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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사람 이야기 스크랩 유한양행 창업자 유일한 [조선 창조경영의 도전자들]
향상일로 추천 0 조회 295 16.05.09 18:25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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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창조경영의 도전자들]

유학 시절부터 상인 자질 발휘 보따리·숙주나물 장사로 성공

 

유한양행 창업자 유일한 (상)

 

▲ 1946년 귀국 후의 유일한 가족.

 

 

“자넨 마음먹은 것은 무엇이든 해낼 수 있네. 모쪼록 조국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게나. 그리고 언제나 조선인의 긍지를 잊지 말게.”

 

서재필은 고국으로 돌아가는 유일한에게 용기와 신념을 안겨준다. 1925년 유일한은 서른이었다. 일한은 배 갑판 위에서 세차게 물결치는 망망대해를 바라보노라니 가슴이 벅찼다. 그는 일제 강점에 신음하는 조국과 동포에게 헌신하리라 결의를 다졌다. 일본이 조국의 국권을 빼앗고 엄청난 자본으로 경제권을 송두리째 거머쥐고 있을 때에도, 뜻 있는 민족상공인들은 신상(紳商)의 정신으로 근대기업을 일으키고 있었다.

일제와 결탁한 정상배(政商輩)가 나라 경제를 휩쓸고 있을 때에도 이를 개탄, 조국의 독립을 가슴속에 꿈꾸면서 조선인의 기업 풍토를 이룩하려는 큰 뜻은 일부 기업인들에게서 끊임없이 이어졌다.

 

유일한은 불과 아홉 살에 자본주의의 본고장인 미국으로 건너가 벤저민 프랭클린의 자서전을 읽으며 자본주의 정신을 배우고, 이 신념으로 그곳에서 기업을 일으켰다. 일한은 외국 땅에서 독립운동에 힘을 기울인 서재필·박용만의 지도를 받으면서 선배 동지들과 나라 사랑의 정신을 키웠으며, 귀국 뒤 기업 활동에서도 자본주의 참뜻을 실천에 옮기고자 노력한다.

 

1895년 1월 15일 평양에서 아버지 유기연과 어머니 김기복의 9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집안은 그리 유복하지 않았다. 유기연은 경북 예천이 고향이었는데, 조선팔도를 다니며 장사를 하다가 평양에 정착, 어렵사리 점포를 마련한다. 농산물·건어물상으로 시작, 잡화상과 고급양품 도매상으로 발전해 나갔다.

유기연은 기독교 세례를 받고 교인이 된다. 그가 서구 문화에 관심을 갖게 된 것도 이때부터였다. 평양은 개화기 기독교가 번성한 고장이었다. 그 무렵 평양에는 서양 선교사들과 여러 민족지도자가 활동하고 있었다. 이들은 신문화를 일깨우며 청소년을 지도했다. 안창호·조만식을 비롯 많은 애국지사들이 민중계몽운동을 펼쳐 나아갔다. 이승만·장승만·박용만 등 이른바 ‘3만’으로 일컬어지는 선각자들도 자주 서울에서 애국심을 불붙게 하는 계몽강연을 했다. 어느 날 유기연은 박용만의 연설에 감동하여 만나기를 청했다. 술잔을 기울이며 나라 걱정을 주고받다가, 신생국가 미국의 눈부신 발전 이야기를 듣고 문득 유기연은 아홉 살 아들을 미국으로 보내 공부시키고 싶다는 뜻을 비쳤다.

 

“훌륭한 결정입니다! 이번에 미국 유학을 떠나는 아이가 몇 있습니다. 유군도 함께 데려가도록 하지요.”

 

아이 혼자 미국에 보내기로 한 유기연의 결심은 무모했고, 생각하기도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유기연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의지와 결단력이 굳센 사람이었다. 아버지의 기백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일한은 뛰어난 체력과 정신력으로 미국에서 혼자 힘으로 공부하면서 대학까지 마칠 수 있었다. 유일한은 박용만이 세운 ‘한인소년병학교’를 거쳐 헤스팅스고등학교에 진학했다. 그는 공부도 잘했지만 운동 또한 즐겼다. 특히 미식축구에 푹 빠졌다. 미식축구는 격렬하고 힘든 운동이었으나 타고난 체력과 훈련으로 극복하고 헤스팅스고등학교 대표선수까지 되었다.

 

유일한은 감수성이 예민하고 사상이 형성되는 청소년기에 미국에서 초·중·고 그리고 대학 교육까지 받았으며 그곳에서 직장생활도 했고 자기 사업체도 창업, 운영했다. 미국은 그를 키워준 제2의 고향이며, 거기서 배워 익힌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에 기초한 자본주의 근본정신은 인생의 신념이자 철학이 되었다.

유일한은 헤스팅스고등학교 시절부터 자립하기로 결심하고 신문팔이, 구두닦이, 식당종업원 등 여러 일을 닥치는 대로 하다가, 달리기를 좋아하는 자신에게 꼭 알맞은 신문배달원 일을 시작했다. 이 무렵 그는 본디 이름 ‘일형’을 ‘일한’으로 바꾸었다. 한자로 일한(一韓)으로 쓰게 되면 한국인이라는 뜻에 더 맞는다고 여겼다.

