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청난 성공과 그에 따르는 대가. 크리드는 충분히 지칠 만했다. 하지만 그들은 예정대로
다시 일어났다. 어깨를 짓누르는 온갖 기대들 속에서, 과거의 성공노선을 반복하기보다는
새로운 시도를 감행했다. 그리고 그 노력의 결실들이 새 앨범 「WEATHERED」에 고스란히
담겨진 것이다.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 크리드에게 딱 어울리는 말이다. 너바나, 펄 잼, 앨리스 인
체인스를 잇는 크리드의 포스트-그런지 사운드는 동시대의 필을 딱 맞춘 약삭빠른
프로덕트였다. 그런지는 확실히 죽었지만 크리드는 이를 오늘날 키드들의 구미에 맞게 잘
요리해내었던 것이다. 하드코어, 혹은 얼터너티브 메틀로 통칭되는 현재의 메인스트림 헤비
씬의 방법론과 과거 그런지의 향수를 적절히 안배해냈던 그들은, 지난 1999년 발매된
[Human Clay]로 멀티플래티넘을 기록하며 수많은 싱글곡들을 차트에 올렸다. 이들의 인기는
그야말로 'Higher’로 하늘 높은 줄 몰랐다. 한편 밴드의 보컬리스트, 스콧 스탭(Scott
Stapp)이 싱글곡 타이틀을 딴 ‘The With Arms Wide Open’이라는 자선단체를 설립, 자신의
아들과 같은 어린 아이들을 돕고자 애쓰는 모습은 보기 좋았다.
하지만 이러한 성공가도를 달리던 중에도 여러 이슈들이 그들을 가만두지 않았다. 특히
이들을, 아니 스콧 스탭을 가장 아니꼽게 보았던 이는 다름 아닌 림프 비즈킷의 프레드
더스트였다. 작년 6월 한 무대에서 프레드는, 스콧이 마치 마이클 잭슨이나 된 양
행동한다며 그에 대해 ‘Funking Punk(조무래기)’라며 욕설을 했고, 스콧은 이에, 림프
비즈킷이 크리드 무대 전에 서게된다는 것이 분통이 나서 지껄인 말이라고 맞받아친 일이
있었다. 이후 프레드와 스탭간의 흥미진진한 말다툼이 장기간 미디어를 통해 공개되기도
했다. 그리고 작년 크리드에게 있어 최대의 사건은, 바로 밴드의 베이시스트인 브라이언
마샬(Brian Marshall)의 탈퇴일 것이다. 브라이언은 작년 여름 한 라디오와의 인터뷰에서
“펄 잼은 무너지고 있다. 그들의 곡에는 훅이 없다”라고 잘난 척을 늘어놓다가 밴드
내에서도 ‘왕따’를 당했고, 크리드 측은 브라이언의 이 엄청난 언사에 대해 “이와 같이
오만하고 어리석은 발언에 대해 어떠한 용서도 있을 수 없다”라고 판단, 즉각 펄 잼에게
사과의 뜻을 표명했다. 그리고 작년 8월, 크리드가 한창 무르익은 인기를 자랑하고 있을 때
브라이언은 팀으로부터 퇴출당하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는데 이에 브라이언은 무척이나
충격을 받았지만 현재는 ‘Grand Luxx’라는 새 밴드에서 열심히 활동을 하고 있는 중이다.
목사 아버지 밑에서 엄한 교육을 받고 자라났던 모범 시민인 스콧 스탭은, 브라이언의
그러한 불손한 행동에 대해 용서를 할 수 없었나 보다.
“우리는 그간 깎일 대로 깎이며(Weathering) 살아왔다. 한마디로 넉다운되었다. 하지만
다시 정신을 차리고 계속 나아가고 있다. 정말로 모든 일이 돌연히 일어났다. 우리가
스스로를 움직일 수 있음을 느꼈다. 부정적인 앙갚음에서가 아닌 긍정적인 방향으로….
사람들이 무어라고 말하든 다만 우리 방식대로 나아갈 것이다.”그 동안 성공에 따르는
온갖 일을 겪은 스콧 필립스(Scott Phillips, 드럼)의 말이다.
그래서 크리드의 새 앨범이자, 세 번째 정규 앨범의 타이틀은 [Weathered]가 되었다. 새
앨범은 새로운 베이시스트를 영입하지 않은 채, 스콧 스탭, 마크 트레몬티(Mark Tremonti,
기타), 스콧 필립스 3명이 똘똘 뭉쳐 만들었는데, 브라이언의 탈퇴 이후 밴드의 라이브
무대를 도왔던 브렛 헤스틀라(Brett Hestla: Virgos Merlot의 프론트맨)가 자신의 밴드
앨범 작업에 몰두하기 위해 크리드에 무심할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이들 세 명이 단결할
수밖에 없었던 것. 그리고 오랫동안 정규 베이시스트 멤버 없이 활동을 해왔던 이들은 이에
대해 아직까지는 큰 불편함을 못 느낀 듯하다.
