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이 일순간에 원래대로 돌아왔다.
안개는 고요히 흐르고 있었고 바닷물은 조용히 찰박거렸다. 선원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사방을 둘러보았다. 오스발의 경우, 모든 것이 정
상으로 돌아왔다는 느낌은 어깨로부터 다가왔다.
그는 자신의 어깨를 움켜쥐는 조타수 칸나의 손길에서 안도감을 느껴
야 될 지, 공포를 느껴야 될 지 종잡을 수 없었다. 오스발은 잘 안되는
미소를 억지로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칸나의 얼굴을 본 순간
그 미약한 미소마저 싹 달아났다. 최고로 열받은 아피르족의 표정을 정
확하게 구사하며 칸나는 더듬거리는 제국 표준어로 말했다.
"너, 조타수 아니다. 너, 타륜 잡았다. 나, 너 먹는다?"
"우아아아!"
오스발은 언젠가 그러했던 것처럼 갑판 위로 정신없이 도망치기 시작
했고 칸나는 고래고래 욕설을 퍼부으며 그 뒤를 추적했다. 하지만 모조
리 아피르족의 욕설인지라 선원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자유호에서 일어나는 이 일대 소동을 보던 키는 피식 웃고는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선 하리야 선장이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키를 보고 있었
다. 키는 정중한 동작으로 그에게 성전을 건네며 말했다.
"자네라면 가지고 있을 줄 알았지. 고마웠네, 신부."
그리고 나서 키는 먼저 모든 배들은 돛을 내리고 정선할 것을 명령했
다. 선단이 완전히 정지한 다음, 키는 선장들을 자유호로 소환해 그들
에게 일어났던 일을 짤막하게 설명해 주었다. 사정을 이해한 선장들은
자신들이 마법에 걸렸다는 것에 치를 떨었고, 칸나의 경우 오스발을 요
리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돌탄 선장은 조금 멋쩍은 표정으로 하리야
선장에게 사과했다.
"어, 자네 성전 때문에 살았군. 놀려댄 거 사과하겠네."
"성전 때문이 아니라 주님의 도움 때문일세. 돌탄 선장."
하리야 선장은 이렇게 말하며 품안에 있는 성전을 쓸어내렸다. 식스는
창백해진 얼굴로 안개를 바라보다가 키에게 말했다.
"도대체 누가 마법을 건 것일까요? 그리고 이제는 괜찮은 걸까요?"
대답하기 힘든 질문이었고, 그래서 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찌푸
린 눈으로 안개를 쏘아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때 레보스 호에서 건너온
라이온이 불쑥 입을 열었다.
"대드래곤 라오코네스입니까?"
식스를 제외한 다른 선장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고 키는 매서운
눈으로 라이온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라이온은 어깨를 으쓱했을뿐 태연
한 태도로 말했다.
"레보스호에 실려있던 제국백과사전과 카밀카르의 법무대신 라스의 도
움을 받아 조금 조사해본 바가 있습니다."
"왜 그런 조사를 했지?"
"저도 뱃놈이고, 이곳 미노만이 대드래곤의 성지라고 불리는 것 쯤은
알고 있었으니까요. 조사해보니 그건 별명 같은 것이 아니더군요. 쳇.
말 그대로더라구요. 대드래곤의 이름은 라오코네스, 800년쯤 전에 이곳
을 자신의 영토로 삼았다던데요?"
킬리 선장이 경악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그럼 이곳에 정말 드래곤이…?"
키는 라이온을 노려보았다.
"말투가 곱지 못하군."
라이온은 히죽 웃었다.
"저란 놈이 원래 그런것 잘 아시지 않습니까. 뭐, 그래도 눈물콧물 다
쏟아내며 우리들을 드래곤의 아가리로 끌고 왔냐고 지랄을 떠는 것보다
야 낫지 않습니까?"
키보다 식스가 먼저 노해버렸다.
"라이온 임시 선장! 지금 그게 무슨 말투인가. 지금 선장님을 힐난하
는 건가?"
그러나 키는 손을 들어 식스를 제지하고는 라이온에게 말했다.
"그래. 네놈은 원래 그렇지. 그리고 조급한 면도 좀 있고."
라이온은 멀뚱한 얼굴로 키를 보았다. 키는 여유있는 미소를 지었다.
"네말은 다 맞다만 충분하지는 않다. 돌아가서 카밀카르의 법무대신과
함께 백과사전을 뒤져봐라. 드래곤이 좋아하는 것이 뭔지를 말이다."
카밀카르의 법무대신이자 현재는 노스윈드의 포로 신세인 라스 카밀카
르는 의자에서 반쯤 일어선 엉거주춤한 자세로 라이온 임시선장을 바라
보았다. 라스의 표정은 차갑게 얼어붙어 있었다. 라이온은 멀뚱한 얼굴
로 라스를 마주보다가 말했다.
"괴이한 표정입니다. 예, 좋아요. 입술을 조금만 더 뒤집으시고 코를
약간 더 격렬하게 벌름거리시면 완벽하겠습니다. 아, 훌륭합니다. 제가
지금까지 본 것 중 최악의 얼굴이 탄생하는 역사적인 순간이군요. 소감
한 마디 말씀해주시겠습니까?"
"지금… 어, 어떻게 농담을 하는 거요?"
"저야 사정을 모르니 왜 놀라야 되는지도 모르지요. 설명해 주시면 저
도 비슷한 표정을 짓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래, 드래곤이 좋아하는 것
이 뭡니까?"
라스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맙소사, 이건 안돼… 말도 안돼. 그 자가 어찌 감히…."
라이온은 슈마허를 향해 얼굴을 돌렸다. 그리고 슈마허 역시 어리둥절
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을 보고는 포기하는 심정으로 라스가 진정되기
를 기다렸다. 슈마허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각하. 왜 그러십니까? 드래곤이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데 그러십니까?"
"…그걸 모른단 말이오? 슈마허 경 당신이나 라이온, 두 사람 모두 똑
같은 얼간이군, 그래!"
졸지에 동격이 되어버린 슈마허와 라이온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다가
함께 라스에게 시선을 돌렸다. 라스는 흐느끼듯이 말했다.
"옛 이야기 그대로요. 슈마허경. 어린 시절 할머니나 할아버지께 이야
기를 졸라대던 시절을 떠올려보시오. 못된 드래곤이 나오는 이야기, 용
감한 기사가 등장하여 드래곤을 물리치는. 그래, 그 멋지고 잘났다는
기사는 도대체 왜 드래곤을 물리친답니까? 라이온 선장, 슈마허 경, 슈
마허 경. 모르시겠소? 그 이유를 정말로 모른단 말이오?"
슈마허는 얼떨떨함 반, 한심함 반인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도대체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군요. 옛 이야기라니. 그러니까 못된 드
래곤은 아름다운 처녀를 잡아먹으려, 려, 려…!"
슈마허는 말끝을 아주 이상하게 마무리하고는 조금전 라스가 구사하던
표정을 똑같이 흉내내기 시작했다. 얼빠진 얼굴로 라스를 보던 라이온
은 자신의 이마를 딱 쳤다.
"아, 그렇다면 율리아나 왕녀를 대드래곤에게? 아름다운 처녀를 잡아
먹는, 아아! 어, 그런데…."
라이온은 갑자기 미심쩍은 얼굴로 라스를 보다가 은근한 목소리로 질
문했다.
"왕녀가 처녀였습니까?"
라이온은 슈마허를 용서할 수 밖에 없었다. 자신의 죄를 알기 때문이
다.
그래서 라이온은 슈마허에게 쥐어박혀서 퍼렇게 멍든 눈두덩이를 쓰다
듬으며 속으로만 낑낑거렸다.
키 드레이번이 율리아나 왕녀를 대드래곤 라오코네스에게 제물로 바칠
생각이라는 것을 라이온이 간파해낸 것은 정오 조금 전이었고, 그 이야
기가 노스윈드의 선단 전체로 퍼져나간 것은 정오 조금 후였다.