 

일한이 졸업을 앞두었을 무렵, 그즈음 북간도로 이주해 살던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해 형편이 어려워지자, 귀국하여 장남 노릇을 하라는 편지를 보내왔다. 하지만 일한은 공부를 그만두고 싶지 않았다. 그는 평소 자신을 믿어주는 담임 교사와 상담을 했다.

 

“전 미국에서 더 공부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한국에는 자식이 성장하면 아버지를 대신해 가족을 책임지는 전통이 있습니다. 지금 아버지가 귀국하라시는데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자네는 아직 미국의 선진학문을 다 배우지 못했네. 지금 귀국한들 일제 식민통치 아래에서 무슨 일을 하겠나. 그보다는 미국에서 좀 더 공부하여 성공한다면 가족들을 더 잘 부양할 수 있지 않겠나.”

 

담임 교사는 은행에서 일한이 100달러를 융자받을 수 있도록 보증을 서주었다. 일한은 감사를 표하고 집으로 돈을 보낸 뒤, 디트로이트 변전소에서 일하며 1년 만에 그 돈을 모두 갚았다. 1916년 스물한 살 때 유일한은 미시간대학 상과에 들어갔다. 융자금을 갚느라 입학이 1년 늦어졌다. 그는 대학 학비와 생활비를 아르바이트로 벌어야 했는데, 이때 피고용인이 아닌 경영인이 되고 싶은 욕구가 생겼다. 일한의 상업적 재능은 이때부터 나타나기 시작한다. 동양, 특히 중국에서 수입되는 비단·손수건·양탄자 등 특산물을 보부상처럼 등에 지고 손에 들고 다니며 팔았다. 이 착안은 적중했다. 그는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장사 수완을 유감없이 발휘, 꽤 큰돈을 벌 수 있었다. 그의 상인 자질은 대학 졸업 뒤에 본격적으로 발휘되었다.

 

유일한은 대학에서 자본주의 이론을 배웠고, 졸업 뒤에는 한동안 제너럴일렉트릭에서 회계 일을 하면서 글로벌 경영 실무를 익혔다. 그러다가 그는 스스로 사업을 하기로 한다. 숙주나물 장사였는데, 대학 나온 사람이 하기에는 하찮은 사업이었다. 이윤이 남는다면 일의 귀천을 어찌 따지랴. 숙주나물 장사는 크게 성공했다. 수요가 늘자 그는 대학 동창 왈리스 스미스와 동업으로 자본을 끌어들여 사업을 확장했다. 1922년 생산공장을 건설하면서 ‘라초이식품회사(La Choy Co.)’를 세웠다. 이때 유일한의 나이 스물일곱이었다. 회사는 번창했고 제품은 디트로이트, 시카고뿐만 아니라 펜실베이니아, 뉴욕에까지 알려져 주문이 몰려들었다.

 

미국의 노예해방은 산업자본주의를 발전시킨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19세기 후반 자원개발과 교통기관 발달에 힘입어 석유업·철강업 등 거대산업들이 급속히 발전하고 독점화되었다. 공화당이 남북전쟁 뒤 오랫동안 정권을 유지하면서 별다른 간섭이 없었던 것도 산업자본이 거대해진 이유의 하나이다. 1890년대 들어서자 남부·동부유럽에서 이민이 급격히 증가했다. 이들은 지금까지의 이민과는 달리 주로 경제적 이유로 미국에 왔으며, 민주주의 경험이 없었다. 종교도 프로테스탄트가 아니었으므로 기존 이민자들과 잘 동화되지 못해 사회문제를 일으켰다. 그 때문에 1920년대에는 할당 이민법이 제정되었다. 테오도어 루스벨트가 대통령에 오른 1901년부터 윌슨 대통령 제1기 끝 무렵인 1919년까지는 독점반대 사회개혁이 행해졌으며 이른바 혁신주의시대라고 일컬어진다.

 

1910년 조선이 국권피탈되자 많은 애국지사가 해외로 망명했다. 총칼을 앞세운 헌병·경찰통치시대 일본의 한국인 탄압은 극에 이르렀다. 억압에 항거하여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다. 그 만세 함성은 팔도강산을 뒤흔들어 민족혼을 일깨웠다. 해외에서도 한민족이 살고 있는 곳이면 어디에서나 일어난 대한독립만세는, 그야말로 온 세계를 울리는 비폭력 저항운동이었다. 이때 미국 곳곳에서도 독립운동집회가 열렸다. 1919년 4월 13일, 필라델피아에서 ‘한인자유대회’가 열렸다. 이때 유일한은 미시간대학 졸업반 학생이었는데, 그도 이 운동에 앞장섰다.

 

그 무렵 미국에는 농업이민 및 국권피탈 뒤 망명한 애국지사와 정부관리, 유학생 등 많은 한인들이 살고 있었다. 청년학생들이 필라델피아 한인자유대회를 주도했고 서재필·이승만·박용만·장덕수·김도연·이대위·정한경 등이 학생들을 지휘하고 있었다. 유일한은 이 집회의 결의문 작성에 참여했으며, 선포하는 일도 맡았다. 필라델피아 대회는 그에게 새로운 사상적 전기를 마련해 주었다. 이때부터 일한은 조국과 민족에 대해 더욱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유일한은 1924년에 미국에서 국제무역회사인 뉴일한주식회사(New Il Han & Company)를 세운 바 있는데, 이때 그는 서재필을 사장으로 초빙했다. 유일한은 30년 연상인 서재필을 아버지처럼 모시고 존경했다. 일한이 귀국할 때 서재필은 미술을 전공한 딸에게 새겨 만들게 한 ‘버드나무가 그려진 목각품’을 정표로 선물했다.

