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서양의 역사와 문화
◎ 2차대전과 유럽
2차대전의 전쟁책임론
2차대전의 전쟁책임 논쟁은 현재까지 해결되지 않았다. 1960년대까지 전통주의에 입각한 지배적인 논리는 나찌독일의 전쟁책임론이었다. 히틀러의 계획된 침략은 뉴른베르그 전범재판의 근본적 테제였다. 따라서'평화와 인류에 대한 범죄행위”를 저지른 나찌독일에 전적으로 책임을 물었다.( 베르사이유 전쟁책임조항:1차대전은 “독일과 독일의 동맹국이 강요한 전쟁”으로 규정하였다.)
1961년 Taylor는 '2차대전의 기원: The Origins of the Second World War“을 통해 수정론을 제기하여 사료를 둘러쌓은 논쟁이 거듭되었다. 그의 중심적 논지는 2차 대전의 기원을 패전국에게만 돌릴 수 없다는 논리이다. 양차대전 모두 집단적으로 책임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2차대전은 “영국등 서방국가에 의하여 독일에게 강제된 전쟁”이라는 수정주의적 해석을 대변하였다. 특히 쳄버린의 유화정책이 히틀러의 정책보다 더 중요한 외교적 실수라고 평가하였다.
토마스 만의 아들이며 역사학자인 Golo Mann은 저서 '19-20세기 독일사'1969년판을 통해 집단책임론을 전개하였다. 틀러의 악마적인 힘이 독일에게만 작용한 것이 아니라, 연합국에까지 작용하여 연합국도 똑같은 책임이 있다는 주장이다. 따라서 러시아, 폴란드, 영국, 프랑스 및 미국도 전쟁에 책임이 있다고 보았다. 독소불가침조약, 폴란드의 영토팽창야욕, 프랑스 동맹정책, 영국의 유화정책, 미국의 초기의 강대국역할: 중립정책등
또한 독일사학자 Hildebrandt와 Hillgrueber등은 제 3제국의 외교정책과 국내정치의 관계를 중심으로 히틀러의 이념과 계획을 연구하였다. 따라서 독일제국성립 이래의 정치, 경제, 이념적인 측면을 고려하여 전쟁책임의 주범 히틀러의 이념적인 의도를 분석하였다.한편 히틀러와 니찌체제에 대한 개념과 해석문제는 기원논쟁의 핵심 과제로써 동일한 사료의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였다. 히틀러 독일사에 우연히 나타난 악마라는 전통주의 해석 방식과 이를 부정한 해석들 마이네케, 리터등 :악마론, 정신질환자론, 악한론에 동조하였다.
독일 사학자 Huttenberger는 1976년 나찌국가의 지배구조를 소관분야별로 분석하여 분야마다 실질적 권력이 주어졌던 다핵권력체로 평가하였다. 즉 나찌국가는 다핵권력체(Polikratie)로 히틀러 개인을 정점으로 한 피라미트적 획일적 통제체제가 결코 아님을 주장하였다.
영국의 유화정책
연합국은 2차대전의 전쟁책임을 나찌독일과 히틀러에게 있다고 규정하였다. 그러나 2차대전의 책임은 뮨헨협상과 관련된 영국의 유화정책에서도 찾을 수 있다. 1938년 3월 히틀러는 사전에 조직이 완비된 오스트리아의 나찌세력의 열렬한 지지하에 오스트리아 린쯔에 입성하여 상제르만 조약을 파기하고 독오통합을 선언하였다. 무쏘리니도 이를 전폭적으로지지하였다. 그러나 영국은 적극저지하지 못하였다. 히틀러의 오스트리아 병합으로 당시 체코의 영토는 거의 독일에 포위돤 상태로 호구 앞에 양과 같은 꼴이 되고 말았다.
히틀러는 계속하여 쥬데덴지역의 독일인의 자치권 인정을 요구하여 침략의 구실을 만들었다. 전운이 감돌자 1938년 9월 15일 영국수상 챔벌린은 히틀러와 회동하였다. 그러나 히틀러는 쥬데덴지역의 독일복귀가 거절하면 세계대전을 불사한다고 위협하였다. “쥬데덴은 독일이 요구하는 마지막영토” 라고 히틀러는 토로하였다. 마침내 챔버린은 프랑스수상 달다디에와 민족자결에 인민투표형식으로 쥬데덴 할양에 합의하면서 유화정책은 절정에 이르게 된다. 후에 처칠은 ' 약소국을 이리의 입에 넣고 일시적인 평화를 구한 치명적인 과오“라고 쳄 버린을 비판하였다. 챔벌린의 의도는 당시 독일과 소련의 예상된 동맹관계에 사전에 방책을 친다는 계산으로 작용하였다.