새 앨범에서 스콧과 마크는 멋진 팀을 이루어 곡 작업을 진행했으며 밴드는 이에 꽤나
만족하고 있다. 앨범이 나오기 전부터 이들은 팬들에게 잔뜩 기대감을 불어넣었는데,
밴드의 관계자는 한 인터뷰에서 새 앨범이 (과거 스콧이 락 음악에 빠져들도록 했던
앨범이기도 한) U2의 [The Joshua Tree]만큼이나 임팩트를 줄 것이라 장담하기도 했다.
한편 전작들([Human Clay](99), [My Own Prison](97))과 마찬가지로 또 다시 프로듀서로서
존 쿠르즈베그(John Kurzweg)가 도왔다.
새 앨범 [Weathered]는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멜로디의 감수성을 최대한 살린 발라드한
곡들이 존재하긴 하지만, 곳곳에서 변화의 시도들도 보이고 있다. 물론 이 변화는 예상
가능한 것들이긴 하다. 최근 헤비 씬에 경도되는 듯한 모습을 보였던 이들이기에 충분히
헤비한 사운드를 보이고는 있지만, 크리드만의 아이덴티티를 찾으려는 노력도 감지되고
있다.첫 트랙 'Bullets'의 인더스트리얼적인 색채는 툴(Tool)을 연상시킬 만큼 헤비하며
넓은 사운드 스케이프를 선사하고 있는데, 스튜디오 처리된 기타 사운드와 각종 효과음이
곡의 느낌을 잘 살리고 있다. 이어지는 'Freedom Fighter'에서 반복적인 리듬이 가져온
최면적인 느낌은 바로 툴의 그것으로, 그들의 사운드가 좀 대중적으로 변한다면 이러할
듯하다. 겹겹이 쌓여진 레이어들이 'Bullets'와 마찬가지로 폭넓은 사운드 스케이프를
선사하고 있다. 하지만 이 두 곡은 전반적인 앨범의 모습과는 다른 것으로, 앨범 안에는
다양한 시도들이 감지된다. 'Who's Got My Back?'이 그 대표적인 예로, 위의 곡들과는 또
다른 느리고 명상적인 사운드의 작품이다. 체로키족의 인디언 보컬리스트 보 테일러(Bo
Taylor)가 게스트로 참여하였고 토속적인 퍼커션이 삽입되는 등 에쓰닉한 느낌을 주는
(러닝타임 8분 26초의) 다크 발라드로, 이것은 크리드의 새로운 시도이다. 이어 'Signs'는
이번 앨범에 자주 흐르는 스튜디오 처리로, 웅웅대는 기타 사운드와 크리드 특유의 멜로디
감수성이 조화된 트랙. 한편 'One Last Breath'는 클린 톤의 기타 사운드와 크리드의
트레이드마크인 멜로디가 이어지는 전작의 싱글들을 연상시키는 편안한 작품, 현악
어레인지로 한층 부드러운 사운드로 태어났다. 이번 앨범의 첫 싱글이기도 한 'My
Sacrifice'은 풍부한 멜로디와 사운드 스케이프를 선보이는데, 녹음 당시 밴드는 싱글로
채택할 정도의 매력을 느끼지 못했으나 엔지니어 커크 켈시(Kirk Kelsey)의 믹싱 과정을
거친 후 싱글로 결정되었다고. 'Hide' 역시 'One Last Breath'와 함께 크리드 특유의
차분한 멜로디 감수성이 엿보인다. 한편 'Don't Stop Dancing'에서는 스콧의 여동생 에이미
(Amy)가 스페셜 보컬리스트로 참여해 하모니를 넣었다. 본래 페이쓰 힐(Faith Hill)을
끌어들이려 했으나 그녀가 임신을 한 상태여서 에이미가 참여하게 되었다고. 앨범은 편안한
어쿠스틱 트랙 'Lullaby'로 마무리된다.
크리드의 전작들이 포스트-그런지에 경도된 어떠한 틀 안의 사운드였다면, 다소 다양한
모양새를 갖춘 본작의 시도들은 고무적인 일로 여겨진다. 하지만 그 시도들이 어떠한
확고한 크리드의 색깔로 소화된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많다. 마치 확고한 아이덴티티로
들어서기 전의 과도기적인 느낌이 강하게 드는 것이다. 라디오 방송을 휩쓸었던 크리드의
차분한 얼터너티브락 사운드만이 크리드의 모든 것은 아니었다. 이러한 다양한 시도들이
어떠한 완결되고 단단한 모양새를 갖출지 다음 앨범에 기대를 걸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