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시 오신 예수 포사이드(Willy H. Forsythe, 보위렴) 선교사 >
고 산지 - 연자시편 칼럼 (2023년) 한국문학신문 1월 11일 (제577호)
(1)
성육신하신 그분,
30년 준비한 3년간의 공생애(公生涯),
짧고 굵게 쓴 대속(代贖)의 삶으로 사랑의 본 보이셨네.
복음의 씨 뿌렸네.
미국에서 태어나(1873년)
31살에 조선에 파송된(1904년 9월) 포사이드(보위렴) 선교사,
왕진 요청을 받고 강도당한 환자를 치료했네.
밤이 늦어 환자 집에 머물다
다시 찾은 떼강도에게 난자를 당하고
왼쪽 귀까지 잘리었네(1905년 3월)
군산 구암진료소에서 응급처치를 한 후,
전주진료소를 거쳐
경성(京城) 세브란스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으나
여의치 않자 미국으로 돌아갔네. (1906년)
붙잡힌 강도를 위해 내가 죽지 않았으니,
그 사람들의 죄(罪) 묻지 말고 죽이지 말라는 편지를
전라감영에 보냈네.
(2)
2년 동안 요양하고 전주선교지부로 복귀한 포사이드(보위렴) 선교사,
목포 프렌치(富蘭翠)병원으로 사역지를 옮겼네.
강도를 만나 받은 상처를
예수님 사랑으로 치유 받은 포사이드(보위렴) 선교사.
몸과 마음이 병든 조선 사람을 치유하는데
자신의 측은지심(惻隱之心)을 모두 쏟아냈네.
지방 순회를 나선 광주선교지부 오웬(Clement C. Owen 오원) 선교사,
급성 폐염(肺炎)으로 생명이 위급했네.
광주 제중원 윌슨(R. M. Wilson) 원장의 호출을 받고
선편(船便)으로 영산포에 도착한 포사이드(보위렴) 선교사.(1909년 4월)
조랑말을 타고 광주로 향하는 도중
죽어가고 있는 한센병 여인을 만났네.
한센병 여인을 조랑말에 태우고
말고삐를 잡은 포사이드(보위렴) 선교사.
오십 리를 걸어서 제중원(濟衆院)에 도착했네.
오웬(오원) 선교사가 소천한 후였네.
(3)
한센병 환우(患友)를 부액(扶腋)한
선(善)한 사마리아인.
조선 구라(救癩) 사역의 마중물이 되었네.
30년을 준비하고
5년을 사역한 포사이드(보위렴) 선교사.
빈자(貧者)와 함께,
걸인과 함께,
고아와 함께,
나환자와 함께
호남에 뿌린 그의 성육신 씨앗.
그의 삶 본받아 회심한 탕자(蕩子).
거두리(巨杜裡) 참봉이 되어 기쁨의 단 거두었네.
걸인들의 대부(代父) 되어 성자(聖者)처럼 살았네.
그의 삶 본받아 회심한 탕자(蕩子).
깡패에서 거듭난 오방(五放) 최흥종(崔興琮).
나환자(癩患者)의 대부(代父) 되어 성자(聖者)처럼 살았네.
1904년 9월 29일 선교사 최초로 조선의 한센병 환우를 지극 정성으로 돌본 윌리엄 포사이드(W. H. Forsythe) 선교사가 조선 땅(제물포)을 밟았다. 예수병원 초대 원장 마티 잉골드가 안식년을 맞아 귀국한 사이 병원을 책임진 그는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진료를 시작했다. 그는 환자를 돌보면서 조선어를 익히며 시간이 나는 대로 남문 시장터로 ‘쪽 복음’을 들고 나가 전도하면서 거지 아이들을 위한 고아원을 설립했다.
