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공원에 조성된 경주배씨 조형물.전면/대전 중구 | ||
작품명 : 삼한갑족三韓甲族의 혼
조각가 : 裵洙寬
작품설명 : 신라, 고려, 조선 세 왕조의 개국원훈을 배출한 성씨로, 3朝 상징의 세 축을 기둥으로 삼고, 그 중심에 裵자의 형상을 연결 조합하여 조국의 발전과 경주배씨의 무한한 번영과 영광을 기원하는 의미를 담아 각 파종회 및 전국50만 종인들의 뜻을 하나로 모아 여기 세우다.
뿌리공원에 조성된 경주배씨 조형물.후면/대전 중구 | ||
<뿌리공원에 새겨진 배씨 유래>
▸ 裴氏는 한국의 대표적 성씨로 일찍이 삼한갑족(三韓甲族)으로 추앙을 받아 왔다. 배씨는 한국 고유 성씨의 하나로 진한 사로국 금산가리촌장(金山加利村長) 지타공(祗沱公)이 신라개국 좌명원훈으로 유리왕 9년(서기 32)에 배씨 성을 하사받은 데서 비롯하였다.
배씨는 신라.고려.조선 세 왕조의 개국원훈으로 시조 지타공께서는 6부촌장과 함께 박혁거세를 왕으로 추대하여 신라 천년사직의 터전을 마련하였고, 중시조 무열공(武烈公) 현경(玄慶)께서는 고려건국의 원훈이며 수상인 대광(大匡)으로서 삼한통합의 기틀을 마련하고 태조 묘정에 수위로 배향되었다.
조선 건국의 원훈인 정절공(貞節公) 극렴(克廉)은 조선조의 첫 정승으로 애국애족의 길을 열었다. 배씨는 새로운 왕조 건국에 큰 기여를 하였고, 한국민에게 삶의 희망을 안겨주는 역군이 되었다. 몽골 침략에 자주의 기치를 높이 들었던 삼별초 배중손(裵仲孫) 장군을 비롯하여 외적의 침입이 있을 때마다 배문의 선조들은 그를 방어하였고 혹은 殉死하기도 하였다.
특히 임진왜란에는 80여명의 선무원종공신을 배출함으로서 국가와 민족을 수호하는데 표상이 되었다.
배씨는 한국 성씨 중 화합의 상징으로 표출되어 왔으니 지타공을 시조로 무열공을 중시조로 하여, 분성(盆城).성산성주(星山星州).달성(達城).흥해(興海).곤산(昆山).처사공(處士公).복야공(僕射公)등 여러 파로 분파되었으나,모두 경주배씨(慶州裵氏)로서 수백년간 하나의 보첩을 가짐으로서 다른 성씨들의 부러움을 받아왔으며 앞으로도 우리 민족 화합의 주역이 될 것이다.
▸이로써 삼한갑족의 이름이 헛되지 않았음을 역사는 입증하고 있다.
