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rc="http://star.hankooki.com/starstory/photo/khc/khc5.jpg">여름방학에 콘서트 일정을 잡은 우리는 압구정동에 있는 모델라인이라는 소극장을 빌렸다. 나는 네곡을 준비했고 친구들도 자작곡 몇곡씩을 준비하였다. 고등학생의 순수한 동기덕분에 우리는 소극장을 무료로 사용할 수 있었다.
연습은 충분히 했지만 막상 콘서트 날짜가 다가오자 점점 자신감이 없어 져갔다. 과연 우리 콘서트를 보러올 사람들이 있을까. 실수없이 공연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앞섰다.
그러나 공연당일 나는 놀라움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예상외로 너무 많은 관객이 몰린 것이다. 소극장은 1백석이었는데 무려 4백명이 찾아 온 것이다. 아마추어그룹치고는 비싼 입장료인 2천원을 받았는데도 말이다. 우리는 졸지에 1회공연을 2회로 늘렸고 별다른 실수없이 콘서트를 마쳤다.
3개월간의 노고가 헛되지 않았고 그때 자신감을 얻어 지금 가수의 길을 걷고있는지도 모른다. 사실 콘서트를 준비하면서 우리는 홍보문제에는 거의 신경을 쓰지 못했다. 대신 친구들의 입을 통한 홍보가 상당히 도움이 되었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우리들이 펼친 '아침향기콘서트'는 강남일대뿐만 아니라 강북지역고등학교에까지 적지않은 화제를 뿌렸다는 것이었다.
관객들 대부분이 고등학생이었고 특히 정신여고, 진선여고, 선화예고, 서울예고에 재학중인 여학생들의 반응은 그 어느 공연장보다 뜨거웠던 것이 사실이다.
성황리에 콘서트를 끝낸 후 공연수익금으로 우리의 음악을 테이프에 담기로 했다. 공연수익금으로 모아진 돈은 고등학생에겐 어마어마했지만 스튜디오를 빌리기에는 턱도없는 액수였다. 그래서 우리는 B자 테이프를 만들 수 밖에 없었다.
세션악기는 키보드, 전자기타 그리고 통기타가 전부였고 에코를 넣기 위해 화장실에서 녹음하기로 했다. 이렇게 만들었으니 질이 좋을리가 없었지만 공장에서 1천5백개를 찍어냈는데 2백50개가 추가 주문되는 호황을 누리기도 했다.
학교 앞에 있던 환타지아레코드가게 아저씨가 우리테이프를 팔아주었는데 고맙게도 무료로 봉사해 주셨다.
판매금을 받아든 우리는 공평하게 나누었고 그 돈을 모두 부모님께 갖다드렸다. 무엇보다도 부모님들이 우리를 믿고 기꺼이 콘서트를 성원해주셨기에 공연이 성공을 거둘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침향기콘서트'는 내게는 언제까지나 잊을 수 없는 추억이다. 그때 불렀던 <아침향기>는 새앨범에 재편곡해 수록하기로 했다.
콘서트때 불렀던 네곡 중에는 다소 빠른 풍의 <여행>이라는 노래가 있는데 이곡에 대해서는 아주 우스운 에피소드가 있다.
91년 겨울이었다. 내가 음악을 시작한지 2년정도 되던 해였다. 이화여대 에서 가요제가 열린다고 하길래 나는 친구들과 함께 구경을 갔었다.
그런데 참가팀중 한팀이 내가 만든 <여행>을 부르고 있는 것이 아닌가.
분명 <여행>은 아침향기콘서트를 위해 만든 곡인데 그팀은 창작곡 경연대회에 자신들이 만든 노래인양 속이고 있었다.
한편으론 불쾌하기도 했지만 어떻게 나의 노래를 알고 가요제 참가곡으로 선택했는지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나와 함께 가요제에 구경갔던 친구들 역시 같은 기분이었다. 가요제가 끝난 후 나는 조용히 그 여학생을 찾아갔다. 처음에는 자신이 만든 곡이라고 우기던 그 여학생은 조금 지나더니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녀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친구가 테이프를 하나주면서 고등학생들이 만든 아마추어작품이니 맘에 들면 가요제참가곡으로 써도 좋을거라고 얘기했던 것이었다. 본의아니게 여학생을 울린 나는 당황스럽기도 하고 미안한 마음도 들어 따지려했던 처음과는 달리 내 노래에 관심을 가져 고맙다는 말을 하고 돌아서고 말았다.
그때는 당황한 마음에 아무렇게나 얘기했지만 지금 생각하면 <여행>이란 노래를 높이 평가해준 그 여학생이 진실로 고맙기만하다.
영동고등학교 2학년때 나는 항상 따뜻한 봄날이었다.
성적이 꾸준히 상위권에 맴돌아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리기도 했다. 또 항상 음악이 가까이 있었고 음악을 통한 멋진 추억거리 또한 많이 남아 있다.
그러나 고3이 되면서 여느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그 굴레는 적지않은 무게로 느껴졌다.
