용서가 한 번만에 끝나는 게 아니더라구요..
설교를 준비하다 보니까, 한 번에 끝나는 문제가 아니더라구요.
2) 용서하지 않으면 내가 감옥에 갇히기 때문
우리가 용서하지 않으면 안되는 또 하나의 이유는,
여러분, 용서하지 않으면 내가 감옥에 갇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비유는 흔히 용서할 줄 모르는 종의 비유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는, 용서하지 못하는 우리들의 모습을 말하기도 하는 것인데,
이 종은 엄청난 빚을 탕감 받은 후에 자기에게 작은 빚을 지고 잇는 동료를 감옥에 가둬 버렸어요.
그 소식을 들은 왕이 노해서 그를 감옥에 도로 가둬 버렸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곧바로 그 뒤에 35절에 이렇게 말씀하세요.
(마 18:35)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 무슨 말입니까?
우리도 용서하지 않으면 감옥에 갇히게 될 것이란 말씀이잖아요.
즉, 우리가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미움과 복수의 마음에 사로잡혀 있으면
그것은 영적인 옥살이를 자초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헨리 나우엔은 이렇게 말한 겁니다.
"용서하지 않으면 스스로 복수심에 결박되어 자유를 잃어버린다."
아마도 우리들 가운데에는 그 누군가를 미워하고 증오하는 마음 때문에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소화도 제대로 안되는 고통을 경험한 분들이 있을 겁니다.
누군가에 대한 불쾌한 마음으로 인해서 속이 편치 않고 필요이상의 화를 내게 되고,
또 결과적으로 모두를 힘들게 만드는 그런 경험을 한 분들이
아마 우리들 가운데 대부분일 겁니다. 저를 포함해서...
그런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누군가를 미워할 때, 상대만이 아니라
바로 미워하는 자신에게 보다 심각한 고통과 피해를 주게 되고, 내 마음이 감옥에 갇히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내수동교회 박지웅 목사님의 『믿음의 눈을 뜨라』 하는 책을 보면, 웃음치료사 이임선 씨의 이런 사례가 기록돼 있습니다.
하루는 50대의 여성이 자신의 웃음치료 클리닉을 방문했는데, 그녀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그래요.
분노가 서린 얼굴로 들려준 그녀의 사연은 참으로 기가 막혔습니다.
25년 전에 그녀는 양가의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사랑하는 남자와 결혼을 했습니다.
빠듯하게 살면서 고생도 했지만, 그래도 행복했습니다.
이제는 자식들을 다 키운 뒤 좀 살만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남편이 심한 간경화로 쓰러져 그만 죽음을 코 앞에 두게 되었습니다.
죽어가는 남편을 보면서 아내의 가슴은 무너졌지요. 죽어가는 남편을 사랑하는 방법이 무엇일까?
아내는 남편이 죽기 전에 무슨 소원이든 들어줄 수 있다면, 그것이 남편을 향한 사랑의 표현이 될까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물었습니다. '여보, 소원이 있으면 말해 봐요.' 그러나 그것은 하지 말았어야 할 질문이었습니다.
남편은 아주 힘겹게 입을 열었습니다.
'그동안 당신 몰래 사귄 여자가 있었는데, 정말 미안하지만 죽기 전에 한 번만 보고 죽었으면 좋겠다.'
아... 참... 이게 정말 기가 막힌 얘기예요.
이 어처구니 없는 말을 듣고 이 부인이 그 자리에서 실신을 했어요.
그리고 의식이 돌아왔을 때 남편은 이미 세상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25년 동안 한결같이 사랑했던 남편, 그 남편을 보내는 마지막 순간이 너무나도 기가 막혔어요.
그 이후, 차츰 그녀의 눈은 독기어린 눈빛으로 변했고 배신감과 증오심을 주체할 길이 없었어요.
그녀는 말했습니다. "남편을 죽이고 싶어요"
이미 죽은 남편을, 다시 죽이고 싶을 정도로 그녀의 마음은 분노와 원망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뒤, 그녀가 뱉은 이 한 맺힌 고백이 치료사인 이임선 씨의 가슴을 때렸어요.
그녀가 이렇게 말합니다. "그래도 남편을 용서하고 떠나 보냈어야 했어요.
남편을 용서할 기회를 놓치고 나니 제가 이렇게 망가져 버렸어요."
죽은 사람이 문제가 아니라, 살아남은 자신이 망가져 버렸다는 것입니다.
