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내(城內)·성남(城南)·성서동(城西洞)
본래 충주군 남변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일부동(一部洞), 이부동(二部洞), 삼부동(三部洞), 남부동(南部洞)과 북변면의 동문리(東門里), 내리(內里) 대가미리(大加味里) 일부를 병합하여 충주읍이라하여 읍내면(邑內面)에 편입되었는데, 1931년 읍제실시에 의하여 네구역을 갈라서 본정(本町), 영정(榮町), 금정(錦町), 대수정(大手町)으로 하였다가, 1946년 왜식동명 변경에 의하여 본정(本町)을 성내동(城內洞), 영정(榮町)을 성남동(城南洞), 금정(錦町)을 성서동(城西洞)으로 고쳤으며, 1962년 성내·성남 성서 연합동으로 편제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음.
●객사-터(客舍-) 지금의 전신전화 건설국 자리에 있던 옛 객사 터. ●경영루-터(慶迎樓-) 객사 동쪽에 있던 옛 동루(東樓:集合場) 터.
●경천문-터(敬天門-) [북문터] 옛 충주성의 북문이 있던 터. 호루는 이층 15간으로, 지금의 성내동 보문당 서점 동쪽 길 가운데에 있었으며, 수문청(守門廳) 4간은 남서쪽에 있었음. 예부터 이곳의 수령 방백이 부임하거나 퇴임할 때는 이 문을 통하였으므로, 다른 문에 비하여 배나 크고 호화롭게 꾸몄었다 함.
●군기창터[軍官廳址] 충주읍성 남문 안에 군관청(軍官廳)이 있던 터. ●군기고-터(軍器庫-)객사 서쪽에 있던 옛 군기고 터. ●남문-거리 : 충주읍성의 남문 밖으로 주로 관속들이 살던 곳으로 대림공사부근을 말함. ●남문-터(南門-) :아문터. ●남별당-터[南別堂址] : 지금의 성내새마을금고 남쪽에 위치 ●남-부(南部) : 남문거리. ●동문-거리(東門-) [동부]: 옛 충주성 안의 동쪽이 됨. ●동문-터(東門-) : 조양문터. ●동-부(東部) : 동문거리. ●봉아문-터(鳳阿門-) [남문터] :옛 충주성의 남문이 있던 터. 호루(護樓)라는 이층 10간으로 성내동 대림공사 북방에 있었으며, 수문청 3간은 현 성내새마을금고 남쪽부근에 있었음. ●북문-거리(北門-) [북부] 옛 충주성 안의 북쪽이 됨. ●북문-다리 : 예성교. ●북문-터(北門-) : 경천문터.
●산고수청-각(山高水淸閣) 제금당 뒤 동쪽에 있는 6간 건물. 고종(高宗) 7년(1870)에 목사 조병로(趙秉老)가 신축하였다 하며, 제금당에 온 손님을 위한 반빗간, 북수간(化粧室)으로 사용되었던 것이라 함.
●상련당-터(上蓮塘-) :지금의 교육청 자리에 있던 연못 터. 당시 연못 속에 석가산(石假山)을 모아, 그 위에 천운정(天雲亭)을 지었으며, 해마다 7월이면 연꽃이 만발하여 수령과 관객들이 많이 모였는데, 조선조 고종(高宗) 광무(光武) 10년(1906)에 충주보통학교(충주교현초등학교의 전신)의 운동장으로 들어가 없어짐.
●서문-거리 : 충주읍성의 서문이 있던 부근. 현 제일감리교회 동편거리를 말함.
●석주문-거리 [석주문좌기] : 현 성내동 충북은행 동쪽 뒤안에 우물이 있는데 옛날 이 자리에 석주문(石柱門:개복청 출입문)이 있었으므로 붙여진 거리 이름.
●성-내(城內) : 성안.
●성-안 [성내] : 옛날 충주성 안의 중심이 됨.
●소지-터[小池址] : 현 관아공원 정문에서 남방으로 약 100m 지점에 있던 작은 연못.
●수구문-터[水口門址] :현 중앙시장 동편 농협 자리에 배수석문(排水石門)이 있었음. 성내의 빗물과 상연당(上蓮塘) 및 하방지(下方池)의 물을 빼기 위한 시설임.
