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자살에 대하여
1.
사람들은 누구든 자신의 몸이나 목숨에 대해서만큼은 세상에서 다른 어느 것 이상으로 확실한 권리를 갖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뿐만 아니라 앞서 말했듯이 자살은 범죄에 포함되고 범죄와 결부된다. (318쪽)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살이란 자신에 대해서는 부당한 행위가 아닐지라도 국가에 대해서는 부당한 행위라고 말한다([니코마코스 윤리학] 제5권 5장). 그렇지만 스토바에오스는 소요학파의 윤리학([윤리학 발췌] 제2권 7장)을 서술하면서 "너무 커다란 불행을 겪는 좋은 사람들이나 너무 큰 행복을 겪는 나쁜 사람들은 인생을 작별해야 한다"는 명제를 인용하고 있다. (...) 스토아학파가 쓴 기록으로 우리는 그들이 자살을 일종의 고귀한 영웅적 행위라고 찬미하는 것을 알 수 있다. (321쪽)
나는 자살에 반대하는 유일하게 설득력 있는 도덕적 근거를 나의 주저에 설명해 두었다([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제1권 67장). 그 근거는 자살이란 비참한 이 세상에서 실제적인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단지 엉터리 구원을 받는 것에 지나지 않으므로, 최고의 도덕적 목표에 도달하는 것에 배치된다는 점이다. 하지만 내가 여기서 자살을 도덕적 의미의 잘못이라고 해서 반대하는 것과 기독교 사제가 그것을 범죄라고 낙인찍으려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323쪽)
우리가 매우 높은 입장에서 내려온다면 자살을 비난할 아무런 확고한 도덕적 근거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성경에도, 설득력 있는 근거에도 뒷받침을 받지 못하면서 유일신 종교들의 사제들이 유별나게 활발한 열의를 보이며 자살에 반대하는 까닭은 어떤 감추어진 근거에 기인하는 것 같다. 그 근거란 생을 자발적으로 포기하는 것이 "모든 것이 보기에 좋았더라"라고 말한 자의 비위를 거스르는 행위이기 때문 아닐까? 그렇다면 어떻게 보면 유대 종교들의 의무적 낙관주의가 자살을 비난하는 것은 자살에 의해 비난받지 않기 위해서일지도 모른다. (323-324쪽)
2.
일반적으로 우리는 삶의 공포가 죽음의 공포를 능가하는 단계에 이르자마자, 인간은 자신의 삶에 종지부를 찍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죽음의 공포가 지니는 저항력도 만만치 않아, 죽음의 공포는 말하자면 문을 지키고 서 있는 문지기와 같다. (324쪽)
정신적으로 매우 심한 고통을 겪을 때는 육체적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 육체적 고통을 무시하는 것이다. (...) 심한 정신적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에게는 자살에 따르는 육체적 고통이 하찮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324-325쪽)
3.
답답하고 끔찍한 꿈속에서 불안이 최고조에 달할 때 불안 자체 때문에 우리가 눈을 뜨고 깨어나 보면 이제까지 우리를 괴롭혔던 밤의 온갖 괴물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고 만다. 인생도 꿈과 같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불안이 최고조에 달할 때 우리니는 그 인생의 꿈을 깨뜨려 버리는 것이다. (325쪽)
4.
자살이란 인간이 자연에 물어서 그에 대한 답변을 강요하려는 하나의 실험이자 질문으로 볼 수도 있다. 다시 말해 죽음을 통해 인간의 생존과 인식이 어떤 변화를 겪는지 알아보려는 실험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서툰 실험이다. 왜냐하면 이 실험은 질문을 하고 대답을 들어야 할 의식의 동일성마저 파괴해 버리기 때문이다. (325쪽)
제5장 삶에의 의지의 긍정과 부정에 대하여
1.
삶에의 의지의 부정이란 어떤 실체를 없애 버리겠다는 말이 아니라 단순히 의욕하지 않는 행위, 다시 말해 지금까지 의욕해 온 것을 더 이상 의욕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 의지의 부정이 무(無)로 넘어가는 과정으로 인식된다. 삶의 의지의 긍정과 부정은 단순히 '의욕하는 것과 의욕하지 않는 것'에 불과하다. 이 두 가지 행위를 하는 주체는 동일하며, 따라서 그 자체로 어느 하나의 행위를 통해서나 다른 행위를 통해서도 없어지지 않는다. 그 때문에 인간의 '의욕하는 것'은 물자체의 현상인 이런 직관적 세계에 나타난다. 반면에 우리는 '의욕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단순히 그것이 출현하는 현상 말고는 다른 현상을 인식하지 못한다. (326-327쪽)
2.
그리스인과 인도인의 윤리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그리스인은 (플라톤은 예외라 해도) 행복한 삶을 영위하는 능력을 목표로 삼는 반면, 인도인은 삶 일반에서 해방되어 구원을 얻는 게 목표다. (328쪽)
3.
