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명(靑溟) 임창순. 젊은이들에게는 낯선 이 한학계의 거두는 지난 사월 타계하였다 이에 『成均』은 한학에 대한 연구와 실천적인 삶 그리고 큰 스승으로서 한 생을 마감한 이 노학자의 삶을 되돌아보려 한다. 선생은 많으나 스승은 드물고 말은 많되 실천은 드문 현실이다. 청명(靑溟)이 남기고 간 자취가 오늘을 사는 청년 심산 모두에게 성찰의 계기를 주었으면 한다.
“마석에서 춘천으로 가는 좋은 길을 버리고 동쪽으로 난 사잇길을 따라 12㎞쯤 달려오십시오”. 청명 임창순 선생의 온기를 더듬기 위해 가는 길이다. 마석에서 버스를 타고 좀더 들어가면 수동면 지곡리에 선생이 남기고 가신 지곡 서당과 태동고전연구소가 눈에 들어온다. 임창순 선생. 올해 4월 12일, 85년의 생을 마감하신 선생의 온기가 아직 이 곳 서당에는 고스란히 남아 있으리라. 지곡 서당이 위치한 이 지둔리 골짜기의 푸르름만큼이나 깊은 선생의 자취가 여기에 남겨져 있으리라. 우리는 과연 그것을 찾을 수 있을까?
지곡 서당은 한학자를 양성하기 위해 임창순 선생이 사재를 털어 시작한 곳이다. 대학 졸업자들을 대상으로 한 해에 열 명 정도를 뽑는데 그들은 장학금을 받고 3년 동안 이 곳에서 거주하며 공부를 한다. 선생은 진보적 한학자였다. 그것은 이 태동 고전 연구소를 설립하며 남기신 설립 취지, 곧 “한문을 가르친다고 해서 옛날 윤리 도덕을 다시 살린다거나 소위 ‘유학=성리학’ 이라는 학문을 공부하는 곳은 아니다. 현재 한국에 관한 학문 또는 동방의 한자 문화권에 대한 역사, 문학, 기타 전통적인 학문을 하려면 그 근본 자료는 모두가 한문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한문을 제대로 읽지 않고서는 그 자료를 다룰 수가 없다. 그렇기에 학문하는 사람을 위하여 이런 교육 기관이 절대 필요하다”는 말씀에서도 잘 드러난다.
학문을 향한 열정어린 노력 1914년 충북 옥천에서 태어난 임창순 선생은 유달리 손자를 아끼시던 할아버지에게서 천자문을 배우며 한문을 처음으로 접했다. 조부가 돌아가시고 가난한 집안 사정으로 학교를 다닐 엄두를 못 내다가 14세 때 가난한 학생들에게 숙식을 제공하며 한문을 가르치는 관선정 서당을 만나게 되고 그 때부터 사서 삼경을 배우고 작문을 지으며 팔십 평생을 몸담게 될 한학의 길로 본격적으로 접어들었다. 하지만 일제 시대, 어지러운 나라 사정은 특히나 선량한 백성들을 비켜가지 않는 법이고 스무 살의 갓 쓰고 버선 신은 이 청년 역시 가난한 집안 사정으로 더 이상 글 읽는 즐거움을 탐할 수만은 없었다.
스무 살 되던 해 서당을 떠난 그는 농사지을 땅도 없는 상황이라 품팔이를 시작으로 식민지 시대 노동자의 삶에 들어선다. 공사장에서 자갈을 고르고 흙을 지게로 나르고 채소 장사, 신 고치는 일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그래도 가난을 벗어나기란 쉽지 않았다. “나는 젊어서 어렵게 지냈기 때문에 천한 일을 잘하는 것이 많다”고 말했던 공자의 젊은 시절이 잠시 스쳐 지나간다. 그 후 평소 한문 공부 외에 틈틈이 독학한 국어와 국사 실력으로 중등 교원 자격 시험을 보고 국사과 수석, 국어과 차석으로 합격하면서 선생의 가르치는 삶은 시작되었다. 선생은 이 후에 대구사범학교를 거쳐 국사편찬위원회 일에 관여도 하고 동양한의과대학(경희대 한의대 전신) 전임강사를 지내다 나중에 성균관대학교로 자리를 옮겼다. 논문을 통해 교수 자격을 획득한 것도 그 때다. 자신의 교수 자격을 심의위원회에 맡기는 일은 싫었지만 그렇지 않으면 자꾸 시간강사로 끌어내리는 통에 억지로 치른 교수 자격 심의였다.