 

“자네 성이 버들 유(柳) 아닌가. 강인하게 잘 자라며 잎이 무성한 버드나무처럼 동포에게 건강하게 쉴 수 있는 그늘을 주고, 자네가 앞으로 할 일들과 고국의 미래도 그 버드나무처럼 무성하게 잘 자라기를 바라는 뜻일세.”

 

1925년 유일한은 중국계 여학생 호미리(胡尾利)와 결혼한다. 그녀는 미시간대학에서 의학공부를 하고, 동양 여성 최초로 코넬대학에서 소아과 전문의 자격을 취득했다. 1926년 일한은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에비슨 박사로부터 초청장을 받았다. 에비슨은 유일한이 연희전문학교 교수를, 호미리가 세브란스의전 소아과 과장을 맡아주기를 바랐다. 일한은 고국에 영구 귀국하기로 결심하고 있었지만, 에비슨의 제의를 받아들일지는 고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교수로서 학생을 가르치기보다는 기업을 세워 조국과 민족에 봉사하겠다는 결심을 미국을 떠나기 전에 이미 굳히고 있었다. 그는 라초이식품회사의 지분을 정리한 25만달러로 의약품들을 구입했다. 먼저 약 종류를 주종으로 하는 무역회사를 세우려는 것이었다.

 

 

▲ 1926년 귀국 당시 동아일보에 게재된 유일한·호미리 부부.

 

 

1926년 유일한은 한국으로 돌아왔다. 호미리는 한국에 아무런 연고도 없었지만 남편의 뜻을 따랐다. 그해 12월 10일 일한은 서울 종로 덕원빌딩에 유한양행을 창업하여 사장이 됐다. 아내 호미리는 에비슨의 부탁을 정중히 사양하고, 유한양행 사무실 덕원빌딩 2층에 소아과를 열고 가까운 거리에서 남편 일을 도우며 틈틈이 의료봉사 활동을 펼쳐 나갔다. 유한양행은 처음부터 국민보건을 목적으로 세운 것이니만큼, 약품 말고도 화장지·생리대·비누·치약과 더불어 농촌에서 필요로 하는 농기구·염료를 수입 판매했다. 다른 제약회사들은 과장광고를 일삼았지만 유일한은 그러지 않았다. 그때까지 모두 세로로 된 광고문안을 가로로 바꾼 새 신문광고로 눈길을 끌었고, ‘먼저 의사에게 문의하라’며 의사의 진단이 있어야 올바른 치료가 된다고 강조했다. 약만 팔아먹으면 그만이라는 악덕상인의 사고방식과는 차원이 다른 계몽적인 문안으로, 서재필 선생이 만들어 준 ‘버들표 유한양행’은 국민의 마음속에 정직하고 믿을 수 있는 회사라는 이미지를 심어갔다.

 

“기업의 첫째 목표는 이윤추구입니다. 그러나 기업에서 얻은 이익은 그 기업을 키워준 사회에 환원해야 합니다. 또한 기업의 생명은 신용입니다. ‘정직’이 버들표 유한의 영원한 전통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은 죽어 돈을 남기거나 명예를 남기기도 합니다. 하지만 가장 값진 것은 ‘사회를 위해서 남기는’ 참된 신뢰입니다.”

 

유일한은 늘 이렇게 사원들에게 강조했다. 유한양행은 창립 5년여 만에 탄탄한 기반을 쌓아, 미국 업체 아보트와의 거래를 시작으로 1930년대에는 프랑스·영국·독일의 저명한 제약회사와 제휴, 글로벌기업으로 성장해 나아갔다. 기업이 번성함에 따라 유한양행은 사옥을 서울 서대문구 신문로에 정하고 만주와 다롄에 창고를 마련, 중국 본토에까지 대리점을 두고 판로를 확장해 나갔다. 이와 같이 무역이 순조롭게 이루어지자 미국 선박회사 및 보험회사의 대리점도 운영했다. 그렇게 유한양행은 크게 성장해 1936년 6월 주식회사로 확대 개편하게 된다. 1937년부터는 중국 중부 및 서북부지역·만주·동남아까지 판로를 확장했다. 이 무렵 영업망 구축을 위해 만주를 둘러보고 온 한 회사 간부가 일한에게 건의를 했다.

 

“만주 곳곳에 마약중독자가 늘어나 헤로인, 모르핀이 아주 비싼 값에 불티나게 팔리고 있습니다. 우리도 만들어 팔면 어떨까요?”

 

일한은 불같이 화를 내며 꾸짖었다.

 

“나더러 아편 장사를 하란 말이냐. 살리는 약을 만들어도 모자랄 판에 죽이는 약을 만들자니, 그건 사람으로서 할 소리가 아니다!”