또한 1939년 히틀러의 폴란드침공은 다시 영국 외교의 실패에 기인한 것이었다. 당시 중립적이었던 스탈린은 폴란드문제에 영국이 개입한는 것을 불편하게 생각하였다. 그러나 영구과 프랑스의 스탈린 유인공작은 체코의 해체로부터 자극을 받았다. 영국은 소련측에게 1939년 3월 루마니아가 독일의 공격받을 때 소련의 입장을 질문하였다. 그러나 소련이 국제회의를 요청하는 방침을 고수하자 챔 버린은 이를 시기상조로 판단하였다. 따라서 영국은 폴란드와의 즉각적인 영토보존협정을 체결할 것을 요청하였지만 폴란드는 완전한 상호원조조약을 요청하여 1939년 4월 상호원조조약이 체결되었다.
스탈린은 독일 파시즘전선에 대항책으로 영국을 포함하는 '평화전선”을 만들고 군사동맹체계를 유지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의 전재조건은 발틱 3국의 할양을 요구였다. 영국은 이를 거절하자 스탈린은 자본주의국가의 미온적태도를 비판하고 영국이 소련을 이용하려 한다고 불만을 토로하였다. 하지만 1939년 5월 신임외상 몰로토프의 등장으로 친독일정책은 강화되고 기존의 리트비노프외상의 집단안보 및 친영주의의 쇠퇴하였다. 특히 폴란드는 소련이 대독전쟁 참가시 소련군의 폴란드 통과를 강경히 반대하고 있었다. 마침내 1939년 8월 21일 독소불가침조약의 체결되자 영국은 물론 전세계가 충격을 받았다.
2차 대전의 경과
폴란드 점령 (작전명: Westwall)
독소조약의 발표로 폴란드 전역에서 나찌의 독일복귀운동을 주도하고 단찌히시 장악에 성공하였다. 영국의 중제에나선 독일과 폴란드협상은 성사되지 못하였다. 독일측이 제시한 16개원칙 특히 단치히 자유시의 반환 및 회랑지역의 귀속문제를 지역 주민의 인민투표로 결정하자는 사항은 폴란드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히틀러는 '9월 1일 국경에서 폴란드 정규군이 도발하여 새벽 5시 45분부터 이를 반격하였다.'라는 억지 주장을 하고 전쟁이 개시되었음을 발표하였다. 영국과 프랑스도 총동원령을 내리고 9월 3일 대독선전포고를 하였다.
영불의 대항 공격없이 독일군은 공습 과 전차부대를 앞세우고 150만 23개 사단의 병력을 전격전에 투입시켜 불과 몇 주만에 폴란드점령에 성공하였다. 사실상 바르샤바가 함락된 9월 27일이후 거의 6개월간 독일 서부에서는 전투가 없었다. 9월 17일 스탈린도 붉은군대에 명령하여 동폴란드지역을 점령하여 쿠종선보다 더 깊숙히 서쪽으로 진격하였고 리투아니아도 점령하였다. 이로써 폴란드 4차분할이 시작되었다. 9월 28일 새로운 독소 우호조약이 체결되여 구 독일영토엿던 단찌히, 동프로이센, 상부 슐레지엔과 포젠등은 독일에 귀속되었다. 스탈린은 발트3국과 강제적인 우호동맹을 체결하여 이를 소련영토에 편입시키고 1940년 6월 이후 강제 적인 이주정책을 실시하였다.
한편 소련은 1939년 11월 핀란드에게 전략적 교두보의 확보를 목적으로 필란드 영토의 일부를 할양할 것을 요구하여 소련과 핀란드간의 겨울전쟁이 시작되었다. 핀란드는 강력한 민족정신을 무장하고 소련군에 적극 댕항하였다. 1940년 영국과 프랑스의 간섭이후 휴전하고 모스크바협약으로 강화가 이루어졌다.