구약 성경은 인간을 구원으로 이끌지 못하는 율법의 지배에 두려고 한다. 그렇지만 신약 성경은 율법이 불충분하다고 천명하고, 그것으로부터 해방시켜 준다(예컨대 로마서 제7장과 갈라디아서 제2장과 제3장). 신약 성경은 신앙, 이웃 사랑, 자기 자신의 전면적 부정을 통해 들어갈 수 있다는 은총의 나라를 설교한다. (...) 신약 성경의 정신은 뭐니 뭐니 해도 금욕적 정신이다. 하지만 이러한 금욕적 정신이 바로 삶에의 의지의 부정인 것이다. 구약 성경에서 신약 성경으로, 율법의 지배에서 은총의 지배로, 행위에 의한 정당화에서 중개자에에 의한 구원으로, 죄악과 죽음의 지배에서 그리스도 안에서의 영생으로 넘어감은, 본래적인 의미에 따르면 다분히 도덕적 덕목에서 삶에의 의지의 부정으로 넘어감을 의미한다. (329쪽)
4.
인간의 탐욕이란 각 개인이 우연히 서로 상대방을 방해해 한쪽에서는 재해를, 다른 쪽에는 해악을 끼치는 그 지점에서 비로소 죄가 되기 시작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의 탐욕은 이미 원래 본질적으로 죄가 되어 배척받아 마땅한 것이다. 따라서 삶에의 전체 의지 자체가 배척받아 마땅한 의지인 것이다. (330쪽)
세상에 가득 차 있는 온갖 전율과 비참함은 중생의 전체 성격에서 비롯되는 필연적인 결과이고, 그러한 성격에 의해 삶에의 의지는 인과율의 끊임없는 연속으로 나타나며 그 성격에 동기를 제공하는 상황에서 객관화되어 나타난다. 그러므로 온갖 전율과 비참함은 삶에의 의지를 긍정하는 단순한 주석인 셈이다(루터, [독일 신학]). 우리의 생존 자체가 죄를 함축하고 있음을 죽음이 증명하고 있다. (330쪽)
5.
고상한 성격의 소유자는 자신의 운명을 쉽게 한탄하지 않는데, 그런 자에게는 햄릿이 호레이쇼에게 한 말이 적용될 것이다. "자네는 온갖 괴로움을 당하면서도 / 아무 일 없었던 자 같았기 때문이지." 이것은 다음과 같은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런 사람은 자신의 본질을 타인에게서도 인식하고 그 때문에 그들의 운명에 관심을 보이면서, 자기 주위에 거의 언제나 자신의 운명보다 더욱 가혹한 운명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따라서 그는 자신의 불우한 처지를 한탄하지 않는다. 이와 달리 모든 현실을 자기 자신에게만 한정하고 다른 사람들을 단순한 허깨비나 환영으로 간주하는 비열한 이기주의자는 이들의 운명에는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자신의 운명에만 관심을 집중해 이해타산에 매우 예민해지고 걸핏하면 비탄에 빠진다. (330-331쪽)
내가 가끔 입증한 바와 같이 무엇보다 정의와 인간애를 일으키는 원천은 낯선 현상 속에서 자신을 재인식하는 데 있다. 그럼으로써 결국 의지를 포기하기에 이른다. (...) 의지의 긍정은 자의식을 자신의 개체에 한정하는 것을 전제로 하며, 인생행로가 우연에 의해 유리하게 진행될 가능성을 의지하는 것이다. (331쪽)
6.
세계를 파악하려고 하는 경우 물자체인 삶에의 의지에서 출발하면 그것의 핵심, 으뜸가는 중심은 생식 행위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생식 행위는 최초의 행위이자 출발점으로서 나타난다. 그 행위는 세계라는 난자의 기점이자 요점이다. (331-332쪽)
어떤 의미에서 보면 생식 행위를 할 때 여성의 죄는 남성보다 적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남성은 태어나는 아기에게 최초의 죄이자 모든 악과 화(禍)의 근원인 의지를 부여하는 반면, 여성은 구원에 이르는 길을 열어 주는 인식을 부여하는 것이다. 생식 행위란 '삶에의 의지가 새로이 자신을 긍정했다'를 말하는 것으로 세계의 얽힌 매듭이다. (...) 반면 수태와 임신은 "의지에 다시 인식의 빛이 덧붙여 주어졌음"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인식의 빛으로 의지는 다시 자신의 길을 찾아내 구원의 가능성이 새로이 생긴 것이다. (332쪽)
여성은 성교에 대해서는 무척 부끄럽게 생각하지만 임신에 대해서는 아무렇지 않게 여긴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임신은 어떤 의미에서는 성교에 의해 유발된 죄를 없애 주거나 적어도 그 죄의 제거를 약속해 주기 때문이다. (...) 성교는 주로 남성의 일이고, 임신은 전적으로 여성만의 일이다. 아기는 아버지로부터는 의지와 성격을 물려받고, 어머니로부터는 지성을 물려받는다. 지성은 구원의 원칙이고, 의지는 구속의 원칙이다. 지성에 의해 밝기가 더해지는데도 삶에의 의지가 시간 속에서 영원히 존재하려는 표시가 성교다. 다시 말해 이러한 의지에 새로이 덧붙는, 구원의 가능성을 열어 놓는 인식의 빛의 표시이며, 더구나 최고로 분명히 드러난 삶에의 의지의 새로워진 인간화다. 그러므로 임신했을 때는 솔직하게, 의기양양하게 돌아다니지만, 성교는 마치 범죄자처럼 몰래 숨어서 하는 것이다. (333쪽)
7.
