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번 답사의 가장 중요한 일정이 이 날 시작됩니다. 일본 국보로 지정된 전통 다실 세 곳 중 참관 가능한 두 곳을 들르기 위해 전체적으로 일정도 그렇고, 동선도 그렇고 조금 애매해진 부분도 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풍성하고 재미있는 하루가 되었던 것도 같네요^^
* 지금은 비공개라 이 번 답사에서 둘러볼 수 없었던 다이토쿠지(大徳寺) 료우코우인(龍光院) 밀암석(密庵席)도 언젠가는 꼭, 방문했으면 좋겠네요@@
* 우리나라와는 달리, 다도에 관해 꽤 풍성한 유형문화재가 다수 남아 보존되고 있는 일본에서 처음 시도해본 컨셉이라, 이래저래 좌충우돌해가면서, 비록 많은 분들과 함께 하지는 못했지만, 나름 의미를 두고 싶네요^^
* 비공개 영역에서 촬영하지 못한 부분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일부 사진은 인터넷 검색으로 보충하였습니다. 두루 양해를~ ^^;;
앞서 후기에서 언급했듯이, 묘우키안(妙喜庵) 타이안(待庵) 참관 일정을 우선시하면서 꼬이기 시작했던 답사일정, 그만큼 다른 어느 일정보다 중요했습니다...@@
이제 묘우키안(妙喜庵) 타이안(待庵)으로 갑니다...
그런데, 다실이 위치한 오오야마자키(大山崎)에 참관 예약 시간 10시30분까지 여유있게 도착하기 위해, 맛있는 아침 식사도 서둘러 일찍 해결하고 고베 롯코잔 호텔(六甲山ホテル)를 여유있게 출발하여, 고속도로를 타고 오오야마자키(大山崎)까지도 무사히 잘 다다랐는데, 정작 오오야마자키(大山崎) 인근의 고속도로 분기점에서 까딱 갈림길을 잘못 접어드는 바람에 잠깐 길을 헤매어 벌어놓은 시간을 다 까먹고, 또 묘우키안(妙喜庵) 스님에게 양해의 전화를 드려야 했네요ㅠㅠ 죄송~
이 곳은, 메이신고속도록(名神高速), 케이지 바이패스(京滋バイパス)가 교차하는 오오야마자키 분기점(大山崎JCT), 신칸센(新幹線), 토우카이도센(東海道線), 한큐교토센(阪急京都線) 등의 철도 노선도 다같이 거미줄처럼 교차하는, 명실공히 교통의 요지 중의 요지이자, 역사 이래 교토의 관문이었습니다.
요롷-게 우왕좌왕 헤매다가, 우리는 겨우겨우 오오야마자키(大山崎)의 아담한 마을로 진입해서, 한 숨 돌리고는 목적하던 주차장을 찾아갑니다.
<출처:인터넷검색>
지금부터 430여년 전인 1582년 6월 13일 어느 여름날, 이 마을 이 강가 너른 들판에서, 전 일본의 패권을 두고 한 판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바로 얼마전 급작스런 혼노지(本能寺)의 정변으로, 온통 혼란스러웠던 전국시대의 일본의 패권을 누가 거머쥘것인가, 모두들 저마다의 꿈을 꾸며 암중모색(暗中摸索)중이던 차, 그 중에서는 누구보다도 패권 구도에서 가장 멀어 보였던, 하필이면 그때 교토에서 가장 먼 곳에서, 그것도 한창 비츄다카마츠 성(備中高松城) 공성전 중이었던 하시바 히데요시(羽柴秀吉, 훗날 토요토미 히데요시, 豊臣 秀吉, 1537-1598)는, 과감하게도 교토로 회군을 결정하자마자, 폭풍과도 같이, 믿기지 않은 속도로 200km를 내달려 단 열흘만에, 교토 인근, 셋츠노쿠니(摂津国)와 야마시로노쿠니(山城国)의 경계에 위치한 야마자키(지금의 교토부 오토쿠니군 오오야마자키 쵸, 京都府乙訓郡大山崎町, 지금 우리가 헤매다 들어온 마을이 앉아있는 들판)에 다다랐습니다.
