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미양요 대나무 돛단배
위의 사진은 신미양요가 있던 1871년 물치도, 지금 인천 앞바다 작약도 연안에 정박했었던 미국 아시아 함대 기함 콜로라도에 조선 관리들을 태우고 온 돛단배다. 배경의 멀리 보이는 곳이 강화해협으로 들어가는 수역이 아닌가 한다.
아세아 함대 기함 콜로라도-1856년 건조
사진 촬영을 한 곳은 조선이 아닌 다른 곳으로 보인다.
위의 돛단배가 태우고 온 조선의 관리들. 아무 협상도 못하겠으니 빨리 물러가라는 조정의 방침을 통보하러 왔을 것이다. 콜로라도를 타고 온 미국 로우 공사는 계급이 낮은 이들 조선 관리들과 면담을 거절했다. 그는 이번 기회를 이용해서 조선과 수교의 기회를 만들어 보라는 본국 정부의 훈령을 가지고 왔었으나 조선의 대원군은 완강하게 만남 자체를 거절해서 미 해병대의 강화도 침공을 불렀다.
1871년 조선을 침공한 미국 함대는 1866년, 천주교 신부들 학살의 책임을 물으러 강화도를 침공했던 프랑스 함대와는 달리 중요한 역사 기록자를 대동하고 왔다.
당시 최신 기술이었던 사진을 촬영할 수 있는 사진사였다.
지금과 달리 그 무렵의 사진기들은 무등산수박만 해서 삼각대 위에 얹어놓고 촬영하며 유리에 감광제를 바른 불편한 필름을 쓰던 시절이라 사진기 자체가 직업 사진사 외에는 소지하기도 힘든 시절이었다.
1866년 대동강에 들어왔다가 피격당한 미 상선 제너럴 셔먼 호의 책임을 묻기 위해서 조선에 온 미국 함대는 이미 미국 남북전쟁 때 역사 기록의 기능으로서 그 가치를 주목받기 시작한 사진사를 대동하고 왔기에 신미양요에 관련된 상당한 사진들을 역사에 남겼었다.
19세기 말이나 20세기 초에 한국에서 촬영했던 많은 사진이 1882년 한미 수호통상조약 이후 조선에 입국했던 서양의 외교관, 종교인 그리고 군인과 상인들이 촬영한 사진들이다.
이 사진이 촬영한 시기가 신미양요가 있었던 1871년으로서 아마 한국을 촬영한 최초의 사진 중 한 장일지도 모른다.
위의 관리들을 태우고 온 돛단배 사진도 그때 촬영했던 사진 중 하나로 언뜻 보면 평범한 사진일 수도 있다. 그러나 식물생태학이나 향토사학적으로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사진을 잘 보면 한 가지 특징이 발견된다. 울릉도 주민들이나 관광객들이 특히 관심을 가질 만한 이색적인 특징이다.
돛대가 대나무다.
대나무라도 보통의 대나무가 아니라 엄청나게 굵은 왕대나무다.
나는 어린 시절 바닷가에 살아서 이들 돛단배에 대해서 조금 아는 바가 있다.
이 정도 크기의 배라면 상당한 크기로써 당시 한반도 육지에서 자라는 어떤 대나무로도 센 바람을 받을 이 배의 돛 베를 지탱해주기가 불가능했다.
신미양요 무렵 1860-1870년대, 조선에서 이런 크기의 왕대나무 돛대를 가져올 곳은 딱 한 곳뿐이다.
그때 국가에서 500년 가까이 공식적으로 사람들이 들어가 살지 못하도록 금지했었던 동해의 고도[孤島] 울릉도다.
지금 울릉도의 특산물은 명이나물이나 오징어, 또는 섬바디라는 목초들로 알려지고 있으나 역사에 나타나는 울릉도의 특산품들은 이 정도가 아니라 여러 가지가 있었다.
앞에서 말한 왕대나무가 있었고 귀한 향나무가 있었고 산삼이 있었고 그리고 거대한 괴목[느티나무]들도 있었고 물개 가죽도 있었다. 또 그 특산에 -지금은 경제적으로 의미가 없을- 사철[沙鐵]이 있었다. 사금[沙金]과 같이 철가루를 품은 모래를 말한다. 세종 때 울릉도에서 가져온 특산물의 하나로 등장한다.
