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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감상실 스크랩 강매 (江梅) - 김의철 & 윤연선│거룩한 노래
하늘빛 추천 0 조회 56 11.01.24 22:5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강매 (江梅) - 윤연선 & 김의철

청개구리 고운노래 모음집 Vol. 4 (2004. Round)

윤연선 Yun, Yeun-Seon 1952 -

No.5 - 강매 (江梅) - 윤연선 & 김의철 듀엣

 

강매 (江梅)                  

김인호 & 김의철 작사, 김의철 작곡

1. 네 이름은 외로워 나비도 별님도 볼 뉘 없어
   너 홀로 강가에 피었다 사라져 갈 이름이여
   너를 찾아 헤매다 나의 외로움만 쌓이고
   스러진 꽃잎을 찾으려고 등 뒤 해 지는 줄 몰랐네

   불러도 대답은 간 데 없고 휘몰아치는 강바람만
   말발굽 소리를 내며 말라버린 풀그루를 지나
   단 한 번 미소를 줏으려고 그래서 네 이름은 강매라네
   단 한 번 그 향기 그리워 그래 네 이름은 강매라네

2. 밝아오는 아침 햇살에 수줍어 고개 숙인 그대여
   님의 맘 다 타버려 재 되어 사라질 날 기다렸나
   어제도 오늘도 동틀제면 너를 찾아 헤매었네
   저녁해 먼산에 걸리어 외로움에 타버렸네

   불러도 대답은 간데없고 휘몰아치는 강바람만
   말발굽 소리를 내며 말라버린 풀그루를 지나
   단 한 번 미소를 줏으려고 그래서 네 이름은 강매라네
   단 한 번 그 향기 그리워 그래 네 이름은 강매라네

윤연선 & 김의철 듀엣
(기타: 김의철, 건반: 장경아, 백코러스: 문지환 & 장경아)

     

윤연선 Yun, Yeun-Seon 1952-

30대 중반을 넘어선 포크송 올드 팬들에겐 추억 저편에 아지랑이처럼 살아 움직이는 노래가 있기 마련이다. 그중의 하나. "동그라미 그리려다 무심코 그린 얼굴 내 마음 따라 피어났던 하얀 그 때 꿈은..." 가수 이름조차 기억속에서 흐릿하지만 불현듯 뇌리에 떠오르는 이 노랫말과 우수에 젖은 멜로디는 올드 팬들에겐 현재와 과거를 이어주는 단단한 연결고리와도 같다.

바로 윤연선의 '얼굴'이다.

윤연선 2집 - 고아 / 얼굴 (1975 Jigu)

그녀는 수줍음 많고 내성적인 70년대의 전형적 한국여성포크가수 1세대. 본인은 "직업가수도 아니었던 내 노래가 칼럼 소재가 될만한 가치가 있느냐"고 오히려 놀라워 한다. 사실 영화배우인 오빠 윤양하와 성우인 언니가 없었다면 그녀가 인기가수였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여전히 감수성 강한 소녀 모습 그대로다. 1972년쯤 포크열풍의 중심이였던 명동의 음악모임에 친구의 권유로 우연히 참여하면서 시작된 그녀의 노래 여정. 이때 어울린 음악친구는 4월과 5월의 멤버였던 이수만. 함께 방송국 구경을 가 인기 DJ 이종환과 사귀고 중앙대 학군단 축제에서는 존 바에즈 노래도 불러 보았다.

72년 가을에 나온 데뷔음반은 DJ 이종환의 배려로 이수만과 함께 했다. 이수만이 대학 초년시절에 작곡한 동요같은 습작들로 채워진 이 음반의 대표곡은 '내마음'. 윤연선 본인도 타워호텔에서 촬영한 음반 자켓을 본 기억만 있을 뿐 발매사 조차 기억이 가물가물하단다. 첫 독집앨범도 비슷하다. 그렇지만 이 음반엔 윤연선의 숨겨진 이야기가 있다. 동아방송 PD 이해성씨의 소개로 2기 '뚜아에무아'를 결성하기 위해 녹음했던 '님이 오는 소리' '보내는 마음 가는 마음' 같은 숨겨진 곡들이 그 대상이다.

