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가 여자를 기다리게 하는 경우가 어딨냐.! 빨리 안오고.!" 입술을 뾰루퉁 찡그리며 혼내는 그녀가 귀여웠다. "미안 오래 기다렸어.? 그런데 니가
나한테 여자냐.? 하.!" 웃으니 "뭐.?, 10분 이나 기다렸어 안주시켜.! 배고파" 화나지 않은 뜻으로 명지가 '헤헤헤' 웃었다. 우리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이야기에 시간이 잘갔다. 그녀가 고등학생때 기숙사 창문을 몰래 넘어 밖에나간 이야기를 했고 나는 자취방 열쇠를 잃어버려 창문 넘어 집에 들어간
이야기를 했다. 명지가 밭에가서 어머니와 큰 고구마 캔 이야기를 할때, 난 캐도캐도 힘에 부치는 감자 이야기를 했고 명지가 뒷동산에 눈구경 가서 엄청큰
토끼 본 이야기를 했을때, 나는 눈오는 날 꿩 잡으러 간 이야기를 했다. 명지와 나는 화장실을 들락이며 생맥주를 많이도 마셨다. 뮤직박스의 디제이가
레코드 판을 갈며 '티득티득' 판튀는 소리를 내며 맨트했다. "달콤한 호프잔에 촉촉한 물기 흐르듯이 오래전 그녀의 볼에 흐르던 눈물 생각나는 바보 디제이
리차드입니다. 그리운 여인을 생각하며 김종찬의 당신도 울고 있네요.! 한곡 띄워 드립니다. 우리 도둑놈 아저씨들 여자 눈에 눈물나게 하시면 안됩니다."
'~~당신도 울고있네요 잊은줄 알았었는데~~~' 그때 그 노래는 디제이 리차드의 사연 이었는데....
'빠빠빠 빠빠빠 이제는 우리가 헤어져야 할시간~~~'
시간 가는줄 몰랐는데 벌써 호프집 닫을때가 되었다는 또 만나요 노래가 퍼져 나왔다. 일어나 카운터로 갔을때 찰진 농담을 잘하시던 호프집 사모님이
마침 나와 계셨다. "너 이놈 한번을 안오다가 어쩐 일이여.?" 명지가 따라 나오다가 여사장이 아는척 함을 보고 "안녕 하세요.!" 하고 인사했다.
"이자식 능력있네 여자친구 힐구두 신으면 너보다 더 크겠다. 이쁘다 야.! 꽉 잡어 오늘 그냥 보내지마.!", "아녀유 그냥 친구에유" 머리를 긁적이니
"남자, 여자 친구가 어딨어.! 아줌마 말 들어 여자는 남자가 밀어 붙혀야 딸려 오는겨.! 옆에 어떤 사람도 웃으며 말했다. "그쵸 남자는 박력이 있어야 되요.!"
농담조 이지만 안들은것 과는 달랐다. '얼마에요 사모님.?' 하고 물으니 '그냥가.!' 라고 말했다. '아니에요 받으세요' 재차 말했고 '그냥가.! 담에는 받으께
자주 안와도 좋으니 또와 그냥가.!' 하며 손등을 내져었다. 아르바이트 시절 지난정이 기억되어 있음에 뭉클했다. 마감 정산때 오백원이 모자르면
'느네들 돈 계산 똑바로 못하는겨 이눔 새끼들 월급에서 공동으로 다깐다.!' 하고 화내던 사모님이 오천원도 넘을 술값을 안 받는다 하니 정이라는게 무척
값진것이다. 은근히 명지 앞에 가호도 살았다. 사모님께 75도로 인사하고 '또 오겠습니다.' 했더니 '야 이눔아 우리 신랑이 건달이지 내가 건달이냐 인사
꼬라지가 그게 뭐여.!' 하며 '씨익' 웃었다. 나도 웃고 명지도 웃었다. 지하 계단을 올라 밖으로 나오니 부슬히 비가 내렸고 차들이 달릴때 도로의 고인물이
'쏴악쏴악' 튀기는 소리가 났다. 좀전 까지만 해도 신나게 이야기 했는데 헤어지려니 딱히 할말이 없었다. 무안했다. 고작 머리를 써서는 그녀에게
이렇게 말했다. "비도 오는데 라면 끓여줄까.?" 멀뚱한 눈으로 명지가 대답했다. "비오는거 하고 라면하고 무슨 상관이냐.?", '그건 그렇다.' 얼버무리 듯 답했다.
