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볼프강 폰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는 1749년 8월 28일 마인 강변의 프랑크푸르트에서 부유한 시민 계급의 신분으로 태어났다. 부친 요한 카스파르 괴테는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교양을 많이 쌓으나 관직에 진출하는 데에는 실패했다. 프랑크푸르트 시장 요한 볼프강 텍스토어의 딸인 그의 모친 카타리나 엘리자베트는 지성적인 면을 강조한 부친과는 달리 활발하고 명랑한 성격이었다. 괴테는 자신의 문학적 재질이 꾸민 이야기를 좋아하는 어머니에게서 유래한다고 말한 바 있다.
재산가들이 흔히 그랬듯 학교에 가지 않고 가정교사의 교육을 받은 괴테는 1765년 10월 부친의 의사에 따라 법학을 공부하려고 라이프치히 대학에 입학한다. 그러나 그는 자신에게 적합한 세계를 찾으려고 방황하고 그런 때 3년 연상인 케트헨(Kathchen)과 사랑에 빠지고, 신분적 제약에 대한 괴로움으로 인해 결국 이별을 하게 된다. 1768년 각혈로 쓰러져 생사지경을 헤맨 끝에 그는 학업을 중단하고 고향으로 돌아온다.
건강을 회복한 그는 1777년 초에 학업을 마치기 위해 슈트라스부르크로 간다. 거기에서 보낸 1년 반의 기간은 그의 일생에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는 학업에 전념하는데 별로 내키지 않는 법학 강의 이외에 의학과 정치학 강의를 많이 들었으며 그 밖에 역사, 철학, 신학, 자연과학 등에 관심을 가졌다. 그에게 가장 중요한 체험은 당시에 가장 영향력 있는 사상가 헤르더와의 상면이었다. 헤르더는 괴테에게 로코코적인 인습에서 손을 떼게 하였고, 하만의 반합리적이고 예언적인 상상 세계와 셰익스피어의 무한성, 호메로스, 오시안, 핀다르를 알게 하였으며 자연의 본질과 인간의 내적 감정에 바탕을 둔 문학과 민속문학에 눈을 뜨게 하였다. 이를 통해 괴테는 자신의 존재가 무한히 확대되고 심화되는 것을 느낌과 동시에 질풍노도로의 준비를 갖추게 된다. 이런 지성적인 자극 이외에 그는 프리데리케와 사랑에 빠진다. 괴테는 전원에 싸인 조용한 마을에 어울리는 밝은 자연 그대로의 순수하고 소박한 그녀를 사랑하며, '오월의 노래', '그림 리본에 부쳐', '환영과 작별'등 훌륭한 청춘시를 남기게 된다. 프리데리케와의 사랑은 괴테의 시적 방향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지만, 그 외에 그녀를 버린 죄책감 때문에 일생을 통하여 참회와 생각을 잊지 못하고 그러한 생각이 그의 작품에 여러 형태로 투영되는 것을 볼 수 있다. '들장미', '파우스트', '괴츠' 등이 그 예이며 순진한 처녀를 버려놓은 죄값을 다루는 부분이 바로 참회의 결과라 하겠다. 그가 제출한 논문이 거부되어 학업을 마무리하지 못하고 그 대신 1771년 8월 법학 석사 시험을 치르고 연인과 작별도 하지 않은 채 고향으로 돌아온다.
1772년 5월 괴테는 부친의 희망에 따라 제국 대법원에서 법률사무를 익히기 위해 베츨라에 가고 그곳에서 그는 브레멘 공사관 서기관 요한 크리스티안 케스트너와 그의 약혼녀 샬로테 부프와 친하게 지내고 로테에 대한 감정이 점점 뜨거워지자 괴테는 9월에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다. 그 후 1775년까지의 3년이 괴테의 일생 중 가장 풍성한 결실의 기간이었는데 이 시기의 절정을 이루는 것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Die Leiden des jungen Werthers>이다. 베츨라 시절에 알게된 예루살렘이 친구의 부인에 대한 이루지 못할 사랑 때문에 자살했다는 소식이 동기가 되어 자신의 샬로테 부프에 대한 비련의 체험에서 탄생된 이 서간체 소설은 당시 젊은이들의 정서를 표현해냄으로써 독일 문학사에서 유례가 없었던 대인기를 얻는다. 이 작품으로써 괴테는 무한에 대한 동경, 정처 없는 자아 확장의 위기를 극복할 뿐만 아니라 질풍노도의 절정도 넘어선다. 1775년에 괴테는 릴리 쇠네만과 깊은 사랑에 빠져 약혼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괴테가 한편으로는 사랑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가정적인 행복에 얽매인 삶에 만족할 수 없으리란 느낌으로 우와좌왕함으로써 그 관계는 혼인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이런 상태에서 그는 프랑크푸르트를 떠난다.
1775년 11월 괴테는 작센 바이마르의 영주 칼 아우그스트 공작의 초대로 바이마르로 간다. 그는 이듬해 추밀고문관에 임명되어 정식으로 국가의 행정 업무를 맡기 시작하여 그 후 10년간 건설, 재정, 병사, 광산, 학예 등의 국사를 처리하고 1782년에는 신성로마제국 황제 요셉 2세로부터 귀족의 직위를 받는다. 공무에 헌신하는 한편 괴테는 바이마르 궁정에서 샬로테 폰 슈타인 부인과의 정신적인 교제를 통해 중대한 내적 변화를 일으킨다. 괴테의 예술과 그 내면성을 잘 이해한 그녀는 적절한 충고와 조언으로 그의 천부적인 재질이 발휘되게 하였다. 괴테는 행정의 책임을 맡은 공적인 생활과 차분한 성격을 가진 슈타인 부인의 영향을 통해 질풍노도기의 과도한 격정에서 벗어나 조화와 중용을 지향함으로써 보다 원숙한 문학 세계로 들어서게 된다. 그밖에 그는 지질학, 광물학, 해부학, 식물학 등 자연과학 연구에 몰두하고 이렇게 분주한 생활로 인해 창작은 주춤하였으나 1775년 프랑크푸르트에서 거의 완성된 <에그몬트 Egmont>의 개작 <타우리스의 이피게니에 Iphigenie auf Tauris>초고의 완성, <토르콰토 타쏘 Torquato Tasso>의 구상 그리고 <빌헬름 마이스터의 연극 사명 Wilhelm Meisters Theatralische Sendung> 등을 꼽을 수 있다.
1780년부터 재능과 생활 사이의 불균형을 점점 심하게 느끼기 시작한 괴테는 정치에서 다시 예술로 돌아가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조화와 중용을 지향하는 괴테는 고대 예술의 조화와 균형과 질서의 아름다움을 동경하여 1786년 9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바이마르를 떠나 이탈리아 여행길에 오른다. 이 이탈리아 여행이 괴테의 인생과 문학에서 중요한 전기가 되는데 괴테는 이탈리아에서 전아하고 견실한 고대 예술을 직접 접하는 가운데 이성과 감성을 조화시키고 중용을 지키며 교양을 갖춘 원숙한 인간상을 절제된 언어와 간결하나 짜임새 있는 완결된 형식을 표현하려는 고전주의 문학관을 확립한다. 근 2년에 걸친 이탈리아 체류 동안 괴테는 전처럼 "생각하거나 감정에 묻히거나 공상한다던가" 하지 않고 예술 작품, 풍경, 이탈리아인들의 삶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보고 파악하고자 했다.
새로워진 괴테는 1788년 6월 바이마르로 돌아오지만 이전의 교우관계를 회복하지 못하고 고립된 느낌을 받는 가운데 23세의 처녀 크리스티아네 불피우스의 소박한 사랑에서 유일한 위안을 얻는다. 괴테는 세인들의 질시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와 동거생활을 시작하는데 혼례식은 1806년에 가서야 올린다. 괴테는 바이마르 공국의 관리로서의 업무에서 거의 손을 떼고 오직 학술기관과 예술기관, 특히 예나 대학에 관계하는데 1791년에 창설된 바이마르 궁정극장의 운영을 맡아 불과 몇 년 사이에 그곳을 가장 유명한 독일 극장의 하나로 발전시킨다. 창작 면에서 이렇다할 성과가 없는 대신 자연과학 연구가 결실을 맺어 <식물의 변형>이 발간된다.
