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10장 묵상
출처 : KTSM 대표 최승호
54. 칠십 인을 파송하시다 (눅 10:1-7)
◆ 칠십 인을 파송하시다
(1) 그 후에 주께서 따로 칠십 인을 세우사 친히 가시려는 각 동네와 각 지역으로 둘씩 앞서 보내시며
예수님께서 이미 열두 제자를 파송하신 적이 있으시다. 그런데 다시 칠십 인의 전도자를 둘씩 보내셔서 전도하게 하셨다. 칠십 인의 파송 이야기는 다른 복음서에는 없고, 오직 누가복음에만 있다. 칠십 명은 열두 명의 여섯 배다. 열두 명을 파송할 때와는 비교가 안 되는 큰 숫자다. 그런데도 주님께서는 '일꾼이 적다'라고 하신다. 주님의 비전은 온 세계를 향하셨음을 암시한다. 오늘날 성도들에게 이런 주님의 비전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칠십 인 파송 장소가 어디일까? 9장에서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셨다고 하셨으니 누가복음의 순서대로라면 예루살렘이다. 서른다섯 팀이 예루살렘 및 인근에서 각종 기적을 나타내고 하나님 나라를 선포했으면 충분히 소동이 일어날 만하다. 이것은 당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눈에는 이단 종교의 폭동처럼 보였을 것이다.
개인적인 추측으로는 이 시점을 기준으로 예루살렘 종교 지도자들이 위험을 느껴서 교인들을 철저히 단속한 듯하다. 이 시기 즈음에 예수께서 실로암 소경을 고치셨는데 당시에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인정하는 자는 출교 당하게 된다고 밝히고 있다(요 9:22).
◆ 목자의 마음
(3) 갈지어다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면 분명히 착해진다. 이것은 놀라운 일이다. 오만가지 논리로 하나님의 선하심을 부인하는 자들도 이 점을 설명할 수 없다. 그런데 그런 착한 사람들이 온갖 술수가 판치는 세상에서 어떻게 그들에게 당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주님께로 인도할 수 있을까?
양이 이리를 이길 방도가 없다. 그러나 양에게는 아주 중요한 무기가 있다. 그것은 '목자'다. 양에게는 목자가 있다. 자기를 지켜보고, 모든 악한 무리로부터 보호하시는 목자가 있다. 더구나 그 목자가 자기 목숨까지 던져서 양을 보호하려는 선한 목자라면, 그야말로 무서울 것이 없다.
우리 주님께서 내게 선한 목자다. 매일 영적 열등감에 빠져서 과연 나 같은 자를 돌보실까 하는 생각은 믿음도 아니고 겸손도 아니다. 불신이며 악한 생각이다. 우리는 의심할 권리가 없다. '나는 선한 목자다'(요 10:11)라고 하실 때 감격하며 '아멘'으로 응답하는 것이 믿음이다.
◆ 전도자의 태도 1
(4) 전대나 배낭이나 신발을 가지지 말며 길에서 아무에게도 문안하지 말며
전대(허리나 어깨에 메는 자루-돈을 넣는 용도로 사용됨), 배낭, 여유분의 신발들을 가지지 말라고 하심은 오직 주님의 공급하심을 믿고 나아가라는 말씀이다.
오, 주님께서는 과연 이렇게 공급하시는 분이시다. 나는 지금까지 수십 년간 사역하는데 주님의 공급이 결핍됨을 보질 못했다. 가끔 우리 선교회에서 선교사들에게 보내는 후원금이 모자라게 되었을 때, 오랫동안 연락도 없던 형제나 전혀 생각지도 못한 형제가 갑자기 연락이 와서 헌금이 채워진 적이 여러 번이다. 20년이 넘는 세월 속에서 단 한 번도 후원금이 미루어진 적이 없다는 것은 돌이켜 보면 놀라운 경험이다.
또한 '아무에게도 문안하지 말라'고 하심은 목적을 잊지 말 것을 당부하심이다. 지금 주님께서 파송하는 사역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기 위함이지, 아는 친척을 방문에서 친교를 다지라는 것이 아니다.
