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 4-57회
정선 부수배리-이기령-갈미봉-사원터갈림목-
고적대-망군대-연칠성령-칠성폭포-무릉계곡
20240505
1-1.물푸레나무 한 잎의 여자를 사랑했네
5월 5일 어린이날 백두대간 산행을 위해 대모산 보금자리를 떠난다. 그런데 비가 내린다. 오동나무 연보랏빛 꽃들과 이팝나무 가느다란 하얀 꽃잎들이 길바닥에 떨어져 나뒹굴고 깔려서 빗물에 젖는다. 기후 위기인지 벌써 봄꽃들이 낙화하고 여름꽃들이 피어나고 있다. 계절의 여왕 5월은 신록의 달이라는 말은 이제 어울리지 않고 녹음의 계절이라고 불러야 할 것 같다.
이번 백두대간 산행은 강원도 정선군 임계면 가목리 부수배리에서 출발하여 백두대간 이기령에 오른 뒤 이기령에서 남진하여 갈미봉, 고적대, 연칠성령 구간을 산행한 뒤 강원도 동해시 삼화동 무릉계곡으로 하산할 예정이다. 백두대간 산행거리는 7.7km에 불과하지만 백두대간 접속 구간 거리가 백두대간 산행 구간의 2배에 해당되고 마지막 하산길은 가파른 비탈길이어서 엄청나게 힘이 드는 산행이다. 4번째로 이 구간을 산행한다. 지난 번에는 북진하였는데 이번에는 남진한다.
올해 4월 7일 백복령에서 출발하여 원방재, 상월산, 이기령까지의 백두대간 산줄기 산행을 마치고 강원도 정선군 임계면 가목리 부수배리골을 거쳐 임계천 가목1교로 하산하였다. 이번에는 지난번 하산하였던 정선군 임계면 임계천의 가목1교에서 출발하여 임계천 옆 부수배리길을 따라 오른다. 길가에는 노랑 민들레꽃이 지천으로 피어 있고, 대관령에서 처음 발견된 유럽 원산의 귀화식물 유럽나도냉이 꽃도 민들레 노란 빛에 뒤질세라 노랗게 반짝인다. 부수배리 펜션촌을 지나면 산골짜기와 길가에 귀룽나무와 돌배나무 하얀 꽃들이 이제사 흐드러지게 피어 있다. 대모산 귀룽나무와 돌배나무 하얀 꽃들은 이미 떨어져 흔적도 없는데 정선군 임계면 가목리 부수배리골에서 뒤늦은 봄을 맞이하여 귀룽나무와 돌배나무 봄꽃에 취한다. 이곳은 이제사 봄철이 되었는가 보다. 오규원 시인의 '봄' 詩가 지금 이곳에 꼭 들어맞는 것 같다. "봄은 자유다. 자 봐라, 꽃피고 싶은 놈 꽃피고, 잎 달고 싶은 놈 잎 달고, 반짝이고 싶은 놈은 반짝이고, 아지랑이고 싶은 놈은 아지랑이가 되었다. 봄이 자유가 아니라면 꽃피는 지옥이라 하자. 그래 봄은 지옥이다. 이름이 지옥이라고 해서 필 꽃이 안 피고, 반짝일 게 안 반짝이던가. 내 말이 옳으면 자, 자유다 마음대로 뛰어라." - 오규원의 ‘봄’ 2연
임계천을 건너 명주목이로 가는 길에도 나무꽃들이 개천가와 숲에서 하얗게 빛난다. 주종은 귀룽나무이고 그 사이에 돌배나무도 섞여 있다. 서울에서 내려와 살고 있다는 자연귀화인의 집 '눈꽃산채' 뒤쪽에 괘병산이 솟아 있다. 괘병산에 오른 뒤 동쪽으로 올라가면 백두대간 갈미봉에 이를 것이다. 명주목이 입구에 하얀 꽃들이 무성하다. 돌배나무꽃인 줄 알았는데 나중에 알아보니 고광나무꽃이다. 하얀 꽃잎이 밤중에도 빛난다고 하여 孤光나무라고 불린다고 한다. 밤에 빛나는 꽃의 대명사는 야광(夜光)나무가 아닐까. 설악산 백담사의 야광나무를 보고 얼마나 감동했던가. 야광주(夜光珠)처럼 반짝이는 하얀 꽃들에 넋을 잃었었다.
명주목이길 옆으로는 임계천이 흐르고 하얀 나무꽃들이 시냇가 숲에서 반짝인다. 그 속에서 쇠물푸레나무가 꽃을 피우고 냇가에 다소곳하게 서 있다. 물푸레나무보다 작아서 쇠물푸레나무라고 불리는 이 나무의 꽃들은 이팝나무 꽃보다 더 가늘고 보송하지만 색채는 이팝나무 순결한 흰빛에 비해 떨어진다. 물푸레나무를 생각하면 언제나 오규원 시인의 '한 잎의 女子'가 떠오른다. "물푸레나무 한 잎같이 쬐그만"이라는 표현에서 시인은 물푸레나무 잎보다 더 작은 쇠물푸레나무 잎을 물푸레나무 잎이라고 표현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시인은 '쇠물푸레나무 한 잎'이라는 표현 대신 '물푸레나무 한 잎'이라고 표현했다. 그래야 시 맛이 난다.