이탈리아에서 귀향하고 별로 성과 없이 여러 해를 지낸 후 괴테는 10년 연하의 쉴러와 아름다운 우정관계를 맺게 된다. 괴테가 직관적이며 현실주의적이라면 쉴러는 사변적이고 이상주의적이다. 이렇게 기질과 성장 배경이 판이하게 다른 두 작가는 처음에는 소원한 관계였으나 90년대 초부터 쉴러는 칸트 연구를 통해 내면의 변화를 일으키는데, 그것은 괴테가 이탈리아 여행을 통해 정립하려 했던 규범적인 예술관에 대해 서로의 이해를 가능케 하고 또 증진시켰다. 이리하여 세계문학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두 천재의 협업이 시작된다. 괴테는 쉴러의 자극을 받아 다시 창작에 힘을 쏟게 되고 쉴러가 주관하는 잡지 <호렌>에 작품을 발표하기 사작한다. 이들은 협동으로 <크세니엔 Xenien>을 만들고 담시를 짓는다. 괴테는 <빌헬름마이스터의 수업시대 Wilhelm Meisters Lehrjahre>와 서사시<헤르만과 도로테아 Herrmann und Dorothea>를 완성하고 다시 <파우스트>에 손댄다. 이들은 활발한 서신 교환을 통해 고전주의의 예술관을 정립하는데 애쓴다. 해가 지남에 따라 이 두 천재의 협업은 심화된다. 쉴러는 만날 기회를 더 갖기 위해 1799년 예나대학의 교수직을 사임하고 바이마르로 이주한다. 이들의 창조적인 협동은 1805년 쉴러의 죽음으로 막을 내리고 괴테는 허탈 상태에 빠진다.
1805년부터 15년까지 유럽은 나폴레옹으로부터의 해방전쟁에 휩싸인다. 그러나 괴테는 나폴레옹이란 인간에 매력을 느꼈을 뿐만 아니라 세계시민 사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독일 민족의 해방운동에 냉담한 입장을 견지한다. 이리하여 그는 불안한 시대 상황에 휩쓸리지 않으려고 의식적으로 일에 몰두하여 1810년 <색채론>을 발간한다. 괴테는 학문 연구에 큰 가치를 부여했음에도 불구하고 쉴러와 교유하기 이전처럼 그것에 몰두하지는 않는다. 그는 1806년에 <파우스트 1부>를 완결한다.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를 개작한 후 괴테는 1807년 <빌헬름 마이스터의 편력시대 Wilhelm Meisers Wanderjahre>의 집필을 시작한다.
괴테는 자서전을 계획하여 준비를 마친 뒤 1811년에 <나의 일생에서, 문학과 진실 Aus meinem Leben, Dichtung und Wahrheit>의 집필을 시작한다. 1831년 제 4부가 탈고되어 1833년 유작집의 제 1권으로 출간된다. 이것은 괴테의 자서전이지만 우리는 거기에서 독일과 유럽의 정신사, 사회사, 문화사를 엿볼 수 있다. 페르시아의 시인 흐아피스에게 자극을 받아 괴테는 1819년 장편서사시 <서동시집 Der west- stliche Divan>을 발간한다.
1816년 6월 아내의 죽음과 궁정극장장의 자리에서 해임되는 일로 괴테는 큰 충격을 받는다. 그의 주위에 점점 죽음과 공허의 정적이 찾아드는 것이다. 크게 보아 지난 20년간 괴테는 두드러진 외적 사건을 겪지않고 매일매일 규칙적으로 일을 하였다. <서동시집>을 마친 후 그가 맨 먼저 열중했던 작품은 <빌헬름 마이스터의 편력시대>와 <파우스트 2부>이다. 동시에 그는 자신이 일생을 회고한 글을 써 <이탈리아 여행기>1부와 2부,<프랑스 종군기>, <제 2차 로마 체류기>를 완성한다. 이토록 작업에 열중해도 만년의 괴테는 전과는 달리 주변 사람들로부터 고립되지 않고 거의 매일 손님이 있었다. 1923년에 서른 살의 청년 에커만이 바이마르로 와 괴테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조수가 된다. 그가 남긴 <만년의 괴테와의 대화>는 괴테의 모습을 역력하게 보여주는 기록으로 <괴테와 쉴러의 서신교환>과 함께 괴테 이해에 필수적인 자료로 간주된다.
괴테는 세계사적인 맥락을 관조하는 방향으로 안목을 넓힘과 동시에 문학적 관심도 확대해 나가 유럽문학을 총괄적으로 파악하려고 노력했다. 그는 이미 흐아피스의 연구를 통해 중 등의 세계를 관찰했고 1820년 이후로는 인도와 중국의 문학을 알려고 했으며 외국작가들을 탐독했다. 그는 문학을 인류의 공동 재산으로 파악했고 각 민족문학간의 부단한 상호작용을 생각하기에 이르렀고 거기에서 세계문학이란 개념을 만들어 냈다.
1828년 칼 아우구스트 대공의 사망과 2년 후 아들의 죽음이 괴테에게는 최대의 시련이었다. 그는 이 시련을 미완성의 작품에 매달림으로써 극복하려고 했다. 그의 일생을 완결하는 작품은 <빌헬름 마이스터의 편력시대>와 <파우스트 2부>이다. <편력시대>는 구성상의 혼란에도 불구하고 80평생을 진지하게 산 괴테의 인생에 대한 관찰과 예지가 집약되어 있다. 큰 병을 앓고 난 괴테는 마지막으로 <파우스트 2부>에 매달리게 되고 <파우스트>의 완성과 함께 파우스트와 같이 살았던 괴테의 일생도 종결된다. 1832년 3월 16일 감기로 자리에 누운 괴테는 3월 22일 향년 83세로 눈을 감는다.
⑵문예사적 배경
괴테의 창작 활동을 문학사조에 의해 흔히 첫째, 질풍노도 시대, 둘째, 고전주의 시대, 셋째, 만년의 낭만주의 시대로 나뉘어진다. 질풍노도 시대는 스트라스부르크 시절, 프랑크푸르트 시절, 그리고 바이마르로 간 첫해까지를 말한다. 고전주의 시대는 질풍노도 시대가 끝나는 1775년부터 실러가 죽은 1805년까지를 말한다.
1770년대의 독일의 봉건주의는 극심한 부패와 기근으로 황폐 일로를 달리고 있었다. 그러므로 여기에 맞서는 혁명적인 시민계급의 출현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문학에서도 그러한 급류는 막을 수 없어서 시민계급 출신의 젊은 작가들은 과거 독일 문학이 지니고 있던 무미건조한 형식과 외면적인 도덕률을 타파하고 진실로 독일적인 생명과 인간 감정의 본질을 회복하려는 새로운 운동을 주도하게 되었다.
이러한 질풍노도 문학은 특히 헤르더를 중심으로 절정에 이르면서 독일에는 새로운 민중문학이 자리잡게 되었다. 그리고 스트라스부르크에서 우연히 이루어진 괴테와 헤르더의 만남에 의해서 이 운동은 독일문단에서 마침내 그 결실을 맺기에 이르렀다. 헤르더는 눈 수술을 받기 위해 스트라스부르크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21세의 청년으로 그 곳에 유학하고 있던 괴테는 5년 선배인 그를 자주 방문, 친교를 나누었다. 이 때 괴테는 헤르더의 자유분방한 정신과 독창적이고 해박한 지식에 크게 영향을 받았으며 자연스럽게 인간 감정의 심연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참된 문학의 본질을 암시받기에 이르렀다.
