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상 강해 (4)
하나님은 언약을 지키신다
대상 17:1~15
I. 서론
런던바이블칼리지(London Bible College) 학장을 지낸 데이비드 페인(David Payne)교수는 오늘 본문을 “다윗에 관한 말씀” 중에서 “가장 중요한 본문”일뿐만 아니라 “구약 전체에 있어서도 핵심적인 본문 중 하나”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은 다윗을 어떤 인물로 생각하고 있습니까? 데이비드 울프(David Wolpe)라는 전통 유대인 랍비가 있습니다. 이 사람은 2012년 <뉴스위크>가 선정한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랍비”로 뽑힌 인물입니다. 이 랍비가 다윗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히브리어 성경 전체를 통틀어 한 사람의 이야기를 이토록 길게, 연속적으로 언급한 예는 다윗뿐이다. 사무엘서부터 시작되는 다윗의 일대기는 열왕기서, 역대기서까지 이어진다.” 한국에 있는 소망교회를 담임하셨던 곽선희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성경 전체를 통틀어 나오는 사람의 이름 중에 최고로 많이 나오는 이름이 다윗입니다. 800번 이상 나옵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사실, 예수님의 별명도 다윗의 자손입니다. 그리고, 신약을 여는 첫 문장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입니다. 그런데, 헬라어 원문에는 “다윗”의 이름이 “아브라함”의 이름보다 먼저 나옵니다. 다윗이 신약을 여는 첫 번째 구약 인물이라는 것입니다. 다윗을 빼놓고 성경을 논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도대체 다윗은 어떤 인물일까요? 물론 이 질문에 한 문장이나 한 사건으로 답을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이 이 질문에 대한 좋은 해답을 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다윗의 신앙을 본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다윗이 다윗이 될 수 있도록 은혜를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도 받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II. 본론
1. 먼저, 다윗에 대해 살펴 보겠습니다.
1) 다윗은 하나님을 향하여 한결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1절, “다윗이 그의 궁전에 거주할 때에 다윗이 선지자 나단에게 이르되 나는 백향목 궁에 거주하거늘 여호와의 언약궤는 휘장 아래에 있도다”
보통 신앙인들은 위기를 당할 때, 그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지만, 그 위기 상황을 벗어나서 평안한 상황이 되면, 하나님을 예전처럼 믿고 따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달랐습니다. 1절, “다윗이 그의 궁전에 거주할 때에”라는 말은 다윗이 위기 상황을 벗어나 이제 어느 정도 안정을 취한 상황이라는 말입니다. 이 때, 다윗은 하나님을 생각했고, 하나님을 위해 성전을 건축하려고 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어떻습니까? 처음 예수님을 믿을 때, 그 신앙과 열정을 지금도 가지고 있습니까? 위기 상황 때, 하나님께 드렸던 기도와 서원을 지금도 지키고 있습니까? 다윗의 신앙을 통하여 우리 자신을 다시 한 번 더 점검해 보면 좋겠습니다.
2) 다윗은 또한 하나님께 물어보았습니다.
1~2절, “다윗이 그의 궁전에 거주할 때에 다윗이 선지자 나단에게 이르되 나는 백향목 궁에 거주하거늘 여호와의 언약궤는 휘장 아래에 있도다 나단이 다윗에게 아뢰되 하나님이 왕과 함께 계시니 마음에 있는 바를 모두 행하소서”
사실 이번 사건은 하나님께 물어 볼 필요도 없는 사항 같았습니다. 왜냐하면, 나단이 생각하기에도 하나님께서 당연히 허락해 주실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 하나님을 위하여 성전을 짓겠다는데 하나님께서 반대할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물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실패를 교훈으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궤를 옮길 때에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지 않다가 웃사가 죽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3개월동안 이동도 못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생각에는 옳다고 생각이 들었지만, 한 번 더 나단 선지자를 통하여 하나님께 물어 본 것입니다.
묻는다는 것은 겸손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교만한 사람은 묻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판단을 믿기 때문입니다. 반면, 겸손한 사람은 자신이 생각하기에 100% 옳은 것도 언제든지 틀릴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묻습니다. 다윗이 그랬습니다. 우리도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께 기도하고 일을 시작하는 습관이 있어야 합니다.
