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흥산 대조사(聖興山大鳥寺 )/ 충남 부여군 임천면 구교리
인도에 가서 범본(梵本) 율장(律藏)을 가지고와 백제 불교의 방향을 달리하게 한 승려 겸익(謙益)이 창건/부여읍지.
사적기를 참작하여 기록한 현판엔 승려 담혜(曇慧)가 창건하였다고 함.
고려 원종 대 진전장로(陳田長老)가 중창함.
전설에 따르면
어느 노승이 큰 바위 밑에서 수도하던 중 어느 날 한 마리의 큰 새가 바위 위에 앉는 것을 보고 깜박 잠이 들었고,
깨어나 보니 큰 바위가 '미륵보살상'으로 변하여 있었다. 그래서 이 절을 '대조사'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부여관광안내지도를 펼쳐보면 부여 10경을 빼고 사찰명이 적힌 곳이 있다. 미암사와 대조사가 있다.
미암사는 전통 사찰이 아니다. 왜 적어 놓았는지 모르겠지만 무량사 가는 길에 있어 들렸다.
석탑과 마애불 등은 홍산상천리마애불입상, 홍양리5층석탑, 장하리삼층석탑, 세탑리오층석탑 등이 있다.
장하리 삼층석탑은 대조사 가는 길에 있어 들렸다.
대조사를 검색하니 잘 생긴 석조 미륵불이 나온다. 논산 관촉사 은진미륵과 닮은 미륵상이다.
또한 성흥산성(지금은 가림성) 사랑나무도 있기에 겸사겸사 들리기로 일정을 추가하였다.
검색을 하니 대조사에 대한 기록들이 많이 있지 않다.
대조사는 그리 큰 절이 아니면 산지 사찰이다.
주차를 하고 계단을 올라야 한다. 버스 한 대가 나와 비슷하게 주차한다. 문화탐방하는 사람들이 내린다.
대조사 미륵불에 대한 설명이다. 위에 내가 인터넷 검색하여 적은 내용과 조금 다르다. 큰 틀은 같지만.
백제시대 도승 겸익은 누구지?
대조사 석탑 /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40호
이 삼층석탑은 고려 초기 작품이나 통일신라시대 유행한 탑의 형식이며 1975년 복원하였다.
원통보전 내부, 닫집이 화려하여 촬영하여 봤다.
목조 보살좌상/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205호
범종각
용화보전과 미륵불
석조 미륵보살 입상/ 보물 제217호, 높이 10m, 고려 전기에 제작된 것으로 본다.
고려 광종 대 제작된 논산 관촉사 미륵상과 비슷하다.
고려 원종 때 무량사 승려 진전장로가 수리하였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용화보전, 현판에 글씨를 쓴 이의 낙관이 화려하게 놓여져 있다.
어떤 책을 보니 대웅전이나 용화전 등 현판 글씨를 쓰고 낙관을 찍는 것은 무지 또는 과시욕이며 예의가 없음이라고 한다.
현판 뒤에 자신의 이름을 기록하는 게 예의 바름이라 지적한다.
용화보전 측면에 보살상을 봉안하고 있다.
이 불상은 한 덩어리의 바위를 조각하여 만들었다.
주변 다른 바위에 글씨가 많다.
명부전
겸익에 대한 기록은 『미륵불광사사적(彌勒佛光寺事蹟)』에만 수록되어 있다. 이 사적기에 526년(성왕 4)에 사문 겸익은 마음에 맹세하고 계율을 구하고자 바다를 건너 중인도의 상가나대율사(常伽那大律寺)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는 5년 동안 인도에 머물며 범문을 배우고 천축(天竺)의 말에 환히 통하였으며, 율부를 깊이 전공하여 계체(戒體)를 장엄하였다. 그리하여 배달다 삼장과 함께 범본 『아비담장(阿毘曇藏)』과 5부 율문(律文)을 가지고 귀국하였다. 7세기 이전에 한역된 오부 광율(廣律)은 살바다부(說一切有部)의 『십송율』 61권(弗若多羅·鳩摩羅什 공역, 404~409), 담무덕부(法藏部)의 『사분율』 60권(佛陀耶舍·竺佛念 공역, 410~412), 마하승기부(大衆部)의 『마하승기율』 40권(佛馱跋陀羅·法顯 공역, 416~418), 미사새부(化地部)의 『미사새부(화혜)오분율』 30권(佛陀什·竺道生 공역, 422~423), 근본유부(根本有部)의 『근본설일체유부비나야』 50권(義淨 역, 703~713) 등이다. 그런데 중국에는 소승 오부 중 하나인 음광부(飮光部)의 광율은 전해지지 않았다. 단지 『해탈계경』 1권(瞿曇般若流支 역, 543)만이 번역되었을 뿐이다. 이 가운데에서 가장 먼저 번역된 광율은 설일체유부의 『십송율』이었다.