전주진료소(현 예수병원)에 부임 6개월, 목천포 당뫼(지금의 ‘만경강문화관’ 자리 추정)에 이경호(전주 이씨 양반) 집에 강도가 들어 이경호가 상해를 입고 사경을 헤매자, 이경호의 서자 이보한이 직접 포사이드 선교사에게 왕진을 청했다. 치료는 했으나 날이 저물었다. 그 집에서 하룻밤을 묵고 있는데 이경호집에 다시 떼강도가 포사이드 선교사는 얼굴과 목에 큰 자상을 입고 한쪽 귀가 잘리었다. 군산 구암진료소로 급히 옮겨 응급진료를 마친 포사이드 선교사는 전주진료소를 거쳐 경성(京城) 세브란스병원으로 후송되어 집중 치료를 받았다. 이마저도 여의치 않자 치료를 위해 미국으로 돌아갔다
전라 관찰사가 강도상해사건의 주범들을 잡고 그에게 사건에 대한 경과보고를 하며 처벌에 대하여 물었다. 전후 사정과 모든 것을 거두절미하고 포사이드 선교사는 ‘아무 조건 없이 용서 한다’고 하였다. 이 일은 전주 양반들이 교회에 나오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조지 톰슨 브라운의 『한국 선교 이야기』는 이 사건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그해의 도시선교는 앞선 해와 비교할 때 전혀 다른 양상을 띠게 되었다. 1905년 2월까지 교회에 모인 남자들은 완전히 중산층 상이이거나 농부가 아니면 하층 짐꾼들이었다. … 교육받은 사람들은 한결같이 기독교를 반대하거나 무관심했었다. … 포사이드 박사가 상처를 입은 한 달 뒤, 상당수의 고위층과 부유층의 이 씨 문중 사람들과 집안의 가장들이 큰 길에서 가마를 내려서 예배드리는 외국사람 집에 가는 것을 보고 이것이 그 도시의 이야깃거리가 되었다. … 이 사건이 본이 되어 교회에 나오는 것이 더 이상 체면이 깍이는 일이 아니었다.”
이보한은 이경호의 서자지만 장남으로 1872년에 익산 목천포 당뫼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렸을 때 열병을 앓아서 왼쪽 눈이 실명하였고 후처의 아들로서 주변의 눈총을 받으며 외롭게 자랐으나 성격이 호방하고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성품이었다. 그는 포사이드 선교사의 조건 없는 용서는 상처투성이 그의 가슴을 따스하게 녹였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한 그는 거두리(巨杜裡=큰 뱃심을 부리며 사는 사람) 참봉으로 불리면서 빈민(貧民) 걸인들과 동거하면서 복음 전도인, 사회적 약자들의 친구 겸 보호자, 불의에 저항하는 자, 비밀리 독립운동을 하면서 예수 닮은 삶을 몸소 실천했다. 1931년 음력 8월 16일에 육신의 장막을 벗고 소천하자 전주의 거지들과 상관 골짜기 나무꾼들 2백여 명이 그의 집에 모여 영결식 비용을 자기들 부담하는 ‘걸인장’으로 장례를 치루겠다고 하였다.
전병호의 『이야기 전킨 선교사는 이보한의 장례식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거리의 지게꾼들은 생업을 전폐하였고 걸인들은 상여 채를 붙들고 뜨거운 눈물을 쏟아냈습니다. 전주의 신작로는 조문객들로 홍수를 이루었습니다. 물 한 모금 마시지 않은 채 걸인들은 다투어 상여를 매었고, 수백 장의 만장 깃대는 좁은 목에서 상관 색장리 까지 장장 십리나 뻗어 있었습니다. 그에게 은혜를 입은 걸인들은 장지에서도 삽을 쓰기를 거절하고 손으로 흙을 파서 봉분을 만들고 자갈 하나라도 들어가면 안 된다고 온 정성을 다해 안장을 하였습니다” 나무꾼들과 걸인들은 1전씩 모아 120cm 높이의 비석을 만들었다. 묘비명은 <李公거두리 愛人碑>이며, 비문에는 “平生性質 溫厚且慈 見人飢寒 解衣給食 한 평생 자비로운 성품, 굶주리고 헐벗은 자를 보면 옷을 벗어주고 밥을 먹여 주었네” 으로 적었다.