<경주배씨 현대인물>
배정현(전대법원장서리),배상욱(특허청장.전체신부장관),배명인(전법무장관.안기부장),배성환(전서울시국장),배봉수(전철도학교장),배명근(변호사),배동환(농학박사),배종옥(전진주종친회장),배문홍(실로암한의원장),배성원(오산기독병원장),배금룡(평택동안외과병원장),배신행(경찰병원전과장),배선한(부산한의원장),배헌(태백의원),배운기(진해민중의원장),배병원(대구외과의원장),배종설(대전종친회임원),배상호(대구종친회임원),
배영준(전부장판사),배숙(전국세청국장),배수동(의학박사),배희한(인간문화재),배용광(전대구교육대학장),배성동(전국회의원),배현규(전한일투자금융회장),배정일(전남광토건회장),배무(전과학기술원미생물연구실장),배성기(전농림부차관),배의환(전한국은행총재),배상명(상명여대이사장지냄),배덕진(전체신부장관),
배영호(전법무장관),배병세(전동양맥주임원),배만규(의학박사),배동조(전한국통신기술사장),배대규(전청주종친회장),배봉천(의학박사),배태일(물리학박사),배정보(이비인후과의원),배원길(전고려병원외과과장),배성호(안동성심내과의원장),배동우(배안과의원),배석구(한신배석구소아과의원장),배운학(고려대교수),배룡(화가),배종영(예비역공군준장),배진극(의학박사),배형식(조각가),배상희(농학박사),
배정도(1981년육군소장때논산훈련소장.국방대학원장.중앙고속사장),배봉식(전테니스연맹부회장),배동걸(전한국해외기술협회이사장),배혜용(전부장검사),배영동(전북사대교수),배병태(전해양대교수),배병우(전중앙노동위원회부위원장),배효원(충북대명예교수),배용원(서울시립대교수),배도선(한국과학기술원교수),배흥직(문학박사),배태준(문학박사),배태영(경희대교수),배양서(한양대교수),배인하(성신여대교수),배계선(동아대교수),배순훈(공학박사),배대성(아이오아주립대교수),배영호(충북대교수),배은상(고려대교수),
배동원(경기대교수),배재식(서울법대학장),배복석(서울대명예교수),배병희(군산대교수),배길관(충북대교수),배상오(충남대교수),배은희(국회의원),배만운(전법원장),배종호(부산성남의원장),배기완(단국대교수),배병휴(매일경제신문논설위원.월간지운영),배성근(목사),배수환(수산대교수),배도(전효성물산대표),배민홍(전전북은행장),배규성(전농지개량조합연합회장),배순훈(전대우전자사장),배강흔(의학박사),배기문(전경제기획원기획실장),배기형(건축가),배광호(전부산항만청장),배달이(삼성운수사장),배석현(동명전문대학장),배도중(전진주여중교장),배흥직(전경안고교장),배상웅(전제주원호지청장),배재식(서예가),배양찬(목사),배석(전법원장),배양태(외과병원장),배원식(한의원장),
배성식(사중한의원장),배두환(신학박사),배석제(군산수산대교수),배지열(관세사),배선홍(동산유지대표),배호원(전체신부실장),배성순(전농협중앙회이사),배학철(족보문화사대표,작가),배경병(전종친회임원),배완수(의학박사),배석구(의학박사),배기태(성대교수),배기태(빙상선수),배기훈(부산대교수),배길도(전국회의원),배대한(농학박사,종친회임원),배삼준(종친회임원),배성환(한국일보전임원),배주원(아신해운사장),배상직(전대전종친회장),배성호(서울대교수),배길관(충북대교수),배렴(동양화가),배양서(대전대교수),배시동(변호사),배문한(전수원카돌릭대학장),배길기(서예가),배명국(전국회의원),배영환(전삼화고속대표),배수곤(전은행감독원장),배종렬(주한양대표이사회장),배응도(전상공부차관),배병주(전적십자병원장),
배윤덕(성신여대교수),배종근(동국대교수),배익우(전동래고교장),배정례(여류화가),배종건(변호사),배종호(연세대교수),배준(전창덕여고교장),배진호(영남대교수),배철세(전동아대대학원장),배희성(전서울고교장),배수윤(전종친회장),배효덕(전영남일보편집국장),배일환(전전국대종회감사),배성호(강남성모병원과장),배억두(대구정형외과의원),배영섭(서울의대교수),배동직(대구배내과의원),배군직(대구제생외과의원),배대균(마산신경정신과의원),배두현(광주외과병원장),배진선(충남대의대교수),배동영(서울의대교수),배직현(미신시내티대교수),배기순(덕성의원장),배영수(삼광치과의원장),배인근(영신의원장),배규용(제천서울병원장),배광식(치과의원장),배종호(전논산 한성대학이사장),