히틀러의 딜레마는 무쏘리니가 동맹의무를 이탈하여 중립을 선언한 것이었다. 따라서 히틀러는 평화주의자의 가면을 쓴 채 영국과 프랑스에 협상을 제의하였지만 이를 거절당하자 개전준비에 매진하였다. 당시 연합국측은 전쟁준비가 미흡하여 소극적인 독일공세로 나왔다. 영국은 개전 한달후에야 2만명 수준의 군대를 프랑스에 상륙시켰고, 영국공군은 보복이 두려워 독일을 공격하지 않았다. 프랑스도 국경에서 병력을 배치한 채 독일군의 공격을 대기하였다. 당시 프랑스 정국은 불안정하였고 친나찌의 노선은 결집하여 활성화 되었다.
스칸디나비아 공격 (작전명: Weseruebung)
히틀러의 평화공세가 실패하자 독일군부는 겨울이 지나기 전 프랑스와 벨기에를 공격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지만 날씨를 이유로 이는 1940년 봄으로 연기되었다. 영국은 독일군의 예상된 노르웨이 상륙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였다. 독일군은 스웨덴의 철 확보를 위해 노르웨이의 부동항 나르빅을 점령키 위한 작전명 Weseruebung을 실시하고 사상최초의 육해공 합동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였다. 1940년 4월 5일 덴마크는 전투 없이 점령되었다.
노르웨이는 국왕은 독일과의 협력을 거절하고 적극적인 저항을 발표하였다. 노르웨이는 특히 나르빅부근의 독일군 전함에 막대한 타격을 입히는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영국과 프랑스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노르웨이 국왕은 영국으로 망명하여 계속 저항운동을 해 나갔다. 노르웨이의 수상 Quisling 퀴슬링은 나찌협력자의 대표자로 악명이 높았다 . 또한 히틀러는 군인출신이 아닌 Essen의 나찌조직책임자 (Gauleiter) 출신의 테르보펜을 총독으로 임명하였다. 점령정책은 민정으로 이루어 졌지만 행정등 모든 조직체계는 나찌화되었다.
베네룩스와 프랑스 점령
1940년 6월17일 프랑스는 마침내 항복하고 프랑스 제 3공화정의 달다디에-폴네노 우익거국내각은 붕괴되었다. 당시 국방차관 드골은 영국의 망명정부를 통해 전쟁을 계속적으로 수행하였다. 또한 프랑스에 비시에 페탕을 수반으로하는 비시정부가 성립되었다. 페탕장군은 '휴전은 엄혹한 것, 그러나 프랑스는 프랑스인에 의한 정부가 존재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프랑스 영토의 5/3은 독일군 점령지역으로 나머지는 자유지역으로 비시정부의 통치하에 놓이게 되었다. 따라서 비시정부는 프랑스의 자유, 평등, 박애를 대신할 '노동, 가족, 조국'이라는 표어아래 나찌 국민혁명을 추진하였다.
프랑스의 항복
1940년 5월 10일 서부전선에서도 전투가 개시되었다. 독일군은 공수부대를 필두로 불과 5일 만에 네덜란드를 점령하였다. 룩셈부르크도 전투없이 점령되자 만스타인 장군의 전략대로 프랑스공격을 시도하였다. 독일군 120개 사단 병력이 동원되는 전격전으로 5월 17일 브뤼셀를 함락시킨 후 마지노선 부근에서 연합국 20개사단을 포위하였다. 연합군 35만명은 필사적으로 탈출하여 덩케르트항에 결집하는 과정에서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마지노선이 붕괴되자 1940년 6월 5일 독일군은 170킬로의 전선에서 일제히 프랑스를 공격하여 6월 14일 파리가 점령되었다. 프랑스의 저항은 소극적이었다. 따라서 프랑스 내륙은 쉽게 함락되었다.
프랑스 3공화정의 몰락
1940년 5월 10일 독일군의 서부전선에서의 전투가 개시된다. 독일 공수부대는 5일만에 네덜란드를 점령하고 프랑스를 공격을 시작하였다. 독일은 만스타인장군의 프랑스전략에 따라 120개 사단병력을 동원하고 전격전을 치룬다. 5월 17일 부류셀 함락이후 마지노선 부근에서 우회하여 독일군은 영국과 프랑스군 20개 사단을 포위한다. 포위된 35만명은 필사적으로 영국으로 탈출을 위하여 덩케르트항에 결집하였지만 심각한 피해를 입는다. 1940년 6월 5일 170킬로의 전선에서 일제히 프랑스를 공격하고 6월 14일 파리는 점령된다. 마지노선은 붕괴되고 프랑스는 소극적 저항을 한다. 독일군은 양면 작전으로 프랑스 내륙을 쉽게 함락시킨다.