용서 받아야 할 사람이 문제가 아니라 용서해야 할 내가 망가져 버렸다는 겁니다.
정작 어려움을 당하고 망가져야 될 사람은 나에게 잘못한 그 사람이어야 하는데,
오히려 어려움과 억울함을 당한 내가 망가져 버렸다는 겁니다.
여러분, 이게 얼마나 모순입니까..
그런데, 정말 그래요. 이게 모순인데, 이게 실상입니다.
용서하지 못하면 그 사람이, 상대가 망가지는 게 아니라 내가 먼저 망가져요.
상대방이 아니라 내 마음이 피폐해집니다. 내 심령이 분노와 미움으로 가득 차서 내가 파괴돼요.
분노의 감옥에 갇혀요. 미움의 감옥에 갇히는 거예요. 기도의 문도 막혀 버려요.
결국, 그 후에, 결론은 그녀는 자신의 가슴 깊숙이 담겨 있던 분노의 독을 다 쏟아내고 죽은 남편을 용서하고 나서야
마침내 상처 받은 마음 치료 받고 웃음을 회복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실화입니다. 책에 기록되어 있어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용서가 이렇게도 중요해요.
왜 용서가 우리에게 그렇게도 절실한 문제인지 아시겠습니까?
박지웅 목사님이 앞서 소개한 그 이야기의 말미에
"용서는 타인을 위한 선물이기 이전에 바로 나 자신을 위한 가장 귀한 선물이다" 그랬어요.
맞습니다. 용서는 진실로 타인을 위한 선물이기 이전에 바로 나 자신을 위한 가장 소중한 선물입니다.
우리는 이 진리를 죽은 남편을 향한 마음의 독을 뱉어 버린 여인을 통해 배울 수 있어야 돼요.
그녀는 죽은 남편을 용서하고 나서야 비로서 자신이 회복될 수 있었어요.
마음의 미움의 철장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어요.
그러기에 용서는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이 살기 위해서라도 먼저 해야 하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서로를 용서하고 화해할 때, 무엇보다 내가 삽니다. 내가 회복됩니다.
내가 분노와 저주와 미움의 감옥에서 해방 됩니다. 그리고 마침내 내 마음 속에 평안이 임하게 되지요.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용서하되 일곱 번의 일흔 번까지도 해라"
한계가 없는 용서를 하라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리고, 엡 4:32절에, "서로에게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고,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5. 나가는 말 :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용서의 선교적 삶을 살자
사랑하는 주안의 성도 여러분,
혹시 우리들 가운데 아직도 부모 형제 자매들과 용서하지 못해 원망하며 상처를 주고 받는 분들은 없습니까?
믿는 형제들 간에도 서로 용서하지 못해서 비난하고 원망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직장에서, 일터에서, 동료나 직장 상사와의 불편한 관계 때문에 힘들어 하고 있는 분들 있나요?
심지어는 교회 안에서조차 성도들끼리 묘한 갈등으로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 하고 있지는 않나요?
이제 그 모든 분노와 미움과 갈등을 주님 앞에 다 내려 놓으세요.
여러분들이 분노하고 미워하면 할수록 상처 받고 그 영혼이 피폐해지는 것은 상대방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예요.
용서하지 않으면 않을수록 계속해서 내가 파괴되고 맙니다. 상대방은 멀쩡한데, 내가 망가져요.
그러므로 이제 성령님의 도우심에 힘입어 내가 먼저 용서합시다.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내가 먼저 겸손하게 손을 내밉시다.
그럴 때, 우리의 심령이 회복될 겁니다. 그럴 때, 우리의 삶 속에 평화가 임하게 될 것이고,
그럴 때 우리의 가정이 이 땅의 작은 천국이 될 것이고, 그럴 때 우리 교회가 천국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용서를 통해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는 삶, 그것이 바로 우리가 살아야 할 선교적 삶입니다.
(마 5:43-44)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아멘!
우리를 향하신 주님의 명령입니다.
† 기도 :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용서의 복음을 다시 들려 주시니 감사합니다.
바라옵기는, 주님의 놀라운 용서의 사랑과 은혜가 우리 안에 충만하게 하시고,
성령의 도우심으로 내가 먼저 손 내밀고 내가 먼저 용서하여 화해를 이루게 하시고,
우리의 가정과 학교와 일터와 교회 공동체 안에 작은 천국을,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게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