새로운 시대를 예고하는 날카로운 비평가 헤르더와의 친교, 스트라스부르크의 목가적이고 아름다운 자연과의 접촉, 시 근교 제젠하임의 시골 목사의 딸 프리데리케와의 연애 등을 계기로 해서 비로소 괴테 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시와 희곡 작품들이 씌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괴테의 질풍노도의 힘찬 걸음은 전진을 계속해 1770년대 첫 무렵에 쓴 시와 1773년에의 희곡 '괴츠 폰 베를리헹긴'에 의해 괴테는 영웅적 시대의 문학적 환상인 질풍노도 시대의 선두주자가 되었다.
그리고 그 1년 후에 발표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으로 괴테는 독일뿐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문명을 떨치게 되었다. 그 자신 경험의 충실한 반영인 이 작품은 발표되자마자 그 당시 독서층을 감격의 소용돌이에 빠뜨린 문제작이 되었고 그 청순하고 열렬한 연애 이야기는 오늘날에도 무수히 많은 세계의 젊은이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다.
1775년 괴테는 작센 바이마르 공화국의 영주 칼 아우구스트의 초청을 받아 그 곳 재상이 되었다. 약10년에 걸친 바이마르 체류 중 그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은 슈타인 부인이었다. 괴테는 10년 동안 이 연상의 부인에게 정열을 쏟았는데 부인은 그러한 괴테의 정열을 교묘히 진정시키면서 그의 천부적인 재질이 유감없이 발휘되도록 그에게 영향을 주었다. 뿐만 아니라 그녀의 여성적인 우아하고 품위 있는 정신은 괴테의 거친 질풍노도를 극복하는데 큰 힘이 되었고 그 뒤 높은 고전주의를 향한 발전을 이룩하는데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다.
고전주의는 조화·균정(均整)·명석(明晳)함을 추구하는 고대 그리스·로마의 예술사조. 르네상스 시대의 고대 그리스·로마 고전에 대한 심취에서 비롯되었으며, 이것은 당시 사람들의 이성을 존중하는 경향과 부합하여 17세기에 문학 분야, 특히 프랑스 희곡문학에서 전형적인 형태로 꽃피워(P.코르네유, J.B.라신, 몰리에르 등), 곧 유럽 전역에 파급되었다(J.드라이든, A.포프, G.E.레싱 등). l8세기 중엽 이후가 되자 음악·회화·조각분야에서도 이와 같은 통일성·이론성의 주장이 일어났으며, 하이든, 모차르트 등의 오스트리아 고전파 음악, J.L.다비드, J.A.D.앵그르 등의 프랑스 고전주의 미술시대가 출현하였다. 그러나 예술을 갖가지 미(美)의 법칙으로 규제하고, 거기서 벗어나는 것을 엄중히 금지하였으므로, 19세기부터는 보다 자유롭고 정서적인 낭만주의가 대두되었다. 고전주의는 후에 생겨난 많은 예술사조의 한 정점을 이룬다.
독일의 고전주의는 괴테의 이탈리아 여행과 직결된다고 흔히 일컬어진다. 괴테는 그 스스로 말한 것처럼 이탈리아에서 다시 태어난 것이다. 괴테는 이미 오래 전부터 이탈리아 여행을 동경하고 계획하고 있었는데 바이마르 체류10년 만에 슈타인 부인에게는 한 마디도 없이 이 여행을 감행했다. 이제 그의 내면에는 고대 로마와 빈켈만이 자리잡게 되었고 그 동안 정체되었던 그의 문학활동은 새로운 고전주의 정신 아래에서 다시 그 왕성한 꽃을 활짝 피우기에 이르렀다. 그의 고전주의 문학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이피게니에'는 바로 이 이탈리아 여행이 가져다 준 결실이었다.
이 고전주의 시대를 괴테의 일생에서의 시대 구분으로 본다면 그의 청춘시대였던 질풍노도와 그의 만년의 낭만시대의 중간지점으로, 폭풍적인 광란에 대해서는 우아함과 온화를, 낭만의 자유분방한 공사에 대해서는 양식적인 균형미를 제시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괴테의 문학세계는 그보다 10년 연하인 실러와의 만남으로 더욱 심화되었다. 이 두 위대한 인물의 결합과 우정은 독일 고전주의를 빛내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한편 낭만주의적인 색체를 짙게 풍기는 괴테의 만년의 문학작품은 그의 저 뛰어난 시집 '서동시집'으로 대표된다. 이 시집은 사랑과 정열이 넘쳐 있으며 무엇보다도 괴테의 인생관과 이상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 주는 작품들로 문학사에 그 확고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괴테의 만년의 가장 큰 업적으로는 역시 '빌헬름 마이스터'와 '파우스트'를 들 수 있다. 특히 괴테 문학의 불멸의 대작이자 찬란한 광휘를 빛내는 '파우스트'는 오늘날에도 세계문학사에서 그 어느 것도 따를 수 없는 고전으로 기록되고 있다.
괴테는 일생 동안 9명의 여성과 애정을 나누었으나 결혼한 것은 이탈리아 여행 직후부터 동거해 온 크리스티아네 한 사람 뿐이었다. 83세의 긴 일생을 살아오는 동안 마지막 크리스티아네와 사별한 뒤 그가 연정을 품었던 소녀 울리케에 이르기까지 여성은 그의 문학에서 구원의 한 대상이었다. 그가 '파우스트'의 마지막 구절에 '모든 여성적인 것만이 우리를 이끌어올린다'고 한 것도 그의 여성관의 한 상징을 나타낸다고 해석 할 수도 있다.
⑶ 신화 - 에피게네이아
테세우스와 헬레네의 딸이라는 설도 있다. 아가멤논이 신의 사슴을 쏘아 잡은 것이 이유가 되어 사냥의 여신 아르테미스의 진노를 사게 되었다. 바람이 전연 불지 않았으므로, 트로이원정 길에 나선 그리스 군대가 아울리스항(港)에서 2년 동안 출항할 수 없었다. 아가멤논 왕은 예언자 칼카스의 의견에 따라 이피게네이아를 아르테미스 여신에게 희생으로 바치게 되었다.
그녀는 영웅 아킬레우스와 결혼시킨다는 구실로 고향에서 불려와, 여신의 제단에 산제물로 바쳐질 뻔하였으나, 그녀를 불쌍히 여긴 여신이 한 마리의 사슴을 그녀 대신 제물로 바치고 그녀를 흑해(黑海) 연안의 타우리스로 데려다가 여신의 신관(神官)으로 삼았다. 그리하여 그녀는 이곳에 오는 이방인을 여신에게 제물로 바치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한편 그녀의 남동생 오레스테스는 아폴로의 신탁(神託)에 따라 아르테미스의 신상을 찾아서 친구 필라데스와 함께 타우리스에 이르렀으나, 체포되어 동생인 줄 모르는 누이의 손으로 여신에게 제물로 바쳐질 운명에 처해졌다.
그러나 제물로 바쳐지기 직전에 서로의 신분을 알게 되어, 슬픔은 기쁨으로 바뀌고 그들은 여신 아테네의 도움으로 요행히 아르테미스의 신상을 찾아내 그리스로 돌아온다. 이피게네이아 신상을 아티카의 할라이로 가져다 모시고 그녀는 신관 생활을 계속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이곳에서는 여신에게 바쳐지는 인신공희(人身供犧)의 의식으로, 사람의 목에 상처를 내는 습관이 계속되었다고 한다.
이피게네이아는 비극의 시인 에우리피데스의 두 편의 작품인 《아울리스의 이피게네이아》와 《타우리스의 이피게네이아》로 잘 알려져 있는데, 그녀는 마침내 '불사(不死)의 몸'이 되었다는 전설이 있으나, 원래는 아르테미스의 별칭(別稱)이었다고도 생각된다. 이를 소재로 한 라신과 괴테의 뛰어난 희곡이 있고, C.W.글루크의 오페라도 있다.