 

그는 당장 사표를 쓰라고 지시했다. 주위에서 만류하고, 그 간부도 거듭 조아린 끝에 용서받을 수 있었다.

 

일제강점기 때 유한양행은 세금을 꼬박꼬박 납부했다. 그러나 그것은 일본을 위해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유일한은 이렇게 말한다.

 

“일제에 고분고분하지 않은 나에게는 늘 일본 경찰이 따라다니고 있습니다. 세금을 제때 내지 않는다면 저들은 트집을 잡아 회사를 무너뜨리려 할 게 뻔합니다. 유한양행은 모든 종업원이 함께 타고 가는 큰 배입니다. 그들을 위해서도 회사는 꼭 지켜내야 합니다.”

 

1930년대 유한양행은 서울 서대문 본사와 소사공장, 다롄·톈진 지점과 상하이 출장소, 사이공 출장소, 대만의 타이베이 출장소까지 합치면 종업원이 1000여명이나 되는 대기업이었다. 소사에는 유한양행 말고도 25개나 되는 일본 회사가 있었으나 실적은 유한양행이 가장 우수했다. 유일한은 여기서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1938년 4월 유럽 및 남북미대륙 시찰여행을 떠났다. 선진국 제약업계를 둘러보고, 유한양행에서 생산한 약품과 한국 농촌 특산물 판로도 개척하고자 했다. LA 출장소를 세우고, 유럽 지역 판로를 열어갔다.

 

유일한은 문득 공부를 계속하고 싶은 욕구가 솟구쳤다. 시대는 날로 발전하고, 어제 이론이 오늘 바뀌고 그것이 내일 또 어떻게 바뀔는지 모르는 것이 학문의 세계였다. 그가 전공한 상과는 더더욱 그러했다. 그즈음 비행기와 배의 발달로 서신 연락도 빨라졌으며 통신수단도 발달해 있었다. 일한은 생각대로 미국에서 대학원 공부를 하면서도 서울 본사로부터 일주일에 한 번씩 보고를 받고 지시를 내릴 수 있었다.

 

그가 한국을 떠날 때만 해도 세계 정세는 그다지 긴박한 상황은 아니었으나, 1939년에 들어서면서부터 전운이 차츰 나돌기 시작했다. 1939년 9월 독일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을 시작으로 유럽은 전쟁에 휩싸였다. 미국에도 그 여파가 밀려오고 있었다. 유일한은 아시아 지배 야욕에 불타는 일본이 미국과 전쟁을 벌이게 되지 않을까 우려했다. 그렇게 되면 일제는 일본과 한국에 있는 미국인은 물론 친미 인사와 회사들을 핍박할 게 틀림없었다. 그는 서울에 남아 있던 아내와 아이들을 미국으로 불러들였다.

 

1941년 12월 8일 일본군이 하와이 진주만 폭격을 감행, 태평양전쟁이 터졌다. 미 육군정보처(OSS)는 한반도와 중국대륙으로부터 정보를 분석하고자 이 두 지역 사정에 밝은 인사들로 구성된 고문실을 두었다. 이때 유일한을 한국 지역 담당으로, 노벨문학상 수상 ‘대지’ 작가인 펄 벅을 중국 지역 담당으로 초빙했다. 유일한과 펄 벅은 이때 처음 만나 전쟁이 끝난 뒤에도 오래도록 친교를 이어갔다.

 

전쟁이 장기화되자 서울의 유한양행도 곤경에 빠졌다. 일본은 모든 행정을 전시 체제로 개편하고 물자 통제를 심하게 했다. 모든 기업체는 자재난을 겪어야 했고 의약품 회사는 제약원료 구입로가 끊겨 제대로 생산할 수가 없었다. 더욱이 유한양행은 한국인이 세운 민족기업이고 사주(社主)가 미국에서 돌아오지 않으므로 자칫 적산으로 몰수당할 위험도 있었다. 유일한은 일본 상인이나 회사와는 거래하지 않는다는 방침을 꿋꿋이 지켜 나갔는데, 그 때문에 일본인 제약업자의 시기와 모함으로 총독부 감시와 간섭은 더욱 심해졌다.

총독부는 유한양행 임직원 근로자들의 반일사상을 핑계 삼아 수시로 연행해 회사 운영을 어렵게 했고, 잦은 세무사찰을 벌였으며, 금융 면에서도 많은 불이익을 주었다. 이러한 실정에서도 유한양행 임직원들은 일치단결해 흐트러짐 없이 꿋꿋하게 시련을 이겨 나갔다.

 

 

 

[조선 창조경영의 도전자들]

사업은 나라를 위한 것 전 재산 사회 환원 구두 두 켤레 남기고 떠나

 

유한양행 창업자 유일한 (하)

 

▲ 미국 유학 가기 직전 부친 유기연과 함께.

