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의 로맨스 '행복한 왕자' 아내 그레이스 켈리 곁으로 [스포츠한국 2005-04-07 09:33]
레니에 3세는 동화 속 왕자님 같은 삶을 살았다. 그리고 세계에‘세기의 로맨스’의 추억을, 모나코에는 막대한 부(富)를 남겼다. 그는 1923년 모나코 공국의 샤를로트 공주와 피에르 드 폴리냑 백작 사이에서 태어나 49년 조부의 사망으로 왕위를 승계했다.
2차대전 때 프랑스 군으로 참전해 무공훈장을 받은 20대의 독신 국왕은 유럽 사교계의 총아였다. 뭇 여성들은 레니에 3세를 흠모했고, 그는 세계적 플레이보이로 명성을 높였다.
56년 그레이스 켈리와의 만남은 한편의 영화와 같았다. 켈리는 거장 히치콕 감독과 모나코 몬테카를로시 티위스티산의 도로에서 영화를 찍고 있었고, 숙명처럼 그곳을 지나던 레니에 3세와 만났다. 켈리 또한 인기의 절정에 있었다.
모나코 대성당에서 거행된 결혼식은 젊은 왕자님과 우아하고 단아한 용모의 여배우가 만난 현대판 신데렐라 이야기였다. 세기의 결혼식이었던 만큼 호사가들의 뒷이야기도 끊이지 않았다. 레니에 3세와 켈리는 우연히 만난 게 아니라 모나코에 강한 영향력이 있던 그리스 선박왕 오나시스의 의도된 작품이었다는 얘기도 나왔다. 침체기에 있던 모나코의 관광산업을 부흥하려는 레니에의 쇼맨십과 오나시스의 사업적인 계산이 맞아떨어졌다는 추측이 돌았다. 실제로 레니에 3세는 정치력도 상당했다. 인구 3만명에 크기가 2㎢가 채 안될 정도로 세계에서 두 번째로 작은 나라를 프랑스의 합병 위협으로부터 지켰다.
다른 유럽의 입헌군주와 달리 행정권을 가지고 있던 그는 1959년에는 국민 회의를 해산 시키고 국정을 직접 장악했다. 프랑스와의 관계가 악화되자 62년 재빨리 국민 회의를 부활시키는 노련함도 보였다.
그는 모나코 주식회사의 유능한 CEO이기도 했다. 그는 즉위하자 마자인 50년 유명한 F1 그랑프리인 몬테카를로 랠리 자동차경주를 시작했고, 74년에는 국제서커스를 창설했다. 두 가지 모두 세계 최고의 권위를 자랑한다. 켈리와의 이별도 현실이 아닌 영화같았다. 켈리는 82년 막내딸인 스테파니 공주와 함께 자동차를 타다가 절벽아래 추락해 숨졌다. 사고지점은 자신이 영화를 찍던 그 길이었다.
호사가들은 켈리가 은막에 복귀하려 했으나, 왕실과 국민들의 반대로 무산돼 알코올 중독에 빠졌다는 이야기를 입방아에 올렸다. 하지만 레니에 3세는 켈리를 잊지 못하고 여생을 독신으로 지냈다.
두 딸인 캐롤라인 공주와 스테파니 공주는 결혼 이혼을 반복하고 있고, 왕위 계승자인 알베르 왕자도 47세의 나이에 미혼이다.
60년 가까이 재위한 레니에 3세는 현존하는 왕실태국의 푸미폰 아둔야뎃 국왕에 이어 두 번째로 오래 왕위를 지킨 군주이기도 했다.
홍석우 기자 musehong@hk.co.kr">museho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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