배철수(가수.KBS 7080 진행자),배용수(삼성라이온스투수),배재성(KBS스포츠취재부장.2008년이길용체육기자상수상),배대성(바스텍코리아대표)등등
배씨(裵氏)
우리나라 배씨(裵氏)는 문헌에는 총 59본관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지난 2000년 기준으로 인구는 372,064명으로 조사되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배씨대종회>의 기록에 의하면 배씨(裵氏)의 뿌리는 2천여년 전 신라 건국초기의 시대로 올라간다. 배씨(裴氏)는 한국의 대표 성씨로 일찍이 삼한갑족(三韓甲族)으로 추앙 받아 왔다
기원전 57년 신라가 개국하기 이전(BC 57년)에 6부(部)의 촌중 현재의 경주시 명활산 아래 '분황사' 일대 지역인 금산가리촌(金山加利村)의 촌장(村長)인 지타(祗陀:삼국유사의 기록에는 6부 촌장 모두가 천강한 신인(神人)이라 함)가 사로 6부촌장(斯盧六部村長)들과 함께 69년 3월에 알천 언덕위에 모여 유덕한 임금을 찾아 나라를 세워 도읍을 정할 것을 의논할 때 양산(楊山) 나정(蘿井)이라는 우물가의 알에서 부화한 '박혁거세'의 탄생을 보게 된다.
6부 촌장들은 기원전 57년(한 오봉,漢 五鳳) 갑자에 13세의 박혁거세를 초대 왕(王)으로 추대하고 국호를 서라벌로 정하였다.[삼국유사]
배씨(裵氏)의 시조 지 타(祗陀)는 개국일등원훈에 서훈되어 대사에 올랐으며 서기 32년(유리왕 9)에 금산가리촌을 한지부(漢祗部:현재의 경주)로 개편하고 배씨로 사성(賜姓)함으로써 배씨(裵氏)가 비롯되었다.
배씨의 시조 금산가리촌장 배지타(裵祗陀)공의 위패(경주시 탑동690) | ||
그때 함께 사성받은 이씨(李氏).최씨(崔氏).정씨(鄭氏).손씨(孫氏).설(薛氏)씨와 함께 배씨는 가장 오랜 성씨(姓氏)가 되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배씨 득성조(得姓祖)인 지타(祗陀)에 관련된 기록이 전한다.
신라 태조 3년(서기 전 55 병인년)에 6부(六部)공신의 위차(位次)를 정할 때 시조 지타(祗陀)공(公)은 개국좌명일등원훈총재태사(開國左命一等元勳總宰太師)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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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재(楊山齋)-양산(楊山) 아래에 자리잡고 있는 이 재각 건물(齋閣建物)은 신라 6부 촌장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사당이다. |
법흥왕은 서기 516년 지타(祗陀)에게 시호(諡號)를 문양(文讓)으로 내렸으며 서기 656년(무열왕 3)에 지타 를 장열왕(壯烈王)으로 추봉(追封)하였다.
배씨(裵氏)는 지타(祗陀) 이후 기록이 실전(失傳:고적이나 묘지가 대대로 이어온 사실을 알 수없게 됨)되어 고려의 개국공신 배현경(裵玄慶)을 중시조(中始祖)로 받들고 있다.
중시조 배현경 묘 중시조 배현경 신도비-(소재지:경북 칠곡군 지천면 낙산리 가락산) | ||
신도비(神道碑)란 종2품 이상 관직에 있던 관리나 학행이 뛰어난 유학자의 무덤 앞이나 길목에 세워 죽은 사람의 사적을 기리는 비석이다. 무열공 배현경 신도비는 묘소 앞 오른쪽에 있으며 높이 243cm, 폭 76cm, 두께 46cm와 귀부(龜趺)와 용두(龍頭)로 되어 있다. |
우리나라의 배씨는 총 59본관으로 문헌에 전하나 현재는 경주배씨 성주파(星州派).대구파.흥해파(興海派).협계파(俠溪派).곤양파(昆陽派).화순파(和順派)등 10본 내외가 전하며 모두 연원이 같은 동계혈족이다.