성교가 더 이상 그 자체의 쾌락 때문에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이미 삶에의 의지의 부정이 일어나서, 번식 목적이 이미 달성되는 한 인류의 번식은 쓸데없고 무의미한 일이 되기 때문이다. (334쪽)
자연에 반하는 모든 성욕의 충족이 비난받는 것은 원래 이상과 반대되는 근거에 기인한다. 이런 경우에는 성욕의 충족을 따르므로, 삶에의 의지는 긍정되지만, 개체의 출생은 무산되기 때문이다. (334쪽)
8.
수도원은 청빈, 동정(순결), 복종(즉 자신의 의지의 단념)을 서약하고, 공동생활을 통해 부분적으로는 존재 자체, 나아가서 단념하기 힘든 상태를 수월하게 하기 위해 사람들이 모인 곳이다. (334쪽)
금욕 생활과 같은 참된 수도원 생활의 내적인 정신과 의의는 현세보다 내세에 더 나은 존재가 될 가치가 있고 그럴 능력이 있다고 인식하는 데 있다. (335쪽)
수도 생활의 근본 사상이 너무 숭고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최선을 남용하면 최악이 된다"는 것이다. 참된 승려는 극히 존경할 만한 존재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두건 달린 수도복은 단순한 가장 무도회의 복장에 불과하다. 가장 무도회의 복장에서와 마찬가지로 승복에 진정한 승려가 들어 있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335쪽)
9.
자신의 의지를 부정하려면 다른 사람의 의지에 완전히 따르고 맹목적으로 맡겨 버리겠다고 생각하는 것이 그것을 용이하게 하기 위한 심리적 수단이며, 진리를 따르는 적절하고도 알레고리적인 수단이다. (335쪽)
10.
영원한 구원을 얻기 위해 강제적인 고난이 필요함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마태복음 19:24)"라는 구세주의 말에도 나와 있다. 그 때문에 영원한 구원을 얻는 문제를 대단히 진지하게 생각한 자들은 운명에 의해 지체 높은 집안에서 부유하게 태어나면 자발적으로 가난을 선택하기도 했다. 왕자로 태어난 부처 석가모니도 자진해서 문전걸식하는 생활을 했던 것이다. 걸식 교단의 창설자인 프란츠 폰 아시시는 젊은귀공자였다. (336-337쪽)
고난과 고통이 대체로 우리의 구원에 얼마나 필요한지 마음에 생생히 그려 본 자라면 다른 삶의 행복보다는 불행을 부러워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또한 그와 같은 이유로 스토아주의는 운명에 맞서는 신조이고, 사실 삶의 고통을 막아 주는 좋은 갑옷이며 현재를 보다 잘 참아 내는 데 유용하지만, 진정한 구원과는 배치된다. 스토아주의는 마음을 완고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돌처럼 딱딱한 외피에 싸인 마음이 그 외피를 느끼지 못한다면 어떻게 고통을 겪는다고 개선될 수 있단 말인가? (337쪽)
11.
부당하거나 사악한 행위는 그것을 행하는 자의 입장에서 보면 삶에의 의지의 긍정이 강력하다는 표시다. 참된 구원인 삶에의 의지의 부정, 따라서 세상으로부터의 구원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는 표시이므로, 구원에 도달하려면 인식과 고통의 수련을 오랫동안 쌓아야 함을 말해 준다. (...) 형이상학적으로는 선이며 참된 구원에 이르게 해주므로 기본적으로 하나의 자선 행위다. (338쪽)
12.
세계정신 : 그런즉, 여기에 네가 힘들고 고생하며 해내야 하는 힘든 과제가 있다. 다른 모든 사물이 그렇듯이 너는 그런 것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
인간 : 하지만 내가 생존에서 무엇을 얻는단 말인가요? 바삐 일하면 곤궁에 시달리고, 하는 일이 없으면 무료함에 시달립니다. 이렇게 많은 일과 많은 고통을 주면서 보답은 이처럼 보잘것없단 말인가요?
세계정신 : 하지만 그것은 너의 모든 노고와 너의 모든 고통에 알맞은 보답이다. 보답이 보잘것없는 만큼 바로 보답이라고 할 수 있지.
인간 : 뭐라고요? 나로서는 무슨 말인지 도저히 모르겠습니다.
세계정신 : 모르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혼잣말로) 삶의 가치란 삶을 원하지 않도록 가르치는 데에 있다는 것을 저자에게 말해 줘야 하나? 최고의 신성함을 얻으려면 먼저 삶 자체가 이 사람을 준비시켜야 해. (338쪽)
12-1.