<출처:인터넷검색> - 절구를 찧고 있는 오다 노부나가, 절구 속의 반죽을 조물거리고 있는 아케치 미츠히데, 반죽을 늘여 떡을 만들고 있는 토요토미 히데요시, 그리고, 만들어진 떡을 맛있게 먹고 있는 토쿠가와 이에야스입니다^^;;
그 날은, 16세기 말, 당시 어느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던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1534-1582)의 천하 제패, 그 목표 달성을 바로 목전에 두었던 어느 날, 그 누구도 예상못한 시점에 그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던 아케치 미츠히데(明智光秀, 1528-1582)가, (현재에 이르러서도 일본 역사학계에서는 그가 왜 정변을 일으켰는지에 대해 몇가지 추정을 할 뿐, 뚜렷한 결론을 못 내리고 있습니다.) 그것도 노부나가(織田信長, 1534-1582)의 최측근이었던 그가, 사전준비도 제대로 안 된 채 그야말로 즉흥적으로, 뜬금없이 주군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1534-1582)와 기습적 시가전을 벌여 자살케 한지(1582년 6월 2일에 있었던) 불과 열흘 후였고, 그때까지도 여전히 천하에 적절한 대의명분을 제시하지도 못해 여전히 주군을 배신했다는 혐의를 해소하지 못하고 있었던 아케치 미츠히데(明智光秀, 1528-1582)의 군대를 맞아 드디어 천하를 두고 한판 결전을 벌이게 됩니다.
모름지기 이 전투의 승자는 일본 전체를 거머쥘 절호의 찬스를 맞이하게 될 터.
우리는 이렇게 묘키안을 찾아 헤매면서, 메이신 & 케이지 바이패스 고가도로 밑을 몇 번이고 가로지르면서, 점점 격전지의 현장에 가까이 다가가고 있음을 느낍니다... 약간은 좁은 차 내에서 천변을 가로지르며 막간의 여유를 누리고 있는 우리들...
오오사카 중심부를 관통하여 흐르는 요도가와(淀川)는, 상류를 향해 거슬러 올라가, 이 일대에서 키즈가와(木津川), 가츠라가와(桂川), 우지가와(宇治川)가 모여서 비로소 거대한 강이 되어 서남쪽 오오사카 방면으로 흘러갑니다...
드디어, 강변의 북쪽으로 넓게 펼쳐진 범람원 들판 위에서 상류 쪽으로 향해 주둔하면서 해발 200여 미터의 나즈막한 덴노잔(天王山) 산을 끼고 진을 친 히데요시 군, 급작스런 히데요시의 회군 소식에 놀라 급하게 만여명의 병력을 꾸려 교토를 출발하여 남서쪽 이 평원에 다다른 미츠히데(明智光秀, 1528-1582) 군,
사실 이 결전의 현장을 중심으로 각 진영의 군대가 이동해온 거리를 보면, 미츠히데 군이 얼마나 황급하게 전장에 나서야 했는지 여실히 느껴집니다@@ 말도 안되는 기동력을 과시하며 한달음에 그것도 엄두도 못 낼 4만여 대규모 병력이 야마자키에까지 다다를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대부대를 지휘하며 숱한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던 역전의 명장, 히데요시의 탁월한 능력 때문이었을 터...
<출처:인터넷검색>
미츠히데(明智光秀, 1528-1582)는 어떻게 어떻게 해서, 마침 거의 무방비 상태로 상경하여 혼노지(本能寺)에 체류하고 있던 노부나가를 덥쳐, 일거에 주군을 제거할 수는 있었지만, 이후, 주도면밀하게 정국을 장악하지도 못했고, 계속 표류하고 있었던 민심이 마땅한 대의명분을 내세우지 못하는 미츠히데를 의심하면서 점차 새로운 구심점을 찾아 점차 이반하고 있었음에도 이를 막지 못하고 우유부단하게 방치했으며, 결과적으로 히데요시의 회군을 효과적으로 신속하게 차단할 만한 어떤 조치도 내리지 못했습니다...
