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학영재학교 교감을 거쳐 경남여고의 공모 교장이 된 조갑룡 교장(사진)은 “미래교육은 ‘N0. 1’ 인간이 아니라 ‘Only One’ 인간을 키워야 한다”며 “개개인의 소질을 계발하고 창의성을 키우려면 감성·문화적 노출을 많이 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1927년 개교한 부산 경남여자고등학교는 그동안 지역 여성계, 문화·예술계의 중추적 인물들을 배출한 명실상부한 부산의 중심 여학교다. 그러나 지역개발이 뒤처지면서 경남여고 역시 지역적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학력과 인지도 면에서 뒷걸음질을 쳐오다 지난해 3월 개방형 자율학교로 지정되면서 미래사회를 선도할 인재양성의 새로운 강자로 비상하고 있다.
‘논리를 뛰어넘는 유연한 사고로 창의성을 키우는 교육’에 초점을 맞춘 경남여고의 다채로운 교육실험이 주목을 받고 있다. 학생들은 과제연구를 통해 작성한 논문으로 논문대회를 열기도 하고 감성교육을 위해 김용택 시인 등을 초청해 특강을 실시하기도 했다. 또 올해부터는 학생들의 학력신장과 교사들의 수업능력 향상을 위해 학생들이 원하는 교사의 수업을 직접 골라 듣는 ‘교사 선택형 보충수업’도 실시하고 있다. 경남여고의 특색 있는 교육과정에 대해 살펴봤다.
고추음료 연구로
아이비리그 탐방
■ ‘학생 1인 1과제 연구’경남여고 2학년 전지혜(16), 장희주(17), 신수미(17) 양은 3월 11일 미국 아이비리그 탐방의 기회를 잡았다. 교내 논문대회에서 '지방분해 기능이 있는 고추 음료의 생산 가능성'이라는 과제연구로 1등을 차지, 성적 우수학생 4명과 함께 동창회 선배들의 지원을 받아 9박10일 간 미국 7개 명문대학을 견학하게 된 것이다.
‘학생 1인 1과제 연구’라는 이름의 연구교육 프로그램인 R&E(Research &Education)는 한국과학영재학교를 비롯한 과학고에서 주로 진행하는 프로그램으로, 학생들 스스로 흥미 있는 연구주제를 정해 과제를 설계하고 연구하는 프로젝트다. 경남여고는 이 프로그램을 정규 교육과정에 포함하고 있다.
이 프로그램을 통해 세 학생은 고추 속 캅사이신 성분에 의해 지방이 분해되는 과정을 직접 실험하기 위해 쇠고기, 닭고기 같은 육류는 물론 식용유까지 동원해 몇 달 간 실험에 매달렸다. 그 결과 시중에 판매 중인 액체 캅사이신을 3:1 비율로 물에 섞을 경우 가장 지방분해가 잘 된다는 결론을 내렸다.
전양은 “담임선생님이 반에서 키우는 고추를 보고 영감을 얻어 지방분해 성분이 있는 고추음료를 만들면 어떨까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며 “과학책에서 배운 지식을 바탕으로 직접 연구를 하면서 살아 있는 공부를 할 수 있어 재밌었다”고 말했다. 세 학생의 연구를 지도한 강옥화 생물교사는 “교과과정에서 배운 것만으로 이 정도의 실험을 해낸 것은 대단한 결과”라고 제자들의 성과를 평가했다.
조갑룡 교장은 “공부하기도 바쁜 인문계 고교에서 무슨 과제연구냐고 하겠지만 학생들이 낸 아이디어와 결과물들을 보면 놀랄 것”이라며 “과제연구를 통해 학생들은 스스로 자신의 관심사를 알아가고, 공부하는 데 흥미를 느끼게 된다”고 강조했다. 또 조 교장은 “결국 사람을 움직이는 힘은 인센티브”라며 “열심히 한 만큼 알아주고 격려해주면 아이들은 신나서 더 열심히 하게 된다”고 덧붙였다.
원하는 교사 수업 골라 듣는 보충수업
■ 교사선택형 보충수업학생들의 학력신장과 교사들의 수업능력 향상을 위해 '교사 선택형 보충수업'을 지난 3월부터 실시하고 있다. 조 교장은 “반대의견도 많았지만 토론을 통해 실(實)보다는 득(得)이 많다는 결론에 이르렀다”고 설명했다.
