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웅 시인 인터뷰/ 이령
□ 박지웅 시인
1969년 부산에서 출생. 추계예술대학교 졸업. 2004년 《시와 사상 》 신인상. 2005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시 《즐거운 제사 》 등단. 저서 『구름과 집 사이를 걸었다 』 2012년 문학동네.『너의 반은 꽃이다 』 2007년 문학동네. 『빈 손가락에 나비가 앉았다 』 2016년 문예중앙 . 2017년 제 19회 천상병시 문학상 수상. 2016년 제 11회 지리산문학상 수상.
■ 이령 편집장
경북 경주에서 출생. 2013년 시사사 신인문학상. 2015년 한중작가공동시집 『망각을 거부하며 』출간. 현재 웹진 『시인광장』 편집장, 동리목월기념사업회 이사, 경북 시사랑연합 부회장.
결핍을 문학적 동력으로 승화한 이 시대의 낭만시인 박지웅
■ 이 령: 선생님! 안녕하세요. 지난해 제11회 지리산문학상을 수상하셨지요. 저도 축하무대에서 제 졸시 낭송을 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선생님과의 좌담이 더욱 뜻 깊습니다.
지리산문학제 이후로 처음 뵙습니다.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는지요?
□ 박지웅: 안녕하세요. 이령 선생님. 반갑습니다. 그날 선생님의 시낭송을 듣고 마음이 한결 차분해졌던 기억이 납니다. 고맙습니다. 문학제가 있기 며칠 전에 졸시집 『빈 손가락에 나비가 앉았다』가 나왔는데, 발행일을 문학제가 있는 10월 1일로 맞춰 냈습니다. 이전에 냈던 시집들이 다 12월에 나와서 아쉬운 마음이 있었어요. 첫날이라는 상징성을 나름대로 가지면서 새로운 출발을 다짐하는 의미로 삼았어요. 그 뒤로 계절이 두 번 바뀌고 여름이 찾아왔네요. 지나간 날들을 돌아보니 참 ‘별일 없이 산다’는 생각이 듭니다. 낮에는 직장일하고 밤에는 집 앞 카페에서 시를 쓰고. 겨울에는 웅크리고 살고 봄에는 몸 펴고 살고 그렇게 지냈습니다. 지난 석 달 동안 반포구립도서관에서 문화큐레이션 ‘시인들’ 편을 맡아 진행하느라 조금 바빴습니다.
■ 이 령: ‘별일 없이 산다’라고 하셨는데, 지난해 수상에 이어 올봄에 제19회 천상병문학상을 받으셨어요. 개인적으로 그의 작품성도 훌륭하지만 삶과 글이 일치한 시인이 바로 천상병 시인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천상병문학상 수상자로서 소감이 궁금합니다.
□ 박지웅: 말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 그리고 행동으로 말하는 삶이 오늘날에는 지극히 드뭅니다. 현대인의 삶이 자연에서 빠른 속도로 멀어져 가는 현실을 생각할 때, 이러한 자기 위반 행위는 더 심각해질 거라고 생각합니다. 물질적 가치와 정신적 가치가 충돌할 때, 인간은 쉽게 표리부동하게 되는데, 그 지점에서 자기 말과 행동, 자기 글과 삶의 내용이 충돌하게 됩니다. 이러한 현실에서 자아는 끊임없이 내상을 입게 됩니다. 저는 詩와 사람(人)이 상충하지 않고 조화를 이룬 상태일 때에만 詩人이라고 믿습니다. 시는 늘 그 자리에 있습니다. 문제는 사람이지요. 詩에 붙었다가 떨어졌다가 변덕을 부리지요. 시를 앞서가지 않고 시에 뒤처지지도 않는 삶, 자기 욕망에 대한 유불리를 떠나 언제나 詩와 보폭을 맞추는 사람, 그 상태를 지속적으로 유지할 때, 시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천상병 시인을 뵌 적은 없지만, 그분이 시와 삶을 통해 보여준 바로는, 어쩌면 詩人의 원형에 가깝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문청시절 때부터 좋아한 시인의 이름자 뒤에 못난 이름이 붙었으니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 이 령: 詩와 사람(人)이 상충하지 않고 조화를 이룬 상태일 때에만 詩人이라고 믿는다는 말씀을 들으니까 시인의 말석에 있는 저로서는 얼굴이 화끈거립니다. 선생님께서 지리산 문학상을 수상하시고 수상 소감을 하실 때, 노모를 정성스럽게 무대로 모시면서 수상의 영광을 어머니께 돌리던 모습이 깊이 각인되었습니다. 개인적인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어린 시절의 박지웅이 궁금합니다. 특별히 박지웅 시인에게 어머니는 어떤 분이셨나요?
