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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양에세이포럼
22기-15차시
일시: 2024년 6월 11일(화) 3시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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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서 | 제 목 | 작 가 | 편수 | 합평 담당 |
1 | 자쾌(自快) | 배정순 | 8 | 이혜경 |
2 | 팔순이 되기까지 | 예수백 | 4 | 권춘애 |
3 | 지렁이 울음소리 | 김인옥 | 4 | 김순향 |
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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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평순서/권춘애 김순향 김선애 김연희 김인옥 민창현
박동조 박희자 배정순 예수백 이경자 이혜경
1. 자쾌(自快)/배정순 8
1. 근래에 장자 철학 전공자 최진석 교수의 강의를 들었다. 내용은 다 잊어버렸는데 가끔 ‘자쾌’라는 단어가 말을 걸어온다. “춤을 배우려 하지 말고 내가 좋아하는 춤을 추라. 본인이 사는 재미를 만들어 내지 못하고 남이 만들어 놓은 삶에 안주할 때 고통이 따른다.” 내가 평소 느끼며 살고있는 삶에 따끔한 일침을 가하고 있다.
2. 나는 스스로 할 수 있는 일도 남편에 의지하려는 습성이 있다. 이건 내가 춤을 추는 것이 아닌 남이 만들어 준 삶에 안주하려는 삶의 전형이다. 누구든 미구에 홀로 남을 것이다. 그럴 때 어찌 살 것인가. 남편을 떠나보내고도 홀로 당당하게 살고 있는 지인의 삶이 답이라고 여겨진다.
3. 가까이 사는 지인은 남편 병환 중일 때도 자기 취미를 놓지 않고 컴퓨터 공부, 헬스, 이웃과의 만남을 꾸준히 가지며 최소한 내 삶은 내가 챙긴다는 마음으로 살았다. 그녀를 바라볼 때면 남편이 죽음의 수렁에 발을 담그고 있는데 어찌 저리 야속할 수가 있을까 싶었다.
4. 환자 상태가 호전된 날, 두 가족이 모여 밥을 먹는 자리 에서 지금까지 지인에게 가졌던 마뜩잖은 심기를 깨끗이 거둬들였다. 아픈 사람들 같지 않게 부부 사이에 흐르는 공기가 살가웠다. 아내마저 건강을 잃는다면 이 가정은 어찌 될까? 또 남편이 아내의 행동에 딴지를 걸었다면 그리 살 수 있을까? 이분들은 나름대로의 춤을 추며 살았던 것 같다. 간병 기간이 짧지 않음에도 힘들다는 내색 한번 하지 않은 건 이 부부의 자기 주도적 삶의 결과이지 않을까.
5. 그리 살다가 그녀의 남편이 유명을 달리했다. 혼자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다 싶어 장례 치른 지 한참 후 자리를 마련했다. 앞으로의 거취를 물었다. 그녀에게 서울은 자식 셋이 살고있어 낯선 곳이 아니었다. 서울 오가면서도 아이들 돌보는 틈틈이 산엘 간다든지 주변 관광지를 둘러 본다든지, 장소가 어디 건 적응 해 자신의 삶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이었다. 당연히 이사하겠지 싶었다. 한데 의외의 답이 나왔다. 울산을 떠나지 않을 거라는. 그녀의 표정이 마치 마른 땅에 뿌리 내린 나무처럼 단단해 보였다.
6. 혼자 말처럼, “하늘은 착한 사람을 먼저 데려가는 것 같다. 남편에게, 먼저 갔으니 10년만 더 기다려 주소. 나도 뒤따라갈 테니”하고 말한다는 것이다. 내가 "저승에 먼저 가신 엄마도 만났겠네? " 해더니 "벌써 만났겠지." 하며 웃었다. 얼굴에 번진 잔잔한 미소가 그녀의 마음 상태 같았다. 죽음을 순리로 받아들이는 의연함이 그녀의 마음에서 느껴졌다.
7. 모임에서 헤어진 지 꽤 오래된 다른 지인을 만났다. 그간 풍문으로 그녀의 남편이 타계했다는 소식은 들어 알고 있었다. 남편을 잃었다고 하지만, 워낙 밝은 친구라서 겉보기에는 이전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한데 점심 식사 후 대화 끝에 지인의 입에서 요즘 통 잠을 못 이뤄 고통스럽다는 말이 나왔다. 남편을 저세상에 떠나보낸 후부터 생긴 증세 라고 했다.
