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에 관한 시모음 73)
봄산은 /손상근
지하 수맥이
스물거리며 열리고
연분홍 들썩임
가슴 부푼다
조아매던 가슴
어쩌지 못하고
옷고름 풀린다
시린 물소리
속삭임처럼 번지고
분홍 치맛단
바람보다 먼저 들린다
어깨 작은 가슴
터질 듯 화사하다
봄산은 불 붙는다
꺼질 기색도 없이
밤낮 가리지 않고
활활 타오른다
스므살 그녀는
문득 봄 /류병구
어느 날 홀연히
외설악으로 입산한 목(穆)시인
"속촙니다
봄바람이 났습니다
...
달이 참 밝습니다"
폴더폰을 타고
택배된 굼뜬 산소리에
비릿한 속초 바닷내가 묻어있다
실금 간 애벌 찻잔에
꽃샘물 굴먹하게 붇고
보내온 햇봄을 두어 닢 띄웠다
지나던 살바람이 슬그머니
꽃술 옆구리를 건드린다
공연히 겸연쩍은 낯가림,
살얼음 잡힌 봄
이미 산통이 시작되었는가
꽃마차는 떠나가네 /한효상
춥고 어둡던 날 봄 햇살이
거둬내고 안개구름 살포시
지나가더니 노란개나리 분홍 진달래
흐드러져 웃고 있더라
뒷동산 무덤가에 핀
쑥대머리 할미꽃 앉았던 자리
하얀 클로바 꽃향기 날리더라
푸른 언덕 춤을 추던
아지랑이 흔적 지운 꽃바람
그대 소식 전해주더라
라일락 그늘아래
담장가 붉은 장미화 계절을
황급히 재촉하더라
그대 머물던 자리 향기는
그대로인데 봄 실은 꽃마차 떠나가네
훠어이 훠어이 산새따라 가는구나
모두 늘 봄이다 /이은경
(웃지 우야노 노파를 바꿀거가?)
식탁 의자 위, 분홍 방석은 내가 산 게 아니다. 그러면, 누구의 행위인가.
아들은 학교에 쳐박혀 있고 난 침대에 박받혀 아직 못 걷는다. 그러면 누구의 행위인가.
바로 그의 행위이다. 난 그를 통해 남성은 투박하고 강하다는 이미지에서 벗어났다.
이 무의식의 변화 하나에 이십년이 소모되었다.
나는 나의 건강 회복을 위해 시를 만들고 아들은 이제 수염이 더부룩한데 내가 우야노.
면도해라. .젊을 때 남성 동무들, 낼 그리도 많이 보더니(착각) 이제 모두 모른다하더라.
그게 시화냥년의(울오마니 동무 표현을 빌어) 진실이니. 아름다움은 기만이다.
오늘은 그 아름다움, 미학적인 것에 대해 생각해야겠다. 심심한데.
봄이 곧 오리라 /박종영
소한 대한 추위
모두 이겨내고 나면
화사한 입춘 절이 얼마 안 남았다
봄의 기척을 알아차린
매화나무 가지 끝엔 어느새
녹두알 만한 꽃봉오리가
키를 재며 서둘러 봄기운을 재촉하고
풋풋한 산의 가슴이
연둣빛 설렘으로 물들어 가면
산골 물은 봄의 자장가로 흘러가고
겨울 동백은 붉은 옷고름 풀어
어두운 땅을 흔들의 깨운다
봄기운 강산에 고루 퍼지는 날
훈훈한 바람은 솔솔 피는 봄꽃 이끌고
산자락에 보름달로 뜬다
그 보름달을 훔쳐 파릇한
동백나무 가지마다 촐싹대며
꽃등을 매다는 노랑 부리 동박새
태화산*의 봄 /鞍山백원기
하얗게 얼어붙은 추곡 저수지
얼음 녹는 소리 들려온다
까맣게 보이는 새끼 물오리
아장아장 걸음마 배우고
한낮 태양에 따습기만 하다
봄 냄새 상큼한 태화산 바람
가슴 깊숙이 스며들고
고로쇠 큰 뿌리 담긴 샘물은
한 모금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남북을 가로지른 산 허릿길