결국은, 동원할 수 있는 최대치의 군대도 소집하지 못한 채, 겨우 만여명의 병력으로 (물론 작전말 잘 세웠다면야, 이 정도로도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정도의 병력은 되었을 거라는@@) 야마자키에 도달했으니, 사실상 전세는 전투에 본격적으로 돌입하기도 전에 이미 어느 정도 기울었던 것...
<출처:인터넷검색>
<출처:인터넷검색>
고가를 따라 강을 따라 우리 차는 천천히 오오야마자키 마을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주차 후, 우리는 다시 JR (일본 국철) 오오야마자키 역 앞에까지 내비를 따라 걸어가다가 드디어 묘키안 입구에 무사히 도달 !!!
사뭇 떨리는 순간이네요 @@
이렇게 호우코우잔(豊興山) 묘키안(妙喜庵)까지 걸어가는 오분여의 산보, 여유로운 어느 한적한 일본 시골 도회지의 정경이 길 옆을 천천히 스쳐 지나갑니다...
바삐 돌아 돌아 왔던 일행의 마음도 그렇게 천천히 진정되었고, 이번 답사에서 처음으로, 일본 다실 건물을, 그것도 문헌상으로도 역사적 중요도로 볼 때에도 가장 기대가 컸던 곳,
국보 다실 다이안(待庵)이 어느덧 코 앞입니다...
<출처:인터넷검색>
<출처:인터넷검색>
언듯 생각해보면 지금처럼 이렇게 너른 평원에서 벌어진 전투라면, 대규모 병력들 간의 여느 평범한 평지 전투처럼 시작하고 끝났을 거라고 짐작하기 쉽지만, 사실 이 당시 이 일대는 쉬이 걸어다닐 수조차 없을 정도의 질퍽한 늪지대였고, 이렇게 강따라 형성되어 있던 광활한 늪지대와 야산 사이에 좁게 나있던 교통로를 따라 겨우 이동할 수 있었다고 하네요...
그래서, 객관적으로 군세가 우세해 보인다 해도, 막상 전투에 돌입했을 때 어느 쪽으로 전세가 기울지 예측하기 힘든 상황, 이는 마치 명량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이 이끌었던 전선 13척의 조선 수군이 무턱대고 열세라고만은 할 수 없었던 지리적 여건과도 언듯 비교가 됩니다...
<출처:인터넷검색>
적절히 전술을 잘 구사했다면, 어쩌면 호각지세 속에 의외의 승리를 노려볼 수도 있었을 수도 있었을텐데, 하지만, 그나마도 당시 결정적으로 전세가 기울기 시작하던 그 순간, 더 동원했어햐 했던 후방의 여유 병력조차 제때 투입하지 못한 채 전투는 끝나버렸고, 이는 역시, 시시각각 변하는 형세 에 냉철하고 신속하게 대응하여 적절하게 작전을 구사하지 못했던 아케치 미츠히데 (明智光秀, 1528-1582)의 미숙함을, 그리고 그러기에 상대적으로 더 빛났던 히데요시의 눈부신 군사적 재능, 그리고 행운 이야기를 아무래도 해야 할 듯합니다...
기습에 능했던 히데요시의 탁월한 리더십이 여실히 드러난 순간,
그렇게 히데요시는 여세를 몰아. 내친 김에 키요스 회의(清須会議)마저도 주도하여, 오다(織田) 가문의 후계자로 ,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1534-1582)의 적장손이자 오다 노부타다(織田信忠, 1557-1582)의 세 살난 어린 아들, 오다 히데노부(織田秀信, 1580-1605)를 꼭둑각시 삼아 내세워 지명받는 데에 성공함으로써, 명실공히 중세 일본 전국시대를 종식한 천하의 일인자가 되었습니다.