9. 지인을 생각하면 그녀의 남편이 함께 떠오른다. 가까이 살지 않아 잘은 모르지만,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성당에서 미사 독서 때, 마트에서 장 볼 때, 문학관에서 아내가 시 낭송하는 자리에도 남편과 함께였다. 저런 남편이라면 평생 다툼 없이 살겠지 싶었다. 한데 그 남편을 떠나보내고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다니, 금실 좋은 것도 다 좋은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의지하던 누군가를 먼저 떠났을 때 그 헛헛함을 어찌 감당할 수 있을지.
8. 밤은 깊어지는데 홀로 잠 못 드는 긴긴밤, 잠들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도 눈이 총총하다고. 큰 집을 줄여 보지 그러느냐고 하자, 그러고 싶진 않단다. 아마도 남편과 알콩달콩 살았던 삶의 흔적을 허물고 싶지 않은 마음이리라. 어쩌려고. 불면증을 겪어본 사람이면 않다. 그게 얼마나 피를 말리는 고통인지를.
10. 가까운 사이일수록 거리 두기가 필요하다는 말이 오늘따라 힘을 받는다. 누군가 세상 물정 모른 체 살고 있는 나에게 들려주는 말 같다. 이건 단순히 가시적 거리 두기가 아닌 자신의 삶은 자신이 책임져야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부부가 함께 살다 한 날에 간다면야 그리 살아도 무방하지만,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 모르는 게 인생이 아니던가. 잉꼬부부 맹점이 거기에 있다. 남편 떠난 지, 이태가 지나도록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다면, 쉬 고쳐질 사안은 아닌 것 같았다.
11. 다툼이 잦아 집안에 말이 많던 우리 부부가 나이 들수록 말수가 줄어든다. 고독한 게 인생이라는 말을 실감하며 사는 요즘이다. 여기에 배우자를 잃은 상실의 아픔까지 보태진다면 이게 흔히 말하는 절대 고독이 아닐까. 그걸 최소화하기 위해 사람들은 늙을수록 독립형 인간이 되라, 혼자 즐길 수 있는 필살기가 있어야 한다고들 하나 보다. 혼자 즐길 뭔가가 있다면 외롭다는 생각을 들지 않으리라. 나 홀로 자생할 수 있는 새로운 춤사위를 개발하는 것, 그게 팔팔하게 살아가는 희망의 아이콘이 아닐지.
12. 생각 위로 두 지인의 삶에서 드러난 명암이 엇갈린다. 나는 어찌 살 것인가.
2. 팔순이 되기까지/예수백4
1) 지인이 팔순을 맞았다. 같은 부서에서 근무한 동료 사원이었다. 퇴직한 지금까지 서로 연락을 주고받으며 만나는 사이다. 나이 차이가 있음에도 허물이 없다. 그가 가족과 함께 찍은 팔순 기념사진이 카톡에 올라왔다. 사진 속에는 80이 된 아버지 옆에서 50이 넘은 아들딸은 어린아이처럼 어리광 부리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뒤에 걸려 있는 ‘팔순’이라는 배경 문구가 없었다면 영락없는 젊은 가족의 생일 잔치 분위기다.
2) 한 세대 전만 해도 50대는 중늙은이 대우를 했다. 나이는 보는 지점에 따라 느낌과 행동이 다르기도 하지만, 지금 50대는 늙은이의 티는 보이지 않고 오히려 젊은 청춘 같다. 지인이 건강하게 팔순을 맞이한 것도 노년의 시작이라고 했던 환갑의 나이와 고희(古稀)라 부르는 칠순을 잘 관리하려 했던 평소의 노력 덕분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3) 어릴 적, 옆집은 부유한 집이었고, 어르신은 면장을 지낸 어르신이기도 했다. 먼 친척이기도 했지만, 가까이하기에는 어려웠다. 그분은 하얀 수염을 길게 기르고 볼 때마다 쓰다듬곤 했다. 허리는 항상 꼿꼿이 펴고 걸었다. 짚고 있는 지팡이는 옻을 칠해서인지 반짝반짝 빛이 났다. 들판에 있는 논을 봄·여름·가을·겨울 없이, 아침저녁 한 바퀴 둘러보는 것 같았다. 길을 나서면 머리는 뒤로 젖히고 지팡이를 짚으면서 헛기침을 간간이 하곤 했다. 우리들은 그분의 별명을 ‘백두산’이라 불렀다. 밑으로 내린 안경 속의 눈빛은 보기만 해도 무서웠다. 무엇이든 참견하고 고함을 치곤 했다. 우리들은 헛기침 소리가 들린다든지 멀리서 보이기만 해도 마주치지 않으려고 자리를 피했다. 한참 동안까지 ‘노인’은 무서운 사람으로 알았다.
