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강해
아레오바고에서의 사도 바울의 설교
사도행전 17:16-34
아덴에 도착한 사도 바울이 아덴 시내를 구경하면서 보니까 아덴 시내가 온통 우상과 우상의 문화가 가득한 것을 보았습니다. 이런 우상과 우상의 문화 하나하나를 바라보는 사도 바울의 마음에 분한 마음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아름다운 재능이 제대로 사용되지 못함으로 우상을 만들어 숭배하는 타락한 문화를 만들어 내는 어리석은 인간들이라는 생각에 이르게 되자 분한 마음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러한 분한 마음은 사도 바울에게 불쌍한 아덴 사람들에게 곧바로 복음을 전하도록 촉구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아덴에서 복음을 선포함으로 그들이 우상으로부터 살아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와 하나님과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도록 애를 썼습니다. 의로운 분노(義憤)로 사도 바울의 영(靈)이 자극을 받아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한 것입니다.
유대인들과의 복음의 변론과 철학자들과의 논쟁
오늘 우리 설교 본문 17절과 18절에 의하면, 사도 바울은 안식일에는 유대인의 회당에서 변론하였고, 평일에는 시장 거리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그리고 아덴은 철학(哲學)의 도시였기 때문에 철학자들과 논쟁을 하였습니다. 오늘 본문 17절의 “변론”과 18절의 “쟁론”의 의미는 약간 다릅니다. “변론”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엘레게토’(dielevgeto)는 ‘의논하다’, ‘대화하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쟁론”에 해당하는 헬라어 ‘시네발론’(sunevballon)은 ‘함께 던지다’라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해 ‘사상(思想)을 앞뒤로 던지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회당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놓고 함께 이야기했고, 철학자들과는 신과 인간과 관련된 생각들을 주고받으므로 격렬한 논쟁을 한 것입니다.
이처럼 아덴 시내를 돌아다니면서 우상숭배와 타락한 문화를 보게 된 사도 바울의 마음에 ‘여기에 주의 복음을 전하여서 이들의 어리석음을 깨닫게 하여 주께로 돌아오도록 하여야겠다’라는 생각이 불일 듯 일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늘 하던 대로 안식일에는 유대인의 회당에 가서 유대인들과 또 경건한 이방인들에게 그리고 평일에는 날마다 토론의 광장에 나가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철학자들과는 인간과 신의 관계를 주고받을 때는 때로는 격렬하게 토론하면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에서와 마찬가지로 아덴에서도 성경에 나타난 그리스도에 대해 묘사하고 역사적(歷史的) 예수를 선포하며 성경의 그리스도와 역사적 예수는 같은 분으로서 하나님께서 보내신 죄인들의 구세주임을 밝혔을 것입니다. 그리고 토론의 광장에서도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전하였습니다. 제2위이신 하나님이 인간이 되어 이 세상에 오셔서 죄인들을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셨고 삼 일째 되는 날 다시 살아나셔서 하늘에 오르시고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계시다가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전했을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 17절에 보면 “장터”라는 말이 있는데 이 “장터”(ajgorav)라는 말은 ‘시장’(市場)이라는 뜻도 있지만, ‘광장’, 사람들이 모이는 ‘회집 장소’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오늘 우리 설교 본문 21절에 의하면, 옛날 그리스 사람들은 이 광장에 매일 모여서 최근의 뉴스(News)와 흥미 있는 시사(時事)와 관련된 문제들을 놓고 토론하는 일이 있었습니다.그러니까 아고라(Agora)는 시장과 공적 생활의 중심지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안식일에 회당에서 복음을 전하는 일을 제외하고는 날마다 이 광장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Luke)는 오늘 본문 17절에서 사도 바울이 이 광장에서 전한 내용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는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오늘 본문 18절 말씀을 보면 짐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18절을 보면 사도 바울은 광장에서 사람들에게 “예수님과 그의 죽으심과 부활”에 대해서 전했습니다. 그리고 에피쿠로스(Epicurus)학파와 스토아(Stoic)학파 철학자들과 논쟁하기도 하였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대로 그리스(Greece)의 아테네는 헬레니즘이 발생한 곳이며 사상(思想)과 철학(哲學)의 도시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당시 에피쿠로스학파와 스토아학파 사람들과 예수님과 예수님의 몸의 부활에 대한 문제로 인하여 논쟁을 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이제 이 두 학파에 대해서 간략하게 생각해 보는 것이 본문을 이해하는 데 유익이 될 것입니다.