<출처:인터넷검색>
<출처:인터넷검색>
<출처:인터넷검색>
근데, 차분한 인상의 묘우키안(妙喜庵)의 스님은, 면대하자 마자 차분하고도 단호한 일성, '촬영은 안됩니다. 카메라는 두고 들어오십시요!!' @@ 혹시나 싶어 이리 돌려, 저리 돌려 말해보아도, 요지부동이네요. @@ 참관도, (사실 이건 미리 이메일로 진작에 몇번씩이고 들었던 당부이긴 했지만,) 정원 뜰에서 니지리구치(にじり口)나, 창문을 통해서 다실 안을 들여다보는 것까지만 가능하다는 단서도 꼬박꼬박 잊지 않고 얘기하시네요.@@
이어서, 마침 우리만 참관하는 지라, 꽤 긴 시간동안, 지치지도 않고 이것 저것 자세하게, 중요문화재인 묘키안(妙喜庵) 쇼인(書院) 건물 (이를테면 보물)에 대해, 그리고 이어서, 국보 다실 타이안(待庵)에 대해 자상하하고도 조곤조곤 설명해주시고, 거기에 덧붙여 그 인연을 기억하고 싶어 같이 기념사진이라도 찍을 수 있는지 한 번 더 여쭤봐도, 이것도 노~@@
FM~~~ ㅎㅎㅎ
<출처:인터넷검색>
타이안(待庵),
중세이래, 일본 사회의 지성인들을 매료시킨 지성인, 다성(茶聖), 센노리큐(千利休, 1522-1591)가 주도하여 지은 다실인 것이 기록으로 증명된 유일한 다실 유적, 그 역사적 가치는 이루 말할 수없이 높습니다...
여기서 다시 한번 기록의 중요성이...
천하의 주인을 두고 다투었던 세기의 전투, 텐노우잔(天王山) 전투 이후에도 히데요시(秀吉)는 이 곳에 반년 정도를 더 머무르면서 성을 쌓고, 센노리큐(千利休)를 다도의 스승으로 모셔와 성 아래 2 조(二畳) 넓이의 다실(茶室)를 짓도록 했다고 합니다.
이 곳에서 센노리큐(千利休)와 히데요시(秀吉)가 다회(茶会)를 열었을 때 센노리큐(千利休, 1522-1591)를 도왔던 제자 코우슈쿠 시보우(功叔士紡, ?-1594)는 훗날 묘키안(妙喜庵)의 3대 주지가 되었다고 합니다. (묘키안(妙喜庵)이란 이름은, 남송 대의 저명한 선승이었던 대혜 종고(大慧宗杲, 1089-1163) 선사 호(号)에서 따왔다고 합니다.)..
이후 케이쵸우(慶長, 1596-1615) 연간에 다실(茶室)은 현재의 묘키안(妙喜庵) 경내로 해체 이건되었다고 합니다.
<출처:인터넷검색>
<출처:인터넷검색>
검박한 공간 안에서 오로지 차를 우려 내어 귀한 손님에 대접하는 엄정한 격식, 그를 통해 자신을 고양하는 와비차(侘び茶)의 정신,
센노리큐(千利休)가 궁극적으로 구하고자 했던 다회에 걸맞게, 아담하고도 질박한 모양새의 다이안(待庵)은 오늘날 일본 전통가옥의 중요한 한 주류인, 스키야(数奇屋) 양식의 원형으로까지 간주되어 보존되고 있는 아주 의미심장한 건물입니다.
<출처:인터넷검색>
들어가봤다면 요런 모습이었겠죠@@
2조(二畳)의 넓이라면, 3尺×6尺, 2장, 그러면, 대략 사방 1.8미터 밖에 안되는 좁디 좁은 공간이라, 딱 두 사람이 좌정하고 나면 도무지 여유라고는 없을 것 같습니다... 위의 사진 정도의 느낌 ??
<출처:인터넷검색>
<출처:인터넷검색>
<출처:인터넷검색>
<출처:인터넷검색>
<출처:인터넷검색>
<출처:인터넷검색>
최선을 다해 모신 손님을 대접해 차를 올리는 정성을 중요시했던 센노리큐와 마주한 이 때의 히데요시의 모습에서, 9년 후의 비극을 쉽사리 떠올리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아니, 그 싹은 진작부터 있었지만, 눈여겨 보는 이 없었을 수도 있겠지요...