 

 

1945년 8·15 광복을 맞이하자 유한양행의 앞날에도 희망과 활력이 넘치고, 일제 말기 배일사상 혐의로 구금되었던 임직원들은 풀려나 회사로 돌아왔다. 이제부터는 일제의 부당한 간섭 없이 자유로운 기업 활동을 펴나갈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그러나 이 활기찬 분위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광복을 맞이한 한국에 이데올로기적 시련이 다가왔다. 38선을 사이에 두고 남북한이 미국과 소련에 분할 점령된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유한양행은 38선 이북과 과거 만주 및 중국대륙까지 진출해 기업 활동을 펼치고 있었는데, 그 지역 모든 상권을 일시에 잃고 말았다. 대륙에 구축하고 있던 기업자산은 유한 전체 자산의 80%에 이르는 엄청난 것이었다.

 

한편 미 군정 시기에 미국 의약품이 대량으로 들어왔다. 미제 의약품은 품질이 좋았고, 특히 제2차 세계대전 때 개발된 약품들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이나 한국에 전혀 알려져 있지 않았던 신제품들이었다. 항생제인 다이야진·페니실린이나 결핵치료제로 쓰이는 파스 등은 그 효력이 경이적이었다. 국내에서 생산해 내는 제품은 그 질이나 가격으로는 도저히 미국 제품에 상대가 되지 못했다.

 

1946년 7월 유일한은 광복된 조국에 돌아왔다. 그 무렵 한국의 기업가들은 대한상공회의소를 결성하고, 유일한에게 초대 회두(會頭)를 맡아달라고 간청했다. 그들은 한국 기업계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는 유일한이 가장 적임자라고 판단했다. 뜻밖의 부탁에 유일한은 고심했지만, 이 일은 해방된 조국에서 절실한 재계를 건설하는 가치 있는 사업이라 생각하고 받아들였다. 그는 국내 상공업계를 공정하게 이끌어 나가기 위해서 유한양행 사장직을 사임했다. 이때 일한은 구영숙을 사장으로 영입하고 자신은 일선에서 물러나 회장이 되었다.

유일한과 구영숙은 미국의 한인소년병학교 시절부터 알고 지낸 사이이며, 구영숙은 성품이 곧고 강직하며 패기와 능력이 있어서 유일한은 일찍부터 그를 눈여겨보고 있었다. 구영숙은 미국 에모리대학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고 귀국해 의학계에 몸담고 있었다. 이런 사람에게 회사를 맡기면 자기가 일일이 관여하지 않더라도 잘 운영되어 가리라 믿었다.

 

유일한은 대한상공회의소 회두 자격으로, 그 무렵 이화장(梨花莊)에 머물고 있는 이승만을 인사차 방문했다. 이승만과는 미국에서 여러 차례 만난 일이 있었으나 가까이 모신 일은 없었다. 이승만은 유일한을 정중히 맞아주었다. 그 자리에는 조병옥을 비롯 저명한 정치인들이 함께했다. 이때에 이승만은 그에게 상공부 장관 입각을 권했으나 유일한은 정중하게 거절한다. 그로부터 3개월 뒤 그해 12월 유일한은 돌연 다시 미국으로 떠난다. 계속되는 입각 강권 때문이었다.

 

6·25전쟁은 민족의 비극이며 한국 역사의 오점이다. 그 상흔은 휴전으로도 끝나지 않았다. 이 전쟁 아닌 전쟁, 민족상잔의 동란으로 남북한 전 지역은 황폐해졌다. 북한군은 한때 부산과 대구를 제외한 남한 전 지역으로 쳐들어왔으며, 군인만이 아니라 일반 국민까지도 수백만 명이 죽고 가족은 흩어졌다. 산업시설은 파괴되고 특히 경인지역 공장지대가 입은 피해는 물론, 전 국토가 잿더미로 뒤덮였다. 유일한은 미국에서 일본으로 거처를 옮겨 꾸준히 본사 직원들과 연락, 지시를 내리며 회사를 온전히 보전하기 위해 온 힘을 다했다.

 

유한양행은 전쟁 초기 시설과 자재에서 큰 피해를 입지는 않았다. 보관하고 있던 약품은 징발되었으나 북한군은 공장시설을 파괴하지 않았다. 서울 수복으로 회사는 활기를 되찾는 듯했으나 그해 겨울 다시 중공군 참전으로 정부와 국민들은 서울을 다시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유한양행은 가까스로 시설 일부와 약품원료를 피란지로 옮겨놓을 수 있었다. 임시수도가 된 부산에 도착한 유한양행은 범일동 삼광제약 사옥을 얻어 가까스로 업무를 시작했다. 부산 피란지에서의 제약 사업은 수많은 어려움의 연속이었다.

유한양행은 실패를 거듭한 끝에 간유(肝油)에서 비타민을 추출, 정제를 만들어 내는 데 성공한다. 창의적인 생각과 기술개발은 언제 어느 때에도 성공의 비결임을 절감케 했다.

 

공방전을 거듭하던 평택 오산전투에서 중국군과 북한군이 밀리기 시작하자 전세는 뒤바뀌었다. 중국군과 북한군이 북으로 달아나면서 서울은 다시 수복되었다. 38선 이북 철의 삼각지대에서 치열한 전투가 이어지고 있었다. 전쟁 기간 내내 양군의 성과 없이 지루한 소모전이 계속되었다. 휴전회담이 개시되고 마침내 1953년 7월 휴전협정이 조인되었다.