"비가와야 라면이 쫄깃하고 구수해.!" 명지가 어이 없는듯 웃었다. "너 머리는 참 좋다.! 그럼 라면만 먹고 갈꺼다.!" 우리는 택시를 탔고 집앞 영화슈퍼에서
라면과 소주 두병을 샀다. 슈퍼 문에 닿았는지 소주병이 '달그락' 하기에 명지가 흘킷 '뭐야.! 음료순가.?' 하고 물었다. '목말라서' 하고 말을 감췄다. 라면 한개를
끓이는 동안 명지는 한번왔던 방안에 지난날을 회상 하는 듯 앉지 않고 둘러 보았다. 린다와 알리사의 사진은 여전히 구하지 못했고 왕조현과 브룩쉴즈의 사진은
담배 연기에 찌들었는지 낡았다. 컵에 소주를 '콸콸' 두잔 나눠 부었다. '목마르면 소주를 이래 먹냐.?' 그녀가 날 따라 온것은 보통의 반가움은 아니었던것 같다.
나의 원샷 권유에 거절없이 '꿀떡꿀떡' 글라스의 소주를 비운것도 그랬다. 맥주가 깨었나 싶을때 소주를 더해 마시니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자고가 비도오고 늦었어.!"
나는 정말 흑심없이 말했다. "어우 야.! 우리가 몇번이나 봤다구 자구가라 그러냐 쫌있다 나 갈껴.!" 나는 생각했다. 어차피 말을 꺼낸거 거절 당하기도 무안했다.
덮석 손을 잡았다. "손만잡구 잘께 약속해.!" 너무도 상투적인 말이지만 손을 쓰윽 빼며 명지가 말했다. "안돼.! 손도 잡으면 안돼 너는 저쪽, 나는 이쪽에서 자.!
옆에 오면 죽일껴.!" 우리는 그렇게 같이잤고 술취한 심장은 쉼없이 뛰었지만 어느사이 팔베게 하고 손을 잡았고 옆에 있어준것이 고맙기에 그 이상은 없었다.
그때는 어렸고 생각하는 그것은 죄짓는 일인 줄로만 알았었다. 우리는 서로 무슨 말을 하지 못했고 침만 몇번씩 '꿀떡꿀떡' 삼키다가 잠들었다. 잠결에 내가
명지의 어떤곳을 더듬기도 한것 같은데 문득 깨어 죄스러운 듯 반성했고 다시 잠들었다. 나는 아침 일찍 일하러 가야했고 좀더 자도되는 명지에게 방열쇠를
주며 문앞 돌밑에 넣어두면 된다고 말했다. 고생하라며 눈을 반쯤 떴다가 좀더 자려는 듯했다. 퇴근하니 자취방 안은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다음날 그녀의 커피숍에 전화했을때 명지가 이렇게 말했다. "미안해! 나... 나는 있지...." 잠시간 말이 없다. "미안해.! 나 너 다시 만나고 너무 반가웠어.!",
"근데 근데 나 있잖아 남자 친구가 있어 커피숍 고모도 걔네 고모야" 나는 '그러냐' 고 답했고 "좋은 여자친구 만나 나도 니가 좋긴한데 남자 친구가 있는걸
어떻해 진작에 좀 오지 그랬냐.! 바보야.!" 나는 잠시 무슨 말을 더 해야 할지 몰랐다. 유행가 가사에 매양 나오는 말이 행복을 빌어 준댔나 뭐랬나.
