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머튼 지음 / 정진석 추기경 옮김 / 바오로 딸
1. 작가소개
- 지은이 : 토마스 머튼
1915년 1월 31일, 프랑스 남쪽 프라드에서 태어났다. 무명 화가였던 뉴질랜드 태생의 아버지를 따라 프랑스와 영국을 오가면서 어린 시절을 보낸 그는 1938년 케임브리지대학을 졸업한 뒤 미국으로 건너가 1939년 컬럼비아대학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은 후, 화려한 작가 생활을 했다. 시를 쓰고 재즈에 열광하면서도 마음 깊은 곳에서 내밀한 변화를 겪던 그는 1938년 전격적으로 회두하여 가톨릭으로 개종, 1940년 트라피스트 수도원에 입회하여 1968년 태국 방콕에서 불의의 사고로 생을 마칠 때까지 수사ㆍ영성 작가ㆍ사회정의 수호자로 살았다.
1948년 자전적 일기 『칠층산』을 시작으로 70여 권의 책을 출간하여 20세기 가톨릭 영성 작가로 자리 잡았으며, 1963년 종교와 관상 기도 연구에 대한 기여로 ‘평화상’을 비롯하여 여러 상을 받았다. 침묵과 고독과 자연 속에서 기도하고 명상하며 관상하고 하느님께 나아간 토머스 머튼의 작품은 30여 개 나라에서 번역되었다. 국내에도 『칠층산』『가장 완전한 기도』『명상이란 무엇인가』『구원의 빛』『침묵 속에 하느님을 찾는 사람들』『마음의 기도』『양심, 자유 그리고 침묵』『고독 속의 명상』『선과 맹금』『침묵 속의 만남』『신비주의와 선의 대가들』『새 명상의 씨』『영적 지도와 묵상』『묵상의 능력』『삶과 거룩함』『평화론』 『토머스 머튼의 단상』을 비롯한 다수의 서적이 소개된 바 있다.
- 옮긴이 : 정진석 추기경
2. 간추림 또는 내 마음에 다가온 구절및 느낌
나는 하느님의 모습을 따라 본성은 자유로웠지만 또한 내가 태어난 이 세상의 모습을 따라 횡포와 이기심의 노예이기도 했다. 이 세상은 나처럼 하느님을 사랑하면서도 미워하는 인간들, 하느님을 사랑하도록 태어났으면서도 공포와 절망적 자기모순 속에 허덕이며 사는 인간으로 가득 찬 지옥과 같았다. (p31)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도 자신들은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고 믿으면서도 이 세상에 사로잡혀 있는 포로들이었다. 사실 나의 부모는 이 세상에 있었으나 이 세상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그들이 성인(聖人)이었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부모님은 예술가였다. 예술가들의 고결함은 사람을 세상으로부터 구원하지는 못하지만 세상 위로 들어 높인다. (p32)
☞ 예술은 사람을 구원하지는 못하지만 사람을 세상 위로 들어올린다. 예술의 역할.
행복이 초자연적 은혜와 아무 관련도 없는 자연적 문제뿐이었더라면, 나는 어른이 되었을 때 절대로 트라피스트 수도회에 입회하지 않았을 것이다. (p33)
☞ 행복은 이 세상이 아닌 저 세상의 문제다.
자기 아이들이 어떤 과오를 범하거나 비겁하고 추한 인간이 될까 봐 소심증에 걸릴 정도로 그렇게 신경을 곤두세웠던 나의 부모가 정작 종교 교육에 대해서는 무관심했다는 것은 이해가 안 간다. 추측건대 어머니는 이 문제에 대해 확고한 신념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아마 어머니는 그 시대의 제도적 교회는 자기가 자녀들에게 바라는 지성적 완성에 이르게 할 수 없다고 굳게 믿었던 모양이다. 우리는 플러싱에 있는 교회에 한 번도 간 적이 없었다.(p45)
☞ 오늘날 한국의 부모들도 그렇게 굳게 믿고 있다. 아이들의 장래는 하느님이 아닌 돈에 달려있다고!
내가 외할아버지한테서 물려받아 내 정신 속에 완전히 뿌리를 내린 것 중 하나가 가톨릭에 대한 미움과 의구심이었다. 그러나 겉으로 드러난 것이 아니고 그저 가톨릭이라는 막연한 악을 피하려는 잠재적인 혐오일 뿐이었다. 가톨릭은 죽음이나 또는 그런 의미를 지닌 것들과 함께 내 정신의 어두운 구석에서 다른 유령들과 함께 숨어 지냈다. 나는 가톨릭이라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그저 음산하고 불쾌한 감정을 일으키는 단어였을 뿐이다. (p80)
☞ 어떤 이에게는 내가 믿는 ‘가톨릭’이 증오의 대상이라는 것 또한 엄연한 사실이다.
악마는 어리석지 않다. 그는 사람들이 지옥에 대해 느끼는 것과 똑같은 것을 천국에 대해서도 느끼도록 한다. 그는 죄악을 두려워하지 않게 만드는 것처럼 은총의 수단은 꺼리도록 만든다. 밝음이 아닌 어둠을 통해, 실재가 아니라 그림자로써, 명백함과 본질로써가 아니라 꿈과 정신착란의 환상을 통해 악마는 인간을 그릇되게 한다. 그리고 인간의 지성이란 얼마나 나약한지 척추에 오한이 조금만 들어도 진리를 찾아내는 일을 포기하고 만다. (p80)
☞ 악마는 겸손같은 그럴듯한 포장을 사용하여 은총으로 나가지 못하게 만든다.
아버지는 자신뿐 아니라 우리한테도 종교의 의무가 있음을 확실히 깨닫게 되었다. 아버지는 종교를 거부한 적이 없었다. 그렇다고 우리에게 기도 같은 것을 가르쳐 준 일도 없었다. 아버지는 내게 그때 처음으로 하느님께 기도하라고 말했다. 아버지가 좋은 그림을 그리고 전시회가 성공하도록, 또 우리가 살 곳을 찾게 해주시도록 하느님께 부탁하라고 했다. (p91)
아버지는 우리가 가끔 만날 수 있었던 착한 가톨릭 신자를 존경했으나 그들은 아버지가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할 만큼 가톨릭에 대해 똑똑히 알지 못했고, 또 대체로 너무 부끄럼을 탔다. (p93)
☞ 우리 가톨릭 신자는 착하다는 소리는 듣지만 선교에는 너무나 소극적이다. 이는 내 성격에는 잘 맞지만 비복음적인 것이다.
자신의 의향과는 상관없이 무의식적으로라도 관상가가 되지 않을 수 없는 환경 속에서 산다는 것은 얼마나 큰 은혜인가! 진종일 거듭거듭 성체성사 안에 계신 그리스도의 집으로 눈을 돌리지 않을 수 없는 곳에 산다는 것은 얼마나 큰 특은인가! 나는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그분이 하느님이신 것조차도 몰랐다. 따라서 성체성사 같은 것이 존재한다는 것은 꿈에도 몰랐다. 나는 성당이란 다만 사람들이 모여서 성가를 두어 곡 부르는 곳인 줄로만 알았다. (p99)
그리스도께서 우리 가운데 사시고, 우리에 의해, 우리를 위해, 우리와 함께 깨끗하고 영원한 제물로 제헌되시는 것이 바로 이 성체성사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이 세상을 보존하시고 우리가 영원한 파멸의 구렁텅이로 곤두박질치지 않도록 잡고 계신다. 따라서 성체성사에는 힘이 있다. 빛과 진리의 힘, 곧 그리스도에 대해 들어본 적도 없고 겉보기에 믿음이 불가능한 사람의 마음속까지 파고 들어가는 힘이 성사에서 나온다. (p100)
몇만 몇천에 이르는 세계 가톨릭 신자들은, 하느님 뜻을 무시할 뿐 아니라 자연적 이성과 분별력도 상실한 채 자기 자녀들을 하이에나의 문화 척도에 따라 성장하도록 방치하면서, 하느님께서 평화를 갈구하는 자신들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는다고 울고불고 불평하는 더할 나위 없이 뻔뻔스러운 짓을 감행하고 있다. (p126)
☞ 얼마나 이율배반적인 신앙인가?
“최상의 것의 부패는 최악이다.”라는 라틴어 격언이 있다. 무릇 악이란 선의 결핍이다. 곧 응당 있어야 할 선이 없는 것이 악이다. 따라서 최상의 선이 부패된 곳에 최대의 악이 발견되는 것이다. (p127)
☞ 사탄은 대천사 루시펠이 부패한 것이었다. 종교인이면서 선이 없다면 그것이 악이다. 종교 없는 사람보다 더 기준이 엄격한 것이다. 마땅히 있어야할 것이 없다면 그것은 위선이다.