 

유한양행은 서울 종로구 신문로 본사로 돌아왔다. 이제 유일한의 진두지휘 아래 활기를 되찾게 되었으며 그간 구상해 오던 새로운 계획들도 차질 없이 착착 진행해 나갔다.

 

“6·25전쟁 동안 회사를 지켜낸 것은 유한양행의 사원들 덕분입니다. 유한양행은 국민의 것이라는 제 기업관을 사원 여러분 또한 이어받아 불사조 같은 정신으로 지켜낸 덕분입니다.”

 

유일한은 경기도 소사 제약공장 복구와 확장에 손을 댔다. 회사 자본을 대폭 증자하고 정부에서 주선하는 ICA자금 25만달러를 대부받아 소사공장 생산시설을 개선, 제품 생산에 힘썼다. 일한은 또 아메리칸 사이아나미드회사와 기술제휴를 체결하고 현대식 항생물질 소분소를 기동시켜 1957년 한국 최초로 항생물질제품을 생산해 냈다.

 

유일한은 사장직을 전무인 이건웅에게 물려주고 회장에 취임했다. 그리고 회사 운영 합리화를 위해 기구를 개편했다. 또 회사에 농축부를 두고 가축약품을 생산했다. 이 가축약품 생산은 유일한이 제약회사를 세울 때부터의 계획이었으며, 그는 한국 농촌을 위해 도움이 되고자 늘 고심하고 있었다. 유일한이 유한양행을 처음 세웠을 때에도 한국 농촌에서 농민들이 제작하는 특산물을 해외로 수출하는 일을 시작하고 있었다. 이번에도 가축약품 생산에 착수한 것은 농촌을 위하는 그의 의지 표현이었다.

 

1960년대 들어서자 유한양행은 더욱 번성해 나갔다. 이 시기 유일한은 동남아 각국을 순회하며 판로를 개척했다. 또 유럽과 미국의 이름난 제약회사를 찾아 기술제휴하며 자체 기술개발에 힘썼다. 그는 유한양행을 최신 기술과 최고 시설을 갖춘 국내 제일의 제약회사로 발전시킬 뿐만 아니라 세계 제약업계로 웅비하는 꿈을 갖고 있었다. 1960년대 소사공장에 최신설비를 갖춘 실험연구실을 준공했고, 속초에 어간유제유소를 신설, 다음 해에는 이를 속초 수산공장으로 발전시켜 나아갔다. 또 이해에는 인삼네오톤을 홍콩으로 수출하기 시작했다. 유한양행이 날로 커지자 정치자금 압박 또한 거세졌다.

정부와 공생관계를 이루며 특별융자 등 갖은 혜택을 받는 정치재벌들이 생겨났다. 정부 특혜를 받지 못하는 기업은 그만큼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유일한도 이를 모르지 않았으나 그는 끝내 뜻을 굽히지 않았다.

 

“기업이 정부와 유착, 부정한 돈으로 경영하면 그들에게 종속될 위험이 있다. 그건 기업이 아니라 정치가들 머슴일 뿐이다.”

 

유한양행이 정치자금을 내놓지 않자 세무서와 치안국 경제계에서 세무사찰로 압박을 가했다. 회계과 직원들이 치안국에 끌려가 매를 맞기도 했다. 사장 이건웅은 유일한에게 하소연했다.

 

“회사마다 얼마씩 할당된 모양입니다. 1 더하기 1은 2가 아니라 3, 4도 될 수 있다고 억지를 부리니 회사가 초상나게 생겼습니다. 회장님, 이번만은 회사를 위해서도 좀 굽히는 게 어떻겠습니까?”

“1 더하기 1은 2일 뿐이야! 돈보다는 실력으로 승부를 해야 하지 않겠나! 상공인들이 정치인에게 자금을 바치면 그만큼의 돈을 제품값에서 뽑아내야 하고, 결국 골탕먹는 건 국민들이네. 알겠나!”

 

무시무시한 일제 총독부 세무사찰도 이겨냈던 유한양행의 회계장부는 이번에도 완벽했다. 그러자 치안국은 아예 유한양행 사무실을 샅샅이 뒤져 예금통장과 도장까지 압수하고는 몰래 은행에서 9600만원이라는 큰돈을 빼내가고 말았다.

 

1962년 유한양행은 서울 영등포 대방동에 대지 6600㎡(2000평), 건면적 4800㎡(1460평) 사옥을 신축하여 본사를 옮기고 전국 규모의 특약점 조직을 구축했다. 이해 유일한은 기업을 공개하면서 주식시장에 상장했다.

또 유일한은 사원지주제(社員持株制)를 도입, 신주(新株)를 사원들에게 분배했다. 기업 성공의 혜택을 받도록 하면 사원들도 회사와 함께하는 운명공동체 의식을 갖게 된다고 생각했다. 유한양행 주식 가격은 날로 상승해 갔다. 이는 사회가 유한의 미래를 희망적으로 믿는 증거였다. 주식상장 뒤 유한양행 임직원들은 회사 운영에 책임과 보람을 느끼게 되었다. 이 무렵 유한양행은 사보도 발간했다.