미 켄터키주에서 태어나 루이빌의대를 졸업한 포사이드는 1898년, 미국-스페인 전쟁 중 군의관으로 쿠바에 파견되기도 했다. 그는 쿠바에서 한센병 환자를 처음 진료했다.
그는 전쟁 중에 겪은 생명에 대한 존중 빈민가 봉사를 통한 병마의 아픔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미국남장로회가 전주선교부 진료소 책임자를 찾고 있자 조선 선교사에 자원했다. 2년 동안 고국에 돌아가 치료를 마친 포사이드 선교사는 다시 조선에 돌아와 전주선교지부에서 목포선교지부로 사역지를 옮겠다. 목포 프렌치(富蘭翠)병원은 맡아 운영하면서 순회진료를 통해 복음을 전했다. 1908년 이기풍 목사가 제주도에 들어 온지 1년 후 1909년 프레스톤 선교사와 함께 포사이드 선교사는 제주읍으로 들어와 진료를 하고 전도지를 나누어 주었다. 이기풍 목사가 세운 제주성내교회 당회록에는 포사이드 선교사가 전도지 3천권을 나누어 주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제주 구좌읍에 있는 세화교회 설립 기록에도 이와 같이 나와 있다. “제주 한동리 출신인 부상규가 목포에 주재하고 있었던 의료선교사 포사이드에게 복음을 받았고, 부산진에 사역하던 왕길지 목사에게 학습을 받았으며, 1918년 가을 이기풍 목사에게 세례를 받음으로 이곳의 초대신자가 되었다.”
1909년 4월 4일, 동료 오웬 선교사가 위독하다는 전보를 받고 황급히 목포에서 배를 타고 영산포에서 내려 조랑말을 타고 광주를 향하던 중, 길가에 쓰러져있는 한 여인을 발견하고 가던 길을 멈추고 길을 멈추었다. 손과 발은 짓물렀고 퉁퉁 부어 있고, 온통 상처투성이에 걸친 누더기 옷은 피고름으로 얼룩진 한센병 환자였다. 포사이드는 길가에 버려져 신음하고 있는 환자를 그냥 버려두고 지나칠 수는 없었다. 그는 피고름을 흘리고 있는 그 한센병 환자를 감싸 안아 자신의 말에 태웠고 자신은 말고삐를 잡고 50여리를 걸어서 광주에 도착했다. 자신의 조랑말에서 한센병 환자를 두 손으로 감싸 안아 내리는 신사복을 입은 파란 눈의 선교사, 손과 발이 부어올랐으며 진물이 흐르고 있는 한센병 환자, 한발은 짚신이고 다른 한 발은 종이로 감았는데 걸을 때는 심하게 절뚝거렸다. 거리낌 없이 그녀를 부축하는 포사이드 선교사를 구경꾼들과 함께 지켜보고 있던 깡패 최흥종은 충격을 받고 회심하여 나환자를 돕는 목사가 되었다.
한센병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제중원에는 그녀를 치료할 마땅한 거처가 없었다. 포사이드 선교사의 간절한 부탁을 받은 제중원 원장 윌슨(우월순)은 고심 끝에 광주 동남쪽에 위치한 옹기 가마터를 한센병 환자의 임시 거처로 정했다. 선교사들이 쓰던 침구와 옷가지를 챙겨주고 그녀를 일주일간 직접 치료한 포사이드 선교사는 목포로 돌아갔다. 파란 눈 노랑머리 서양 선교사가 나병 환자를 극진히 보살펴 주었다는 소문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자 나병 환자들이 하나 둘씩 광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윌슨 제중원 원장은 1912년 최흥종이 기부한 광주군 효천면 봉선리에 나병 환자 수용소와 병원을 세웠다. 닥터 포사이드와 한 나병 환자의 우연한 만남이 계기가 되어서 4년 만에 병원과 수용소가 준공된 것이다. 포사이드 선교사는 풍토병에 감염되어 선교지에서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게 되자 1911년 고국으로 돌아갔다. 그는 투병 중에도 7년이 넘게 미국 각지를 순회하면서 조선 선교에 대한 강연을 계속했다. “그들이 질병에 노출되어 무방비 상태로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도움이 필요합니다. 빨리 도와주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그들을 도와줍시다.” 그는 나병 환자를 돕기 위한 성금 모금과 한국으로 파송할 선교사를 모집하는 등 많은 일을 했다. 귀가 잘리고 나서 그 후유증과 풍토병으로 1918년 5월 9일 45세에 세상을 떠났다.