양심적 지식인으로서의 청명(靑溟)의 편력 4.19가 일어났다. 제자들의 죽음을 그냥 모른 척 넘길 수가 없었다. 25일 교수단 시위가 일어났고 “학생들의 피에 보답하라”는 큰 플랜카드 뒤로 대형 태극기가 따르고 백여 명의 교수들이 그 뒤를 이어 거리로 나왔다. 플래카드의 글씨뿐만이 아니라 성명서에 ‘이승만 하야’ 조항을 넣은 것이나, 거리에서 점잖은 교수님들을 설득해 “학생들에 피에 보답하라”는 구호를 외치기 시작한 것도 선생이었다. 교수단 데모 다음 날로 대통령이 하야 성명을 내어 다들 교수단 시위를 대단한 것으로 평가했지만 그 때 선생은 생각이 달랐다. “학생들은 목숨 내놓고 했지만 교수단은 안전 보장 받아 가면서 한 건데…. 학생들의 투쟁에 비하면 그다지 공을 내세울 것이 못 되지…”
이후에도 선생은 학내 재단 비리가 있을 때마다 목소리를 내셨고 통일 문제에도 각별한 관심을 가져 ‘민족자주통일협회’(이하 민자통)에 참가하는 등 현실 문제와 부딪칠 때마다 피해가지 않았다. 그러나 결국 5.16 군사 쿠데타 이후 사직 압력을 받은 선생은 그 이듬해인 1962년에 사직서를 쓰고 강단을 떠나셨다.
그 후 1964년 인혁당 사건으로 감옥살이를 하기도 했고 민자통과 연루된 다른 교수들이 다 학교로 돌아가는데도 그는 끝내 대학 강단으로 되돌아갈 수 없었다. 선생은 생전에 “강제 해직은 맨 처음 나를 쩔쩔매게 만들었다”고 하셨다. 옳다고 생각되는 일은 누가 뭐래도 주저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직 가르쳐 줘야 할 것이 너무 많은데 갑자기 그 길이 막혀 버린 것은 그에게 적잖은 충격이었을 것이다. ‘아무나 나서서 가슴을 헤집고 든 지식 다 파내 갔으면 싶었’을 그 안타까움이 감히 느껴진다. 그러나 선생의 일은 어쩌면 강단을 떠난 후부터 시작되었는지도 모르겠다. 글을 배우겠다는 학생들이 찾아왔고 하루 한 시간씩 장소를 빌려 강의를 시작했다. 그것이 태동고전연구소의 시작이었다.
강의 공간을 마련할 돈이 없어 여기저기 옮겨 다니면서 강의를 했지만 서당을 지어 옮길 때까지 사, 오천 명을 수강시켰다. 그러나 양적으로 많은 수강생보다는 자신의 가슴 속에 깊이 든 학문을 옮겨 줄 이가 아쉬웠다. 한학자 양성을 위해서는 대학 졸업한 사람을 뽑아 장학금 주고 일정한 기간을 집중적으로 공부시켜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곡 서당은 선생이 주려 했던 한학에 대한 애정과 가르침이, 그리고 제자들이 찾으려 했던 배움이 함께 만든 곳이다. 지곡 서당이 들어서면서 지둔리 골짜기에는 강(講)이 울려 퍼졌다. 강(講)은 강의(講義)의 준말로 ‘외우고 이해한다’는 뜻이다. 매 수업이 끝나고 외워서 다음 수업 시간 전에 강을 본다고 한다. 하루 배운 양을 소화해 내는 것은 그리 힘들지 않지만 그게 쌓이고 책 한 권이 끝나면 그 양은 엄청나다. 처음 읽을 때는 괜찮지만 몇 번 읽다 보면 목이 쉬고 침이 마르고 입술이 바싹 탄다. 이 곳에서 거주하는 삼 년 동안 학생들은 오로지 공부에만 전념해야 한다. 물론 외우지 못했다고 혼내는 법은 없으셨다. 하지만 아무 말씀이 없어도 사람들은 알아서 그만두었다. 그것이 이 곳의 관행이다. 제자들에 대한 스승의 기대가 크기 때문이리라.