삶은 대체로 실패로 끝난 일련의 희망, 공허하게 끝난 계획, 너무 늦게 깨달은 오류에 다름 아니다. 이러한 진리는 다음의 비통한 시구에 잘 나타나 있다. "노쇠와 경험이 손에 손을 잡고 / 그를 죽음으로 이끌었다. / 그때야 그는 깨달았노라. / 평생에 걸쳐 오랫동안 힘들게 노력했지만 / 자신의 견해가 옳지 않음을(로체스터?, [인류에 대한 풍자])." (339쪽)
나는 생존 자체를 일종의 길 잃음보다 나을 것이 없는 것으로 본다. 생존에 대한 인식이 우리를 그러한 길 잃음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준다. 인간은 존재하고 인간인 한 이미 '잘못되어 있다'. 따라서 모든 개인도 자신의 삶을 굽어보며 대체로 '잘못된' 상태에 있음을 발견하는 것은 당연하다. 인간의 구원이란 자신의 삶을 일반적으로 통찰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개별적인 경우에서, 다시 말해 자신의 개인적인 인생행로에서 삶을 인식하는 것으로 시작해야 한다. 왜냐하면 '속(屬)에 적용되는 것은 종(種)에도 적용되기' 때문이다. 삶이란 우리에게 부여된 엄중한 질책으로 봐야 한다. (339쪽)
행복한 삶이란 불가능하다. 인간이 달성할 수 있는 최고의 인생행로는 영웅적인 인생행로다. 그런 생애를 산 사람은 어떤 일이나 문제에서 모든 사람에게 어떻게든 도움을 주기 위해 엄청난 어려움을 무릅쓰고 싸워서 결국 승리를 거두지만, 정작 자신은 보답을 조금밖에 받지 못하거나 전혀 받지 못한다. 그리하여 고치(1720~1806, 이탈리아 극작가)의 희곡 [까마귀]에 나오는 왕자처럼 마지막에는 돌로 변해 버리지만, 고귀한 자세로 관대한 태도를 취한다. 그는 뭇사람의 기억에 영원히 남아 영웅으로 숭배받는다. 그의 의지는 노고와 활동, 실패와 세상의 배은망덕에 의해 평생에 걸쳐 무효로 선언되어 열반에 들면서 소멸된다(카알라일은 [영웅과 영웅숭배]를 이런 의미에서 썼다). (340쪽)
13.
'사리분별에 의해 구원을 얻을 자유도 없는데 무엇 때문에 의지는 수천 가지 형태로 이렇게 고통받으며 불안에 떤단 말인가?'라는 의문이 생긴다. 현상계에서는 삶에의 의지 이외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고, 그것은 굶주린 의지이므로, 삶에의 의지란 자신의 살을 갉아먹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로만 동물계의 고통이 정당화될 수 있다. 따라서 삶에의 의지의 여러 현상은 연속되는 단계로 나타난 그 각각의 현상은 타자를 희생시키며 살아간다. 이 점에 대해서는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의 153장과 154장을 참조하기 바란다. (340-341쪽)
제6장 종교에 대하여
1. 신앙과 지식
철학은 하나의 학문으로서 믿어야 하거나 믿어도 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우리가 알 수 있는 것과만 관계있다. 그런데 이 말이 우리가 믿어야 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라고 한다면 신앙에도 불리하지 않을지 모른다. (...) 그렇더라도 신앙이 철학 이상으로 훨씬 많이 가르칠 수 있으며, 서로 일치하지 않는 철학으로는 아무것도 가르칠 수 없다는 이의가 제기될 수 있겠다. 다시 말해 지식은 신앙보다 더 단단한 재료에서 나온 것이므로 둘이 충돌한다면 신앙이 붕괴한다. 어쨌든 철학과 신앙은 근본적으로 상이해 양자의 안녕을 위해 서로에게 주의도 기울이지 말고 각자 자신의 길을 가도록 할 필요가 있다. (342쪽)
2. 계시
인간이라는 덧없는 종은 신속히 연이어 생겨났다가 사라지지만 개체는 불안, 곤궁, 고통을 겪으며 죽음을 껴안고 춤을 춘다. (...) 인간의 가혹하고 불쌍한 많은 운명 중에서 가장 안타까운 것은 우리가 어디로 가고, 어디에서 왔으며, 무엇 때문에 존재하는지 알지 못하고 살아간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이러한 불행한 감정에 사로잡혀 있는 자는 계시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특별보고를 알려 주려 한다고 사칭하는 사람들에 대해 분노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나는 계시를 전하는 자들에게 오늘날 너무 많은 계시를 말하지 말라고 충고하고 싶다. (343쪽)
인간은 일찍이 인간이 아니었던 존재가 자신과 세계의 생존이나 목적에 대해 설명했으리라고 진지하게 생각할 수 있는 다 큰 어린이에 불과하다. (...) 인간은 대체로 자신의 머리를 신뢰하는 자보다는 초자연적 근원이 있다고 사칭하는 자를 특히 좋아한다. 그런데 우리가 인간들 간의 지적 차이가 엄청나게 큰 것을 주시하면 어쨌든 어떤 사람의 생각이 다른 사람에게는 혹시 계시로 간주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343-344쪽)