성모님은 큰 권능을 지닌 여왕으로서, 넘치는 선과 자비를 지닌 우리의 어머니로서, 하느님 앞에 있는 우리의 유력한 중재자로서, 거룩하고 은총이 가득하신 하느님의 어머니로서 응당 사랑과 존경을 받아야 마땅하다. 성모님은, 영혼 안에 하느님의 모상을 지니고 이 세상에 태어나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사랑하지만, 이 세상의 어리석음과 무분별은 성모님의 그 강력한 사랑을 알지 못하고 있다. (p135)
그들의 일상은 완전히 초자연적으로 영위되고 있었다. 그들은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미미함, 흔한 기술과 평범한 일, 일상생활로 성화되었다. 그러한 것들에 초자연적 가치가 부여되는 까닭은, 그들의 영혼이 깊은 믿음과 애덕으로 하느님과 항상 일치함으로써 ‘내적 은총’으로 충만하기 때문이었다. 이 착한 사람이 전심전력을 쏟는 것이라고는 그들의 농장·가족·교회가 전부였다. (p137)
☞ 평범함과 하느님과의 만남…성화는 꼭 크고 특별한 일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일상도를 살아갈 때 우리는 성화될 수가 있다.
그들이 내게 신앙이 없는 것을 그렇게도 진정으로 걱정해 준 데 대해 하느님께 감사드린다. 이 훌륭한 두 분들한테서 내가 얼마나 큰 은혜를 입었는지 누가 알랴! 내가 말하는 것은 무엇이나 추측일 뿐이지만, 그들의 애덕을 아는 나로서는 내가 이렇게 은총(궁극적으로는 개종과 수도 성소의 은총)을 입게 된 것은 바로 그들의 기도 덕분이라고 확신한다. (p142)
☞ 그들은 머튼이 머무른 오베르뉴에서 만난 프리바씨 부부를 말한다. 이웃을 향한 그들의 기도는 큰 열매를 맺었다.
나는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이 산처럼 밀려와 엉엉 울어버렸다. 눈물이 한없이 흘러나왔다.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나는 담요에 얼굴을 묻고 울었다. 불쌍한 아버지도 함께 울었다. 다른 사람들은 곁에 조용히 서 있을 뿐이었다. 뼈를 쪼개는 아픔이었다. 우리는 완전히 속수무책이었다.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p187)
☞ 사랑하던 아버지가 뇌종양에 걸려 병원에 입원을 하게 된다. 어머니를 일찍 여윈 머튼은 화가인 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진실로 많은 이가 너무나 늦게까지 깨닫지 못하는 진리가 있다. 그것은 피하려고 애쓸수록 더 큰 고통을 당한다는 진리다. 상처입을 것을 두려워하는 만큼 더 작고 사소한 것에서조차 괴로움을 당하게 마련이다. 고통을 피하려고 바둥거리는 사람이 결국 가장 심한 고통을 당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고통은 지극히 사소하고 보잘것없는 것에서 오는 까닭에 그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나만의 것이 되어버린다. 자신의 존재자체가 바로 자기 고통의 주체요 원천이다. (p188)
☞ 고통을 피하기보다는 직면해야 한다. 내가 존재하는 한 피한다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루는 병실에 들어가 보았더니 아버지가 그림을 그린 푸른색 노트의 작은 종잇장들이 침대 위에 널려 있었다. 그 그림은 전에 그가 그렸던 여느 그림과는 달랐다. 수염과 후광이 있는 키가 작고 엄격한 얼굴을 한 비잔틴풍의 성인들 그림이었다. … 병실에 갇혀서 부분적으로는 감관 기능을 잃었음에도 본질적으로는 조금도 손상되지 않고 장애 받지 않은 아버지의 지성과 의지는 아버지 안에 계시면서 고통의 뜻을 깨닫고, 그 고통이 선이 되도록 이끌어 영혼을 완성시킬 빛을 아버지에게 주시는 하느님께 나아가 마주보고 이야기하고 있었음을 나는 의심치 않는다. (p189-190)
아버지의 영혼은 자연적 애덕이 충만한 위대한 영혼이었다. 아버지는 예외적인 지성과 정직과 성실, 그리고 순결한 이해력을 지닌 사람이었다. 고통과 가공할 무서운 병이 그를 무덤의 문턱 안으로 무자비하게 밀어 넣고 있었지만 그를 파괴하지는 못했다. (p190)
영혼은 운동가와 같아서 한껏 힘을 발휘하여 싸우고는 거기에 따르는 상을 받기 위해 상대가 되는 적수가 필요하다. 아버지는 그런 의미에서 종양과 싸우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중 어느 누구도 그 싸움을 이해하지 못했다. 우리는 아버지가 폐인이 되었다고 불쌍히 여겼으나 바로 이것이 그를 위대하게 만들고 있었다. 하느님은 아버지에게 줄 상을 미리 준비해 둔 것 같았다. … 그는 구원받을 만한 자격이 있었다. 그의 투쟁은 하나도 헛된 것이 아니라 상을 받을 만한 진짜 투쟁이었다. (p190)
☞ 어쩌면 병고는 하느님께 나아가는 마지막 투쟁의 장(場)인지 모른다. 우리가 어떻게 싸우느냐에 따라 하느님은 상은 마련해 주실 것이다
슬픈 이야기는 여기서 다 끝났다. 나는 정신이 멍했다.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었다. 아버지는 훌륭한 정신뿐 아니라 뛰어난 재능과 관대한 마음을 지닌 사람이었다. 더구나 나를 세상에 태어나게 해주고 키워주고 내 영혼 세계도 다듬어 주었다. 그분이야말로 내가 지금까지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고 존경하던 분이요, 나와 가장 깊은 인연으로 맺어진 내 육친이었다. 그런데 뇌종양이라는 무서운 병으로 이제는 알지 못할 세계로 가버린 것이다. (p192)
좀 어두워 보이는 방은 매우 고요했다. 아프다는 것이 짜증스럽게 느껴졌다. 그때 뜻하지 않은 방문객의 그림자가 들어서는 것을 느꼈다. 죽음이었다. 그것은 내 침대 머리맡에 와 있었다. 나는 탈진하여 눈을 뜰 기력조차 없었다. 방문객을 보려고, 죽음을 보려고 눈을 뜰 필요도 없었다. 죽음은 마음의 눈으로도 뚜렷이 볼 수 있다. 그 죽음은 빛에 반사되어 보이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골수 안에서 일어나는 오싹하는 느낌으로 보는 것이다. (p218)
나는 반쯤 잠들어 몽롱한 상태에서 내면의 눈으로 죽음을 바라보았다. 그때 나는 무슨 생각을 했던가? 별생각이 없었던 것 같다. 그저 헤어날 수 없게 기진맥진하여 축 늘어져 있었을 뿐이다. 어찌나 심하게 아프고 짜증스러웠던지 사느냐 죽느냐에 대해서도 마음이 쓰이지 않았다. 그러나 죽음이 바짝 다가왔었더라면, 내가 차갑게 죽어가고 있음을 바라보게 했었더라면 얼마나 두려워하면서 떨었을까? (p218-219)
만일 그때 나를 위해 준비된 그 암흑의 문이 크게 열려 나를 영원한 잠 속으로 삼켰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날인지 그 다음 날 밤인지, 또는 한 주일 후인지 확실히는 모르지만 아무튼 내가 다시 깨어났다는 것은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은혜였다. (p219)
☞ 누구나 한 번쯤은 죽음에 가까이 다가간 경험이 있을 것이다.
내가 기억하는 한 하느님 생각이나 기도 같은 것은 내 마음에 조금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날도, 내가 병을 앓는 동안에도, 그해 내내도 마찬가지였다. 혹시 그런 생각이 떠올랐다 해도 그것을 부정하고 거부할 뿐이었다. 내 기억에 그해에 학교 예배시간에 사도신경을 바칠 때면, 나는 으레 ‘나는 아무것도 믿지 않는다.’는 나 자신의 신조를 선언하기 위해 고의로 입술을 굳게 다물곤 했다. (p220)
☞ 철저한 무신론자로서의 머튼의 모습이다.
그때 내 영혼은 죽어 있었다. 백지요 무(無)였다. 초자연적 면에 관한 한 내 영혼은 텅 비어있는, 이를테면 영적 진공상태였다. (p221)
이 세상에서 인간에게 일어날 수 있는 가장 나쁜 일은 현실감각을 상실하는 것이다. 나에게 일어났던 가장 나쁜 일은 죽음이 위협하는 자리에서조차 지독한 냉담과 무관심으로 내 죄를 끝까지 완결지었다는 것이다. (p222)
나는 이제 성당들을 단순히 예술적 안목만 가지고 방문하지는 않았다. 거기에는 나를 매혹시킨 다른 것, 곧 일종의 내적 평화가 있었다. 나는 이들 거룩한 장소에 있는 것이 좋았다. 나는 내가 거기에 속해있다는, 곧 나의 이성적 본성은 하느님의 성당에서만 충족될 수 있는 심원한 소망과 필요로 가득 차있다는 깊고 강력한 확신을 갖게 되었다. (p246)
☞ 머튼은 로마 여행길에서 성전을 순례하게 된다. 거기서 마음의 평화를 만난다.