하나의 선단 내에서 소문이 퍼져나가는 속도는 상상을 초월한다. 점심
식사 시간을 이용하여 해적들은 재빠르게 이야기를 주고받았고 점심 식
사가 끝날 무렵이 되자 노잡이 노예들마저도 그 이야기를 알게 되었다.
점심 시간 직후 레보스호를 방문한 식스를 향해, 라이온은 고개를 끄
덕이며 말했다.
"합리적이군요? 왕녀와 보물을 동시에 챙긴 다음, 보물을 팔기 위해
테리얼레이드로 향하고, 왕녀는 그 중간의 미노만을 통과하기 위해 이
용한다. 그래서 오닉스가 그 난리를 치는데도 율리아나 왕녀를 태운 것
이군. 쳇. 늙은 선장은 수평선 너머도 내다볼 수 있다지만, 키 선장은
도대체 얼마나 내다보는 거지요?"
식스는 우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키 선장님은 그런 분이니까.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난 그 계획이 마
음에 들지 않네."
"그래도 슈마허만 하려고요."
"그 기사는 뭐라던가?"
"이 눈이 시퍼렇게 된 것이 누구 때문인 것 같습니까? 발광을 하기에
두들겨팬 다음 방안에 가둬놓았습니다. 미노만을 무사통과할 때까진 아
무 것도 주지 않을 생각입니다."
"그래…. 그렇잖아도 그 말 전하러 건너왔네. 아무쪼록 잘 감시하게.
왕녀를 돌려주고 몸값을 받을 생각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버린 이상
포로들이 가만 있을 것 같지 않군."
라이온은 울상을 지어보였다. 익살스럽게.
"너무하는군요. 레보스호의 선원들 대부분은 널판지 위에서 변절한 놈
이란 말입니다. 이럴 줄 알았다면 모조리 바다에 처넣는 건데."
"그럼 레보스호는 어떻게 움직이고? 도리없네, 조심하는 수밖에. 명심
하게. 만약 레보스호가 포로들에 의해 점거 당하거나 하면 말짱 도루묵
이야. 우리가 이런 위험을 무릅쓰고 테리얼레이드로 향하는 이유는 이
배에 실린 보물 때문일세. 이 배만 없다면 왕녀를 드래곤에게 바칠 필
요도 없단 말이야. 포로들도 그 정도는 떠올릴 수 있을 걸세."
"아아, 잘 알겠습니다. 쳇. 이래서 임시 선장 같은 것 되고 싶진 않았
습니다. 난 갑판장 체질이란 말입니다."
라이온의 투덜거림이야 어쨌든 레보스호 내부의 분위기는 험악해질대
로 험악해져 있었다. 원래 카밀카르의 병사들이었던 자들은 눈에 살기
를 띤채 오가고 있었고 상대적으로 소수인 해적들은 긴장한 고양이만큼
이나 신경질적으로 변하고 있었다. 금새라도 칼부림이 일어날 것 같은
분위기 때문에 라이온은 우울했다.
그런 부하들을 통솔하기 위해 눈코뜰새 없이 바쁜 라이온에게 키의 전
갈이 전해진 것은 오후 3시 쯤이었다. 키의 전갈은 단순했다. '달이 뜰
때.' 그리고 라이온은 이해했다. 달이 뜰 때 왕녀를 드래곤에게 바친다.
따라서 저녁 무렵이 고비일 테니 조심하라. 그 때만 넘기면 안전할 것
이다. 라이온은 씁쓸한 심정으로 오늘 달이 몇시 쯤에 뜨는지를 생각해
보았다. 오늘 달은 일몰 후 5시간 쯤 뒤, 자정 무렵에 떠오를 것이다.
현재 노스윈드의 선단에서 율리아나 왕녀만큼 유명해진 인물이 있다면
노잡이 오스발이었다. 오스발의 기행-본인은 기행을 저지른다는 아무
런 인식도 없이 저지르기에 더욱 기행다운 기행-은 해적들 사이에서
무수한 루머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갑판 위로 뛰어올라오고도 오히려 칭찬을 받고, 교수형이 싫다는 이유
로 노예 신분을 고수하고, 마법의 꽃 싱잉 플로라를 제멋대로 다루고,
3천만 데리우스라는 제국에서 가장 높은 현상금이 걸려있는 배를 거뜬
히 움직였던 사내.
그러나 오스발은 현재 자유호의 조타수 칸나가 마음이 바뀌어 자신을
잡아먹으려 들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에 젖어 떨고 있었다. 그가 과민반
응을 보이고 있다고 치부해버릴 수도 없는 것이, 제국 천년의 역사도
아피르족의 식습관을 개선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오스발은 발목에 쇠사슬을 묶고 노 옆에 묶여 있었으면 얼마나 마음
편할까 하는 생각을 계속하고 있었다. 하지만 노예장이 키 드레이번의
명령을 무시하고 그에게 족쇄를 채울 리가 없다. 오스발은 노예장을 불
편하게 하고 싶지 않아서 배 아래로 내려가지는 않았다.
자신이 마음대로 다룰 수 없는 노예가 근처에 있다는 것이 노예장을
얼마나 신경 거슬리게 하는 일인지는 오스발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렇
다고 해서 칸나의 시선이 날카롭게 빛나고 있을 상갑판으로 올라갈 생
각은 더욱 들지 않았다. 그래서 오스발은 넓은 자유호의 선내에서 소속
감을 잃고 이리저리 배회하고 있었다. 그것은 노예에겐 너무 힘든 일이
었다.
계속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걷고 있던 오스발은 문득 자신이 처음 보는
장소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당황한 오스발은 이곳이 어디인지 생각하기도 전에 이곳을 떠날 궁리
부터 시작했다. 하지만 이곳이 어디인지 모르는 바에야 여기를 떠날 방
법을 알 리 없다. 오스발은 혹시나 지나가는 해적들에게 들킬까봐 두려
워하며 무의식 중에 통로 옆벽에 바짝 붙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오스발
의 등이 닿은 곳이 선실의 문이었다. 오스발의 등이 문에 부딪히자 문
저편으로부터 가느다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응? 누구시죠?"
오스발은 제자리에서 굳어버리고 말았다. 여자 목소리? 오스발은 자유
호 내에서는 들릴 리가 없는 목소리에 놀라 경악하다가, 간신히 이 배
에 타고 있는 유일한 여자를 떠올렸다. 율리아나 왕녀? 오스발은 그 깨
달음에 안도감을 느끼기보다 더 짙은 공포를 느껴야 했다. '맙소사!'
율리아나 왕녀가 갇혀있는 곳이라면 노예는 절대 출입해서는 안되는 격
리구역인 것이다.
"왜 등을 보이는 건가요? 몸을 돌리세요."
오스발은 자신의 경악을 다스리지 못한 상태에서 몸에 익은 대로 명령
에 복종했다. 오스발은 뒤로 돌아 선실문의 감시창을 들여다 보았다.
감시창 너머 선실 안쪽으로 율리아나 왕녀의 얼굴이 보였다. 왕녀는
얼굴 가득히 의아함을 담은 채 오스발을 바라보고 있었다.
"식사 시간도 아닌데 뭔가요? 음? 당신 얼굴이 왠지 낯에 익군요. 당
신…?"
잠시 후 오스발과 율리아나 왕녀는 거의 동시에 입을 열었다.
"예. 저는,"
"그 때 그 노예!"
오스발은 공손하게 머리를 조아렸다.
"오스발이라고 합니다. 너무 늦은 사과입니다만,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고귀한 왕녀님." 하지만 율리아나 왕녀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
"당신 말마따나 너무 늦어서 용서해 주려고 해도 어색해요. 그러니 용
서 대신 다음에 언제 당신이 치마 입고 내 앞에서 엉덩방아를 찧던가
해요."
오스발은 입을 쩍 벌린 채 창살 너머의 왕녀를 바라보았다. 치마를 입
으라고? 하지만 왕녀는 별표정도 없는 얼굴로 그를 마주보고 있어서 오
스발은 그녀가 농담을 하는건지 진담을 하는건지 구분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오스발은 역시 무덤덤한 얼굴로 대답했다.