"그려 행복을 빌어줄께 행복해라.! 그저께 만나줘서 고마웠어.!" 그렇게 명지와 짧은 재회는 끝났다. 한동안 비가 그치지 않고 내렸다. 눅눅한 자취방 이불에
그녀의 향기는 사라지고 다만 칼이 굵지 않은 명지의 머리카락 몇 올만 방바닥에 보였다. 그 머리카락 만큼 만이라도 우리 만남이 길었더라면 인연이란게
어떻게 흘러 갔을런지.... 당시 우리들 세계에서는 임자있는 여자에게 찝적 대는건 파렴치한 짓으로 여겨져 금기시 했는데 지나고 보니 결혼전에는
그것도 아니었던 걸 알고 난 후엔 이미 소용 없는 일이었다. 나는 명지를 잊었다. 몇달이 지나면 신체검사 1등급의 병무청 판정으로 현역에 입대해야 했고
명지의 남자 친구는 신의 아들 동사무소 방위였다. 난 그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방위.! 참으로 막강한 경쟁 상대 아니던가.!' 퇴근하면 그녀 앞에 갈수있고
그녀를 옆에서 방위 할수있는....' 수정에게 명지 소식을 듣고 난 그렇게 군대에 갔고 사실 명지가 내안에 들어 올 커다란 깊이도 없었던가 보다. 3년 정도 지났을까
군에서 전역 후 바삐 살다가 여전히 혼자이던 어느날 김치공장을 창업하여 개업하게 되었다. 친한 친구 몇에게 오라했는데 연락에 연락이 퍼져서 저녁에는
친구들이 무리지어 몰려왔다. 그리고 돼지 머리에 다들 축복을 해주었다. 늦으막히 나와 각별히 친했던 은호는 결혼까지 약속된 수정을 데리고 온다 했다.
호프집에서 명지를 알게해 준 그 수정이다. 통화중에 수정이 바꿔 달라하여 내게 말했다. '내친구 한명 따라 오는데 같이 가도 되지.?' 하고 물었다.
'그래 좋지 안될일이 뭐있어 언능와.!' 얼마 후 은호가 화장지를 들고 수정과 함께 들어왔다. 모두들 그 커플이 들어서자 다들 인사하며 동창 커플임에
웅성웅성 두배로 축하해 주었다. 그뒤로 하늘색 원피스를 차려입은 여자가 수줍게 서있었다. 명지였다. 헬쑥해 진듯한 얼굴에 조금은 점잖을 떨 듯
"야.! 축하해 나 누군지 알지.? 너 가게도 오픈하고 멋있다.!" 속으로 말했다. '당연히 누군지 알지 바보.!' 그렇게 호프집 화장실에서 나올때 '야 너 멋있다.!'
했던것 처럼 하얀이를 보이며 거기에 서있었다. '떡먹어.!' 나는 얼떨결에 그렇게 말했고 그녀는 떡을 잘 먹었다. 그리고 내게 물었다. "나도 돼지 머리에 절해도 되.?"
물끄러미 날 보기에 대답했다. "당연히 되고 고마운 일이지" 막걸리를 내가 붓고 명지가 두손으로 다소곳이 받았다. 우암동의 좁은 자취방에서도 소주를
그렇게 받았었다. 남들은 모를 상상에 돼지머리가 돈을 문채로 활짝 웃었다. 다소곳하게 돼지머리에 절했다. 그녀의 뒷모습에 다시금 '여전히 예쁘구나.!'
생각했다. 아니 정말 예뻤다. 수정이 내옆에 다가와 말했다. '명지랑 잘해봐 훨씬더 예뻐졌지.?' 하며 나즈막히 웃었다. '방위는.?' 하고 물으니
"뭘 따지고 생각해 그냥 잘해봐.!" 말했다. 얼굴살이 헬쑥해진것이 마음 쓰였지만 오히려 처녀다운 성숙한 분위기를 보여냈다. 여러 친구와 대면하느라
명지와 대화는 거의 못했다. 수정이 그녀의 전화번호를 내게 찍어 주었다. "명지 바로 근처에 살아 인연이야.! 인연.! 오늘은 바쁠테고 따로 만나 잘해봐.!"
수정이 더욱 들떠하였다. 개업 분위기가 수그러들고 몇일 후 명지에게 전화했다. "나야 김치가게.!" 말하니 반갑게 그녀가 대답했다.
"어 그래 개업식은 잘 끝났지.! 히히 못 도와주고 먼저 왔었네.!" 더 친해진것 같은 말투다.
"나올래.? 소주방 사줄께.!" 대뜸 그렇게 말했다.