4) 어느 해, 그분의 환갑잔치가 열리던 때였다. 그 집 마당에는 가마솥이 몇 개나 걸렸다. 앉을 자리가 부족했는지, 겨울철 보리심은 논에도 멍석을 깔아 손님을 받았다. 동네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면내에 사는 사람이 다 모인 것 같이 동네가 떠들썩했다. 돼지를 잡고, 소도 잡았다. 돼지 잡는 것은 결혼식이나 초상 때면 가끔 있었지만, 소 잡는 것은 그때 처음 보았다. 소는 집안의 큰 일꾼으로 여겨서 웬만해서는 잡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환갑잔치는 온 동네의 잔치로 며칠 동안 계속되었다. 사랑방에 앉은 그분은 가족 친척의 인사뿐만 아니라, 면장과 지서장과 같은 지역유지의 인사도 받았다.
5) 평균 수명이 짧았던 과거에는 환갑은 오래 살았다는 축하의 인사와 더불어 더 오래 사시라는 축원의 자리였다. 본인에게는 살아서 누릴 수 있는 가장 풍성한 잔치이기도 했을 것이다. 잔칫상에 쌓아 올린 음식 높이에 따라 자손의 효심과 장수에 대한 기대를 가늠하기도 했다 한다. 지난 시절, 환갑잔치는 가족 구성원에게는 어느 다른 행사보다 중요하고 기념적인 생일 잔치였다.
6) 환갑 다음 해를 진갑(進甲)이라 하여 새로운 60년을 약속한다. 환갑잔치로 얻은 에너지로 새로운 10년의 마디를 만들어 간다라는 뜻이다. 환갑을 끝이 아닌, 향후 또 다른 10년의 디딤돌이라는 인식이다. 환갑은 순환된다는 수동적 의미를 가진다면, 진갑은 능동적으로 나아가는 의미를 가진다고 볼 수 있다. 생동하는 진갑을 통해서 생활의 활기와 마음의 긍정을 만들어 가면 고희(古稀)라는 칠순의 언덕에 안착할 수 있다는 장수 약속이기도 하다.
7) 칠순 이후에는 따로 ‘진(進)’자를 붙이지 않는다. 대신에 ‘망(望)’을 붙이기도 한다. 이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보지 않는다. 이제는 스스로 힘을 만들어 가는 것보다는 장성한 자손의 도움이 필요한 시기이다. 가족과 주위 사람과의 좋은 관계 속에서 도움을 받는 수동적인 위치에 있다고 볼 수가 있다. 논어에서도 칠십이 되면 사람과의 관계나 사회적 관계가 부드럽고 자연스러워져서, 말과 행동이 조화와 균형에 맞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 편안한 마음으로 70대의 나이를 보내고 건강하고 아름다운 팔순을 맞이한다는 것이다.
9) 요즘, 환갑을 노인의 기준으로 삼는 말로 쓰이고 있다. 하지만 ‘백세시대’를 바라보는 지금 시점에는 청장년에 불과하다. ‘인생은 60부터’라고 공공연하게 덕담을 주고받고 있으며, 환갑은 노인을 상징하는 효력을 잃어버리고 있다. 60년이나 살았다고 축하할 대상의 나이는 더욱 아니다. 환갑은 중년도 아니고 노년도 아닌 어정쩡한 60대에 들어섰다는 것을 알려주는 숫자일 뿐이다. 모두의 축하를 받았던 떠들썩한 환갑잔치는 사라졌다.
