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의 글은 카페지기 서봉석(소선)의 블로그
"소선의 음악이야기" blog.naver.com/bongarr 에서 옮긴 것입니다.
미8군쇼란 과연 무슨 단체인가?(1960년을 전후하여 성행했던)
※ 본 카페지기는 1964년부터 5년간 미8군공연단체의 밴드에서 활동한 경력을 바탕으로 연주자의 입장에서 내가 직접 겪고 듣고
느낀 내용을 기술하고저 합니다. 관계 문헌을 뒤져서 정리한 것은 해방직후의 상황이고 그 이후의 것은 본인이 평소 알고 있는
것을 정리한 것이기에 기억의 미흡이나 내용상의 오류도 있을 수 있기에 양해하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본인은 팩트에 가깝게 정리하려고 노력에 노력을 거듭하였기에 심한 오류는 없으리라 생각됩니다.
혹시 내용에 수정할 부분이나 보충할 부분이 있다면 알려 주십시요 바로 잡겠습니다.(010-6217-2796 서봉석)
우리가 "미8군쇼"라고 칭하는 것은 미8군사령부가 일본 지바에서 1955년에 한국으로 옮기고 1957년 유엔군사령부 겸 미
8군사령부가 서울 용산에 주둔하면서 "미8군" 이라 하면 주한 미군을 일컫는 명칭이 되었고 미8군 장병들의 사기진작을 위해서
미8군 산하의 전국 각처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 부대의 영내 클럽에서 공연하게 되는 한국의 연예인들로 구성된 공연단체를
"미8군쇼"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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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가) 1945년 해방, 6.25 전쟁, 휴전. 미군 주둔과 그들의 여가문화
8.15 해방 직후
6.25 전쟁과 휴전 직후
(나) 미8군에서 공연단체(쇼, 밴드) 정기적으로 오디션 실시
미8군 공연단체를 관장하는 연예대행업체 설립
오디션과 공연 평가
(다) 공연단체의 성격과 단체들 그리고 클럽
공연단체의 기능상 쇼와 밴드로 구분
미군 클럽의 종류
(라) 주한미군의 1950~70년대초 주둔 지역의 영내외 클럽
미군부대 영내 클럽
미군부대 영외의 기지촌 클럽과 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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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1945년 해방, 6.25 전쟁, 휴전. 미군 주둔과 그들의 여가문화
▲ 8.15 해방 직후
우리나라에 미군이 주둔하게 된 것은 1945년8월15일 일본의 압제에서 해방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의 승전 강대국인 미국과 소련
이 얄타회담의 결과에 따라 한반도를 분할점령하기로 하고 남에는 미군이, 북에는 소련군이 3년동안 군정을 유지하면서 일본군
무장해제와 일본인 안전 귀국 및 우리나라 국민의 안정을 위해서 주둔키로 된 것이다. 1945년9월에 주한미군정청 사령관(미육군
제24군단장) 존 리드 하지(John Reed Hodge) 중장이 이끄는 미육군 제24군단 병력 7만7천여명이 주둔하여 미군정을 펼쳤고
1948년8월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미군 병력은 철수하고 그 1년 후인 1949년에는 미 군사고문단 500명만 남게 되었
다.
이 시기에 북에서는 해방 직후 소련이 김일성을 앞세워 소련의 전적인 무기 지원 하에 공산주의국가의 군대를 양성했고
남에서는 미국이 국방경비대(육군의 모체)만을 인정하여 치안 및 국가 경비의 수준에서 군병력이 유지되었다.
미국은 자유롭고 부유한 나라이기에 여가문화(餘暇文化)가 발달해서 군부대 내에도 춤과 술과 음악 및 오락을 즐길 수 있는 크고
작은 클럽이 각 중대에 하나 정도는 설치되는 대단한 나라이다. 단위 부대가 여기저기 관할지역 내에 분산되어 있기 때문에 소규
모의 부대에도 클럽들이 있었다. 8.15 직후 미군들은 3년이라는 단기간 주둔의 영향으로 영내 클럽이 많지는 않았겠지만 그외에
도 서울시내의 대형 클럽(구락부=俱樂部 라고 했음)을 이용하기도 했고 지방에서도 주둔지역 클럽을 이용하기도 했다.