"화음이 어울리지 않은 것 같아 발표하지 않았다"는 이필원의 고백에서 보듯 윤연선-이필원의 '뚜아에무아'는 불발탄으로 끝났지만 우수에 젖은 듯한 두 사람의 하모니는 찬탄을 불러일으킨다. 윤연선- 이필원의 '뚜아에무아'가 못내 아쉬워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윤연선의 최대 히트곡 '얼굴'은 처음으로 자기의 음악을 내놓고 싶어 적극적으로 찾았던 곡이다. 작곡자인 동도중학교(당시) 신규복 선생님을 찾아가 학교 강당에서 피아노 반주에 맞춰 즉석 테스트를 받아가며 곡을 얻어냈다. '얼굴'은 원래 어린이를 위해 만든 동요였다. DJ 박원웅이 기획한 <윤연선/박승용-지구JLS120849, 1974년10월11일>은 '얼굴'의 첫 음반이건만 그녀가 가장 싫어하는 음반이다. 지구레코드 전속악사의 트로트풍 '얼굴'연주와 파트너로 함께 수록된 박승용도 이질감으로 영 못마땅했다.

깔끔하게 재무장해 발표한 음반이 <고아/얼굴-지 JLS120958, 1975년2월26일>. 타이틀곡은 오세은 편곡의 '고아'였고 '얼굴'은 2면 머릿곡이었다.

'고아'는 광주에서 처음 히트해 서울로 올라왔다.

"방송금지곡으로 묶여 부를 수 없게 됐을 때가 가장 속상했다"고 말할 정도로 윤연선의 최고 애창곡이다. '고아'의 방송금지조치이후 '얼굴'은 대박을 터트리며 방송과 다운타운가의 주요 레퍼토리로 하루도 빠짐없이 울려 퍼졌다.

당연히 각 방송ㆍ음반사에서 출연 및 음반제작 제의가 밀려들었지만 그녀는 오히려 부담스러웠다고 한다. 그저 노래부르는 자체가 좋았을 뿐 대중앞에 나서서 직업적으로 노래를 부를 자신도 없고 능력도 없다고 생각했다. 자신을 홍보하거나 체계적인 음악공부에 몰입하고픈 음악적 갈증보다는 요청이 있을 때만 고등학교나 대학축제무대에서 노래부르는 것이 마음 편했다.

이처럼 소극적인 윤연선 때문에 속이 탄 지구레코드는 은밀히 금지곡 '고아'를 삭제하고 '얼굴'을 타이틀곡으로 한 재판을 발매하였다. '왜냐 묻지 말아요'등 4곡을 추가로 수록한 재발매음반은 날개 돋힌 듯 팔려 나갔다. 그래도 어렵사리 구할 수 있는 재발매판에 비해 '고아/얼굴'이 함께 수록된 초판 구경이 만만치 않은 것도 이런 연유 때문이다. 상상을 초월한 반응으로 지구레코드사 사장은 추가로 음반 취입을 제의하면서 거액의 수고비까지 내놓았다. 윤연선은 "음반을 내면서 한번도 돈을 들이지도 받지도 않았다. 이때 받은 거액의 수고비는 노래를 한 이래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고 회고한다. 이후 김의철 곡 '강매' 등으로 녹음준비에 들어갔지만 상업적인 음반관계자들의 작업 환경에 염증을 느껴 도중에 그만둬 버렸다.

나이 50을 바라보는 중년의 윤연선. 요즘은 홍대앞에서 '윤연선의 얼굴'이라는 카페를 운영하며 자신의 노래를 기억해주는 팬들의 사랑에 행복해 한다. 그 사랑에 보답하기 위해 엊그제는 떨리는 가슴을 추스리며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행복의 나라로' 포크30년 기념공연 무대에 나서 25년만에 대중들과 호흡을 함께 했다.

'얼굴'을 듣던 중년의 관객들은 한 순간 "아! 이 노래가 윤연선의 것이었구나"라며 추억을 되새겼다. 팬들의 변치 않는 사랑으로 그녀는 이제 '가수였음'을 행복하고 소중하게 여길 것이다.

--- 최규성 기요칼럼니스트 ---

     

     

강매 (江梅) - 숲속의 작은 마을 합창단

숲속의 작은 마을 합창단 (옆의 자켓은 임의 삽입)

김의철 Kim, Eui-Cheol 1953-

강매 (江梅)

 

김의철의 강매 (江梅)

이 노래를 작사, 작곡하신 김의철 님은, 죽은 김광석이 부른 <불행아>의 원 작사, 작곡자이십니다. 김의철 님은 이 노래를 고등학교 때 가출하여 방황하면서, 그 느낌을 옮겨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또 다른 초창기 명곡 <마지막 교정>은 고등학교 졸업 때 즉석에서 만드셨고요. 80년대 대학 캠퍼스에서 많이 불린 <군중의 함성>과 <이 땅의 축복 위하여>도 그의 작품입니다.