나는 한 女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한 잎같이 쬐그만 女子, 그 한 잎의 女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그 한 잎의 솜털, 그 한 잎의 맑음, 그 한 잎의 영혼, 그 한 잎의 눈, 그리고 바람이 불면 보일 듯 보일 듯한 그 한 잎의 순결과 자유를 사랑했네.// 정말로 나는 한 女子를 사랑했네. 女子만을 가진 女子, 女子 아닌 것은 아무것도 안 가진 女子, 女子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女子, 눈물 같은 女子, 슬픔 같은 女子, 病身 같은 女子, 詩集 같은 女子, 그러나 누구나 영원히 가질 수 없는 女子, 그래서 불행한 女子.// 그러나 영원히 나 혼자 가지는 女子, 물푸레나무 그림자 같은 슬픈 女子. - 오규원(1941~2007)의 '한 잎의 女子' 전문
1-2.고적대에서 조망하는 운무(雲霧) 풍경
2021년 11월 23일 강원도 동해시 삼화동 무릉계곡에서 출발하여 백두대간 능선 연칠성령에 오른 뒤 북진하여 망군대, 고적대, 갈미봉을 거쳐 이기령에서 백두대간 산행을 마친 뒤 정선군 가목리로 하산하였었다. 그로부터 2년 5개월이 흘러서 이기령에서 백두대간 이기령-영칠성령 구간을 남진한다. 산죽밭이 펼쳐지고 송림은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 있다. 동쪽 방향에는 백두대간 느루봉에서 갈라져서 철산과 금산 방향으로 내닫는 산줄기가 삼화사 뒤쪽으로 흘러내리고 있다. 그 능선을 보면서 백두대간 능선에 있는 느루봉을 이번에는 거쳐가야 하겠다는 생각을 품었지만 산행 속도가 워낙 느린 탓에 제한 시간을 고려하여 결국 포기하고 느루봉을 우회하여 능선 아래 너덜지대를 통과하고 말았다. 느루봉 산행은 뒷날 혼자서 편안하게 해야 할 것 같다.
느루봉 능선 아래의 너덜지대를 지나면 느루봉 갈림목이 나온다. 갈림목을 지나면서 잔뜩 찌푸렸던 날씨는 비를 뿌려댄다. 빗방울이 굵어져서 결국은 비옷을 입었다. 갈미봉으로 가는 도중 남동쪽으로 살피면 두타산은 봉긋하게 제 모습을 보이지만 청옥산은 운무에 가려 숨어 있다. 서쪽 방향으로는 갈미봉에서 괘병산으로 내리벋는 능선이 시원하게 시야에 들어온다. 고산철쭉 연분홍 묽은 꽃들이 산객의 눈을 호강시켜 주고, 봄비인지 여름비인지 계절을 변환시키는 비는 꾸준히 내린다. 갈미봉과 그 동쪽의 전위봉에 오르는 힘겨운 고투가 시작되었다. 일행들은 모두 앞서 지나갔고, 홀로 맨 뒤에서 힘겹게 그들을 좇아가지만 보이지 않는다.
갈미봉은 사방이 막혀서 조망할 수가 없다. 갈미봉을 내려가면 동쪽과 남쪽으로 풍경이 열린다. 무릉계곡과 동해시, 동해 바다가 운무가 피어오르며 신비한 풍경을 연출한다. 동남쪽의 두타산도 운무에 가려 수묵화를 연출한다. 암릉 지대에 이른다. 기암절벽의 암봉이 치솟아 있고, 청옥산에서 두타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은 운무에 가려 보이지 않고 검푸른 몸을 드러낼 뿐이다. 그 몸 아래 연칠성령 계곡과 호계, 무릉계곡은 초록빛을 뿜어낸다. 기암절벽의 암봉을 서쪽으로 우회하여 사원터 갈림목으로 가는 도중 아름다운 꽃들을 만나 우중산행의 맛을 만끽한다. 거제수 군락지를 지나면 다른 곳에서는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진 얼레지 꽃들이 시드는 군락지가 있다. 꽃잎이 뒤로 젖혀지는 특징의 얼레지꽃은 그래서 꽃말이 '바람난 여인'이다. 올봄에 얼레지꽃을 전혀 만나지 못했는데 고적대 가는 산길에서 비록 시들었지만 빗물 머금은 얼레지 군락지에서 바람난 여인들을 만나 행복하다.
얼레지 군락지를 지나면 나도옥잠화 군락지가 나온다. 처음에 한 개의 옥잠화가 꽃송이를 피우고 있는 줄 알았다. 그런데 조금 더 가니 나도옥잠화가 군락을 이루고 있다. 비 내리는 깊은 산비탈에서 서로 의지해 후손을 번식하는 야생초의 모습에 감동했다. 몇 년 전 설악산 중청봉 북쪽 기슭에서 나도옥잠화를 만난 이후 처음이다. 반가워서 쩔쩔맸다. 나도옥잠화를 연거푸 폰카에 담아 보았다. 빗물 머금은 나도옥잠화 초록 잎과 새하얀 꽃이 참으로 아름웠다. 순결한 처녀처럼 청초하고 우아하다. 옥잠화는 꽃이 ‘옥으로 된 비녀’(옥잠玉簪)를 닮아서 옥잠화 이름을 얻었으며, 나도옥잠화는 옥잠화와 비슷해서 이런 이름을 얻었다. 나도옥잠화는 잎이 옥잠화와 비슷하지만 꽃은 옥잠화와 다르다. 옥잠화는 길쭉한 통꽃이지만 나도옥잠화는 작은 꽃이 여러 개 뭉쳐서 달린다. 꽃말은 조용한 사랑, 나도옥잠화 꽃을 잘 드러낸 것 같다.