그 두 사람 스스로도, 그렇게까지 서로의 생각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또 서로를 못 견뎌하게 될 줄은, 그래서 급기야 공존을 결단코 인정하지 않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9년 전 그 때, 좁디 좁은 다실(茶室) 안에서만큼은 서로 평등했던 두 사람, 이제는 명실공히 천하의일인자가 되어버린 그 때, 바야흐로 조선 침공을 1년여 앞둔 그 때, 히데요시의 과대망상은, 다실에서마저, 금박이 회벽을 온통 뒤덮어야 만족스러워했고, 이에 다실의 본분을 망각하였다 탓한 다도 스승의 질책도 못견뎌 끝내 할복을 명하고야 말았다고도 합니다...
간간히 검색되는 다이안 방문 후기 블로그 내용만 믿고, 답사때 다실 외관이나, 묘키안 쇼인 건물 스케치 정도는 어케 될 줄 알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작년 6월 즈음부터 이미, 묘키안 경내가 전면 촬영 금지가 되었다는@@ 물론, 답사 당시에 그렇게 안내를 받고, 조금 당황스럽긴 했지만 넘어갔었더랬는데, 후기를 정리하면서 찾아보니 이미 1년 전부터 그렇게 규정이 바뀌었다는 걸 느즈막하게 알게 되었네요^^;;;
<출처:인터넷검색>
<출처:인터넷검색>
<출처:인터넷검색>
<출처:인터넷검색>
<출처:인터넷검색>
아닌게 아니라, 조선시대 여느 초막에 앉아 느긋이 차를 즐기는 거랑 별반 다를 바 없을 것처럼, 그런 주막 방 한 칸, 누각 방 한 칸의 모습이 꼭 이랬을 그런 모습의 창호, 의장,
굳이 다르다면, 손님은 꼭 니지리구치(にじり口)를 통해 들어오도록 의도했다는 정도?
창호의 의장이나, 바닥, 벽 지붕의 재료 하나하나가, 당시 번성했던 국제도시 사카이(堺)의 부유한 상인이었던 센노리큐가 접했었던 가장 소박했던 모습, 아니 화려하지 않고 질박한 모습이면서도 그렇다고 천해 보이지도 않는 어떤 기백을 느낄 수 있는, 딱 그런 인테리어를 조선의 여느 평범한 초가집의 모습에서 찾아냈었나 싶기도 합니다... 조선의 다완조차 그런 마음가짐에 딱 맞아 떨어졌던 건지, 그 자연스러우면서도 질박한, 다실 공간과 그렇게 조화를 이루어 최고의 가치를 인정받고 오늘날까지 많은 수의 유물이 가보로, 국보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언듯, 십년전, 바뀌기 전의 동리산(桐裏山) 태안사 (泰安寺) 배알문(拜謁門)을 떠오르네요...
어른이 허리굽혀 조심스레 지나가야 할 정도로 아담한 키와, 어울리지 않게 짤막하고 후줄근해보이기도하고, 게다가 두 나무 기둥이 흡사 Ω 모양처럼 동그랗게 휘어져 있기까지 하였던 그 사이로 언듯 보였던 적인선사조륜청정탑(寂忍禪師照輪淸淨塔)의 상륜의 모습,
십년전 제가 처음 들렀을 때 이미, 새 것으로 바뀌어 버려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옛 추억이 되어버렸던 그 모습에서도 같은 의도로 읽혀지기도 하는 듯한...
'보수를 하되 최대한 옛 모습을 살리려 했다'는 당당한 일성으로 보수 공사의 변을 늘어놓았던 공사 담당자들의 무지 속에 사라져 버린 건축 공간과 정신이 참으로 아깝기도 하고,
한편으로 만약 타이안(待庵), 그들이 이 다실 건물에 손을 댔다면, 지나치게 작은 입구가 어울리지 않게 보여 벽 전체를 헐어 문으로 만들어 놓고도 모자라, 낡아빠진 회벽도 말끔하게 도장하고, 가는 대나무로 대충대충 얽어놓은 창호도, 굵고 번듯한 나무 기둥으로 창살을 붙여 놓았을 지도 모르겠네요@@국적불명의 짙은 화장을 덕지덕지 바른 새색시같은 모습의...
여러가지 생각이 떠오릅니다...
<출처:인터넷검색>
다도의 정신은, 센노리큐(千利休, 1522-1591)의 손을 떠나면서 이미 훼손되기 시작되지 않았을까 생각해보기도 합니다.