●습사장-터(習射場-) : 지금의 문화회관 서편 주차장과 현 교육청 테니스장 자리에 있던 활터. 근세 조선 정종(正宗) 10년(1786)에 사계(射契)를 조직하여 봄가을로 활량들이 모여 활을 쏘았는데, 해가 가니 활터가 헐어서 고종(高宗) 7년(1870)에 다시 고쳤다가, 그 32년(1895)에 폐지됨.
●실록각-터(實錄閣-) : 객사 동남쪽에 있던 실록각 터.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였었음.
●야문-거리 : 야문(夜門)이란 야간에 사대문이 닫히고난 뒤 관원들이 드나들기 위해서 만든 비상문으로 현 여자고등학교 사택이 있는 자리에 해당되는데 그 부근을 말함.
●예성-교(蘂城橋)【다리】현 중앙파출소옆 교현천에 놓은 다리, 속칭 북문다리라고 함. 길이 32.9m, 폭 17.6m로 1977년 9월 2일 확장 준공됨.
●전옥-터(典獄-)【터】옛날의 감옥터. 현 중앙시장 자리에 상무관(尙武館)이 있었으며 그 서편에 위치하였음.
●제금-당(製錦堂)【고적】현 관아공원 청녕헌의 동쪽에 있는 팔작기와집으로 12간의 건물임. 영빈관(迎賓館)으로 귀빈을 맞이하던 곳이며, 최근까지 중원군수의 관사로 사용하여오다 1983년 중원군청이 이전하면서 복원 개수하였음.
●조양문-터(朝陽門-) [동문터]【터】옛 충주성의 동문(東門)이 있던 터. 호루는 이층 8간으로, 지금의 충주문화회관(유물전시관) 동쪽 길 가운데에 있었으며, 수청(守廳) 3간은 그 건너편에 있었음.
●중앙-공원(中央公園, 官衙公園)【공원】현 문화회관 서편에 있는 공원, 최근까지 중원군청이 있었으며, 1983년 중원군청이 이전하면서 공원으로 조성되었음. 공원안에 청녕헌, 제금당, 산고수청각 등이 있음. 중앙-시장(中央市場)【시장】충주 제1로터리 동남방, 즉 충주시가지 중앙에 위치하여 한상욱(韓相旭)시장 때 현대식으로 개축됨.
●청녕-헌(淸寧軒)【고적】현 관아공원 안에 있는 조선조 때 충주목사가 공사(公事)를 처리하던 동헌. 목조의 팔작기와집으로 21간의 건물임. 이 건물은 고종7년(1870년) 8월에 화재로 인하여 소실된 것을 같은해 10월에 당시 목사였던 조병로(趙秉老)가 창용사(蒼龍寺)를 헐어다 옮겨 세운 것으로 최근까지 중원군청사로 사용하여오다 1983년 중원군청이 이전하면서 완전해체 복원하였음.
●축성사적-비【사적】현 관아공원안에 있으며, 1869년 충주목사 조병로(趙秉老)가 읍성을 개축한 뒤에 세운 비로 지방유형문화재 제68호로 지정되어 있음.
●충주읍성-터(忠州邑城-) [예성]【터】옛날 충주관아를 둘러쌌던 석성이 있었음. 초창은 모르고 고려 충렬왕(忠烈王) 3년(1277)에 개축을 했는데 당시 초석에 화려한 연화문(蓮花紋)을 조각했었으므로 예성(蘂城)이란 별칭이 있었음. 조선 고종(高宗) 3년(1866) 10월에 강화도양란(江華島洋亂)을 평정하고 8도 각주군(各州郡)에 성첩(城堞)과 군기(軍器) 등을 수선하여 유사시에 대비하라는 소칙을 받아 고종(高宗) 6년에 당시의 충주목사 조병로(趙秉老)가 개축하였는데 성의 주위는 3956척, 너비는 25척, 높이는 20척이 되었으며 치첩(雉堞)은 415간이고 동서남북으로 사대문루와 동남간으로 야문(夜門), 서북간으로 수구문(水口門) 등이 있었는데 동학란 때 불타 없어졌음. 성벽의 위치는 현 제1로터리, 엽연초생산조합 북방 네거리, 문화회관의동북단을 잇는 4각형으로 추정됨.