"저, 다른 방법이면 안되겠습니까? 저는 무지한 노예입니다. 어떻게
하면 사과드릴 수 있을지 하명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다른 방법? 모르겠네요. 천천히 생각해봐요."
"그건 안됩니다. 오늘 저녁까지…."
아무 생각없이 말하던 오스발은 흠칫하며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그래
가지고서야 들려줄수 없는 이야기가 있다고 광고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율리아나 왕녀는 창살에 바짝 붙어서며 말했다.
"오늘 저녁이라니, 무슨 말이죠? 가만! 물러나지 말아요. 이야기 하세
요. 그렇잖아도 아까 식사를 가져다 준 해적도 퍽 이상한 표정으로 날
쳐다보더군요.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니 꼭 지금의 당신 같은 얼굴을 하
던 걸요. 오늘 저녁에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거죠?"
오스발은 슬픈 눈으로 왕녀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의 입은 쉽게 열
렸다. 그것은 그의 성격이다.
"…왕녀님께서는 오늘 저녁 만찬에 초대됩니다."
"만찬?"
"물론 왕녀님께서는 많은 만찬에 초대되셨을 듯합니다만, 오늘 만찬에
서 왕녀님이 맡을 역할은 생전 처음이실 것 같군요."
율리아나 왕녀는 잠깐 미간을 찌푸렸다. 왕녀가 만찬에서 맡은 적이
없는 역할이 뭘까? 잠시 후 율리아나 왕녀는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말했
다.
"테이블의 말석인가 보죠?"
"아뇨. 음식입니다."
율리아나 왕녀는 잠깐 동안 말문이 막힌 채 오스발을 바라보았다. 그
녀는 오스발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오스발은 자신
이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알고 있었고, 그래서 체념섞인 태도로 말했다.
"왕녀님은 키 드레이번 선장님이 대드래곤 라오코네스를 주빈으로 개
최하는 만찬에 메인 코스의 음식으로 초대되실 겁니다."
이해는 느렸지만 비명은 빨랐다. 율리아나 왕녀가 소리높이 비명을 지
르는 동안 오스발은 풀죽은 얼굴을 한 채 선실 문 앞에 서있었다.
안개에 파묻힌 미노만 위로 밤의 옷자락이 흘러내렸다. 별빛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암흑 속에서 해적들은 손에손에 횃불을 든 채 갑판에 도열
했다. 그리고 그 사이로 노스윈드 선단의 사나운 선장들이 모두 단정한
옷차림을 한 채 자유호의 갑판 위에 꼿꼿이 서있는 모습이 보인다.
하리야 선장은 손에 성전을 펴든 채 조용히 기도문을 읽고 있었다. 다
른 때라면 조롱을 보냈을 해적들은 오늘만은 하리야 선장의 그런 모습
에 감사했다. 지독한 안개와 암흑 속에 그들은 주눅들대로 주눅들어 있
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하리야 선장만은 온화한 태도로 기도문을 읽
고 있어 주위의 해적들에게 커다란 위안이 되었다.
승강구로부터 키 드레이번이 올라왔다. 새 옷이 불편해서 계속 꿈지럭
거리고 있던 돌탄 선장도 재빨리 허리를 폈다. 키는 해적들을 주욱 둘
러 보았다. 키의 시선이 오닉스의 마스크 위에서 잠시 멈췄다. 횃불빛
밖에 없는 암흑 속에서 오닉스의 눈빛은 알아보기 힘들었다.
하지만 키는 오닉스를 똑바로 쳐다보았고 잠시 후 오닉스가 다른 곳을
쳐다보는 것을 보면서 히죽 웃었다. 키는 트로포스를 향해 명령했다.
"트로포스. 시작하세."
트로포스는 왼손엔 그의 지팡이를 들고 오른손엔 횃불을 든 채 자유호
의 이물을 향해 걸어갔다. 이물에는 특별히 준비해둔 신호용 대포가 놓
여 있었다. 트로포스는 엄숙한 동작으로 심지에 불을 댕겼다. 잠시 후
미노만이 통채로 진동할 듯한 무시무시한 포성이 울려퍼졌다.
같은 시각, 레보스호의 선실에선 잘 깨지는 화물이나 된 것처럼 꽁꽁
묶인 슈마허와 라스가 이를 갈고 있었다. 대포소리를 들은 라스가 신음
처럼 말했다.
"라오코네스를 부르려는 것이군. 미련하고 무례한 해적놈들, 대드래곤
께 대포를 쏘다니!"
자유호의 갑판 위에서 트로포스는 속으로 쉰까지 센 다음 다시 대포를
장전하고 불을 붙였다. 다시 한번 안개를 뚫고 무시무시한 포성이 울려
퍼졌다. 류트를 다루기에 음감이 남달리 좋은 킬리는 대포의 반향음을
들으며 이맛살을 찌푸렸다.
"백년 전에 빠졌던 시체도 떠오를 지경이군."
킬리는 수면 가까이에서 대포를 쏘면 익사한 시체가 떠오른다는 이야
기를 인용했다. 옆에서 듣고 있던 라이온이 피식 웃었다.
"그 정도로는 모자라죠. 800년 전의 대드래곤을 깨워야 하니까."
킬리는 아무 대답 없이 조금 창백한 얼굴이 되었다. 말을 꺼낸 라이온
역시 섬뜩한 기분에 휩싸였다. 하지만 일곱번째인가 여덟번째의 대포가
발사될 때까지도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자 라이온은 맥빠지는 기분을
느꼈다.
엄정한 자세로 서 있던 해적들 역시 자세를 흐뜨러트리며 웅성거렸다.
키는 꼼짝도 하지 않고 밤바다를 바라보고 있었고, 오닉스는 그런 키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더이상 참지 못한 오닉스가 앞으로 한 발 내디뎠을
때였다.
"하늘이다!"
식스의 고함 소리에 해적들은 아연한 기분을 느끼며 고개를 들어올렸
다. 키 드레이번도 입술을 깨물었다. 왜 위로부터 올 거라는 생각은 못
했지? 키는 턱을 한껏 쳐들었다.
해적들은 자신들이 대드래곤의 크기에 대해 심한 착각을 하고 있었다
는 사실을 깨달았다. 머리를 들어올렸던 해적들은 아직 고개를 반도 들
어올리지 않았다는 사실에 당혹해 하며 머리를 더욱 힘껏 젖혔다. 그리
곤 안개 너머로 보이는 밤 하늘에 지금껏 한번도 보지 못했던 별 두 개
가 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 별은 가장 밝은 별보다 훨씬 더 환하게 타오르고 있었고, 어떤 별
보다 거대했다. 라이온은 아랫턱을 덜덜 떨며 그 별을 바라보았다. 저
걸 어떻게 '두 개의 눈'이라고 부를 수 있단 말인가, 저건 별이다! 하
지만 검은 안개더미 위에서 형언할 수 없는 엄숙함으로 그들을 굽어보
고 있는 그것은 분명 두 개의 눈이었다.
"오, 신이여!"
하리야의 손에서 성전이 털썩 떨어졌다. 오닉스는 숨을 헐떡거리며 마
스크를 움켜 쥐었다. 요란한 소리에 고개를 돌린 킬리는 갑판에 주저앉
아 입을 뻐끔 거리고 있는 돌탄을 발견했다. 횃불잡이들마저도 몸을 심
하게 떨어 횃불이 춤을 추었다. 그 때 까마득한 곳으로부터 '목소리'가
전해져 왔다.
"나는 일몰의 왕 라오코네스…."
목소리를 들은 순간 키는 발작적으로 '자유'의 칼자루를 움켜 쥐었다.
아슬아슬한 순간에 간신히 자제력을 회복한 키는 간신히 검을 뽑지 않
을 수 있었다. 만약 그가 칼을 뽑았다면 제국은 마침내 가장 큰 시름을
덜 수 있었을 것이다. 키는 칼자루를 꽉 움켜쥔 채 위를 향해 외쳤다.