달을 가리키던 그 손과 함께 달도 사라지고, 가리키던 검지 손가락 끝, 그 그림자만이 남아, 다도의 격식과 다실은 더할 수 없이 엄격해지고 복잡해졌고, 문화의 아이콘으로 심취하고자 했던 이들에게조차, 이제는 더이상 다실 공간에서, 본래의 평등의 정신을 찾아내는 것이 그닥 용이하지는 않게 되지 않았던가 싶기도 합니다...
수백년간 수없이 분화해나간 센노리큐 제자들의 수많은 계보와 파벌, 그들 간에 조금씩 격식도 저마다 달라진 모습, 마치 주객이 전도된 듯한 복잡하고 난해하여 지나치게 엄숙해진 다도 절차와 몸가짐, 어찌 보면, 그렇게 허름한 초막에서 시작했던 본래의 모습과는 정반대의 복잡해져 버린 오늘날의 다도의 모습, 조금은 아이러니를 느끼게 한다는 인상이었던 것은, 저 뿐이었는지 모르겠네요@@
<출처:인터넷검색>
1663년, 센노리큐(利休)의 증손자인 우라세케(表千家)의 코우신 소우사(江岑宗左, 호우겐사이<逢源斎>, 1613-1672)가 리큐(利休) 이후 에도(江戸)시대 초기 당시의 챠노유(茶の湯)에 관해 남긴 기록인, 코우신게가키(江岑夏書)에서 센노리큐의 일곱 명의 수제자, 리큐칠철(利休七哲)을 언급한 이래, 그의 다도는 서서히 지식인 사회 전반으로 파급되어, 수없이 많은 계파로 분화를 거듭하였고, 더 나아가 오늘날에는 일반인에게까지 친숙해버린 일본 전통 문화의 일부분, 전통 건축의 일부분으로까지 체화되어 오늘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가모우 우지사토(蒲生氏郷, 힛토우<筆頭>, 1556-1595), 호소카와 타다오키(細川忠興, 산사이<三斎>, 1563-1646), 후루타 시게나리(古田重然, 오리베<織部>, 1543-1615), 시바야마 무네츠나(芝山宗綱, 켄모츠<監物>, ?-?), 세타 마사타다(瀬田正忠, 카몬<掃部>, 1548-1595), 타카야마 가가후사(高山長房, 우콘<右近>, 1552-1615), 마키무라 토시사다(牧村利貞, 효우부<兵部>, 1546-1593) 등, 리큐의 바램과 사상에 동조하여 열씨미 다도를 연마했던 초기의 대가들의 바램과 비교하여 오늘의 다도의 모습이 어느 정도 달라졌는지는 좀 더 공부해봐야 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 끊이지 않고 오롯이 남아 있는 수많은 다실 유적, 다도 문서, 비록 형해화(形骸化)되어 버렸다는 비판도 간간히 제기되기는 하지만 끈질기게 이어져 내려와, 그 유구한 내력을 자랑하는 각각의 독특한 격식들,
문화란 건, 또 그 풍부한 유형 무형의 자산 속에서 또 어떻게 변용되어 우리 생활과 사고를 또 어떠한 양상으로 보다 풍성하게 만들어 줄 지는 또 모르는 일이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
<출처:인터넷검색>
<출처:인터넷검색>
<출처:인터넷검색>
1591년, 돌연 센노리큐가 히데요시(秀吉)의 심기를 건드렸던 어느 날, 히데요시는 세노리큐에게 고향이었던 사카이(堺)로 돌아가 칩거(蟄居)하도록 명을 내렸고, 센노리큐의 제자들 다수가 구명에 매달렸지만, 그 보람도 없이, 센노리큐를 다시 교토 히데요시의 저택이었던 쥬라쿠다이(聚楽第) 인근에 있었던 집 (지금은 이정표만이 남아 있지만, 교토왕궁 서쪽 세이메이신사(晴明神社) 인근에 센노리큐의 쥬라쿠다이(聚楽第) 자택 (쥬라쿠다이 경내에 있지는 않았던 듯@@)이 있었습니다.)으로 돌아와 할복 자결을 명하게 됩니다.