비가 계속 내린다. 비는 여름처럼 무성한 숲의 녹음을 씻어 내린다. 숲의 초목은 비에 씻겨 더 맑다. 진분홍 진달래꽃이 비를 맞으며 아직도 피를 토하는 풍경에 가슴이 울렁거린다. 울렁거리는 가슴을 달래며 고적대 암릉지대 북서쪽 비탈면을 지나는데 풀숲에서 큰앵초꽃들이 진분홍 등불을 밝히며 길손을 맞이한다. 큰앵초는 앵두를 닮은 앵초보다 더 크다고 해서 큰앵초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아름다운 큰앵초 진분홍 꽃잎에 빗물이 잘게 흩어져 있다. 빗물 머금은 큰앵초 꽃잎, 예쁘다. 그녀 앞에 앉아서 그녀와의 추억을 그린다. 설악산 풀숲에서 햇빛에 반짝이는 그녀의 진분홍 입술이 그려진다. 언제 보아도 사랑스럽다. 설악산 큰앵초들도 피어났을까? 큰앵초꽃을 설악산에서 처음으로 배웠기에 내게 큰앵초꽃 원산지는 설악산처럼 기억된다.
사원터 대피소로 내려가는 갈림목을 지나서 고적대에 오른다. 비바람이 세차게 불어댄다. 사방이 열려 있어서 풍경 조망이 으뜸인 고적대에서 이번에는 운무에 가득한 풍경만을 감상할 뿐이다. 두타산과 청옥산, 중봉산, 무릉계곡과 동해 바다, 이 모든 것은 운무 풍경 속에 숨어 있어 그 숨은 풍경을 상상하며 그리워한다. 아무도 없는 고적대, 잠시 혼자 머물며 상념하지만 비바람에 몸이 날리는 것 같다. 고적대에서 내려가는 급경사를 밧줄을 잡으며 위태하게 내려간다. 비바람에 몸이 쓸려갈까 봐 마음이 조마조마하다.
허겁지겁 뒤뚱거린다. 제한 시간 6시간 30분은 지킬 수 없으며 7시간 안에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고적대 아래로 내려와 갈미봉에서 남쪽으로 이어지는 능선과 암릉의 장쾌함을 감상하고 바로 머리 위에 있는 고적대를 올려본다. 이제 이곳에 다시 올 수 있을까? 날로 힘들어지는 무릎 연골과 심장 때문에 백두대간 4차 종주를 마치면 더 이상 백두대간 종주를 따라갈 수 없을 것 같다. 그러니 백두대간 종주 산행의 매 순간을 더욱 소중하게 간직해야 하는데 매번이 헐레벌떡하며 주변을 그냥 스쳐만 간다.
망군대에 앞에 이르렀다. 조선 인조 때의 재상이요 문장가인 택당 이식 선생이 삼척시 하장면 단교암에 은거할 때 이 바위에 올라 한양 쪽을 바라보며 임금을 그리워했다고 하여 이 바위를 망군대라고 부른다고 한다. 예전에 망군대에 올라 한 바탕 호기를 부리며 풍경을 조망하였는데 이번에는 풍경을 조망할 수 있는 날씨도 아니거니와 제한 시간에 쫓겨서 망군대에 오르지 않고 연칠성령으로 내려간다. 15시 23분, 산행을 시작하여 약 5시간이 흘렀다. 남은 거리 약 6.7km를 내려가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
1-3.아, 탈진의 무아지경
지난 달 4월 7일 삼척시 댓재에서 출발, 북진하여 햇댓등, 두타산, 청옥산을 거쳐 연칠성령까지 백두대간 산줄기 산행을 마치고 연칠성령에서 무릉계곡으로 하산하였다. 그때 연칠성령에서 내려가는 산길은 눈이 쌓여 있어서 엄청나게 고생하였다. 그때 미끄러져 넘어져 오른쪽 팔꿈치를 다쳤는데 소중하게 아끼는 등산복 셔츠가 찢어지고 말았다. 그때 목적지까지 2시간 20여 분이 걸렸다. 이번에는 비가 내려서 연칠성령 계곡은 진흙길이 되어 미끄럽다. 미끄러운 것은 그때나 이번이나 똑같지만 위태하기는 덜하다. 문제는 무릎 상태, 지난 번에 비해 무릎 상태가 몹시 안 좋다. 과연 목적지까지 제대로 내려갈 수 있을지 걱정스럽다.
무념무상 상태로 하산하는데 무릎과 허벅지 통증이 심해지면 압박한다. 장딴지는 자꾸 쥐가 난다. 그렇지만 이 모든 것을 이겨내며 제1차 어려운 과정인 칠성폭포까지 내려왔다. 16시 42분,연칠성령에서 48분이 걸렸다. 휘청휘청 무릉계곡 대피소에 이른다. 이곳은 일반적으로 사원터 대피소라고 이르는데 이제는 무릉계곡 대피소라고 이르는 것 같다. 이곳에서 곧바로 백두대간 고적대 삼거리로 올라갈 수 있는데 등산로 폐쇄라는 안내문이 붙어 있다. 그런데 왜 사원터일까? 예전에 이곳에 상원사라는 절이 있었는데 지금은 사라졌다. 그래서 상원사터라고 불리다가 상원터로 바뀌고 이제는 사원터라고 불리게 되었다.