□ 박지웅: 초등학교를 입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어머니를 졸라서 의수를 맞추러 간 적이 있어요. 부산 초량동에 가니 진열장에 고무 의수와 의족 등을 내놓은 가게들이 쭉 있더군요. 그 일주일 뒤부터 저는 손가락 네 개가 달린 고무손을 왼손에 장착하고 다녔죠. 어머니에게는 제가 가장 아픈 손가락이지요. 제가 일고여덟 살쯤 되던 어느 날, 고무대야에 들어간 두 동생을 씻기던 어머니의 미소가 잊히지 않습니다. 동생들과 함께 대야에 들어가고 싶었지만, 그럴만한 공간이 없었죠. 그래서 대야 앞에 시무룩하게 앉아 목욕물에 왼손을 담그고 있었는데, 그때 목욕물의 따스함이 지금도 손등에 느껴집니다. 내 왼손을 만져주던 목욕물이 어머니 그 자체라고 생각합니다. 이후 어머니는 평생 종교인으로 살고 있습니다. 어머니 는 아들이 종교인이 되기를 바라셨고 지금도 가끔 권하지만 어릴 때만큼 압력을 넣지는 않습니다. 당신도 이젠 늙었고 제 길이 어디인지를 아시니까요. 졸시 <찬밥>에서 쓴 것처럼, “나를 낳은 뒤 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여인”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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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엄마라는 가엾은 풍습을 아네
나른 낳은 뒤 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여인이
오늘은 목단 이불을 귀까지 쓸어 올리고 잠든 겨울밤
다 퍼주고 이제 찬밥처럼 남은 백발 앞에 나 싸늘히 앉아 쓰다듬네
자식5 오는 길 그 눈 내린 밤길을 비로 쓸어놓았는데
당신 머리에 내린 눈은 녹지도 않고 쓸어내릴 수도 없네
때때로 누워 있는 것을 안으면 뒤늦게 노래 한 줄기가
귓속으로 흘러들어 내가 당신에게 깃들고 맺히던
깊고 아득한 열 달이 아주 멀지도 가깝지도 않게 아른거리네
제 살과 뼈를 밀어 올려 내게 물의 보금자리를 마련해주던 나날들
이제는 무릎이 닳아 방바닥도 세상도 온통 얼음판이 되었으나
나를 가졌을 때 당신은 네 개의 무릎을 가진 건강한 짐승이었네
몸속에 불을 놓아 심장으로 핏줄을 풀어 심장을 짓고
몸안에 기러기를 풀어내려 피붙이가 눈뜨게 해주었네
새끼와 입맛을 맞추느라 석 달을 입덧하고 부른 배를 풀었네
오래전 그날처럼 오늘 당신은 바다와 한 이불을 쓰고
가랑이 사리로 고래가 들어오는 꿈을 꾸는지
새끼낳던 스물여덟 그 겨울 새벽으로 돌아갔는지
당신은 하늘 높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찬밥 한 그릇만 남아있네
- 「찬밥」
|어린 시절의 박지웅 시인과 어머니|
■ 이 령: 어머니라는 이름은 모든 자식들에겐 따뜻함이고 위로의 원천일거에요. 선생님의 <찬밥>이라는 시에서 “나를 낳은 뒤 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여인”이라는 한 문장 앞에서 눈물이 났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2005년 문화일보 신춘문예에 시 ‘즐거운 제사’로 등단하셨지요? 등단 이후 선생님의 시적 변화가 궁금합니다. 특별한 선생님만의 페르소나가 있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 박지웅: 앞서 2004년에 ‘발목’이라는 시로 문예지 <시와 사상> 신인상을 받았고, 그해 겨울 신춘문예에 ‘즐거운 제사’로 등단했어요. 등단 초기에는 개인적 경험세계에서 출발한 작품이 많았어요. 이후에는 사회현상에 눈을 돌리고 시대를 읽으면서, 시세계가 개인에서 타인으로, 가족에서 사회로 이동했습니다. 내면까지는 잘 모르겠지만 외연이 확장된 건 분명해 보입니다. 은유와 상징으로 세계와 조응하고 대응하는 방식도 바뀐 듯합니다. 꽤 오래 전부터 죽은 자의 목소리를 통해 발언하고 싶었고, 여러 시편에서 시도했습니다. 등단 초기에 쓴 ‘종이호랑이’, ‘무거운 숟가락’, ‘바람의 가족사’에서 ‘안개의 식생활’ 연작, 또 최근작인 ‘귀신이 청탁한 시’ 같은 작품들이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목소리를 가진 작품입니다. ‘데스마스크’를 쓰고 더 많은 작품을 창작하고 싶습니다.