"일몰의 왕 라오코네스! 순간을 지배하기에 영원을 지배하는 위대한
존재여! 나는 키 드레이번, 인간이오!"
라오코네스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키는 라오코네스가 그의 목소리
를 들었는지 의심스러웠다. 마치 산꼭대기 위의 사람에게 고함을 지르
는 기분이었으니까. 하지만 잠시후 라오코네스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
다.
"인간은 자신의 제국을 넘을 수 없다. 이곳은 제국이 아니다. 돌아가
라."
라오코네스의 대답을 듣는 순간 키는 가슴이 뻥 뚫리는 통쾌함을 느꼈
다. 라오코네스는 800여년 전의 약속을 아직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키는 칼자루를 놓으며 외쳤다.
"나는 제국과 상관 없소! 나는 제국의 공적 제1호 키 노스윈드 드레이
번이란 말이오! 하하하!"
"나는 그 이름을 알지 못한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은…."
높은 곳에서 빛나고 있던 두 눈에 갑자기 지금까지와는 다른 빛이 떠
오르기 시작했다. 라오코네스는 사실만을 말하는 차분함으로, 하지만
판결을 내리는 단호함으로 말했다.
"네가 아무 허락도 없이 나의 영토에 들어왔다는 것이다. 돌아가라.
일몰의 왕이 두 번씩이나 권고했음에도 불구하고 감사하며 물러나지 않
는다면, 넌 너의 목숨을 가질 자격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해적들은 벌벌 떨며 그들의 선장을 돌아보았다. 키는 숨을 깊이 들이
쉰 다음 외쳤다.
"미안합니다만 나는 두 번째 권고를 받아들일 마음도 없고, 위대한 일
몰의 왕에게 세 번째 권고를 말하는 수고를 끼쳐드릴 생각도 없습니다.
나는 당신에게 대가를 지불하고 당신의 영토를 지날 생각입니다."
"대가? 너는 드래곤에에 어떤 대가를 준비했느냐?"
"처녀입니다. 아름다운."
대드래곤 라오코네스는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자유호를 내려다 보았다.
라이온은 메마른 입술로 혀를 핥으며 라오코네스의 대답을 기다렸다.
어차피 보이는 것은 붉게 타오르는 두 개의 눈 뿐. 라오코네스의 움직
임을 볼 수는 없었다.
라오코네스는 키 드레이번처럼 짧게 말했다.
"대가를 받겠다."
자유호의 해적들은 일제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돌탄은 눈물을 줄줄 흘리며 히스테리컬하게 웃어댔고, 그래서 킬
리는 그런 돌탄을 달래야 했다. 키는 고개를 돌려 식스에게 명령했다.
"식스. 율리아나 왕녀를 데리고 오도록."
식스는 즉각 대답한 다음 승강구를 달려 내려갔다. 이제 한결 안심하
게 된 라이온은 키 드레이번에게 다가서며 낮게 속삭였다.
"그런데 선장님. 왜 이런 깊은 밤을 선택하신 겁니까? 간덩이가 부은
소리일지 모르겠습니다만, 낮이었다면 제국의 누구도 보지 못했던 것을
똑똑히 볼 수 있었을 걸 하는 아쉬움이 듭니다만."
키는 잠시 침묵했다. 조바심을 느낀 라이온이 다시 질문하려 했을 때
키는 나직하게 말했다.
"너는 율리아나 왕녀가 잡아먹히는 광경을 보고 싶었느냐."
라이온은 입을 다물었다. 키는 그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을 뿐만 아니
라 그 모습을 부하들에게 보여줄 수도 없었던 것이다. 라오코네스의 공
포에 질려 있는 해적들이지만 언젠가는 그들의 선장이 드래곤에게 왕녀
를 넘겼다는 사실에 실망하게 될지도 모른다. 키는 그 광경을 해적들에
게 각인시키는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는 않았으리라.
라이온은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그리고 라이온은 고개를 숙인 채 생각했다. 키 드레이번, 당신은 도대
체 어디까지 내다보는 겁니까? 그때 승강구 쪽에서 재빠른 발자국 소리
가 들려왔다. 라이온은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왜 이렇게 급
하게 돌아오는 거지? 승강구에서 나타난 것은 조금 전 아래로 내려갔던
식스 일등항해사였다.
식스는 혼자였고, 어둠 속에서도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창백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해적들이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가운데 식스는 키에
게 다가섰다.
그리고는 키의 귓가에 입을 가져가서 낮게 소근거렸다. 키의 표정이
험악하게 바뀌었다. 키는 즉각 몸을 돌려 승강구 쪽을 향해 달려갈 자
세를 취했다. 그러나 키는 제자리에 멈춰서서는 라오코네스를 향해 고
함 질렀다.
"대드래곤 라오코네스여! 죄송합니다. 사정이 생겨서 시간이 좀 필요
하겠습니다."
"…기다리겠다."
라오코네스의 대답이 떨어지자마자 키 드레이번은 즉시 승강구로 뛰어
들어갔다. 라이온은 키의 뒤를 따라가는 식스의 어깨를 붙잡으며 낮게
속삭였다.
"무슨 일입니까?"
식스는 끔찍한 표정을 지은 채 낮고 거칠게 말했다.
"왕녀가 사라졌어!"
"예?"
율리아나 왕녀는 퉁탕거리는 가슴을 내리누른 채 통로 옆 벽에 기대어
섰다. 생선 가시와 실로 만든 낚시는 훌륭하게 작용했고, 그래서 율리
아나 왕녀는 쉽사리 빗장을 열고 감방을 나올 수 있었다. 감시가 허술
했던 탓도 있었다.
해적들은 아무도 망망대해의 배에서 왕녀가 어딘가로 도망갈 수 있으
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왕녀 자신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이 라오코네스에게 바쳐질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율리아나 왕
녀는 도저히 감방 안에 있을 수 없었다.
율리아나 왕녀는 계단 옆의 어두운 그림자 속에 숨어서 필사적으로 생
각했다. 보트는 분명히 갑판 위에 있다. 하지만 그녀 혼자서 보트를 내
릴 수는 없을 것이다. 그것을 타고 도망친다는 것은 더욱 말이 안된다.
왕녀는 가까스로 이곳이 만이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육지가 가까울 것
이다. 헤엄을 친다면? 그러나 여기서 치명적인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해운국 카밀카르의 삼왕녀인 율리아나 왕녀가 헤엄을 칠 줄 모른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 수 밖에 없어.' 율리아나 왕녀는 이를 악물었다. 해적들이
득시글거리는 갑판 위로는 올라갈 수 없다. 그렇다면 바다로 뛰어들 수
있는 곳은…. 율리아나 왕녀는 내려가는 계단을 찾기 시작했다.
노 구멍을 통해 바다로 뛰어드는 것이다. 노예들이 있겠지만 모두 쇠
사슬에 묶여 있을 것이다. 노예장만 피할 수 있다면 그쪽이 오히려 안
전하다. 왕녀는 신발을 벗었다. 그리고 맨발로 통로를 달리기 시작했
다.
헤엄치기에 거추장스러운 드레스는 이미 벗어던진 상태. 왕녀는 짧은
속옷 바람으로 달리고 있었다. 한참을 정신 없이 뛰어다니던 왕녀는 거
의 지나칠 뻔하다가 가까스로 아래로 내려가는 사다리를 발견했다. 왕
녀는 그것이 어디로 통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아래로 내려가는 사다리
였기에 주저없이 사다리 위에 올라탔다.
다행히도 그 사다리는 노갑판으로 이어지는 사다리였지만, 사다리를
내려선 왕녀를 맞이한 것은 완전한 암흑이었다. 노예들을 위해 귀한 기
름이나 양초를 태울 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위를 분간할 수 없
었던 왕녀는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어 벽을 찾아보았다. 그 때 느닷없이
고함소리가 터져나왔다.
"누구냐! 오, 오스발? 네놈이 기어코!"
잠결에 왕녀의 발자국 소리를 들은 노예장이 내지른 고함소리였다. 율
리아나 왕녀는 거의 까무라칠 뻔했다. 그때 또다른 방향에서 당황해 하
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노예장님. 저를 부르셨습니까?"