Ⅱ. 작품줄거리
트로이 원정에서 그리스 원군의 승리를 위해 제물로 바쳐진 이피게니에는 디아나 여신의 도움으로 죽음을 맞이하지 않고, 다이나 여신의 여사제로서 살아가게 되었다. 사제의 직분을 준 것은 토아스 왕이지만 그녀는 스스로를 부모를 여윈 여자라고 여기며 슬픔으로 가득찬 생활을 하고 있다. 디아나 여신의 제단에서 그녀는 부드러운 기도로 진노하는 여신을 가라앉혀 피의 제물을 바치는 관습의 공포를 줄여 들게 하였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 받은 그녀는 토아스 왕에게 청혼을 받기도 하였지만 그녀는 마음을 열지 않고 여사제의 비밀이라는 명목아래 자신의 혈통을 숨겼다. 이러한 그녀에게 아르카스는 이피게니에가 가지고 있는 부정적인 삶의 가치관과 토아스 왕의 청혼건에 대한 충고를 해준다. 토아스 왕은 금심과 불만으로 자신을 따르고 있는 주위 사람들에 대한 심리적인 불안도 있는 상태로, 이피게니에가 자신을 미천한 사람으로 표현하며 청혼을 거절하는 것을, 그녀의 혈통과 가문을 숨기며 토아스를 신뢰하지 않는 것으로 이해하고 서운함을 들어냈다.
이피게니에는 부모의 성명과 가문을 숨기는 이유는 난처한 사정 때문이지 불신 때문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녀는 이 대화에서 자신을 저주받은 자로 표현하며 죄 많은 사람이라고 하지만, 토아스 왕은 그녀와 함께 해오면서 누린 축복의 시간을 내 걸며, 그녀가 죄 많은 사람이라는 것은 인정하기 어렵다고 한다. 뜻을 굽히지 않는 토아스 왕에게 이피게니에는 자신이 탄탈루스 가문의 자손이라 밝힌다. 탄탈루스는 옛날에 신들의 특별한 은총을 받았던 인물이라고 세상 사람들이 알고 있는 인물이었다. 또한 쥬피터 신도 존언을 듣기 위해 식탁에 초대했으며 신들까지도 그 분의 풍부한 경험과 심오한 사상을 겸비한 이야기를 마치 신탁을 듣는 것처럼 기뻐하기도 한 존재였다. 이피게니에는 탄탈루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지만 신들은 인간들과 동등한 존재인 것처럼 교제해서는 안 될 것이옵니다. 필사(必死)의 종족 인간은 너무 연약해서 저 높은 하늘 위에서 현기증을 느끼지 않을 수 없나이다. 그 분은 품성이 저열하지 않았고 천기를 누설하지도 않았나이다. 허나 저 위대한 천둥의 종이 되기엔 그릇이 너무 컸고 벗이 되기엔 부족한 인간에 불과했나이다. 그래서 그 분의 잘못도 어쩔 수 없는 인간의 과실이었으나 신들의 심판은 준엄했나이다. 그래서 시인들이 이렇게 노래한답니다.
교만과 불충이 그를 제우스 신의 식탁에서
영원히 고통받는 지옥으로 떨어뜨렸네.
그리고 그의 후손 모두 신들의 미움을 받았네 -본문 14p-
그후 탄탈루스의 아들인 펠롭스가 이미 배신과 살인을 무릅쓰고 가장 아름다운 여인 외노마우스의 딸 히포다미아를 차지했고. 그녀는 지아비의 소원에 따라 두 아들 티에스트와 아트레우스를 낳았다. 그 형제는 부친이 다른 데에서 낳은 큰아들을 점점 더 사랑하는 것을 질투하며 지켜보다 결합되었고 두 형제는 은밀히 이복형의 살해라는 최초의 범행을 감행했다. 아버지는 히포다미아가 살해자라 생각하고 분노에 차서 그녀에게 아들을 살려내라고 요구하니 그녀가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다.
그들의 부친이 사망한 후 아트레우스와 티에스트가 나라를 공동으로 다스렸지만 융화가 오래 지속될 수 없었다. 곧 티에스트가 형수와 간음을 범했고, 복수심에 불타 아트레우스가 동생을 나라 밖으로 추방했다. 음흉하게도 티에스트는 오래 전에 이미 무시무시한 계획을 마음 속에 품고 형에게서 아들 하나를 빼돌려 은밀하게 친자식인 것처럼 겉으로는 애지중지 키웠다. 그가 그 아이의 가슴 속에 분노와 복수심을 가득 불어넣어 백부로 알고 있는 친아버지를 살해하도록 도성으로 보냈지만 그 젊은이의 기도가 발각되었고 왕은 동생의 아들을 죽인다고 여기면서 잔인하게 처형했다. 만족감에 도취된 왕이 눈 앞에서 고문을 당하며 죽어가는 자가 누구인지 알았을 때는 이미 너무 늦었버렸다. 가슴 속에 타오르는 복수의 열망을 잠재우기 위해 그는 말없이 전대미문의 계획을 세웠다. 겉으로 대범한 척 태연한 척 원한을 푼 것처럼 위장해 동생을 두 아들과 함께 나라 안으로 유인하더니 아이들을 붙잡아 도살하여 그 고기로 만든 욕지기나고 소름끼치는 요리를 첫 식사 때에 그 아이들의 아버지에게 내놓은 것이다. 티에스트가 자기 자식들의 고기로 배를 채운 후 왠지 슬 픔에 사로잡혀 아이들이 어디 있느냐고 묻고 홀 문에서 나는 발걸음 소리, 목소리가 아이들 것이라 생각했을 때 아트레우스가 비웃으며 그에게 도살된 아이들의 머리와 발을 던졌다.
아트레우스의 장남이 아가멤논이 이피게니에의 아버지이며, 클리템네스트라가 어머니이다. 그리고 그 밑으로 여동생은 엘렉트라이다. 아가멤논은 평화롭게 나라를 다스렸고 오랫동안 찾아볼 수 없었던 평온이 탄탈루스 가문에 주어진 것 같았다. 다만 아들이 없는 것이 아가멤논과 클리템네스트라의 행복에 한가지 흠이 였다. 그러나 그 소원도 성취되어 아들 오레스트가 태어나게 되었다. 절세 미인 헬레나를 도둑 맞은 것을 복수하기 ㅟ해 그리스의 모든 군주들이 병력을 총동원해 트로이와의 전쟁을 벌렸다. 아가멤논은 그리스 연합군을 지휘하였으나, 디아나 여신이 연합군의 사령관에게 진노하여 갈길 바쁜 군대의 발목을 잡았다. 디아나 여신은 예언자 칼하스의 입을 통해 왕의 큰딸을 요구하였고, 이피게니에는 제단에 바쳐졌다. 그러자 디아나 여신의 마음은 풀렸고, 죽을것으로 생각되었던 에피게니에는 신전 안에 살게 되었다. 여신의 소유물이라는 이유로, 이피게니에는 토아스 왕의 청혼을 거절해 보지만, 토아스 왕은 이 신전안에 살게 하는 것이 바로 청혼의 계시라고 말하며 이피게니의 말을 맞받아 친다. 그러나 이피게니에는 가족에게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을 밝히고 성스러운 인연을 져버리고 가족에게 돌아가려고 하는 이피게니를 왕은 원망한다. -18-
이피게니에는 용기와 의지에 넘치셔서 순하게 따르라고 하는 왕에게 신들이 동의하지 않는 결합을 맺지 말라는 확고한 신념을 밝히지만 왕은 그 신념은 신의 것이 아닌 이피게니의 신념이라 말한다. 결국 토아스 왕은 에피게니에에게 사제로 남을 것을 말하며, 백성들의 불만을 줄이기 위해 다시 이방인 제물을 받힐거라고 한다. 에피게니에는 피에 굶주린 것은 신이 아닌 사람이라 말하며, 자신의 잔인한 욕구를 신들에게 전가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토아스 왕은 해변의 동굴 속에 숨어 있다가 발견된 이방인 두 사람을 제물로 보내겠다고 한다.