- 미군들도 드나들던 국내 클럽의 악단들
해방 직후에는 서울에 신식 서양춤을 추는 대형 댄스홀이 하나 둘 생기게 되었고 미도파백화점 5층과 동화백화점 5층이 댄스홀로
유명했다. 이외에도 클럽들이 많이 생겨나서 서로 유명 악단을 유치하기 위해 악단 스카웃 작전이 심했다고 한다. 미국식 대중음
악을 익숙하게 연주하던 악단으로는 임정박악단(林正博-Clarinet=한국의 베니굿맨-스윙음악-인기최고의 해외파 악단)을 비롯하
여 조춘영악단, 엄재근악단, 엄토미악단, 김광수악단, 이재춘악단, 김호길악단, 노명석악단 등이 국내 클럽의 하우스밴드(전속악
단)로 활동했으며 1946년에는 서울치과대학 학생이던 김영순(베니-트럼펫)을 밴드 리더로 치대 1년 후배인 길옥윤(본명 최치정)
과 당시 경기중학교 학생이던 피아노의 박춘석 등이 서울 시내에 있던 미군클럽에서 하우스밴드로 활동을 하기도 했다. (이 시절
에는 고등학교 제도는 없었고 중학교가 5년제였다.)
과거 일본 장교들 전용으로 사용하던 시내의 구락부(클럽)는 미군이 장교클럽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 미군들에게 인기 최고인 국내의 악극단(쇼) - 김해송의 KPK악단
해방 직후, 악극단 위주의 공연단체가 20~30개 있었다고 하는데 해방 전부터 활동하던 악극단 외에 새로 생기는 단체가 많다보니
얼마 못가서 없어지는 단체들도 많았다고 한다. 이러한 악극단들이 미군클럽에 가서 공연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 시절에는 미국
에서 연예단체가 한국으로 오는 것도 힘드니까 한국에서 한국인 공연단체가 출연을 많이 하게되었다.
당시 국내 재즈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는 김해송(Guitar,작곡가,편곡자,지휘자,가수로서 천재음악가였음 -6.25때 납북도중 사망
설)의 KPK악단은 당시 최고로 유명했던 악극단으로서 그의 천재적인 음악성을 발휘하여 우리 민요를 재즈풍으로 작,편곡 - 뮤지
컬처럼 공연함으로서 미군들에게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위 공연에 출연하는 악단의 단원 명단을 보면 후에 한국 대중음악 역사에 남는 엘리트들이다. 과연 김해송의 KPK악단은 당대 최
고의 악단이었다. 필자가 이름을 기억하는 분들만 정리하자면 (좌로부터)
현경섭 (Trumpet-1930~40년대 최고의 트럼펫, 악단장-1950.6.25때 납북)
노갑동 (Trumpet- 1950년대 한국의 루이 암스트롱이란 별명. 악단장)
송민영 (Trombone-국내 최고의 트롬보니스트, 50년대 KBS경음악단 공동지휘자,미8군 토미 아리오 쇼 리더, 작곡가.
개신교 목회자. 인기가수 송민도의 남동생)
엄재근 (Tenor Sax.- 악단장. 인기배우 엄앵란 부친, 엄토미의 친형)
손석우 (Guitar - 작곡가, 50년대 KBS경음악단 공동지휘자)
※ 미8군의 명칭
이때에는 일본에 사령부를 둔 미극동군사령부(사령관 맥아더원수)의 예하 부대인 육군 제24군단으로서 한국 주둔의 미군정청장
이 24군단장인 하지중장이었다, 1955년 일본 지바에 있던 미극동지상군사령부 겸 미8군사령부가 한국으로 이동하고 또 1957년
7월1일에 미극동 지상군사령부를 해체하고 유엔군사령부와 미8군사령부의 미8군사령관이 유엔군사령관과 주한미군사령관을
겸직하게 된다. 국내에서는 이때부터 현재까지 주한미군을 미8군이라는 군대 명칭으로 부르고 있다.
▲ 6.25 전쟁과 휴전 직후
1950년6월25일 북한은 소련의 승인하에 불법 남침을 하게 되고 그해 7월에는 미군을 주축으로 한 유엔군이 참전하면서 미군의
숫자가 32만5천명에 달하게 되었고 1953년 휴전이 성립되며 미군 22만3천명이 한국에 계속 주둔하게 되었다.
그들은 미군들을 위문해 줄 한국의 공연단체가 대량으로 필요하게 되었다.
전쟁 중에도 후방의 피난지인 대구,부산 등지에서 미군들은 공연단체를 필요로 했었고 휴전 후부터는 본격적으로 미군클럽측과
공연단체측이 직접 접촉해서 공연을 하는 일이 많아졌고 그들은 공연의 대가로 달러를 받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일상에 필요한 군
수품 및 생활필수품으로 받는 경우가 많았다. 공연단체의 대표는 이 물건들을 양키시장(미 군수물자 암거래상)에 가서 현금으로
바꿔서 단원들에게 출연료를 지불하곤 했다.