회사에서 일어나는 일들과 한국 제약업계, 한 걸음 더 나아가 세계 제약업계 정보들을 사보를 통해 사원들에게 알리면서 경영합리화를 수시로 토론토록 했다. 사원에게 회사 운영 실태를 알리는 것은 오늘의 기업사회 사조이며, 그렇게 해야만 노사갈등도 해소되고 모든 기업가족은 책임과 사명을 갖게 된다는 것이 유일한의 신념이었다.

 

유한양행은 날로 발전해 갔다. 끊임없는 기술혁신으로 1965년에는 PAS 원료생산을 개시했다. 1968년에는 한국 최초 IBM 전자자료처리실을 설치했다. 이어 소사 공장을 ‘펄 벅 재단’에 인계하고, 새로운 시설의 공장을 신축하고자 시흥에 대지 8만2600㎡(2만5000평)를 매입, 1969년에 건면적 5780㎡(1748평) 영등포공장을 준공했다. 이어 미국 킴벌리 클라크회사와 합작해 ㈜유한킴벌리를 설립, 유한양행은 세계 제약업계와 어깨를 겨루는 발전을 이룩해 나아갔다.

 

 

▲ 유일한의 유언장 내용을 대서특필한 신문들(1971년 4월 9일자).

 

 

유일한은 교육은 타고난 인간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계발해주므로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고 믿었다. 교육을 받은 사람은 능력이 계발되어 사회에 기여할 수 있으나, 교육을 받지 못하면 잠재된 능력이 빛을 보지 못하고 시들어 버리고 만다. 일한은 한민족은 세계 어느 민족에도 뒤지지 않는 자질을 갖고 있으나, 당파싸움에 빠져 이를 길러주는 교육이 부실했기에 일제강점기라는 수모를 겪은 것이라고 생각해 왔다.

유일한은 6·25전쟁이 휴전은 되었지만 집을 잃고 가난해 학교 교육의 기회를 갖지 못한 청소년들이 거리를 떠도는 모습을 보며 가슴 아파했다. 그는 이들을 버려둘 수만은 없다고 생각, 1952년 소사 공장 안에 임시교실을 만들고 청소년을 모집해 학비와 숙식비를 제공하면서 기술교육을 실시키로 했다. 이것이 ‘고려공과기술학교’의 시초였다. 이 학원에서의 기술교육은 그 뒤에도 계속 이어져 많은 어려운 청소년들이 기술을 습득하고 일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 1957년 서울 본사가 있는 대방동에서 다시 ‘고려공과학원’을 개교, 역시 청소년들에게 기술을 가르쳤다. 교육연한 수업내용은 정규 공업학교와 다를 바 없었지만 정부인가를 받지 않아 우수한 학생들의 응모가 적었다. 유일한은 정부 교육령에 따른 정규 고등학교 신설을 서둘렀다.

 

1963년 어느 날 그는 세브란스의전 교수와 원자력병원장을 역임한 김명선을 불렀다. 김명선은 유일한이 새 만년필을 쓰고 있는 것을 보았다.

 

“못 보던 만년필이군요. 새로 사셨습니까?”

 

“내가 미국에서 공부할 때 셰퍼 만년필을 사서 19년간 써 왔거든. 설명서에 언제든 무료 수리해 준다고 써 있었는데 얼마 전에 고장이 났어. 그래서 미국 셰퍼 본사로 고쳐달라고 보냈는데, 자기들 제품을 19년이나 써주어서 고맙다며 수리 대신 새 만년필을 보내주더군.”

 

“19년 쓴 만년필을 고쳐달라고 보내는 사람이나, 그 대신 새 제품을 보낸 사람이나 다들 예사롭지가 않습니다그려. 허허.”

 

“약속은 지키라고 있는 것 아닌가. 그래서 말인데, 기업활동으로 얻은 이윤은 사회에 환원해야 한다는 게 내 경영철학이자 국민에 대한 약속이네. 그래서 이제부터 교육사업에 힘을 쏟으려 해. 자네가 내 뜻을 알고 책임을 맡아주었으면 하네.”

 

그리하여 1963년 ‘재단법인 유한학원’을 설립, 이사장에 세브란스의전 교수 김명선 박사를 초빙, 학교 설립을 준비해 1964년 ‘유한공업고등학교’를 개교했다. 유한공업고등학교에 대한 유일한의 기대와 열성은 대단했다. 그는 사재를 들여 학교 설립 및 운영에 필요한 비품을 모두 준비했다. 1966년에는 유한중학교를 병설했다. 학생들 모두에게 장학금을 지급했으며 시설도 전국에서 손꼽힐 만큼 좋았다. 학교 운영도 순조로웠고 교육 내용도 충실해 우수한 학생들이 몰려들었다.

 

유한학원은 1977년 12월 유한공업전문학교를 설립, 1979년 유한공업전문대학으로 개편했으며 1991년 12월 유한전문대학, 1998년 유한대학, 2011년 유한대학교로 발전을 이룬다. 메카트로닉스·IT·콘텐츠디자인·지식서비스 등 모두 4개 학부 22학과를 운영하고 있다. 이처럼 유일한은 민족기업을 창업해 성공적으로 운영해 왔으며, 또 거액의 재산을 내놓아 학교를 세우고 청소년들에게 교육받을 기회를 주면서 한민족의 근대적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1971년 3월 11일, 유일한은 일흔여섯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수많은 내빈이 참석하여 거인의 가는 길을 눈물로 지켜보았다. 그의 주검을 실은 차는 ‘할아버지 고이 잠드소서’ 플래카드가 내걸린 유한공고 교정으로 향했다. 찬송가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그는 ‘유한동산’에 안장되었다. 저만큼 세워진 그의 동상이 흙으로 돌아가는 그를 굽어보고 있었다. 정부는 그 공로를 기려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했다.