●포수청-터(砲手廳-)【터】지금의 우체국 부근에 있었던 12간의 포수청터. 1869년에 당시 목사 조병로(趙秉老)가 창건하여 포수 200명을 길렀다함.
●하방지-터(下方池-)【터】상련당(上蓮塘) 아래쪽, 지금의 전신전화국 자리에 있던 저수지. 여름엔 낚시질, 겨울엔 얼음지치기로 유명했는데 고종(高宗) 10년에 충주보통학교(충주교현초등학교 전신)를 지으면서 메워짐.
●향청-터(鄕淸-)【터】객사터 서쪽 지금의 우체국 자리에 있던 옛향청터.
●홰나무-거리【마을】성서동 78번지, 현 감리교회 자리에 있던 마을. 큰 홰나무가 있음.
●휘금문-터(輝金門-) [서문터]【터】옛 충주성의 서문 터. 지금의 호루 이층 8간은 성서동 영덕의원 북쪽 길 가운데에 있었으며, 수문청 3간은 지금의 라지오 상점 자리에 있었다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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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인(忠仁)·충의동(忠義洞)
충인(忠仁)·충의(忠義) 연합동은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읍내면에 편입되었는데, 1931년 읍제 실시에 의하여 충주읍을 네구역으로 갈라서 북쪽을 대수정(大手町)이라 하다가, 1946년 왜식동명 변경에 의하여 대수정일구(大手町一區)를 충인동(忠仁洞), 대수정이구(大手町二區)를 충의동(忠義洞)으로 고쳤으며, 1962년 충인(忠仁) 충의(忠義) 연합동으로 편제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음.
충인동(忠仁洞)
▣ 충인-동(忠仁洞)【동】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읍내면에 편입, 1931년 읍승격시 북쪽 대수정1구 지역임. 1946년 왜식동명 변경에 의하여 충인동이라 하였음.
●나무전-거리【마을】충인동 25번지에 해당되는 골목. 옛날에 나무 장사가 많았음.
●장터-골목(시장통)【길】현 제중병원에서 중앙파출소로 통하는 상가.
●충인-교【다리】충인동에서 예성공원 쪽으로 건너가는 다리. 길이 27m, 폭 6m로 1977년 9월 2일에 준공됨.
충의동(忠義洞)
▣ 충의-동(忠義洞)【동】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읍내면에 편입, 1931년 읍승격시 북쪽 대수정2구 지역임. 1946년 왜식동명 변경에 의하여 충의동이라 하였음.
●공설-시장【시장】→ 충주공설시장.
●쇠전-거리【터】현 약물시장(충의동 141번지 부근). 1960년대까지 우시장(牛市場)이었다가 위생문제를 이유로 안림동(安林洞)으로 옮겨갔다가 1980년대 남산아파트 건축으로 풍동으로 옮겨감.
●싸전-거리[자유시장]【시장】충주교 서북방의 시장통을 말하며, 예전에 싸전이 밀집해 있었다고 함. '충주시장'이라고도 함.
●자유-시장(自由市場)【장】→ 싸전거리.
●충의-교【다리】구 쇠전거리에서 대가미(大加味)로 건너가는 다리. 길이 27m, 폭 6m. 1970년 8월 22일 준공됨.
●충주-교(忠州橋)【다리】호암천(虎岩川)에 놓인 다리. 성서동, 역전동, 충의동의 경계에 있음. 일제때 대수교(大手橋)라 하였으므로 지금도 '대수정다리'라고 부르는 사람이 많음.
●충주공설-시장(忠州公設市場, 公設市場)【시장】충의동 서쪽, 충주천변에 있는 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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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현동(校峴洞)
▣ 교현-동(校峴洞)【동】본래 충주군 북변면(北邊面)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야현리(冶峴里), 주봉리(珠峰里), 어림리(御林里), 교동(校洞), 대가미리(大加味里), 봉계리(鳳溪里)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교동과 야현리의 이름을 따서 '교현리'라하여 읍내면(충주시)에 편입됨. 1962년 7월 1일 행정구역 통폐합시 교동, 야현, 대가미 등 3개 자연동을 통합하여 교동(校洞)과 야현(冶峴)의 동명을 따서 교현동으로 개편하였다가 1985년 11월 1일 충주시조례 제971호에 의해 교현1.2동으로 분동하였음.