1950년 6.25전쟁 직후 부산에 임시수도(1950.08.18~10.27. / 1951.01.04~1953.08.14)가 있을 때에는 부산시는 피란민들과 한국
군, 미군들로 시 전체가 더 이상 수용할 수 없을 정도로 포화상태에 있었고 그런 가운데에서도 시내에는 댄스클럽, 미군부대에는
영내클럽들이 쇼와 밴드를 필요로 했다.서울의 유명 악단들도 대부분 대구,부산으로 옮겨서 활동했었다.
김광수악단을 비롯 많은 악단들과 쇼가 부산에서 활동하다가 1953년7월 휴전협정이 이루어진 후인 8월에 정부가 서울로 환도하
면서 피난민들도 서서히 귀가하게 되고 피난지에서 활동하던 음악인들도 서울로 활동무대를 다시 옮기게 된다.
부산에는 육군본부군악대와 육군교향악단, 해군의 정훈음악대(후에 해군교향악단)그리고 진해의 해군본부군악대 등도 후생사업
으로 군악대 악기를 이용, 미군클럽에서 활동을 했었다. 이 시절 육본군악대에는 후에 한국의 유명 연주인으로 성장한 고계화(트
럼펫) 김강섭(피아노)김인배(트럼펫) 홍덕표(트롬본) 이정식(재즈 테너색스) 등이 중,상사의 계급으로 활동했고 진해의 해군본부
군악대에는 송민영(트롬본)이 병조장(상사)계급으로 활동했었다.
휴전이 성립되고 불안한 가운데에서도 안정을 찾아 1953년8월에 정부가 환도하자 서울을 중심으로 대도시에는 전후파적(戰後派
的)인 시류에 따라 사교춤이 유행되고 캬바레(댄스클럽)라는 이름으로 고급 사교장이 많이 생겨나게 되었다.
이 시절에도 미국에서는 정부기관인 USO(United Service Organization 미국문화협회)에서 해외에 파병된 미군을 위문하기 위해
유명 연예인을 비롯 많은 연예인들을 한국에 파견하여 주한미군을 위문하곤 했다. 유명 배우인 마리린 몬로, 재즈트럼펫의 루이
암스트롱, 인기가수 냇킹 콜, 배우겸 가수인 앤 마그릿 등도 다녀갔다.
(나) 미8군에서 공연단체(쇼, 밴드) 정기적으로 오디션 실시
▲ 미8군 공연단체 관장하는 연예대행업체 설립
한반도 휴전후 미국에서는 미군을 장기주둔 계획을 세우고 일본에 있던 미8군사령부를 1957년7월 한국으로 이전시키게 된다. 미
8군에서는 그동안 개별적으로 클럽과 공연단체가 공연을 성사시키다보니 그 단체의 수준이 천차만별인지라 미군들의 사기에 지
장이 있다고 생각하여 1957년부터 그들은 미8군사령부 안에 공연단체에 대한 체계적인 심사와 계약업무를 맡는 Booking
office(Special srevice)를 설치하고 전국에 산재해있는 미군클럽이 필요로 하는 연예단체를 한 곳에서 선정, 공급하게 되었으며
이에 따라 국내에서는 개별적으로 활동하던 공연단체를 관장하는 연예대행업체들이 미8군의 용역업체로 등록, 활동하게 되었다.
그 이전부터 소규모의 공연단체들이 우후죽순격으로 생겨나다보니 대행업체간의 상도덕이 문란하게 되자 그중 선두 주자였던
화양과 극동,신일,삼양 등 4개 업체가 하나로 합쳐서 한국흥행주식회사를 설립하게 된다. (원효로 -용산구 청파동 선린상고 입구
위치)
한국흥행주식회사는 당시로서는 보기 드물게 공연단체들의 연습실과 각종 관리 및 단원 휴게 등을 위한 시설을 갖춘 건물과 가장
많은 단체를 확보하게 됨으로서 다른 업체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가 되었다. 회사의 정식명칭은 한국흥행주식회사이지만 그중 선
두였던 화양(和洋)이 많이 알려져 있었기에 이후에도 발음 편리하게 화양이라고 불리워졌다.
대표에는 안찬옥(前화양 사장)이었고 전무 김영순(베니김-前극동 사장)이 운영의 핵심이었다. 그 외에는 유니버설,공영,대영,동
일.아주 등 소수만 남아서 활동했으며 이 업체 모두가 용산의 미8군사령부와 가까운 원효로 지역에 모여 있었다.