-과거 철은 광산에서 캐낸 광석에서 얻은 것이 아니라 사금[沙金]과 같이 모래를 걸러내서 얻는 방식으로 얻어졌다. 세종 당시 조선의 철의 산지는 34개소인데 이 가운데 사철로 철을 생산하는 곳이 21개소였다고 한다.-
다시 말하자면 이 돛단배는 울릉도에서 건조되었고 조선의 관리들을 태우고 온 것을 보면 선주가 경기도 사람인 듯하다. 경기도 사람이 어떻게 울릉도까지 가서 선박을 건조했는지는 다음 편에서 설명하고자 한다.
이 돛대로 쓰인 대나무는 밑둥 직경이 20센티가 넘고 키가 20미터가 넘는 맹종죽[孟宗竹]이라는 대나무다.[그러나 이 글에서는 편의상 왕대나무로 통칭하기로 한다.]
맹종죽에는 중국에서 전래된 효자 전설이 얽혀 있으나 한반도에서는 나지가 않았었고 날씨가 따뜻한 일본 규슈와 중국 남쪽에 널리 서식하고 있다.
1890년대에 촬영한 한강의 돛단배.
돛대가 왕대나무가 아님에 유의
나는 맹종죽이 한국 육지에는 안 난다고 믿고 있었으나 20여 년 전에 거제도에 가보니 맹종죽 죽림[孟宗竹 竹林]이 있었다.
기후 변화로 한국에도 저 대나무가 자라는구나 했는데 알고 보니 1926년 거제시 하청면의 신용우 씨가 일본 방문 중에 이 맹종죽 세 뿌리를 구해서 이식한 것이 오늘날 저렇게 큰 숲이 되었다는 것이다. 지금 이곳은 관광객들이 몰려오는 테마파크로 지정되어 인기몰이를 하는 중이다.
맹종죽은 한국에서 자라지 않았지만 일본산 맹종죽이 한국에 꾸준히 수입되던 때가 있었다. 서해에서 많이 조업하는 안강망[鮟鱇網]어선의 그물 부구[浮具]로서 이 일본산 대나무 묶음을 사용했었다. 서해안의 어부들에게는 이 맹종죽이 낯설지 않은 존재였다.[지금은 사용하고 있지 않다.]
안강망 어선의 신주머니 모양 그물 윗부분을 띄우는 맹종죽 다발
이런 내력의 왕대나무는 우리나라에서 다른 곳에서는 자라지 않고 울릉도에서만 서식했었으며 역사서에 오래전부터 대죽[大竹]이라는 호칭으로 기록들을 남기고 있다.
이 울릉도산 왕대나무는 조선 초부터 역사에 자주 나타나다가 19세기 말쯤부터 기후변화나 남벌로서 멸종되었는지 더이상 보이지가 않는다.
그러나 울릉도 특산이었으나 멸종한 왕대나무는 엉뚱하게 국제적으로 중요한 다른 곳에 그 이미지를 남기고 있다.
일본인들이 시마네 현[島根縣]에 강도 편입시키고 자기 영토라고 주장하는 독도의 일본명이 다케시마, 즉 죽도[竹島]다.
울릉도에 몰래 들락거리던 일본인들도 -대마도와 시마네, 돗토리 출신들이 많았는데- 이들도 울릉도의 왕대나무에 주목했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인들은 울릉도를 대나무가 많다는 뜻에서 다케시마 즉, 죽도[竹島]로 불렀고 시마네 현과 울릉도 사이에 있는 독도를 마쓰시마[松島]로 불렀다.
외교 문서에 보이는 바대로 판단한다면 일본인들이 울릉도를 죽도[竹島], 독도를 송도[松島]라고 하는 명명 관행이 굳어진 시기는 1650년대부터라고 볼 수가 있다.
이 사실은 숙종 20년 1694년 영의정 남구만[南九萬]이 울릉도 명칭에 혼란스러워하는 대마도주에 보내는 답신에서 알 수가 있다.
"-비록 그러나 우리나라 백성이 어채(漁採)하던 땅은 본시 울릉도로서, 대나무가 생산되기 때문에 더러 죽도(竹島)라고도 하였는데, 이는 곧 하나의 섬을 두 가지 이름으로 부른 것입니다. 하나의 섬을 두 가지 이름으로 부른 상황은 단지 우리나라 서적에만 기록된 것이 아니라 귀주(貴州) 사람들도 또한 모두 알고 있는 것입니다---"
1849년, 프랑스의 선박인 리앙쿠르 호가 독도를 발견하고 명명했던 리앙쿠르 암초[Liancourt Rocks]가 국제적으로 알려지자 일본은 -도쿠카와 막부 말 ~ 메이지 초기인- 1860년대에 좀 이해하기 힘든 짓을 했다.