■ 이 령: 네. 선생님의 독자로서 저는 세계에서 -나 -존재,에서 세계에로 -나 -존재로 시적 형상화의 방향이 확장되었음을 느꼈습니다. 끊임없는 실패를 인정하는 시인이야말로 진정한 시인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시인이라고 인정하는 순간 시인이 아님을 증명하듯 끊임없이 시의 외연, 내연이 변화 확장되는 선생님의 시들이 더 기다려집니다.
등단 이후 문단 활동도 궁금합니다. 시인으로 구성된 국내 , 어쩌면 세계에서 유일한 시인 축구단인 ‘글발 ’ 회원으로 알고 있습니다.
□ 박지웅: 등단하면서 스스로 다짐하기를 문단 활동하지 말자는 것이었습니다. 문단이라는 곳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는 풋내기였고, 실제로 문단에 어떤 정치적 활동이 있는지 없는지도 몰랐지만, 그런 생각을 막연하게 했습니다. 오직 시로 보여주자고 다짐했고, 그 마음가짐은 지금도 유효합니다. 문단 출입을 최소화하고 그 시간에 시를 읽고 배우고 씁니다. ‘글발 ’에 대한 이야기는 등단 직후, 문학세계사에 들렀다가 당시 글발 회원으로 활동하던 김요안 평론가에게서 처음 들었습니다. 축구를 좋아하느냐고 묻더군요. 시인들이 모여 공을 차지만 회원 간에 시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솔깃하더군요. 그렇게 ‘글발 ’에 들어가 지금까지 한 달에 한두 번씩 공을 찹니다.
■ 이 령: 네에. 하하하 “시인들이 모여 공을 차지만 회원 간에 시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이 말속에는 오로지 시만이 중심인 시인들의 모임이 과연 글발이구나 하는 생각이 퍼뜩 듭니다.
선생님의 일상이 궁금합니다.
□ 박지웅: 낮에는 출판사에서 편집과 기획을 하고 저녁에는 주로 카페에서 책을 읽고 시를 씁니다. 공을 차지 않는 주말에는 아침 8 시부터 늦은 밤까지 카페에 있어요. 오후에 커피를 리필하지 않고 한 잔 더 삽니다. 보통 카페에 자리가 넉넉하지만 그래도 카페 주인한테 미안한 마음이 들어요. 주중 저녁에 시 창작 교실을 하고, 야구시즌에는 롯데자이언츠를 응원하고 게임을 못 본 날에는 하이라이트라도 빠뜨리지 않고 챙겨 봐요. 연희로 8길 ‘캣대디 ’이기도 합니다.
|연희로 8길 캣대디 박지웅 시인|
■ 이 령: 네에. 카페 주인에게 미안해서 리필을 사양하고 한 잔을 더 사는 시인, 연희로 8길 ‘캣대디 ’를 자청하는 시인,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나니 작품에서 느꼈던 시인 박지웅보다 일상의 박지웅이 더 따뜻하고 매력적인 분이구나 싶습니다.