또한 이때부터 모든 공연단체들이 상공부에 등록허가제로 되면서 한국흥행주식회사를 중심으로 한 한국연예대행연합회 (KEAA
= Korea Entertainment Agency Association)를 구성하게 된다.
이들 연예대행기관은 Booking Office의 요구에 맞춰, 각 공연단체는 시기에 따라 3개월 내지 6개월 간격으로 미8군 영내의 클럽에
들어가 미국에서 온 전문가로 구성된 심사위원단에게 심사를 받도록 되어 각 단체들은 항상 연습을 부지런히 하게 되었다.
(심사 장소로는 몇군데가 있었지만 주로 이태원에 있는 Frontier Club에서 대부분 이루어졌다.)
▲ 오디션과 공연 평가
- 오디션 평가는 4~5 등급으로 평가. (쇼는 최하를 C등급, 밴드는 D등급까지 분류.)
AA, A, B, C, (D)로 등급을 조정하고 회당 공연단체의 가격을 등급에 따라 지불하도록 했다.
이 단체들은 계약된 클럽에서 공연을 끝내면 반드시 송장(送狀 Invoice)에 클럽 지배인의 평가를 받게 되어 있었다.
(미군 클럽에는 요리사와 여급 등 한인종업원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한인 책임자(Manager)가 있었고 전체를 관리하는 미군
관리인(Custodian)이 있었다.)
- 공연평가는 3등급으로 나누는데
Excellent(우수) Average(보통) Poor(빈약) 중 하나로 평가했다.
이 송장은 클럽에서는 Booking office로 보내어지고 공연단체에서는 소속회사로 보내어져 심사때의 인원과 공연내용을 확인하는
작업도 하게 되어 결국 2중으로 심사를 받는 셈이 됐다. 이런 엄격한 체제의 덕분(?)인지 특히 쇼밴드의 연주자들 중에는 후에 한
국의 대중음악계를 좌지우지하는 거물급 악단장이 많이 배출되었고 밴드에서도 우수한 연주자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등급이 높으면 음악적으로 인정을 받아 좋지만 가격이 비싸서 일이 적게 계약되는 경우도 간혹 있었다.
우리가 1960년을 전후로 일반 극장에서 자주 볼 수 있었던 수준 높은 미8군쇼는 미군 측과 계약이 적게 된 쇼를 회사측에서는
임금지불이 급하니까 일반 극장에 공연을 붙이는 일이 생겼기 때문이기도 했다.
(다) 공연단체의 기능과 단체들 그리고 클럽
▲ 공연단체의 기능상 쇼와 밴드로 구분
회사에서는 단체(악단)의 성격을 쇼와 밴드로 구분을 했는데 쇼멤버로서의 악단을 쇼밴드라고 했고 악단 연주만의 단체를 밴드라
고 불렀다. 쇼밴드는 쇼의 반주 및 악단연주곡을 중심으로 공연을 했고 밴드는 클럽의 손님들이 춤출 수 있는 음악만을 연주하는
댄스밴드였다.
- 쇼(Floor Show)= 관람 위주의 공연으로서 밴드, 가수, 무용단, 사회자 등이 출연하며 조명과 음향 및 악기관리자(밴드보조-
Helper) 매니저 등 실무 스탭진이 항시 동행 활동했으며 쇼밴드(Show Band)는 10인조 이상의 빅밴드 또는
5~6인조의 캄보밴드로 구성하였다.
무용단에는 안무가가, 악단에는 편곡자가 반드시 필요했기에 회사에서 채용하기도 했고 단체별로 책임지기도
했다.
※플로어 쇼(Floor Show)= 공연장처럼 무대가 크지 않은 클럽의 경우 손님들이 춤을 추는 플로어(마루바닥) 에서 쇼를 공연한다
는 데서 생긴 용어이다.
※쇼밴드의 리더는 단체의 출연진을 대표하는 경우가 대부분으로서 책임이 컸고 스타 연주자가 많았다.
※패키지쇼(Package Show)는 60년대 초부터 시작된 소편성의 록그룹(그룹사운드)이 기존의 쇼 편성보다 적은 인원으로 간편하
게 꾸려서 공연에 임한다는 의미로 붙여진 이름이다.
- 밴드(Dance Band)= 사교춤을 위한 공연으로서 트럼펫.트롬본,색소폰,리듬색션 등 관악기 위주의 편성으로 연주했으며
10인조 이상의 빅밴드 또는 5~6인조의 캄보밴드로 구성되었었다.
