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도민일보 2010. 6. 9 황영준 십자가의 길
부모가 자식에게 비천하고 살기 고달픈 가문을 물려주고 싶겠는가. 부모 보다는 자식이 더 잘되기를 소망한다. 자식도 부모의 유업을 잇거나 더 잘하는 것을 보람이나 자랑으로 여긴다. 기독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것을 가장 큰 보람으로 생각한다. 그것이 하나님께 받은 특별한 은혜이고 헌신자의 충성이며 영원한 가치라고 믿기 때문이다.
박환규 목사님은 50년 동안, 반 백 년을 목회자로 헌신하고 은퇴했다. 전라도에 처음 들어온 선교사들을 도와 남도 땅 여러 지방을 순회하며 성경을 배포하고 복음을 전하던 조부(박문택), 평생 전도사 신분으로 제주도까지 오가며 교회를 섬기다 6‧25때 순교한 부친(박병근 전도사)을 이어 3대째 목회자였다. 그 가문은 장로교 선교사들이 처음 들어오던 선교 초기로부터 교회의 역사와 함께했다.
박환규는 18세 때 첫 설교를 했다. 일제 때라서 신사참배를 거부한 목사님들이 감옥에 갇히니 강단을 교인들이 지켜야 했다. 그가 강단에 섰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강론할 사람은 못되었다. 설교집을 보고 읽는 형편으로 예배를 인도했다. 그런데도 은혜가 넘치는 것은, 환란과 핍박 가운데서 십자가를 붙드는 신실한 믿음, 목자 잃은 양들이 부르짖는 눈물 기도, 어려운 시대에 오직 하나님만을 소망으로 바라보는 간절함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때 그 일이 목회자의 길로 발걸음을 인도했다. 광주고등성경학교를 졸업하고 첫 목회지 관산교회(장흥군) 전도사로 갈 때가 24세 였다. 총회신학교(남산장로교신학교)에 진학하였다. 피란 시절에는 학교가 부산과 대구로 옮겨 다니며 공부했다. 목사 안수를 받고는 교회를 옮겨서 시무했다. 원진교회(해남), 창평교회(담양), 구례중앙교회, 대안교회(나주), 봉황교회(나주)를 섬겼다. 가난했던 시절에 농촌교회 목회자로 살아 온 것이다. 봉황교회를 섬길 때 교단 분열로 교회를 나왔다.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에 소속된 목사로서 전통적인 총회를 떠나지 않기로 결단하고 새롭게 교단을 세우는 측에서 떠난 것이다.
1979년(69세 때)에 광주로 올라왔다. 개발지역 이었던 운암동에 은석교회 간판을 달고 교회 개척에 나섰다. 주공아파트 주민을 대상으로 복음을 전하며 어렵고 힘겹게 예배당을 건축했다. 일련의 일들이 고난의 길이었다.
“가족이 살던 집을 팔았다. 자녀들 가운데 누구 하나 원망하지 않았다. 지금도 아이들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그 때는 교인 수가 적었고 교회가 땅을 살 돈도 없어서 가족이 살던 집을 팔아 예배당 부지를 구했다. 가족 몇은 작은 방을 세로 얻어 생활하고 나는 예배당 작은방에서 지냈다. 그 때 고생은 큰 것이었다. 지금 교인들은 모를 것이다….” 그의 기억이다.
박 목사님은 1995년에 고혈압으로 쓰러졌다. 2월 첫주일 밤예배를 마치고 예배당에 딸린 사택으로 내려가 쓰러진 것이다. 병원으로 실려가 밤새워 수술을 받고 며칠이 지나서야 깨어났다. 3개월을 입원해 있었지만 후유증이 남아서 오른쪽 팔다리에 장애가 오고 말이 어눌해졌다. 오직 십자가만 바라보며 달려왔던 목회의 길을 접어야했다. 힘겹게 걸어온 한 평생. 교회 일을 계획하고 앞장서 이끌어가며, 모든 책임은 내가 감당해야하는 목회자였다.
지금은 교인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 지난 일들, 목회자의 수고와 눈물 기도와 헌신을 잘 모른다. 수고를 알아주기만 해도 큰 위로가 되지만, 섭섭하게 오해라도 없었으면 하는 생각을 갖는다.
박환규 목사님의 아들 박은기 목사(광주아름다운교회)는 교회를 개척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믿음의 대를 이어간다는 것은 축복입니다. 순교하신 할아버님과 일관성 있게 한 길을 달려오신 아버님을 존경해 왔습니다. 농촌목회와 개척목회를 하면서도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한 길을 걸어오신 아버님입니다. 아버님이 저희 형제들 앞에 내 놓으시던 총알구멍이 난 옷(할아버지가 순교할 때 입고 있었던 옷)을 떠올립니다. 그럴 때면 조상들의 일사각오 신앙 그리고 교회를 위해 죽도록 충성하는 목회자의 모습이 저의 자존감이 됩니다. 앞으로 그런 자세로 사역하겠습니다. 그리고 자녀들에게도 그런 믿음의 유산을 남겨주는 목사가 되겠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증조 할아버지의 믿음을 이어 4대 목회자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를 위하여 십자가의 길을 가는 박 목사님의 결단이다. 박성기 선교사(케냐), 박창기 선교사(캄보디아)가 그의 형제들이다. (끝)
1930년에 사용했던 전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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