그렇게 과정을 마친 제자들이 지금은 130여 명이 된다. 청명 선생은 무사히 공부를 마친 제자들을 장한 사람들이고 귀한 사람들이라며 무척 대견스러워하셨다. 그리고 사회 각계에서 현실의 부당함에 대해 당당히 목소리를 내는 제자들의 이름을 들을 때 그는 “그래도 잘 가르쳤구나”라는 한 마디를 하셨다. 현실 문제에 참여해야 한다고 소리내어 가르치시진 않았다. 다만 그 자신이 몸소 그렇게 평생을 살아오셨을 뿐이다. 그 스승 밑에서 학생들은 그저 글만 읽으면 되었다. 모든 장학 경비를 선생 사비로 부담하던 지곡 서당 초기, 먹는 것 자는 것 등 공부 외의 모든 걱정은 스승의 몫이었다. 지곡 서당 초기 졸업생들은 ‘대학까지 나온 젊은이들이 왜 돈 쓸 곳이 없겠냐’며, 행여 공부하는 제자들이 학비 걱정으로 잡념이 생길까 봐 사재를 털어 꼬박꼬박 장학금을 주시고 자신이 없으면 빚을 내더라도 제자들의 장학금은 거르지 않으셨던 스승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다.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선생의 학문적 조예 청명 선생은 한학뿐만이 아니라 금석학을 비롯해 미술, 서예 등 그 폭이나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분이었다. 중국 그 넓은 땅에 ‘비림’이라는 곳이 있다. 걸어도 걸어도 끝없이 비석들이 늘어서 있는 비림. 제자들과 함께 그 비석 사이를 걸어가시는 선생의 눈은 빛났다. 끝없는 비석의 길에서 임창순 옹의 깊은 감식안은 유난히 빛났고 중국 비림의 비석을 연구하는 학자들마저 그의 뒤를 따르며 선생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다 한다. 평생 제도 교육을 받은 적이 없으며 학력이라고 한다면 어릴 적 관선정 서당에서의 6년이 전부였지만 어떤 질문에도 막힘이 없던, 그 짐작할 수 없는 학문적 깊이 앞에서 사람들은 겸손해지곤 했다고 한다.
학문에 대한 청명의 조예와 열정은 그가 이 세상을 떠나기 얼마 전 우리 손에 쥐여진 책, 『당시정해(唐詩 精 解)』에서도 잘 드러난다. 1956년 초판 『당시정해』를 다시 수정해 40여 년 만에 낸 것이다. 초판부터 왠만한 백과 사전의 ‘당시’ 항목에는 참고 문헌으로 되어 있을 정도로 당시 선집에 있어서는 하나의 레퍼런스 북으로 일컬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것조차도 ‘불미스러운 곳이 많아 항상 께름칙해 언젠가 다시 쓰려던’ 결심을 옮겨 10년 작업 끝에 다시 펴낸 것이다. 개정판이지만 한자를 잘 모르는 요즘 세대들을 위해 거의 다시 쓰다시피 한 책이나 다름없다. 젊은 층에게 좀더 많이 읽히기 위해 “책은 작게, 값도 싸게 만들라”고 출판사 편집진들을 다그치기도 했다는 선생은 해설에 연연하지 말고 마음에 드는 시를 골라 열 번 백 번 입으로 외다 보면 그 시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다며 당시 감상법을 추천하셨다. 이 외에도 선생은 『한국의 서예』 『한국미술전집(일본어판)』 『한국금석집성』 『단권신역(單券新譯)』 『옥루몽』 등의 활발한 저술 활동을 하신 바, 이처럼 한학과 관련된 많은 연구로 인해 1979년에 보관문화훈장을 받으시기도 했다.
청명(靑溟)은 순수한 소년이자 엄격한 스승이셨다 “그분처럼 재미있는 노인도 없을 겁니다” 80이 넘은 연세에도 젊은이들과 거침없이 대화를 하던 스승을 회고하면서 한 제자는 소리 없이 깊게 웃는다. 지곡 서당은 일 년에 두 번 가족들이 모이는 날이 있다. 그 중 하루가 임창순 선생의 생신날이다. 130여 명의 지곡 서당 졸업생과 재학생들, 그리고 그들의 자식과 아내가 이 지둔리 골짜기를 메운다. 그런 날은 음식을 만들어 밤을 세워 가며 시간을 함께 보낸다. 조용하던 서당이 그 날 하루는 강(講) 대신 큰 웃음소리로 채워진다(올해는 선생이 돌아가셔서 추모 사업에 대한 논의들을 했다고 한다). 젊은 제자들과 마주 앉아 밤을 새워 이야기를 나누고 제자들이 부르는 노래를 따라 부르시던 선생은 형식과 격식을 무척이나 싫어하셨다. 설날 제자들이 세배를 하러 오면 평등한 사람끼리 무슨 절이냐며 한사코 거절하셨다. 현재의 불평등한 남녀 관계는 빨리 개선돼야 할 근본적인 문제라고 생각하셨고 자식들에게는 자신이 죽고 나면 화장을 하고 제사도 폐하라고 하셨다.