진달래 철쭉 작은 꽃눈
성급히 실눈 뜨려 하고
내 뺨을 스치는 찬바람도
화려한 봄을 재촉하고 있다
*태화산 : 경기 광주 도척면 추곡리에서 오르는 해발 644m의 산
다시, 봄은 오고 /김귀녀
지금쯤, 개구리 울어대는
송정동 들녘엔
희디 흰 감자꽃 하얗게 피었겠지
새참 이고 가는
아낙의 밝은 미소 구름까지 닿아
뒷산 깊은 골짜기에
향 깊은 산마늘 피고 있겠지
지금쯤, 송정동에는
해송 숲에 바람이 놀러와
모래집을 짓고
보랏빛 갯완두 눈썹 끝엔
해풍 따라 날아온
해란초의 미소
심장처럼 따뜻한 모래 숲에서
행복을 노래하며
피고 있겠지
골목길의 봄 /김인숙
봄볕 내리쬐는
화사한 오후
길바닥에
여기저기
마른 나뭇잎
초라한 담배꽁초
바람 따라 춤추며
날아가는 껌 종이
보도블록 사이에 끼어
햇살 향해
머리 내민 이름 모를 새싹
이 모양 저 모양으로
살아가는 세상 속
내 모습과 다를 바 없음을
골목, 길 선생이
봄맞이 수업시간에 알려주시네
하품하고
깜빡 졸은 모습 딱 걸려
겨우내 묵은 마음 깨끗이
대청소하라 엄벌을 내리셨네
봄의 집을 짓다 /김영자
나비들이 걸어온다 날개를 잃어버린 나비들이 춤추지 못하는
나비들이 부서진 더듬이를 안고 걸어온다
꽃들이 집을 짓는다 봄의 집을 짓는다 봄의 살들이 일어선다
봄의 살 속에서 돋아난 더듬이는 날개가 되어
노란 춤을 춘다 나비의 날개 새로 태어나는 순간이다.
봄의 노래 /신혜림
종다리 높은 울음에
모두 잠에서 깨어나기로
약속이 있었나보다
민들레 뽀얀 얼굴.
천사 꿈을 꾸고
마파람 간지러움에
까르르 개나리 웃음소리
아침부터 취한 진달래 보며
장독대 아지랑이 어지럽단다
가만히 있어도 가득 차는 금 빛 아래
생명들의 그림자 놀이
푸른 풀밭에 발돋움하고
수줍게 걸어오는 봄 각시여..
이어도에서 오는 봄 /김혜천
1
보리빵집을 꿈꾸던 늙은 어미의
골다공 돌 무더기 곁으로
물결치는 청보리 초록바다
함성지르며 피어난 유채꽃 노란바다
슬픔 속에 아름다움
아름다움 속에 슬픔을 노래하는 제주 바람엔
다른 곳에서 들을 수 없는 소리가 있다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기다리는 물질하는 여인의 짧은 한숨
보리밭 보리 베어지듯 스러져간 4.3 원혼들의 웅웅거림
고사리들만 울분 참지 못해 주먹 쥐고 쑥쑥 올라온다
잃어버린 마을 어귀 늦도록 트지 않는 무등이왓 팽나무 순
이제 곧 주름진 등걸에
푸른 생명들 잔뜩 껴안고 풍성해질 것이다
2
대다수 사람들의 평범한 삶에서
스스로를 유배시키고
바닥바닥 긁던 바닥은 그들의 배경이 되었다
정해진 속도로 걷고 계량화된 무게의
순응하는 사람들에게만 너그러운 음험한 도시
그 도시에서 소외된 사람들을 호명한다
질펀한 갯벌에 발 담그고 조개를 캐던 시간
물미역 움켜쥐고 회이호이 내뱉던 외마디
바람 사나워 파랑 집채 삼켜도
저 멀리 이어도가 있다고
봄은 하늘에서가 아니라 이어도에서 온다고
봄의 속도 /배한봉
봄은 어떤 속도로 오느냐는
아이의 물음에
과학자는 지구가 자전하는 속도라 말하더군.
며칠 내내 부풀기만 하던 분홍빛 꽃봉오리가
한꺼번에, 온통 눈부시게 터져
미세먼지 뒤덮였던 하늘이 드맑게 눈을 뜨는 아침.
