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백악관 국가장애위원회 정책 차관보 강영우 박사(64·사진)는 앞을 볼 수 없는 시각 장애인이다. 중학교 때 실명, 장님이 된 뒤 절망했지만 자신에게 던져진 역경과 맞서 불가능하게 보이던 삶을 변화시켰다.
강 박사는 18살 나이에 서울 맹학교에 입학한 뒤 연세대 교육학과를 졸업했고 1972년 도미(渡美), 국내 장애인 중 최초로 정규 유학생이 됐다. 피츠버그대에서 3년 8개월 만에 석사와 박사를 받은 뒤 노스이스턴 일리오이대 특임교수로 임용됐다.
“앞이 보이지 않아 절망했지만 좌절하지 않고 30년 인생계획을 세워 도전했습니다. 제 삶은 역경과 도전의 산물입니다. 삶이 그저 불가능하게 보였지만 생각을 바꾸니 세상이 달라졌습니다. ”
기자는 지난 10월 28일 인하대 초청 강연차 내한한 강 박사를 만났다.
인생의 30년 계획
14살 때 아버지를 잃은 강 박사는 한 해 뒤 덕수중 1학년 때 축구공에 맞아 실명했다. 아들이 장님이 되자 어머니는 충격을 받고 쓰러져 사망했다. 생계를 위해 누나는 다니던 학업을 포기, 봉제공장에 입사했지만 16개월 만에 과로로 숨졌다. 당시 13살이던 남동생은 철물점 직원, 9살 여동생은 보육원으로 흩어졌다.
“절망 속에서도 긍정적으로 생각 했습니다. 깜깜한 두 눈으로 아무 것도 볼 수 없었지만 새로운 미래를 꿈꾸었어요. 30년 인생계획을 세웠지요. 첫 10년은 맹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진학, 졸업하는 기간으로 정했어요. 다음 10년은 배우자를 만나 행복한 가정을 꾸미는 기간으로 세웠고, 나머지 10년은 신에게 영광을 돌리고 사회에 봉사하며 살겠다고 다짐했어요. 불가능하게 보이지만 30년 인생계획을 세우고 나니 살아야 겠다는 동기가 가슴 속에서 꿈틀댔습니다.”
- ▲ 김승완기자 wanfoto@chosun.com
당시 맹인은 점쟁이와 마사지사가 되는 길 외에 다른 직업을 택하기 어려운 시절이었다. 그러나 그는 공부를 하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눈을 잃은 뒤 처음 2년은 국립의 료원에서, 다음 2년은 신앙으로 눈을 치유하기 위해 노력했지요. 그 뒤 맹인 재활센터에서 점자와 한글타자를 배워 서울맹학교에 입학했습니다. 하지만 맹학교에서 대학으로‘점프’ 하는 것은 어려웠어요. 우선 맹인이 어떻게 대학에 가느냐는 사회적 편견이 컸지요. 그나마 학비가 막막했지만, 후견인의 도움으로 미국에서 매달 20달러를 받았어요. 당시로선 대졸 신입사원 월급보다 큰 돈이었지요.”
불가능한 생각, 긍정으로 바꿔라
하지만 교과서도 읽을 수 없었고 점자 참고서도 없었다. 오로지 대학에 가겠다는 목표만 있었다. 그는 어떻게든 방법을 찾았다. 대학생 자원봉사자인 지금의 아내(석은옥)를 만난 것도 그 즈음이었다.
“아내가 당시 유학을 준비하고 있어서 저를 데리고 코리아헤럴드 학원을 다녔지요. 원장이‘장님 동생을 데리고 다니는 누나가 착하다’며 학원비를 받지 않았어요. 영어는 그렇게 공부하게 됐지요. 문제는 국어와 수학이었습니다.”
하나의 고비를 넘으면 으레 또 다른 장벽이 나타나기 마련이다. 하지만 역경을 피하기 보다 맞섰다. 국어, 수학 실력을 어떻게 키울까 고민하다가 서울대 직업보도소로 전화를걸었다. 직업보도소는 지금의 대학 아르바이트 알선기관. 그는“맹인이지만, 대학 가려고 한다. 가정교사가 필요하다”고 부탁, 서울대 학생을 소개 받았다. 물론 학비는 후견인의 도움을 받았다.