사원터에서 내려가는 계곡을 '호계(虎溪)'라 이른다고 한다. 두타산성 성문을 따서 지명이 된 '문간재' 서쪽 계곡을 호계라 이르고 문간재를 넘어서 동쪽 계곡을 무릉계라 이른다고 한다. 어떻게 문간재를 지났는지 무아지경의 고통을 견딘다. 문간재에서 내려가면 하늘문 갈림목이며 이곳까지 내려가면 2차 어려움이 끝난다. 그럼에도 돌길과 바윗길은 고통을 가중시킨다. 고통을 참아내며 무릉계곡에 종 모양으로 피어난 쪽동백나무 꽃들을 감상하며 고통을 삼켜낸다. 개축 공사 중인 삼화사 천왕문과 십이지신상 앞을 거쳐 반석교, 무릉계곡의 명품 무릉반석을 지난다. 끊임없는 고통은 축제로 변화되는가? 신선교를 건너 속계로 나와 무릉계곡 상가 앞에서 축제의 환상에 잠긴다. 탈진한 무아지경이 된 몸의 환상일 것이다. 무릉계곡 제1힐링캠핑장에 도착하여 7시간30분의 큰 고통의 산행을 마친다. 무아지경의 탈진에 그대로 쓰러졌다. 정현종 시인의 '고통의 축제' 시가 혼몽히 흐른다.
계절이 바뀌고 있습니다. 만일 당신이 생의 機微(기미)를 안다면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말이 기미지, 그게 얼마나 큰 것입니까.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을 만나면 나는 당신에게 色(색) 쓰겠습니다. 色卽是空(색즉시공). 空是(공시). 色空之間(색공지간) 우리 인생. 말이 색이고 말이 공이지 그것의 實物感(실물감)은 얼마나 기막힌 것입니까. 당신에게 色(색) 쓰겠습니다. 당신한테 空(공) 쓰겠습니다. 알겠습니다. 편지란 우리의 感情結社(감정결사)입니다. 비밀통로입니다. 당신에게 편지를 씁니다.
識者(식자)처럼 생긴 불덩어리 공중에 타오르고 있다.
시민처럼 생긴 눈물 덩어리 공중에 타오르고 있다.
불덩어리 눈물에 젖고 눈물덩어리 불타
불과 눈물은 서로 스며서 우리나라 사람 모양의 피가 되어
캄캄한 밤 공중에 솟아오른다.
한 시대는 가고 또 한 시대가 오도다, 라는
코러스가 이따금 침묵을 감싸고 있을 뿐이다.
나는 監禁(감금)된 말로 편지를 쓰고 싶어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감금된 말은 그 말이 지시하는 현상이 감금되어 있음을 의미하지만, 그러나 나는 감금될 수 없는 말로 편지를 쓰고 싶습니다. 영원히. 나는 祝祭主義者(축제주의자)입니다. 그 중에 고통의 축제가 가장 찬란합니다. 합창 소리 들립니다. "우리는 행복하다"(까뮈)고, 생(生)의 기미를 아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안녕.
- 정현종(1939~)의 '고통의 축제(祝祭) 1 - 편지' 전문
2.산행 과정
전체 산행 거리 : 20.48km
전체 소요 시간 : 7시간 29분
2-1.백두대간 산줄기 접속 구간(가목리-더바지령) : 5.84km, 1시간 20분
강원특별자치도 정선군 임계면 가목리 가목1교 앞에서 왼쪽 부수배리펜션 방향으로 진행한다.
부수배리길을 따라 부수배리펜션과 괘병산 등산로 입구 방향으로 올라간다.
부수배리길을 따라가다가 출발지점을 뒤돌아본다. 임계천이 흐르고 가목1교 건너 왼쪽에 가목리 버스정류소가 있다.
가목리(柯木里)는 원래 삼척군 도상면에 속하였다가 1914년 삼척군 하장면에 이관되어 가목리로 불리어 오다가 1973년 7월 1일자로 도전리와 같이 정선군 임계면에 이속되었다. 가목리라 칭한 것은 이 지방에 가목(물푸레 나무)이 타 수종에 비해 많이 무성함으로 가나무정이라 불리어 왔다. 자연부락은 다음과 같이 분포되어 있다. - 정선군청
임계천 옆 부수배리길을 따라 펜션촌이 자리한 부수배리빌리지 방향으로 올라간다. 노랑 민들레꽃이 지천으로 피어 있다.
임계면(臨溪面)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경덕왕 때 9주로 확정, 명주군에 속하였다가 고려(1018년)때에는 강릉군에 속하였고 조선시대(1906년) 고종 43년에 행정구역 개편으로 임계면이 정선군에 이관되어 정선군 임계면이라 칭하게 되었다. 1910년 일제침략으로 면 행정구역을 개편하여 11개 리이고, 1973년 7월 행정구역 개편, 삼척군 하장면 도전리와 가목리를 임계면에 편입, 13개 리였으나 1989년 1월 봉정리를 여량면으로 이관하여 현재 12개 리로 되어 있다. - 정선군청
펜션단지인 부수배리 빌리지 앞을 통과한다. 부수배리와 부수베리, 두 지명이 모두 통용되는 것 같다.
부수베리(火石舃洞)는 옛 사람들이 일상생활용품으로 오늘날의 성냥 대신 돌과 돌을 마찰시켜 담배 불로 이용하던 부싯돌이 생산되던 곳으로 부수베리골이라 부르고 있다. - 정선군청
왼쪽은 전원주택인 듯하고 맨 오른쪽 뒤에 부수배리 펜션이 있다.
부수배리길을 따라 로지 펜션 앞을 통과한다.
유럽나도냉이꽃은 1993년 강원도 대관령에서 처음 발견된, 유럽 원산의 귀화식물이라고 한다.
상수원의 수질 보호를 위해 임계천 출입이 금지되는 곳을 통과한다.
가목리 1.8km, 더바지령 정상 3.8km 지점으로 오른쪽은 괘병산 등산로 입구이다.
가목리 2km, 더바지령 정상 3.6km 지점에서 임도와 헤어져, 임계천을 건너 정선 옛길을 따라 더바지령으로 향한다.