때는 오게 되어 있었다. 내가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이 기이한 방법으로 그때는 갑자기 왔다. 나는 내 방에 있었다. 밤이었고 불이 켜져 있었다. 그때 갑자기 돌아가신지 1년이 넘은 아버지가 홀연히 내 곁에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 느낌이 어찌나 생생하던지 아버지가 내 팔을 툭 치고 말을 거는 것 같아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러나 이 놀람은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불이 깜빡였다. 그 순간 내 안에 어떤 변화가 일어난 것을 느꼈다. 찰나와 같은 바로 그때 나는 형용할 수 없는 강렬한 빛 속에서 비참하고 부패한 내 영혼의 깊은 곳까지 들여다볼 수 있었다. 몸이 부들부들 떨렸고 곧바로 그 비참함을 벗어나야 한다는 강력한 항거와 함께 해방과 자유에 대한 진지한 갈망이 생전 처음으로 힘차게 솟구쳐 올라왔다. (p247)
그때 나는 생전 처음으로 진정한 기도 곧 입술과 지성과 상상뿐이 아니고 생명과 존재의 밑바탕에서 우러나오는 기도, 어둠 속에서 숨어 계신 하느님께서 오시어 나의 의지를 속박하고 있는 이 많은 무서운 것에서 풀려나도록 도와주시기를 간청하는 기도를 바치기 시작했던 것이다. 기도와 함께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흘렀고 그 눈물은 나를 위로했다. 그러는 동안 내 방에 아버지가 있다는 생생한 느낌은 없어졌지만 나는 아버지를 내 마음에 모시고 아버지와 이야기했고 아버지를 중재자로 삼아 하느님께 말씀을 여쭙고 있었다. (p248)
☞ 하느님 체험은 중요하다. 강력한 체험은 믿음으로 이끈다.
나는 도미니코 회원들이 관리하는 성녀 사비나 성당으로 갔다. 무릎을 꿇고 하느님께 기도드리는 것 외에 다른 뜻이 없었다. 이것은 격투 끝의 항복 · 굴복 · 개종에 해당하는 결정적 체험이었다. (p250)
☞ 이제 무신론자 머튼은 죽고, 하느님께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은총의 기쁨과 자유에 참여하도록 창조되었으면서도 그것을 거부하는 사람들 안에서 거듭거듭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깨닫지 못하고 있다. (p266)
☞ 아마도 예수님은 최후의 불신자가 사라질 때까지 십자가에 매달려 있을 것이다.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 나로 하여금 당신의 사랑을 피하여 도망칠 수 있는 데까지 도망치도록 허용하면서 동시에 내가 당신한테서 가장 멀리 도망쳤다고 여기는 심연의 밑바닥에서 결국 당신과 마주치도록 마련하셨다는 의미에서만 은총이었다고 할 수 있다. “제가 하늘로 올라가도 거기에 당신 계시고 저승에 잠자리를 펴도 거기에 계십니다.”(시편 139,8)
☞ 이 시편 구절을 처음 대했을 때 충격을 잊을 수가 없다. 나에게 이 시편은 이렇게 다가 왔다. 내가 천국에 가도 하느님은 거기에 계시고 설령 지옥에 떨어진다고 해도 거기에 함께 계신다는 의미로 말이다. 나는 하느님 앞에 선 단독자라는 실존이 여기에 있었다.
자신의 불행을 깨닫는다고 해서 그것이 곧 구원은 아니다. 그것은 구원의 기회일 수도 있고 지옥의 더깊은 구렁으로 빠지는 문일 수도 있다. 그런데 나는 내가 깨달은 것 이상으로 더 깊이 빠져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적어도 내가 어디에 있는지 깨달았고 거기서 벗어나려고 애쓰기 시작했다. (p272)
하느님의 사랑인 섭리는 지극히 현명하여 인간이 자기 자신을 지배하려고 몰두하는 한 아무 간섭도 하지 않으시고 자신의 책략을 쓰도록 내버려 두신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느님의 도움 없는 자신들의 무력함이 얼마나 많은 경박함과 슬픔의 원인이 되는지를 스스로 깨닫게 하신다. (p272)
사람들은 우리가 그다지도 많은 전쟁을 치르고 있는 것은 어느 모로 보면 자비로운 하느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증거라고 여기는 듯하다. 그러나 이와는 정반대로 세기를 이은 죄와 탐욕과 색욕과 잔학과 증오와 인색과 압박과 불의가 인간의 자유의지에 의해 포태되고 양육되어 왔음에도, 인류가 번번이 회복되고, 악을 선으로, 증오를 사랑으로, 탐욕을 애덕으로, 색욕과 잔학을 성덕으로 극복하는 남녀를 여전히 낳고 있음을 생각해보라. 하느님의 자비로우신 사랑의 힘으로 우리에게 은총을 쏟아주시지 않는다면 이 모든 것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겠는가? (p281)
우리는 눈을 크게 뜨고 우리 죄가 이 세상에서 무엇을 하고 있고 무엇을 하였는지를 살펴보아야만 한다. 그런데 우리는 볼 수가 없다. 하느님의 예언자들이 했던 다음과 같은 말은 바로 우리를 두고 한 말씀이다. “듣고 또 들어도 알아듣지 못하고,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는구나.” (p282)
어떤 꽃이 피든지, 무슨 씨가 땅에 떨어지든지, 어떤 밀이삭이 바람에 고갯짓을 하든지, 이 세상 전체에 하느님의 위대하심과 자비를 설교하지 않는 것이 없고 선포하지 않는 것이 없다. 어느 친절한 행위거나, 어느 관대한 행위거나, 어느 희생의 행위거나, 어느 평화의 말이거나, 어느 어린이의 기도거나 하느님의 옥좌 앞에서, 인간들의 눈앞과 면전에서 하느님께 찬미의 노래를 불러드리지 않는 것이 없다. (p282)
☞ 우리의 모든 행위는 하느님께 봉헌하는 찬미의 노래다.
그는 질문을 함으로써 학생들 안에 있는 것을 끌어내는 기술을 갖고 있었다. 그의 강의는 글자 그대로 ‘교육’, 곧 학생들 안에 있는 것을 끌어내어 학생들의 정신이 스스로 명시적 이념을 산출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p303)
☞ 교리교사가 새겨들을 글이다. 진정한 교육은 지식을 주입하는 것이 아니라, 질문을 함으로써 그 답을 학생들로부터 끌어내는 것이다.
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인가! 자신을 채운답시고 한 일이 자신을 텅 비게 했으니 사물을 움켜잡는다는 것이 만사를 잃은 꼴이었다. 쾌락과 향락에 탐닉함으로써 실의와 번민과 공포만을 얻었다. (p351)
하느님은 인간에게 초자연적 생명력을 지향하는 본성을 부여하셨다. 하느님이 인간에게 주신 영혼은 그 자체의 수준에서는 완성될 수 없고, 오직 인간 능력을 무한히 초월한 수준의 하느님에 의해서만 완성되도록 조성된 것이다. 하느님의 계획안에 있는 인간이 순수한 자연 생명만을 이어가도록 운명 지워져 있지 않은 것처럼 순수한 자연적 행복만을 지향하도록 운명 지워져 있는 것도 아니다. 하느님이 거저 주신 은혜인 인간 본성은 또 하나의 거저 주시는 은혜, 곧 ‘성화 은총’에 따라 완성되어야 한다. (p357-358)
은총이란 무엇인가? 이는 인간이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는 것이다. 하느님의 생명은 사랑이다. 곧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은총에 의해 인간은 무한한 몰아의 사랑에 참여할 수 있다. … 자연 수준에 머물러 있는 한, 어떤 의미로는 이기적일 수밖에 없는 자연적 선행과 사랑의 능력은 ‘하느님의 사랑’이 그 안에서 빛날 때 변화한다. (p358-359)
모름지기 지성은 본성적으로 하느님에 대한 참다운 앎을 갈망한다. 인간은 하느님을 알아 뵙고 싶은 갈망을 지니고 태어났기 때문에 달리 어찌할 도리가 없다. (p368)
인간의 어떤 이념이나 이미지도 하느님을 올바로 표상할 수 없으므로 하느님에 대한 미숙한 지식에 만족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내게 크나큰 구원이었다. 그 결과 즉각 가톨릭 철학과 신앙에 대해 무한한 존경심을 품게 되었다. 내가 가톨릭 신앙에 존경심을 품게 되었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p369)
하느님은 각자의 구원을 위해 모두 서로 의존하고, 서로의 선과 공동 구원을 위해 함께 노력하기를 바라신다. (p375)
영혼의 생명은 지식이 아니라 사랑이다. 사랑은 의지, 곧 인간의 최상급 기능이 동원되는 행위요, 이 사랑으로 모든 노력의 최종 목표인 하느님과 정식으로 일치를 이루는 것이다. (p399-400)
☞ 영혼은 지식이 아니라 사랑으로 살아간다.