1909년 8월 《미셔너리리뷰(The Missionary Review of the World)》에 기고한 오웬 부인의 글에는 포사이드가 벽돌 가마에서 이 여인을 어떻게 대하였는지, 이 여인의 형편에 관한 부분이 있다. “임시 진료소에서 이틀 밤을 보낸 후 닥터 윌슨은 이 여성을 위해 오래된 벽돌 가마에 임시 거처를 만들어 주었다. 한센병에 걸린 지는 10년이 되었고, 4년 전 과부가 되어 생계가 어려워지고 친척도 없는 상태였다. 거처도 없이 이집저집을 다니며 구걸을 하며 생활하고 있었다. 그녀에게 닥터 포사이드와의 만남은 어떤 의미였을까? 포사이드는 자신이 아는 한국말을 최대한 동원하여 무엇 때문에 그녀를 도와주는지 설명해 주고 그녀의 생각도 이끌어냈다.” “다시 길거리로 떠돌아다니며 구걸을 할까 걱정이 되어 새로운 거처로 이 여성 환자를 옮기는 일은 쉽지 않았다. 끈질기게 설득하여 2주 후에 마침내 이 환자를 진료소에서 데리고 나왔다. 벽돌 가마에 모인 사람들은 한센병 여인이 닥터 포사이드의 따뜻한 손을 잡고 나오는 것을 보고 ‘마치 주님을 보는 것과 같다’고 생각하였다. 그들이 우리 쪽으로 올 때의 광경은 말로 형용할 수가 없었다. 어느 모로 보나 완벽한 신사인 닥터 포사이드가 병으로 만신창이가 되어 냄새 나는 환자의 팔을 몇 번이나 잡아주면서 걸어왔다. 머리는 몇 년 동안 빗지 않은 듯 헝클어지고, 옷은 누더기로 더러웠으며, 손발은 부푼 상처로 덮여 있고, 온몸에서는 지독한 냄새가 풍겼다. 한쪽 발은 짚신을 신었고, 다른 발은 두꺼운 종이로 묶었고, 심하게 절뚝거렸다. 다시 그녀가 우리한테 왔을 때 큰 환영을 받았다. 이따금 한국인 기독교 신자들과 선교사들이 그녀를 방문하여 예수님에 대해 말해 주고, 예수님께서 그녀를 위한 처소를 준비하였고, 새로운 몸으로 태어날 것이라고 말해 주었다. 그녀는 줄곧 ‘만약 내 동족이라면 여러분처럼 나를 대우하지 않았을 것입니다’라며 행복해했다.”
