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성 그리고 감사! / 이호규
1) 몇 년 전 일이다. 외손자가 돌을 갓 지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기에 포항 해안가로 가족 여행을 갔었다. 바닷가에 숙소를 잡고 모래놀이로 한창 재미있는 시간을 보냈다. 식사 때가 되어 딸아이가 예약한 깔끔한 일식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찬우도 아기용 의자에 앉아 한 자리를 차지했다. 잠시 후 종업원이 음식을 가져오면서 개인용으로 따뜻한 미소국을 주었다. 우리는 아무 생각 없이 미소국을 먹기 시작했다. 그런데 갑자기 찬우가 울음보를 터뜨린 것이 아닌가. 놀란 우리는 왜 우느냐고 물었지만 아직 말을 하지 못할 때라 표현이 되지 않았다. 혹시 저한테만 없는 미소국 때문인가 싶어 물어보니 고개를 끄떡였다. 종업원한테 부탁해서 한 그릇 더 가져오니 울음을 뚝 그치고 고사리 같은 작은 손으로 혼자서 반은 흘리면서 열심히 떠먹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는 흡족한 듯이 눈을 찡그리며 미소 지었다.
2)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였다. 코로나19 시기여서 어디를 갈 때도 없을 때, 찬우는 외할머니와 엄마를 따라 내가 근무하는 직장으로 자주 놀러 왔다. 사무실 근처에서 저녁 식사를 하고 가기로 했다. 어느 집으로 갈까 찾다가 황장군 갈비탕 집이 있어서 들어갔다. 큰 뚝배기에 갈비탕이 나왔다. 갈비가 너무 뜨거워 건져서 식힌 후 살코기 부분을 골라서 줄려고 가위로 작게 잘랐다. 그런데 찬우는 그렇게 하는 게 싫다며 갈비를 통째로 달라고 했다. 오동통한 조그마한 손으로 갈비를 잡고 띁어 먹는 것이 아닌가. 살찜도 없어 보이는 부분까지 작은 입으로 야금야금 먹는 모습이 한편으론 우습기도 했다. 그때부터는 갈비가 있는 음식은 모두 손으로 잡고 먹으려 했다.
3) 두 돌이 지날 때쯤이었다. 대구수목원에 들렸다가 근처 메밀묵 집에 식사하러 갔다. 메밀 묵채를 시키고 메밀 부추전을 추가로 주문했다. 밀가루 대신에 메밀가루로 만든 부추전이 노릇노릇 맛나 보였다. 다행히 고추가 들어있지 않아서 찬우 입에 조금 넣어줘 보았다. 한입 물고는 식당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 그러다가 다시 와서 더 달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야금야금 받아먹는 모습을 보고 식당 주인이 신기한 듯 바라보았다. 주인아주머니께 맛있다고 엄지척하라고 하니 부끄러운 듯 뒤로 숨었다. 그 후로는 칼국수 집에 가서도 해물파전을 주문할 때는 고추를 넣지 말고 달라고 부탁했다.
4) 며칠 전 금요일 저녁에 우리 부부는 딸아이와 영화 한 편을 보았다. 찬우는 제 아빠와 집에서 TV를 보겠다며 다녀오라 했다고 한다. 미안한 아내는 찬우에게 줄 된장국을 두부와 팽이버섯을 넣어 심심하게 끓여서 보냈다. 주말 아침에 늦게 일어난 찬우는 된장국에 밥을 말아서 큰아이처럼 먹는 모습을 사진 찍어 보냈다. 잘 먹는 모습을 본 아내는 흐믓해 하였다. 그러니 또 해주고 싶은 마음이 저절로 생기는 모양이다. 내일도 아이 엄마가 다른 일이 있어 유치원 마칠 때 데리러 가야 하는 모양인데 또 시장을 다녀와서 시원한 탕국을 한 솥 끓이고 있다.
5) 바뀐 나이 계산법으로 찬우는 다섯 살이다. 나이도 어린 것이 먹는 것을 보면 꼭 어른 식성을 닮았다. 아직 맵고 짠 것을 잘 구별하지 못하고, 뜨거운 것은 잘 먹지 못한다. 하지만 심심한 음식들은 어른을 뺨치게 좋아한다. 특히 국물 있는 음식을 좋아한다. 김치도 맵지 않는 백김치를 그렇게 좋아한다. 시원한 물김치는 더 좋아한다. 사과나 복숭아도 깎아주면 싫어하고 통째로 주어야 좋아한다. 오이도 거친 부분만 정리하고 한 손으로 잡고 먹는 것을 좋아한다. 가끔 외식하러 나가면 콩나물 무침을 꼬맹이가 퍼먹는 것을 보고 주인장이 대견하여 더 갖다주기도 한다. 약간 질긴 미역 줄기 무침도 좋아한다.
6) 누가 가르친 것도 아닌데, 타고난 식습성이 참 신기하기만 하다. 가끔 집사람이 밥을 챙겨주러 가면 찬우는 할머니가 해주는 고깃국이 맛있다는 표현을 잘한다고 한다. 밥을 국에 말아 한입 털어 넣고는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이며 할머니 최고라고 치켜세운다. 지금은 제법 대화 상대가 된다. 무 깍두기 김치를 씻어서 먹으며 "할머니, 이거 오래 두면 더 맛있는 거 알아?"라고 묻더라고 했다. 자기 유치원 간식 할머니의 음식 솜씨도 좋다고 자랑하는 걸 보면 어른 입맛에 익숙한 것 같다. 뜨거운 것을 잘 못먹는 걸보면 약간 나를 닮은 것 같기도 하고, 아무거나 잘 먹는 것을 보면 나랑은 완전 딴판이다.
7) 나는 자라면서 감사의 표현을 잘 해보지 못했다. 그냥 무덤덤하게 기껏 씨익 웃는 것으로 끝이었다. 어머니께 잘 먹었다고 말씀 한 번 드리지 못했다. 식당에서도 맛있는 음식을 접했을 때 주인이나 주방장에게 감사 인사도 제대로 해 본 기억이 없다. 사십년을 함께한 아내에게도 제대로 해본적이 없다. 어린 찬우를 보며 가끔 반성할 때가 있다. 우리 어른들도 감사한 것을 적극 표현하며 살아야겠다고 생각하지만 잘 실천이 안된다. 찬우는 "할머니가 만든 음식은 모두 맛있어요" 라고 하면서 소고기 무국에 들어있는 토시살을 잘도 먹고 있다. 이런 먹성처럼 무럭무럭 건강하게 잘 자라 주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