오늘날 덕행이라는 단어는 세상을 비꼬는 고등학생들이 철없이 빈정대며 입에 올리는 단어가 되었고, 극장에서는 음탕하고 야비한 풍자에 이용되고 있다. 곧 위선자와 무능한 이들이 얌전한 척 겉꾸미는 행위를 주로 뜻하게 되었다. (p425)
☞ 재물을 최대 목표로 삼는 오늘날은 말해 무엇할까? 덕행은 시대에 뒤떨어지는 사람의 바보같은 짓으로 여기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덕행 없이는 행복이 있을 수 없다. 덕행은 행복을 획득할 수 있는 힘이기 때문이다. 덕행 없이는 기쁨이 있을 수 없다. 덕행은 인간의 자연적 정력을 조정하고 조절하여 조화와 완성과 평형을 지향케 하며 마침내 인간 본성이 하느님과 일치하여 영원한 평화를 얻도록 하는 습성인 까닭이다. (p426)
나는 그날의 느낌을 앞으로도 쉽사리 잊지 못할 것이다. 그 충동은 “미사에 가라! 미사에 가라!”고 내 안에서 보채는 감미롭고도 강하며 부드럽고도 맑은 충동이었다. 나를 독촉하는 이 목소리, 곧 내가 할 일이 무엇이라는 것을 확고하게 일러주는 내적 확신은 정말 신기한 것이었다. 극히 감미롭고도 단순하여 쉽게 표현할 수가 없었다. 내가 굴복했을 때, 그 충동은 신이 나서 나를 밀어붙이거나 맹렬하게 덤비지도 않았다. 다만 차분하게 목적이 뚜렷한 방향으로 나를 몰고 갔을 뿐이다. (p430-431)
그때 내 눈에 띈 것은 열대여섯 살가량 된 예쁜 소녀가 무릎을 꿇은 채 몸을 꼿꼿이 세우고 진지하고 조용하게 기도드리는 모습이었다. 나는 이때 처음으로 젊고도 아름다운 사람이 성당에 가는 진정한 목적은 오로지 기도를 바치기 위함이라는 것을 목격하고 아주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 소녀는 남에게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진정으로 기도하려고 무릎을 꿇고 있는 것 같았다. 비록 성인의 깊은 명상은 아닐지언정 그곳에 있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은 전혀 염두에 두지 않고 있다는 것이 여실히 드러나는 진지한 모습이었다. 그 많은 보통 사람이 한자리에 모여 있으면서 이웃사람보다 하느님을 더 의식하고 있음을 발견하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계시였던가? (p433)
어느 누구도 자기가 원한다고 해서 믿을 수는 없다. 은총을 받지 않는 한, 하느님으로부터 지성과 의지를 움직이는 빛을 받지 않는 한, 산 신앙의 행위를 할 수가 없다. 우리에게 신앙을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시다. 그러기에 성부께서 인도해 주시지 않으면 아무도 그리스도께 다가가지 못한다. (p437)
영혼에게 은총이 부여되지 않는 이유 중 하나는 탐욕과 잔인함과 이기심으로 완고해진 의지가 은총을 거부하는 경우에 더욱 완고하게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p438)
'너는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가?‘ 내 안의 목소리가 다시 말했다. ’왜 멍청히 앉아 있는가? 더 이상 주저할 필요가 없다. 왜 벌떡 일어나서 행동하지 않는가?‘ 나는 벌떡 일어나 안절부절못하면서 방 안을 서성거렸다. 그것은 허무맹랑한 소리다. 어쨌든 피하고 싶었다. (p449)
갑자기 나는 참을 수가 없었다. 책을 내려놓고 우비를 입고 계단을 내려가 거리로 나섰다. 가랑비를 맞으며 길을 건너 브로드웨이를 향해 우중충한 나무 울타리를 끼고 걸었다. 그러자 내 안에 있는 모든 것이 평화와 확신의 노래를 힘차게 부르기 시작했다. (p450)
"신부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네, 집으로 들어갑시다.“ 이렇게 대답한 신부는 나를 쳐다보더니 좀 놀라는 기색이었다. 우리는 문 옆에 있는 조그마한 응접실에 앉았다. ”신부님, 가톨릭 신자가 되고 싶습니다.“ (p450-451)
☞ 마침내 긴 방황은 끝이 나고 머튼은 신앙의 길로 들어선다.
교리교육은 세상에서 가장 엄청난 일로 하느님의 말씀을 영혼에 심는 일이다. (p452)
☞ 교리교사가 된다는 것은 그 엄청난 일의 도구가 되는 것이다.
나는 싫증을 내지 않았다. 나를 그다지도 강력히 얽매었던 취미나 오락을 희생하면서까지 교리시간에는 단 한 번도 빠지지 않았다. 갑작스럽게 결심을 세우기까지 질질 끌어온 것이 마음에 꺼리는 만큼 모든 것을 빨리 해치우고 싶었다. 세례를 받고 싶은 욕망이 간절해서 언제쯤 교회에 받아들여질까 하는 것이 늘 궁금했다. (p452)
어느 누구도 지옥에 가라고 강박 당하지는 않는다. 지옥은 스스로 하느님 뜻을 거스르는 편을 선택함으로써 가게 되는 것이다. 하느님의 섭리와 은총에 반항하고 거부함으로써 지옥에 갈 수 있다. 따라서 지옥에 가는 것은 하느님 뜻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뜻이다. … 그 결정은 하느님이 전적으로 그들 자신의 선택에 맡기신다. (p453)
우리는 나약함 때문에 전전긍긍하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그것은 우리의 힘의 원천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리스도의 힘이 나에게 머무를 수 있도록 기쁘게 나의 약점을 자랑하렵니다.”(2코린 12,9) 하느님의 권능은 우리 약점 안에서 더욱 드러나며 우리가 무력하다는 사실 때문에 가난한 자, 작은 자, 무거운 짐 자를 당신께 부르시는 하느님의 자비가 더욱 요청되는 것이다. (p453)
☞ 강한 사람은 하느님을 찾지 않을 수도 있다. 자신의 강함으로 인한 교만 때문에. 그런 면에서 약함은 은총이다.
시간이 점점 흐르면서 내 마음 깊은 곳에서는 또 하나의 소망이 싹텄다. 사제가 되고 싶다는 막연한 소망이었다. (p454)
나는 죽음의 노예 처지에서 해방되기 며칠 전에야 겨우 나 자신의 나약함과 무력함을 느끼는 은총을 받았다. 이 은총의 빛은 그렇게 환한 것은 아니었지만 나는 드디어 내가 얼마나 가난하고 비참한 존재인가를 진정으로 깨달았다. (p460)
☞ 세상에서의 나약함과 무력함이 은총이었다는 이 신비.
나는 죄의 종류대로 하나씩 하나씩 정성을 기울여 모든 죄를 마치 이빨을 뽑듯이 뿌리째 뽑아냈다. 그중 어떤 것은 뽑기가 힘들었으나 재빨리 뽑아내었고 그러한 죄를 몇 차례나 지었는지 최선을 다해 고백했다. (p465)
내가 모실 첫 성체가 나를 향하여 계단을 내려섰다. 제대 난간에는 나뿐이었다. 천국이 온통 내 것이었다. 아무리 여러 사람이 참여해도 감소되거나 구분되지 않는 천국이 몽땅 내 것이었다. (p466)
그렇게 오랫동안 지옥의 경계를 헤매다가 간신히 신념과 개종의 투쟁을 거쳐 드디어 세례의 무량한 은총을 받았음에도 나는 강하고 열성스럽고 관대한 가톨릭 신자가 되기는커녕 여전히 반쯤 동물적인 생활을 계속하고, 영혼에 은총의 숨결을 간직하려는 투쟁은 거의 하지 않는 미온적이고 투미하며 게으르고 무관심한 냉담자 대열로 떨어지고 말았다. (p475)
☞ 영적으로 투쟁하지 않는 영혼은 냉담으로 굴러 떨어지는 것같다. 머튼도 마찬가지였듯.