◆ 전도자의 태도 2
(5)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말하되 이 집이 평안할지어다 하라
'이 집이 평안할지어다' 이 한마디가 담은 의미가 크다. 이것은 단순히 평안을 비는 의례적인 인사를 넘어선다. 이것은 전도자의 위치를 말해준다. 주님께서는 이집 저집 전전하지 말고 한 집에 머물 것을 명령하셨다(마 10:11). 모름지기 전도자는 구걸하는 자가 아니며 복과 평안을 빌어줄 수 있는 진정한 하나님의 종임을 일깨우신 말씀이다.
'평안할지어다'라고 말하라고 하심은, 전도자에게 절대로 비굴하지 말고, 눈치 보지 말라는 주님의 명령이시다. 전도자는 빌붙어서 먹는 자가 아니라, 오히려 복을 빌어주는 자이며 당당하게 대접받아야 마땅한 자임을 말씀하심이다.
오,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주님께서는 우리를 얼마나 존귀하게 여기시는지! 비록 우리는 섬기는 자로 있지만, 주님께서는 절대로 우리를 비천하게 만들지 않으신다. 설사 세상이 우리를 그렇게 취급할지라도 우리는 당당해야 한다.
바울은 쇠사슬에 매여서 왕 앞에 섰을 때, 이렇게 말했다.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행 26:29)
제사장들이 백성들에게 십일조를 받는다고 굽실대는가? 아니다. 그렇게 되면 안 된다. 백성들은 제사장에게 드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드린 것이며, 제사장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기 때문이다.
전도자가 후원자에게 감사하는 이유는 그가 나를 구제했기 때문이 아니라, 나의 사역에 동참하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헌신했기 때문이다. 전도자와 후원자가 진정으로 감사해야 할 대상은 받아주시고, 공급해주시는 하나님이시다. 전도자가 된 당신이 할 일은 더욱 충성하는 것이다.
꼭 선교사나 목사만이 이런 전도자가 아니다. 우리가 복음을 들고 친구나 이웃이나 친척들에게 전할 때도 우리는 존귀한 전도자가 된다. 우리는 거듭난 후에는 좋든 싫든 모두가 예수의 증인들이다(행 1 : 8). 아무도 전도의 사명에서 벗어날 수 없다(마 28:19-20).
주님, 전도하는 일은 참으로 복되고 보람된 일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전하는 이런 사역을 귀하게 여기겠습니다. 다만 세속의 물결에 휩쓸려 떠내려가지 않도록 저를 보호해주십시오.
55. 전도자의 지침 (눅 10:8-16)
◆ 전도자의 지침 3
(8) 어느 동네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영접하거든 너희 앞에 차려놓는 것을 먹고
전도자는 구제받는 것이 아니라, 대접받는 자다. 그리고 물질적으로는 대접받을지 모르나, 영적으로는 오히려 엄청난 복을 베푸는 자다. 주님께서는 전도자들에게 병자를 고치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전하라고 하셨다.
9절에서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함은 '재림'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왕께서 오셨으며 이제 곧 하나님 나라가 세워질 것임을 시사하는 것이다. 이제 그 나라의 백성을 모집하니 기대하라는 말씀이다.
주님께서 승천하신 이후 곧 사도행전부터 제자들은 더는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다'라고 전하지 않았다. 가까운 것이 아니라 이미 여기에 임했기 때문이다. 우리 주님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으심으로써 왕으로 등극하셨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더는 숨기지 않고 밝히 만천하에 드러냈고, 하나님 나라를 선포했다. 이제 하나님 나라가 가까운 것이 아니라 여기에 있으며, 우리가 곧 하나님 나라다. "그의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계 1:6)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이미 속한 자며, 거기의 백성이다. 우리는 왕을 기다리는 자가 아니라 이미 왕의 통치를 받는 자다. 다만 지금은 세상을 전도하느라, 온갖 핍박과 조롱을 참아내며 당장은 약한 자로 사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부활을 믿기에 십자가의 길을 인내하는 것이다. 곧 왕께서 이 땅에 재림하심으로써 이런 세상과의 전쟁도 끝날 것이다. 주님이 재림하시면 더는 약한 모습으로 살지 않을 것이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 나라가 이미 왔음을 선포해야 한다(행 28:31).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을 믿는 자 마음에 임한다(눅 17:20,21). 그러나 11절에 언급하시는 하나님 나라는 심판 때에 임하시는 미래의 하나님 나라다. 주님께서 재림하심으로써 이루어지는 심판의 나라다. 구원을 위해 내미시는 따뜻한 손이 아니라 심판하기 위해 내리치는 형벌의 손이다.