에피쿠로스(Epicurus)학파와 스토아(Stoic)학파
먼저 에피쿠로스주의는 에피쿠로스(Epicurus, 342?-270 B.C)라는 사람이 창설하였는데 이들을 쾌락주의자라고 부릅니다. 이들은 인생의 최고의 목적을 쾌락이라고 주장하였고, 인생이 육체적인 고통과 정신적인 불안에서 벗어날 때 쾌락이 느끼게 되는데 이때의 쾌락을 “최고의 선(善)” 혹은 “최고의 행복”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따라서 에피쿠로스주의자들이 말하는 “쾌락”은 ‘육체적인 고통과 정신적인 불안에서 해방된 상태와 그로 인하여 영혼의 평정심, 즉 아타락시아(ataraxia)의 경지에 이르게 될 때 오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최고의 선 혹은 최고의 행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에피쿠로스주의자들이 최고의 행복을 성취하는 조건은 죽음의 공포와 신에 대한 공포와 초자연적인 세력에 대한 공포에서 해방되는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영혼이 평정심을 얻고 유지하는 삶을 사는 것이 최고의 행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들의 가르침에 의하면, 육체적인 고통과 정신적인 불안에서 벗어나서 영혼의 평정심을 유지하고 살기 위해서는 인간 사회에서 도피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들은 죄와 고통의 문제에 대해서 관계하지 않고 도피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이 가지고 있는 철학적 지식으로는 인류가 죄와 죄의 삯인 죽음과 죽음의 증상인 질병과 고통에서 벗어나 해방되는 가르침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이들에게는 이들의 지식으로는 죄와 죄의 결과로부터 해방되는 것들을 설명하고 벗어나게 할 능력이 없습니다.
이것을 구원론적으로 접근하면 에피쿠로스주의자들에게 있어서 구원은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인 불안에서 벗어나는 과정에서 느끼는 쾌락이나 그 상태가 계속해서 유지되는 것입니다. 에피쿠로스주의자들은 처음에는 그런 쾌락을 얻는 방법으로 ‘단순하고 검소하고 꾸밈없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나중에 가서는 결국 육체적 부패를 드러내게 되었습니다. 육체적 쾌락주의로 빠져서 도덕적이고 윤리적으로 문란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스토아(Stoic)주의는 제논(Zeno, 340-365 B.C)이 창설한 것으로 “최고의 선(善)”을 ‘도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도덕적 실천을 매우 강조한 실천적 철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스토아 철학도 나중에는 이론에 빠지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그들은 지고(至高)의 신(神)이 있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범신론적(汎神論的)으로 인식해서 그 신(神)을 ‘세상의 혼’(world soul)과 혼동했습니다. 그들은 세상은 운명에 의해 결정되었으므로 인간들은 아무리 고통스럽더라도 자연과 이성과 조화를 이루어 살기 위해 자기를 포기하고, 그들의 임무를 수행해야 하며, 자급자족하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스토아학파에서는 사람이 도달해야 할 구원의 세계를 자신의 힘과 노력으로 이를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 두 학파에 대해서 간단하게 말하면, ‘우연’과 ‘도피’와 ‘쾌락의 향유’를 강조하는 것이 에피쿠로스주의의 특징이고, 향락주의를 배격하고 ‘도덕주의’를 강조하며 이성에 의한 자기 통제를 주장한 것이 스토아주의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덴이라는 도시는 이런 도시였습니다.