내 영적 생활 첫해에 또 한 가지 큰 결함은 하느님의 모친에 대한 신심이 없었다는 것이다. 나는 교회에서 성모에 관하여 가르치는 교리를 믿었고 기도할 때면 성모송도 외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넉넉지 않았다. (p476)
☞ 나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는데, 개종을 한 사람들이 통상 겪는 과정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성모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모르기 때문에 복되신 동정녀의 엄청난 힘을 깨닫지 못한다. 하느님께서 성모님이 인류 구원사업에 참여하기를 원하셨기 때문에 모든 은총이 성모님의 손을 통해서 온다는 것을 사람들은 모르고 있다. (p476)
하느님 모친의 사랑없이, 뚜렷하고 드높은 영적 목표 없이, 영적 지도 없이, 매일 영성체 없이, 그리고 기도 생활도 없이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었겠는가? 내게 무엇보다도 가장 필요했던 것은 초자연적 생명을 의식하고 아울러 내 욕정과 광적인 본성을 정화시켜 나가는 일이었다. (p477)
나는 그리스도인 생활을 단순히 은총이라는 초자연적 옷을 입힌 자연적 삶에 불과한 것처럼 착각하고 교회로 들어가는 무서운 과오를 범했다. 이전에 살던 대로 계속 살고, 이전에 하던 대로 생각하고 행동하되 다만 대죄를 피하기만 하면 다 되는 줄 알았다. (p477)
☞ 생활 자체를 변화하려는 노력을 해야한다. 이전의 삶이 육적인 삶이었다면 이후의 삶은 영성적인 삶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인간이 하느님의 뜻보다 자신의 의지를 우선하게 되는 한 그는 하느님을 미워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하느님의 계명을 위반함으로써 하느님을 미워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은 우리의 생명이시고, 그분의 뜻이 우리의 음식이고 고기이며 우리 생명의 빵이다. 우리 생명을 미워하는 것은 죽음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p478-479)
☞ 하느님을 미워하는 것은 영원한 생명을 거부하는 길이다.
사람들은 한 사람의 성인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전혀 모른다. 성덕은 지옥 전체보다 강하다. 성인들은 만능의 왕권과 신권을 지닌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다. 성인들은 그것을 의식하고 그들 자신을 그리스도께 바친다. 그리하여 보잘것없고 무가치해 보이는 성인들의 행위를 통해서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의 구원을 위한 권능을 행사하실 수 있는 것이다. (p484-485)
내가 행한 모든 것이 하느님이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한 것이었고, 하느님의 도우심이 아니라 나 자신의 지혜와 재능에 의지한 것이었으니 어떻게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었겠는가? (p490)
내 영혼에 관한 또 하나 잊을 수 없는 사건은, 그해 봄 어느 밤에 랙스와 내가 6번로를 산책하던 때 일어났다. … 그때 우리가 걸으면서 무엇에 관해서 토론하였는지 잊어버렸지만 이야기 끝에 랙스가 느닷없이 나를 향해 돌아서면서 물었다.
“좌우간 자넨 무엇이 되겠단 건가?”
“모르겠는걸, 글쎄, 훌륭한 가톨릭 신자가 되고 싶다고 해두지.”
"훌륭한 가톨릭 신자가 되겠다는 건 무슨 뜻인가?“
뜻밖의 질문에 대한 내 대답은 서툴기 짝이 없었고 나의 혼란뿐 아니라 심사숙고해서 대답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여지없이 폭로되고 말았다. 랙스는 내 대답을 용인하지 않았다.
“자네는 성인이 되고 싶다고 말했어야 해.”
성인이라니! 나는 딴 세상 얘기 같은 충격을 받았다.
“내가 어떻게 성인이 된다는 건가?”
나는 다시 강조했다.
“난 성인이 될 수 없단 말이야!”
랙스가 다시 말했다.
“성인이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오직 성인이 되기를 바라는 것뿐이야. 자네가 하느님께 동의만 한다면, 하느님께서는 자네를 창조했을 때 바라셨던 그 모습으로 만드신다는 것을 자네는 믿지 않나? 자네가 해야할 일은 그것을 바라는 것뿐이야.” (p493-494)
☞ 삶의 목표는 ‘성인이 되는 것’이어야 한다. 바라야 이루어질 수 있는 것. 성인이 되는 것은 신앙인의 목표며 의무다.
무엇이든지 구원에 유익하지 않은 것을 청하는 경우에는 구세주의 이름으로 청하는 것이 아니다. (p513)
☞ 구원에 유익하지 않는 것을 청한다는 것은 구세주의 이름으로 청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이름으로 청하는 것이다.
나는 성광을, 그 속의 성체를 보았다. 그때 돌연히 나의 전 생애가 위기에 처해 있음을 분명히 의식했다. 상상할 수도, 이해할 수도, 생각할 수도 없었던 것이 단 한 마디, 나의 결심에 달려 있었다. 나는 이제까지 내 삶을 이 방향으로 지향하지 않았었다. 내 정신 안에는 그런 기미도 전혀 없었다. 그러므로 내 정신 안에서가 아니라 영원한 섭리의 무한한 심연 안에서 준비되어 온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뜻밖에 이 성당으로 내가 불려 들어왔다는 사실에는 존엄성마저 깃들어 있었다. (p527-528)
새 땅, 약속된 땅, 내가 살기를 고집하였던 이집트와 같지 않은 땅으로 가는 길이 이제 다시 열리고 있었다. 그 길은 오직 한순간만 열려 있다는 것을 나는 본능적으로 의식했다. (p528)
‘너는 정말 사제가 되기를 원하는가? 원한다면 그렇다고 말하라….’ 성가가 끝나고 있었다. 사제는 어깨보 끝자락을 손에 덮고 성광 아랫부분을 잡고 천천히 제대에서 들어올려 신자들을 향해 강복했다. 나는 성체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리고 내가 바라보는 그분이 누구이신지 알고 말했다.
“네, 저는 사제가 되기를 원합니다. 진심으로 원합니다. 당신 뜻이라면 저를 사제로 만드소서… . 저를 사제로 만드소서.” (p529)
영신수련의 묵상을 통해 나는, 하느님의 사랑 때문에 창조된 우리가 하느님의 뜻보다 자신의 뜻과 만족을 우선하는 것은 부조리요 악이라는 것을 더욱 깊이 확신하게 되었다. (p556)
성체축성 때가 되었다. 사제가 성체를 거양한 다음 성작을 거양했다. 갈색 수도복에 흰 띠를 맨 프란치스코회 수사가 어린이들 앞에 우뚝 일어섰다. 그러자 어린이들의 맑은 목소리가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전능하신 천주 성부, 천지의 창조주를 믿나이다… .”
갑작스러운 우렁찬 승리의 고함소리, 쿠바 어린이들이 목청껏 외치는 환희의 신앙고백이었다. 그러자 방금 제대에서 성체축성 때 이루어진 일이 무엇인지를, 곧 성체축성의 말마디로써 하느님이 여기 현존하시어 내게 속하게 되었다는 것을 그 외침처럼 갑자기 정확하게, 그리고 더할 수 없이 또렷하게 이해했다. (p582-583)
이 자각은 무엇인가? 그것은 보이지 않는 것인데도 나는 거기서 청천벽력 같은 충격을 받았다. 그것은 볼수 있는 그 어떤 빛과도 무관한 밝은 빛이었고, 일체의 체험을 무색하게 만드는 심원하고도 내밀한 빛이었다. 무엇보다 가장 큰 충격을 받은 것은 이 빛이 어떤 의미로는 ‘보통’ 빛이었다는 점이다. 숨조차 쉴 수 없게 만들었던 이 빛이 환상적이거나 이상한 점이 전혀 없는 누구한테나 제공되는 빛이었다는 점이다. 이것이야말로 한순간에 극도로 명백하게 된 신앙의 빛이었다.
마치 내가 하느님의 현존을 목격하여 갑자기 그 눈부신 빛 속에 서 있는 느낌이었다. (p583)
☞ 사도 바오로와 같은 하느님 현존체험이었을 것이다.
내 머리에 떠오는 첫 번째 분명한 생각은 ‘천국이 바로 여기로구나.’하는 것이었다. 오직 한순간의 일이었지만 그 놀라운 환희와 깨끗한 평화와 행복이 몇 시간이나 계속되었기 때문에 나는 잊을 수가 없다. (p584)
나는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길로 인도되어야 했고, 내 선택을 초월한 길을 따라야 했다. 하느님은 나의 자연적 취향이나 취미나 선택이 옛 습관과 궤도를 완전히 벗어나서 그분의 작업에 따라 곧바로 그분께 가기되기까지 내 취미나 선택을 원치 않으셨다. 나의 자연적 선택, 신분 선택의 취향은 전혀 믿을 것이 못되었다. (p596)
나는 착한 수도자가 되고 수도회의 의무를 다하고 사는 것이 당치도 않게 거의 전적으로 내 능력과 힘에만 달려 있는 줄로 여겼다. 하느님은 이것을 바라지 않으신다. 하느님은 우리가 그분에 대한 호의로 세상을 떠나기로 바라지 않으신다. (p597)
☞ 전적으로 주도권을 하느님께 맡겨드려야 하는 것이다.