장차 임할 하나님 나라는 지금 여기에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와 연결되어 있다. 지금 하나님 나라를 거절하면 그에게 임하는 미래의 하나님 나라는 무서운 나라가 될 것이다.
◆ 전도자 지침 4
(10-11) 어느 동네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영접하지 아니하거든 그 거리로 나와서 말하되 너희 동네에서 우리 발에 묻은 먼지도 너희에게 떨어버리노라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을 알라 하라
많은 전도자가 거절당할 때 상처받는다. 나름대로는 사회에서 존경받는다고 자부했는데, 자신이 거절당하며 잡상인 취급받는다는 것이 몹시 자존심 상해한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참으신 주님을 생각함으로 견뎌라.
주님께서는 거절한 동네를 나와서 그 발에 묻은 먼지도 털어버릴 것을 명령하셨다. 이 행동은 매우 의미가 깊다. 전도자는 자기 발의 먼지를 털어냄으로써, 한편으로는 자기 책임을 다했음을 인지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들에게 심판 때에 변명의 여지가 없음을 경고한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명령하심은 조금도 주눅 들지 말고 당당할 것을 일깨우심이다.
그들이 우리를 버린 듯하지만, 사실은 그들이 버린 바 된 것이다. 도움이 필요한 자는 우리가 아니라 그들이었고 우리가 거절당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전도자의 도움을 거절한 것이다. 전도자를 거절한 동네는 심판 때에 소돔과 고모라보다 더 심하게 취급될 것이다. 어떤 긍휼도 어떤 고려도 없을 것이다. 전도자는 그들의 거절에 상처받을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을 불쌍히 여겨야 한다.
세상의 어떤 존귀한 자라도 복음 전도자를 무시할 수 없다. 그들을 조롱함은 곧 주님을 조롱함이다. 반면에 그들을 영접함은 곧 주님을 영접함이다. 오, 주님께서는 전도자와 주님을 동일시하신다. 전도자의 영광스러움은 바로 여기에 있다. 정말로 예수님의 증인으로 산다는 것은 영광스러운 일이다. 전도자로 살자. 직접 전도하기 어려우면 전도자들을 기도와 물질로라도 후원하자.
주 예수여, 주님의 증인으로 사는 전도자 삶의 영광스러움을 잊지 않게 해주십시오. 주님께서 영혼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서 온갖 조롱과 모욕을 참아내셨듯이 제가 그러한 십자가의 길을 견딜 수 있게 해주십시오.
56. 무엇을 기뻐할 것인가? (눅 10:17-20)
◆ 믿는 자에게 주신 권세
(19)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을 주었으니 너희를 해칠 자가 결코 없으리라
칠십 인이 기뻐하며 돌아왔다. 이들이 병자를 고치고, 귀신들을 쫓아냈다. 흥분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런 권능은 당시에 칠십 인에게 주신 일시적인 권능일까? 아니다. 주님께서는 사역을 마치고 돌아온 이들에게서 권능을 회수하지 않으시고, 여전히 부여하고 계심을 말씀하셨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기 전에 이렇게 말씀하셨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어 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막 16:17,18)
다시 말해서 당시 칠십 인에게 부여하신 권능은 모든 믿는 자에게 부여하신 권능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권능이란 헬라어 '엑수시아'를 번역한 것인데, 이것은 요한복음 1장 12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와 동일한 단어다.