2. 둘째, 하나님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은 간단합니다. 다윗이 예루살렘을 새로운 수도로 정한 다음에, 기럇여아림에 있던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요? 다윗은 자신을 거처를 위해 백향목으로 궁전을 지었고, 수많은 전쟁을 통하여 이스라엘에 평화를 가져 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오늘 본문 말씀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읽어 보면, 두 가지 특이한 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말씀이 너무 길다는 것입니다. 2) 둘째, 하나님의 말씀이 다윗의 질문과 상관없는 내용이 많다는 것입니다. 하나씩 살펴 보겠습니다.
1) 첫째, 하나님의 말씀이 너무 깁니다.
제가 본문을 읽고, 첫 번째로 느낀 점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균형이 맞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윗의 말은 1절만 나오는데 반하여, 하나님의 말씀은 11절에 걸쳐 나옵니다. (4~14절) 다윗의 말은 간단합니다. “나는 백향목 궁에 거주하거늘 여호와의 언약궤는 휘장 아래에 있도다” 이 간단한 말(질문)에 하나님께서는 무려 11절에 걸쳐서 말씀을 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내용은 다윗을 축복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하나님께서 다윗을 축복하시려고 준비하셨다가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말을 한 마디 하자마자, 하나님께서 축복을 쏟아놓으셨다는 인상을 주게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 위해서는 마중물이 필요합니다.
나폴레옹 황제가 부관과 같이 어느 시골에 있는 조그마한 여관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되었습니다. 나폴레옹 황제는 평민처럼 변장을 하고, 부관 역시 나폴레옹의 친구처럼 있으면서 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맛있는 음식을 주문하여 둘이 식사를 잘하고, 웨이터에게 계산서를 달라고 했습니다. 계산서에 14프랑이 나왔다고 합니다. 당시 돈으로 꽤 많이 나온 것입니다. 나폴레옹 황제가 말합니다. “어이, 이 돈을 내가 내지.” 그러면서 계산을 하려고 주머니에 손을 넣었는데 지갑이 없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황제가 당황하고 있으니까 같이 식사했던 부관이 얼른 “제가 내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를 어떡합니까? 마침 부관의 주머니에도 돈이 없었습니다. 두 사람 모두 돈이 없이 식사를 한 것입니다. 부관이 웨이터에게 주인을 불러 달라고 해서 정중하게 말합니다. “정확히 한 시간 후에 돈을 갖다 드리겠습니다. 좀 이해해 주십시오.” 웨이터는 이들 손님들을 계속 서빙했기 때문에 이 분들이 돈을 떼먹을 분들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지만, 여관 주인은 당장 돈을 가지고 오지 않으면, 경찰에 신고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습니다. 그리고는 돈도 없는 것들이 비싼 음식을 먹고 돌아다닌다고 야단까지 쳤습니다. 주인이 하도 험한 말을 하니까, 옆에서 보고 있던 웨이터가 자신의 지갑에서 돈을 꺼내어 내면서 말합니다. “주인 어르신, 이분들은 거짓말할 분들이 아닌 것 같습니다. 제가 대신 내겠습니다.” 나폴레옹 황제와 그의 부관은 웨이터 덕분에 무사히 식당을 빠져 나올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정확히 한 시간이 지났습니다. 부관이 정장을 하고 여관을 다시 찾아 습니다. 그리고 여관 주인을 불러서 말합니다. “이 여관 얼마면 살 수 있소?” 그러자, 여관 주인이 말합니다. “제가 얼마 전 3만 프랑을 주고 샀습니다.” 부관이 말합니다. “여기 3만 프랑이 있소, 이 집문서를 내 놓으시오.” 그리고는 그 집 문서를 웨이터에게 주었습니다. “이제부터는 이 여관은 자네 꺼야. 자네는 우리를 믿어 주었어.”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관 웨이터는 이러한 보답을 기대하고 나폴레옹 일행을 도와 준 것을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그의 선행이 마중물이 되어 큰 축복을 받았습니다. 다윗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위해 성전을 짓겠다고 한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대가를 기대하고 한 행동은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마음의 중심을 보시고, 그를 축복해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이런 마음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이제, 다윗이 받은 축복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다윗이 받은 축복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그런데, 첫 번째 것을 제외하고는 다윗의 질문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는 것입니다. 첫째 축복은 다윗의 질문에 대한 응답입니다. 둘째 축복은 다윗을 존귀한 자로 만들어 주겠다는 약속입니다. 셋째 축복은 다윗을 위하여 한 왕조를 세워 주겠다는 약속입니다. 차례대로 살펴 보겠습니다.
A) 첫째, 다윗의 질문에 대한 응답입니다.