자기들이 호칭하는 남의 나라 섬의 이름을 바꾼 것이다. 그때까지 독도에 자기들이 붙여 놨던 마쓰시마[松島]라는 섬의 이름을 울릉도에 옮겨다 붙이고 마쓰시마[松島]라고 부르던 독도 이름은 리앙고 島[-량고도]로 개명하였다.
다케시마[竹島]라는 울릉도 명칭은 일본의 역사적 허공에 50년 가까이 떠 있다가 1905년 일본이 조선의 독도를 도둑질하듯 빼앗아 시마네현에 편입시킬 때 량고도라는 이름을 버리고 이 이름을 다시 꺼내 독도에 가져다 붙이고 지금까지 그대로 부르고 있다. 독도에는 대나무가 전혀 나지 않는다.
* 참고로 말하지만 그때까지 조선도 섬 명칭의 혼란을 겪어오다가 울릉도[무릉도, 우릉도, 삼봉도, 울도]와 우산도 또는 자산도[독도]로 통일을 해가고 있었다. 우산도는 후에 석도[石島]로 이름을 바꿨다가 독도[獨島]가 되었다. *
한국의 독도.
일본인이 마쓰시마로 부르다가 량고도로 개명했다가 강취(强取)해가며 왕대나무가 많이 나던 울릉도에 붙였던 다케시마라는 이름을 옮겨다 여기에 걸었다.
왕대나무에 대해서 관심이 있어 10여 년 전에 한 번, 그리고 이번 글을 쓰기 전에 한번, 울릉도의 알 만한 기관에 전화를 해보았으나 이 왕대나무에 대해서 아는 사람이 없었다.
울릉도 왕대나무는 멸종되고 그 존재를 남길 유산이나 기록이 울릉도에 찾아볼 수가 없다는 이야기다. 그러니까 1871년에 촬영한 위의 사진은 울릉도에 자생하던 왕대나무의 유일한 모습을 담은 사진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왕대나무 - 맹종죽의 숲
배경 설명을 충분히 한 것 같다.
지금부터 울릉도 왕대나무의 자취를 찾아 먼 역사로 올라가 보자.
울릉도는 우리 역사의 삼국시대 기록인 삼국사기에 우산국[于山國]이라는 이름으로 최초로 나타난다.
신라시대 서기 512년에 이사부가 토벌해서 복속시켰다는 기록이었다.
그 뒤 신라가 망하고 고려시대로 접어들 때까지 우산국, 즉 울릉도는 육지의 신라와 고려에 공물을 바치고 순종의 태도를 견지했다.
그러나 평화롭던 이 우산국, 즉 울릉도에 대참변이 일어났다.
1018년 고려 현종 9년, 여진족 해적이 쳐들어와서 우산국을 완전히 결단을 내버린 것이다. 이 여진족 해적들은 사람을 죽이고 납치하거나 농기구를 포함한 여러 재산까지 모두 강탈해 가버려 살 수가 없게 되자 생존자들 대부분이 고려로 나와 목숨을 구했다.
여진족 해적은 아주 드문 케이스로 나중에 나타난 왜구보다 더 잔인했었다.
이들은 왜구의 나라 일본 본토를 두 번이나 공격했었다.
개인적인 견해지만 이 해적들은 흑룡강[黑龍江], 즉 아무르 강에서 어로생활을 하던 흑수말갈족들이 힘을 길러 바다로 나온 것이 아닌가 한다.
또 주제넘은 소리지만 이들이 신라 역사에 나오는 흉노족의 신라 왕족 조상설이나 동유럽 트라키아 전래 가능성의 경주 계림로 발굴 황금검과도 무슨 연관이 있을 수가 있다.[트라키아는 현재 루마니아 불가리아 지역이다.]
경주 계림로 출토 황금 칼
특히 석탈해가 동북쪽에서 왔다든가, 흑룡강 어구와 신라와의 중간 농경이 가능했던 함흥평야 경계 두 곳 -황초령과 마운령- 에 진흥왕 순수비가 서 있다든가 하는 것은 즉, 어로 민족이었던 흑수말갈 중에 일부가 농경민족으로 변화해가며 해안을 따라 계속 농사짓는 곳을 따라 남진하면서 신라의 역사에 나타나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도 가능케 한다.