※ 10인조 이상의 빅밴드를 그 시절에는 한국식 영어로 훌멤버밴드(Full Member Band) 또는 줄여서 훌밴드라고 칭했다.
※ 또 한가지 악단장을 우리나라에서는 밴드마스터(Band Master)라고 칭했으나 미국에서는 밴드리더 (Band Leader)라고
했다. 미군 중에는 곡을 신청하려고 악단장을 찾을 때 “Who‘s the leader?" 라는 미군이 가장 많았고 "Who's the honcho?
(한초=책임자, 우두머리)” 라고 묻는 친구도 간혹 있었다.
- 계약에 따라서 하우스밴드(House Band) 또는 오픈밴드(Open Band)로 분류된다.
# 하우스밴드(House Band=전속악단)= 한 개의 클럽 또는 계약기간동안 계약부대 내의 몇 군데 클럽을 로테이션 연주하
는 경우의 두 가지가 있었다.
# 오픈밴드(Open Band)= 전속계약이 안된 수시 출연의 회당 계약에 의해서 출연하게 되는 밴드의 경우를 말한다.
(여기에는 출연료가 제일 비싼 AA클라스 또는 제일 낮은 D클래스의 경우의 밴드에 미계약이 많았다.)
(오픈밴드는 쇼단체처럼 한 클럽에서의 1회성 계약이기 때문에 전국에 산재해 있는 클럽을 모두 다니게
되는데 교통편은 대부분이 미군트럭이고 간혹 미군용 버스가 나온다. 부산,군산 등 먼 곳은 기차를 이용
했고 역에 도착하면 미군 차량으로 클럽에 이동하게 된다.)
※ 하우스밴드(House Band)라는 용어는 미국에서 1920~40년대에 베니 굿맨악단, 글렌 밀러악단, 듀크 엘링턴악단 등 유명 악단
이 클럽에서 연주 활동할 때에 클럽의 전속악단이란 의미로 사용되었고 이 시절 유명 악단의 스카웃작전이 대단히 치열했다고
한다. 이 유명 악단들은 단순히 댄스음악에만 열중하는 것이 아니라 악단연주곡의 히트곡 경쟁이었다.
이 시절 미국 뉴욕의 코튼클럽을 위시하여 몇몇 고급클럽에서는 유명 악단을 하우스밴드로 두고 요즘 우리나라의 연예기획사
같은 형태의 역할도 클럽에서 맡아 하면서 악단의 신곡 발표도 클럽에서의 댄스음악 연주를 통해 직접 라디오 생방송으로 보내
는 것이 유행이었다.
음악영화로 유명한 글렌 밀러 스토리, 베니 굿맨 스토리, 에디 듀친 스토리 등에서 클럽 장면을 볼수 있다.
▲ 미군 클럽의 종류
Officer’s Club (장교클럽) = 미군장교와 미국 민간인 및 국내 지역 인사들이 주고객.
NCO Club (부사관클럽) = Non Commissioned Officer
EM Club (사병클럽) = Enlisted Man
Service Club (서비스클럽) = 유흥을 위한 클럽과는 다른, 건전하고 문화센터 비슷한 분위기.
Civilan’s Club (민간인클럽)= 주한미군과의 사업관계로 한국에 주재하는 민간인들을 위한 클럽. 대부분 영외에 있음.
(미8군사령부의 장교클럽은 분위기는 대단히 좋고 수준이 높아서 좋았지만 손님들의 대화에 지장을 주면 안 된다고 해서 사운드
를 가능한 한 줄여야 했기에 밴드로서는 가장 고역인 클럽이었다.)
▲ 쇼단체의 이름
쇼는 가수,무용,밴드 등이 출연하는 버라이어티한 공연이기에 미군들에게 이름을 쉽게 기억할 수 있는 이름이 필요했다.
그 쇼의 스타를 내세운 쇼 이름과 기억하기 쉬운 쇼 이름을 짓는 경우 등이 있었다.