오스발의 목소리였다. 왕녀는 제자리에 굳어버린 채 꼼짝도 하지 않았
다. 노예장이 몸을 일으키는 것인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너 이 자식! 들키니까 아닌 척하고 있어? 가만 두지 않겠다. 아무리
키 선장님의 결정이라도 너따위 놈에게 자유를 준 것은 실수이셨어! 잠
시만 기다려라. 모가지를 뽑아놓겠다!"
왕녀는 숨소리마저 죽인 채 기다렸다. 그때 바로 오른쪽에서 탁탁거리
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린 왕녀는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불꽃을 보았다. 노예장이
부싯돌을 켜고 있었다. 하지만 서두르는 바람에 불이 잘 붙지 않았다.
몇번의 실패 끝에 기어코 등잔에 불을 붙인 노예장은 등잔을 위로 들어
올렸다.
율리아나 왕녀는 눈이 부셔서 자기도 모르게 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인기척을 느낀 노예장은 등잔을 돌려 왕녀를 돌아보았다. 노예장은 숨
이 멎을 뻔했다. 불빛 속에 드러난 것은 하늘거리는 속옷만 걸친 여자
의 모습이었다.
다른 장소의 다른 시간이었다면 노예장의 입이 찢어져라 벌어졌을 것
이다. 하지만 여자가 있을리가 없는 망망대해의 해적선 위에서 그런 모
습을 보게 되다니…. 노예장은 심장이 멎을 듯한 공포를 먼저 느꼈다.
게다가 여자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노예장이 혼절할듯한 정신 속에서 '크라잉 고스트'라는 말을 떠올렸을
때 멀리서 구슬픈 노랫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음…… 음음…… 음…….
"우아아아악!"
목이 터져라 비명을 지르던 노예장은 입에서 거품을 뿜어내며 기절했
다. 등잔이 떨어지며 기름이 쏟아지자 불길이 치솟았다. 율리아나 왕녀
는 불길을 피해 뒤로 물러나려 했지만 곧 벽에 부딪혔다.
그때 그녀의 손목을 잡아채는 손길이 있었다. 왕녀는 몸을 돌렸고, 그
녀의 손목을 부여쥔 사람의 얼굴을 보았다.
"오스발?"
"이리 오십시오! 타죽겠습니다."
오스발은 율리아나 왕녀를 질질 끌다시피 잡아당기며 달려갔다. 불길
이 거세게 일어나자 쇠사슬에 묶여 있던 노예들이 비명을 지르기 시작
했다. 불길에서 조금 멀어지자 오스발은 왕녀에게 다급하게 고함질렀다.
"도망치신 겁니까?"
"그래요! 살려주세요. 제발 부탁해요!"
"어떻게 말입니까. 저는 노잡이 노예에 불과합니다. 왕녀님을 도와드
릴 수가 없어요."
율리아나 왕녀는 절망적인 얼굴로 오스발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오스
발은 서글프게 고개를 가로저을 뿐이었다. 왕녀는 입술을 질끈 깨물고
는 노를 향해 달려갔다. 주위가 밝아져 왕녀는 쉽게 노구멍을 찾을 수
있었다. 오스발은 다시 그녀의 손목을 붙잡아야 했다.
"잠깐! 무슨 생각이십니까? 바다에 뛰어들려는 겁니까?"
"드래곤에게 잡혀먹느니 바다에 빠져죽겠다고 말한다면 바보 같겠죠?
죽는 건 마찬가지니까. 하지만 내가 갑자기 헤엄을 배울 수도 있지 않
을까요? 그러니까 부디 이 손목 놔주면 좋겠어요."
오스발은 잠시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이런 급박한 상황에서 듣기엔
너무 침착한 대답이었다. 하지만 왕녀가 침착한 얼굴 그대로 그의 손등
을 깨물려고 들자 더 이상 그러고 있을 수 없게 되었다. 오스발은 왕녀
의 입을 재빨리 피하며 말했다.
"더 좋은 생각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찬성이에요! 시작해요!"
"…알겠습니다. 따라오십시오."
텅 빈 왕녀의 감방을 바라보며 아연해하고 있던 키와 식스, 그리고 라
이온은 갑자기 몸을 돌렸다. 아래쪽에서부터 노예들의 비명소리와 함께
"불이야!" 하는 외침소리가 들려왔다. 키는 이를 드러내며 짓씹듯이 말
했다.
"아래쪽이군. 식스! 선원들을 데리고 와! 라이온은 나와 함께 왕녀를
붙잡는다."
"이 깜찍한 왕녀. 불을 지를 생각을 다하다니, 대단한데?"
라이온은 으르릉 거리며 말하고는 즉시 사다리를 향해 달려갔다. 노갑
판에 내려선 키와 라이온은 치솟아 오르는 불길에 주춤했다. 불길 저편
으로는 쇠사슬에 묶인 노예들이 미친 듯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키는
재빨리 외투를 벗어서는 불을 끄기 시작했다. 역시 같은 행동을 하던
라이온은 바닥에 쓰러진 노예장을 발견했다.
"이 해파리 같은 놈! 왕녀에게 당한 거야? 어처구니가 없군!"
키는 머리 위로부터 다급한 발자국 소리가 들리자 외투로 상체를 가리
며 불길 속으로 뛰어들었다. 불길을 뛰어넘은 키는 외투를 팽개치고는
가장 가까이에 있던 노예의 멱살을 붙잡아 당기며 말했다.
"여자 어디로 갔나!"
경악 때문에 말문을 제대로 열지 못하던 노예는 대신 손을 들어올려
한쪽 방향을 가리켰다. 키는 노예가 가리킨 방향을 향해 달려갔다. 이
물쪽에 거의 다다른 키는 멀리서 히끄무레한 것이 움직이는 것을 발견
했다. 율리아나 왕녀와 또다른 사내의 모습이었다.
"멈춰라!"
키의 고함소리에 율리아나 왕녀는 파랗게 질린채 고개를 돌렸다. 그러
나 그 때 옆에 서있던 사내는 율리아나 왕녀의 어깨를 끌어당겨 재빨리
노 위에 앉히며 말했다.
"계단 난간 타 보신 적 있습니까? 비슷한 겁니다."
키는 사내의 목소리에 충격을 받았다. 그는 그 목소리를 알고 있었다.
그때 사내는 왕녀의 등을 밀었고, 왕녀는 비명을 지르며 노 위를 미끄
러져 내려갔다. 왕녀가 노 구멍으로 사라지자 사내는 어깨를 으쓱하며
고개를 돌렸다. 키는 이를 악물며 사내의 이름을 불렀다.
"오스발! 네가!"
"죄송합니다, 선장님."
우아하게도 오스발은 가벼운 목례까지 보낸 다음 발 옆에 놓아두었던
물건을 집어들었다. 구명 부이였다. 오스발은 그것을 겨드랑이에 낀 채
노 구멍을 향해 몸을 날렸다. 노 구멍을 통해 밖을 내다본 키의 눈에
노의 끝에 매달려 첨벙거리고 있는 왕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키는 지체없이 노 위에 뛰어 올랐다. 노를 밟으며 달려오는 키의 모습
을 보자 율리아나 왕녀의 눈이 커다랗게 변했다. 그 때 왕녀의 등 뒤의
물 속에서 오스발이 느닷없이 솟아올랐다.
"안돼!"
키는 고함을 지르며 손을 뻗쳤지만 그 전에 오스발이 먼저 왕녀의 허
리를 끌어안았다. 키의 손이 왕녀에게 닿기 직전, 두 사람은 그대로 물
아래로 사라졌다. 왕녀를 놓친 키는 균형을 잃고 바다에 빠졌다. 재빨
리 노를 움켜쥔 키는 사나운 눈길로 사방을 둘러보았다. 잠시 후, 멀찌
감치 떨어진 곳에서 무언가가 솟아오르는 것이 보였다. 구명 부이에 매
달린 왕녀와 오스발이었다. 오스발은 구명 부이를 끌며 안개 쪽을 향해
헤엄쳐가고 있었다. 노의 물갈퀴에 매달린 채, 키는 포효하듯 외쳤다.