흉노족이 신라에 영향을 끼치는 동안 왕은 마립간[麻立干]으로 불렸다.
눌지, 자비, 소지 등 마립간 칭호 6대의 왕들이 있다.
중국에서는 흑수말갈족을 혁철족이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국내에 혁철족의 민족 전래 시집이 번역되어 출판되었는데 여기서 우두머리의 이름을 머르건으로 호칭된다는 사실이 있었다.
신라에 유라사아 내륙지방에서 활동했던 스키타이족의 문화가 진하게 보인다. 신라 시대 미스터리의 흉노족 근원을 바다 건너 중국에서 찾으려는 노력들이 있는데 이 혁철족의 남진, 즉 함흥평야의 경계에 서 있던 진흥왕 순수비들과 유라시아 대륙을 통하지 않으면 도저히 신라까지 오기 힘든 계림로 칼들의 유래를 동북방의 바다를 통한 유입으로 보는 연구도 필요할 듯하다.
울릉도의 조감도
여진족 해적에 황폐해진 우산도의 형편을 보다 못한 고려는 육지로 피난 나온 주민들의 울릉도 귀환과 정착을 도우려 했지만 이들 주민들은 점차 울릉도를 떠났다. 이때부터 우산국, 즉 울릉도의 몰락이 시작되었다..
세월이 한참 지난 고려 의종 13년 1159년, 고려 의종은 김유립을 울릉도로 파견하였다. 내륙인들의 울릉도 이주가 가능한가를 조사하기 위해서였다.
돌아온 그가 올린 보고서에서 역사에 가려져 있던 우산국의 내부 사정을 약간이나마 볼 수가 있었다. 그 글의 전모를 한번 보자
의종(毅宗) 13년[1159], 심찰사(審察使) 김유립(金柔立) 등이 돌아와서 고하기를, "섬 가운데 큰 산이 있는데, 산꼭대기로부터 동쪽으로 바다에 이르기 1만여 보이요, 서쪽으로 가기 1만 3천여 보이며, 남쪽으로 가기 1만 5천여 보이요, 북쪽으로 가기 8천여 보이며, 촌락의 터가 7곳이 있고, 간혹 돌부처·쇠북·돌탑이 있으며, 멧미나리(柴胡)·호본(蒿本)·석남초(石南草) 등이 많이 난다." 하였다.
울릉도가 암석이 많아 사람들이 개척하기 힘들다는 보고에 고려 조정은 주민 이주 계획을 포기했다.
그러나 위의 보고서에서 두 가지 사실, 즉 촌락의 터가 7곳이 있고 간혹 돌부처, 쇠북, 돌탑이 있다는 말은 초기 우산국의 가려진 비밀을 짐작하게 한다.
신라에게 토벌되어 복속했지만 울릉도의 주민이 모여 사는 곳이 단 일곱 곳의 촌락뿐인데 이 정도 규모라면 지금 면 단위의 크기다. 어떻게 우산국, 즉 나라라고 자처할 수가 있는가 하는 것이 그 첫 번째 의문이다.
그래서 울릉도 주민들이 외부 간섭에 반독립적인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 대외적으로 국가를 자처하지 않았나하는 생각이 든다.
다른 의견도 있을 수가 있다.
그때 사용하던 '국[國]'이라는 명칭이 과연 '국가'를 나타내는 명칭이었을까 하는 의문과 함께 반드시 왕이 다스리던 국가가 아니라 일본의 경우와 함께 한 독립적안 지역 세력권에 사용하던 넓은 의미의 지역 명칭이 아니었던가 하는 생각도 든다.
일본의 노벨 문학상을 받은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의 설국[雪國]이 나라를 나타내는 말이 아닌 지역을 나타내는 뜻이며 한국에는 설향[雪鄕]으로 번역되어 나왔다는 사실에 주목하자.
고려가 울릉도에서 보낸 공물 사신 백길과 토두에게 정위와 정조의 벼슬을 내렸다는 사실을 살펴보자.
정위와 정조의 벼슬을 그럴 듯하지만 참봉이나 초시와 같이 향리들에게 내리는 벼슬이라는 사실과 함께 별 볼 일 없는 대접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나라였던 지역의 관리라면 이런 향토직을 주었을 리가 없다.