권세의 의미를 아는가? 오늘 처음 경찰관 복을 입고 거리에 나선 앳된 여성이 있다. 거대한 덤프트럭이 신호를 무시하고 달리자, 그녀는 호루라기를 불어서 멈추어 세웠다. 그러자 즉시 멈추어 섰다. 어제까지만 해도 아무리 호루라기를 분들 조금도 개의치 않을 사람들인데, 갑자기 자기 말에 고분고분해졌다. 신기하다. 어째서일까? 대한민국 정부가 경찰에게 준 권세 때문이다. 만일 이 여성 경찰의 말을 듣지 않으면 그것은 곧 대한민국 정부를 향한 거역이며, 법적 처벌을 면치 못할 것이다. 이게 권세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셨다. 성도가 귀신을 두려워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오히려 귀신이 우리를 두려워해야 한다.
◆ 진정으로 기뻐해야 할 일
(20)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사역자가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면 신나고 기쁘다. 사역할 맛이 날 것이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경계하신다. 이런 것으로 기뻐하지 말라고 하시고, 진짜 기뻐해야 할 것을 알려주신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 영생을 얻어서 하늘의 생명책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라고 하신다. 우리가 기뻐할 이유를 제대로 갖지 않으면 시험에 들 수 있다.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면 사람들은 나를 주목하고, 대단한 사람인 것으로 여긴다. 이것을 기뻐하고, 즐기게 될 때 우리의 신앙은 위기에 처하게 된다. 사람들은 임금을 보고 절하는데, 임금을 태운 나귀가 으스대는 꼴이 되는 셈이다. 많은 사람이 이런 시험을 제대로 통과하지 못하고 넘어짐으로써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했다.
베드로는 하반신 장애인을 일으켰을 때 처신을 잘했다. 사람들이 몰려들자 베드로는 이렇게 말했다.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행 3:12)
주님이 얼마나 대단한 분인지를 알게 되면 사람들이 나를 쳐다보는 것이 부담스럽다. 주님의 영광을 도둑질하는 느낌이다. 베드로는 자기 능력의 출처를 알았다. 베드로의 자세는 단순히 겸손을 취한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를 말한 정직한 자세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능력이 어떻게 발휘되는지에 대한 과정을 매우 잘 설명했다.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가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행 3:16)
병자가 낫게 된 이 메커니즘을 잘 숙지하라. 예수의 이름을 믿는 믿음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그 이름이 이 사람을 낫게 했다. 오, 내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낫게 하셨다는 말씀이다. 그리고 기억해야 할 것은 내 믿음이 아니라,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 그 믿음이 병자를 낫게 한 것이다. 우리가 '믿-쑵니다'를 반복하며 짜낸 믿음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신 믿음이다. 그 믿음이 임하면 베드로처럼 말할 수 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행 3:6)
그러므로 병자를 위해서 기도하고자 하면 주님께서 내게 병자를 위한 믿음을 주셨는지 살펴야 하고, 병자를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면, 당신이 할 첫 번째 일은 당신의 힘을 빼는 것이다. 모세처럼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이나 두들기면서 마치 자신의 힘으로 반석을 쪼개어 물을 내는 것처럼 행세하지 말아야 한다. 오직 그분의 선하심에 결과를 맡기고 기도할 따름이다.
나는 평생에 병자를 고쳐본 경험이 거의 없다. 소리를 지르고, 땀을 뻘뻘 흘리며 기도해도 그런 기적은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데 꼭 한 번 진짜 내 힘을 빼고 마음을 비운 상태로 기도하자 병자가 나았다. 그것은 내게 큰 교훈을 주었다.
사역자들은 어떻게 설교하면 사람들이 재미있어하고, 감동할지에 대해 관심이 많다. 그러다 보니 모든 것에 자기 힘이 잔뜩 들어가 있다. 아, 그러나 영적인 힘이 아니면 사람들이 회개하지 않음을 왜 모르는가? 영적인 사람이 되려면 내 힘부터 빼야 한다. 아, 주님, 저는 여전히 저의 힘을 과시하고 싶어 합니다. 설교도, 기도도, 글도 종종 제 힘이 가득 차 있습니다. 저를 긍휼히 여기소서!
이제 진짜로 기뻐해야 할 이유를 바꾸어야 한다. 내가 대단한 사람이 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내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고, 그렇게 나를 구원하신 주님께 감사하는 사람이 되자.