모든 배씨는 신라 6부촌(六部村)중 금산가리촌(金山加利村:漢祗部)의 촌장 지타(祗陀)공에 연원을 두며 비조(鼻祖,처음시조)인 지타(祗陀)의 후손이라는 고려의 개국공신 배현경(裵玄慶)이 경주배씨의 중시조이다.
중시조 배현경(裵玄慶,초명(初名)은 백옥삼(白玉衫) 시호는 무열 武烈)은 첨력(瞻力)이 과인(過人)하고 용맹과 지모(智模)가 웅위(雄偉)하였다고 하며 궁예(弓裔)가 고구려 영토를 점거하고 태봉국(泰封國)을 세울때 이를 도와 행오(行伍-현재의 분대장 정도)에서 출발하여 기장(騎將)에 이르렀다.
그러나 궁예가 왕(王)으로 즉위한지 불과 수년에 처자(妻子)를 살해하고 백성을 혹사하는등 폭정이 날로 심(甚)해지므로 당시 동료 기장(騎將)이었던 신숭겸(申崇謙:평산신씨시조),복지겸(卜智謙:면천복씨시조), 홍유(洪孺:부계홍씨 시조)등과 밀의하여 궁예를 축출하기로 하고, 왕건(王建)에게 왕창근(王昌瑾)등 복술가(卜術家)의 예언(豫言)을 설명하면서 천명신우(天命神佑)로 중심이 공(公)에게 돌아왔으니 이를 따르지 않으면 화가 미치리라 하고 거사를 권하여 왕건(王建)을 고려태조로 옹립하고 개국1등원훈(開國1等元勳)에 서훈(敍勳;훈등과 훈장을 내림)되었다.
중시조 현경(玄慶) 공 초상화
배현경은 서기 919년(태조2) 도읍을 송도로 옮길 때 개주도찰사(開州都察使)가 되어 새도읍의 건설에 공을 세웠으며 벼슬이 이부상서(吏部尙書:정3품 장관)겸 순군부 영도통병마대장에 이르렀다.
서기 936년(태조19) 그가 병으로 위독해지자 태조가 친히 문병하고 "경의 자손이 있으니 그들을 잊지 않겠노라"하고 손을 어루만지며 왕건이 나가자 죽었으며 태조 왕건은 배현경의 부음을 접하자 가마를 멈추고 대성통곡하였다고 한다.
서기 995년(성종 14)에 배현경은 태조묘에 배향되고 평산 태백산성에 태사사(太師祠)를 세워 사철상(四鐵像)을 수립하고 매년 봄.가을에 향사(享祀:제사)한다.
배현경의 현손(玄孫:손자의 손자.고손자) 배사혁(裵斯革)에게 네 아들이 있는데 첫째 배원룡(裵元龍)은 김해, 둘째 배천룡(裵天龍)은 성주, 셋째 배운룡(裵雲龍)은 대구,넷째 배오룡(裵五龍)은 흥해로 각각 분적하고 다시 흥해에서 협계로 갈린 것으로 문헌에 나타나 있다.
성주파는 조선시대에 문과(文科:대과)에 9명,무과(武科:무관을 뽑던 과거로 시험은 무예와 병서)에 6명,사마시(司馬試:생원.진사를 뽑던 시험)에 23명,의과에 1명,율과(律科:형률에 능통한 사람을 등용하던 과거)에 3명 등 모두 42명의 과거 급제자를 배출했다.
인구조사에 의하면 성주파는
1985년에는 총 15,477가구에 인구는 64,297명이었으며
2000년에는 총 27,829가구에 인구는 90,239명으로 조사되었다.
경주배씨(慶州裵氏)는 조선시대에 무과(武科:무관을 뽑던 과거로 시험은 무예와 병서로 3년마다 실시되었으며 초시.복시.전시의 3단계였음)에 7명,사마시(司馬試:생원.진사를 뽑던 과거)에 3명 등 모두 10명의 과거 급제자를 배출했다.