10) 하지만, 60이라는 숫자보다 그 이면에 있는 의미를 새겨야 다음 마디로 나아갈 수가 있다. 60세는 50대가 건실해야 설 수 있는 기초 나이다. 기초가 튼튼하지 못한 집은 언제 무너질지 모른다. 모래 위에 쌓은 집이 파도 한 너울에 무너질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노인의 기초는 60으로 들어서는 환갑이다. 이 환갑을 소중히 맞이하고 따라오는 10년을 잘 관리해야 한다. 칠순은 환갑을 기초한 60대를 건실히 지켜온 사람에게 보장되는 나이이기 때문이다. 팔순은 70대를 기초로 얻어지는 인생의 황금이요 다이아몬드다. 보석은 그냥 얻어지는 법이 없다. 결과는 언제나 원인을 묻고 있다.
11) 어느 때든 자신의 나이를 잊지 않아야, 나이에 걸맞은 건강, 행동, 그리고 말이 나올 수 있을 것이다. 지인은 60대는 겸손, 70대는 온화한 행동과 말을 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었다. 혹자는 매 10년 단위로 고비가 찾아온다고 하고, 혹자는 아홉수의 나이를 잘 넘겨야 한다고 한다. 모두가 비슷한 이야기다. 10년을 단위로 삼든 9년을 단위로 삼든 스스로 세월의 마디에 의미를 둔다면, 의미는 목표를 만들 것이다. 목표가 있고 목적이 있는 나이에는 활력과 행동이 따르게 마련이다. 그 목표가 고스톱 놀이라도 좋고, 바닷가 낚시도 좋다. 거대한 목표보다 행동하는 목표가 좋다. 행동하는 목표에는 넓은 공간이 있어 좋다. 흘러가는 시간이 보여서 좋다.
12) 지인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이번 주말 모임의 비용은 자기가 내겠다는 통 큰 호언이었다. 우리들이 좋아하는 고스톱도 한판 치자고 했다. 가족의 축복 속에 맞이한 팔순을 자랑스러워하는 지인의 모습이 보기에 좋았다.
3. 지렁이 울음소리/김인옥 4
1. 한 모임에서 친구가 지렁이 울음소리를 들어봤냐고 했다. 깜짝 놀랐다. 지렁이도 소리를 낼 줄 아느냐고 반문했다. 한 번 들어보라며 인터넷에서 찾아 들려 주었다. 귀뚜라미 같은 풀벌레 소리와 확연히 구별되었다. 아주 작은 방울이 빠르게 구르는 듯 맑고 투명했다. 지렁이가 이런 소리를 내다니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2. 지렁이는 식물조차 해치지 않고 평생 흙만 파먹는 순한 생명체다. 거기에다 흙 속의 부엽토를 뿌리가 흡수하기 좋은 상태로 변화시켜 거친 땅을 비옥하게 해주는 고마운 동물이다. 깊은 곳의 흙을 먹고 지표로 똥을 눔으로써 경운효과까지 주는 훌륭한 3. 농부다. 거기다 뭇 생명들의 먹이로 몸 보시까지 하지 않는가. 그것도 모르고 사람들은 지렁이를 징그러워하고 혐오한다.
나도 시골에 살던 첫해엔 그러했다. 텃밭을 호미로 매다 지렁이가 꿈틀대는 걸 발견하면 소리를 지르며 펄쩍 뛰어 도망치곤 했다. 아마도 지렁이가 먹지도 자지도 않고 기어가도 한 달은 족히 걸릴 거리였으니 얼마나 웃기는 행동이었나. 그런데 바퀴벌레도 자꾸 보면 정들더라고, 농약도 화학비료도 쓰지 않아 흙 속에 우글거리는 지렁이를 숱하게 만나다보니, 손으로도 예사로 만질 수 있게까지 되었다.
4. 나는 지렁이가 그토록 아름다운 소리를 낸다는 사실에 신이 났다. 지렁이를 혐오하는 인간에게 한 방 먹이는 역설이라 생각했다. 창조주는 참으로 합당한 소리를 지렁이에게 주었다며 무릎을 쳤다.
5. 집으로 돌아와 인터넷에 소개된 지렁이 울음소리를 여러 번 반복해서 들으며 귀에 익혔다. 그런 다음, 피부 호흡을 하는 지렁이가 땅 위로 나올 법한 비가 오는 날이나 이슬이 내리는 늦은 저녁이면 남천 산책길에 나섰다. 남천과 산책길 사이에는 긴 풀섶이 있어서 어디에서나 지렁이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아무리 들어도 지겹지가 않아, 온 여름 내내 행복한 마음으로 지렁이 울음소리를 찾아 귀를 기울였다.