오레스트와 필라데스는 형제로 하계의 복수의 여신들에게 쫒기고 있다. 그러나 디아나 여신의 오빠인 아폴로 신은 그들에게 위안과 도움을 줄 것으로 약속했다. 오레스트는 죽음 앞에서 낙심한 상태지만 필라데스는 신의 언약을 믿으며 희망을 잃지 않았다. 오레스트는 일렉트라의 남동생으로 자신가 꼭 닮은 아버지의 죽음을 안타까워했다. 오레스트와 필라데스는 친 형제간은 아니지만, 필라데스의 가족은 아버지를 잃고 정부와 살아가는 어머니로부터 피난처를 오레스트에게 제공해 주었고, 성장할 수 있게 끔 도와주었다. 그래서 그들은 친 형제와 같이 지낼 수 있었던 것이다. 오레스트는 그에게 좋았던 시절을 상기하지 않고 어두운 과거의 시절만을 생각하지만 대조적으로 필라데스는 희망과 앞으로 살아갈 길들, 그리고 오레스트와의 즐거웠던 만남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
필라데스: 형을 좋아했을 때, 그때 내 인생이 시작되었어요.
오레스트: 내 고난이 사작되었어라고 해야 옳은 말이다. 내가 몹쓸 병에 걸려 인간 세상에서 격리된 사람처럼 가슴 속에 남 모르는 고통과 죽음을 품고 있는 것, 제 아무리 건강한 곳이라도 내가 발을 들여놓으면 곧 내 주위의 활짝 피어난 꽃 같은 얼굴들에 서서히 죽어가는 죽음의 고통이 나타나는 것이 내 운명의 끔직한 점이다.-26-
신이 주신 운명에 관해서도 둘은서로 다른 입장을 하고 있었다. 오레스트는 자신에게 주어진 저주스러운 운명을 받아드리며, 희망을 잃고 살지만 필라데스는 선인이건, 악인이건 간에 누구나 자신의 행위에 대한 대가를 스스로 받게 되어 있다고 말한다. -27-
오레스트: 가족의 불행을 물리치고 나라의 영토를 넓히고 국경을 튼튼히 하고 오랜 적들이 쓰러지거나 패주하는 등 좋은 일들을 신이 인간에게 선사한다면 그 인간은 감사해야 한다! 신이 그에게 인생의 최초의 기쁨을 주었기 때문이지. 신들은 나를 그래도 존경하는 어머니의 도살자로, 살해자로 선택하였고 그들의 명령에 따라 치욕스런 행위를 욕되게 복수한 나를 파멸시켰다. 내 말을 믿어, 신들은 탄탈루스 가문을 노리고 있어. 그리고 최후의 자손인 나는 죄없이 죽어서는 안 될, 명예롭게 죽어서는 안 될 운명이야.
필라데스: 신들은 조상들의 비행을 아들한테 복수하시지 않아요. 선인이건 악인이건 간에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행위에 대한 대가를 스스로 받게 되어 있어요. 유전되는 것은 부모의 축복이지 저주는 아닙니다.
즉 오레스트는 신들의 뜻은 자신과 필라데스를 파멸에 모는것으로 생각하지만 필라데스는 신이 명하는 것을 행하고 속죄하면 분명 신에게 구원받을 수 있다고 여긴다. 또한 그들은 잔인한 법을 저지하는 사제라는 것에 대해 이야기 하며 필라데스는 그녀에게 희망을 걸지만 오레스트는 그녀가 자신들을 구하지 못할 것으로 생각한다. 용감하고 곧은 사람을 높이 평가하는 오레스트와 달리 계략적인 필라데스는 자신이 먼저 이피게니에를 만나며 그녀에게 자신들의 운명을 남김없이 이야기 해줘서는 안될것이라고 생각한다.
필라데스는 자신이 누구이며, 어떠한 운명을 가졌는지 속이고 여사제 이피게니에와 이야기를 나눈다. 여사제가 이피게니에 인줄은 모르고 클리템네스트라가 에기스트와 공모하여 남편을 속였고 돌아온 날 남편을 살해했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왕비를 속이고 장녀 이피게니에를 디아나 여신의 제단에 바쳐진것이 왕비의 가슴 속에 뿌리 깊은 반감이 심어주게 되었고, 그래서 왕비는 에기스트의 구애에 넘어가 남편을 죽이게 되었던 것이다.
이피게니에는 필라데스에게 듣지 못한 나머지 이야기를 오레스트에게 듣게 된다. 오레스트는 자신의 존재를 숨긴채 부친의 매제 스트로피우스가 그를 기꺼이 받아 주고 친아들과 함께 길러 주었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스트로피우스의 아들인 필라데스 새로 온 외사촌형과 돈독한 우정을 맺었고, 그들이 자라는 것 같이 그들의 마음속에서 대왕의 죽음을 복수하려는 불같은 열망이 자라났다. 변복을 하고 미케네에 잠입한 오레스트는 누이인 엘렉트라를 만나, 어머니 클리템네스트라를 죽이고 말았다라는 이야기를 마져 해주었고, 자신이 오레스트라는 것을 밝힌다. 그러자 이피게니에도 자신이 오레스트의 큰 누나임을 밝히지만 오레스트는 이 사실을 쉽게 믿지 못했다. 그는 오직 자신의 죄값을 치르기 위해 죽음을 맞이 할 생각만 하고 있었다. 결국 여사제가 자신의 누나인 이피게니에 임을 알게 된 오레스트는 사제인 누나가 자신을 제물로 죽여야 되는 현실을 받아들이며 형제살해가 유서 깊은 탄탈루스 가문의 대대로 전승되어 온 관례라고 말한다.
오레스트는 죽음과 저주를 피하지 못할 것으로 생각하고, 누이인 이피게니에와 동생인 필라데스와 함께 저승으로 내려가자고 하고, 필라데스는 현실을 직시하며 신속한 결단이 필요하다가 말한다. 이피게니에는 바닷가로 동생을 빼돌렸고 제사를 미루며, 거짓말을 해야 하는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이피게니에는 제사를 집행하지 못하는 이유를 예기치 않던 장애를 이유로 하여 왕의명령을 어겼다. 그 예기치 않던 장애라는 것은 혈족을 살해한 이방인 중의 하나가 복수의 여신들을 쫒김을 당하는데, 신전 안에서 조차 광기가 그를 덮쳐 그에게 나온 오물이 성전을 더럽혀서 제사를 집행할 수 없었던 거라고 이피게네는 아르카스에게 말한다. 아르카스는 다시한번 이피게니에에게 왕의 심기를 가라앉힐 수 있는 방법은 토아스 왕을 받아 들이는 것 뿐이라고 말하지만 이피게니에는 모든 걸 신들의 손에 맡겼다며 거절한다. 하지만 아르카스는 신들은 인간의 손으로 인간을 구한다는 말을 한다. 타우리스를 떠나려는 이피게니에를 아르카스는 다시 일깨워 혼란 스럽게 한다.
필라데스는 도망쳐 바닷가로 간 후의 이야기를 이피게니에에게 전한다. 오레스트는 기쁨과 욕망으로 평온해 졌고, 이제 여신상 만을 가지고 떠나면 된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피게니에는 토아스 왕의 사자인 아르카스가 왕에게 갔다 다시 돌아온다는 것을 말하고, 자신은 신성한 권리를 거짓말로써 이용할 수 없었음을 밝힌다. 예상치 못한 위험에 직시한 필라데스는 또다시 묘안을 내 놓으며, 이피게니에를 다시 설득한다. -67-
필라데스 : 상황이 위험스럽게 꼬이네요. 하지만 그렇다고
겁먹거나 분별없이 성급하게 서두르므로써
우리의 본색을 드러내지는 맙시다. 차분히
사자가 돌아오기를 기다리십시오. 그리고
그가 와서 무슨 말을 하건 입장을 고수하십시오.
그런 의식을 주재하는 권한은 사제의
몫이지 왕의 몫이 아니니까요.
그리고 사자가 광기 때문에 몹시
시달리는 이방인 청년을 보자고 하면
우리 두 사람을 신전 안에 잘 감금하고 있는
척하면서 거절하십시오.
그렇게 우리에게 숨돌릴 틈을
만들어 주시면 되도록 서둘러 그 성스러운 보물을
거칠고 저속한 족속에게서 빼앗아 달아나겠어요.