젊은 날의 김의철

원래 서양고전 음악을 하는 집안에서 자라났으나 그의 반항기는 이런 분위기를 벗어나도록 하였습니다. 일부러 대학도 안 갔고, 그런 식으로 재야(?, 非대학생 출신이란 말이죠)포크싱어 노릇을 하면서 차츰, 우리 포크송의 지킴이가 되어 오셨죠.

한 때 그 옛날 명동에서 모였던 노래모임 '청개구리'를 부활시켜, 명동 YWCA 마루홀, 일산 별모래 소극장, 명동성당 뒤쪽 삼일로 창고극장 등으로 장소를 옮겨 가며 청개구리 공연을 이끄셨지만, 이젠 그것도 여의치 않아 쉬고 계시는 중입니다(2008년 12월 현재).

그에게는 별로 빛을 못 본 걸작집 두 장이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그 산하>>(1992년 발행)인데, 이 중에서 제가 <江梅>를 뽑아 봤습니다. 이 앨범은 전체가 하나의 흐름을 갖고 진행되는데, 그 대략의 주인공인즉슨 동학군과 의병과 독립군입니다. <강매>에는 다음과 같은 해설이 붙어 있습니다.

"바람 몰아치는 강가에 내리는 눈 그대로 맞으며, 피는 매화의 얼굴과 향기, 어려운 세월 속 높은 정신 한 순간도 놓지 않고, 살다간 의로운 사람들의 자취 간 데 없고, 외로운 길 홀로 힘겹게 살아가는 깨끗한 사람들에게는 찾아오는 나비도 벌님도 없다. 쉽게 잊혀져 갔지만 고개 숙여 뜻을 기리며 외로운 영혼들의 명복을 비오니 이 노래를 들으소서 의병 홍범도 장군의 영령이시여! 독립군들이시여!"

이 해설을 읽는 순간 저는 울컥하며 실제로 독립군들이 불렀던 노래 중 하나인 <독립군 추모가>의 마지막 절을 떠올렸습니다. "나의 사랑 대한 독립 피를 많이 먹으려나, 피를 많이 먹겠거든 나의 피도 먹어다오(<스텐카라친> 곡조)" 그 추운 만주벌판, 노령 등지에서 그들은 추위와 굶주림을 이겨내기 위해 수많은 독립군가를 지어 불렀다고 합니다. 독립군가를 부르고 출정을 했다 합니다. 독립군가는 그들에게 또 하나의 신약이요 식량이요 또 무기였습니다. 저는 미력한 제가 하는 일들이, 지금도 우리 가슴 속에 살아있는 그들의 뜻을 기리고 계승하는 신약이요 식량이요 또 무기로 작동할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

그런데, 김의철 님은 이 노래를 유신시대 엄혹한 현실에서 한강가에 나가 헤매다 떠올렸다 합니다. 그런 만큼 이 노래는 그 당시 정치 현실에 대한 은유도 담겨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매화 그 자체의 절개나 의지 같은 것을 그 자체로 떠올리며 감상해도 좋을 듯합니다.

'숲속의 작은 마을 합창단' 은 김의철 님이 미국에 계실 때 이 앨범제작을 위해 아는 교포를 모아서 단기간에 노래연습시켜 만든 합창단이었습니다. 당연히 아마추어적인 노래를 보여주지만, 풋풋해 보이기도 합니다. 앨범 전반에 걸쳐 보이는, '러시안 발라드적' 우울한 분위기는, 당시 김의철 님이 빠져 있으셨던 러시아 국민음악파의 영향을 보여줍니다. 배경의 현악트레몰로 효과음은 마치 러시아의 민속악기 발랄라이카 소리와도 같습니다.