6. 가을 기운이 느껴지면서 소리들이 점점 약해지기 시작하더니 바람이 서늘해지자 그만 뚝 끊겨버렸다. 나는 몹시 서운했다. 그 때부터 슬슬 이상한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기온이 떨어져도 추울 정도는 아닌데 지렁이 소리가 안 들린다는 게 이상했다. 인터넷에서 본 지렁이가 몸을 전혀 움직이지 않고 소리를 내고 있었던 것도 떠올랐다. 날개도 없고 배도 움직이지 않는다면 도대체 어디로 소리를 낸단 말인가. 그렇다고 폐도 없어 숨을 불어낼 수 없는데 어찌 입으로 소리를 낼 수 있단 말인가.
7. 이 의문을 꼭 풀고 싶었다. 인터넷 서점을 뒤져 ‘지렁이 울음소리’라는 제목을 가진 책을 두 권 사서 샅샅이 읽었다. 한 권은 제목과는 달리 지렁이 울음소리에 대한 일언반구도 없이 지렁이가 얼마나 이로운 동물인가만 적혀 있었다. 또 한 권은 박완서 작가의 단편소설집이었는데 총 일곱 편의 단편 중 하나인 지렁이 울음소리라는 단편에서는 그저 비유적으로 씌어졌을 뿐이었다.
8. 실망한 나는 도서관으로 달려가서 ‘흙 속의 보물 지렁이’라는 책을 찾아냈다. 270여 쪽의 이 책에는 지렁이에 관한 모든 것이 상세히 기술되어 있었다. 그런데 어디에도 지렁이가 소리를 낸다는 말은 없었다. 지렁이 몸의 구조 그림을 아무리 뜯어봐도 발성기관은 없었다. 입만 있고 눈과 코가 없었다. 귀도 없었다. 벌레들이 소리를 내는 것은 짝을 찾기 위해서가 아닌가. 들을 귀가 없는데 소리는 무슨 소용이겠는가. 지렁이는 암수 한 몸이라 구태여 구애의 소리를 지를 필요도 없어보였다. 자체 수정을 하진 않지만, 유전적 성질을 강화하기 위해 서로의 정자를 주고받기 때문이다. 지렁이는 소리를 내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9. 그렇다면 온 여름 내내 지렁이 울음소리로 착각하고 들은 소리의 주인공은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인터넷을 한참 뒤지다가 드디어 찾아냈다. 그것은 땅강아지 소리였다. 곤충이면서 땅 속에 굴을 파고 살다보니 지렁이 울음소리로 착각했을 것이다.
10. 나는 지렁이가 소리를 내지 않는다는 시실에 몹시 실망했다. 괜히 억울한 생각까지 들었다. 평생 순하게 살면서 일만하다 가는 생인데 평생 벙어리로 살아야 하다니 너무하지 않은가.
11. 박완서님의 단편소설 ‘지렁이 울음소리’의 주인공은 지성과 교양을 갖췄으나 지극히 단순한 속물근성의 남편과 살면서 속으로 비명을 지르는 여자다. 여고시절 그녀에게 우상이었던 선생님을 20년 후 다시 만나지만 몹시 실망한다. 그 옛날의 순수했던 열정이나 패기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주변을 맴돌며 비정상적인 돈벌이에만 정신이 팔려있다. 그마저도 계속 실패하자 마지막 자존심이었을까. 유서 같은 편지를 남기고 사라진다. 그 편지를 보며 그녀는 지렁이 울음소리 같다고 생각한다. 작가는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우는 속울음을 지렁이 울음소리라고 표현했다.
12. 지금도 권력의 힘에 얽혀서, 돈의 무게에 눌려서, 가족이라는 이름의 굴레 속에서 비명 같은 울음을 속으로만 삼키며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을까. 해결책을 제시해줄 수는 없다 할지라도 누군가는 그 울음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래서 소리 없는 소리를 들어주어야 한다. 손을 잡아주고 어깨를 토닥이며 잘 하고 있다고, 그 모습 그대로 괜찮다고 말해주어야 한다. 누구나 하나쯤은 지렁이 울음소리를 간직하고 있을 나 자신에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