특히 겸익이 활동할 당시 중국에서는 유부의 『십송율』이 널리 유통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겸익이 귀국하자 백제 성왕은 일산(羽葆)과 풍악(鼓吹)으로써 교외에서 맞이하여 흥륜사(興輪寺)에 머물게 하였다. 국내의 명승 28인을 모아 겸익을 도와 율부 72권을 번역하게 하였으니 이것이 백제 율종의 시작이었다. 이에 담욱과 혜인 두 법사가 율부의 소(疏) 36권을 저술하여 왕에게 바쳤다. 성왕은 비담(毘曇)과 신율(新律)의 소(疏) 36권을 지어 태요전(台耀殿)에 받들어 간직하였다. 왕은 장차 새겨서(剞劂) 널리 펴고자 하였으나 얼마 안 있어 붕어하였다. 한편, 겸익의 율학은 일본에도 영향을 주었다.
(다음-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발췌)
장하리 삼층석탑 / 보물 제184호, 부여군 장암면 장하리
높이 4.85m.
그렇게 큰 사찰이 있었던 장소는 아닌 것 같다. 장하리사지.
정림사자 오층석탑을 모방한 백제계탑으로 고려시대 제작되었다.
이 삼층석탑이 정림사지 오층석탑의 동생 같다는 느낌이 든다. 안정감과 균형미가 있다. 날씬하다.
미암사(米岩寺) / 부여군 내산면 저동리
무량사를 보고 나오는 길에 들렸던 사찰이지만 개인 사찰 같다.
옛날 이 절에는 세상 이치에 통달한 승려가 있었는데, 마지막 임종할 때에 자기 곁을 떠나지 않던 수도승에게 “너희들이 지금처럼 열심히 수도를 한다면 먹고 사는 일은 저절로 해결될 것이니라.” 란 말을 남기고 입적.
그가 죽은 후 절 뒤의 바위에는 구멍이 생기고 그 안에서 파란 새와 노란 새가 번갈아 나와 울었는데 새가 울고 나면 구멍에서는 쌀이 쏟아져 나왔다. 덕분에 수도승들은 쌀 걱정 없이 열심히 불도에 매진할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절에 새로 온 비구니가 이 사실을 알게 되었고, 새를 잡아 자기가 키우면 큰 부자가 될 것이란 야심에 사로잡혔다. 그리고는 억지로 새를 잡으려던 끝에 새들이 구멍 속으로 들어가자 막대기로 구멍을 쑤셔댔고 한참 후에는 그 구멍에서 물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날 이후 더 이상 새들은 나타나지 않았고, 쌀바위 역시 쌀을 토해내지 않았다. 절은 점점 쇠락해 갔고 승려들도 모두 절을 떠나게 되어 결국 큰 절이 작은 암자가 되고 말았다고 한다.
현재 미암산의 쌀바위에는 큰 샘이 있고, 쌀바위 근처에 새로 조성한 절을 미암사라 부르고 있다.
(디지탈공주문화대전에서 발췌)
ㅋㅋㅋ 검색을 잘못한 것 같다. 공주시 탄천면 견동리에 '미암'이 있고 이 바위와 연관된 전설이다.
그럼 미암사의 쌀바위는? 부여군 내전면 저동리에 있다.
옛날 대를 이을 손자를 얻기 원하는 한 노파가 있었다. 노파는 날마다 미암사에 찾아가 정성껏 불공을 드렸는데 어찌나 열심히 했는지 집에 쌀이 떨어진 사실도 모를 정도였다. 어느 날, 비몽사몽간에 관세음보살이 현몽하여 "소원을 들어 주겠다"고 하면서 "호리병에서 쌀 세 톨을 꺼내 바위에 심으면 하루 세 끼 먹을 쌀이 나올 것이니, 매끼니를 지을 때 이 쌀을 가져다 짓도록 하라"고 하였다. 노파가 정신을 차리자 바위에서 진짜 쌀이 나왔을 뿐만 아니라, 얼마 후에는 그토록 바라던 손자도 얻었다. 그러나 욕심이 생긴 노파는 쌀을 더 많이 얻고 싶어서 부지깽이로 구멍을 후벼팠다. 그러자 쌀이 나오기는커녕 구멍에서 핏물이 흘러나와 주변이 핏빛으로 물들었다고 한다.
- 위 내용은 쌀바위 앞에 있는 설명문에 나온내용이다.
촛대바위, 부처바위, 음경석 등으로도 불린다.
가지산의 쌀바위, 강원 고성군 화암사의 쌀바위 등과 내용은 조금 다르지만 결론은 욕심을 내면 안 된다는 것.
어쩌면 하나의 전설이 여기저기로 퍼진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부여 저동리 쌀바위 /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371호
쌀바위에서 내려오면 전각이 있다.
전각 옆에 이런 불상이 있다. 도로변엔 '세계최대와불'이라 안내판이 있다.
방치된 느낌이다.
FRP 제품에 금색 칠한 불상 같다. 휴....괜히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