아폴로 신께서 우리에게 최선의 징조를 보내 주고 계십니다.
우리가 성실하게 조건을 충족시키기도 전에
이미 신께서 훌륭하게 약속을 지키겠습니다.
오레스트는 해방되었고 치유되었습니다!―오,
순풍아, 우리를 해방된 자와 함께 아폴로 신께서
거주하시는 바위섬으로 데려가다오.
그 다음에는 미케네로. 그러면 미케네가 다시
살아나고 불꺼진 화덕의 재를 헤치고
가정의 수호신들이 즐겁게 다시 일어나며
화려한 불이 그들의 집들을 구석구석
밝게 비칠 것이다. 누님이 맨 먼저
황금향로에서 유향을 꺼내 그들에게 뿌리셔야 합니다.
누님이 생가에 다시 축복과 생명을 가져오시고
속죄하여 저주를 추시고 가족을 싱싱한
생명의 꽃으로 새로이 화려하게 장식하실 것입니다.
그녀는 동생을 구하며, 조국으로 돌아가게 되는 대신 여신상을 훔치고 자신의 생명의 은인을 속이라는 이중의 악행을 저질러야 하는 것에 대해서 고뇌한다. 그러면서 그녀는 어릴 적에 들었던 운명의 여신들의 분노의 노래를 기억해 낸다. 아르카스는 토아스 왕에게 사제가 포로들을 도와 도망친다는 소문이 들리고 있음을 알리고 토아스 왕은 사제를 불러드리라고 한다. 토아스는 자신이 관용을 배푼 에피게니에 에게, 그리고 그녀에게 호의를 배푼 자신에게 분노를 느낀다. 그녀에게 노예의 대접이 아닌 호의를 배푼것에 대한 후회를 한다.
토아스는 이피게니에를 불러 제사를 미루고 있는 이유에 대해 묻는다. 그녀는 아르카스에게 소상히 말했다며 말하길 거부하지만 토아스 왕은 그녀의 입을 통해 듣고 싶다고 말한다. 그녀는 여신이 왕꼐 통촉할 시간을 주기 위해 제사를 미룬다고 했으나, 이 이유는 토아스왕에게 통하지 않는다. 이피게니에는 낯선 사람 누구나 성스럽게 대하라는 율법을 이유로 이방인을 제물로 받치는 것을 미룬다고 말하지만 이는 오히려 권력자의 심기, 토아스 왕의 심기를 거슬리게 되는 것이었다. 그녀는 제물로 받혀질 이방인을 자신과 같은 처지로 보며, 여자의 연약함으로 대항하지 못하는 그녀를 존중해 줄것을 요구한다. 이토록 이방인 두사람에 대한 지나친 동정심과 걱정을 하고 있는 이유를 토아스 왕은 묻고 그녀는 이방인 중 연장자가 자신의 아우 오레스트 이고 다른 한사람은 그의 절친한 동무 필라데스라고 밝힌다. 그리고 자신들에게 호의를 배풀어 줄것을 부탁한다. 아트레우스 가문의 마지막 희망은 오레스트에게 달려있고, 그녀가 고국에 돌아가 집안의 죄를 씻게 해 달라고 토아스 왕에게 말한다.
이피게니에는 토아스 왕과 함께 오레스트 일행이 있는 곳으로 간다. 계략을 실토하고 모든 운명을 토아스 왕에게 맡긴 그녀는 토아스 왕에게 경의를 표할 것을 오레스트에게 말한다. 토아스는 오레스트 일행을 포위한 병사들에게 칼을 거두라는 지시를 내리며, 토아스와 오레스트, 이피게니에가 이야기를 하고 있는 동안 누구도 해치지 말라는 명령을 내리고, 오레스트도 휴전을 받아들인다.
이피게니에는 참혹한 싸움이 일어나지 않게끔 토아스에게 분노를 삭히고, 오레스트에게 젊은 혈기를 다스릴 것을 요구한다. 토아스 왕은 오레스트에게 이피게니에의 동생이 맞는지 확인하려하고, 오레스트는 결투를 신청하므로써, 자신이 위대한 제왕의 아들임을 증명하려 한다. 오레스트는 자신이 결투에서 이기면 이피게니에, 필라스트, 오레스트의 자유를 줄 뿐만 아니라 이방인 전체의 자유를 요구한다. 대신 그가 패하면 그들의 사형선고도 자신과 함꼐 내려진 것으로 하라 한다. 이피게니에는 이를 반대하며, 결투는 남성의 명성을 영원토록 만들지만, 뒤에 남은 여인은 눈물만 나을 뿐이라며, 이 결투를 막으려 한다. 그러나 토아스 왕의 성스러운 여신상을 탈취하러 왔다는 것 자체가 수수방관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극적으로 오레스트의 저주에 대한 새로운 해석으로 결투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아폴로가 말한 누이란, 아폴로의 누이가 아닌, 오레스트의 누이인 에피게니에 였던 것이다. 에피게니에는 토아스 왕에게, 스피타이인을 자신의 고향에서 만나기로 하겠다면 환대와 선행하겠다는 것을 약속하고 타우리스 해변을 떠났다.
Ⅲ. 근대의 계몽과 휴머니즘적 관점에서
유럽의 문화의 모태라고 할 수 있는 그리스·로마 신화는 유럽의 여러 문학 작품에 도용되었다. 괴테의 『타우리스의 이피게니에』역시 신화를 바탕으로 한 드라마인데, 이는 에우리피데스의 에피게니에 와는 다른 경향을 보이고 있다. 문학, 예술 과 같은 전반적인 문화가 그 시대의 사회와 경향을 반영하듯이, 괴테의 『이피게니에』 역시 그 시대의 물결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에우리피데스와 괴테는 트로이 전쟁의 전설적 후일담에 해당되는 한 여인의 운명을 통해 두 작가가 살던 시대의 역사적 갈등에 대한 문학적 대응과 비판적 성찰을 시도하고 있다. 근대의 계몽과 휴머니즘적 관점이라는 것은 「에우리피데스와 괴테의 {이피게니에}에 나타난 신화와 계몽」을 요약 정리한 것이다.
에우리피데스의 작품에서 신화적 요소가 개인의 운명을 좌우하는 역사적 힘의 상징으로 나타난다면, 괴테의 『이피게니에』에서 신화의 세계는 아주 희미한 배경으로만 문제된다. 이러한 차이는 극적 갈등의 구도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온다. 에우리피데스의 이피게네이아는 귀향에의 간절한 소망에 못지 않게 오레스테스의 환상까지도 똑같이 공유하고 있으며, 두 자매가 재회한 이후 토아스 왕을 계략으로 속이는 과정에서 그녀가 오히려 주도적인 역할로 나서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그녀는-그녀의 성격을 규정하는 불행의 직접적 발단이 다르다는 차이를 제외하면-오레스테스의 인간형과 뚜렷이 구별되지 않으며, 그 둘은 요컨대 전통적 운명비극의 전형에 속하는 인물들이다. 그 반면 괴테의 이피게니에는 그녀의 의지와 무관하게 덧씌워진 과거의 숙명적 구속에서 멀리 벗어나 있으며, 이 점은 작중의 다른 인물들에게도 마찬가지로 해당된다. 이로써 새롭게 전개되는 인간 관계 및 갈등의 양상은 외적 상황으로 주어진 운명과의 싸움이나 승패 여부가 아니라, 개개인이 어떻게 자율적 주체로 성숙할 수 있는가 하는 주제로 모아진다.