아멘. 주 예수여, 제가 택함 받은 자며, 영생을 얻은 자가 됨을 기뻐합니다.
영원한 생명을 주신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57.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눅 10:21-24)
◆ 어린아이에게 나타내심
(21)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시며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대학 시절에 내가 복음을 전한 친구가 자신이 믿지 않는 여러 이유를 말하면서 무신론자 니체가 쓴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이란 책을 내게 내밀었다. 다 읽지는 않았으나, 거기에 이런 내용이 있었다. 인간의 사랑은 유한하다. 그런데 인간끼리 사랑하기도 버거운데, 만일 하나님까지 사랑하라고 하면 그만큼 인간끼리의 사랑은 빈약해질 것이다. 논리가 제법 그럴싸하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인간에 대한 사랑이 줄어들기는커녕 더 풍성해지고, 더 샘솟는다.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알고 진정으로 사람을 사랑할 줄 알게 된다. 유한한 인간이 무한하신 하나님을 아는 순간, 그는 무한을 체험할 것이다. 무한은 아무리 나누어 주어도 줄어들지 않는 세계다.
무신론자들의 논리는 하나님을 안 믿는 자들에게나 그럴싸하지, 실제로는 유치하다. 우물 안 개구리의 좁은 소견이며, 유한의 세계에서 통하는 논리일 뿐이다. 마치 시각 장애인이 무지개를 논하고, 청각 장애인이 음악을 평가하는 것 같다. 그리고 그런 자들의 강의에 감탄하는 똑같은 장애인들을 볼 때 한숨이 나온다. 그들은 세상에서는 박사일지 모르나, 영적 세계에서는 백치다. 주님께서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하신 말씀이 어찌 그렇게 꼭 들어맞는지!
진리를 알려면, 어린아이처럼 겸손해야 한다. 예수님의 말씀을 아멘으로 받아들일 때 놀라운 영적 세계를 체험하게 된다. 바다 위를 어떻게 걷겠는가? 그러나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바다 위를 걸을 수 있었다. 거기에 무슨 논리가 필요한가? 어린아이가 되지 않으면 체험할 수 없는 세계다.
논리적으로, 학문적으로 아무리 따져도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결론이 나지 않는다. 그러나 예수님을 참으로 믿으면,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게 된다. 그것은 내 머리에서 나온 결론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알게 해주신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계시'라고 한다.
◆ 계시를 받은 자
(22)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구인지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가 누구인지 아는 자가 없나이다 하시고
'계시'는 헬라어로 '아포칼립토'라고 하는데, 그것은 덮개를 제거하다, 또는 폭로하다라는 의미를 가진다. 덮개를 제거할 때 드러나고, 폭로해야 드러나는 지식이다. 가령 내 얼굴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화가가 내 얼굴을 그릴 수 있겠는가? 아무리 뛰어나도 그것은 불가능하다. 화가 머릿속에는 내 얼굴이 없다. 내 얼굴을 보여주어야 비로소 알게 되고 그릴 수 있다. 이렇게 보여주는 것, 그것이 바로 '계시'다.
하나님은 우리 머릿속에서 나온 분이 아니시다. 우리 머리 밖에 계신다. 하나님께서 침묵을 지키신다면 인간은 절대로 자기 머리로 하나님을 알 수 없다. 그리고 알지도 못하는 하나님을 이러쿵저러쿵 판단하는 것은 정말 말이 안 된다.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프랜시스 쉐퍼가 말한 것처럼 '하나님은 거기 계시며, 말씀하셨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침묵하지 않으시고 말씀하시고, 자신을 드러내셨다. 그래서 우리는 알 수 있게 되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성경이 되어서 내 손에 있다는 것이 감사하고, 이 말씀이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내게 다가오도록 하신 하나님의 은총이 감사하다. 정말로 감격스럽고, 감사하다.
하나님을 알고 싶은가? 내 명철과 내 지혜를 내려놓고, 하나님 말씀 앞에서 겸손하라. 유한이 무한을 아는 유일한 방법은 내 머리와 경험에만 붙들려있는 편협한 사고를 내려놓고 새로운 마음으로 대하는 길뿐이다.