통계청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경주배씨(慶州裵氏)는
1985년에는 21,361가구에 인구는 90,034명 이었으며
2000년에는 총 7,068가구에 인구는 22,069명으로 조사되었다.
본관은 시조의 발상지인 한지부가 경주(慶州)로 개칭됨에 따라 경주라 하였다.
배씨는 후대에 내려오면서 고려조에 공이 있어 분성군에 봉해진 배원룡(裵元龍)의 후손이 <분성파>, 고려 원종 때 홍안부원군에 봉해진 배인경(裵仁慶)의 고조 배위준(裵位俊)의 후손이 <성산파>, 고려조에 나라에 공이 있어 달성군에 봉해진 배운룡(裵雲龍) 후손이 <달성파>, 충숙왕 때 흥해군에 봉해진 배전의 5대조 배경분(裵景分)의 후손이 <흥해파>, 달성배씨에서 9세손 배맹달(裵孟達)이 세조 때 곤산군에 봉해졌기 때문에 그 후손이 <곤양파>등으로 분적되었고,
그밖에 경주 처사공 <충과>파, 성산 복야공 <영찬>파, 화순 진사공 <연>파, 함흥 교서공<덕수>파,협계 합문 사인공<진>파 등으로 나누어졌으나 모두 경주배씨의 분파로 득성시조 와 중시조의 통일 혈손이므로 <경주배씨>로 일원화하였다.
배씨는 개국공신 배현경(裵玄慶)의 후광을 받아 고려조에서 번영을 누렸고, 조선조에서도 영의정 1명, 청백리 1명, 공신 2명, 문과 급제자 47명 등 많은 인물을 배출했는데 이를 각 과별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분성파에서는 파조 배원룡(裵元龍)이 고려조에서 출장입상한 공으로 분성군에 봉해졌다.
계당(桂堂)배맹후(裵孟厚)는 조선 세조 때 문과에 급제,성종때 이조참의(정3품)를 지냈고, 정곡(靜谷) 배세적(裵世績)은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으로 벼슬은 현감(종6품)에 그쳤지만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모정(慕亭)배대유(裵大維)는 선조때 문과에 급제,광해군때 이조참의에 올랐으나 인조반정 후 대북파에 동조했다는 이유로 삭직 되었다.그는 문장과 글씨에 능했다.
배경남(裵慶男)은 임진왜란때 경상도의 유격장으로 공을 세우고,당항포의 해전에서 이순신(李舜臣)장군 휘하 좌별도장으로 참전,승리를 거두어 조방장(助防將:주장을 도와서적을 막는 장수인데 무재를갖춘 수령이 이임무를 맡음)이 되었다. 그의 아들 배홍우(裵弘祐)는 광해군때 문과(文科:대과)에 급제, 인조 반정 후 현감을 지냈다.
성산파에서는 파조 배위준(裵位俊)이 고려조에서 삼중대광(정1품품계)으로 벽상공신(壁上功臣:940년 신흥사의 동.서벽에 나라에 공이많은 사람의 초상이 그려진 공신)에 올랐고, 그의 5대손 배인경(裵仁慶)이 보문각 직학사와 지추밀원사 등을 지내고 충숙왕조 때 흥안안부원군에 봉해졌다.
배인경의 현손 배규(裵規)는 우왕 때 문과에 급제, 조선 세종 때 대사간(大司諫:왕에게 간하던 사간원의 정3품)을 지냈다. 정절공(貞節公) 배극렴(裵克廉)은 공민왕때 문과에 급제,고려말에 문하우시중(右侍中;종1품정승)을 지내고 이성계의 혁명을 도와 조선개국1등공신으로 성산백에 봉해지고 영의정에 올랐다.
효숙공(孝肅公) 배흥립(裵興立)은 임진왜란 때 조방장으로 전공을 세우고 뒤에 공조참판(參判:종2품차관),영흥 대도호부사 등을 지냈다.