* '다 큰 어린이'는 구카이가 말한 '영동무외심(嬰童無畏心)'의 당사자라고 할 수 있음. (박희택)
3. 기독교에 대하여
기독교가 자비, 화해, 원수에 대한 사랑, 체념, 자기의지의 부정(동양에서는 이런 것이 자명한 사실이다)을 배타적으로 자기 것으로 하는 도덕에서 뿐만 아니라 교의학에서조차 이전의 두 종교를 훨씬 능가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하지만 진리를 직접 파악할 능력이 없는 우중(愚衆)에게 실제적 삶에 대한 길잡이로서, 희망과 위안의 닻으로서 완전히 멋진 알레고리를 주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뭐가 있겠는가. 그런 알레고리에는 불합리함이 섞인 조그만 혼합물이 알레고리적 성격을 암시하는 필수적 요소다. (...) 불합리한 점이 생기는 이유는 구약 성격의 교리와 신약 성경의 교리 같은 이질적인 두 가지 가르침이 결합될 수 있기 때문이다. (345-346쪽)
구약 성경과 신약 성경의 결합에서 기인하는 불합리함의 근원에 대한 하나의 실례와 예증은 무엇보다도 루터를 인도하는 별인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해 형성된 예정설과 은총에 관한 기독교의 교리를 우리에게 제공한다. (...) 이러한 학설의 상스러움과 불합리함은 단순히 인간이란 낯선 의지의 작품이며, 이런 의지에 의해 무에서 비롯되었다는 구약 성경의 전체에 기인할 뿐이다. 반면에 진정한 도덕적 장점은 사실 선천적이라는 점과 관련해서, 그 문제는 브라만교와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라는 전제에서 볼 때 완전히 다르고 좀 더 합리적인 중요성을 획득한다. 그 전제에 따르면 어떤 사람이 태어날 때 다른 사람보다 우월하게 해주는 것은 낯선 은총의 선물이 아니라 다른 세계와 이전의 삶에서 완수한 자신의 행위의 결실이다. (347-348쪽)
결국 관용과 모든 죄의 용서, 그리고 원수를 사랑하라고까지 지시하는 그 신은 아무것도 실행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 반대 상태에 빠진다. 모든 것이 지나가고 영원히 끝나 맨 끝에 이루어지는 처벌은 개선도 위협도 목표로 할 수 없는 단순한 복수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고찰하면 사실상 모든 인류는 구원의 선택(우리는 왜 그러는지 모른다)에 의해 구원받을 수 있는 극소수의 예외를 제외하면 영원한 고통과 영겁의 벌을 받도록 창조된 것이 확실하고도 분명하다. (348-349쪽)
맨 처음에 이 교리의 불합리하고 혐오스러운 점은 신이 무에서 인간을 창조했다는 유대적 유신론의 결과다. 유대적 유신론은 그런 사실과 연관되는 자연스러운 윤회설을 실제로 모순되고도 혐오스럽게 부정한다. 윤회설은 어느 정도 분명하다. 그 때문에 유대인을 제외하고, 시대를 막론하고 거의 전 인류가 그것을 받아들인다. (349쪽)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의 체계적이고 경직된 머리로 기독교를 엄격히 교의화해, 성경에서 단지 암시만 되고 여전히 모호한 상태에 있는 교리를 확정해, 후자(모호한 상태에 있는 교리)에 구체적인 윤곽을 부여했고 전자(엄격히 교의화함)를 매우 준엄하게 완성했다. 그리하여 그 교리는 오늘날 혐오스럽다. 그 때문에 그의 시대에는 펠라기우스파의 사상이, 오늘날에는 합리주의가 그것에 반기를 들었다. 예컨대 [신국론](제12권 11장)에서는 문제를 추상적으로 파악해 실제로 이런 식으로 본다. 다시 말해 신은 어떤 존재를 무에서 창조해, 그 존재에게 금지와 명령을 내린다. 그런데 이러한 지시가 지켜지지 않기 때문에 신은 생각해 낼 수 있는 온갖 고통을 가하며 영원히 인간을 괴롭힌다. 이 목적을 위해 신은 인간이라는 존재가 고통스럽게 해체되고 없어져서, 영원히 고통받으며 살도록 육체와 영혼을 분리할 수 없게 결합시킨다([신국론] 제13권 2장, 11장, 24장). (349-350쪽)
나는 인간에게 동정심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사실 인간의 행동거지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선택에 의해 미리 정해졌다는 아우구스티누스의 다른 교리를 덧붙인다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더 이상 알지 못한다. (...) 화형을 당한 사악한 이단자, 율리우스 케사르 바니우스의 목소리에 한번 귀 기울여 보면 우리는 그런 발언에 더욱 혼란스러워진다. "(...) 신의 의지와 달리 인간이 죄를 짓는다면 신은 자신에게 맞서고 그럴 권한을 갖는 인간보다 약한 존재가 된다. 이런 사실에서 추론해 볼 때 신은 지금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원한다고 볼 수 있다. 신이 더 나은 세계를 원한다면 더 나은 세계를 가질 수 있을 테니까([원형 경기장])." (350-351쪽)