이때가 70세을 목전에 두었던 적지 않은 나이. 워낙 당시 사회 전반에 숭모의 대상이었던 터라, 그 당시, 그의 제자들이 무력으로 센노리큐를 구해낼 것을 우려하여, 우에스기 가게카츠(上杉景勝, 1556-1623) 군대가 집 근처를 포위했을 정도라고 하네요...
<출처:인터넷검색>
1587년, 규슈(九州)를 평정하면서 명실상부 천하제패를 달성한 히데요시(豊臣秀吉)는 그 세를 과시하기 위해 교토 시내의 키타노텐만구(北野天満宮) 일대에서 키타노다이사노에(北野大茶湯), 대규모 다회를 개최합니다.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다완(茶碗) 하나만 있으면 함께 할 수 있었던 그 이벤트의 막후에는 바로 센노리큐가 있었고, 영내에 무려 800여 곳에 다석(茶席)이 마련되어, 히데요시(豊臣秀吉)는 다석(茶席)을 일일이 들러서 차를 대접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기성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던 센노리큐, 그리고 그의 배경이 되었던 사카이(堺) 상권을 노리고 있던 히데요시의 야망으로 인해 암암리에 나날이 위축되어간 사카이(堺)의 상인들...
1590년 고호우죠우 가문(後北条氏)을 굴복시키기 위해 벌인 오다와라 정벌(小田原征伐)에까지 히데요시를 대동했던 센노리큐(千利休)에게 있어서, 히데요시의 분노를 사 호우죠우 가문에 의탁했었던 그의 수제자 야마노우에 소우지(山上宗二, 1544-1590)를 히데요시와 화해시키고자 만남을 주선했다가, 오히려 히데요시의 분노를 사, 그만 그 자리에서 참수되는 비극을 목도했던 일은, 적지않은 충격이었던가 봅니다...
이 후, 10월 20일, 마침 쥬라쿠다이(聚楽第) 인근 집으로 돌아온 센노리큐(千利休)는, 하카타(博多)의 상인, 카미야 소우탄(神谷宗湛, 1551-1635)를 초대해 다회를 열었는데, 이 다회가 그만 그가 주관한 마지막 다회가 되고 말았습니다.
해를 넘겨 1591년 1월13일에 있었던 히데요시와의 다회에서, 어느덧 화려한 다회에 빠져 있었던 히데요시의 의사에 반해, 일부러 싫어하는 검은 색 다완을 꺼내 차를 올려 심기를 건드렸고, 1월 22일 그를 지지해주었던 후원자, 토요토미 히데나가(豊臣秀長, 1540-1591)가 병으로 죽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새삼스레 다이토쿠지(大徳寺) 산문(山門) 2층에 센노리큐(千利休)의 목상이 조성 안치된 일을 문제삼아 2월에 이르러서는 사카이(堺)로 돌아가 자택에서 근신할 것을 명받았습니다.
산문 밑을 지나가는 이를 내려다 보게 될 센노리큐의 목상의 위치가 의도가 불경스럽다는 게 그 이유였습니다...
워낙에 기세등등했던 히데요시의 심기를 거스를까봐, 배웅하는 이도 후루타 오리베(古田織部), 호소카와 산사이(細川三斎) 단 2명 뿐이었다고 하네요... 센노리큐가 이에 굴하지 않고, 사죄하러 들르지도 않은 채로 사카이(堺)로 돌아가버리자, 히데요시(豊臣秀吉)는 격분하여 2월 16일(혹은 17일), 결국 할복을 명하게 되었습니다.
키타노만도코로(北政所, ?-1624)를 위시하여 많은 이의 중재에도 불구하고, 센노리큐는 이를 거절하였고, 이윽고 2월 25일, 다이토쿠지의 목상(千利休像)이 먼저 끌어내려져, 교토(京都) 이치죠우모도리바시(一条戻橋)로 옮겨졌고, 2월 26일에는 센노리큐(千利休)가 교토(京都) 요시야마치(葭屋町) 자택으로 이송되었습니다. 계속해서 줄기차게 이어졌던 구명 노력도 결국 물거품이 되어, 이윽고, 2월 28일 센노리큐는 할복 자결했습니다...