“주제 넘게 서울대 엘리트 학생을 가정교사로 썼어요. 좋은 교사에게 배우니 실력이 늘었습니다. 대학에 가겠다는 목표를 세웠더니 방법이 보였던 셈이지요.”
하지만 또 다른 난관이 나타났다. 대학에서 장님의 입학을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다. 기독교 대학인 연세대에 문의했으나 답은 마찬가지였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 총무이신 김관석 목사를 찾아가‘실력이 없어서 떨어지면 모르겠지만 시험 볼 기회도 안 준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호소했지요. 김 목사가 연세대 김윤석 총무처장을 찾아가 시험만 칠 수 있게 부탁하셨어요.”
강 박사는 1968년 연세대 교육학과에 전체 10등으로 합격했고 4년뒤 문과대학 전체 차석으로 당당히 졸업했다.
“시력을 잃은 뒤 제 나이 또래 친구를 따라잡기는 상식적으로 불가능 했어요. 친구와 저를 상대평가하고 비교했다면 공부는커녕 좌절부터 했을 겁니다. 저는 생각을 바꾸었어요. 남과 경쟁하기보다 제 인생의 비전과 목적을 분명히 하고 그 길로 달려갔어요. 일종의 절대평가적 사고를 했던 것이지요. 불가능한 생각을 긍정적으로 바꿔 도전하니 길이 보였어요. 으레 장애물이 나타나 가던 길을 막아 섰지만 무너뜨리고 다시 도전할 힘이 생겨났습니다. 살아야 할 제 인생의 목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멘토와 만나라
강 박사는 1977년부터 22년간 대학교수이자 인디애나 주정부 특수교육국장으로 근무했고 UN 세계장애인위원회 부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또 2000년 미국 저명인명사전, 2001년 세계저명인명사전에 수록됐다.
“교육학에서‘만남’은 아주 중요합니다. 인물이 되려면 인물을 만나야 합니다. 자신의 역할모델을 책이나 멘토에서 찾아 벤치마킹 하는 방법이 가장 빠릅니다. 어려서 소아마비에 걸린 미국 26대 대통령 루즈벨트는 먼 친척을 그대로 닮으려 애썼지요. 친척이 다니던 고교와 하버드대에 진학했고 친척이 해군에 입대하자 그대로 행적을 따랐지요. 멘토를따라가면 방황을 하지 않게 됩니다. 혈연이나 지연 같은 우연한 만남은 선택의 여지가 없지만 가치관과 목적을 같이하는 사람과의 의도적인 만남 은 개인을 크게 성장시켜줍니다.”
강 박사는 일본인 교수 이와하시다께를 그대로 따랐다. 그는 와세다대에 다닐 때 실명한 뒤 영국 에든버러대에 유학, 석사를 받고 귀국해 일본에서 훌륭한 교수가 된 인물이다.
“자신과 생각이같은 이를 적극적으로 만나야 합니다. 작은 물줄기가 시냇물이 되고 강 과 바다로 이어져 엄청난 물살이 되듯, 처음 자신은 보잘 것 없지만 생각을 공유하는 사람들을 만나 오늘날의 제가 됐습니다.” |
첫댓글 교육학에서 만남은 아주 중요합니다 인물이 되려면 인물을 만나야 합니다. 멘토를 따라가면 방황을 하지 않게 됩니다. 가치관과 목적을 같이하는 사람과의 의도적인 만남은 개인을 크게 성장시켜줍니다. 자신과 생각이 같은 이를 적극적으로 만나야 합니다.이글들을 가슴속에 간직하고 구미시 자전거연합회 발전을 위해서도 실천해야 할 일들입니다
좋은말씀입니다...관장님^^
그러지 않아도 강영우박사님이 쓴 책을 사보려고 하는 중이었답니다.
멘토를 따라가면 방황을 하지 않게 된다....오늘은 아침부터 조은글을 접해서 하루가 달리 느껴집니다..감사~^^
좋은말씀 인생을 좀더 열심히 살아야 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