작품의 발단에서부터 가장 두드러진 차이는 이피게니에의 역할이다. 타우리스에서 아르테미스 신전의 사제 노릇을 하고 있는 애초의 상황은 같지만, 그 사이에 그녀는 토아스 왕을 설득하여 이방인들을 제물로 바치는 의식을 중단시켜 놓았다. 그런 사실 자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작품에서도 '야만족'의 왕으로 등장하는 토아스 왕이 그녀의 말에 설득된 경위이다. 우선 이피게니에가 처음부터 자기 신원을 밝힌 것도 토아스 왕의 신임을 얻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에우리피데스의 작품에서 그녀는 오레스테스와 재회하여 함께 토아스 왕을 속이고 도망가려던 계획이 좌절당하는 궁지에 몰려서야 자신의 신원을 밝힌다. 여기에는 말하자면 토아스 왕이 '대화'로 상대할 위인이 아니라는 인식이 전제되어 있으며, 그녀가 꾸며낸 꾀에 순진하게 넘어가는 토아스 왕의 우스꽝스러운 모습도 그런 인식과 짝을 이룬다. 그리스 인의 눈에 비친 토아스 왕은 어디까지나 '야만인'이며, 작품의 결말까지 토아스 왕에게선 야만의 낙인이 지워지지 않는다. 그에 비하면 괴테의 작품에서 그리스와 타우리스를 나누는 '문명'과 '야만'의 격차라는 것은 이피게니에와 토아스 왕 사이의 인간적 관계에 비하면 부차적인 셈이다. 두 사람의 관계는, 적어도 토아스 왕의 입장에서는, 그런 의미에서 대등한 인격적 관계 이상의 것이다. 토아스 왕은 이피게니에한테 청혼을 해놓고 있는 것이다. 괴테의 작품에서 극적 갈등의 양상이 판이해질뿐 아니라 두 인물이 에우리피데스의 작품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중심적 비중을 갖게 되는 근거가 여기에 있다.
갈등의 한 가닥은 토아스 왕의 청혼을 이피게니에가 받아들이지 못하는 데서 비롯된다. 이피게니에는 피의 제물을 바치는 악습을 중단시킴으로써 전쟁의 참화를 겪고난 타우리스 백성들에게 새로운 평화를 정착시키는 여사제로서 이미 신망을 얻고 있다. 따라서 그녀가 이방인이라는 사실은 이 혼사에 하등의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 또한 전쟁에서 아들을 잃은 토아스 왕은 왕통을 잇기 위해서라도 이 청혼을 성사시켜야 할 입장이다. 토아스 왕 자신의 고백을 빌리면 전란을 겪고나서 민심이 흔들리는 상황이므로 이 혼사는 그에게 왕권의 존립이 달린 문제이기도 하다. 이피게니에의 입장에서도 토아스 왕에게 입은 은혜는 그의 청혼을 받아들이기에 모자람이 없어 보인다. 어떻든 이방인인 자신에게 자비를 베풀어 목숨을 구해주었을뿐 아니라 그녀의 요구를 받아들여 타우리스 족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오랜 관습까지 바꾸어 놓았다면 토아스 왕의 관용정신은 이미 입증된 셈이기 때문이다. 이 모든 사정을 잘 아는 이피게니에가 청혼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당연히 타우리스의 왕비가 되어 누릴 행복보다 풍지박산난 가족사의 고통이 여전히 더 큰 무게로 짓누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토아스 왕의 호의와 친절에도 불구하고 버림받은 존재라는 느낌에서 헤어나지 못하며, '여건이 허락하면 무사히 고향으로 돌아가게 해주겠다'는 토아스 왕의 한때 약속에만 희망을 걸고 있다. 양쪽의 소망은 나름대로 똑같이 절실하다. 하지만 각자의 절박한 사정과는 다른 차원에서, 이피게니에의 거부가 무엇보다 남녀간의 '감정'의 문제임을 먼저 알아보는 쪽은 토아스 왕이라는 사실을 여기서 기억해둘 필요가 있다. 청혼 수락을 압박해 오는 토아스 왕과 이피게니에가 주고 받는 다음 대사에서 그것이 완곡하게 드러난다.
이피게니에: 그러나 소녀는 신들이 동의하지 않는 이 결합을 맺지 말라는 확고한 신념을 주신 신들에게 감사합니다.
토아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신이 아니라 그대의 마음이오.
이피게니에: 신은 우리 인간의 마음을 통해서만 인간에게 말씀하옵니다.
이피게니에가 '신의 뜻'을 입에 올리는 것은 그녀의 입장에서는 물론 자기 가족에게 내린 저주를 지금의 불행한 현실로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녀가 탄탈로스 일족의 딸임을 이미 알고 있는 토아스 왕에게 이 혼사로 인하여 또 어떤 불행이 닥칠지 모른다는 경고와 배려의 뜻까지도 함축한다. 더구나 그녀는 지금 타우리스인들의 신이기 전에 그리스 전체의 신인 아르테미스 여신을 모시는 사제인 것이다. 그렇지만 토아스 왕이 피의 제물을 바치는 의식을 거두어들였다면, 신의 뜻인 줄 알았던 그 의식이 실은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악습임을 시인한 셈이며, 같은 이유에서 이피게니에의 몸에 탄탈로스의 피가 흐른다는 사실이 그에겐 결코 결합의 장애가 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신은 인간의 마음을 통해서만 인간에게 말씀하신다'는 이피게니에의 말은 결국 그녀의 '마음'이 문제라는 토아스 왕의 해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두 사람의 마음과 요구가 이렇게 어긋나 있는 교착 상태가 새 국면을 맞는 것은 오레스트의 등장을 통해서이다.
괴테의 작품에서도 오레스트와 그의 사촌 필라데스는 아폴로의 신탁에 따라 타우리스에 와서 타우리스 인들에게 붙잡히는 신세가 된다. 여기서 오레스트와 이피게니에가 자매간인 줄 아직 아무도 모르는 시점에 토아스 왕은 두 포로를 이피게니에에 대한 청혼 압박의 수단으로 끌어들인다. 토아스 왕의 말을 빌리면, 백성들 사이에는 왕자의 전사가 왕의 부덕 탓이며 그럼에도 타우리스의 오랜 관습인 제물 공양을 중단한 것은 불경한 처사라는 소문이 돈다는 것이다. 이미 언급한대로 전란 후 민심을 수습해야 하는 토아스 왕의 처지에서 보면 그런 소문은 한낱 '그리스 여자' 때문에 예전같지 않게 우유부단해진 토아스 왕에 대한 불만의 소리일 것이며, 그 불만의 배후에는 왕권을 넘보는 세력도 있을 거라는 추측까지도 가능하다. 따라서 토아스 왕으로서는 이피게니에와의 혼사가 이 위기를 타개할 유력한 방책으로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것이 된다. 이 곤경에서도 토아스 왕 나름으로는 강제로 그녀를 아내로 삼는 최악의 경우(이피게니에 자신도 그 가능성마저 상상할 만큼 궁지에 몰려 있긴 하지만)는 피해서 백성들의 요구에 따라 다시 피의 제물을 바쳐야 겠다는 것이며, 때마침 오레스트와 필라데스가 제물로 바쳐지기 위해 포로로 잡혀 있는 상황이다. 협박하는 왕과 저항하는 이피게니에 사이의 설전에서 두 사람은 제각기 앞에 인용한 대화에서와는 정반대의 논리를 취하고 있다.
이피게니에: 하늘에 계신 신들이 피에 굶주려 있다고 생각하는 자는 신을 잘 모르는 것이옵니다. 자기 자신의 잔인한 욕구를 신들에게 전가하는 것일 뿐이옵니다.
토아스: 성스러운 관습을 쉽게 변하는 이성으로 우리의 뜻에 따라 이리저리 해석하는 것은 우리 인간에게 합당한 일이 아니오.
지금까지 관용의 미덕을 보여오던 토아스 왕은 폭력을 정당화하는 제의적 의식에 호소하려 하며, 이피게니에를 만나기 이전의 야만으로 떨어질 고비에 이른 것이다. 이 문맥에서 토아스 왕의 주장은 이피게니에의 말대로 그의 '욕구'를 채우기 위한 구실일 뿐이다. 그러나 '이성의 변덕'에 관한 토아스 왕의 언급은 이피게니에와 오레스트의 재회 이후 작품의 결말까지 이어지는 또다른 문맥에서 조명될 필요가 있다.