옛 사람들이 생활 필수품을 사러 삼척지방을 왕래하는데, 더바지령을 넘어가는 길목이 아주 잘록한 계곡을, 매우 협소하다는 뜻에서 '명주목이'라고 했다고 하는데 명주목이로 가는 곳에는 현재 넓은 들녘이 개척되었다. 왼쪽의 소나무가 멋지다.
도시인이 이곳으로 내려와 살고 있는 '눈꽃산채' 입구를 지나간다.
저 집이 눈꽃산채일까? 뒤에 솟아 있는 괘병산(掛屏山, 1200.5m)은 수병산(繡屏山)이라고도 불린다.
괘병산(1200.5m)은 수병산(繡屏山)이라고도 부르는데, 임계면 도전리와 가목리 일원에 있으며 원시림이 울창하며 태고의 신비를 간직한 곳이다. 거대한 바위가 우뚝 솟은 정상에서는 동해바다가 한눈에 들어와 감탄을 자아내게 하며, 공룡 발자국 모양의 샘이 여러 곳 있고, 바다 조개껍질이 있는 것으로 보아 수억 년 전 바다가 융기되면서 생성된 것으로 추측된다. 운이 좋은 날은 정상에 있는 기암괴석 위 구부정한 노송을 구름이 비단처럼 감싸는 풍경을 볼 수 있으며, 때마침 동해바다의 비릿한 내음이 실린 바람이라도 불어오면 구름이 흩어졌다 다시 바위와 노송을 감싸는 멋진 광경이 보고 있는 사람들을 짜릿하게 만든다. 전설에 의하면 인근 주민들이 가장 신성시한 산으로 바위가 병풍처럼 둘러져 있는 형상을 하였다고 괘병산(掛屏山)이라 하며, 암벽이 흰 색으로 변하면 비가 온다는 이야기가 있다. - 대한민국구석구석
가목리 2.6km, 더바지령정상 3km 지점, 눈꽃산채 입구에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명주목이 가는 길에 귀룽나무 꽃과 돌배나무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다.
귀룽나무 꽃 향기가 은은하다.
명주목이 입구에 소나무가 멋지게 솟아 있고, 그 왼쪽에 고광나무 꽃이 하얗게 흐드러진다.
돌배나무 꽃인 줄 알았는데 나중에 알아보니 고광나무 꽃이라고 한다.
임계천 징검다리를 건너 명주목이로 진입한다.
명주목이 입구에 차량출입 차단기가 설치되어 있다.
명주목이길을 따라 너덜겅 아래를 통과한다.
물푸레나무 한 잎같이 쬐그만 여자, 오규원의 '한 잎의 여자' 시 구절에서 물푸레나무 잎은 쇠물푸레나무 잎 같다.
소나무들이 솟아 있는 옛길에 쉼터가 조성되어 있다. 이 쉼터를 지나면 곧바로 더바지령에 이른다.
철쭉꽃이 지고 이제는 고산철쭉 묽은 연분홍 꽃들이 절정을 이룬다.
백두대간 능선 이기령에 오른다. 이기령은 동해시 이기동과 정선군 임계면 가목리 부수배리를 이어준다. 이기령(耳基嶺)은 본래 는 '힘들다'는 뜻의 강원도 토박이말인 '더바지령'이었는데 이후 이기령이 되었다고 한다. 동해시 이기동(耳基洞)은 원래 구리터(동기, 銅基)마을이었다고 한다. 이 구리터가 변화되어, 구리터>구이터>귀터. 이 귀터를 한자로 표기하여 이기동(耳基洞)이 되었으며 더바지령 고개 이름도 마을 이름을 따서 이기령으로 변화되었다고 한다.
임도 뒤쪽 옛길을 따라 이기령으로 올라왔다. 임도를 따라 올라와도 되지만 돌아오기에 거리가 멀다.
2-2.백두대간 산줄기(이기령-연칠성령) : 7.46km, 3시간 33분
이제부터 백두대간 산줄기를 남진한다. 이기령에서 연칠성령은 7.6km 거리이지만 무척 어려웠다.
건너편은 동해시 이기동 지역이다. 이기령~고적대 6.6km, 고적대~연칠성령 1km, 백두대간 능선 7.6km를 산행한다.
이기령에 돌무더기(국시댕이, 국시)가 있는데, 그 앞에 설명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아득한 옛날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괴나리 봇짐과 짚신을 등에 멘 선비 유생들은 청운의 뜻을 품고 이 길을 걷고 또 걸었다. 등짐과 봇짐을 메고 든 장돌뱅이 보부상들은 거상의 꿈을 꾸며 험하고 험한 이 길을 수도 없이 오갔다. 한양 천리길은 장원급제의 꿈과 큰 포부를 안고 오가던 선비에게는 희망의 길이었고, 이 장터 저 장터를 떠도는 장돌뱅이 보부상에게는 한많은 애환이 담긴 길이기도 하였다. 이 험난한 고갯길을 오고가는 사람들은 여로의 무사 안녕과 소원을 빌며 한두 개의 돌탑을 쌓거나 돌을 던졌다고 한다. 하나둘씩 쌓인 돌무더기는 국시댕이(국시)라 불리며, 서낭당과 같은 신령한 장소처럼 두려움과 경외의 대상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이제 국시댕이는 가던 길을 멈추고, 걸어온 길을 돌아보며 길 위에서 길을 찾는 나그네에게 이 옛길은 힐링의 길, 소원성취의 희망의 길로 거듭나게 하고자 한다. 2015년 10월 31일 (사)동북아시아 문화 허브센터 - 설명안내판
이기령에서 고적대 방향으로남진하면 산죽밭이 펼쳐지고 소나무들이 하늘로 치솟아 있다.