◆ 복 받은 자
(23) 제자들을 돌아 보시며 조용히 이르시되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도다
인류 역사상 가장 복 받은 자들은 하나님의 아들과 동고동락했던 제자들이다. 많은 선지자와 임금이 그토록 보고 싶어 했던 것을 직접 보게 되었고, 듣고 싶었던 것을 육성으로 들은 자들이기 때문이다. 정말로 엄청난 분이 이 지구에 왔다 가셨다. 인간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몰라보고 범했던 무례와 악행이 죄송스럽고, 아들을 보내신 하나님의 선하심이 감사하다.
우리도 제자들 못지않게 복 받은 자들이다. 이 복음을 들을 수 있는 세대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이 얼마나 다행이고 감사한 일인가? 구약 세대와는 비교가 안 되게 복 받은 자들이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특별히 은총을 받은 자'들이다.
어떤 사람이 이런 특별 은총을 받지 못한 자들에 대해 하나님의 불공평함을 따지는 것을 보았다. 그렇게 따지기 전에 자신이 특별히 택함받은 것을 감사해본 적은 있는가? 하나님보다 더 사랑이 많은 척하고, 더 공평한 척 하지 말라. 따지기 전에 먼저 자신을 구원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러면 이해는 못 할지라도 하나님의 선하심과 공평하심을 알게 될 것이다.
예수님을 알게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내게 계시를 주신 것이며, 큰 은혜다. 예수님을 알면 알수록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선하심을 더욱 깨닫게 된다. 하나님 말씀 앞에서 어린아이처럼 겸손하자. 내 명철, 내 지혜 의지하지 말고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자.
주 예수여, 주님을 믿습니다. 참으로 이 진리를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합니다. 제가 진리 앞에서 더욱 어린아이와 같아지기를 구합니다.
58. 우리의 이웃을 누구입니까? (눅 10:25-37)
◆ 영생의 길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25)
율법 교사의 이 질문에 예수님은 되물으셨다.
"율법에 무엇이라고 기록되었느냐?"
그러자 율법 교사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고 짚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고 하셨다. 여기에서 우리는 혼란을 느낄 수 있다. 예수를 믿어야 영생을 얻는 것이 아닌가? 율법을 지켜도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후에 사도 바울에게 간수가 똑같이 질문했다. "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까?" 그러자 바울은 주저하지 않고 바로 대답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행 16:30-31)
예수님과 바울은 사상이 달랐을까? 아니다. 율법을 완벽히 지켜도 영생을 얻는다는 말씀은 틀린 것이 아니다. 애초에 율법 교사는 그것을 전제로 질문했기에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대답하신 것이다. 만일 율법을 열심히 지켜도 영생을 못 얻는다면 율법에 결함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율법은 완전하며 결함이 없다(시 19:7). 하나님도 말씀하셨다. "너희는 내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말미암아 살리라 나는 여호와이니라"(레 18:5)
따라서 율법도 영생을 얻는 하나의 방법이고 길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이전까지는 유일한 길이었다. 그러나 구약성경은 인간이 이 시도에 성공한 예가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심지어 가장 의롭다는 욥조차도 자만심이란 늪에 빠져있음을 보여주었다. 구약성경 자체가 오로지 하나님의 은총만이 사람을 구원할 수있음을 보여준다. 결국 율법은 인간이 죄인임을 깨닫게 하는 도구임이 드러났다(롬 3:19).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다(롬 3:21). '율법 외'라는 의미는 완벽한 의인만이 들어가는 학교에 지극히 죄인인 내가 들어갈 수 있는 새로운 입학 전형이 생겼다는 의미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롬 3:22) 아멘, 아멘.
주님, 감사, 또 감사합니다.
◆ 우리의 이웃은 누구인가?
율법 교사는 주님께 칭찬받자, 즉시 의미심장한 질문을 했다.
"그러면 우리의 이웃은 누구입니까?"