피의 의식을 다시 시작하려는 토아스 왕의 의지는 확고하며, 바로 그 시점에 재회한 두 남매는 결국 타우리스 탈출을 시도한다. 에우리피데스의 작품과 달리 이 대목에서 토아스 왕을 속이기 위해 계책을 꾸며내는 것은 퓔라데스이며, 이피게니에는 그의 각본대로 토아스 왕을 따돌리는 수동적인 역할만 맡는다. 그렇지만 토아스 왕의 은혜를 잊지 않고 그를 마지막까지 '제 2의 아버지'라 여기는 이피게니에는 차마 왕을 속이지 못한다. 그녀는 제물로 잡혀 있는 청년이 자신의 남동생이라는 사실을 고백하면서 자기 남매를 고향으로 돌려보내줄 것을 호소한다. 토아스 왕은 그러나 "그리스인 아트레우스가 듣지 않았던/진리와 인정의 목소리를/거친 오랑캐 스키타이인이 들을 거라 생각하시오?"라며 화를 터트릴 뿐이다. 이 위기상황에 뛰어든 오레스트는 아가멤논 왕의 후예답게 타우리스에서 가장 뛰어난 장수와 결투하여 승부를 판가름짓도록 허락해줄 것을 토아스 왕에게 청하며, 뜻밖에도 토아스 왕 자신이 그 결투의 상대로 나선다. 이 장면에서 이피게니에는 사내들의 '공명심'보다 소중한 것은 '여인의 눈물'임을 애절하게 호소하면서 결투를 막으려 하고, 그녀의 호소에 토아스 왕은 분노를 억누르면서도 결투만큼은 되물릴 수 없는 이유를 이렇게 밝힌다.
그대 스스로 고백했듯이 그들은
짐에게서 성스러운 여신상을 탈취하러 왔소.
그대들은 짐이 그것을 수수방관하리라 생각하오?
그리스인들은 수시로 탐욕의 눈길로
값진 모피와 준마, 아름다운 여인 등등
저 멀리 야만족들의 보물을 넘보고 있소.
그러나 폭력과 간계를 쓴다고 해도 그들이
획득한 재물과 함께 늘 무사히 돌아가지는 못할 것이오.
에우리피데스의 토아스 왕이 그리스의 '힘'에 굴복한 것과 똑같은 이유에서 괴테의 토아스 왕은 그 힘에 힘으로 맞서겠다는 것이다. 괴테의 작품에서 오레스트는 신상 탈취를 위해 간계를 정당화한 퓔라데스를 '지략가 오뒤세우스'라 비꼬며, 그런만큼 정직한 성격의 소유자인 오레스트의 결투 신청은 신성한 정의감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토아스 왕이 보기에 그 당당한 영웅심의 밑바닥에는 '변방의 보물'을 탈취하기 위한 야욕이 도사리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더 이상 이피게니에의 마음을 돌릴 수 없는 '변방의 왕' 토아스가 왕의 직분에 충실하려면 나라의 보물을 지킬 권리와 의무를 다하는 도리밖에 없다. 이피게니에를 소재로 한 괴테 시대의 여러 판본들은 이 장면을 토아스 왕의 죽음으로 끝내면서 막을 내렸다고 한다. 에우리피데스 시대와는 비교되지 않게 민족주의의 발흥기였던 18세기 유럽의 관객들은 신분의 차이를 떠나 그런 대단원에 매우 흡족했을 것이다. 그러나 괴테의 작품에서 이 마지막 장면은 불가사의한 화해로 매듭된다. 토아스 왕의 발언에서 오레스트는 자기가 되찾아야 할 것은 '아폴로의 누이' 아르테미스의 여신상이 아니라 '혈육의 누이' 이피게니에라는 사실을 깨달으며, 오레스트와 이피게니에의 마지막 호소에 결국 토아스 왕은 "잘 가시오"라는 마지막 인사와 함께 이들을 보내주는 것이다.
이 마지막 장면은 여러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무엇보다 '여신상'의 알레고리는 그리스 인이든 타우리스 인이든 똑같이 섬기는 우상임이 밝혀진다. 그 우상의 실체가 명예와 부와 권력을 탐하는 인간 자신의 욕망임은 물론이다. 또한 그 우상을 정당화하는 어떠한 명분과 이성도 힘의 논리에 근거해 있으며, 여신상/이피게니에를 둘러싼 결투의 위기에서 보듯이 그 힘과 힘의 충돌은 결국 인간의 상실로 귀착될 수밖에 없다는 것도 분명해진다. 이렇게 해서 괴테는 에우리피데스 시대에 인간에게 억압적 숙명의 악순환을 강요하던 여신상을 폴리스의 신전에서 끌어내려 근대의 토양 위에 휴머니즘의 새로운 기념비를 세우고 있다. 그런 뜻에서 괴테의 {이피게니에}는 독일인들에게 고전적 휴머니즘의 정수로 두고두고 받들어졌지만, 불행하게도 그들의 역사는 야만의 극단으로 치달았음을 우리는 기억한다. 사실은 이 작품을 쓰고 있던 '작가' 괴테와 바아마르의 '정치인' 괴테 사이에도 불가해한 심연이 가로놓여 있었다. 괴테가 이 작품을 쓰던 당시 독일의 강대국 프로이센은 바이에른 왕위계승 전쟁에서 유럽의 최강국 오스트리아에 대항하기 위해 작센-튀링엔 공국에 군사지원을 요청했는데, 당시 '전시(戰時) 위원회' 위원장 직을 겸하고 있던 괴테는 징집업무를 총괄하여 책임지고 여러 지방을 돌아다니며 '지원병들을 면접하면서 다른 한 손으로는 {이피게니에}를 써야 하는' 괴로운 심경을 토로하기도 했으며, 또 난리통에 생계가 끊긴 '양말 직조공들의 참상을 모르는 듯이 토아스 왕은 너그럽게 말해야 한다'고 자조하기도 했던 것이다. 그렇게 보면 아도르노가 지적했듯이 괴테의 고전적 휴머니즘은 '이상적인 화해를 표현하는 듯한 예술의 자율적 형식 속에서 현실에서는 화해불가능한 상태의 긴장을 응축시킨' 것인지도 모른다. 실은 그 화해불가능한 긴장이 작품의 마지막에 긴 여운을 남긴다. 토아스 왕과의 화해를 통해 이피게니에는 마음 속에 '제 2의 아버지'를 얻으며, 그 화해를 통해 비로소 가능해진 그녀의 귀향은 따라서 자신을 제물로 바쳤던 생부 아가멤논의 죄씻음에 값하는 행복을 보증할 것이다. 그러나 홀로 남겨진 토아스 왕은 온 나라가 섬기던 여신상이 돌조각에 불과하다는 깨달음은 얻었을지 몰라도, 자신의 명운을 걸었던 이피게니에를 잃은 슬픔이 그런 깨달음으로 메워지지는 않을 것이다. 신탁의 비밀을 발견한 순간부터 두 자매의 긴 호소가 끝날 때까지 오직 "잘 가시오"라는 말밖에 하지 못하는 토아스 왕의 침묵은 달리 설명될 수 없을 것이다. 결국 그리스인 이피게니에와 타우리스인 토아스가 주고받은 것은 말의 온전한 의미에서 인간적·인격적 차원의 등가교환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사에서 도대체 '교환'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옳은 진리일 그 깨달음을 얻은 대가로 삶의 전부를 잃는, 그 사실을 너무 잘 아는 토아스 왕의 관용이 없다면 이피게니에는 일찍이 에우리피데스의 주인공이 겪었던 저 숙명적 악순환의 굴레로 되돌아가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Ⅳ. 참고문헌 및 사이트
김인구, 「유럽적 현대성의 해석자로서의 괴테 - 몇가지 테제」
김희열, 「안티케 소재 엘렉트라 비교 고찰」
인성기, 「독일 고전주의의 두갈래- 괴테의 『에그몬트』와 쉴러의 『에그몬트』 비교분석」, 독일어문학 제22집
임흥배, 「에우리피데스와 괴테의 {이피게니에}에 나타난 신화와 계몽」
정서웅, {이탈리아 기행}에 나타난 괴테의 세계관
독일 고전주의의 두 갈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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