그리고 이곳에 돌부처와 쇠북 돌탑이 있다는 말은 절터가 있었다는 말이다.
쇠북은 절의 대형 종대신 쓰던 것으로 요즈음의 징과 같은 것이 아닌가 한다. 즉 이곳 멀고 먼 고도에 일찌감치 불교가 전파되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거제도 맹종죽 테마파크
역사는 흘러서 조선 시대가 되었다.
고려 말부터 기승을 부리기 시작한 왜구들은 한반도에 막대한 타격을 주었다. 조선 태종 때 수군의 크기가 육군의 크기보다 더 컸지만 일본 왜구뿐만 아니라 명나라의 해적들도 내습을 하니 방어가 힘든 섬에 사는 주민들을 모두 철수시켰었다.
즉 공도정책[空島政策]이 실시된 것으로 울릉도도 예외가 아니어서 육지에서 군역 등을 피해 도망쳐 들어간 주민들을 전부 데려왔다.
육지에 데려와 거주하게 했던 울릉도 주민으로부터 청취한 최초의 왕대나무에 관한 증언이 조선왕조실록 태종 때 기록부터 나온다.
태종 12년 1412년,
강원도 관찰사가 보고한 내용이다.
‘이 섬이 동에서 서까지 남에서 북까지가 모두 2식(息) 거리이고, 둘레가 8식(息) 거리입니다. 우마(牛馬)와 논이 없으나, 오직 콩 한 말만 심으면 20석 혹은 30석이 나고, 보리 1석을 심으면 50여 석이 납니다. 대[竹]가 큰 서까래 같고, 해착(海錯)과 과목(果木)이 모두 있습니다.’ 고 하였습니다.
[해착은 각종 수산물, 과목은 과수를 말한다.]
태종 때 현지 거주민의 증언을 통해 처음 역사에 나타난 울릉도 왕대나무는 5년 후에 다시 나타난다.
태종 17년 즉 1417년,
불법 거주자들을 데려오기 위해서 울릉도에 들어갔었던 안무사 김인우는 세 명의 거주자를 데리고 나왔으며 아직도 섬에 86명의 주민들이 살고 있다고 보고했다.
그는 대죽[大竹], 물개 가죽, 생모시 목화씨, 통나무 토막들을 올렸고 같이 올린 보고서에 이런 내용이 들어있다.
"땅이 비옥하고 대나무의 크기가 기둥 같으며, 쥐는 크기가 고양이 같고, 복숭아씨가 되[升]처럼 큰데, 모두 물건이 이와 같다." 하였다.
[이 보고서는 나중에 이수광의 1614년 출간 한국 최초 백과사전인 지봉유설[芝峰類說]에 인용되어 나타난다.]
태종 때 처음 얼굴을 보인 울릉도의 대죽[大竹], 즉 왕대나무는 그 뒤에 계속 역사에 얼굴을 내민다.
울릉도 주민들을 그대로 살게 하자는 건의도 많았으나 왜구의 침공을 염려한 태종은 3년 뒤인 1420년, 울릉도 주민들을 모두 데려오고 섬을 비우는 공도정책[空島政策]을 최종 결정했다.
왜구들 등쌀에 수립되었던 공도정책은 이후 500년 뒤인 고종 때까지 유지되었다.
섬이 빈 것을 알게 된 대마도주가 우리가 들어가 살면 안 되겠냐고 양해를 구하는 술책을 부렸는데 태종의 조선 정부에게 일인지하에 거절당했다.
대마도는 그 뒤에도 계속 울릉도에 입맛을 다시며 기회를 엿보았다.
세종은 이 공도정책을 견지했다.
세종 20년 1438년,
섬으로 잠입해갔던 주민들을 쇄환해 오고 실정도 조사할 겸 남회와 조민 두 사람을 파견해서 68명의 주민들을 데려왔다. 두 사람은 사철[沙鐵], 돌 고드름, 전복과 대죽[大竹]을 가져왔다.
세종은 공도정책 유지의 강경책을 구사해서 이들 무리의 두목이 되는 김안[金安]을 처형하고 주민들은 먼 북쪽 경성에 이주시켰다.
이 뒤에 울릉도는 텅 빈 곳이 되고 말았다.
이렇게 섬이 빈 채로 60여 년이 지났다.