광주지역 최초 개종자(改宗者), 광주지역 최초 개신교 세례자(洗禮者), 광주지역 최초 개신교 집사(執事), 광주지역 최초 개신교 장로(長老), 북문외교회(광주) 최초 당회장 목사(牧師), 전남노회의 파송 최초 시베리아 선교사(宣敎師), 제중원(광주) 윌슨 원장 조수로 나환자를 치료한 조선인 최초 보조의사, 유산을 기부해 조선 최초 나병원 설립하는데 단초를 제공한 최흥종(崔興琮) 목사의 호는 오방(五放)이다. 1909년 4월, 포사이드 선교사가 나환자를 데리고 와 제중원(광주)에서 나환자를 치료하는 모습을 보고 회심한 최흥종(崔興琮)은 윌슨(Wilson, Robert Manton 우월순) 선교사의 조수가 되어 나환자들을 섬기며 구라(救癩)활동을 시작한 최흥종은, 1911년에는 광주 봉선동의 땅 1,000평을 광주 선교부에 무상으로 기증해 한국 최초의 나병원(癩病院) 설립(1912년)에 참여하였다. 평향신학교(1914년)에 입학했으나 제때 졸업하지 못하고 기미년(己未年 1919년)을 맞은 최흥종은 남대문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한 혐의로 1년형을 선고받아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했다. 신학교를 졸업(1920년)한 최흥종은 목사 안수를 받고 전남노회 시베리아 선교사로 파송되었으나 소련정부에 의해 추방, 제주도 모슬포교회에서 사역하였다. 광주 나병원(癩病院)이 지역주민들의 항의로 여수반도 끝자락 소록도에 있는 애양병원(愛養病院)으로 옮겨갔다. 애양병원(愛養病院)’에서 치료 받은 나환자들이 생활고로 말할 수 없이 많은 고난을 겪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최흥종 목사는 “이후로는 사회 및 정치 사업에 일절 관심을 두지 않고 금일로 나환자들과 함께 하겠다.”며 모슬포교회를 사임하였다.
나환자들의 치료와 재활을 위한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하고자 윤치호, 조병옥, 송진우, 김병로, 안재홍 등과 「나환자 근절협회」를 만들어(1932년) 경성(京城)에서 모금활동을 벌였으나 성과가 좋지 않았다. 최흥정 목사는 나환자 수용 시설 확보를 위해 ‘나환자 행진’이라는 비상의 수단을 강구, 움직이지 않는 총독부를 압박하였다. 나환자 150명을 이끌고 광주를 출발한 최흥정 목사는 조선총독부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열하루 만에 경성(京城)에 도착하였을 때 나환자 시위대는 400명에 이르렀다. 그는 나환자들과 함께 총독부 앞마당까지 들어가 우가끼(宇垣) 조선총독을 면담하였다 ‘전국 나환자 집단수용시설’과 ‘치료시설’을 요청한 최목사는 우가끼(宇垣) 총독에게 소록도 재활시설 확장에 대한 확답을 받았다. 나환자 시위대를 이끌고 경성(京城)에 가서 총독과 담판을 하고 있는 사이에, 광주 양동 주민들의 항의로 양동 장터에 있던 빈민촌 판잣집들이 철거되어 2백여 명의 걸인들이 순식간에 거리로 쫓겨났다.
최흥종은 경양 방죽가에 임시 거처를 만들어 걸인들을 수용하고 북문밖교회 교인들과 YMCA 회원들을 동원하여 구휼하였다. 구제 소식이 퍼져나가자 전남 각지에서 걸인들이 광주로 몰려들어 광주 사람들의 비난이 거세졌다. 노회와 광주 교인들 중에서 그의 ‘빈민 목회’를 비난하는 자들이 늘어났다. 가족들도 더 이상 그에게 가장의 역할을 기대하지 않았다. 신사참배로 몸살을 앓던 제도권 교회들이 최흥종 목사를 외면하기 시작했다. 「성서조선」에 ❮교역자의 반성과 평신도의 각성을 재촉함❯를 기고해 목회자들의 타락을 비난하며 평신도들의 각성을 촉구한 최흥종 목사는 거세 수술을 받은 후(1935년) 자신의 아호(雅號)를 오방(五放)으로 정했다. 방만(放漫), 방일(放逸), 방종(放縱), 방기(放棄), 방랑(放浪) 등 오방(五放)은 '다섯 가지를 놓아버린다'는 뜻이다. 그가 놓아버린 5가지는 집안의 일, 사회적 체면, 경제적 이익, 정치적 활동, 종파적 활동을 의미했다. 그는 "지상의 집착을 놓아버리고 오직 하나님 일을 하며 자유롭게 살겠다"고 선언했다. 1937년 어수선한 시국 속에서 자신의 사망통지서를 지인들에게 발송한 후(1937년) 죽은 사람으로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