●갱-고개【고개】만리산 서편에 위치하며, 교동(향교말)에서 시누골로 넘어가는 고개.
●고구문-거리[고북문거리]【마을】주봉(珠峰) 동편의 마을. 삼한때 안림동 어림(御林)에다 왕도를 정하였을 당시 봉현성(逢峴城)의 북문거리가 되었던 곳. 그후 고북문(古北門)거리라 불리워 오다가 고구문거리로 와전되고 있음.
●교-동(校洞)【마을】→ 향교말. ●교전-리(校前里)【마을】→ 향교말.
●교현-교(校峴橋)【다리】교현초등학교 남쪽 문앞에서 교현천을 건너 성내동으로 건너가는 다리. 길이 28.1m, 폭 8m. 일정때 가교했던 좁은 다리를 재시공해 1980년 5월 26일에 준공되었음.
●교현-천(校峴川)【하천】안림동 계명산과 남산(금봉산)에서 발원한 냇물이 동촌에서 합수하여 교현동을 거쳐 직류하다가 대가미(大加味) 남쪽에서 호암천(虎岩川)과 합류해서 충주천(忠州川)이 됨.
●교현-초등학교【학교】충주시 교현1동 339번지-1. 1896년 9월 17일 충청북도 관찰부 충주공립소학교가 설치되어, 1905년 1월 20일 충주공립보통학교로 인가, 동년 4월 4일 충주공립보통학교로 개교함. 1942년 4월 1일 충주교현공립 보통학교로 개명하였다가 1950년 6월 5일 충주교현국민학교로 개명되었고, 다시 1996년 충주교현초등학교로 개명함.
●대가-미【마을】주봉(珠峰) 서남방의 마을. 일제 초기까지는 대감리(大甘里)라고 했었는데 대가미리(大加味里)로 기록되었었음. 옛날 대감(大監) 묘가 있었다고 하며, 상대가미(上大加味), 하대가미(下大加味)로 구분함.
●대가미-다리【다리】아랫다가미에서 충의동 현대상가 쪽으로 건너가는 다리. 일제때 놓임.
●대가미-동(大加味洞)【마을】풀무고개 서쪽에 있는 마을.
●대가미-못[대가미제]【저수지】아랫대가미에 있는 저수지. 교현천의 물을 끌어다가 어정이들에 댐. 1929년에 시설함. 1997년 현재 오염으로 인해 매립계획을 수립하여 연내 매립을 완료하려다가 양질의 흙을 받기 위해 1998년까지 매립기간을 연장해 매립중임. 매립 후에는 도심 공원으로 조성할 계획이라고 함. 대가미-제(大加味堤)【저수지】→ 대가미못.
●대봉-교(大鳳橋)【다리】아랫다가미 법원사거리 쪽에서 봉방동으로 건너가는 다리. 1967년 7월 1일 준공되고 길이 48m, 폭 30m임. 대가미(大加味)와 봉방동(鳳方洞)의 머리문자를 따서 대봉교(大鳳橋)라 함.
●동-촌(東村)[도촌(島村), 섬말]【마을】향교말 남쪽 안림천(安林川) 건너에 위치한 마을. 예전 충주읍성(성내동 지역) 안에서 볼 때, 동쪽이어서 동촌(東村)이라고 했고, 교현천(校峴川)과 남산(南山)에서 발원한 냇물 사이에 있으므로 '섬말'이라고도 함.
●동촌-교(東村橋)【다리】동촌(섬말)에서 충일중학교쪽으로 건너가는 다리. 길이 27m, 폭 7.5m이며 1972년 12월 5일 준공됨.
●만리-사(萬里寺)【절】만리산에 있는 절. 본래 사직산에 있었으나 화재로 인해 현 위치로 이전했음.
●만리-산(萬里山)【산】향교말 북쪽 뒤에 있는 산. 산이 낮으나 충주시내가 멀리까지 보임. 윤달이 든 해에 이 산에 오르면 유행병에 걸리지 않는다하여 다투어 올라갔다 함.
●만리-재(萬里峴)[만리티, 만리현]【고개】만리산에 있는 고개. 향교말에서 충일중학교 동편으로 넘어다녔음. 지금은 주택지역으로 개발돼 각종 아파트가 밀집해 있음.