그(바니우스)는 이 대목의 앞부분에서 이렇게 말했다. "신이 죄를 원한다면 죄를 저지르는 자는 신 자신이다. 신이 죄를 원하지 않는다 해도 죄는 저질러진다. 따라서 우리는 신이 자신의 의지의 이행 여부를 알지 못하거나 관철시키지 못하거나 중시하지 않으므로 예견력이 없거나 무기력하거나 잔인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351쪽)
유럽이란 무엇이냐고 고지(高地)의 어느 아시아인이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답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유럽은 인간의 출생이 그의 절대적인 시초이며, 인간이 무에서 비롯되었다는 미증유의 믿을 수 없는 망상에 완전히 사로잡혀 있는 대륙이지요." 양쪽의 신화는 별도로 하고 깊디깊은 근저에서 보면 부처의 윤회와 열반은 아우구스티누스가 [신국론]에서 세상을 나누는 두 가지 '나라', 즉 '세속의 나라'와 '하늘의 나라' 개념과 동일하다. (353쪽)
합리주의자들이 악마를 없앤 이래, 여기에서 생겨나는 단점을 점점 더 확연히 느낄 수 있다. 이것은 예견할 수 있는 일이었고, 정통주의자도 그런 예상을 했다. 어떤 건물의 기둥을 제거하면 나머지 부분도 위험해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여호와가 아후라 마즈다의 변형이고, 사탄이 그것과 떼어 낼 수 없는 아리만이라는 다른 데서 확정된 사실이 이런 점에서도 확인된다. 하지만 아후라 마즈다 자신은 인드라의 변형이다. 기독교는 다른 종교와 마찬가지로 순수한 교리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그리고 주로 일련의 사건이고 여러 사실의 복합체며, 개체적 존재의 행위와 고통의 복합체인 하나의 역사라는 본래적 단점을 지니고 있다. (353쪽)
기독교의 또 다른 근본적 오류는 인간을 자연에 반하는 방식으로 동물계로부터 떼어 냈다는 점이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동물계에 속하는데, 인간을 전적으로 홀로 인정하려고 동물을 사물로 간주했다. 그런 반면 브라만교와 불교는 일반적으로 전체 자연과 인간이 유사하다는 것을 인정하듯이, 무엇보다 대체로 동물적인 자연과 인간이 대단히 유사하다는 사실을 단호히 인정하고, 인간을 항시 윤회에 의해 그리고 보통 동물계와 밀접하게 연결 지어 서술한다. 유대교와 기독교에서 동물이 전적으로 무가치한 것과 비교해 볼 때 브라만교와 불교에서 일반적으로 동물이 수행하는 중요한 역할은, 유럽인이 그런 불리리함에 아무리 익숙해져 있다 해도 완전성과 관련해 유대교와 기독교를 가혹하게 비판하는 일이다. 유대교와 기독교의 근본적 오류를 미화하는 것은 사실 그 오류를 확대하는 행위다. 우리는 그런 데서 후안무치하고 가련한, 이미 나의 [윤리학]에서 비판한 술책을 발견한다. (354-355쪽)
기독교의 도덕은 인간에게만 규정을 한정하고, 전체 동물계는 권리 없는 상태로 방치한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대단히 불완전하다. 그 때문에 경찰은 거칠고 무정한, 때로는 금수보다 더한 우중에 맞서 동물 보호에 앞장서야 한다. 이것이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오늘날 동물 보호 단체가 유럽과 미국 각지에서 설립되고 있다. (356쪽)
사람들은 가축을 측은히 여길 것이 아니라 정당하게 대우해야 한다. 유럽에는 대체로 정의가 결여되어 잇다. 그 대륙에는 "유대의 악취"가 짙게 배어 있어 "동물은 본질적으로 인간과 같다"는 명백하고 단순한 진리가 상스러운 역설이 되고 있다. (358쪽)
유럽에서 적어도 동물에 관련한 유대의 자연관이 이제야말로 종말을 맞고, 우리 인간 속에서처럼 동물 속에도 살아 있는 영원한 존재가 그 자체로 인정되고 보호받고 존중받아야 할 시점이다. (...) 동물이 본질적으로 우리와 완전히 같은 존재임을, 그리고 그 차이가 의지인 실체에 있지 않고 단순히 우연에, 즉 지성에 있음을 통찰하지 않을 수 없다. 세계는 형편없이 만들어진 졸작이 아니며, 동물은 우리가 사용하기 위한 제품이 아니다. (361-362쪽)