유년주일학교 시절에 우리의 이웃은 '강도 만난 사람'과 같이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라고 배웠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우리 예상과 전혀 다른 말씀을 하신다. 우리의 이웃은 '자비를 베푼 사람'(37)이라고 하신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등장한 사람들은 매우 극단적이다. 제사장, 레위인, 사마리아인이다. 제사장, 레위인들은 종교적으로 '선할 것'으로 기대되는 사람이다. 사회적 신분도 꽤 높은 사람들이라 이웃이 되면 내 신분에도 도움이 되는 사람들이다. 저 사람이 이웃이 되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진 적이 없는가?
반면에 사마리아인은 유대인들이 극도로 혐오하는 사람들이었다. 부디 이웃이 아니길 바라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런 자가 내가 가장 어려울 때 나를 도왔다. 누가 나 자신처럼 사랑해야 할 이웃일까? 주님께서는 이런 자가 '내 이웃'이라고 하신다. 우리가 '나 자신'처럼 사랑해야 할 대상이라고 말씀하신다.
오늘날 사람들은 부자이고, 권력을 가졌으며, 사회적으로 명망 있는 사람을 이웃으로 두고 싶어 한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런 자가 아니라, 내게 자비를 베푼 사람이라고 하신다. 사람들은 자기에게 자비를 베푼 자가 사회적으로 별 볼 일 없어 보이면 그들이 베푼 은혜를 대수롭지 않게 취급한다. 반면에 사회적으로 명망이 있는 자가 조금만 관심을 보여도 필요 이상으로 감사하며 은혜를 갚겠다고 호들갑이다. 아니다. 그러면 안 된다. 그렇게 차별하면 안 된다.
나를 위해서 기도해주는 사람, 내가 어려울 때 함께 해준 사람, 설사 그 도움이 지극히 사소한 것일지라도 당시에 내게는 큰 도움이 되었다면 나는 그 은혜를 잊으면 안 된다. 주님께서는 물 한 그릇 내민 사람의 은혜조차 절대로 잊지 않으신다고 하셨다(막 9:41). 우리는 그런 주님을 따르는 자들이다. 설사 그 사람과 사이가 안 좋아졌더라도 우리는 그가 베푼 은혜를 잊으면 안 된다.
지난 세월을 돌이켜보면 내게 복음을 전해준 사람, 나를 양육한 사람, 나를 걱정해주던 사람들이 참 많다. 그들은 모두 내 이웃이다. 오, 자비를 베푼 자가 내 이웃임을 왜 모르는가? 그들을 나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옳다. 자비를 베푼 자가 자기에게 한번 잘못했다고 그 모든 은혜를 잊고 원수로 삼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운 것이다.
반면에 '강도 만난 자'는 우리의 이웃은 아니다. 그러나 그런 자에게 이웃이 되어주는 자야말로 진정한 예수님의 사람들이다. 어려움과 고통받는 자에게 이웃으로 다가가는 것이 십자가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다. 이로써 우리는 이웃 사랑이라는 계명을 온전히 이룰 수 있다.
우리는 믿음으로 이미 영생을 얻었지만, '이웃사랑'을 율법이라고 외면하면 안 된다. 율법은 그리스도의 그림자다(골 2:17).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는 율법 아래 있는 자보다 더욱 이웃 사랑에 마음을 다해야 한다.
주님, 주님께서는 물 한 그릇 준 사람의 은혜조차 절대로 잊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제가 주님을 본받기를 원합니다. 아주 조그마한 은혜도 잊지 말고 잘 기억하며 나의 이웃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자가 되게 해 주십시오.
59. 더 귀한 하나님의 일이 무엇일까? (눅 10:38-42)
◆ 무엇이 하나님의 일인가?
(42)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마르다는 주님과 그 일행을 대접하기 위해서 몹시 분주했다. 주님을 대접하기 위한 이 봉사를 사람들은 명백하게 '주님의 일을 하고 있다'라고 규정할 것이다. 무슨 이론의 여지가 있겠는가? 주님을 위한 봉사와 헌신 맞다.
