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출과 해돋이에 관한 시모음 ]
※ 아침을 기리는 노래 / 문태준
시간은 꼭 같은 개수의 과일을 나누어 주시네
햇볕, 입술 같은 꽃, 바람 같은 새, 밥, 풀잎 같은 잠을
나는 매일 아침 샘에 가 한통의 물을 길어 오네
풀의 평화와 물의 음악과 물의 미소와 물의 맑음을
내 앞에는 오늘 내가 고를 수 있는 물건들이 있네
갈림길과 건널목, 1월 혹은 3월 혹은 9월 혹은 눈송이, 첫 번째,분수와 광장,
거울 그리고 당신
당신이라는 만남
당신이라는 귀
당신이라는 열쇠
※ 해가 지면 해가 뜬다 / 강원석
태양처럼
뜨거웠던 어제가 있어
석양처럼
찬란한 오늘을 품는다
노을 앞에 슬퍼 마라
해가 져야 해가 뜬다
또 다른 꿈을 위해
별처럼 살아가자
다가올 어린 날들이여
너를 위해 나는 더 빛난다
※ 낮에서 밤으로 / 이생진
일출봉에 올라 해를 본다
아무 생각 없이 해를 본다
해도 그렇게 나를 보다가
바다에 눕는다
일출봉에서 해를 보고 나니
달이 오른다
달도 그렇게 날 보더니
바다에 눕는다
해도 달도 바다에 눕고 나니
밤이 된다
하는 수 없이 나도
바다에 누워서
밤이 되어 버린다
※ 해 / 박두진
해야 솟아라, 해야 솟아라, 말갛게 씻은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산 너머 산 너머서 어둠을 살라 먹고, 산 너머서 밤새도록 어둠을 살라 먹고, 이글이글 애띤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달밤이 싫여, 달밤이 싫여, 눈물 같은 골짜기에 달밤이 싫여, 아무도 없는 뜰에 달밤이 나는 싫여······.
해야, 고운 해야, 늬가 오면, 늬가사 오면, 나는 나는 청산이 좋아라. 훨훨훨 깃을 치는 청산이 좋아라. 청산이 있으면 홀로래도 좋아라.
사슴을 따라 사슴을 따라, 양지로 양지로 사슴을 따라, 사슴을 만나면 사슴과 놀고,
칡범을 따라 칡범을 따라, 칡범을 만나면 칡범과 놀고······.
해야, 고운 해야, 해야 솟아라. 꿈이 아니래도 너를 만나면, 꽃도 새도 짐승도 한 자리에 앉아, 워어이 워어이 모두 불러 한 자리 앉아, 애띠고 고운 날을 누려 보리라.
※ 새해 / 나태주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너는 어린 것
다만 안쓰럽고 가여운 아이
그런 마음을 위해
어린 장미는 피어나고
아버지도 있고 딸도 있을 것임
문득 세상이 새롭게 밝아온다.
※ 어머, 해가 뜨려나 봐요
/ 다서 신형식
누군가는 진통을 하고 있고
또 누군가는 환호를 준비하는
참으로 정체가 모호한 세상
저 너머를 넘어
어머, 해가 뜨려나 봐요
어머니, 해가 뜨려나 봐요
※ 해 볼만 해 /다서 신형식
해볼 만하다고,
이번에는 정말 해 볼만하다고
엉덩이가 들썩들썩 유체이탈을 시도하는
그 절묘한 산란의 타이밍에
쌍화차에 계란노른자 덤으로
퐁당 던져넣으면
매번이 첫경험 같아
밤을 지샌 부끄러움이 미끈하게
목구멍을 통과하는 순간
웃는 듯 우는 듯
뜨겁게 해탈하는 고백,
해 볼만 해
궁금하다
내 유전자는 일출다방에 죽치는
아주 오랜 단골이 아니었는지
※ 일몰과 일출 사이 / 목필균
해가 떠오름도
달이 떠오름도 시간 속에 있다
일출과 일몰 사이
빈번하게 드나드는 분주한 발걸음이
대부분 지갑 여는 일에
지갑 닫는 일에 매달려 있다지만
일몰이 오고야
일출을 기다리며
어둠을 밝히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그렇게 살아본 사람만이 그 일을 알고
그 일을 겪어본 사람만이 그 사람을 아는데
어둠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 속에
대부분 가려진
간절한 수고가 있다
일몰과 일출 사이
어둠이 있기에 밝음이 있는데
어찌 세상살이에 곤란만이 있을까?
※ 죽일 년 살릴 년 / 박상률
이 년 가니 저 년 오는 세밑 저녁
앉은뱅이책상 앞에 쭈그려 앉아
헌 수첩 전화번호 새 수첩에 옮겨 적는다
해마다 갖는 나만의 송구영신 의식으로
전호번호부 개정판을 내는 것이다
이 사람은 금년에 연락한 일 한 번도 없었지
내년에도 전화할 일 없을 테니 헌 수첩에서 죽이고
이 사람은 자주 연락해서 전화번호 외울 판이지만
내년에도 또 전화할 일 있을지 모르니 새 수첩에 살리고
묵은해니 새해니 따질 것도 없는 살림이지만
구년 가고 신년 오는 그 사이
죽일 년 살릴 년 운명을 가르는 나의 연례행사
※ 비화하는 불새 / 황지우
나는 그 불 속에서 울부짖었다.
살려 달라고
살고 싶다고
한 번만 용서해 달라고
불 속에서 죽지 못하고 나는 울었다.
참을 수 없는 것
무릎 꿇을 수 없는 것
그런 것들을 나는
인정했다.
나는 파드득 날개 쳤다.
명부에 날개를 부딪치며 나를
호명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무너지겠다고 약속했다.
잿더미로 떨어지면서
잿더미 속에서
다시는 살로 태어나지 말자고
부서지는 질그릇으로
날개를 접으며 나는
새벽 바다를 향해
날고 싶은 아침 나라로
머리를 눕혔다.
일출을 몇 시간 앞둔 높은 창을 향해
※ 새해인사 / 나태주
글쎄, 해님과 달님을 삼백예순 다섯 개나
공짜로 받았지 뭡니까
그 위에 수없이 많은 별빛과
새소리와 구름과 그리고
꽃과 물소리와 바람과 풀벌레 소리들을
덤으로 받았지 뭡니까
이제, 또다시 삼백예순다섯 개의
새로운 해님과 달님을
공짜로 받을 차례입니다
그 위에 얼마나 더 많은 좋은 것들을
덤으로 받을지 모르는 일입니다
그렇게 잘 살면 되는 일입니다
그 위에 더 무엇을 바라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