- 악단장을 스타로 내세운 경우
Benny's Show (Trumpet 김영순의 예명 베니김 → Trumpet 장경환 →Trombone 서의철 →Trombone 홍덕표)
Tommy Ario Show (Trombone 송민영의 예명. 미국 재즈트롬보니스트 Tommy Dorsey 에서)
Poppy Show (Tenor Sax. 김안영 예명 파피)
- 가수를 스타로 내세운 경우
Lima Show (스페인풍의 가수 예명 리마김 – Piano 김강섭)
Patti Kim Show (패티김이 좋아하던 Patti Page의 이름을 – Tenor Sax. 길옥윤- Special Show)
Sanghee Kim Show (김상희 이름으로-필자도 1970년 잠시 리더로 활동- Special Show)
Hanky Lim Show (임현기 이름을 미군들이 부르기 편하게)
※ Special Show란 출연자의 인기와 능력을 인정하여 미8군에서 실시하는 오디션 과정을 거치지 않은 쇼를 말한다.
- 외우기 쉬운 이름으로 짓는 경우 (이런 이름이 가장 많았다.)
(알파벳 순)
Add Four Show (Guitar 신중현)
A-JAX Show (Guitar 홍신윤)
Ambassador Show (Trombone 윤광섭 1970년)
A One Show (Guitar 김희갑)
Around the World Show (Trumpet 배상하)
A Train Show (Trumpet 최상용 → Alto Sax. 강철구)
Black Cat’s Show ( )
Black Eyes Show ( 박성원)
Blue Ribbon Show ( 전지인)
Broadway's Best Show (Ten.Sax. 김석성)
Club Date Show (Ten.Sax. 신지철)
Cool Cat’s Show (Trombone 정서봉)
Far East Police Show ( )
First Nighters Show (Tenor Sax. 이봉조)
Gloria Show ( 박성원)
Holywood Show (Tenor Sax. 이봉조)
Las Vegas Show ( )
NBC Show (Alto Sax. 이준영) 재즈맨 이동기의 부친, 일제강점기 악극단 단장
Make in Whoopy Show( )
New Star Show (Trumpet 김인배 →Trumpet 박봉구→)
Newyorker’s Show (Trombone 정서봉)
Seoul Swinger's Show (Trumpet 배상하)
Seven Star Show (Alto Sax. 이준영)
Show Boat Show (Tenor Sax. 김안영 = 파피)
Show of Show Show (Piano 박선길)
Silver Star Show ( )
Sky Lark Show (Trumpet 배상하)
Sky Liner Show ( )
Spring Varierty Show (Tenor Sax. 이정식,→ Trombone 김형진→ Tenor Sax. 최태국 등)
Summer Time Show (Trumpet 최상룡→Ten.Sax. 이봉조→)
Swing Star Show ( )
Top & Pops Show ( ) 공연 후 귀경중 문산지역에서 미군 트럭 전복 사고로 사망,부상자 발생
Top Drawer’s Show (Trumpet 이성호 - 단장 최태원)
20th Century Show (Guitar 이인성 – 단장 김일광)
Vegas Variety Show (Trombone 김종택)
Western Jubilee Show (Violin 김동석 → Violin 박창길)
※ 이러한 쇼들은 같은 쇼단체의 이름으로 악단장이 오디션때마다 바뀌는 경우도 많았기에 위의 악단장 이름은 기억나는
분들만 정리한 것임. (쇼단체의 주인인 쇼단장은 대부분 연주자가 아님) 오디션 1시즌에는 평균 20개 정도의 쇼만 합격.
쇼단체의 숫자가 적어질때의 이유는 미군이 서서히 감축되었기때문이다;
※ 1958년부터 10년 넘도록 이어오면서 1년에 2~3회 오디션 때마다 쇼 이름이 바뀌고 새로운 단체들이 탄생하는가 하면 없어지
는 기존의 단체들도 많았기에 위의 쇼 이름은 록밴드를 제외한, 관악기 위주의 쇼밴드의 경우로서 아마도 연이어서 50~60개
이상 될 것 같다. 같은 이름으로 10 여년간 지속되기는 힘들었다고 생각되는데 그중에서 한국흥행의 김영순전무가 미8군쇼
초기에 창단한 Benny's Show가 가장 오래 되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 트롬본의 대가 홍덕표씨가 1970년을 전후하여 베니쇼의
밴드리더를 맡았었으니까.)
각 회사의 단체를 합하면 대략 20개 정도의 쇼단체가 항시 유지되어 왔고 미군 클럽에서 고정적으로 연주하는 댄스밴드들도 50
개 정도는 된 것으로 기억된다. 이러한 단체들의 활동이 1960년대 중반 베트남전쟁이 발발하면서 주한미군이 대거 베트남으로
이동하게 된다. 한국 주둔병력이 급감하게 되자 국내의 대행업체들이 베트남에 지사를 차려 연예인을 송출하게 되니 1967~8년을
전환점으로 국내의 미8군 공연단체들은 급속히 사양길을 걷게 된다.