프랑스의 항복: 6월17일 프랑스군은 항복하고 휴전하여 비시정권이 성립된다. 당시 국방차관이던 드골은 영국에 망병정부를 세운다. 달다디에 폴네노 우익거국내각은 붕괴되고 결국 페탕(P.Petain)내각의 비시정부가 성립된다. 페탕은 '휴전은 엄혹한 것이만 프랑스인이 주도하는 정부는 필요한 것이다'라 성명을 발표하면서 나찌와의 협력체계에 동조한다. 이로써 프랑스 국토의 5/3은 독일 점령하에 나머지 지역은 비시정부의 통치하에 놓인다. 프랑스의 자유,평등, 박애정신은 ' 노동,가족, 조국'의 표어로 바뀌고 나찌적인 국민혁명을 추진한다.
대외적 레지스탕스운동 (La Resistance exterieure): 국방차관 드골은 런던에서 <<자유프랑스>>를 조직하여 망명정부의 역할을 수행하고 연합국과의 협조체계를 긴밀히 유지한다. 한편 프랑스 국내의 저항운동도 다양한 조직망들로 이루어졌고. 기존의 정당과 사회단체가 주체가 되었다. 1942년에는 국내 저항세력이 통합되여 영국 망명정부와의 연대를 강화한다.
이탈리아의 참전
무소리니는 프랑스가 무너지자 마침내 중립선언을 포기하고 1940년 6월 10일 독일측에 가담하였다. 히틀러는 이탈리아군의 참전으로 전략상 지중해전투의 유리한 고지를 확보하고 영국에 직, 간접적으로 타격을 줄 수 있는 가능성을 확보하였다고 판단하였다. 그러나 이탈리아군이 연속적으로 전투에서 부진을 면치 못하자 독일측은 북부아프리카, 발칸, 스페인 남부의 전략에 커다란 차질이 생겨났다. 특히 무쏘리니의 그리스 전투의 패배등 발칸에서의 실패로 1941년이후 독일군이 이지역에 파병되어야 하였다.
독일군의 영국침공
작전명은 바다사자 (Seeloewe)이다. 보수당 당수 처어칠 거국내각은 폴란드 침공이후의 모든 히틀러의 평화안을 반대하는 대독강경책을 고수한다. 따라서 히틀러의 예상된 영국본토 상륙작전에 대비한 총력전을 주장하였다. 1940년 8월 이후 2500대의 전투기를 동원한 독일공군의 대규모 공습개시 되었지만 레이다에 의한 타격도 적지 않았다. 히틀러는 작전을 변경하여 야간공습에 의존하고 본토상륙은 1941년 봄으로 지연하였다. 또한 독일군은 해전에서의 심각한 패배로 인한 해군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잠수함전을 속개하였다. 사실상 독일은 1940년이후 매월 40여대의 잠수함을 건조시켰다.
2차대전과 영국의 대외정책
1944년 10월 처질은 모스크바에서 스탈린과 비밀리에 회동한다. 스타린의 요구사항은 동유럽에서 소련에 우호작인 정부가 수립되고 독일는 분할되여 특히 남부 독일의 수도는 비엔나로 정하며, 루르와 쟈르지역 및 북해-동해운하는 소련이 참가하는 국제적 통제에 두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처칠은 스탈린에게 소련이 루마니아에서 90%, 헝거리와 불가리아에서 80% 영향력을, 영국이 그리스에서 90%의 영향력을 상호 인정하였다. 그러나 유고와 폴란드에서의 영향력은 양국이 공동으로 점유해야된다고 역설하였다.
결국 처질은 소련의 동남부 유럽의 지배권을 인정한 셈이었다. 한편 티토가 주도한 소련군과의 베오그라드 해방으로 소련의 영향력이 더 강해졌다. 폴란드문제 역시 소련의 보호하에 성립된 루블린 위원회가 1944년 7월 “국민해방 폴란드위원회'로 둔갑하고 소련이 공식정부로 인정하였다. 한편 1944년 10월 소련은 영국의 후원하는 폴란드 향토군은 독일 공세시 소련군이 후원을 거절하여 수 만명이 사상되는 과정에서 독일군에게 의도된 항복을 강요하였다. 1945년 1월 소련군은 독일군이 철수하자 바르샤바에 입성하면서 루부린정부도 따라서 이동하였지만, 영국 망명정부의 입국을 방해하였다.