아덴이라는 이 도시가 무엇인가를 찾고 분주하게 사상(思想)을 논(論)하고, 진리가 어디에 있는가를 열심히 찾고, 새로운 사상이 나타나면 그것을 들으려고 했다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들은 고대로부터 사상이 발전해 왔기 때문에 ‘진리의 세계’ 그리고 ‘신’(神) 또는 ‘제일 원인자’(原因者) 혹은 ‘제일 동력자’(動力者)를 추구하고 나가는 그런 양상을 꾸준히 보였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에 따른 여러 이론을 끊임없이 만들어 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무슨 새로운 이론이 나타나서 인생의 문제와 인생의 존재 전반에 대한 문제를 해결해 주지 않는가?’ 하며 새로운 지식, 새로운 진리를 찾는 것이 그들의 일상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그저 배불리 먹으면 되는 것으로 그리고 쾌락을 즐기다가 죽으면 되는 것으로 생각하면서 자기 출세나 꿈꾸고 인생을 살지만, 아덴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무엇인가 인생의 본질적인 문제들을 놓고서 꾸준히 생각하고 탐구하고, 그런 이론들에 대해서 귀를 기울이며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돼지와 같이 먹고만 사는 그런 인생들이 아니었습니다. 적어도 무엇인가 인생의 본질적인 문제들을 놓고 고민하며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인들보다는 몇 배 나은 사람들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과 복음 사역자의 역할
그런데 사도 바울이 이러한 성격을 가지고 있는 도시에서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회당에서 광장에서 그리고 아레오바고 언덕에서 천국의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아덴 사람들에게 대대로 전해져 가르쳐 왔던 철학들은 별 의미가 없는 것이고, 진정한 선(善), 인생의 참된 진리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가르쳤습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최고의 선(善)이며, 참된 진리(眞理)이며, 우리가 배워야 할 바로 그분이라고 가르친 것입니다. 그리고 몸의 부활에 대해서도 전하였습니다. 따라서 구원과 관련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에 대해서 가르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몸의 부활을 전하니까 아덴 사람들로서는 지금까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이론이었고 그래서 ‘이게 무슨 소리인가? 이상한 것을 우리에게 들려준다’라고 하였습니다(17-18절).
여기에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은 하나님의 나라와는 반대되는 사상(思想)이 많이 있고, 그리스도의 복음은 바로 이런 하나님 나라와 반대되는 사상을 가진 사람들의 가운데 들어가서 그들과 변증(辨證)하고, 그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주고, 그들에게 참된 진리를 제시해 주면서, 그들을 사상(思想)을 이기고 극복해 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도 바울을 바로 우상과 철학의 도시인 아덴에 보냈습니다. 유대인들이라든가 예루살렘 같은 헤브라이즘이 강한 그런 사람들과 도시만이 아니라 헬레니즘의 본산지이며, 헬레니즘이 가장 번성했던 그런 지역에서도 천국의 복음을 전하도록 하셨습니다.
오늘날의 도시는 어떤 면에서 사도 바울 당시의 아덴을 방불케 하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우상은 물질적인 것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야 할 일들이 물질에 의해서 가로막혀 버리고, 거룩하고 중대한 문제와 관련한 것들이 우리의 현실적인 삶의 문제에 마음을 다 빼앗겨 버리고, 상실해 버리고, 희석되어 버리는 때가 많이 있습니다.
우리 교우들은 이런 점에서 매우 조심해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먹고살기가 어려우니까 ‘하나님 조금만 참아주십시오. 내 어려운 문제가 잘 해결된 다음에 그때 내가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겠습니다’라고 합니다. 그런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해되고 공감이 됩니다. 하지만 성경은 우리에게 그렇게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먹고사는 문제가 우리의 첫 번째 문제가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고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너희가 이 세상을 살아갈 때 필요한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삶의 우선순위가 바꾸어 져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순서를 뒤바꿔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 사람들로서 하나님께서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모든 것을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믿고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창조의 능력으로 모든 것을 섭리하여 가신다는 것을 믿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 자식이 아버지에게 무엇을 달라고 하면 좋은 것을 주려고 하는 것이 이 세상을 사는 아버지의 마음인데, 하물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구하는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지 않겠느냐는 말씀을 믿어야 합니다(마 7:9-11).