그의 아들 배시량(裵時亮)은 병자호란 때 경상좌도 병마절도사 민영(民營)의 막하에서 선전하다가 민영이 전사하자 대신하여 군대를 지휘했고, 뒤에 전라도 병마절도사, 경기도수군절도사, 포도대장(大將:종2품 경찰청장) 등을 지냈다.
충숙공(忠肅公) 배명순(裵命純)은 정묘호란 때 인조를 강화로 호종하였고, 병자호란 때는 남한산성에서 결전을 주장하다가 화의가 성립된 후 철수하는 청병과 철령에서 싸워 이기고 계속 추적,안변에서 적과 분전하다 전사했다.
달성파에서는 배정지(裵廷芝)가 충렬왕 때 별장으로 연기에서 합단을 격파하고 중랑장(中郞將:정5품무장)이 되었으며 충선왕 때 호군으로 전농사 유비창의 일을 관장했다.
그리고 충숙왕 때 탐라에서 김성(金成)이 반란을 일으키자 존무사가 되어 이를 토평하고 밀직부사가 되었다가 옥사가 일어나 유배당했다.
그는 아들 3형제를 두었는데, 맏아들 배성경(裵成慶)은 공민왕조에 홍건적의 침입을 막다가 과천에서 아들 배광유(裵光裕)와 함께 전사했다.
둘째아들 배천경(裵天慶)은 공민왕 때 판추밀원사,경주 부윤 등을 지내고,달성군에 봉해졌다. 셋째아들 배함경(裵咸慶)은 홍건적의 난이 일어나자 형 성경과 함께 참전, 검교장군이 되었다.
양호공(襄胡公) 배맹달(裵孟達)은 세조때 "이시애의 난"을 평정,적개공신2등으로 곤산군에 봉해졌다.그래서 그 후손들은 <곤산배씨> 라고도 한다.
흥해파에서는 파조 배경분(裵景分)이 고려조에 검교장군이 되었고, 6세손 배전이 충숙왕 때 조적의 난을 당해 왕을 호종(扈從:왕가를 뒤따름)한 공으로 1등 공신이 되고 흥해군에 봉해졌다.
전의 아들 백죽당(栢竹堂) 배상지(裵尙志)는 고려 말에 판사복시사를 지내다가 조선이 개국되자 안동으로 돌아와 은둔하고 절의를 지켰다.
상지의 아들 배환(裵桓)은 조용(趙庸)의 문인으로 태종 때 문과에 급제,전라 감사(관찰사)를 지냈다. 배삼익(裵三益)은 이황(李滉)의 문인으로 성종때 문과에 급제,황해도 관찰사를 지냈으며 글씨를 잘썼다. 또한 배삼익(裵三益)과 그의 아들 배용길(裵龍吉)이 이름을 날렸다.
성산 복야공파에서는 배응경이 선조 때 문과에 급제, 임진왜란때 나주목사로 혼자서 금산성을 지켰다. 이순신이 불러다가 막하에 두려고 하였으나 황신(黃愼)의 무고로 투옥되었다가 풀려났다.
아들 배상익(裵尙益)은 정구(鄭逑)의 문인으로 성균관에서 공부할 때 동료유생들이 인목대비의 폐위상소를 올리자고 했으나 불참했고,인조 때 판관(判官;종5품)을 지냈다.
대구파(달성파)에서는 배익신(裵益臣).배진명(裵晉明).배성유(裵聖兪)등이 있다.
배씨(裵氏)는 모두 태사공 지타의 후손이나 자손이 번성해짐에 따라 파(派)가 나뉘어져 분성파,성산파,달성파,흥해파,협계파,화순파,함흥파 등이 있으며 대동보를 부정하고 다르게 족보를 만든 파도 있다.