이때부터는 록그룹을 중심으로 한 패키지쇼가 많은 비중을 차지하게 되고 관악기 위주의 쇼와 밴드는 서서히 도태되었다. 1970
년대 들어서서는 다행스럽게도 우리나라의 경제가 활성화되면서 각처에 유흥업소들이 많이 생기게 되자 미8군연예회사 소속의
연주자들은 자연스럽게 국내 무대로 이동하게 된다.
(이 시절 전쟁 중인 베트남의 최전방까지 찾아가서 공연을 하는 쇼단원들은 문자 그대로 목숨을 걸고 공연을 했었다. 이들의 출연
료는 국내의 것에 비해 3배 정도였으며 그들은 대부분 귀국할 때 홍콩을 경유하면서 명품 악기들을 구입해 들여왔고 국내파들은
그들을 무척 부러워하기도 했었다. 드물게는 귀국 하지 않고 제3국을 경유해서 미국과 캐나다로 이민을 간 사람들도 있었다.)
*** 하우스밴드는 주로 댄스를 위해 연주를 하는데 오산 공군기지 클럽의 빅밴드 "Jet Stream" 과 미8군사령부 내 클럽의 빅밴드
"Knights of Melody" 등은 한때 오디션의 기본 모델이라고 했을 정도로 팀웍이 좋았었다. 여대영(Trumpet-후에 MBC-TV 악단장)
이 창단했던 빅밴드 "Diamond" 도 인기가 있었고, 재즈를 즐겨 연주하는 의정부 미1군단 클럽의 재즈캄보 "Birdland Jazz(리더
:Trumpet-김점배)" 와 재즈캄보 “Hepcat"(리더: Bass-이판근) 캄보밴드 Sunset(리더:Trumpet 박봉구) 등도 인기가 좋았었다.
이러한 하우스밴드에는 간혹 밴드싱어라고 해서 1명 정도의 가수가 출연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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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회사마다 쇼를 중심으로 회사를 운영하기 때문에 그 쇼의 흥행성 여부가 회사의 운명을 좌우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기에 항상 미국 본토에서 히트되는 신곡을 재빨리 채보,편곡하여 연습하게 되고 또 다음 오디션 준비를 해야하기 때문에 그
당시의 미8군 공연단체 연예인들의 능력이 대단할 수 밖에 없었다. 그로 인해 우리나라의 대중음악이 미국과 유럽 스타일로 글로
벌화 하는데 큰 역할을 하게 되었고 현재의 K-Pop을 이룰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고 하겠다.
1950~60년대에는 우리나라 연간 총수출액이 1천만달러가 채 안될때 이 미8군공연단체에서 벌어들이는 외화가 연간 120만달러
정도였다니 당시의 국내 경제발전에 크게 기여했다고 하겠다.
(라) 주한미군의 1950~70년대초 주둔 지역의 영내외 클럽
▲ 미군부대 영내 클럽
서울의 미8군사령부 + 서울 시내의 Civilian Club(민간인클럽) USOM Club(주한미군경제협력처)
김포공항의 공군기지
부평지역의 ASCOM (군수기지사령부 = Army Support Command)
의정부지역의 제1군단,
동두천지역의 제7사단
파주지역(문산,법원리,선유리,용주골,파주등)의 제1기갑사단 →제2보병사단으로 사단 교체됨
판문점의 JSA
춘천지역의 Camp Page
평택지역의 Camp Humprey (육군비행단)
오산지역의 공군기지 (쑥고개)
대구지역의 Camp Walker
왜관지역의 Camp Carroll
부산지역의 Camp Hialeah
진해지역의 해군,해병대 군사고문단
군산지역의 공군기지
성환,태안,서천,진천 지역의 미사일기지 등등. (이 외에도 더 있음.)
전국 각처에 260개 정도의 미군 클럽에서 항상 쇼나 밴드를 쓰는 것은 아니고 미군의 출입이 비교적 많은 클럽에서는 그 클럽에
고정출연하는 하우스밴드를 두게 되고 또 하나의 방법은 사단이나 군단 차원에서 몇 개의 밴드를 계약해서 부대 내의 여러 클럽
을 로테이션하게 하는 하우스밴드도 있었는데 대부분의 밴드가 후자의 경우에 해당된다.
서울의 미8군사령부 영내 클럽들과 오산과 군산공군기지의 클럽들은 대부분 1개의 악단을 하우스밴드로 두었다.