"오스바아아알!"
노의 물갈퀴에 매달린 채 오르락내리락 하고 있는 키 드레이번을 발견
한 라이온은 재빨리 구명 부이를 집어 던졌다. 다시 배 위로 올라온 키
는 젖은 외투를 벗어던지고 곧장 갑판 위로 달려 올라갔다.
갑판 위에선 선장과 해적들이 당황한 모습으로 웅성거리고 있었지만
키는 그쪽으로는 시선도 보내지 않은 채 곧장 이물로 달려갔다. 이물에
선 키는 고개를 한껏 꺾어 대드래곤의 얼굴이 있을 것으로 짐작되는 곳
을 쳐다보며 외쳤다.
"라오코네스! 안개를 거둬주시오!"
대드래곤 라오코네스는 말없이 키를 내려다보다가 마땅찮은 어투로 말
했다.
"이유는?"
"당신에게 바칠 처녀가 방금 배 밖으로 뛰어 나갔소! 안개를 거둬주셔
야만 수색이 가능하오."
해적들은 경악했다. 율리아나 왕녀가 배 밖으로 뛰쳐나갔다고? 해적들
중 몇몇은 뱃전을 향해 달려가 먹물 같은 바다를 향해 횃불을 비춰보기
도 했고, 어떤 선장은 보트를 향해 달려가기도 했다. 그때 그들의 머리
위로부터 라오코네스의 나직하지만 힘있는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그렇다면, 너희들은 안타깝게도 나에게 바칠 대가를 분실한 것이군?"
라오코네스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유쾌함 같은 것도 섞여 있었다. 하지
만 그 말을 들으며 정말로 즐거움을 느끼는 해적은 아무도 없었다. 그
것은 개구리를 앞에 둔 뱀의 유쾌함 같은 것이었다. 키는 눈살을 찌푸
렸고 그런 키를 향해 라오코네스는 침착하게 말했다.
"나로선 처녀를 고집해야 할 이유가 별로 없다."
라이온은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을 느꼈다. 특급 요리인 율리아나 왕녀
대신, 영양가는 좀 떨어질지 몰라도 질보다 양으로 승부하는 수천 명의
해적이 대드래곤의 시식을 기다리고 있으니…. 순식간에 허무맹랑한 말
을 만들어낸 라이온은 자신의 생각에 웃어야 할지 오싹해해야 할지 모
르게 되어버렸다. 하지만 대부분의 해적들은 라오코네스의 말에 심장이
떨어지는 기분을 느꼈다.
키는 안간힘을 다해 말했다.
"대드래곤 라오코네스여…."
"그 검의 장인을 봐서, 이대로 돌아가는 것은 허락하겠다. 물러가라."
라오코네스는 키의 말을 끊으며 말했고, 그래서 키 드레이번은 그의
말을 빨리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잠시 후 라오코네스의 말을 이해한
키는 눈을 부릅뜨며 자신의 허리를 내려다보았다.
"검…이 복수 말이오?"
허공 속에서 불타고 있던 라오코네스의 두 눈이 서서히 멀어지기 시작
했다. 안개가 더욱 짙어지며 폐를 적셔오는 것 같은 습한 공기 속에 키
드레이번과 해적들은 헐떡 거렸다. 라오코네스의 말은 머나먼 메아리처
럼 들려왔다.
"인간이여. 너는 그 검의 소유자인 만큼 그 검의 검신에 있는 글귀를
알 테지. 800년만에 처음 찾아온 손님에 대한 선물로서 그 글귀를 주고
싶군."
키는 거친 숨소리만 낼뿐 대답하지 않았다. 라오코네스의 모습은 이제
안개 속으로 완전히 사라지고 있었다. 그 안개와 어둠 속에서 라오코네
스의 목소리는 둔한 울림으로 전달되어왔다.
"복수는 복수를 원하는 자에게 복수한다." 그리고 라오코네스는 사라
졌다.
희끄무레한 안개를 뚫고 보트들이 천천히 노를 저었다. 보트장들은 어
디에 있는지 알수 없는 암초와 절벽 때문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왕녀와 오스발을 수색하기 위해 출동한 보트들이 먼저 길을 잃을 지경
이었다. 그래서 노스윈드 선단의 아홉 척의 배에는 램프와 횃불을 활활
지펴놓았다.
선단의 보트를 모두 출동시켜 오랜 시간에 걸쳐 안개 속을 뒤졌지만
해적들은 아무 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지리한 시간이 흘렀다. 마침내
새벽이 되었을 때, 그랜드머더호의 보트들을 지휘하던 킬리 선장은 수
면 위를 떠다니는 물건을 발견했다.
날카로운 휘파람 소리가 울려 퍼졌다. 미노만을 수색하던 보트들이 모
두 킬리 선장의 보트 주위로 몰려들었다. 킬리는 바다에서 건져낸 구명
부이를 들어 올렸다. 역시 그랜드파더호의 보트를 지휘하고 있던 돌탄
선장은 이맛살을 찌푸린 채 말했다.
"빠져죽은 걸까?"
킬리는 대답 대신 보트를 전진시켰다. 해가 떠올랐을 때 그들은 안개
를 뚫고 느닷없이 나타난 해안절벽에 깜짝 놀랐다. 돌탄이 절벽이 갈라
진 틈 사이로 흘러나오는 조그마한 시내를 발견했다. 잠시 후 해적들은
강 하구에 형성된 좁은 모래톱을 발견했다. 해적들은 조심스럽게 해안
에 접근했다. 모래톱 위에는 발자국들이 찍혀 있었다.
트로포스는 우울한 얼굴로 모래톱 위에 찍힌 발자국을 관찰했다. 그리
고 그것이 크고 작은 두 종류의 발자국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트로포
스는 우울한 얼굴로 돌탄을 돌아보았다.
"자네가 하겠나?"
"왜 내가? 식스에게 시켜."
그래서 자유호의 보트들을 지휘하던 식스 일등 항해사는 자유호로 돌
아갔다. 키 드레이번에게 왕녀와 오스발이 상륙에 성공한 것 같다는 소
식을 전하는 불쾌한 임무을 맡은 것이다. 키 드레이번은 밤새 한숨도
자지 않아 눈에 핏발이 선 모습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식스의 보고를 들은 키는 아무 말 없이 선장실로 돌아간 다음 조용히
문을 걸어 잠갔다. 아무 사후 대책을 듣지 못한 식스는 한층 더 불쾌한
기분을 느끼며 수색 중이던 해적들을 모두 철수시켰다.
정오가 되었을 때 밤새도록 수색에 나섰던 해적들은 그것도 대드래곤
의 성지 바로 앞에서 행하는 수색인지라 머리 끝까지 긴장된 상태에서
수색하던 해적들은 녹초가 되어 잠들었다.
하지만 라이온은 피로한 몸을 이끌고 난동을 부리지 않도록 꽁꽁 묶어
두었던 슈마허와 라스를 찾아갔다. 그들을 풀어주기 위해서였다. 거의
하루 동안 묶여 있었던 라스 법무대신과 슈마허는 분통을 터뜨릴 기운
도 없이 축 늘어진 모습으로 일어났다. 라이온은 그런 두 사람을 우울
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짤막하게 말했다.
"왕녀는 탈출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그
녀는 바다를 가로질러 상륙하는 데까지 성공한 것 같군요. 덕분에 우리
는 현재 미노만 앞에서 발이 묶이고 말았습니다."
두 사람은 말 그대로 펄쩍 뛰어올랐다.
라스는 800년만에 일어났던 대드래곤이 너무나 짧은 시간 동안, 그것
도 어둠과 안개 속에 몸을 거의 가린 채 인간과의 회견을 마쳤다는 사
실을 안타까워했다.
"어떻게 들릴진 모르겠지만, 제국의 학자들이 이 사실을 알았다면 당
신네들의 5대 조부까지 비난의 향연으로 끌어냈을 거요."