●만삭-장(挽索場)【터】송정들에 있는 만삭장 터. 옛날부터 충주의 지신을 진압하기 위하여 해마다 이월에 반드시 줄다리기를 하였는데, 고북문거리로부터 호암동까지 통한 길을 동서로 갈라서, 목사는 동편 영수가 되고, 영장(營將)은 서편 영수가 되어, 각각 딸린 마을에서 새끼.바 등을 수백 사리씩 모아서 줄을 북문다리 앞에서 제1로터리까지 늘이고, 지름 28촌, 길이 약 100척 이상의 줄을 만들어서 송정들에 옮긴 후 줄을 다리면 양편에서 농악을 울리고 남녀노소 수만 명이 운집하여 구경하였다고 함. 1928년 이후 현 북문밖 교북(橋北)과 흰갈매기들에서 3년간 줄을 당겼으며, 1930년에는 교현천과 호암천이 합류하는 대가미교 서쪽으로 옮겨서 당기다가 이듬해부터 폐지됨.
●백구-평(白鷗坪)【들】→ 흰 갈매기들.
●봉현성-터(逢峴城-)【터】고북문거리 근처에 있던 성터. 한때 견훤(甄萱)이 이곳에 있었다 하며, 당시의 북문을 주봉에 설치하였다 하는데, 지금도 이곳을 '고북문거리'라 함.
●북문-거리1(北門巨里)【마을】북문거리에 있는 마을.
●북문-교【다리】→ 예성교.
●빙고-터(氷庫-)【터】주봉산 동쪽에 있는 터. 옛날에 얼음을 저장하던 창고가 있었다 함. 일제 때 빙현(氷峴)에 있던 것을 이곳으로 옮겼다고 함.
●새-말 [신촌, 피란민촌]【마을】여수월 옆에 있는 마을. 지금의 충주여자상업고등학교 부근을 말함. 6.25때 피난민들이 모여 살면서 이루어진 마을이라고 함.
●송정-들 [송정평]【들】교현동 앞에 있던 들. 소나무 정자가 있었으며, 해마다 줄다리는 터로 되었음.
●시눗-골【마을】갱고개 넘어 여수월로 가는 내리막 길 우측으로 들여다 보이는 마을.
●아랫-대가미 [하대가미]【마을】대가미동 서쪽 아래에 있는 마을.
●야-현(冶峴)【고개】→ 풀무고개2.
●야현-동(冶峴洞)【마을】→ 풀무고개1.
●어정이-들[漁汀坪]【들】대가미 서편, 충주농업고등학교 부근의 들. 예전엔 이 일대가 대가미못의 농업용수를 이용하는 넓은 들이었으나, 1970년대 중반부터 주택단지로 개발돼 지금은 충주농업고등학교 실습논 일부만이 남아있음.
●여수월[송정골, 여우골]【마을】신촌(新村) 동쪽에 위치한 마을. 옛날 참나무숲이 우거졌었는데 여우가 많아서 '여우골'이라고 불렀었다고 함.
● 염바다-들[鹽海坪]【들】안림동 어림 앞과 금봉산 서쪽, 동촌 뒤쪽에 걸쳐 있던 넓은 들. 현 성남초등학교 동편에 해당됨. 옛날 이곳에 큰 못이 있었는데 큰 지렁이가 숨어서 인축(人畜)을 무수히 해치므로 이 고을 수령이 명을 내려 이 못에다 수천포의 소금을 투입시켜 지렁이를 퇴치했다는 전설이 있는데 후일 못을 메웠음. 후백제의 왕 견훤이 이곳에 도읍을 정하려고 지명을 알아본즉 '鹽바다'라는 말을 듣고 크게 놀라 전라남도 광주(光州)로 옮겼다는 전설도 있음. 본래 견훤은 지렁이의 화신이라는데서 소금을 크게 꺼리는 까닭임. 지금은 남산아파트 지역으로 불리는 주택단지가 들어선 곳으로 아파트가 들어선 아랫부분에서 남산아파트 사거리까지 남산(금봉산)에서 발원해 동촌으로 흐르는 냇물을 경계로 좌우측에 논이 있었음. 현재는 20여년전부터 겨울이면 간이 스케이트장으로 쓰이는 논이 조금 남아있을뿐 그 흔적을 찾기 어려움.