고려시대의 인물은 김해파의 파조 배원룡과 삼별초(三別抄)의 난을 총지휘한 배중손(裵仲孫),대구파의 배정지(裵廷芝)와 그의 아들 배천경(裵天慶)등이있다.
조선시대에는 개국공신 배극렴(裵克廉)이 대표적 인물로 영의정(領議政:정1품 벼슬.정승)에 이르렀고 조선시대 상신록(相臣錄)에 기록되어 있다.
그 밖에 김해파의 배맹후(裵孟厚).배대유(裵大維),성주파의 배흥립(裵興立)과 그의 아들 배시량(裵時亮),그리고 배진손(裵晉孫).배 신(裵紳).배명순(裵命純) 등이 있다.
배씨(裵氏)는 조선시대에 모두 47명의 문과(文科:대과) 급제자를 배출하는 등 모두 96명의 과거급제자를 배출하였다.
곤양파(昆陽派;곤산)의 파조 배맹달(裵孟達)은 달성군 배운룡(裵雲龍)의 13세손으로 조선 세조때 '이시애의 난'을 진압하는데 공을 세우고 적개공신으로 병조판서(兵曹判書:정2품 벼슬)에 올랐으며 서강군에 봉해졌다가 곤산군(昆山君)에 개봉(改封)되었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달성파(達城派)에서 분파하여 본관을 곤양으로 삼게 되었다.
곤산은 곤양의 옛 지명이다.
곤양(곤산)배씨는 조선시대에 문과(文科:대과)에 3명,무과(武科:무관을 뽑던 과거로 시험은 무예와 병서로 3년마다 실시되었으며 초시.복시.전시의 3단계였음)에 3명 등
모두 6명의 과거 급제자가 있다.
인구조사에 의하면 곤양배씨는
1985년에는 총 1,174가구에 인구는 4,880명이었으며
2000년에는 총 2,284가구에 인구는 7,328명으로 조사되었다.
본관소재지 곤양(昆陽)은 경남 사천군에 속해있는 지명으로 곤양의 옛지명은 곤산(昆山)으로 고려 때는 곤명현으로 하였고 조선 세종 때 남해현과 합하여 곤남군이 되었으며 1437년에 진주의 금양부곡과 합하여 곤양(昆陽)으로 고쳤다. 그후 곤양면,곤명면으로 바뀌었다.
한편 성산파는 지난 2000년의 인구조사에서 총 11,293가구에 인구는 36,164명이었으며
성산파(星山派)는 조선시대에 무과(武科:무관을 뽑던 과거로 시험은 무예와 병서)에 2명,사마시(司馬試:생원.진사를 뽑던 시험)에 6명 등 8명의 과거 급제자를 배출하였다.
[분성파]의 관향인 분성은 경남 김해의 옛 지명으로 지난 2000년 인구조사에서 총 22,564가구에 인구는 71,268명 이었으며 조선시대에 사마시(司馬試:생원.진사를 뽑던 과거)에 3명의 급제자를 배출하였다.
[달성파]는
인구조사에서 1985년에는 총 9,777가구에 인구는 41,268명이었으며
2000년에는 총 18,831가구에 인구는 61,104명으로 조사되었으며
조선시대에 사마시(司馬試:생원.진사를 뽑던 과거)에 1명의 급제자가 기록에 나타나 있다.
[흥해파]의 관향 흥해는 경북 포항시 흥해읍의 옛 지명으로 지난 2000년 인구조사에서는 총 9,130가구에 인구는 29,210명으로 조사되었다.
흥해파는 조선시대에 문과(文科:대과)에 15명 무과(武科)에 3명
사마시(司馬試:생원.진사를 뽑던 과거)에 8명 등 모두 26명의 과거 급제자를 배출하였다.
[협계파]의 관향인 협계는 황해도 신계군 일원의 옛 지명으로 지난 2000년 인구조사에서 총 23가구에 인구는 63명이었다.
오늘날에는 배씨(裵氏) 전체 인구의 약 70~80%를 성주파(星州派)가 차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