하느님은 인간을, 수도자뿐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을 ‘세상의 소금’이 되도록 부르신다. 그러므로 성 아우구스티노의 말대로 소금의 맛은 초자연적 생명이므로 만일 우리가 하느님께 의존하기를 중지하고, 세속적 사물을 차지하고 싶은 욕망이나, 또는 이를 상실할까 봐 두려워하는 공포에 따라 살아간다면 소금의 맛을 잃게 된다. “그러므로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마라. 이런 것들은 모두 다른 민족들이 애써 찾는 것이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마태 6,31-32)
☞ 세상의 소금으로 산다는 것은 하느님께 전적으로 의존하고 사는 것이다
하느님은 흔히 성경을 통해 곧바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그분은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그 구절에 도움의 은총을 가득 심으신다. 그래서 우리가 기도하는 마음으로 성경을 주의깊게 읽다 보면 그때까지 알 수 없었던 뜻이 불시에 마음에 심어진다. (p601)
성인들은 자기 죄악이 회상될 경우, 그 죄악을 기억하지 않고 하느님의 자비를 기억한다. 따라서 과거에 범한 죄악까지 현재 기쁨의 원인으로 변하고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데 이바지한다. (p605)
나는 완전히 산산조각이 났다. 걷잡을 수 없는 눈물이 얼굴을 가린 두 손바닥 사이로 줄줄 흘러 내렸다. 그 상태로 나는 제대 위에 걸려있는 커다란 석조 십자가와 성체 앞에 기도했다. 그때 나 자신의 비참 외에 내가 알고 있는 유일한 것은 앞으로는 수도 성소에 대해 생각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뿐이었다. (p611)
☞ 머튼은 수도자가 되기 위하여 프란치스코회에 지원을 하지만 수도회에 완전히 말하지 않는 자신의 과거에 직면하게 된다. 그는 이후 모든 것을 말했고, 입회를 제고해 달라는 편지를 보낸다. 하지만 수도자가 되려던 그의 꿈은 프란치스코 수도회에 보낸 청원서가 취소되었다는 통보와 함께 산산이 부서졌다. 자신의 과거가 무엇인지 이 책은 자세히 밝히지 않지만, 몇 년후 그 이야기가 무엇인지 밝혀졌다. 케임브린지 클레어 칼리지에 다닐 때 느꼈던 성적 충동으로 머튼은 한 여인과 관계를 맺었고 그의 아이가 생긴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 미혼모와 아이를 버렸고 연락이 끊어져 버렸다.
성무일도, 이 네 권의 책은 나의 결심을 표상했다. 내가 비록 수도원에서 살지 못하고 세속에서 살더라도 수도자처럼 살려고 노력하겠다는 결심이었다. 나에게 허용되지 않은 그 삶에 가능한 한 접근하겠다는 뜻이기도 했다. 비록 내가 수도복을 입을 수 없더라도 최소한 제3회에 가입하여 교내 성당이 있는 가톨릭 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살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려고 마음을 먹고 있었다. (p614)
앞으로는 나에게 독을 먹이려는 삶과 타협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이런 것들에 등을 돌려야 한다. 하느님은 내가 수도회에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지만 수도자 비슷하게 사는 성소는 허락하실 것이다. 비록 내가 수도자가 못 되고 사제가 될 수 없더라도 그것은 하느님의 일이다. 그러면서도 하느님은 여전히 내가 사제나 수도자와 비슷하게 살기를 바라실 것이다. (p614-615)
☞ 세상 속에서 수도자의 정신으로 살아가는 길이 3회의 길이다.
성무일도서를 산 것은 내 평생 가장 잘한 일이었다. 성무일도서를 사야겠다고 생각했다는 것 자체가 큰 은총이었다. 내 기억에 이보다 더 큰 기쁨을 안겨준 일은 별로 없는 것 같다. (p617)
세계 도처에서 봉헌되는 생명을 주는 이 기도, 곧 인간을 통해 성부께 드리는 그리스도의 기도의 심원한 분위기에 젖어들게 된 나는 마침내 다시 살아났고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진심으로 외치지 않을 수 없었다.
“살아있는 한 주님께 노래를 부르리라. 내가 존재하는 한 나의 하느님을 찬미하리라. 나의 말마디가 주님께 이르게 되기를, 나는 주님 안에서 기쁨을 누리리라.” (P620)
나는 세상 사람들이 위안과 오락에 필요하다고 여기는 온갖 습관과 사치에서 벗어나려고 애썼다. 내 입에서는 마침내 샛노랗게 찌든 니코틴 냄새가 말끔히 가셨고, 영화의 뿌연 흙탕물에서 눈도 깨끗이 헹구어졌다. 이제 내 취향과 시야는 깨끗해졌다. 내 마음을 더럽힌 책들도 내던져 버렸고, 내 귀도 광포한 소음에서 씻기면서 깊은 평온 속에 파묻혔다. (P624)
인내롭게 기다리는 것 외에는 대안이 없었고, 내 안에서 상충하는, 맷돌의 윗돌과 아랫돌 같은 두 법의 틈새에서 나 자신을 부서지게 해야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이것이야말로 하느님이 기뻐하시는 공로가 충만한 순교임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아직도 이것을 잔인함 시련으로 느꼈고, 헤어날 수 없는 굴욕으로 느끼고 있었다. (P625)
이 비참하고 소란하고 잔인한 지상에서 이 세상의 소식이나 욕망이나 갈등이 미치지 못하는 첩첩산중에 격리되어 수도원 독방에서 침묵과 고독의 경이로운 기쁨을 누리며 사는 사람들이 있다니, 그곳은 얼마나 행복할까! (p645-646)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 숨어서 ‘하느님의 가난한 형제들’이 되었다. 그리고 하느님의 사랑 하나를 위해 모든 것을 내팽개치고 하느님 면전의 비밀 속으로 슴어들었다. 그러나 은총이 그들 마음에서 피조물에 대한 욕망을 비우는 만큼 하느님의 성령이 들어와 하느님을 위해 마련된 자리를 채우는 까닭에, 그들은 아무것도 갖지 않았지만 모든 것을 소유하는 최고의 부자들이다. (p647)
그들은 받고 하느님은 주신다는 대립감이 전혀 없다. 하느님과 그들 사이의 간격이 없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그들은 하느님 속에 있다. 그들은 무(無)가 되어 그 순수하고 철저한 겸손에 의해 하느님으로 변모해 버렸다. (p648)
깨끗한 마음에 넘쳐흐르는 그리스도의 사랑 덕분에 그들은 어린이가 되고 영원한 사람이 된다. 팔과 다리가 나무뿌리처럼 쭈글쭈글한 늙은이들이 어린이 눈을 지니고 회색 양털 두건 속에 파묻혀 영원히 살고 있다. 젊거나 늙거나 그들 모두 나이가 없는 하느님의 작은 형제들, 하늘나라를 차지할 어린이들이다. (p648)
그들은 한밤중에도 일어나서 암흑을 헤치며 하느님께 탄원기도를 드린다. 그런즉 그들 기도의 힘(그들의 기도소리 속에 힘을 감추고 계시는 그리스도의 성령)이 탐욕과 허욕과 살인과 색욕과 온갖 죄로 가득 찬 더러운 세상을 내리치시려는 하느님의 팔을 놀랍게도 꽉 붙들고 있는 것이다. (p649)
"여기서 살려고 왔습니까?“
수사가 물었다. 이 질문이 나를 전율케 했다. 마치 내 양심의 소리처럼 들렸다.
“천만에요, 아닙니다.” (p655)
거룩하고 평화로운 밤의 깊고 깊은 적막이 나를 애무하듯 안온하게 감쌌다. 침묵의 포옹! 나는 아무도 침입할 수 없는 고독 속으로 들어온 것을 느꼈다. 그때 나를 감싸는 침묵이 어느 목소리보다 더 강하고 더 힘 있게 말을 건넸다. 그리고 고요하고 말쑥한 방 안의 열린 창으로 따스한 밤공기와 함께 말고 평화로운 달빛이 듬뿍 쏟아져 들어올 때, 나는 비로소 이 집이 참으로 누구의 집인가를 깨달았다. (p656)
“‘사랑’이 무엇인지 아느냐? 모든 것을 네 중심으로 끌어당긴 너는 결코 ‘사랑’의 의미를 알지 못했다. 여기 희생의 피로 가득 찬 성작 안에 ‘사랑’이 있다.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의 영광을 위해 죽는 것임을 너는 모르느냐? 그렇다면 네 사랑은 어디 있느냐? 너는 ‘나’를 따르기를 원한다고 말하지만, 너는 ‘나’를 사랑하는 시늉을 하지만 네 ‘십자가’는 어디 있느냐?” (p662)
☞ 사랑하는 이를 위하여 죽는 것, 이것이 사랑이다.