●염해-평(鹽海坪)【들】→ 염바다들.
●예귀당-터(禮鬼堂址)【터】현 공설운동장에서 연수동(連水洞) 공말로 넘어가는 마루턱에 위치하는데 옛날 충주 숲거리 처형장에서 사형당한 사람들의 위패를 만들어 두고 위령하던 당터. 또 한 곳은 빙현 안식교회 북쪽에도 있었음.
●예성공원(蘂城公園)【공원】충주여자중학교 남방에 소방도로를 사이에 두고 위치함. 일제때 일본인소학교이던 것을 해방후 충주사범학교 부설국민학교로 사용하다가, 6.25때 일시 예성인민학교라는 명칭이 사용된 바 있고, 충주사범학교가 폐교됨에 따라 예성국민학교라 개명했었음. 건물이 노후하고 부지가 협소하므로 주봉 위에 신교사를 짓고 이전한 뒤 공원으로 조성하였음. 1978년 2월 23일 이 공원 안(교현동 395-5)에 대지 800평을 잡고 건평 276.8평 열람석 382석의 현 '충주 시립도서관'을 건립하였음.
●예성-교(蘂城橋)【다리】교현천의 북문 밖에 있는 다리.
●웃-대가미 [상대가미]【마을】대가미동 동쪽에 있는 마을.
●주-봉1(珠峰)[주현]【산】현재 야현천주교회가 있는 산. 충주여자중학교 건축당시 대지조성을 위해 이 산을 파냈음. 예전엔 산봉이 구슬같이 둥글었다고함. 지금은 야현 천주교 성당과 예성초등학교를 위시해 사방에 주택이 들어서 있어서 얼핏보아서는 산이라고 하기 어려움.
●충주여자-중학교【학교】현 충주경찰서 앞에 있는 학교로 교현2동 369-1번지에 해당됨. 1942년 3월 31일 충주공립고등여학교 4년제 인가를 받아, 같은 해 4월 28일 충주공립고등여학교로 개교하였음. 1945년 9월 1일 충주공립여자중학교로 변경하고, 1951년 9월 1일 중.고교가 분리되어 충주여자중학교와 충주여자고등학교로 나뉘어져 1975년 충주여자고등학교가 용산동의 현 교사로 이전한 후 지금 위치에 남아있음.
●풀무-고개1 [야현]【고개】향교말 서북쪽에 있는 고개. 옛날에 근처에 대장간이 있었으며, 지형이 풀무처럼 생겼다 함.
●풀무-고개2 [야현동]【마을】야현 천주교 성당 입구 근처의 마을. 예전에 대장간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
●하-대가미(下大加味)【마을】→ 아랫대가미.
●충주-향교(忠州鄕校)【고적】향교말에 있는 충주 향교. 충주향교의 창건 연대와 그 장소는 정확하지는 못하고 다만 여수월마을 동북방 400m 지점이었다고 하는데, 최근까지 기와장이 출토되었다고 함. 임진왜란 때 병화로 소실되었던 것을 현 위치에 옮겨서 건립한 것은 1579년 3월이고, 그후 1897년과 1936년 두 차례의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렀음. 다른 지방의 문묘에서는 볼 수 없는 호성사(護聖祠)가 있는 것이 특징임.
●향교말[교동, 교전리]【마을】향교가 있는 부근 일대의 마을을 이름.
●향군-회관【회관】충주시 재향군인회관으로 교현교에서 교현초등학교 정문을 바라볼 때, 다리 앞의 좌측으로 있는 건물. 지금은 일반건물로 사용되고 있음.
●호성-사(護聖祠)【사당】교현1동 316번지에 있는 사당. 임진왜란 때 대성전(大成殿)이 병화에 타는 것을,
●석천수(石天壽), 석감(石鑑) 숙질이 불 속을 헤치고 대성전의 위패를 구해내서 계명산 속에 피란시켰으므로, 숙종 때 이 사당을 짓고 숙질을 제사지냄.
●화교-소학교【학교】향교 남쪽에 있는 화교 학교.
●황새-모랭이【마을】교동에 딸린 마을. 구 충일중학교 정문 입구에서 계명산쪽으로 난 길을 따라 개울가로 있던 마을. 옛날에 숲이 무성하여 황새가 많이 깃들었다 함.