백두대간 느루봉에서 분기하는 산줄기가 동해시 삼화동 삼화사 뒤쪽으로 내리벋는다.
솔숲에 고산철쭉 묽은 연분홍꽃들미 맑게 피어 있다.
이기령 1.1km, 고적대 5.5km 지점을 통과한다. 이 지점은 임도 갈림목이다.
이기령-고적대 이정표를 지나 뒤돌아본다. 백두대간 마루금은 오른쪽이고, 왼쪽은 임도로 내려가는 길이다.
이기령 1.1km 지점을 통과하여 가파른 비탈길을 따라 올라와서 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느루봉 능선으로 이어간다.
백두대간 능선이 동쪽으로 가파른 비탈길을 이루다 완전히 남쪽으로 방향을 트는 지점을 뒤돌아 본다.
해발 1142.8m 느루봉을 우회하여 느루봉 아래를 통과하는데 너덜 지대가 이어진다.
위쪽에 느루봉 능선이 가늠된다. 느루봉 능선 아래는 너덜 지대가 계속된다.
느루봉 능선 아래 마지막 너덜 지대를 통과하면 느루봉 정상에서 내려오는 느루봉 능선과 만난다.
느루봉을 우회하여 느루봉 아래 왼쪽으로 통과하였다. 느루봉정상을 거쳐 오면 오른쪽으로 내려온다.
갈미봉 가는 길에서 남동쪽의 두타산을 조망한다. 오른쪽 청옥산은 나무들에 가려 있다.
백두대간 갈미봉은 괘병산 갈림목이다. 전망 바위에서 갈미봉과 괘병산으로 벋어 내리는 능선을 조망한다.
전망 바위에서 서북쪽 괘병산으로 벋어 내리는 갈미봉 능선을 조망한다.
중앙에 갈미봉이 솟아 있다. 갈미봉 왼쪽의 산봉에 오르기가 엄청나게 힘들다.
오른쪽 이기령 방향에서 갈미봉 정상으로 올라와 왼쪽 고적대 방향으로 진행한다. 왼쪽 뒤는 괘병산 방향이다.
해발 1260m 갈미봉 정상에 정상 표지판이 세워져 있는데 글씨가 지워져 가까이 가서 확인해야 한다.
무릉계곡에 안개구름이 피어나고 멀리 동해시 시가지 뒤에 동해 바다가 어림된다.
동해시 삼화동 무릉계곡 뒤에 두타산이 운무에 덮여 있다.
무릉계곡 서쪽에 웅대한 단애의 암봉이 솟아 있다. 이 암봉을 서쪽으로 우회한다.
청옥산에서 두타산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 능선은 운무에 덮여 있다.
백두대간 연칠성령은 오른쪽에 운무에 덮여 있고, 아래쪽은 연칠성령에서 내려와 만나는 칠성폭포가 있는 계곡이다.
단애의 암봉을 서쪽으로 우회하여 거제수 군락지를 지난다.
얼레지 꽃은 다른 곳에서는 이미 다 떨어졌는데 이곳에서는 시든 얼레지꽃들이 아직 남아 있는 얼레지 군락지를 지난다.
얼레지 군락지를 지나자 나도옥잠화 군락지가 있으며 나도옥잠화 하얀 꽃들이 피어나고 있다.
진달래꽃들이 떨어진 지는 한참인데 고적대 능선에는 아직도 진달래꽃들이 피를 토하듯 한창이다.
큰앵초도 군락을 이루어 진분홍 꽃들을 피우고 있다.
무릉계곡 사원터 대피소로 내려가는 갈림목에 이른다. 고적대 방향으로 이어간다.
단애의 암봉과 암릉 지대를 서쪽으로 우회하여서 암릉 지대를 살핀다.
해발 1353.9m 고적대 정상에는 정상 표석과 삼각점, 이정목, 고적대 설명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고적산(高積山)은 강원도 동해시 삼화동과 삼척시 하장면, 정선군 임계면에 걸쳐 있다. 해발 1,354m로, 고적대(高積臺)라고도 한다. 태백산맥의 줄기인 해안산맥에 속하는 산으로 북쪽에는 괘병산(掛屛山, 1,221m), 서쪽에는 중봉산(中峰山, 1,264m), 남쪽에는 망지봉(望芝峰, 1,210m), 남동쪽에는 청옥산(靑玉山, 1,404m)과 두타산(頭陀山, 1,355m) 등이 솟아 있다. 산의 동쪽 사면은 급경사를 이루는데, 이곳에서 발원한 하천이 흥월평(興月坪)을 만들고, 신흥천(新興川)과 합류하여 전천(箭川)을 이룬 후, 넓고 기름진 북평들을 형성하며 동해로 흘러든다. 북쪽 사면을 흐르는 하천은 도전리를 지나 임계천(臨溪川)으로 흘러든 후, 골지천(骨只川)과 합류하여 서쪽으로 흐른다. 산의 서쪽 사면은 상대적으로 경사가 완만하다. 고적산 남동쪽의 청옥산과 두타산 사이에 형성된 무릉계곡에는 학소대(鶴巢臺)·관음사(觀音寺)·삼화사(三和寺)·무릉반석(武陵盤石)·금란정(金蘭亭)·호암소(虎岩沼) 등 많은 관광자원이 있다. 무릉계곡은 1977년에 국민관광지, 2008년에 명승으로 지정되어 많은 관광객들이 찾고 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고적대 정상에서 삼척시 중봉리 방향을 조망하지만 운무에 덮여 위치를 확인하기가 어렵다.