"이 수도자들은 ‘나’를 위해 죽고 있다. 이 수도자들은 ‘나’를 위해, 너를 위해, 이 세상을 위해, ‘나’를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현세에서는 결코 알지 못할 몇 억만 명을 위해 스스로를 죽이고 있다.“ (p662)
☞ 지금 이 시간에도 전 세계에 퍼져있는 수도자들은 이 세상을 위하여 죽고 있는 것이다.
이 교중미사 전례는 어마어마한 웅변으로써 단순하고 설득력 있는 한 가지 진리를 가르쳐 주었다. 바로 하늘의 모후의 궁전인 이 성당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나라의 진정한 중심이라는 진리였다. 여기가 미국의 모든 생명력의 핵심이요, 미국이 뭉칠 수 있는 원인이요 이유다. 각자의 이름을 감추고 두건 달린 백색 수도복을 입고 가대석에 서있는 수도자들이 이 나라를 위해 어떠한 군대나 의회도, 심지어는 대통령도 할 수 없는 일을 하고 있다. 이 수도자들이 이 나라를 위해 하느님의 은총과 보호와 우정을 벌어들이고 있다. (p663-664)
수도자들은 세속을 떠나 숨어버림으로써 자신의 인격을 잃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완전한 인격체가 되는 것이다. 온갖 완덕의 원천이신 하느님과 일치함으로써 그들의 인격과 개성이 진정한 영적 질서에서 완성되는 것이다. (p674)
세속적 성공 논리는 이상한 허위에 바탕을 두고 있다. 각자의 완성 여부가 다른 사람의 평가나 견해나 칭송에 달려 있다. (p674)
새 성인의 발견은 엄청난 체험이다. … 성인들은 우리의 친구가 되어 우정을 주고 받으며 우리를 사랑하는 확실한 증표로 우리에게 은총을 전달해 준다. 이제 나는 하늘에 위대한 새 친구를 갖게 되었으니 그 우정이 내 삶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음은 당연했다. (p721)
☞ 한 성인을 안다는 것은 하늘에 한 사람의 친구를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무엇을 얻을 필요가 없고 오히려 줄 필요가 있었다. 그리스도께 영원한 삶을 청하면서, 이제껏 계명을 지켜왔는데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하고 물었던 부자 청년과 같은 느낌이 내 마음 속에 날이 갈수록 강해졌다. 그리스도께서는 내게도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마태 19,16-21) 하고 말씀 하셨을까? (p723-724)
☞ 사랑은 주는 것이다. 유행가 가사 같지만 ‘아낌없이’ 주는 것이다. 그 사람을 사랑하는가? 그에게 주라.
11월 말이어서 해가 짧은 탓인지 날이 일찍 어두웠다. 마침내 그 주간 목요일 저녁에 나는 갑자기 ‘트라피스트회 수도자가 될 때가 왔다.’는 생생한 확신을 느꼈다. 이런 생각이 어디에서 왔을까? 내가 아는 것은 갑자기 떠올랐다는 것뿐이었다. 그러면서도 그것은 저항할 수 없이 강력하고 또렷한 것이었다. (p737)
내가 모든 주저와 의문을 몽땅 털어놓자, 필로테오 신부는 내가 수도원에 입회하여 사제가 되기를 바라지 못할 이유가 전혀 없다고 말했다.
비이성적으로 보이겠지만, 그 순간에 마치 내 눈에서는 비늘이 떨어지는 것 같았고, 이제까지 내 모든 걱정과 의문이 얼마나 허황하고 부질없는 것이었던가를 뚜렷이 볼 수 있었다. 그렇다. 내가 수도생활의 소명을 받은 것은 분명했다. 그리고 이에 관한 모든 의심은 대체로 그림자에 지나지 않았다. (p741)
일주일 후에 나는 어디 있을까? 그것은 하느님의 손에 달렸다. 하느님의 자비에 나를 맡기는 수밖에는 달리 도리가 없다. 그러나 나는 이때쯤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자기 자신을 위해 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선한 방향으로 우리를 돌보시고 또 그렇게 하실 수 있다는 것을 응당 깨달을 수 있어야 마땅했다. 갈등 · 역경 · 부조리 · 불행 · 패망 등을 겪는 것은 오직 우리가 하느님의 도우심을 거절하고 하느님 뜻을 거역할 때뿐이다. (p744-745)
나는 자유로웠다. 나는 자신에게 속하지 않고 하느님께 속했다. 하느님께 속한다는 것은 이 지상의 온갖 불안과 걱정과 비애, 그리고 사물에 대한 애착에서 해방되어 자유롭다는 것이다. 일단 삶이 하느님께 속하고, 자기 자신을 완전히 하느님 손에 맡기기만 한다면 장소나 복장의 차이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요컨대 자기 자신과 의지를 본질적으로 봉헌하는 희생이 있느냐 없느냐가 문제일 뿐이지 나머지는 모두 부수적인 것이다. (p750)
☞ ‘하느님께 완전히 맡기느냐 아니냐.’의 문제다.
하느님을 기쁘게 하는 것만이 행복하다. 또 비록 가장 사소한 일이거나 생각뿐일지라도, 또한 그것이 잠재적 욕망일지라도 하느님을 불쾌하게 하고 거부하며 배반하는 것은 슬픔이요 불행이다. 이런 것들 안에 슬픔이 있다. 그것들은 우리 생명이요 기쁨이신 분한테서 분리됨을 뜻하기 때문이다. (p750-751)
☞ 무슨 일을 할 때마다 생각하자. 이것은 하느님을 기쁘게 하는 일인가, 아니면 슬프게 하는 일인가?
이윽고 들창이 열리더니 흰 수염의 마태오 수사가 보였다.
“안녕하세요. 수사님?”
나를 알아본 그는 내 옷가방을 흘끔 보더니 물었다.
“이번에는 여기 머물려고 오셨소?”
“그렇습니다, 수사님. 수사님이 저를 위해 기도해주신다면 … .”
수사는 머리를 끄덕이면서 들창문을 닫기 위해 손을 올렸다.