●흰갈매기-들[백구평(白鷗坪)]【들】현 고북문거리와 야현 사이에 있던 들. 전에 흰갈매기가 많이 날아왔었다 함. 지금은 예성공원과 교현초등학교, 충주여자중학교를 비롯한 주택단지가 형성돼 흔적을 찾을 수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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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동(龍山洞)
▣ 용산-동(龍山洞)【동】본래 충주군 남변면의 지역으로 뒤에 용산(龍山)이 있었으므로 용산(龍山)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서부동(西部洞)과 달신리(達新里), 대제동(大堤洞), 일부동(一部洞), 남부동(南部洞), 호암리(虎岩里), 이부동(二部洞)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용산리라하여 읍내면에 편입되고, 1945년 용산리를 분할하여 용산1구, 용산2구, 지곡, 빙현, 역전동(지금의 문화동)으로 분할되었으며, 1962년 용산1구와 용산2구로 합하여 용산동으로 편제되었음.
●광부처-거리【마을】지금 충주공업고등학교 동북방 노천에 철불좌상(鐵佛坐像)이 있었는데 이 부처를 건드리면 충주에 미친 사람이 난다고 해서 위해오다가 개구장이 목동들이 작대기로 두들겨서 손목이 부러지고 했었음. 후일 성남동 마하사(摩阿寺)로 옮겼다가 현재는 대원사(大圓寺)내에 봉치하고 있음. 먼저 불상이 있던 자리는 테니스장이 만들어졌음. 일설에 의하면 철불이 아미타불이기에 이를 줄여 광불(光佛)이라 한데서 이름했다고도 함.
●남산-교(南山橋)【다리】현 남산초등학교에서 지곡(芝谷)으로 거너가는 다리. 길이 24m, 폭 20m임. 1981년 5월 30일 준공됨.
●느티나무-골[응골]【골짜기】남산아파트에서 남산체육공원으로 올라가는 골짜기. 큰 느티나무가 있으며, 일명 응골이라고도 하는데 노씨의 산장이 있음.
●말무덤-자리【마을】남산아파트에서 남산체육공원으로 올라가는 초입(구 성화학원 자리)에 말무덤이라고 부르던 묘지가 있었음.
●솔정이-들[松亭坪]【들】현재 남산초등학교 부근에서 원호암(元虎岩) 부근까지의 들을 말함. 현재 이곳은 주택.아파트 건설, 동부우회도로 개설 등으로 들의 규모가 축소되어 옛 모습을 볼 수 없으며, 개발에 따라 점점 줄어드는 추세임. 옛날 귀족들과 호족들이 많이 살아 번화가를 이루었던 곳으로 정자가 많아 솔정이들이라 하였다 함.
●염바다-못[鹽海小溜池, 남산연못]【못】느티나무골에서 내려오는 물을 가두어 염바다들에 관수하던 연못. 어린이들의 익사사고가 자주 일어나던 곳이었으나, 1997년 아파트단지 조성 공사로 없어짐.
●영남-촌(嶺南村)【마을】용산동사무소 부근의 마을을 말하는데 1899년 흉년때 영남 사람들이 들어와 토막을 짓고 살던 곳이라 함.
●용-산(龍山)【산】금봉산(錦鳳山)의 낙맥으로 삼국시대(백제 때) 충주에 이 산으로 인해서 왕기가 있다고하여 산상에 못을 파고 못가에 석탑을 세워 지맥을 눌렀다 하는데, 1912년 충주전매지청을 건축하느라 못을 메우고 석탑천(石塔川)도 제거해 버렸다고 함.
●용산-교(龍山橋)【다리】용산에서 지곡으로 건너가는 다리로 호암천에 놓임. 길이 30m, 폭 20m. 1974년 8월 9일에 확장준공하였음.
●웃-남비(웃남부)【마을】현 세무서 북방 네거리에 남문이 있었는데 현 용산동의 남문 가까운 부근을 웃남비라고 불렀음.
●응-골【골짜기】→ 느티나무골.
●응골-약수【샘】느티나무골에 있는 약수터.