계약은 1개월을 기준으로 하되 밴드가 인기 있으면 계약을 연장했는데 의정부,부평,문산 지역 등의 몇몇 밴드는 수년간 같은 부대
에서 공연하는 경우도 많았다.
대부분의 클럽들은 주말에 주로 쇼를 초청했고 주중에 초청하는 경우도 있었다. 국내의 쇼단체가 주로 출연했지만 가끔씩 미국에
서 USO(United Service Organization=미군위문협회)를 통해서 미국의 유명 연예인을 비롯, 일반 연예인과 위문단체가 공연하는
경우도 꾸준히 이어졌다. 유명 연예인은 클럽이 아닌 연병장 또는 영내 극장에서 많은 미군들을 대상으로 공연을 했었다. 보브 호
프, 마리린 몬로, 루이 암스트롱, 냇킹콜, 자니 매티스, 앤 마그릿 등.
※ 1971년에는 미국의 유명 가수 겸 배우인 앤 마그릿이 미8군 위문차 내한했을 때 한국측에서 힘들게 설득하여 시민회관 (현 세
종문화회관의 전신)에서 공연을 했었는데 KBS의 김강섭악단이 반주를 맡았다. 본인도 참가.
※ 본인의 미8군 공연밴드 시절에는 일정한 부대 또는 한 클럽의 하우스밴드를 가장 많이 했고 오디션때 AA 등급을 받으면서 하우
스밴드 계약(Booking)이 안되어 오픈밴드를 잠시 경험했는데 이때에는 평소 접하지 않던 특이한 공연을 접할 기회가 있었다.
USO를 통해서 들어오는 미국의 연예인이 반주악단 없이 혼자 온 경우의 반주악단으로, 또 국내의 인기가수 중 팝송과 영어 멘
트가 가능했던 김상희 스페셜쇼의 반주악단으로, 또 회사를 경유하지 않는 비공식적인 쇼(요즘 표현으로 19금)의 공연 등도 경
험했었다.
▲ 미군부대 영외의 기지촌 클럽과 밴드
1953년 휴전이 성립되어 미군의 장기주둔이 불가피하게 되자 미군부대는 전국 각처에 자리를 잡아 주둔하게 되고 미군부대 주변
에는 미군들의 외출시 휴식과 유흥을 위해 술,여자,춤,오락 등을 만족시킬 서비스업 중심의 업소가 여기저기 난립하게 되고 이에
따라 여러 형태의 경제활동을 하게 되는 상권이 형성되게 되었다.
1957년경에는 정부가 나서서 미군측과 협의하여 미군들이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는 구역을 지정하게 된다. 이 지역의 미군들은
미군헌병대에서 통제하도록 제도화 하고 내국인 출입 금지의 미군전용클럽과 호텔 등을 미군전용관광업소로 허가하고 미군들을
접대하는 여성들을 각 클럽에 등록토록 해서 질병과 위생에 대해 철저하게 검사 및 치료를 해당 지역 보건소에서 관리하게 되었
다. 이때부터 기지촌이라는 명칭이 통용되기 시작했다. 1950~60년대에 우리나라 연간 수출액이 1천만 달러가 안 되던 때에 국내
의 각 기지촌에서 나오는 달러가 1백만달러가 넘었다고 하니 그 시절 우리나라 경제가 얼마나 빈곤했는가를 쉽게 가늠할 수 있겠
다.
동두천, 파주, 부평 등지에는 미군이 많다 보니 크고 작은 일반클럽들이 많이 있었다.
(이 시절 미군부대 영내클럽이 아닌 기지촌의 클럽을 미8군연주자들끼리는 일반클럽이라고 불렀다.)
비교적 큰 클럽에서는 악단을 고용했었는데 위 세 지역만 해도 20 여개의 밴드가 활동했었다. 일반클럽에도 미군클럽의 출연 밴
드처럼 5~6인조 소편성의 밴드들이 그 클럽의 하우스밴드(전속악단)로 출연케 되었는데 이 밴드들은 대부분 새로 조직되는 밴드
이거나 또는 미8군 오디션에 낙방해서 다시 오디션을 보려고 준비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 밴드들은 대부분 낮에 모여 열심히 연습
했기에 연주 실력이 우수한 팀들이 많이 있었다. 미8군 오디션에 합격하면 기지촌을 떠나고.........
후에 우리나라 대중음악계에서 인정받으며 활동하는 연주자와 그룹사운드들 중에는 이러한 기지촌 클럽에서의 추억을 가진 연주
자들이 많이 있었다. 밴드에게는 와신상담의 기회였기에 그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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