독소개전 (작전명: Babarossa)
히틀러는 원료공급지확보와 발칸에서의 경쟁관계를 종식시키고, 영국과 예측 가능한 동맹관계를 사전에 분쇄시키기 위해 소련을 공격하여야 하였다. 소련의 점령이야 말로 히틀러의 대게르만 재국 건설의 절대필수적인 관건이었다. 또한 히틀러는 영국의 영향력 지역인 이란, 인도, 아프칸등에 소련이 이권을 차지하지 못하도록 사전에 봉쇄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는 소련이 전격전으로 성공될 수 없는 지역임을 간과했다. 1940년 7월 31일 소련 공세가 시작되기로 예정되었지만 발칸사정으로 대소전은 5주 동안 연기되었다. 루마니아의 유전확보를 두러싸고 영국의 위협공세도 지연이유가 되었다. 영국과 소련의 후원을 받는 유고에서의 반격도 만만치 않았다. 또한 1941년 3월 영국군이 그리스에 상륙한 이후 그리스에서의 전투도 독일측에게는 큰 부담이었다.
1941년 6월 22일 독소개전이 시작되었다. 독일과 동맹관계에 있던 이탈리아, 루마니아, 핀란드도 대소개전을 시작하였다. 독일군은 처음부터 기습작전에 성공하여 소련군에 연전 연승을 하였다. 1941년 가을 독일군은 레닌그라드, 키에프를 거쳐 모스크바에 육박하였다. 스탈린은 400만명의 병력상실과 물자의 부족에도 저항을 계속하여 전쟁은 장기전화되었다. 스탈린은 10월 중순 모스크바 공방전에 직접 지휘를 하고. 빨찌산전투등을 통해 12월초 독일군에 막대한 타격을 입혔다. 1942년 3월까지 독일군은 100Km 후퇴하였다.
스탈린그라드 공방전
독일군은 1942년 봄 이후 240개 사단병력을 동원하여 동맹국의 지원하에 재차 공세를 시작하였다. 특히 남부공략에 성공하여 흑해방면에서 동진하여 1942년 8월 스탈린그라드를 점령하였다. 1942년 10월 독일군이 볼가지역에 진출하자 소련은 최대의 위기를 맞게되었다. 1942년 11월 소련군이 총반격하자 독일군은 1943년 1월에 칼라치지구에서 33만명이 포위당하고 말았다. 스탈린은 독일군 섬멸작전을 명령하여 9만명의 독일군이 포로가되고 겨우 몇 천명만 살아남는 대 전과를 올렸다. 1943년 여름 이후 소련군의 동부에서의 주도권이 확보되었다. 1944년 1월 소련군은 레닌그라드를 탈환하고 독일군을 44년말까지 동구로 내밀었다.
아프리카전투
한편 북아프리카 특히 리비아에서 롭멜군단의 전차부대가 승리하자 동쪽으로 이동하여 수에즈를 점령하였다. 당시 연합국이 가장 어려운 시기였다. 1941년 12월 일본의 진주만 공격이후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였다. 미국은 1942년 6월 미드왜이 해전의 승리로 일본 항공모함 4대를 격침시켰다. 8월에는 과달카날의 비행장을 탈취하고 3회에 걸친 솔로몬 해전에서 승리하였다. 이러한 승리는 연합국 전시협력체제가 성립되는 계기가 되었다.
독일군이 대소전에서 열세로 나타나자 1942년 가을 몽고메리 장군휘하의 영국군은 아프리카 반격을 시작하였다. 영국군은 제너럴 셔먼의 전차개발로 롬멜군단에 打擊을 가하였다. 아이젠하워의 미영연합군이 1942년 11월 850척의 전함과 14만의 해군병력으로 프랑스영 모로코와 알제리에 상륙하였다. 연합군은 1943년 5월 협공으로 독일군을 튀니지에서 포위하였다. 이로써 독일군은 북아프리카 전투에서 결정적인 패배를 당하였다. 이후 드골 망명정부인 프랑스 위원회는 알지에로 본거지 옮기고 국민해방 프랑스위원회로 개편하여 본토에서의 대독전을 준비하였다.