●할딱-고개【고개】느티나무골에서 금봉산(남산)으로 오르는 등산로에 있으며, 산등성이쪽으로 오르는 아주 가파른 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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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현동(芝峴洞)
▣ 지현-동(芝峴洞)【동】1962년 행정구역조정시 용산동에서 지곡·빙현동으로 분리되고, 1969년 지곡·빙현동을 지현동으로 통합하였으며, 1990년 용산동 지번을 폐지하고 지현동 단일번지를 사용하고 있음. 총면적은 0.59㎢로 충주시 전체면적의 0.06%를 차지하고 있으며 대부분 구옥의 주거지역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보물 제98호인 철불좌상이 안치된 대원사가 있음.
●검지-고개【고개】현 충주고등학교 정문 앞, 즉 용암파출소가 있는 고개. 옛날에 나무가 우거져서 검지고개라고 불렀다함.
●도둑-골【마을】망재 서편의 마을. 고려 때 도둑들이 웅거하며 외적을 방위했었다 함.
●망-재[望峴]【고개】현 시장관사 부근의 마을. 옛날 망대(望臺)가 있었다 함.
●박-샘【샘】대원사(大圓寺) 입구에 있던 샘. 이 물이 넘쳐흘러 겨울이면 빙판을 이루었으므로 빙현(氷峴)이란 명칭이 생겼다 함.
●빙-고개【터】현 용운사(龍雲寺) 동북쪽으로 있던 얼음창고터. 일정때 고구문거리로 옮김.
●빙-현(氷峴)【마을】현 용운사(龍雲寺) 옆의 서낭댕이 동편일대를 말했는데 대원사(大圓寺) 옆의 지하수가 용출해서 겨울이면 빙판을 이루었다고 함.
●빙현-교(氷峴橋)【다리】빙현(氷峴)에서 성남동 피촌거리로 건너가는 다리로 1964년에 준공.
●사직-교(社稷橋)【다리】성남동에서 사직산으로 건너가는 다리. 길이 27m, 폭 7.5m. 1980년 7월에 확장준공됨.
●사직-산(社稷山)【산】현 여성회관이 있는 산. 대림산(大林山)의 낙맥으로 보이며 조선조 때 사직단(社稷壇)이 있었고 일정 때는 신사가 있었음.
●신-촌(新村)【마을】1959년 노점소상인 철거할 때 이주민 30세대가 마을을 이루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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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동(文化洞)
▣ 문화-동(文化洞)【동】용산동에 속하였다 1962년 행정구역 조정시 역전동으로 분리되었으며, 1992년에 동의 명칭을 문화동으로 변경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음. 총면적은 0.98㎢로 충주시 전체면적의 0.1%를 차지하고 있으며, 각급기관 단체와 시외버스정류장이 소재한 교통의 요충지로 상업지역과 주거지역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지역임.
●도둑-골【마을】호암지(虎岩池) 급수문 북방으로 자리한 마을. 옛날에 도둑들의 출몰이 많던 곳이라고 함.
●사직단-터【터】옛날 전국 각고을마다 사직단(社稷壇)이 있어 국태민안과 시화년풍을 기원하였었는데 충주는 이 고을의 남방인 사직산에 있었음. 현재는 그 자리에 상수도 저수지가 위치하고 있음.
●사직-산(社稷山)【마을】여성회관 부근일대의 마을을 말함.
●성터-지기【마을】현 럭키아파트가 자리잡고 있는 언덕의 마을을 말함. 옛날 토성이 숲거리까지 연결되어 있었음.
●송장-골[孫宗谷 손종골]【마을】성터지기에서 서남방으로 골짜기에 있는 마을. 옛날에 이곳에 손씨(孫氏)의 묘가 많았다는 전설도 있고, 숲거리에서 사형을 하고 이곳 골짜기에다 시체를 버리던 곳이라하여 송장골이라는 전설도 있음.
●숲-거리【마을】현 부민약국 서편으로 버드나무를 비롯한 많은 잡목이 우거졌었으므로 붙은 이름.
●숲골못-터【터】숲거리에 못이 있었는데 현 시외버스 터미날이 있는 곳임.
●연못-등치【마을】송장골 동남쪽에 있는 마을. 호암지 방축 서편이 됨.
●처형장-터【터】현 삼원로터리 부근으로 숲거리에서 죄수에게 극형을 처하던 장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