"어 저기 알았어 대충 츄리닝 입고 갈꺼니까 흉보지 말어.!" 나도 츄리닝을 챙겨 입고 나갔다. 소주방에서 우리는 그간의 이야기를 주고 받으며 소주를
물처럼 많이 마셨다. 그녀가 지난 여름 바다에 놀러가서 파도에 슬리퍼 잃어버린 이야기를 했을때 나는 클럽 축구하러 갔다가 축구화 잃어버린 이야기를 했고,
그녀가 진해 군항제에 벗꽃 구경가서 맛있게 파전 먹은 이야기를 했을때 난 무심천 벗꽃 축제에 막걸리 마신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그리고 술이 깊이
취해 갈즈음 명지는 내게 물었다. "여자친구 없어.?" 주저없이 대답했다. "있었어, 그런데 군대간 사이 이유도 모르게 떠났어.!" 말하고 한잔 들이키자
"어휴 바보.! 잡았어야지 적극적이지 않으니까 떠났겠지.! 왜 놓쳐 바보야.!" 나도 물었다. "너는 방위 어떻게 됐어.?" 내 물음에 '힛' 하고 짧게 쓴웃음 짓더니
"그냥 그래 어떻게 되겠지 뭐.!" 크게 궁금 할것도 아니고 더 묻지 않았다. 소주방 사장 아주머니가 추가 주문한 소주를 가져다 주며 말했다.
"둘이 너무 잘 어울린다. 언제 결혼해.?" 명지는 "하하하" 목젖이 보이도록 웃었다. 나는 소주를 더 마셨다. 술김이라 그랬는지 웃는 그녀의 입술에 덮썩
키스하는 상상을 했다. 우리는 취하여 일어섰고 그녀가 휘청거릴때 서로 손을 잡고서는 집쪽으로 돌아 왔다. "너네 가게에 푹쉰 김치 있어.? 나 푹쉬어서
군네 나는 김치가 좋아.!" 왜인지 남들 잘 안먹는 그것을 좋아 한다 했고 냉장고에는 이미 쉬어서 팔지 못하고 버릴수는 없는 거의 삭은 김치를 꺼내 보여 주었다.
김치 곰팡이가 희끗 보여서 무안 했는데 명지는 활짝 웃으며 "나 이렇게 흰 곰팡이 낀거 엄청 좋아해 그마워 고마워.!" 환하게 웃으며 손가락으로 몇개를
집어 먹는데 입안에 묽은 침이 '셔억' 고일 정도로 신맛이 상기 되었다. 잘 이해되지 않았다. 무거울 정도로 한봉지를 가득 담았고 그 때문에 그녀 집앞 까지
들어 바래다 주었다. 명지는 짚앞에서 잠시 머뭇 했지만 무엇을 더 할것은 없었다. 신김치를 집어 먹어서 뽀뽀 따위를 하면 시큰 하겠지.! 생각 했지만 단지
상상이다. 그녀의 팔을 한번 꼭 잡았다. "우리 조만간 맛있는 곳에서 저녁먹자.!" 명지가 답했다. "연락줘봐바 어떻게 될지 잘몰라.!" 몇일 후 분주히 서둘러
일을 마치고 분당의 배송도 다음날로 미룬 후 오후 3시에 명지에게 전화했다. "나 오늘 안바뻐 우리 밥먹자.!" 명지가 잠시의 말이 없더니 답했다.
"미안해.!.... 나있지.!.... 있잖어.!..."
'어휴 도대체 뭐가 매번 미안하다고....'
첫댓글 명지랑 이어질듯 끊어질듯 아슬아슬하네요 ㅎ
아슬아슬해서 더 기억나는것 같습니다.
나 있지~ 잇잖아~ 이거 사람 골때리게하는 멘트 전에 나오는 말인데말입니다 ㅎ
저렇게 말하는건 적어도 미련이 있다는 뜻인데 당시에는 모르지 말입니다.
혹시 나이때가 저와 비슷하신가요..? 왜 자꾸 저의 옛날 스토리와 비슷한지 의문입니다 ( 이 부분만요). 잘 보고 있습니다
메디야안님의 연세를 제가 모르니까 비슷한지도 모르겠습니다. ^^ 다만 시대적 배경을 공감 하셨다면 네살 안팍 아닐까 생각됩니다.
글을 정말 잘쓰시네요
칭찬 주시니 정말일까.! 기분이 좋습니다. 만약에 재능이라면 꾸준히 기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