철도의 가장 큰 선행은 수백만 마리에 이르는 마차 끄는 말들이 비참하게 살지 않게 해주었다는 점이다. 영국에는 채식주의자가 있긴 하지만, 북쪽으로 내몰려 피부가 하얗게 된 인간에게 육식이 필요하다는 것은 안타깝지만 사실이다. (...) 우리는 동물을 도살하기 전에 먼저 마취를 시켜야 한다. 이렇게 고상한 조치를 취해야 인간이 명예로울 것이다. (...) 브라만교와 불교는 자신의 규정을 '이웃'에만 한정하지 않고 '살아 있는 모든 존재'를 보호 하에 둔다. (3622-363쪽)
동물계에 대한 유대인의 견해는 그것의 비도덕성 때문에 유럽에서 추방되어야 한다. 본질적으로 그리고 주된 점에서 동물이 우리와 완전히 같다는 사실보다 더 명백한 게 있단 말인가? (364쪽)
4. 유신론에 대하여
다신론이 자연의 개별 부분과 힘의 의인화이듯이, 일신론은 전체 자연을 한꺼번에 의인화하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나의 창조주여! 나는 한때 무였습니다. 하지만 그대는 내가 지금 무엇이 되어 존재하도록 나를 만들었습니다"나 거기다가 "난 그대의 자선에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결국은 "내가 아무 쓸모 없다면 그것은 저의 탓입니다"라고 말하는 어떤 개체적 존재 앞에 있다고 상상한다면, 나는 철학과 인도 연구의 결과 내 머리가 그런 생각을 견딜 수 없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364-365쪽)
칸트 이후의 철학 교수들이 절대자, 요컨대 아무 근거도 없다고 할 수 있는 절대자라는 것을 그들의 모든 철학적 사고의 끊임없는 주된 테마로 삼는 것을 저지하지 못했다. 그들에게 그것이 그런대로 정당한 생각이다. 일반적으로 이 사람들은 구제 불능이다. 나는 그들의 저서와 강의에 시간을 빼앗기지 말 것을 간곡히 권한다. 나무, 돌멩이, 금속으로 우상을 만들든 추상적 개념을 조합해서 그것을 만들든 매한가지다. 사람들이 자신을 희생시키는 존재, 소리치며 부르는 존재, 감사하는 어떤 개인적 존재를 자기 앞에 가지자마자 그것은 우상 숭배가 된다. 자신의 양을 바치든 자신의 애착을 바치든 그것은 기본적으로 그다지 다르지 않다. 모든 의식이나 기도는 당연히 우상 숭배의 증거가 된다. (365쪽)
5. 구약 성경과 신약 성경
유대교는 사실상의 유신론을 조건으로 하는 현실주의와 낙관주의를 기본 성격으로 하고 있으며, 그것과 가까운 친척 관계에 있다. 이러한 유신론은 물질적 세계를 절대적으로 현실적이라 사칭하고, 삶은 우리에게 주어진 편안한 선물이라고 사칭하기 때문이다. 이와 달리 브라만교와 불교는 이상주의와 염세주의를 기본 성격으로 하고 있다. 그것은 세계에 다만 꿈같은 실존만 허용하고, 삶을 우리의 잘못의 결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첸다베스타(조로아스터교의 경전) 학설에서 염세적 요소는 아리만에 의해 대변되는데, 알다시피 유대교는 그 경전에서 유래한다. (...) 유대교는 아리만을 즉각 자신의 낙관적 근본 오류를 개선하는 데, 다시 말해 원죄에 활용한다. (366쪽)
여호와가 아후라 마즈다라는 결정적인 확증은 그리스어 구약 성경의 제1서인 에스라, 그러므로 루터가 생략한 사제 에이(A. 6장 24절)가 제공해 준다. "예루살렘에 주의 성전을 짓게 한 키로스왕은 거기서 영원한 불에 의해 희생된다." 마카베오가의 제2서도 유대인의 종교가 페르시아인의 종교였음을 증명하고 있다. 포로가 되어 바빌론에 끌려 온 유대인이 느헤미아의 지도로 사전에 성스러운 불을 땅속의 마른 빗물 통에 숨겨 두었다고 이야기되기 때문이다. (...) 여호와가 아후라 마즈다의 변형이듯이 아리만의 변형이 아후라 마즈다의 적수인 사탄이다(루터는 그리스어 구약 성경에 나오는 '사탄'을 예컨대 열왕기상 11장 23절에서 '적수'라고 옮긴다). (366-367쪽)
반면에 신약 성경은 인도에서 유래한 것이 분명하다. 신약 성경에서 드러나듯 도덕을 금욕으로 옮기는 전적인 인도적 윤리, 염세주의, 아바타(신의 화신을 뜻하는 힌두교 용어)가 그것을 증거하고 있다. 그러나 바로 이런 사실에 의해 신약 성격은 구약 성경과 내적으로 결정적인 모순 관계에 있다. 원죄 이야기만 신약 성경이 매달릴 수 있는 연결고리 역할을 할 뿐이었다. 인도의 가르침은 약속의 땅에 들어설 때 타락과 세계의 참상에 대한 인식, 구원의 필요성과 아바타에 의한 구원의 인식을 유대의 일신론이나 "모든 것이 보기에 좋았더라(창세기 1장 31절)"와 결합시켜야 하는 과제가 생겨났지만, 완전히 일절적이고 상반된 두 개의 가르침을 어떻게든 결합시킬 수 있었다. (368-369쪽)