출처 : 네이버 불러거 푸른몸

     

     

고독한 방랑자의 염세적 노래들

1집 - 김의철 노래모음
마지막 교정 / 연인들의 자장가 (1974 성음)

1973년 경 '포크' 진영이 양극화되었다는 점은 여러 번 지적된 바 있다. 일부는 대중매체를 통해 새로운 대중연예(이 말은 결코 '나쁜' 뜻이 아니다!)로 정착해 가고 있었고, 다른 일부는 '언더그라운드'를 고집하고 있었다. '언더그라운드'라는 말이 당시에 사용되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TV 쇼나 생음악 살롱 등 주류 음악인들의 무대를 거부하는 지향을 가진 '아웃사이더'형의 인물들이 존재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명동의 무대를 예로 들어보면 오비스 캐빈과 쉘부르 등이 이미 스타가 된 포크 가수들의 무대였다면 내쉬빌과 디쉐네 등은 이들 '언더그라운드 포크'의 무대였다. 이런 현상은 단지 음악인들의 '마음'에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이들이 연주하는 사운드에서도 드러난다. 대중매체를 통해 자주 등장한 포크가 '일렉트릭'해지고 '리드믹'해졌던 반면, 언더그라운드 포크는 '통기타 순수주의'를 고수하면서 서정성과 '메시지'를 중시했다.

김의철은 그 가운데서도 가장 비타협적인 경우에 속한다. 그와 비슷한 인맥을 형성했던 오세은과 이정선이 통기타 중심의 음악을 선보이면서도 이런저런 음악적 실험을 시도한 반면, 김의철은 마치 목숨을 걸듯 기타의 플러킹(plucking)에 승부를 건다. 통기타의 리듬 스트러밍(strummimg)은 "마지막 교정"의 후렴구에서만 잠깐 나올 뿐이고, 하나의 코드(화음)에 속하는 음들이 동시에 나오는 일도 그리 많지 않다. 리듬이 비교적 일정한 패턴으로 인식되는 곡은 쓰리 핑거 주법으로 연주하는 "마지막 교정", "저 하늘에 구름 따라", 그리고 컨트리 스타일의 "친구", 트레몰로 주법이 등장하는 "우리들의 꽃" 정도이다. 다른 곡들의 경우 리듬은 기타 아르페지오나 노래의 멜로디에 숨어 있을 뿐이다. 결과는 한 줄 한 줄 섬세하게 튕길 때마다 사색을 담은 기타 연주와 탁 트이지 않은 톤의 목소리로 부르는 노래들이고, 그 느낌은 내향적이고 우울하고 때로는 염세적이다. 기타와 노래 외에 편성된 다른 음이라곤 백킹 코러스와 클라리넷 정도일 뿐이다. "섬아이"에서 베이스 기타가, "연인"에서 피아노가 등장하지만 이런 느낌을 확 바꿔 버리는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이를 연주한 인물들이 외부로부터 초빙된 직업적 음악인이 아니라 내부로부터 조달된 가족이거나 동료라는 사실은 이 음반이 자급자족으로 녹음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참고로 클라리넷을 연주한 김의혜는 그의 셋째 누나이고, 베이스를 연주한 이정선과 객원 가수 박찬응은 그의 동료(혹은 선배)다.

수록곡 가운데 유일하게 자작곡이 아닌 "연인들의 자장가"의 원곡이 우디 거쓰리(Woody Guthrie)의 "Hobo's Lullaby"라는 점은 김의철의 음악적 지향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즉, 이 음반의 화자의 정서(혹은 정체성)가 있다면 '고통받고 소외된 떠돌이'일 것이다. 떠돌이의 절망감은 객원 가수 박찬응의 그로테스크한 목소리를 빌린 단조의 곡 "섬아이"와 "평화로운 강물"에서 극한적으로 표현되는 듯하다. "섬아이"는 3박자 리듬 위에서 A-A-B'-A 형식이 두 절 반복되는 형식인데, 감기라도 걸려서 목이 잠긴 듯한 박찬응의 노래는 처절한 슬픔을 담고 있고 특히 클라리넷과 어우러질 때 슬픔은 더욱 증폭된다. 베이스 기타는 섬의 분위기를 표현하듯 슬며시 꿈틀댄다(참고로 이 곡을 이정선의 "섬아이"와 비교해서 들으면 여러 모로 흥미롭다. 아웃사이더들의 고독에 대한 상이한 표현방식을 느낄 수 있다는 점에서). 한편 "평화로운 강물"의 경우는 16마디 형식의 노래가 여섯 번 반복되는데 리듬이 세 박자와 네 박자가 교대되는 특이한 진행을 보인다. 기타 주법도 리듬의 변화에 따라 가변적으로 변화하는데, 유심히 들으면 이런 변화가 가사의 스토리텔링과 연관됨을 알 수 있다. 그 점에서 이 곡은 '아메리칸 포크'를 듣는 기분이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전주와 간주에서 감화음(diminished chord)을 동반한 기타 주법은 '클래식 기타'의 영향을 강하게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런 고통받고 소외된 정서는 증정본 표지에 그가 친필로 적은 "젊음은 활활 타오르고 있다. 그러나 언젠가는 재 되어 흙으로 변할 뿐이다"라는 문구에서도 잘 나타난다. 이런 정서의 원인을 한국전쟁 때 월남해 온 김의철의 가족사, 그리고 사춘기 시절 부모 형제와 떨어져 지내야 했던 개인사로만 돌려버릴 수는 없을 것이다. 이 음반이 발매된 1974년(녹음은 1973년)이 '긴급조치의 시기'라는 시대사로만 설명을 대신할 수도 없을 것이다. 어쨌거나 이 음반은 '판금'이라는 조치를 당했고 그 결과 김민기, 한대수, 양병집의 음반과 더불어 시장에서 사라진 뒤 컬트가 된 음반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심의를 통과하지 못한 이유는 "섬아이"가 '창법 미숙'이라는 것이었다. '저속'이 아니라 '미숙'이라는 점에 유의하라.