이걸 보았다면 과학자는
그 꽃나무 옆 시냇물이
구름을 타고 여행 갔다 돌아와
하늘의 금모래 같기도 뱀 비늘 같기도 한 별 이야기를
꽃망울들에 들려주는 속도라 말하지 않았을까.
사람에게 스며든 꽃향기가
사람의 숨결로 어디 까마득한 데 여행가는 때
먼 옛날 나였던 꽃나무가
지금은 사람이 되었다고,
꽃나무가 사람이 되는 속도로 봄은 온다고 들려주면
아이는 시시한 마법이라고
순 거짓말쟁이라고 나를 놀려대겠지.
그러나 먼 훗날의 아이가
나무 안에서 분홍빛 꽃눈으로 자라는 것을 우리 모두가 안다면
봄의 속도는 차츰 줄어들고 또 줄어들어
오늘을 잊어버리고 내일도 모레도 잊어버리고
드디어는 고요에 가 닿는 영원이 되어 있지 않을까
모과꽃 지는 봄 /권대웅
저녁의 고요가 나뭇가지 사이로 스민다
적막을 들킬까봐 꼼짝 않던 꽃들이
빗소리에 화들짝 불을 켜자
분홍불 꽃 속으로 들어간 발자국이 보인다
그 사내 빗방울로 걸어와서
나뭇가지에 쪼그려 앉은
그 여자 손목 붙들고 들어간
꼿 속으로 구름이 흐르고
수많은 봄이 지나가고
봄비 내리는 저녁이면
어느 알 수 없는 먼 공간에 불이 켜진다
꽃잎은 지고 있는데
빗줄기를 붙잡고 올라간 방
어느 해인가
적막이 더 환해
고요의 희미한 빛에 세 들어
당신과 내가 살다 간 방
봄빛 고운날 /최홍연
몽우리 벌린 하늘을
꽃나비가 몸을 비틀며 날고
부지런한 꿀벌 사랑의 보금자리를 틀어
눈웃음지며 꽃속에 파묻히는 날
그리움의 길이만큼 몹씨도 나를 그리워해 줄 참꽃의 속삭임
눈부신 햇살 찬란한 풀빛보다 진한 가슴 깊이 심어진 붉은 정
목련꽃 실눈뜨고 안절부절 하는 봄빛 고운 날에는
하늘을 닮은 사랑을 하고 싶다
봄이 씌다 /황인숙
노랑꽃들과 분홍꽃들과 갈색 덤불 위에
너의 연록빛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평화롭고 우아한 여린 초록이
내 눈에 씌였다.
보도 블록에도 버스표 판매소에도
마주오는 사람의 얼굴에도 지나가는 버스에도
건너편 유리벽에도 허공에도 하늘에도
너의 그림자가 어룽댄다.
세상이 너의 어룽 너머로 보인다.
그리고 이 소리는 무엇일까?
이것은 소리일까?
이 기분 좋은, 조용히 부풀었다가 잦아들곤 하는
이것은 너의 호흡
햇빛 속에 여려졌다 짙어지는
녹색의 현들.
오늘 나는
온종일 상냥하다.
너의 그림자 속에서.
휘늘어진 너의 가지들은
햇빛 속에서 주의 깊고 온순하게 살랑거린다.
내 마음은 그 살랑거림 속에서 살랑거린다.
너의 이파리들 속에 얼굴을 파묻고
오래도록 너를 껴안고 싶다.
너의 여림과 고즈넉함이
나의 몸에 배일 정도로 오래도록.
삶의 상냥함과 온순함을
꿈틀거리게 하는 봄나무.
봄의 수다 /古松 정종명
나른한 몸이 둥둥 하늘을 난다
칠흑 같았던 계절 저편 언덕 넘어
누근 한 미풍 나비처럼 희망을 춤추며 왔다
새벽이슬에 세안한 어여쁜 꽃띠
소녀처럼 해맑은 미소 띤 계절이다
온화한 엄니 손길 같은 바람이
마당 가득 똬리를 틀었다
숭얼숭얼 아가 손 같은 여린 새싹
뽀얀 솜털에 분 바르고 얼굴 내민다
몽글몽글 내미는 처녀 입술 같은
보드라운 꽃봉오리 뱅긋이 웃음 짓는다
뜰 안 아담한 화단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새 가족들의 상봉이 황홀하다
봄 식구들 나들이 길에 질펀한 수다가 향기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