그런데 동생 마리아는 이렇게 바쁜 상황에서 한가하게 주님 발치에 앉아서 말씀을 듣고 있었다. 과연 이것이 마땅한가? 누가 보아도 마리아가 틀렸다. 마르다는 자신은 옳고 마리아가 틀렸음을 확신하기에 예수님께 와서 호소했다. 주님, 내 동생에게 일 좀 하라고 말해 주세요.
그러나 주님께서는 오히려 마리아 편을 들면서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했다고 하셨다. '좋은 편'이란 말씀은 마리아도 아주 귀한 주님의 일을 하고 있음을 일깨우신 것이다. 마르다만 주님을 위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마리아도 주님을 위하고 있는 것인데, 마리아가 오히려 더 주님을 위하는 일을 하고 있음을 말씀하신 것이다. 오, 이것이 주는 교훈이 얼마나 큰지!
당시에는 녹음기도 없던 시절이라, 예수님의 말씀은 한번 놓치면 더는 들을 수가 없었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대접해야 함을 알지만, 이 황금 같은 말씀을 놓칠 수가 없었다. 말씀에 대해 갈급함은 단순한 지적 욕망이 아니라, 영적 갈망이다.
예수님 입장에서도 음식 대접도 예수님을 존중하는 것이며, 나름대로 귀한 일이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소중하게 여겨서 단 한마디도 놓치지 않고 들으려는 마리아도 예수님을 존중하는 것이며 귀한 일이다. 아니, 그게 더 예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었다. 주님께서는 사마리아에서 복음을 전하실 때 빵보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 이루는 것이 자신의 더 중요한 양식임을 말씀하셨다(요 4:34).
그리고 마리아가 옳았다. 후에 마리아는 아무도 생각지 못한 일을 하는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5일 전에 무려 300데나리온이나 되는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머리털로 씼었다는 것은 식사 음식 대접과는 비교가 될 수 없는 헌신이었다. 어떻게 이런 헌신이 가능했을까? 그것은 마리아가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그리고 예수님께서 곧 돌아가실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지식과 믿음은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들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많은 사역자가 하나님의 일 '손과 발로 뛰는 것'으로만 규정한다. 말씀을 연구하고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선교사들의 보고에도 주로 손과 발로 뛰는 것만 보고하고 있다. 기도하고 말씀 연구하는 것을 사역이라고 보고하는 사람은 없다. 왜냐하면 누구도 그것을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많은 성도와 사역자들의 삶 속에서 기도와 말씀 연구가 사라졌다. 그런데 어떤 때는 그 이유가 참으로 묘하다. 너무 주님의 일에 바뻐서란다.
그러나 사실은 말씀과 기도가 신앙생활과 사역에서 최우선순위이다. 아니, 말씀과 기도 자체가 신앙생활이고 사역이다. 사역자가 이것을 인식하지 못하면 그의 사역은 곧 인간적이고 메마른 사역으로 전락할 것이다. 주님을 위한다고 하지만, 실상은 자기 욕망을 실현하고자 하는 몸부림일 뿐이고, 제대로 성과가 생기면 자만심이 가득한 목이 곧은 사역자가 될 것이다.
주님께서는 요한복음에서 사람들이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라고 묻자 이렇게 대답하셨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요 6:28, 29) 이 말씀은 당시에 손과 발로 일하고, 말로 설교하는 것만이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크게 각성시킨 말씀이다. 손과 발로 뛰는 어떤 일보다도 주님을 더욱 믿고, 아는 일이 더 우선이며 더 중요한 것임을 일깨우신 말씀이다.
할 일이 없어서 기도와 말씀 시간을 갖는 것이 아니라, 할 일이 많아도 가져야 한다. 아니 오히려 늘려야 한다. 기도 속에서, 말씀 묵상 속에서 우리의 일은 밀도가 있고, 우선순위가 세워지며 하나님의 뜻이 바르게 실천된다. “내가 날이 밝기 전에 부르짖으며 주의 말씀을 바랐사오며 주의 말씀을 조용히 읊조리려고 내가 새벽녘에 눈을 떴나이다”
(시 119:147-148)
나의 왕, 나의 하나님이여 ! 내가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소서 내가 주께 기도하나이다 여호와여! 아침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 (시 5 :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