4절, “가서 내 종 다윗에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너는 내가 거할 집을 건축하지 말라”
하나님께서는 왜 다윗에게 성전을 건축하지 말고 솔로몬을 통하여 성전을 건축하라고 말씀하셨을까요? 우리는 그 정확한 이유를 모릅니다. 단지 성경을 통하여 알 수 있는 것은 다윗은 전쟁을 너무 많이 해서 피를 많이 흘린 사람이고, 솔로몬은 전쟁 이후의 사람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대상 22:8~9,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너는 피를 심히 많이 흘렸고 크게 전쟁하였느니라 네가 내 앞에서 땅에 피를 많이 흘렸은즉 내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지 못하리라 보라 한 아들이 네게서 나리니 그는 온순한 사람이라 내가 그로 주변 모든 대적에게서 평온을 얻게 하리라 그의 이름을 솔로몬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그의 생전에 평안과 안일함을 이스라엘에게 줄 것임이니라”
그런데, 성경 어디에도 다윗이 전쟁을 통하여 피를 흘린 것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다윗은 하나님께서 함께 해 주심으로 어디를 가나 승리를 했다고 말합니다.
8절, “네가 어디로 가든지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 모든 대적을 네 앞에서 멸하였은즉 세상에서 존귀한 자들의 이름같은 이름을 네게 만들어 주리라”
다윗이 모든 전쟁에서 대적을 멸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고, 이 일로 말미암아 다윗의 이름이 존귀하게 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다윗이 전쟁을 통하여 피를 많이 흘렸기 때문에 성전을 짓지 못하도록 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무엇인가 앞뒤가 맞지 않는 말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설교 초두에 말씀드렸던 데이비드 울프(David Wolpe)라는 전통 유대인 랍비의 관점을 좋아합니다.
“역대기는 피를 흘린 장수는 하나님의 집을 지을 수 없다며 도덕성에 방점을 둔다. 또 현실적으로 다윗 때에는 끊임없이 전쟁을 치러야 했기 때문에 성전을 지을 여유가 없기도 했다. 하지만, 다윗이 성전을 짓지 못하는 사정을 다윗과 하나님 간의 ‘권력의 균형’이라는 맥락에서 이해할 수도 있다. 다윗은 살아남았고 왕이 되었다. 그는 하나님에게 엄청난 빚을 졌다. 그런데 만약 다윗이 성전을 지어버린다면 반대로 하나님이 빚을 지게 된다. 솔로몬은 다윗과 완전히 달랐다. 솔론몬에게 있어 성전은 왕국의 확고함을 드러내는 상징이자 선친의 유업을 완성한다는 의미였다.”
다윗이 성전을 지었다면, 다윗은 어떤 마음을 가졌을까요? 지금까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에 대해서 어느 정도 보상을 했다는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마도 서로 사랑하는 관계가 아니라 서로 거래하는 관계로 변모되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과 맺는 관계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이런 마음을 분명히 알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시로 표현했습니다. 시편 131편은 3절밖에 되지 않는 짧은 시이지만, 수많은 사람의 마음을 터치합니다.
시편 131편,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실로 내가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영혼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 이스라엘아 지금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이것이 다윗의 고백입니다. 하나님, 제가 큰 일을 하려고 하거나 감당하지 못할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않겠습니다. 제 영혼은 젖을 먹고 행복감에 젖어 엄마의 품 속에 있는 곤히 잠들어 있는 어린 아이와 같습니다. 제가 바라는 한 가지 일은 하나님의 품속에서 평안을 누리는 것입니다.
B) 둘째, 존귀한 자로 만들어 주겠다는 것입니다.
7~8절, “또한 내 종 다윗에게 이처럼 말하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처럼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목장 곧 양 떼를 따라다니던 데에서 데려다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고 네가 어디로 가든지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 모든 대적을 네 앞에서 멸하였은즉 세상에서 존귀한 자들의 이름같은 이름을 네게 만들어 주리라”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내가”입니다.
7절, “내가 너를 ~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았다.”
8절,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모든 대적을 멸하였다.”
8절, “내가 너를 존귀한 자로 만들어 주겠다.”