라이온은 우울한 얼굴로 라스를 바라보았다. 라스는 점잖은 얼굴로 말
했다.
"800년 전의 역사, 800년 전의 약속, 800년 동안 쌓여왔을 그의 철학
과 무한의 지혜. 우리가 거기서 무엇을 배울 수 있었을 지는 짐작도 할
수 없군. 그런데 우리 시대의 마지막 현자와 나눈 이야기가 그런 시시
껄렁한 이야기들뿐이라니."
배부른 소리하고 있네, 집어치워. 라고 말하는 대신 라이온은 핏 웃었
다.
"라오코네스와 고담준론을 나눠보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저 역시 퍽
아쉽습니다. 지혜로운 라오코네스라면 희희낙락하고 있는 법무대신의
입을 한번에 다물게 만들 수 있는 말이 뭔지 알고 있을 지도 모르지요.
지금 제겐 그런 마법의 말이 꼭 필요하거든요."
라스는 입을 다물었고 라이온은 그런 라스를 향해 잔인한 미소를 지은
다음 말했다.
"왕녀가 달아났다는 이야기에 몹시 즐거운 모양입니다만, 잘못 생각하
신 겁니다. 이 황량한 미노만에서라면 건장한 선원도 생존할 수 있다고
장담하기 어렵습니다. 하물며 왕녀가 어떻게? 왕녀에게 사냥 기술이 있
습니까, 야영 기술이 있습니까? 그녀는 부러진 칼토막 하나도 가져가지
않았소. 미련하기 짝이 없는 탈출이지."
라스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슈마허가 말했다.
"노예 하나가 같이 달아났다고 들었다만."
"흐응. 입이 싼 녀석들이 있었나 보군. 그렇네, 슈마허. 노잡이지. 꼬
마였을 때 배에 팔려와서 이 날 이 때까지 노만 저은 녀석이지. 사람이
넘치는 도시에 던져놔도 굶어죽을 녀석이고 절대로 모험가 타입은 아니
지. 거친 황야에서의 생존 확률을 비교한다면 왕녀와 막상막하일걸. 나
라면 그런 녀석에게 희망을 걸진 않을 거야."
슈마허는 라스를 흉내내기 시작했다. 입을 꽉 다물고 언짢은 표정을
지었다는 말이다. 라이온은 그런 두 사람을 바라보며 배부르게 웃었다.
"왕녀는 살아나기 힘들 거요. 그녀는 대드래곤을 피해서 훨씬 더 비참
한 죽음을 찾아간 것이오."
라이온은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향해 걸어갔다. 그 때 그의 등을 향해
슈마허가 말했다.
"한 가지 알려줄까."
라이온은 제자리에 멈춰서 고개만 돌렸다. 그리고 슈마허의 눈 속에
재미있어 하는 감정이 담겨 있는 것을 보고는 의아해졌다. 슈마허는 팔
짱을 끼며 천장을 올려다 보았다.
"잘 알겠지만 율리아나 왕녀께서는 애서가시지. 왕녀께서 부러진 칼
한 자루 가져가시지 않았다고 했나? 허나 대신 그 분께서는 만 권의 책
에 달하는 지식을 가져가셨다. 그것은 수십명의 조력보다 더 강력한 힘
일 거라고 생각하는데, 자네 생각은 어떤가?"
슈마허는 빙긋 웃었고, 라스는 탄성을 질렀고, 라이온은 조금 전 그들
이 짓고 있던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
"추, 추워죽겠어요."
율리아나 왕녀는 나무 밑둥에 기대어 앉은 채 온몸이 부서져라 떨면서
말했다. 왕녀는 얇은 속옷 하나만 걸치고 차가운 바다를 가로지른 데다
가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추위와 배고픔이 동시에 몰려든
밤이기에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왕녀로서는 처음 겪는 경험이었다. 하지만 지금으로선 어찌해 볼 도리
가 없었다. 시중 들 사람이라곤 노예 한 명 밖에 없으니.
오스발은 들고 있던 나무 꼬챙이를 내려놓으며 실망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왕녀님 말씀대로 해보았습니다만 아무래도 불이 안붙는데요."
율리아나 왕녀는 부들부들 떨면서도 계면쩍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 이상하네…. 책을 보면 나무를 비벼서 불을 붙일 수 있다고 하,
하던데…… 에츄!"
"책에는 강철로 칼을 만든다고도 나와 있겠죠. 하지만 대장장이가 아
니라면 누가 칼을 만들 수 있겠습니까. 이것도 그거 비슷한 일인 거 같
군요."
"다, 다른 방법도 읽었어요. 돌멩이를 부딪쳐서 불을 붙일 수도 있대
요."
오스발은 잠시 율리아나 왕녀를 바라보다가 아무 말 없이 단단한 돌멩
이를 찾아들었다. 그리고는 그것을 부딪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리
해도 불은 붙지 않았다. 왕녀는 결국 그만두라고 말했다. 오스발은 손
바닥에 생긴 물집을 처량한 시선으로 내려다보았다. 두 사람은 한참 동
안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었다. 잠시 후 왕녀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안아주세요."
"그게 낫겠군요."
오스발은 왕녀에게로 다가앉아서 그녀의 가냘픈 몸을 살짝 안았다. 율
리아나 왕녀는 오스발의 품 속에서도 무섭도록 떨고 있었다. 아니, 더
이상 떨 기력도 남아있지 않은 것 같았다. 그래도 왕녀의 몸은 계속 떨
렸다. 몽롱한 정신 속에서 왕녀는 머릿 속에 떠오르는 아무 말이나 꺼
내었다.
"제가 지, 지금 무슨 생각하는지 아세요?"
"차라리 얌전히 라오코네스에게 잡아먹힐 걸, 하는 생각이겠죠."
"어? 맞았어요. 어떻게 알았죠?"
"저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까요. 왕녀님이 달아나든 말든 내버려
두고 자유호에 있었으면 지금쯤 부른 배를 안고 편하게 자고 있었을 겁
니다."
율리아나 왕녀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무런 불빛도 없는 숲
속의 밤이었기에 오스발은 코 앞에 있는 왕녀의 표정도 분간하기 힘들
었다. 잠시 후 왕녀는 궁금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럼 절 버리고 그 해적들에게 돌아가지 그래요? 가서 늙어 죽을 때
까지 노나 젖다가 죽어요."
"그럴까요?"
오스발은 무뚝뚝하게 대답했고 왕녀는 울고 싶어졌다. 그를 떠밀어 버
리고 싶었지만 추워서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왕녀
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말을 돌렸다.
"그러고보니 책은 다 엉터리군요. 전 남자에게 처음 안기는 처녀거든
요. 이럴 땐 머릿속에서 유성이 왔다갔다 하고 종소리 같은 것이 땡땡
울린다고 하던데, 전 추워죽겠다는 생각 밖에 안들어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요. 전 노예라서 글을 읽을 줄 모르거든요."
왕녀는 졸음이 찾아오는 것을 느끼며 말했다.
"아함…. 언제 노예가 되었는데요? 부모가 노예였어요?"
"모릅니다. 전 하이낙스 전쟁 때문에 생겨난 수많은 고아 중 하나거든
요. 어찌어찌 노예상에게 잡혀서 배에 팔렸고 지금까지 노를 저었습니
다. 제가 타고 있던 배가 노스윈드에게 나포된 이후로 자유호의 노잡이
가 되었지요."
꾸벅꾸벅 졸고 있던 율리아나 왕녀는 갑자기 우스운 생각이 들었다.
"그럼 당신도 여자와 함께 있는 건 처음이겠군요? 어색하지 않아요?"
오스발은 뭐라고 대답했지만 왕녀는 그 대답을 듣지 못했다. 오스발은
왕녀의 눈꺼풀 주위를 살짝 만지고는 그녀가 잠들었다는 것을 알게 되
었다. 오스발은 잠시 자신의 처지가 참 불쌍하다고 생각하다가 눈을 감
고 잠을 청했다.
