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산 문화답사 후기
늦은 밤, 만년초등학교 <장미축제 별밤 가족 나들이>행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작은 아이가 그런다.
"엄마, 구름에 때 낀 거 같아. 새까매!"
밤이라서 어린아이 눈에 그렇게 보였나 보다 하면서 나도 한 번 밤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혹시 내일 비 오려나? 피곤한데 답사 괜히 신청했어. 에이!'
화창했다.
"얘들아! 빨리빨리! 40분엔 집에서 나가야 해.
엄마, 돈 다 냈는데 지각해서 못 가면 좋겠어?"
유성도서관 앞이다. 여유롭게 온 양 대충 인사를 하고, 명찰을 걸고는
자리를 잡고 앉았다.
드디어 엑스포 관광버스 출발!!!
정말 감사했다.
꿀백설기......
'요긴하다'라는 말은 아침식사를 거른 우리 가족의 이 순간을 위해
정녕 태어났으리라!
맛나게 쩝쩝거리고 나니 그제서야 버스 창문 밖의 스치는 풍경들에 눈이 갔다.
간단한 자기 소개와 함께 진해성선생님께서는 <내 귀는 짝짝이>라는 책도
읽어 주셨다.
그래서인지 금방 서산에 도착했다.
계곡을 따라 적당한 분량의 나무계단과 돌계단을 오르고 나니 오늘의 첫 목적지인
서산마애삼존불상 앞에 다다랐다. 김경혜선배님의 친절한 설명을 들으니 이 곳은
백제시대때 중국으로 통하는 교통로의 중심지인 태안반도에서 부여로 가는 길목에
위치하는 의미를 가진다고 한다. 총 세 분의 불상......막연하게 거대한 규모를
생각했었는데 좌우의 미륵반가사유상(1.66m)과 제화갈라보살입상(1.7m)은 보통 어른
체격 정도만 했고 중앙의 석가여래입상(2.8m)은 그보다는 훨씬 커 보였다. 자연의
암벽에 조각된 반원형 눈썹 특유의 후덕하고 자비로운 '백제의 미소'를 여실히 감상
할 수 있었다.
햇볕은 풍부하게, 그리고 비바람은 정면으로 들이치지 않은 곳에 새겨졌다하니
정말이지 선인들의 지혜에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서산마애삼존불은 빛의 방향에 따라 아침에는 밝고 평화로운 미소를, 저녁에는 은은하고
자비로운 미소를 볼 수 있다 하여 실없는 질문을 아이들에게 해 보았다.
역시나......두 아이가 합세하여 엄마는 아침에는 사납고, 저녁에는 무섭단다. 쳇!
끝없어 보이는 서산삼화목장을 지나 백제 의자왕 14년(서기654)에 창건하였다고 전해지는
개심사로 향했다.
사찰 입구 나물 파는 할머니들이 제일 먼저 눈에 띈다.
애기똥풀 줄기로 노랗게 손톱을 물들여 가며 개심사로 가는 길은 아이도 어른도 모두
재미있어 했다. 일행보다 뒤처지는 듯 하여 서둘러 오르막길을 올랐다. 다행스럽게도
호흡이 심하게 거칠어지기 전에 앞선 일행과 전각들이 보였다.
"와아!"
한 눈에 다 들어오는 아담하고 자그마한 절이었다.
휘어진 나무의 자태 그대로를 네 기둥으로 쓴 범종각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이층 구조로
되어 범종 바로 아랫쪽 바닥에 둥글게 구멍을 뚫어 놓은 점 또한 독특했다.
한 채인지 두 채인지 모르게 겹쳐 놓은 종무소 전각(나중에 찾아 보니 건축학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는 '심검당'이라 한다. 조선 성종 15년(1484)에 다시 지은 것으로 추정한단다.)
또한 힘있게, 굵게 휘어진 자연목이 세월을 바치고 있었다.
그 툇마루에 앉아 보았다. 건너편 요사채 지붕위로 햇볕과 바람이 가꾸어 주는 대로
자라나고 있는 꽃과 풀들이 보였다. 그 낭만과 정취가 너무 좋아 안달이 날 정도였다.
고사찰의 푸근함과 고요함이 절 이름처럼 진정 마음을 열어 속세의 시름을 잠시 잊게
해 주는 듯 했다.
아이들은 큰 아이, 작은 아이 할 것 없이 절 앞 작은 연못에 관심을 보였다.
올챙이였다.
통통하고 까만 녀석들......힘찬 몸짓의 강한 생명력이 싱그러웠다.
사찰 기왓장에 소원성취를 새기듯 올챙이 본다고 연못에 모여 든 이 아이들의 건강을
하얗게 마음속에 새기며 개심사를 내려왔다.
버스로 이동하여 우렁쌈밥으로 점심을 맛있게 먹고는 바로 해미읍성으로 걸어갔다.