에스라는 왜 이 말을 하고 있을까요? 바벨론에서 돌아온 유대인의 마음에는 다윗을 가장 위대한 왕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다윗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께서 계셨기 때문이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입니다. 다윗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던 베들레헴의 목동에 불과했습니다. 가정에서도 인정을 받지 못했고, 사울 왕으로부터도 도망 다녀야 했던 신세였습니다: 목동, 왕따, 도망자. 하지만, 이런 사람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때, 왕이 되고, 승리자가 되고, 존귀한 자가 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에스라는 왜 이 말을 했을까요? 바벨론의 포로에서 돌아온 유대인들은 자신의 처지가 참으로 초라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목동보다도 못한 포로자들이었고, 주변 국가로부터 완전히 왕따 당한 유대인들이었고, 예루살렘은 황폐하여 도망자보다 못한 패배자들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에스라가 그들에게 “다윗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목동에 불과했고, 왕따 당했고, 도망자였지만, 하나님께서 함께 해 주실 때, 왕이 되었고, 승리자가 되었고, 존귀한 자가 되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세상적인 배경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함께 해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함께 해 주시면, 우리도 다윗처럼 될 수 있다. 왜냐하면, 다윗이 다윗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다윗의 위대함이 있지 않고, 하나님의 위대함에 있었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뽑으신 열두 제자도 모두 세상적으로는 탁월한 자들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해 주시자, 누구보다도 더 크게 하나님 앞에 쓰임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이런 제자들을 뽑으셨을까요? 능력이 제자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음을 나타나기 위해서입니다.
옛날에 한 왕이 있었습니다. 이 왕은 나이가 들어 자신의 왕위를 물려줄 때가 되었습니다. 그 나라의 전통은 장남에게 주지 않고 가장 지혜로운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었습니다. 왕은 어떻게 하면 지혜로운 아들을 구별할 수 있을까 며칠을 고민하다 한 가지 묘안을 찾았습니다. 당시 자신이 쓰던 나라의 보물 창고 열쇠를 세 개의 상자 중 하나에 넣고 그것을 찾는 왕자에게 왕위를 물려주기로 했습니다. 하나는 보석과 금으로 만들어진 상자이고, 두 번째 상자는 단단한 금속과 자물쇠로 잠가진 상자입니다. 마지막 상자는 허름한 나무로 된 것으로 볼품도 없는 상자였습니다. 큰 아들이 먼저 들어갔습니다. 명예를 사랑하고 권위적인 큰 아들은 이 나라의 왕이 사용하시는 열쇠이고 나라의 보물을 간직한 창고이니 당연히 화려하고 아름다운 곳에 보관해 둘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보석이 박힌 금 상자를 열었습니다. 하지만 열쇠는 보이지 않았다. 둘째 아들이 들어갔습니다. 지식과 냉철한 이성을 가진 둘째 아들은 소중한 열쇠를 가장 든든한 금고에 넣어 두리라 생각하고 두 번째 상자를 열었습니다. 역시 열쇠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마지막으로, 막내가 들어갔습니다. 들어가니 세 개의 상자가 보였습니다. 셋째 아들은 자신이 왕이라면 어디에 열쇠를 숨길까를 고민했습니다. 그리고 허름한 나무 상자를 열었습니다. 열쇠는 그곳에 있었습니다. 왕이 아들에게 어떻게 열쇠를 찾았냐고 물었습니다. 만약에 도둑이 들어왔을 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보석이 달린 금 상자는 사람들이 상자를 훔쳐가 열쇠를 잃어버릴 것이고, 두 번째 상자는 튼튼해 그곳에 열쇠를 숨겨 놓았다고 금세 알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허름한 나무 상자에 소중한 열쇠를 넣어 두리라고 아무도 생각하지 못할 것이고, 그러니 절대 잃어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왕은 셋째의 지혜에 탄복을 하고 그에게 왕위를 물려주었습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고후 4:7,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다윗은 질그릇 같은 인생이었습니다. 광야에서 양을 치던 목동이었고, 부모에게 버림 받았고, 사울 왕에게 쫓김을 당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통하여 역사해 주시자, 다윗은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이 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선택하신 이유는 그 능력이 다윗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있음을 알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이 바로 역대기서 최초의 독자들이 다윗의 이야기를 들어야 할 이유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해 주실 때, 우리는 누구보다도 더 강한 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C) 마지막으로, 다윗을 통하여 세우신 한 왕조입니다.
12~14절, “그는 나를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의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나의 아들이 되리니 나의 인자를 그에게서 빼앗지 아니하기를 내가 네 전에 있던 자에게서 빼앗음과 같이 하지 아니할 것이며 내가 영원히 그를 내 집과 내 나라에 세우리니 그의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하셨다 하라”
역대기서 최초의 독자들은 이 부분을 읽으면서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다윗의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고 약속해 주셨는데, 자신들이 보기에는 다윗의 왕위는 더 이상 존재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유다는 실제로 BC 586년에 바벨론에 의해서 패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들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을 것인지, 아니면, 현실을 보고 좌절할 것인지 말입니다.