개인적으로 선생님의 시 ‘망치와 나비’를 좋아합니다. 언젠가 제가 문학전문카페에 이 작품에 대한 시 감상을 올리면서 ‘청동’이 ‘나비’로 변주되는 리드미컬하면서도 깊이 있는 사유에 무릎을 쳤던 기억이 있습니다 . 비단 이 작품 외에도 선생님의 시적 형상의 발아점과 퇴고의 과정이 궁금합니다 .
물 한 방울 없이 새로운 종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탕, 탕 망치로 나비를 만든다 청동을 때려 그 안에 나비를 불러내는 것이다
청동은 꿈틀거리며 더 깊이 청동 속으로 파고들지만 아랑곳하지 않는다 망치는 다만 두드려 깨울 뿐이다 수없는 뼈들이 몸속에서 수없이 엎치락뒤치락한 뒤에야 하나의 생은 완전히 소멸하는 것
청동을 붙들고 있던 청동의 손아귀를 두드려 편다 청동이 되기까지 걸어온 모든 발자국과 청동이 딛고 있는 땅을 무너뜨린다
그러자면 먼저 그 몸속을 훤히 읽을 줄 알아야 한다 단단한 저편에 묻힌 심장이 따뜻해질 때까지, 금속의 몸을 벗고 더없이 가벼워져 꽃에 앉을 수 있을 때까지 청동의 뼈 마디마디를 곱게 으깨고 들어가야 한다
탕, 탕
짐승처럼 출렁이던 무거운 소리까지 모두 불러내면 사지를 비틀던 차가운 육체에 서서히 온기가 돌고 청동이 떠받치고 있던 청동의 얼굴도 잠잠하게 가라앉는다
그렇게 오랫동안 두드리면 청동은 가볍게 펼쳐지고 그 깊숙한 데서 바람 소리가 나기 시작한다 금속 안에 퍼지던 맥박이 마침내 심장을 깨우는 것이다
비로소 아 비로소 한 줌의 청동도 남아 있지 않은 곳에서 한 올 한 올 핏줄이 새로 몸을 짜는 것이다 그 푸른 청동의 무덤 위에 나비 하나 유연하게 내려앉는 것이다
- 「망치와 나비」
□ 박지웅: 하나는 모든 것과 연결되어 인드라망의 그물은 생명체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언어들 역시 하나의 공동체로 수많은 기표와 기의의 고리들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자연 언어와 시적 언어의 다양한 층위, 언어와 사물, 언어와 현상 사이에 교환되는 분량이 상당합니다. 인간의 숨결을 한 번이라도 받은 낱말과 낱말 사이에는 우리가 가보지 못한 수많은 섬이 있고 그 섬과 섬을 복합적으로 연결하는 다리들이 있습니다. 유기적인 통로도 있고 내밀한 탐색을 통해 또 다른 세계로 이어진 길도 있습니다. 실험정신과 창조성을 통해 언어의 신비한 사원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시적 발아점이 여기 어디쯤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고착화된 언어가 다른 언어와 관계함으로써 열리는 경계 위에 홀연히 시적 발화가 일어납니다. ‘망치와 나비’ 같은 시는, 청동이라는 금속에 생명성을 부여할 때 필요한 소재가 무엇인지, 또 시적화자가 어떤 위치에서 진입하고 어디까지 관계를 맺을 것인지 등 다각도로 살피면서 썼습니다 . 보통 시를 쓰기 전에 시적 발아점을 토대로 이미지 설계도를 마음속으로 계속 스케치합니다. 이미지 트레이닝이지요. 설계도가 나왔다고 해도 그것이 그대로 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아시다시피 변수는 늘 있지요. 창작과 퇴고가 동시에 이루어질 때가 많습니다. 퇴고를 할 때는 소리 내어 읽습니다. 보석세공사가 원석을 다듬듯이 , 혀로 시문장과 이미지의 결을 다듬습니다 . 시 전체에 흐르는 큰 의식의 흐름과 문장 속의 라임을 알뜰하게 챙기면서 연과 행갈이를 마음에 들 때까지 매만집니다. 그러면서 어울리지 않거나 과욕을 부린 곳이 없는지 유의해 살핍니다. 쓴 시를 며칠 뒤에 제 3 자의 입장에서 다시 한 번 읽어 봅니다. 퇴고 과정에 딱히 남다르다 할 부분은 없습니다.