혹 타고 다니는 차가 없을 때는 제자들이 태워 드린다고 해도 각자 할 일이 있을 텐데 가까운 사람에게라도 신세져서야 되겠냐며 어느 새 버스를 타고 나가 버리셨다. 검은 머리의 제자들과 마주 앉아, 왼손에는 담배를 오른손에는 검은 바둑알을 잡고 내기 바둑을 두며 바둑판을 여유 있게 내려다보시는 백발의 스승을 회고하는 또 다른 제자는, 스승의 죽음을 아직 잘 실감하지 못하고 있었다. 잘 두시진 못하셨지만 한 번 시작하면 내리 일곱 판을 둘 정도로 바둑을 즐기시던 선생은, 중국 여행을 갈 때도 바둑판만은 챙기셨다고 한다. 지곡 서당의 앨범을 한 장 한 장 넘기면 그 속에는 항상 제자들과 웃고 계신 선생이 있었다. 하지만 수업 시간에만은 엄격하셨다. 특히 강(講)을 볼 때면 평소와 다른 엄격함에 다들 바짝 긴장했다 한다. 그러면서도 선생은 수업을 지루하지 않게 이끌어 가셨다. 학문과 삶의 진정성에서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위트, 가끔씩은 어린아이처럼 떼를 쓰던 모습. 학문적으로는 존경하지만 동시에 인간적 친근함을 느낄 수 있는 스승은 많지 않은 현실에서, 정작 보여 주지 않아도 자연스레 드러나는 그 어떤 풍모. 선생의 권위는 바로 그런 것이었다.
학자로서의 사명에 마지막까지 충실했던 삶 선생께선 작년 6월에 소장하고 있던 고서화와 자택, 토지 등의 사재를 털어 고전종합연구소인 청명문화재단을 설립하셨다. 살아 생전에 한학 공부를 위한 서당을 세워 가르침을 주었고 이제 안정적으로 연구할 수 있는 터전까지도 만들어 놓으셨으니, 학자로서 그리고 스승으로서 선생은 할 일을 다 하고 가신 것이다.
통일 문제를 위한 국민적 논의를 확산시키고자 1998년에 창간한 계간지 『통일시론』의 작업도, 올해 초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선생은 봄호 원고를 꼼꼼히 검토하셨다. “지금은 책을 읽는 사람, 지식인이 아주 살기 어려운 시대입니다. 교사나 교수들을 특수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학생들을 지도하는 신성한 직업을 가졌다 해서, 선생이면 무조건 행정부의 지시에 순종해야만 그 자리를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됐어요. 봉건 시대에도 임금의 명령에 항거하거나 상관의 지시를 따르지 않은 사실이 얼마든지 있지 않습니까. 지식인들이 일신의 안전만을 생각하고 사회 현실에 대해 비판할 줄 모르고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 운동에 나서지 않는다면 이는 자기의 사명을 저 버리는 것이죠. 학생들에게도 그런 정신이 있어야 합니다. 사회가 바로잡히고 또 우리가 살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어야 그것이 삶인데 그 권리 다 상실하고서는 살 수 없는 것 아닙니까? 우선 자기 생존을 위해서라도 할 수 있는 데까지 해야 하죠.” (『역사 비평』 1992년 가을호에서)
1999년 4월 12일 오전 8시 30분. 청명 선생은 아무 말도 남기지 않고 조용히 삶을 마감하셨다. 평소 뜻대로 시신은 화장되어 지곡서당과 모친의 묘소가 있는 남양주 일대에 뿌려졌다. 말만 많은 세상이다. 깊이 얕은 열정만이 난무하는 세상이다. 가슴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던 ‘실천적 진리애’ ‘소탈하면서도 운치를 아는 삶’. 이 한 노학자의 생을 더듬으며 우리는 그저 머릿속 단어로만 존재하던 스승, 학자, 그리고 지식인이라는, 그 정확한 뜻이 무엇인지 정말 이해하기 어려웠던 단어들을 가슴으로 배웠다. 가슴으로 울려 퍼져 오는 선생의 삶 처음 경기도 남양주 마석리라는 곳에서 시외 버스를 내렸을 때, 우리는 그 곳에서 푸른 나무들에 둘러쌓여 있는 지곡 서당을 보았었다. 그 곳에는 그저 조용한 물소리와 바람소리, 그리고 가끔 울어 대는 매미 소리만이 있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길에 우리의 귓가에는 하나의 소리가 더불어 따라오고 있었다.
강(講)! 누구의 것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누군가의 강(講)하는 소리가, 마치 청명의 숨결처럼, 그제서야 들려 왔던 것이다. “…내가 집을 하나 이루고자 한 바 이미 오래였는데 마침내 그 때가 되어 지금 마룻대(上樑)를 올리는도다. 내가 이 집을 지음은 재물로 삼아 뒤에 자식에게 물리려 함이 아니니…다만 바라는 바는 이 집에서 영원하도록 글 읽는 소리 그침이 없었으면 하는 것일 따름이로라…” (청명[靑溟] 선생의 『지곡 서당 상량문[上樑文]』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