미노만의 입구에 정박한 자유호의 선상에서, 식스는 고개를 갸웃거리
다가 불확실한 어투로 말했다.
"글쎄요. 어쨌든 율리아나 왕녀는 대륙에 소문이 자자한 미녀인만큼…."
"말이 안돼. 오스발 놈이 왕녀의 미모에 혹해서 그녀를 탈출시켰다고?
이 선단의 어느 미친 해적놈이 그랬다면 믿을 수 있어. 하지만 그 놈은
아냐."
키 드레이번은 단정짓듯이 말했다. 식스는 입을 다물었다.
"놈은 싱잉 플로라의 노래도 듣지 못해. 그런 놈이 왕녀의 미모를 느
낀다고? 교수대가 싫어서 평수부가 되는 것을 거절했어. 그런데 탈출을
감행해? 그 놈은 둔하고 게으른 보통의 버러지야. 그런 녀석들은 자기
처지에 만족하기 때문에 절대로 이런 큰일을 벌이지 않아."
"글쎄요. 오스발의 마음이야 저로선 알 도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선원
들과 선장들은 앞으로의 계획을 알고 싶어하는데요. 미노만을 통과할수
도 없고, 그렇다고 페리나스 해협으로 갈 수도 없습니다. 왕녀가 없어
졌다는 것만으로 두 군데 항로가 모두 막히는 군요. 전리품들을 처리하
기 위해선 아무래도 되돌아가야 될 것 같습니다만."
키 드레이번은 입을 꾹 다문 채 식스를 쏘아보다가 말했다. 그리고 식
스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오스발을 추적한다."
"무슨 말씀입니까! 그들은 육지로 도망간 겁니다."
"알아. 하지만 내게도 두 다리가 있다. 나는 그 다리를 이용해서 오스
발 놈을 추적할 생각이야."
"사, 상륙하신다는 말입니까? 직접 추적하시겠다고요?"
키는 대답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그리고 식스 역시 대답을 기다리
지 않고 말했다.
"그럼 선단은 어떡하고요?"
그러나 키는 단호한 목소리로 지시를 내렸다.
"선장들에게 전해라. 각 선박의 선원들 중 지원자를 우선으로 10명 씩
선발해라. 강인하고 젊은 선원들로. 선발이 끝나면 자네는 그들에게 무
기와 야영 도구 등을 지급하여 수색대를 편성하라. 내가 그들을 지휘하
겠다. 부재 중 함대의 지휘는 자네에게 맡기겠다. 피치 못할 사정이 없
는 한 이곳에 정박해서 나를 기다려라."
"선장님!"
키는 주먹으로 책상을 쾅 내리쳤다. 요란한 소리에 식스는 입을 다물
었다.
"나는 오스발 그 놈을 내 손으로 잡고 말겠어! 그러니 아무 소리 말고
명령대로 시행해!"
키는 잡아먹을 듯한 눈으로 그의 일등 항해사를 쏘아 보았다. 식스는
입술을 깨문 채 키를 마주보다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율리아나 왕녀 아닙니까?"
"뭐?"
"율리아나 왕녀를 추적해서 잡아와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래야 그녀
를 대드래곤에게 바치고 미노만을 통과하거나, 아니면 필마온 기사단에
게 넘겨주고 페리나스 해협을 통과할 수 있을 테니까요. 그런데 선장님
은 왜 오스발을 자꾸 거론하시는 겁니까. 탈출에 대한 벌을 주는 것 이
외에 그를 붙잡을 필요가 따로 있습니까?"
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식스는 조금 기다렸다가 뒤로 한 발자
국 물러나며 침울하게 말했다.
"명령 받들어 시행하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자꾸 불길한 생각이 듭니
다. 제가 편성할 수색대가 과연 제대로 된 목적을 가지고 있는지 의심
스럽군요. 나가보겠습니다."
식스는 자신의 말에 대해 엄격한 사람답게 그 즉시 각 배에 전갈을 보
냈다. 그리고 각 배의 선장들은 10명의 선원들을 선발하여 보내는 대신
지금 웃기는 이야기나 할 때냐는 식의 반응을 보내왔다. 그래서 식스는
자신이 키 드레이번에게 했던 말을 조금 각색해야 했다.
미노만이든 페리나스 해협이든 율리아나 왕녀가 있어야 통과할 수 있
다는 식스의 설명은 선장들을 납득시켰다.
식스의 두 번째 전갈을 받아든 흑기사호의 오닉스는 마스크 속에서 생
각에 잠겼다. 그 여자를 배에 태워 선단이 이런 지경에 빠졌는데, 기어
코 그 여자를 도로 잡아올 생각인가? 마스크 속의 오닉스의 미간이 심
하게 일그러졌다. 어디 그렇게 되나 두고보자, 키 드레이번.
식스는 자신도 수색대에 참가하겠다는 오닉스의 전갈을 받고 어이가
없어졌다. 하지만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질풍호의 트로포스 선장이 아홉 명의 선원을 이끌고 자유호에 올라왔
을 때조차도 식스는 그것을 돌아볼 겨를이 없었다. 식스는 머리 끝까지
화가 나서 라이온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라이온은 히죽 웃으며 슈마허
의 어깨에 팔을 걸쳐 어깨동무를 해보였다.
"지원자를 우선 젊고 강인한 선원들을 선발하라고 하셨잖습니까? 슈마
허는 그 조건을 모두 충족시킵니다. 물론 지원자고요. 뭐 잘못된 점이
있습니까?"
이를 부득부득 갈고 있던 식스는 트로포스를 돌아보고는 고함을 빽 질
렀다.
"트로포스 선장! 당신도 수색대에 참가하겠다는 거요?"
"물론이지, 식스. 키 선장님도 가신다며?"
그리고 트로포스는 눈을 조금 돌려 자유호에 먼저 승선해 있던 오닉스
를 가리켜 보였다. 하지만 식스가 그 눈짓의 의미를 알게된 것은 키 드
레이번에게 보고하러 갔을 때였다. 키는 식스의 보고를 듣자 피식 웃었
다.
"놈들. 나와 오닉스가 으슥한 오솔길이라도 함께 걸어가게 될까봐 상
당히 걱정하고 있나 보군."
식스는 그제서야 희미한 신음 소리를 내며 트로포스의 눈짓을 이해했
다. 그리고 식스는 의외로 많은 선장들이 수색대에 참가하겠다고 통보
해 온 이유를 알아차렸다. 오닉스 나이트는 키 드레이번에게 패했기에
노스윈드에 소속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식스 역시 그 완고한 오닉스
가 자신의 굴욕을 잊었다고는 생각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식스는 가일층 심해지는 파국의 예감을 느껴야 했다. 만약 수
색대가 육지에서 사고라도 만나게 된다면 노스윈드 선단은 치명적인 손
실을 입게 되는 것이다. 선장은 보통 선원들보다 약간 더 중요한 존재
같은 것이 아니다. 머리가 팔보다 약간 더 중요한 부위가 아닌 것처럼.
식스는 미노만 주위의 땅이 황무지에 가깝다는 사실을 되뇌이며 자신
을 위로해야 했다. 식스는 제국의 공적 제1호가 육지에 올랐다는, 즉
전투함이 없는 무력한 상태로 호랑이굴에 들어간다는 사실을 제국의 국
가들이 알기라도 한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상상도 하기 싫었다.
키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수색대는 출발 준비가 된 것인가?"
"그렇습니다, 선장님."
"역시 자네로군. 이렇게 빨리 준비를 마치다니. 그럼 내일 새벽에 상
륙하도록 하지. 그 동안 선단을 잘 부탁하네."
식스는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선장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뭔가?"
"미노만 바깥까지 나가지는 마시길 바랍니다. 선장님은 제국의 공적 1
호입니다. 바다에서라면 제국의 어느 누구라도 선장님을 두려워하겠지
만 육지는 그렇잖습니다. 어떤 나라든지 일개 중대만 파견하면 수색대
는 끝장날 겁니다. 제발 사람들이 있는 땅까지는 가시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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