입구에 다다르니 축제가 있는 듯 풍악소리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소풍 온 듯한
사람들이 꽤 있었다.
개인적으로 여러 번 기회가 있었지만 오지 못하고 이제서야 <사단법인 어린이도서연구회
대전 동화읽는어른 모임>에서 오게 될 줄이야! 그것도 작년에 회원가입을 하여 지금까지도
신입의 백치미(?)가 줄줄 흐르는 상태로 말이다. 잠시 '인연'이라는 것에 대한 사색에
잠겨 보았다.
해미읍성은 태종18년(1491)부터 세종2년(1420)에 축조된 평지에 쌓은 석성으로
(성곽길이1800m, 성곽높이5m, 면적20만㎡) 서해안 방어의 임무를 담당하던 곳이었으며
천주교 박해 때는 교인들을 무참히 처형한 아픔의 현장이기도 한 곳이다.
시간약속을 정해 놓고 자유롭게 돌아보기로 했다.
미처 가져 오지 못한 얼음물을 챙기러 주차장 버스로 먼저 달려 갔다가 옆문(동문)을
이용하여 성곽길에 오르려 했다. 하지만 문은 굳건하게 닫혀 있었다. 주변을 청소하고
계신 할아버지께 여쭈니 정문(진남문)으로 돌아가야만 들어갈 수 있단다.
어허! 이런~ 덥기도 하여 지름길로 빨리 가려 했던 얄팍한 생각을 성문은 초장부터
침묵으로 후려치시는구나! 숭고한 역사 앞에 먼지같은 내가 무릎을 꿇는 순간이었다.
죄명은 '띄엄띄엄 넘어가려 했던 얼렁뚱땅 죄'.
되돌아 가느라 더 많은 걸음으로 역사 앞에 댓가를 치르고 정석대로 정문을 통과하여
성벽길에 올랐다.
"와우!"
그다지 높아 보이지 않았는데 성벽길은 지상에서와는 또 다른 품으로 된통 혼난 나를
품어 주었다. 부드러운 산들바람이 너댓살 꼬마아이들 키만한 풀들을 나부껴 주는 가운데
어른이건 아이이건 동등하게 한사람씩만 지나갈 수 있는 면면한 역사의 길을
열어 주고 있었다.
일부러 성곽 바깥쪽 낭떠러지에 가깝게 서서 살살 걸어 보았다.
단박에 무서웠다.
그래도 조금 더 걸어 보았다.
많이 무서웠다.
뭔가 많이 잘못하며 살아왔기에 겁이 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나도 모르게 들었다.
큰숨 한번 쉬어 보고는 휘이~ 둘러 보았다. 시선을 먼 곳에 두고도 걸어 보았다.
잠깐 멈추어도 보고......
낮은 산자락들과 옹기종기 마을도 보아 가며......
뒷사람도 먼저 보내 가며......
불쑥 솟아 오른 엉겅퀴도 쓰다듬어 가며......
...... ......
바쁠 것 하나없이 한 줄 기차로 천천히, 천천히 거닐었다.
적응이 되었는지 조금은 발걸음이 편안해졌다.
아슬아슬 외줄타기를 하듯이 나는, 삶을 풍요롭게 만들지 못하고 무언가 세상적인
한 가지에만 집착한 채로 커트라인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노심초사 살아가고만 있는
것은 아닐까? 말없는 성은 순교의 내공으로 이렇게 또 한 번 참회의 길로써 내 감성을
어루만져 주었다.
모두 한갓진 잔디밭으로 모였다.
준비해 오신 수박을 달게 먹은 뒤, 오월 하늘 아래 푸르고 너른 잔디밭 위에서의
비눗방울 놀이.
정말이지 '오월은 푸르구나~ 우리들은 자란다~' 뮤직배경 그 자체였다.
중학생 규빈이도 함께 즐기는 눈치같아 더 좋아 보였다. 최정혜회장님은 시간을 허투루
보내지 않고 어느샌가 멋진 화관을 하나 뚝딱 엮어 놓으셨다. 돌아가며 써 보는 여자아이들의
모습을 화보의 한 장면으로 승화(?)시켜 주셨다.
멀게는 그 옛날 순교자들의 고통과 희생덕분으로, 가까이로는 허은영문화부장님을 비롯한
여러 분들의 준비와 노력덕분으로 우리35명은, 묶어 놓고 고문을 가했다는 6백여년 된
회화나무와 옥사 앞 이 공간에서 자유와 여유를 만끽할 수 있었으리라!
모든 일정을 무사히 마쳤다.
가뿐했다.
읽기 편한 잔잔한 에세이 한 편을 읽은 느낌이랄까?
이런저런 진솔한 느낌으로 충만할 수 있었던 오늘같은 날들을
살아가면서 가끔씩 쌓아 올릴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과거와 미래를 잇는
살아 있음이요, 나만의 역사이야기요, 내 마음의 답사가 아닐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