담쟁이덩굴은 버팀목과 발판이 필요하므로 거칠게 다듬은 말뚝을 휘감고 올라가, 보기 흉한 말뚝 어디서나 적응해 무럭무럭 자라지만, 자신의 생명력과 매력을 갖추어 보기 흉한 말뚝을 감싸고 우리에게 즐거운 모습을 보인다. 이처럼 인도의 지혜에서 유래한 그리스도론도 자신과 완전히 이질적이고 조악한 유대교의 옛 근간을 그대로 유지했다. 그리고 유대교의 기본 형태 중에서 유지되어야 하는 것은 그리스도론에 의해 완전히 다른 것, 무언가 생기 있고 참된 것으로 변화되었다. 다시 말해 양자는 같은 것 같지만 실제로는 다른 것이다. (369쪽)
여호와를 찬미하는 현세적인 형편없는 졸작에 관한 유대의 견해는 힌두교와 불교에서 찾을 수 없을 것이다. 멀리 적도의 광야에서 산과 강을 넘어 불어오는 꽃향기처럼 인도의 지혜의 정신을 신약 성경에서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구약 성경에 관해서는 단지 원죄 말고는 아무것도 인도의 지혜와 맞지 않는다. 원죄는 낙관적인 유신론을 교정하는 수단으로서 즉각 첨각되어야 했다. 신약 성경 역시 자신에게 제공되는 유일한 논거로서 원죄를 이어받았다. (...) 기독교를 철저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세상을 부정하는 다른 두 종교, 다시 말해 브라만교와 불교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다. (...) 브라만교와 불교를 알아야 기독교를 제대로 알 수 있는 것이다. (370-371쪽)
나는 언젠가 인도 종교에 정통한 성경 연구자가 나타나리라는 희망을 품고 있다. 그는 인도 종교와 기독교의 유사성을 매우 특수한 특성에 의해 증명할 것이다. 시험 삼아 잠시 다음에 대한 주의를 환기시키고자 한다. 야고보서(3장 6절)에 나오는 "생성의 수레바퀴"라는 표현의 예로부터 해설자에게 고통을 안겨 주었다. 하지만 불교에서 "윤회의 수레바퀴"는 매우 잘 알려진 개념이다. (371쪽)
불교와 기독교의 외적인 우연한 유사성은 그것이 태동한 나라에서 지배적이지 않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둘 다 이렇게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요한복음 4장 44절)." 기독교가 인도의 가르침과 일치하는 점을 설명하기 위해 온갖 추측을 해본다면, 이집트로의 도주에 관한 복음의 고지가 역사적인 요소를 토대로 하고 있고, 예수가 인도를 종교의 기원으로 한 이집트 사제에 의해 교육받았고, 그들에 의해 인도의 윤리와 아바타의 개념을 받아들였으며, 후에 그런 것을 본국에서 유대의 교의에 맞추고 옛 근간에 접목시키려 애썼으리라고 가정할 수 있다. 자신의 도덕적이고 지적인 우월감에 마음이 동해 마침내 자기 자신을 아바타로 간주하고, 그에 따라 자신이 단순한 인간 이상임을 암시하기 위해 자신을 "인간의 아들"로 부르도록 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의 강하고 순수한 의지를 바탕으로, 일반적으로 물자체인 의지에 귀속되는 전능, 그리고 동물적인 쵬녀술이나 이것과 유사한 마법적인 영향으로 알려진 전능에 의해 그 역시 소위 기적을 행할, 다시 말해 의지의 형ㅅ이상학적 영향력을 발위할 능력이 있었으리라 생각해 볼 수 있다. (372-373쪽)
나는 일반적으로 예수의 시대나 환경에서 나온 어떤 원본이나 적어도 단편이 우리 복음서의 토대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세계 종말과 구름을 타고 내려오는 주의 찬란한 재림"이라는 그토록 혐오스러운 예언에서 추론하고 싶다. (...) [예수와 그의 제자들의 목적에 관해]라는 라이마루스의 매우 읽을 만한 책에는 그런 내막이 상세히 설명되어 있다. (...) 예수는 제자들이 볼 때 단지 유대인의 세속적 해방자에 불과했다. 만약 복음서 저자들이 그런 대목을 담고 있던 동시대 자료를 토대로 작업하지 않았더라면 말이다. 심지어 신자들 사이에서 단순히 구전으로 내려온 전통은 신앙을 손상시키는 대상과 관계를 끊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374쪽)
라이마루스는 이해할 수 없게도 다른 모든 것보다 자신의 가설에 유리한 대목인 요한복음 11장 48절(1장 50절, 6장 15절과 비교하는 것)을 간과했고, 마찬가지로 마태복음 27장 28-30절 ; 누가복음 23장 1-4절, 37절, 38절 ; 요한복음 19장 19-22절도 간과했다, 그런데 이런 가설을 진지하게 인정하고 관철시키고자 한다면, 우리는 기독교의 종교적·도덕적 내용이 알렉산드리아, 인도, 불교에 정통한 유대인에 의해 짜 맞추어진 다음, 원래 지상의 메시아를 천국의 메시아로 변형시켜 비극적 운명을 지닌 정치적 주인공을 운명의 연결점으로 만든 것이라고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물론 모순되는 점이 많다. (374-37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