우선 나의 재산목록 1호인 모든 악기가 한쪽으로 치워져야 했고 오직 공부에만 몰두해야 했다. 이상하게도 고3이 되면서 성적이 조금 떨어지기는 했지만 그리 문제될 것은 못되었다.
어머님은 내게 지극한 정성을 쏟으셨고 그런 어머님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은 생각에 최선을 다해 입시공부에 매달렸다. 나의 진로설정은 나도 모르게 당연히 의대로 정해져 있었다.
우리시대의 고등학생들 대부분이 그렇듯이 나 또한 진로를 결정하는데 심사 숙고하기 보다는 학력고사점수를 높이는데 전력투구를 하였다. 그러다보니 어머니가 정해준 진로가 곧 나의 갈길이 되어버린 것이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었지만 고3이라는 자체만으로도 중압감은 대단했다.
힘겨운 고3 생활을 하는 가운데 큰 힘이 되어주신 분이 한 분 계셨다. 그분은 다름아닌 고3 담임인 이석일선생님이었다. 선생님은 활달하고 유머가 풍부한 분으로 늘 학생들을 친구처럼 대해 주셨는데 나 또한 그분의 영향을 받은 바가 크다. 편견이나 편애가 없으신 까닭에 학생들은 모두가 그 분을 좋아하고 존경했다.
스승의 날이 되면 이석일선생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따로 약속을 정해야 할 정도다.
영동고교개교 때부터 계시던 분이라 1회 졸업생 선배들로부터 현재 제자에 이르기까지 거의 1주일 동안 선생님은 제자들의 방문을 받아야 했다.
내마음 깊은 곳에 있던 이석일선생님은 삭막한 고3 생활에서 아주 따뜻한 기억을 갖게 해주었다. 다행히 아직까지 선생님과의 관계를 지속시키며 우리는 부담없는 사제의 정을 유지하고 있다.
요즘도 가끔 선생님을 찾아갈 때면 많은 음식과 장식장에 진열된 양주를 아낌없이 내주시며 반갑게 맞아 주신다. 그리고 나의 음악에 대한 여러가지 느낌을 아주 솔직하게 말씀해 주시기도 한다.
간혹 음악을 좀 쉽게 만들어달라는 말씀도 하시는데 그럴 때 나는 조심스럽게 내음악관을 얘기하기도 한다. 진정한 음악이란 결코 대중에게 맡겨놓아서는 안되며 음악인 스스로가 최대한의 노력으로 음악발전에 기여해야한다고.
힘겨운 수험생활을 한 나는 고려대학 의과대에 지원서를 냈다. 고대의대 합격자 발표보다 이틀 전에 연대의대합격자가 발표되었는데 연대의대 커트라인이 나의 학력고사점수보다 낮았다.
이런 상황으로 보아 나는 당연히 합격하리라고 생각하고 편한 마음으로 발표날을 기다렸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고대합격자 발표날 전화속에서 나오는 목소리가 나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내이름이 합격자명단에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믿을 수 없어 고려대학교로 뛰어갔는데 내이름이 대기자 2번명단에 걸려있었다. 의대합격자 명단에 없는 내이름은 2지망으로 지원한 학과에 붙어있었다.
지난1년간 부모님들의 관심속 열심히 노력했건만... 참담한 마음이었고 부모님은 뵐 면목이 없었다.
대기자 2번이어서 혹시나 했지만 결과는 대기자 1번까지 최종합격되었고 나는 재수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번 쓰라린 인생경험을 한 나는 곧바로 종로학원에 등록을 했다. 고3때보다도 더 악착같이 공부에 매달렸다.
다행이 성적은 날로 향상이 되었고 어머니의 관심도 여전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겉보기에 외향적인 성격이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겁도 많고 수줍음도 많았다. 고등학교시절에 그런 나의 진짜 모습을 보이기싫어 일부러 활달한척 꾸민 것이다.
그러나 재수라는 것이 괜히 주눅들게 만들고 맘대로 웃거나 즐거워하는 모습이 어울리지 않는 것이고 보니 자연스레 내 속에 감추어져있던 내성적인 성향이 겉으로 드러났다.
또다시 입시철이 되어 나는 이석일선생님을 찾아갔다.
그때 내성적은 꽤 높은 점수대를 유지했고 선생님은 서울대 기계공학과 원서를 준비해 놓으셨다. 그러나 나는 겁이 났다. 또다시 실패하는 것은 상상할수 없었다.
그래서 점수를 낮추어 연세대 기계공학과에 원서를 제출했다. 입시 당일날 나는 어처구니없는 일을 당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나는 입시운이 없었던 것 같다.
2교시 수학시험을 볼 때였는데 갑자기 내 옆의 라디에이터가 터지면서 물이 새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수학은 내가 가장 자신있는 과목이었는데 어수선한 교실분위기에 정신을 빼앗긴 나는 엉망으로 시험을 치렀다.
나는 또 한번 고배를 마셔야 했다. 눈앞이 캄캄하고 모든 일에 의욕을 잃었다.
가족들조차도 기력을 상실했지만 내가 정말 열심히 재수생활한 것을 아는 식구들은 조금도 낙방에 대해 눈치를 주지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