여러분이 하나님의 주권을 믿고 섭리를 믿는다면 먹고사는 문제가 여러분의 삶에 있어서 가장 우선되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 미래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 내가 앞으로 퇴직을 하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하는 문제가 막막하기도 할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시고 약속해 주셨지 않습니까?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러하면 내가 이 모든 것을 채워주겠다”라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여러분이 이 사실 하나만 믿고 살아간다면, 이 땅에서 여러분은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현실성이 너무 떨어진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그렇게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현실이 어떠하고 어떻게 변한다고 하더라도 이 약속의 말씀을 굳게 믿고 나가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미래를 굳건하게 하여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우리 마음을 항상 단속하고 마음을 지키지 아니하면, 우리 속에도 여러 가지 물질적이고 또 정신적인 우상의 요소들이 들어와서 우리의 영적인 민감성과 영적인 자세들을 모두 둔화시켜 버릴 것입니다. 그러면 속수무책으로 사탄과 세상의 유혹에 넘어져 죄를 범하고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합니다. 삶의 우선순위를 분명하게 하고 살아가야 합니다. 삶의 우선순위를 하나님 중심으로 생각하고 사시기를 바랍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언약의 풍성항 복에 관한 약속이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정신을 바짝 차리고 영적으로 깨어있지 않으면, 이 세상의 사상들과 정신들 그리고 그릇된 가치관들이 우리 눈에 보이지 않게 서서히 스며들어와서 ‘정당하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어떻게 살아야 하고, 그리스도의 교회를 위해서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들에 관해 판단을 흐리게 만들고, 순간적으로 다른 생각을 품게 하는 일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해진 결과
사도 바울이 에피쿠로스주의와 스토아주의 철학자들에게 예수님과 부활에 대해서 전했을 때 오늘 본문 18절을 보시면 두 가지의 반응이 나타났습니다. 하나는 “이 말쟁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냐?”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이방 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보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여기 “말쟁이”라는 말의 문자적 의미는 ‘씨를 쪼아 먹는 것’(seed pecker)으로서 이 말은 ‘특별히 자기 머릿속에는 독창적인 사상이 없으면서 여기저기서 지식의 부스러기들을 주워 모으며 거리낌 없이 다른 사람의 사상을 자기 것인 것처럼 말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당시에는 떠돌이 철학자들이 많이 있어서 철학을 이야기하고 돈을 받아서 생활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아마 사도 바울을 그런 사람들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방 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 보다”라고 한 것을 보면, 아마도 철학자들은 사도 바울이 새로운 신(神)들 곧 “예수”라는 신과 “아나스타시스”(ajnavstasi", 부활)라는 ‘부활의 신’을 소개하고 있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아덴의 철학자들이 그렇게 말한 것의 정확한 의미가 무엇이었든 간에 사도 바울이 “예수님의 죽음과 몸의 부활”에 대해 전하였을 때 사람들이 사도 바울에게 “네가 말하는 이 새로운 가르침이 무엇인지 우리가 알 수 있겠느냐 네가 어떤 이상한 것을 우리 귀에 들려주니 그 무슨 뜻인지 알고자 하노라”(19-20절)라고 하면서 사도 바울을 붙잡고 아레오바고로 데려갔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세상에서 뛰어난 철학자들이 인간이 구원을 받고 구원에 도달해야 할 세계에 대해서 말하지만, 이 세상의 철학자들은 구원에 대한 충분한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생각했습니다. 철학자들이 가르치는 것으로는 사람이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에 의한 믿음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의 지식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가 없고, 이성으로는 구원의 세계를 알지 못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서 주시는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의 우선순위를 하나님께 두시고 사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갈 때 필요한 모든 것을 채워주실 것입니다. 아멘.
(2014. 8. 13 수요 예배)
(2023. 10. 1 주일 오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