■ 이 령: 네. ‘한 편의 시를 쓰는 일은 나를 뜯어고치기보다 어렵다’ 라고 했던 고형렬 시인의 시구가 오버랩 됩니다. 시를 쓰는 시인의 천착의 힘이 좋은 시를 쓰는 길이라는 말씀으로 이해됩니다.
박지웅 시인은 결핍을 문학적 동력으로 승화한 이 시대의 전투적 낭만시인이라는 평이 있습니다. 이에 대한 시인 자신의 생각과 변을 여쭙습니다.
□ 박지웅: 아날로그 시대에서 우리는 종이에 손으로 글씨를 썼습니다. 사람을 만나기 위해 우리는 걸어가서 대문을 두드리거나 다이얼을 돌렸습니다. 육필과 육성의 시대였고, 有線 의 언어로 소통했습니다. 말과 글이 땅에 뿌리를 딛고 있던 시절이었습니다. 디지털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말과 글은 무선과 암호화된 컴퓨터언어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아날로그 시대 때에 우리 몸에서 발화된 언어들은 걸어 다녔다면 지금은 말과 글이 공중을 날아다닙니다. 마치 육체 없는 유령처럼 말입니다. 대문의 편지통이 포털사이트의 메일함으로 바뀌는 동안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에 대해 생각합니다. 기술과 과학의 발전으로 디지털시대에 우리는 가벼워지고 빨라졌고 화려해지고 또 관계망은 넓어졌지만, 정작 우리 내면은 공허하고 바빠지고 천박해지고 또 관계는 느슨해졌습니다. 과학처럼 언어의 사용과 기술은 다양해지고 발전했지만 그 안에 담긴 내용은 빈약하고 푸석거립니다. 알갱이 없는 말들이 악성 바이러스처럼 우리 사회에 유포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답장이 없는 세계에서 살고 있습니다. 상실과 결핍은 외부에서 온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자처한 것이고, 그 배후에는 삶의 가치를 혼란 속에 방치한 무책임한 ‘나 ’들에 있다고 봅니다 . 자기 내부의 균열은 곧 타인과의 연대감을 무력하게 하고 곧 자기 파괴로 이어집니다. 이것에 저항하는 모습을 평자가 ‘전투적 낭만시인 ’으로 함축해 표현한 것 같습니다.
■ 이 령: 네, 결국 시인은 자기 내부의 균열에 대해 깊이 반성해야 겠어요. 선생님의 고독한 저항정신이 훅! 전해 옵니다.
선생님의 근작시집 『빈 손가락에 나비가 앉았다』(문예중앙 , 2016)에는 간극과 틈, 그 사이에서 관찰자로서의 낭만적 아이러니와 비애의 정서를 자유롭고 순수하게 그려냈다고 생각합니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평자들의 이러한 시안은 결코 그냥 나온 것이 아닐 텐데요. 시인 본인은 이러한 의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합니다.
□ 박지웅: 두 번째 시집을 낸 뒤, 제 기억에 남는 말은 “첫 시집을 가볍게 뛰어넘었다”는 평이었습니다. 『빈 손가락에 나비가 앉았다』를 준비하면서 저는 한 가지 생각만 했습니다. 이전 시집인 ‘『구름과 집 사이를 걸었다 』를 뛰어넘어야 한다. ’ 그 생각뿐이었습니다. 다음 시집을 준비하는 지금의 마음가짐도 똑같습니다. 앞도 뒤도 옆도 볼 까닭이 어디 있겠습니까. 지금 우리나라에만 해도 당연히 저보다 높은 시적 성취를 이룬 시인들이 많습니다. 그분들이 이룬 문학적 경지를 감히 넘볼 수는 없으니 저는 오직 제 자신을 뛰어넘기를 바라고 애쓸 뿐입니다. 그 한 걸음 한 걸음이 모여 나만의 길이 될 거라고 믿습니다.
■ 이 령: 네, '저는 오직 제 자신을 뛰어넘기를 바라고 애쓸 뿐입니다' 가장 겸손하지만 가장 무서운 말씀이에요. 고맙습니다.
