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흐의 해바라기가 몇 점이나 돼죠? 7점? 8점? 제가 아는 해바라가는 고흐고향인 네덜란드 고흐미술관에 1점. 영국 네셔널 갤러리에 1점. 독일 뮌헨 노이애 피노코텍에 한점. 일본 보험회사 로비에 걸려 있는 거 한 점 입니다. 일본 보험회사는 그 그림을 300억에 사서 지금은 970억 이러고 합니다. 저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고흐미술관에 걸려있는 해바라기와 독일 뮌헨 노이에 피노코텍에 걸려있는 시든 해바라기는 작접 가서 보았습니다.
고흐의 해바라기 이야기 2
고흐의 해바라기는 고흐가 권총으로 자살하기 1년 전인 1888년 프랑스 남부 아를에서 그렸습니다. 고흐의 노란방 아시죠? 그 방에서 그렸기 때문에 화병에 담긴 해바라기 뒷배경이 노란색 인 것으로 추정합니다. 당시 고흐는 파리에서 고갱에게 같이 아를에서 그림을 그릴 것을 제안했고 고갱아 아를로 오기로 했습니다. 고흐는 고갱이 오니까 방을 꾸미고 싶었는데 이 해바라기가 방을 꾸미려고 제작한 그 그림들입니다.
제가 아를은 가보지 못했지만. 그 위도와 같은 프랑스 남부 해변에 위치한 니스는 가 보았습니다. 2월 인데도 따듯하고 한가하고 샤걀 마술관과 마티스 미술관이 있는 곳 입니다. 아를도 같은 위도상에 있는 곳이기 때문에 겨울에도 따뜻할 것이라 예상이 되었습니다.
저는 여기서 위문이 들었습니다.
고흐의 해바라기 이야기 3
왜? 고흐는 고갱을 아를로 초대했을까오?
고흐는 왜 귀를 잘랐을까요?
그림을 그리는 화가들의 성향을 보면 자존심이 매우 강한 사람들입니다. 제가 작업을 30년 동안 하면서 느끼는 갓인데 그 자존심이 없으면 붓을 이렇게 오래 잡고있지 못했을 거라은 생각을 합니다. 특히 요즘 젊은 화가들은 유행에 맞게 장르를 바꿔가며 그림을 그라는데 아런 화가들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제가 추졍하는 가설은 고갱이 고흐의 그림에 대해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사실 고흐는 미술학도 출신이 아니기 때문에 정통파에 비해 핸디캡이 많은 화가이고 고갱은 드가를 선생님이라고 호칭한 것을 보면 미술계쪽에서도 좋은 라인에 있는 소의 잘 나가는 화가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저는 고흐가 고갱을 아를로 오라고 한 것은 외로움도 있었겠지만 고갱을 선택한 이유는 미술 정통파 출신의 아카데미식 그림을 그리는 고갱의 조언이 필요하지 않았을까? 하고추정합니다. 고흐의 그림들을 학생을 지도하며 모작하다보면 투시가 가끔씩 어색한 그림들을 발견 할 수 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시점도 항상 평범한 시점을 구사하고 있기 때문에 고갱과 함께 작업하며 뭔가를 배워보려고 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드가는 1834년생. 고갱은 1848년생 14년 차이고 고흐는 1853년생으로 5살 차이니 고갱이 고흐에게 조언하기 좋은 언령이었고 드가는 고갱에게 지적할 연배는 넘은 연령이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저 처럼 작업을 하며 선.후배들과 유대관계를 갖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이라면 이해 할 수 있을 겁니다.
저도 5년 후배들 한테는 조업을 하지만 가끔싹은 쓴 소리도 합니다만 드가와 고갱의 나이 차 만큼 있는 교수님들은 졸업 한 저한테. 쓴 소리를 하진 않습니다.
고흐는 신학을 공부 한 후 그림 공공부는 혼자 독학했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남을 위한 희생정신이나 많은 사람인 것 같습니다. 그러니 정싱분열도 온 것 같고 아를에 정신병원이 있었으니 이용하기도 편했을 겁니다. 우리나라 사람 중 20%가 우울증. 조을증. 분노조절장애 등 정신질환을 갖고 았는데 동양적 정서상 병원울 꺼리는 것 뿐 입니다. 그런것에 비하면 유럽은 그런 것에 비교적 자유롭지만 그림을 그리는 작가들은 외로움과 싸우면서 창작의 고통을 이기내기는 힘들었을 것으로 보여집니다.
취미로 그림을 그리는 사람과 인생을 걸고 그림을 그리는 작가와의 정신적 스트레스 차이는 제가 최근 8~9년을 해 보니 알겠더군요. ㄱ
당시 인상파화가들이 대세였는데 고흐의 화풍이 인상파에 들어가나요? 고흐는 후기인상파 화가로 붓터치가 강해 후에 야수파를 낳습니다. 아마도 고갱이 인상파 화가들의 부드러운 화풍과 고흐의 붓터치가 강한 거친 그림을 비교했을 수도 있어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