조 교장은 “학교 일이 교장이 주도한다고 모두 이루어지지는 않는다”며 “학교에서 결정할 중요한 사항이 있다면 학교연수에서 전체 선생님이 난상토론을 하고 거기서 결정된 합의사항은 따르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고 말했다.
조 교장은 “아직은 몇 달 되지 않았지만 학생들이 학원 수업이나 대학 강의처럼 교사를 직접 선택해 보충수업을 수강할 수 있다는 것에 학생과 학부모 반응이 긍정적”이라며 “교사들도 더 노력하는 계기로 삼고 있는 것 같다”고 밝혔다.
코티칭(co-teaching)으로 통섭(統攝) 실현
■ 교과통합형 수업교과통합형 수업도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준비하고 있다. 조 교장은 “1998년 미국에서 연수를 받을 때 대학교수가 두 명 또는 다섯 명까지도 함께 수업을 진행하는 것을 보고 큰 감동을 받아 접목을 시도하고 있다”며 “코티칭(co-teaching)을 위해 간(間) 학문적으로 두 교사가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 자체로도 의미 있고 굉장히 발전적인 일”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영어시간에 우주에 대한 지문이 나오면 과학 교사가 함께 수업에 들어가 가르치는 방식으로 진행할 것"이라며 “6월 준비과정을 거쳐 2학기부터는 본격 실험에 들어가려고 한다”고 말했다.
이 같은 다양한 교육실험 속에서 학력신장이라는 성과도 이뤄냈다. 지난해 3월 전국 학력평가 결과 누적인원 59명이던 300점(만점 500점) 이상 득점자가 지난해 11월에는 88명으로 49.2%나 늘었다. 학부모들도 다양한 교육개혁을 추진하는 학교의 시도에 대해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학부모 강영순(46·여)씨는 “학생들을 3단계로 나눠 주요 과목에 대한 보충수업을 실시하는 등 개인별 맞춤수업을 하는 것이 특히 마음에 든다”며 “틀에 박히지 않은 교육과 아이들에게 꿈을 주는 다채로운 문화적 체험도 좋다”고 말했다.
오페라 관람·시인 특강 등 감성교육
■ ‘1인 20제’ 가지기‘감성교육을 통한 전인교육과 학력신장’을 추진해 온 조 교장은 “21세기형 글로벌 인재의 필수요건인 창의성은 예술적 감성에서 나오는 것”이라는 교육철학을 가지고 있다. 이런 철학을 바탕으로 실시하고 있는 프로그램이 바로 ‘1인 20제 가지기’, 오페라 관람, 시인 초청 특강 등이다.
‘1인 20제 가지기’란 학생들이 졸업 때까지 좋아하는 시 20편, 음악 20곡, 그림 20점을 정해 관련 자료를 수집하고 자신만의 감상을 담아 개인 포트폴리오를 만드는 작업이다.
지난해 9월에는 비싼 관람료 때문에 평소 학생들이 접하기 힘든 오페라를 전교생이 단체 관람하기도 했다. 실제 공연 티켓은 10만원 안팎의 고가지만 최종 리허설 관람료는 5천원이라는 데서 착안해 전교생이 무료 관람을 할 수 있도록 학교에서 지원한 것이다.
지난해 11월엔 1·2학년 학생과 학부모, 교직원, 동문 등 7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김용택 시인을 초청해 ‘사람을 귀하게 가꾸는 글쓰기’라는 주제로 특강을 열기도 했다.
개방형 자율학교는...
혁신의지가 강한 운영주체에 학교운영권을 위탁해 교육과정과 교수법 등을 자율적으로 운영하는 학교. 운영주체는 대학, 민간단체, 공모 교장 등에게 개방된다. 학교장의 인사권을 확대해 우수교사 초빙 등의 권리도 준다.
부산 경남여고를 비롯 서울 원묵고, 구현고, 부산 남고, 충북 청원고, 인천 신현고 등 전국에 10여 개가 운영 중이다.
경남여고 조갑룡 교장은 “개방형 자율학교는 지식만을 전달하는 기존의 학교교육에서 벗어나 신체적, 정서적, 지적 측면에서 균형을 이룬 자기계발을 통한 전인교육을 지향한다”며 “학습동기유발 모듈을 개발하는 등 새로운 교육방법을 적극적으로 도입해 학교교육만으로도 대학에 진학할 수 있도록 한 새로운 학교운영 모델이라고도 할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