강원도 삼척시 하장면에 속하는 법정리 중봉리(中峯里)는 이 지역의 중앙에 망주봉(望柱峯)이 있어서 본래 주봉동(柱峯洞)이라 불렀다가 이것이 와전되어 중봉(中峯)이 되었다. 조선 숙종 때 이재가 경기도 지평에서 이곳 사곡에 이주한 후 남씨, 이씨, 함씨, 안씨가 이주하며 형성되었다. 중봉리는 하장면의 북부에 위치하여 동쪽은 동해시, 서남쪽은 삼척시 갈전리·광동리·장전리, 북쪽은 정선군 임계면 도전리에 각각 접한다. 동서 8㎞, 남북 14㎞이다. 사곡, 김천, 당곡, 기곡, 음기, 간평, 후평, 마전곡, 청룡내 등의 자연마을이 합쳐진 법정리이다. 동쪽에는 고적대(高磧臺)가 솟아 있고, 남쪽에는 청옥산과 두타산이 있다. 서쪽에서 발원하는 중봉천은 남쪽으로 흘러 갈전리로 들어간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청옥산과 그 뒤 두타산 방향을 조망하지만 운무에 덮여 보이지 않는다.
고적대는 청옥산 2km, 두타산 6km 지점에 있다.
정상표석에는 고적대(高積臺) 높이가 해발 1353.9m라고 적혀 있는데 설명안내판에는 1353m라고 적혀 있다.
고적대(高積臺, 1,353m)는 동해시, 삼척시, 정선군의 분수령을 이루는 산으로 기암절벽이 대를 이루어 신라 고승 의상대사가 수행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동쪽으로 뻗어진 청옥산, 두타산과 아울러 해동심봉으로 일컬어지며, 신선이 산다는 무릉계곡의 '발원지가 되는 명산으로 높고 험준하여 넘나드는 사람들의 많은 애환이 서린 곳이다. - 설명안내판
고적대(高積臺)[1,357m]는 신라 고승 의상(義湘)이 대(臺)를 짓고 수도한 곳으로 유명하며 무릉계곡과 같은 시대 미상의 삼화화강암으로 이루어져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고적대에서 급경사의 가파른 비탈길을 내려오면 고적대 0.3km, 연칠성령 0.7km 지점을 알리는 이정목이 세워져 있다.
이정목을 조금 지나서 북쪽을 바라보면 걸어온 느루봉, 갈미봉 능선과 단애의 암릉 지대가 한눈에 들어온다.
같은 곳에서 맨 오른쪽 단애의 암봉과 사원터 갈림목의 암릉 지대를 살핀다. 왼쪽에 고적대가 솟아 있다.
해발 1353.9m 고적대를 다시 올려 본다.
고적대에서 조망이 좋은데 그 풍경을 감상하지 못하고 운무에 덮인 고적대를 자꾸 올려보게 된다.
연칠성령 위쪽 암봉 망군대(望君臺) 아래를 지난다. 택당(澤堂) 이식(李植) 선생이 삼척시 중봉산 단교암(斷橋庵)에 은거하며 지낼 때 이곳에 올라 마음을 달랬다고 해서 망경대(望景臺)라고도 했는데, 이후 임금을 그리워한다는 망군대(望君臺)로 바뀌었다.
망경대(望景臺)에서 망군대(望君臺)로 바뀌었다. 이번에는 운무 때문에 그냥 통과한다.
1623년(인조 1) 명재상이었던 택당(澤堂) 이식(李植)이 중봉산 단교암(斷橋庵)에 은거하며 마음을 달랬다고 해서 망경대(望景臺)라고도 한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고적대 1km, 청옥산 1.3km 지점의 안부(鞍部)인 연칠성령 정상에 이른다.
연칠성령(連七星嶺)이 연칠성령(蓮七星嶺)으로, 망경대(望景臺)가 망경대(望京臺)로 바뀐 것 같다. 연칠성령을 칠성폭포에 이어진다는 의미로, 풍경을 감상하는 망경대(望景臺)가 임금을 그리워하는 망군대(望君臺)로 바뀌지 않았을까?
연칠성령(蓮七星嶺, 1,224m)은 예로부터 삼척시 하장면과 동해시 삼화동을 오가는 곳으로 산세가 험준하여 난출령(難出嶺)이라 불리웠다. 이 난출령 정상을 망경대(望京臺)라 하는데 조선 인조 원년 명재상 택당(澤堂) 이식(李植)이 중봉산 단교암에 은퇴하였을때 이곳에 올라 서울을 사모하여 망경(望京)한 곳이라 전해진다. - 설명안내판
연칠성령(連七星嶺)에는 국시댕이(돌무지)가 있고, 연칠성령 정상 이정목과 연칠성령 설명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연칠성령(連七星嶺)은 해발고도 1,204m로 과거에 강원도 삼척의 하장과 무릉계곡[지금은 동해시 소재]을 오가던 곳이다. 고적대(高積臺)[1,357m]와 청옥산[1404m] 사이의 백두대간 능선 상에 있다. 연칠성령의 별칭인 난출령(難出嶺)과 고고험(鼓高險)은 넘나들기가 험준하여 붙여졌으나, 연칠성령의 유래는 확실치 않다. 청옥산과 고적대가 갈라지는 연칠성령 마루에는 이정표 역할을 하는 돌탑이 쌓여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연칠성령에서 청옥산 방향을 조망한다. 뒤쪽에 희끄무레한 청옥산이 보이는 것 같다. 이곳에서 백두대간 산줄기 산행을 마치고 연칠성령 계곡으로 내려간다.