그런데 30년 가까운 시간이 지난 지금 이 음반을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앞에서 운을 띄웠지만 이 음반에 담긴 음악은 '연예'로부터 가장 거리가 먼 경우에 속한다. 김의철이 추구한 방향은 포크 음악이든, 클래식 음악이든 대중음악 '이전'의 서양 음악의 뿌리를 찾는 것이었고, 실제로 그의 이후의 경력은 이런 방향을 보여준다. 그 점에서 그는 한대수, 이정선, 조동진, 김민기, 오세은 등과도 상이해 보인다. 이를 '또 하나의 서양 콤플렉스'라고 매도하는 것은 부당하지만 그 결과가 '의미는 있지만 재미는 없는 음악'이라는 점은 조심스럽게 지적할 수 있겠다. 그래서 이 음반은 일부로부터는 시대를 초월한 아름다움을 가진 품격 있는 음악으로 숭앙 받고 있지만, 다른 일부로부터는 '그 시절 그 노래'이며 소문에 비해 흥미롭지 않은 음악이라는 상이한 평을 받고 있다. 아무렴 어떤가. 품격 있는 음악에 대한 수요는 언제든 존재하는 것이니까...  20021222

P.S. 1
이 음반의 판금과 관련해서는 몇 가지 확인해야 할 대목이 남아 있다. 하나는 이 음반 수록곡들이 금지곡의 공식적 리스트에는 오르지 않았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이 음반이 오리엔트(당시 음반사는 성음)의 나현구 사장이 제작한 작품이라는 점이다. 전해지는 말로는 나현구 사장이 "곡 제목과 가사를 상의도 없이 수정하여" 발매했다는 것이다. 이런 저런 이유로 김의철은 이 음반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지인들에게 나누어 주었던 음반들을 회수하여 스스로 폐기했다고 한다.
P.S. 2
이 음반에 수록된 김의철의 곡 "저 하늘에 구름 따라"(원제: 불행아!)는 1980년대 이후에도 대학가의 애창곡이었다. 그런데 이른바 '노래운동' 진영에서 이 곡은 '금지곡'이었다. 물론 농담이지만 '이런 노래는 가급적 부르지 말자'는 내부적 금기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이런 노래'란 패배주의적이고 허무주의적 메시지를 담은 노래를 말한다. '가열차게 투쟁'해야 했던 당시의 상황에서는 왠지 부르고 나면 맥빠지고 의욕이 떨어지는 이 노래의 효과가 부담스러웠던 것 같다. 한편 김의철의 또 한 곡인 "군중의 함성"은 1980년대 중반까지 대학가에서 널리 불렸다.
P.S. 3
1979년 유학을 떠난 그는 독일과 미국 등지에서 공부를 하면서 [그 산하, 김의철](킹, 1992), [김의철 2: 연가집](킹, 1993) 등을 제작했지만 정식으로 배급하지는 않았다. 이 음반에서 보컬은 성악가 양경숙이 맡았다. 귀국 후 김의철은 1997년부터 양희은의 음악감독을 맡아 공연과 음반을 도와주고 있고, 앞으로는 방의경, 현경과 영애 등 당시 그의 주위에서 활동했던 포크 가수들이 활동을 재개하는 것을 돕고 싶다고 한다.

text | 신현준 homey@orgio.net
글 출처 : Coner Music

     

잘생긴 꾀꼬리 꽃미남 리차드강 어리버리 돈키호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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