“지금까지 쭉 그렇게 해온걸요. 당신을 위한 기도말입니다.” (p752)
☞ 누군가 나를 위해 기도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수련장과 대화는 즐거웠다. 그러나 여태까지 내 양심에 얹혀있던 꺼림칙한 큰 짐, 곧 개종 전의 생활 태도와 아울러 이 때문에 한때는 사제 성소를 단념하게까지 되었다는 사정을 이 착한 트라피스트인에게 몽땅 털어놓기가 쑥스러웠다. 그러나 급기야는 마음을 다부지게 먹고 나의 부끄러운 과거를 줄이고 줄여 단 몇 마디로 간추려 실토해 버렸다. … 수련장은 당황하는 것 같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할 말을 모조리 실토한 태도가 마음에 들었고 이 문제에 대해서는 원장님과 의논해 보겠다고 했다. 그게 전부였다. (p762)
원장님이 우리 둘에게 강복할 때 우리는 그의 반지에 입을 맞추고 밖으로 나왔다. 원장님은 우리를 내보면서 즐겁게 살되 아무렇게나 살지는 말 것과 예수 마리아의 이름이 언제나 입술에 올라 있어야 한다고 거듭 당부했다. (p765)
<마니피캇>을 노래하기 시작하자 나는 울음이 터질 지경이었다. 마침내 내가 정말로 수도원에 들어와 하느님의 수도자와 더불어 하느님의 전례를 노래하고 있다는 사실에 감사의 정이 복받쳐서 거친 목청으로 그 찬미가를 하려니까 눈시울이 뜨거워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p769)
"얼마나 많은 영혼이 자네가 이 수도원에 항구히 머물러 있는 데 달려 있는지 아는가?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의 많은 이가 자네가 성소에 충실할 때 비로소 구원되도록 마련하셨다네. 그러니 떠나고 싶은 유혹이 들면 그 사람들을 먼저 생각해야 하네. 앞으로 떠나고 싶은 유혹을 받게 될 걸세. 그러면 자네에게 딸린 그 영혼들을 기억해야 하네. 그중에는 자네가 아는 사람도 있겠지만 자네가 천국에서 만날 때까지 알지 못할 사람이 대부분일 걸세. 하여간에 자네는 여기 혼자 와있는 것이 아니라네 … .“ (p775)
참으로 나는 하느님의 비밀스런 보호 속에 숨어 있었다. 하느님이 당신 사랑과 지혜와 자비로 늘 나를 감싸고 계셨다. 영원히 그럴 것이다. 때때로 어렵고 크게 여겨지는 문제가 나를 덮치기도 했지만 다 지나고 나서 보면 내가 궁리해 낸 해결책은 별 것이 못 되었다. 나의 시야와 이해력을 초월한 하느님께서 내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조용하게 나를 위해 모든 일을 해결해 주신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하느님은 당신의 섭리라는 이해할 수 없을 만큼 지혜로운 계획으로 내 삶과 실체와 존재라는 직물 속에 해결을 짜 넣으셨던 것이다. (p779-780)
‘은총이 가득하시다!’ 생각만 해도 우리 마음이 은총으로 가득해지는 기도문이다. 저녁마다 수도자들이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계곡에서 바치는 이 묵주기도가 세상에 얼마나 큰 은총이 흘러넘치게 하는지 누가 알랴! (p794)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하느님의 계시를 받아들이는 것, 그 계시는 인간의 입을 통해 온다는 조건을 받아들이는 겸손이다. (p801)
그분은 순간순간 우리 마음에 탄생하신다. 이 영원무궁한 탄생, 당신 자신을 떠나거나 유일성을 손상시키지 않고 당신 자신한테서 탄생하시는 하느님의 영원무궁한 시작, 이것이 우리 안에 있는 생명이다. 그런데 보라, 그분은 성체축성때 홀연히 이 제대 위에서 타오르는 촛불 아래 눈처럼 흰 성체포 위에 탄생하여 높이 거양되신다. 하느님의 성자 그리스도께서 그 전능으로 사람이 되셨다. (p818-819)
클레르보의 성 베르나르도에 따르면, 관상에 도달하되 하느님에 대해 아는 바를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사랑으로 넘쳐흐르지 않는 영혼은 비교적 약한 영혼이라고 했다. 무릇 성 베르나르도도, 성 그레고리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 십자가의 성 요한, 복자 요한 로이스부르크, 성 보나벤투라와 같은 위대한 그리스도교 신비가들에 따르면 신비생활의 정점은 영혼과 하느님의 결혼이요, 이 결혼으로 성인들은 하느님과 영혼들을 위해 일하는데 있어서 지칠 줄 모르는 힘을 발휘하여 무수한 영혼을 성화시키는 결실을 맺으며, 종교 역사뿐만 아니라 세상 역사의 진로까지도 변경한다는 것이다. (p834)
성 토마스의 원리는 확고하다. 곧 ‘관상한 것을 전달하는 것’이 최고의 완덕이다. (p838)
☞ 완덕의 열매는 다른 이의 영혼을 구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당신 모상을 성 프란치스코에게 새겨 넣은 것은 다만 소수의 특전을 입은 수도자만이 아니라 참으로 영적인 모든 사람을 사랑의 완성인 관상의 완성으로 이끌기 위한 것이었다. 일단 이처럼 높은 경지에 도달한 사람은 이웃을 자기한테 이끈다. (p840)
오직 한 가지 성소만 있을 뿐이다. 가르치든지, 봉쇄구역 안에 살든지, 환자를 간호하든지, 수도자거나 아니거나, 기혼자거나 독신자거나, 또는 신분이나 직업이 무엇이든 상관없이 누구나 완덕의 정상에 오르도록 부르심을 받고 있다. 누구든지 깊은 내적 생활, 심지어 신비적 기도생활을 하고 아울러 관상의 열매를 이웃에게 전하도록 부르심을 받고 있는 것이다. 말재주가 없어 말로 그렇게 하지 못하더라도 모범으로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다. (p841)
☞ 신앙생활은 자신의 구원에만 그쳐서는 안된다. 이웃의 구원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우리는 언제나 여행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그 여행은 목적지를 알 수 없는 긴 여행이다. 다른 의미로 우리는 이미 도착했다. 우리는 현세에서 하느님께 완전히 소유되는 지점에 도달할 수 없다. 그러기에 우리는 어둠 속에 여행하고 있다. 그러나 은총에 의해 하느님을 이미 소유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이미 빛 속에 도착하여 그 안에 살고 있다. (p842)
☞ 그런 의미에서 하느님 나라는 ‘이미’ 시작되었고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피조물들은 당신과의 거리감을 느끼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저는 모든 피조물과, 피조물에 관한 지식에 대해 죽은 자가 되려는 것입니다. 비록 당신은 피조물 속에 계시지만 세상 만물을 초월하신 분임을 피조물이 제게 가르쳐 줍니다. 당신이 우주만물을 만드셨고 당신 현존이 그것들을 살게 하시는데 그것들은 저한테 당신을 숨기고 있습니다. 그러니 저는 그것들을 벗어나 홀로 살렵니다. 오, 복된 고독이여! 제가 그것들을 떠나야먄 비로소 당신께 갈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p847)
나는 가장 바른 길을 원하는 까닭에 네가 이해하지 못하는 길로 너를 인도하리라. 그러므로 네 주변에 있는 모든 것이 너를 거슬러 싸우고 거부하며 때리고 괴롭힘으로써 너를 고독으로 쫓아낼 것이다. 그것들이 너를 미워하는 까닭에 너는 머지않아 홀로 남을 것이다. 그것들은 너를 저버리고 배척하여 추방할 것이요, 그러면 홀로 되리라. (p848)
무릇 피조물의 기쁨은 너에게 오직 고통일 따름이리니 너는 온갖 기쁨에 죽어 홀로 되리라. (p848)
너는 나의 고뇌와 가난의 참고독을 맛보리니, 나는 너를 내 기쁨의 높은 자리로 인도하리라. 그러면 너는 내 안에서 죽어 내 자비로 모든 것을 발견하리라. (p849)
책은 끝났으되 탐구는 끝나지 않았노라. (p849)
☞ 이후 70여권의 책을 출간하여 20세기를 대표하는 가톨릭 영성작가로 자리 잡는다.
3. 이책에 대한 간략한 나의 느낌 또는 소개
<칠층산>은 트라피스트 수도원 수사신부인 토마스 머튼의 자서전이다. 출생으로부터 트라피스트 수도원에 들어갈 때까지의 여정이 800페이지가 넘는 글에 담겨져 있다. 작가를 꿈꾸었던 그의 글은 간결하면서도 읽기가 쉽다. 처음 읽고 나서는 남는 것이 하나도 없는 허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다시 차근차근 읽고 정리하면서 묵직한 여운이 하나 둘 씩 다가왔다.
역시 책은 한 번이 아닌 두 번은 읽어야 한다는 나름의 교훈을 일깨워주는 계기가 되었다.
첫댓글 토아스 머튼의 "칠층산" 감동 깊게 읽었던 책인데, 마음지기님 덕분에 다시 요약된 것을 읽었습니다. 공감되는 부분이 많아
행복했습니다. 말 로 못 전한다면 행동으로
빛으로 이끄는 그리스도인이 돼야한단 말씀이 특히 남네요. 더 많은 부분이 있지만... 감사합니다. 마음지기님!^^*
내가 잡서에 빠져있을 때 마음지기님과 아가토비님은 저리 훌륭한 책을 읽으셨군요.
800페이지가 넘는 책을 두번이나 읽으신 마음지기님, 요약해 놓은 글 읽으며 남이 차린 밥상앞에서 힘 안들이고 돈 안들이고 밥먹는 기분이 들어 고맙고도 미안했습니다.
마음지기님 강화도 수도원 가는 버스 안에서 무슨 책 입니까 라고 물었던 그 책이군요. 조금전 묵주기도 할 때는 내머리가 천근 만근 무거워 기도가 왜이렇게 힘들지 했는데 이 글을 읽으면서는 언제 다읽었는지 모르고 다 읽었습니다. 묵상은 저도 한번더 읽고 올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4일 악마는 어리석지 않다는 구절과 영혼의 생명은 지식이 아니라 사랑이다라는 구절을 묵상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새벽에 일찍 깨어 맑은 정신으로 '칠층산'을 읽으면서 감사드립니다.
이 또한 마음지기님의 '성소'였음을...
"관상에 도달하되 하느님에 대해 아는 바를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사랑으로 넘쳐 흐르지 않는 영혼은
비교적 약한 영혼 이라"......
"관상한 것을 전달하는 것이 최고의 완덕이다."...
마음 속에 깊이 새겨봅니다.
때가 차서
관상의 열매를 이웃에게 전하라고
주님께서 명하실 때까지
부지런히 수련하고 단련하고 훈련하는 데
전심전력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