2-3.하산 구간(연칠성령-무릉계곡-야영장) : 7.18km, 2시간 36분
하산길에서 몸에 이상이 생겨서 탈진의 고통으로 고생했다. 아, 무념무상의 탈진을 고통의 축제라고 이를 수 있을까?
연칠성령에서 무릉계곡 관리사무소까지 6.7km 거리이다. 주차장을 거쳐 야영장까지는 거리가 더 멀다.
연칠성령에서 가파른 비탈길을 힘겹게 내려와 칠성폭포(七星瀑布) 입구에 이르렀다. 1.8km를 내려오는 데 48분이 걸렸다.
연칠성령 계곡에는 고추나무꽃이 피어나기 시작한다.
사원터 대피소를 무릉계곡 대피소라고 부른다. 이곳에 상원사 절이 있다가 사라져서 이곳을 상원사터라고 부르다가 상원터로, 다시 사원터라고 부르게 되었다. 사원터에서 호계(虎溪) 계곡를 이리저리 돌고 학등골 등산로 출입구를 지나 문간재로 향한다.
문간재 넘어 계곡을 호계라 하는데, 호계 상류에 옛날 상원사가 있었다 하여 속칭 “상원터”라 한다. 지금도 그 옛터가 있다. 1963년에 발간된 『삼척사지』에 의하면 청옥산 주봉의 소나무는 1865년(고종 2)에 경복궁을 중건할 때 가장 적합한 동량재(棟梁材)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사원터 대피소
문간재를 경계로 하여 동쪽은 무릉계, 서쪽은 호계(虎溪)라 이른다. 오른쪽 신선봉에 올라가지 않고 무릉계곡으로 내려간다.
청옥산 동쪽 사면에는 문간재(門間峙)가 있다. 무릉계곡에서 호계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해방 후 없어진 동석산성(혹은 두타산성)의 성문(城門)의 이름을 따서 문간재라 하였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문간재 철계단을 통과하여 무릉계곡으로 내려간다. 제한 시간에 쫓겨 하늘문 갈림길, 용추폭포 입구, 두타산성 입구, 힉소대 아래를 허걱거리며 통과하여 삼화사 앞을 지난다.
불교 서적과 불교 용품을 판매하는 곳으로 전통차를 마실 수 있다고 한다. 그 오른쪽에 사천왕문 개축공사가 진행 중이다.
삼화사 경내의 12지신상(十二支神像)은 2010년 5월 15일~18일에 걸쳐 인천국제공항 동편 입국장에서 전시하였던 것을 2015년 9월에 주지 효령 스님이 삼화사로 옮겨왔다고 한다. 십이지신 신장(神將)은 열두 방위에 맞추어서 쥐, 소, 호랑이, 토끼, 용, 뱀, 말, 양, 원숭이, 닭, 개, 돼지의 얼굴 모습을 가지며 몸은 사람의 형상으로 나타낸다.
삼화산 반석교 앞에서 삼화사 뒤편의 중대폭포와 철산을 가늠한다.
삼화사의 무향각, 사천왕문, 십이지신상 앞을 거쳐 반석교 앞으로 왔다. 맨 뒤쪽 운무에 감싸인 연칠성령을 가늠한다.
오른쪽에 베틀바위 산성길 출입구가 있으며 왼쪽 신선교를 건너 무릉계곡 매표소 앞으로 간다.
탈속의 무릉도원에서 신선교를 건너 속계로 나간다.
신선교에서 무릉계곡 무릉반석과 중대폭포를 바라본다.
신선이 노닐었다는 동해 무릉계곡 일명 무릉도원이라 불리는 동해 무릉계곡은 두타산과 청옥산을 배경으로 이루어진 계곡으로 수많은 기암괴석과 절경들이 장관을 이루고 있어 마치 현존하는 선경에 와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태고의 신비와 전설 속에 동해 무릉계곡은 이곳을 찾는 많은 관광객들을 매료시키기에 충분한 관광명소이다. - 동해시청
무릉계곡 매표소 앞에서 무릉계곡 상가지대를 바라본다. 주차장을 지나 무릉계곡 제1힐링캠프장에서 산행을 종료한다.
삼화동(三和洞)은 동해시 전체의 절반이 넘는 면적을 차지하고 있으며 동해안 제일의 산수라 할 수 있는 천하절경 무릉계곡이 있고 단일 규모로는 세계 최대 규모의 시멘트공장인 쌍용양회 동해공장이 있는 동해시의 대표적인 아름다운 자연경관지역과 공업지역이다. 삼화(三和)라는 지명은 삼화(三華)를 삼화(三和)로 표기하였다고 하는데 전하는 바에 의하면 삼화(三華)라 함은 ‘세 번 빛난다’는 뜻으로 누가 처음 붙인 이름인지는 알 수 없으나 지형지세를 살펴본 고승(高僧)이 명명하였다는 설이 있다. 그 첫 번째는 일제말기 1935년 자철광산이 개발되어 빛을 보았고 두 번째는 1966년 쌍용양회 동해공장으로 빛을 보았는데 세 번째는 언제 빛을 볼지 아직은 알 수 없다. 삼화(三和)는 819년 고려태조가 삼한을 통일한 후 전란의 고혼을 달래는 수륙대재를 삼공암에서 올리고 절 이름을 삼화사(三和寺)라 개칭하는 데에서 기인되었다. 속칭(俗稱) 삼홧골 또는 삼애골이라 불려지다가 이것이 변하여 흔히 사매골이라고도 한다. - 동해시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