항간에는 ‘시인들만이 시의 독자’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찌 보면 문단의 폐쇄성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일 수도 있으나 또 다른 일면으로 예술적 시를 지향하는 문인들에게는 당연한 논리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이에 대한 선생님의 생각이 궁금합니다.
□ 박지웅: 에밀리 디킨슨은 평생 자기 방에서 나오지 않았습니다. 자기만의 공간에서 시만 쓰다가 죽었습니다. 그녀가 쓴 1800 여 편은 사후에야 발견되어 독자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시가 도로나 하천, 항만과 같은 사회 공공재로써 인간과 인간을 비롯한 뭇 생명을 잇는 가교가 되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그것을 강요할 수는 없겠지요. 시의 사회적 역할에 선행되어야 할 것은 시와 시인의 소통과 교류입니다. 그것이 먼저입니다. 시를 외면하는 것은 독자들이 아니라 시를 쓰고 있는 우리가 아닐까 생각합니다.시는 독자를 향해 열려 있어야 하지만, 시인은 높고 외롭고 쓸쓸해야 합니다. 그걸 제대로 하지 못해서 시와 문단이 ‘그들만의 리그 ’로 전락하고 있습니다. 크게 바라보고 멀리 내다보아야 합니다. 독자란 시인 자신의 활동으로 또 문단의 문학 행사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진짜 시인이 되고 진짜 문학을 하면 진짜 독자가 생깁니다. 문제는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 이 령: 네. “시를 외면하는 것은 독자가 아니라 시를 쓰는 시인자신이다” 라는 말이 깊이 각인됩니다. 시와 소통하지 않고 문학 외적인 권위에 편입해서 ‘그들만의 리그 ’에 빠진 많은 듣보잡 시인아닌 시인들에게 일갈이자 깊이 새겨야할 말씀을 하셨습니다.
‘시인이 되겠다’ 결심한 계기가 있으신지요? 아니면 누구에게나 선택적 출생이 주어지지 않듯 자연스럽게 시를 쓰게 되신 건지요?
□ 박지웅: 이상한 잠버릇이 있습니다. 바로 누워 자도 아침에 일어나면 팔을 세워 얼굴을 받치고 있습니다. 와불처럼요 전생에 중이었나? 내 빈 손가락들은, 전생에 소지공양이라도 한 건가? 이런 생각을 하곤 합니다. 육체적 결손은 반드시 존재의 원형성을 파괴하게 마련인데, 이를 회복하려는 시도들 가운데 문학과 시가 자리 잡은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 길 말고는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 이게 다 ‘빈 손가락’ 때문에 일어난 일입니다. 하하.
■ 이 령: 죄송한 말씀이지만 선생님의 그 ‘빈 손가락 ’이 갑자기 고맙습니다. 선생님의 시를 통해 감성적, 이성적 감개를 공유하는 독자로서요.
시인으로서 앞으로 계획이나 바람에 대해 말씀해주세요.
|연희로 8길 캣대디 박지웅 시인|
□ 박지웅: 서울생활을 하면서 늘 시골살이를 꿈꿉니다. 적게 벌고 적게 쓰면서 느리게 살고 싶습니다. 시인이 되는 것보다 시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곳에서 나를 존재하게 한 나의 모든 어머니들에게 정성껏 답장을 쓰고 싶습니다.
■ 이 령: 끝으로 시인들과 공유하고 싶으신 말씀이 있으시다면 부탁드립니다.
□ 박지웅: 높고 외롭고 쓸쓸해집시다. 그곳에서 봉화를 올립시다. 좋은 시를 쓴 날에 불을 피웁시다. 눈 내리는 날에도 너무 외로운 날에도 불을 높이 올립시다 . 그 불을 받아 나의 쓸쓸함도 지피겠습니다.
■ 이 령: 높고 외롭고 쓸쓸하겠습니다. 선생님 같은 시인이 우리문단에 계시기에 마냥 외롭지만은 않을 거라는 희망을 가져봅니다. 긴 시간 동안 귀한 대담 고맙습니다.
□ 박지웅: 고맙습니다.
첫댓글 좋은 내용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