유일한은 유언에서, 자신의 모든 주식을 학교재단에 넘기고, 딸 유재라에게는 묘지 주변 땅 1만6500㎡(5000평)를 주어 유한동산으로 꾸며 학생들이 마음껏 즐기게 했다. 미국의 장남 유일선에게는 이런 유언을 남겼다.

 

“대학까지 졸업했으니 앞으로 자립해서 살아가거라.”

 

그러면서 재산을 한 푼도 남기지 않았다. 그동안 회사를 키워준 사회에 모든 것을 되돌려 준 유일한에게 남은 것은 양복 두 벌과 구두 두 켤레뿐이었다. 그의 이런 행적은 사람들에게 회자되었다. 유일한의 행적을 되짚어 보면 오직 경탄과 존경을 금할 수 없다. 보통 사람이라면 부모 슬하에서 응석을 부릴 아홉 살 나이에 태평양을 건너 머나먼 이국땅에 갔다는 것만으로도 놀라운 일이다. 하물며 말도 다르고 풍습도 다르고 모양새도 다른 사람들이 사는 사회에서 자기 힘으로 생활을 개척하면서 대학까지 마쳤다. 그곳에서 신문팔이에서부터 사업을 시작해 성공한 그 굳은 의지와 실천력은 경외감마저 들게 한다. 일한은 사생활도 대단히 검소했다. 그가 갖고 있는 재산이라면 호화로운 저택에서 사치스럽게 생활할 수 있었으나 그는 절대 그러지 않았다. 자기 개인의 생활이 그러했을 뿐만 아니라 가족들에게도 사치를 허용하지 않았다.

 

유일한은 또 자기의 직계 가족들은 물론이고 일가친척 누구도 무턱대고 중용하지 않았다. 그와 친분이 있다 하면 어김없이 일자리 청탁을 했으나 절대 응하지 않았다. 그 사람의 모든 능력을 꼼꼼히 살펴, 일을 맡겨도 괜찮겠다는 판단이 설 때에만 일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그렇기에 그는 때때로 친척이나 친지들로부터 피붙이에 대한 정이 없다는 비난도 받았다. 이는 자본주의 사회인 미국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면서 몸에 밴 서구적 정서에서 나온 그의 신념이었다.

 

유일한은 ‘근면·성실·정직’을 평생의 신조로 삼았다. 이것은 그에게 신앙과 같은 생활의 계율이었다. 그의 아버지인 유기연으로부터 이어받은 교훈인 동시에 그가 미국에서 배우고 체험으로 익힌 진정한 자본주의 정신과도 일치하는 것이었다.

 

그는 늘 가족이나 직원들에게 입버릇처럼 이렇게 말했다.

 

“근면하지 않으면 경쟁사회에서는 살아갈 수 없으며, 성실하지 않으면 일을 성취할 수 없고, 정직하지 않으면 남이 믿어주지 않는다.”

 

유일한은 기업 운영의 몇 가지 성공비결을 강조했다.

 

“먼저 좋은 물건을 값싸게 생산해야 하고 고객이 원하는 상품이 무엇인가를 알아내야 하며, 그뿐 아니라 고객이 사고 싶도록 새로운 제품을 생산해야 한다. 기업인은 수요를 찾아다닐 뿐만 아니라 수요를 창조해야 한다. 그 수요를 창출하기 위해서는 언제나 신기술을 개발해 새로운 제품을 생산하고, 또 눈은 늘 밖으로 세계로 돌려 남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살펴야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새로운 착상이 기업 성장의 원동력이라는 사실이다.”

 

이는 슘페터의 창조적 개척정신 주장과 상통한다. 또 그는 한국의 경영인들에게 이런 말을 남긴다. “기업은 개인의 영화(榮華) 수단이 될 수 없다. 기업의 소유주는 사회이며 기업주 개인은 이를 관리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기업인은 사회의 기업을 맡은 이상 이를 합리적으로 운영해 많은 이윤을 창출해 내며 기업을 번영시켜야 할 책임이 있다. 나는 사업의 목적은 명예로운 방법으로 돈을 버는 것임을 명심해 왔다. 또한 인생의 목적은 선(善)을 행하는 것임을 잊지 않으려 힘써 왔다.”

 

 

고정일

1940년 서울 출생. 성균관대 국문과 졸업. 2000년 소설 ‘청계천’으로 ‘자유문학’ 수상. 1956년~현재 동서문화사 발행인. 1977~1987년 동인문학상운영위집행위원장. 저서 ‘한국출판 100년을 찾아서’ ‘장진호’ ‘이중섭’ ‘매혹된 혼 최승희’ ‘폭풍 속에서’ ‘대하소설 불굴혼 박정희’. 한국출판학술상 수상, 한국출판문화상 수상.

 

 

/ 주간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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