하지만, 죽을때까지 이 일을 후회했던 히데요시(豊臣秀吉)는 그의 뒤를 이어 다도 스승이 되었던 후루타 오리베(古田織部)로 하여금, 다실, 정원을, 생전에 센노리큐(千利休)가 좋아했던 모습대로 만들게 하고, 그를 추모했었다고 하네요...
<출처:인터넷검색>
그가 워낙 당시 문화계의 거물이었던 터라, 그 불화의 이유에 대해 수많은 추측이 난무했는데,
앞서 얘기되었던 것처럼 다이토쿠지(大徳寺) 보수 비용에 보태라고 시주한 것에 감사하여 절에서 조성한 목상(木像)이 하필 산문 2층에 안치되는 바람에 산문 밑을 지나가게 되어 있는 히데요시를 위에서 굽어보도록 의도했다는 불경의 혐의,
또 앞에서 얘기되었던 바와 같이 다도(茶道)에 관한 한 서로 양보할 수 없었던, 칸파쿠(関白) 히데요시(豊臣秀吉)와 와비챠(侘茶)의 창시자로서의 센노리큐(千利休) 간의 견해 차 (결국은 황금 다실이라는, 결코 양립할 수 없는 조건의 다실을 짓고 만 히데요시의 생각에 센노리큐는 결코 동의할 수 없었던거겠죠...),
또 하나는 센노리큐의 명성을 이용해 값싼 다기임에도 단지 센노리큐가 높이 평가했다는 이유로 높은 값을 쳐 사가는 다이묘(大名) 들의 행태를 묵과할 수 없었던 히데요시가 덮어씌웠던 착복의 혐의,
또 하나는 평소 다기를 만들기 위해서라면 왕릉에 쓰였던 돌이라 할지라도 함부로 옮겨와 쵸우즈바치(手水鉢)나 정원석으로 갖다 썼었던 일에서 불거진 조정(朝廷)에 대한 불경의 혐의,
또 하나는 히데요시가 센노리큐의 딸을 눈여겨 봤다가 첩으로 들이려고 했는데, 마치 딸을 발판으로 출세하려고 한다고 바라보는 주위의 시선이 싫었던 센노리큐가 거절하였던 것에 격노해 히데요시의 눈 밖에 났다는 혐의,
또 하나는 권력 투쟁의 관점에서 볼 때, 마침 두 달 전, 다이묘(大名)들의 신망이 두루두루 두터웠던 히데나가(豊臣秀長, 1540-1591)를 질시하여 그가 병으로 죽자, 그가 후원했던 센노리큐에게 곧바로 할복 자결을 명했다는 정적 제거의 혐의,
마지막으로는 앞서 얘기했듯이 사카이(堺) 출신 다인(茶人)이었던 센노리큐가 원래부터 사카이 지역의 상인들의 권익도 대변해왔던 것에 반해, 사카이 상권마자 장악하고자 했던 히데요시의 독점욕이 서로 충돌하면서 심기를 거슬렀다는 혐의 등등등...
<출처:인터넷검색>
센노리큐는 할복하기 전날 다음과 같이 유게(遺偈)를 남겼습니다.
人生七十 力囲希咄
인생 칠십이라- 크게 기합소리와 함께-
吾這寶剣 祖佛共殺
나는 이 보검으로 조불(祖佛)도 함께 죽이고,
提ル我得具足の一ッ太刀
잘 드는 칼을 휘둘러,
今此時ぞ天に抛
지금 이제, 이 몸 하늘에 던지노라.
당대 제일의 지성인과 당대 제일의 권력자 간의 갈등이 결국 권력자의 승리로 귀결되면서, 어쩌면 초심을 잃은 일본 다도의 왜곡이 시작되지는 않았을까 생각도 드네요...
이렇게, 한 시대를 풍미했고, 시대가 온통 그의 얘기만 했던, 센노리큐의 얘기는 여기서 잠깐 접어두고, 우리는 그 애증의 다른 한 축, 히데요시의 마지막 얘기를 하러, 다이고지(醍醐寺) 산보우인(三玉院)을 향해 출발합니다...
여기서는 반대로, 예상치 못한 행운을 만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