이탈리아의 항복
무솔리니는 나찌독일이 폴란드, 스칸디나비아와 베네룩스 그리고 프랑스 점령에 성공하자 1940년 6월 10일 독일측에 가담하고 2차대전에 참전한다. 사실상 히틀러는 전략적으로 지중해전투의 중요한 교두보를 이탈리아군이 확보하여 연합군에게 심각한 타격을 줄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그러나 무솔리니의 군대는 지중해와 발칸, 북아프리카, 스페인 남부등의 전투에서 점차적으로 패배하는 부진을 면치 못하였고, 그리스 전투에서는 그 절정에 달하였다.
1941년 이후 히틀러는 이러한 전략상 차질을 차단키 위해 발칸과 아프리카전투에서 무솔리니의 임무를 대신할 독일군 파병을 결정하였다. 한편 전투에서 나타난 이탈리아군대의 연속적인 패배와 독일군에 의존하는 수모는 무솔리니의 위신추락으로 나타났다. 1943년 3월 이후 국내에서는 임금인상 및 종전을 요구하는 격려한 노동운동이 일어나고 무력한 군대는 전선을 이탈하기 시작했다.
1943년 7월 아이젠하워의 시칠리아 상륙이후 미군의 로마진격이 개시되었다. 이탈리아의 레지스탕스 운동은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와 기독교주의자 ( 인민당에서 기독교 민주당으로 개칭)등에 의하여 전개되었고, 드들은 밀라노(Milano), 토리노Torino)등 주요도시를 해방시켰다. 이러한 이탈리아 반파시스트 동맹 (이후 1944년 로마협약으로 반파시트전선으로 개칭)은 1943년 7월 무솔리니를 체포하고 강금하였다.
따라서 무솔리니의 총사령관 P. Badoglio 바돌리오는 내각(1943-44)을 구성하고 9월 무조건 항복에 서명하였다. 이후 이탈리아는 연합국에 가담하여 전투를 속개한다. 한편 이탈리아의 전설이탈은 히틀러에게 커다란 충격이었다. 그는 무솔리니 구출작전을 지시하여 아페닌 산맥 그란사소에 독일공수부대를 침투시켜 극적으로 성공시키고 북부 이탈리아에 파시스트 정권을 수립케하였다.
1943년 9월 본토에 연합국이 상륙하자 로마근교에서 독일군은 반격으로 맞섰지만 공군력의 열세로 퇴각하였다. 1944년 6월 반파시스트 국민해방위원회는 북부에서 소위 빨찌산 전투에서 승리하고 스위스로 탈출하려는 무솔리니는 체포되었다. 1945년 봄 독일군은 항복하고, 1945년 4월 무솔리니는 코모호반에서 총살되고 그의 시신은 밀라노 광장에 방치되는 수난을 당한다. 파시스트(Fascista)에 의해서 비합법화된 인민당(기독교민주당의 전신 추후 이탈리아 현대사에 한 장을 열게 되었다.
노르만디 상륙작전
1944년 6월6일 아이젠하워를 총사령관으로 영국에 집결한 연합군은 병력 41개사단, 13000 전투기와 6000 전투정를 동원하여 프랑스 노르만디에 상륙작전에 성공하였다. 이로써 서부전선 즉 유럽 제2전선을 형성되었고 독일군에게 점령된 프랑스가 해방되기 시작하였다. 프랑스도 레지스탕스의 활약으로 파리 수복에 기여하였다. 8월24일 26일 파리에 드골망명정부가 입성하였다.
동유럽의 해방과 히틀러의 최후
1944년 6월 동부전선에서 소련의 반격이 시작되고 7월에는 소련군이 바르샤바 근교에 진주하였다. 티토가 이끄는 50만의 유고 해방군도 공세를 강화하였다. 1944년 7월 20일 히틀러 암살시도의 실패로 돌아갔다. 연합군은 1945년 봄 이후 독일 본토를 공격하였다. 4월 22일 소련전차부대가 베를린 외곽에 출연하고 4월 25일 엘베강에서 미소양군의 악수를 하였다. 4월 29일 베를린이 포위되자 히틀러는 자살하였다. 1945년 5월 7/8일 독일은 군사적 항복을 하고 무조건 항복문서에 서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