에스라가 하고 싶은 말은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성경에서는 다윗의 왕위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어지고 있음을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눅 1:32-33, “그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어질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왕위를 그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을 왕으로 다스리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알리스터 맥그래스(옥스퍼드 대학교 교수)의 말입니다. “이 본문에서는 메시아의 향취가 강렬하게 풍겨 나온다. 다윗의 자손 중 하나가 ‘하나님의 아들’이 될 것이며, 그의 나라가 영원히 설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예언은 미래에 이스라엘이 갖게 되는 메시아 대망의 기초가 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가지고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 약속들을 힘든 세상 속에서 매일 기억하면서 그 약속들을 믿음으로 고백하고 살아가냐는 것입니다.
III. 결론
제가 감동 깊게 읽은 글을 소개하고 말씀을 맺겠습니다.
닐 앤더슨 목사님이 쓴 책 <내가 누구인지 이제 알았습니다>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제목은 “내가 성공할 수 있는 20가지 이유”입니다. 시간 날 때마다, 좌절하고 낙심할 때마다, 이 글을 펴놓고 큰 소리로 읽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닐 앤더슨, 『내가 누구인지 이제 알았습니다』, 죠이선교회, 2015, 138~140.
1. 내게 힘 주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일을 할 수 있다고 했는데, 왜 내가 할 수 없겠는가? (빌 4:13)
2.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내 모든 것을 채워주신다고 했는데, 왜 내가 부족하겠는가? (빌 4:19)
3.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라고 했는데, 왜 내가 두려워하겠는가? (딤후 1:7)
4. 하나님이 나에게 필요한 분량대로 믿음을 주셨는데, 왜 내가 하나님의 소명을 이루는데 믿음이 부족하겠는가? (롬 12:3)
5.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요, 하나님을 아는 백성은 강하여 용맹을 발휘할 것이라고 했는데, 왜 내가 약하겠는가? (시 27:1, 단 11:32)
6. 내 안에 계시는 하나님이 세상에 있는 자보다 크신데, 왜 내가 사탄의 지배를 허용하겠는가? (요일 4:4)
7. 하나님이 항상 나를 이기게 하시는데, 왜 내가 실패하리라고 생각하겠는가? (고후 2:14)
8. 그리스도는 하나님에게서 나와서 지혜가 되셨고, 하나님은 내가 지혜를 구할 때 꾸짖지 아니하고 후히 주신다고 했는데, 왜 내게 지혜가 부족하겠는가? (고전 1:30, 약 1:5)
9.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 성실하심과 소망이 있는데, 왜 내가 우울해져야 하는가? (애 3:21-23)
10. 나를 돌봐주시는 그리스도께 내 모든 것을 맡길 수 있는데, 왜 내가 염려하고 두려워하겠는가? (벧전 5:7)
11. 주의 성령이 계시는 곳에 자유함이 있다고 했는데, 왜 내가 멍에 속에 있겠는가? (갈 5:1)
12. 그리스도 안에 정죄함이 없다고 했는데, 왜 내가 정죄받은 것처럼 두려워하겠는가? (롬 8:1)
13. 그리스도께서 항상 나와 함께 하시며 나를 떠나거나 버리시지 않는다고 했는데, 왜 내가 외로워하겠는가? (마 28:20, 히 13:5)
14.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여 저주를 받으사 율법의 저주에서 나를 속량하시고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셨는데, 왜 내가 저주를 받았거나 불행한 희생자라고 느끼겠는가? (갈 3:13~14)
15. 사도 바울처럼 내가 모든 환경에서 만족하는 법을 배웠는데, 왜 내가 불만스러워하겠는가? (빌 4:11)
16.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는 그리스도를 나 대신 죄로 삼으셔서 나를 의롭게 하셨는데, 왜 내가 무가치하다고 느끼겠는가? (고후 5:21)
17. 하나님이 나를 위하시니 아무도 나를 해할 자가 없는데, 왜 내가 박해를 받는 것처럼 피해의식을 갖겠는가? (롬 8:31)
18.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 내주하시는 성령님을 통하여 나에게 지식을 주시는데, 왜 내가 혼란에 빠지겠는가? (고전 14:33, 2:12)
19.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든 일에 이길 수 있다고 했는데, 왜 내가 실패할까 봐 두려워하겠는가? (롬 8:37)
20. 예수님이 세상과 세상의 환란을 모두 이기신 것을 알아 담대해질 수 있는데, 왜 내가 생활의 어려움으로 고민하겠는가? (요 16: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