성종 2년, 1471년에 울릉도 대나무가 나타난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삼봉도는 울릉도의 다른 이름으로 성종은 이 섬을 미지의 다른 섬으로 잘못 알고 찾아보려고 했었다.
성종 3년 1472년,
성종은 경차관[敬差官] 박종원(朴宗元)이 지휘하는 네 척의 탐험선을 울릉도에 보냈으나 대장선은 풍랑에 밀려 돌아오고 세 척이 울릉도에 도착했다. 세 척의 보고서다. 여기서 울릉도를 무릉도로 부르고 있다.
-사직(司直) 곽영강(郭永江) 등의 세 배는 지난 5월 29일에 무릉도에 이르러 3일을 머물렀는데, 섬 가운데를 수색(搜索)하여 보니 사는 사람은 보이지 아니하고 다만 옛 집터만 있을 따름이었습니다. 섬 가운데 대[竹]가 있어 그 크기가 이상하였으므로 곽영강 등이 두어 개[數竿]를 베어 배에 싣고 돌아와, 이달 초 6일에 강릉(江陵) 우계현(羽溪縣) 오이진(梧耳津)에 이르렀습니다.-
1600년대에 들어와 이제는 왜구도 거의 없어지고 정부의 감독도 느슨해지자 연안 어민들의 울릉도 진출이 활발해졌다. 그러나 반갑지 않은 일본인들이 울릉도에 대거 나타났다. 일본인들은 더 빠른 1620년대부터 울릉도로 와서 불법 활동을 하고 있었다.
1693년 울릉도에 와서 조업을 하던 조선 어부들과 일본 어부 사이에 시비가 붙어 조선 어부였던 안용복이 일본 어부들에게 납치되는 사건이 생겼다.
안용복은 그 신분이 서울 거주 양반 가문의 노비로 되어있다.
주인과 무슨 묵계가 있어 자유로운 양민의 신분 활동이 가능했을 듯하다.
그러나 부산에 -거주지가 현재 좌천동- 에 살면서 어부를 했었다.
배운 것도 별로 없었을 그가 울릉도 역사에서 아주 중요한 활약을 하게 된다.
그 공의 지대함에 후세에 들어와 추존한 장군 호칭에 안용복은 영토 보존을 위한 외교 활동에 부족함이 없는 활약을 하였다 - 부산에 세워진 그의 동상
그는 일본인들에게 오키 섬을 거쳐 돗토리번에 끌려가서 심문을 받게 되자 돗토리 번에 왜 우리 땅인 울릉도에 와서 조업을 하는 것이 불법이 아니냐고 강하게 항의했을뿐더러 울릉도는 조선 영토라는 확인서까지 받고 조선으로 돌아왔었다.
그러나 울릉도에 계속 일본인들이 나타나자 1696년 동료를 모아 자신은 조선 관리로 변장하고 일본에 가서 다시 항의했다.
첫 번째 끌려갈 때와 두 번째 직접 갈 때의 일본 방문에서 그는 현재 독도를 거쳐 오키 섬으로 가는 여정을 밟았다.
"울릉도에서 독도까지는 하루 뱃길, 독도에서 오키 섬까지는 이틀 뱃길,"은 일본 기록에 남은 해상 노정의 시간이 일치하며 그는 독도 방문자로서 최초로 역사에 이름을 남긴 사람이 아닌가 한다.
두 번째 방문은 중간에 끼어든 쓰시마 번의 훼방으로 별다른 소득을 얻지는 못했으나 이 민간인의 한계를 넘는 행동은 조선 조정을 자극했다.
안용복을 처벌하자는 의견도 있었으나 숙종조 조정의 강자였던 영의정 남구만이 적극적으로 나섰다. 조선의 강한 항의에 결국 일본 도쿠가와 막부는 울릉도 조선 영토를 인정하고 어부들에게 도해금지령[渡海禁止令]을 내리고 자국의 어민들을 단속하기 시작했다.
큰 공을 세웠으나 안용복은 무단으로 관리를 사칭하고 외국과 접촉했다는 혐의로 유배형을 받았다는 기록을 끝으로 더이상 역사에 나타나지 않는다.
안용복의 활동에 자극을 받은 조선 조정은 비로소 울릉도 관리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 이야기를 다음 편부터 해본다.
[출처] 신미양요 사진의 멸종 울릉도 왕대나무 돛단배 -1-|작성자 동고동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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