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언훈습종자의 현행
1)명언훈습종자
명언훈습종자(名言熏習種子)의 명언(名言-언어적 표현)이 훈습된 것으로, 예컨대 "말이 씨가 된다"라는 속담에서 '말의 씨'가 바로 명언종자(名言種子)이다. 즉, 명언(언어적 표현)이 씨(종자)가 되어 아뢰야식에 저장된 것을 의미한다. 인간이 인식하는 소리는 다양하다. 다양한 소리 중 언어는 인간의 개념적 분별을 통해 형성되고 훈습된 명언종자는 아뢰야식 내에서 성숙하여 결국은 현상세계로 현행한다. 식에 저장된 언어와 문자를 명언습기(名言習氣), 명언훈습(名言熏習), 업종자(業種子)라고 하는 이유가 그것이다.
마음에 떠오르는 느낌・감정・욕망・의지 등의 심상(心像)을 타인에게 전달할 때는 언어를 통해 음성이나 글로 전달하게 된다. 이때 아직 외부로 표현하지 않은 것을 '명(名)'으로, 소리나 글을 통해 '의미'하는 바를 타인에게 전달하는 것을 언(言)으로 부른다. 여기서 '명'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마음의 내면적 대상인 명(名)은 마음에 떠오른 인식대상을 가리킨다. 명(名)은 아직 외부로 표현되지 않은 내적인 '심상'을 의미한다. 생각은 하고 있으나 음성으로 표현되지 않은 많은 이미지들이 그것이다. 예컨대 과거에 파리 몽마르뜨언덕에서 보았던 광대의 모습을 떠올리거나 그곳에서 초상화를 그리고 있는 화가들의 모습을 기억하는 경우가 있다. 현재 내 앞에 그들은 존재하지 않지만 내가 경험했던 그들은 현재의 인식 속에 명확히 떠오른다. 이 내용을 음성으로 표현하지 않은 채 나는 그 모습을 눈앞에 그리면서 그 경험을 떠올린다. 유식학에 의하면 이러한 심상이 바로 명이 된다. '심상'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단편적으로 떠오르기도 하지만 하나의 이야기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러한 '심상'은 '식'이 분화되어 형성된 것이다. '심상'은 마음이라는 스크린에 나타난 영상이다. 우리가 영화를 볼 때 영사기에 의해 필름이 스크린에 비추어지듯이 마음에 나타난 영상은 '종자'에 의해 '식'이 분화되어 형성된 것이다. '종자'에 내재해 있던 내용이 마음에 비치는 현상이다.
과거를 기억할 때도 언어나 문자에 의타하여야만 언어에 의한 개념적인 사고가 집약될 수 있다. 예컨대, '아바로케데슈바라(avalokiteśvara)'는 '관세음보살'이라는 의미의 산스크리트어이다. 관세음보살이 산스크리트어로 '아바로케데슈바라'라는 것이 아뢰야식에 훈습되어 있는 이는 '아바로케데슈바라'가 '관세음보살'을 뜻함을 알고, 깊은 신심을 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바로케데슈바라'를 처음으로 듣는 사람은 이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전혀 모를 것이다. 저장·훈습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의 분별작용은 '알라야식' 속에 존재하던 '명언훈습종자'에 의해 형성된다. 또한 동일한 소리를 듣고도 각각 상이한 느낌, 생각, 행동을 수반하는 것 역시 명언종자의 현행이다. 이때 작용하는 명언종자는 인연 의타하여 '분별(分別)'로 대변되는 변계소집으로 현행된다. 이는 인식 주체를 '분별하는 것'으로 인식대상을 '분별된 것'으로 본다. '변계소집성'의 세계에서 생겨나는 마음의 작용을 분별작용의 견지에서 해석한 것이다. 이것은 이미 설명한 바와 같이 '알라야식'이 인식의 주체와 인식의 대상으로 분화되어 '인식주체로서의 식'이 같은 식인 '인식대상으로서의 식'을 파악한다고 주장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분별심과 언어의 능훈습력(能熏習力)으로 인해 제8식 아뢰야식에 훈습된 종자는 그 잠재되어 있던 공능(功能)으로 변계소집으로 현행되는데, 이것이 바로 모든 오취온(五取蘊)의 근원이며 윤회의 씨앗이 된다.
2)변계소집성의 현행
알라야식에 존재하던 명언훈습종자가 현행함에 따라 알라야식은 인식 주관[見分]과 인식대상[相分]으로 나누어지면서 인식작용이 시작된다. 이에 인식주관은 인식대상을 분별하고 취착하여 그것을 언어로 표현하여 타인과 관계를 형성한다.
변계라 함은 주변계탁(周邊計度)의 뜻으로 일체 모든 법이 서로 나[我]다, 법[對象]이다하고 계탁 분별하는 것을 말한다. 주변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은 허망분별에 의해 가상(假想)된 변계소집성으로 실재성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식에 의해 실재하는 것처럼 보며, 사실을 사실대로 보지 못하고 모든 것을 치우치게 보고 집착한다. 즉, 자아[見分]와 대상[相分]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으로 잘못 알고 집착하여 그릇된 상을 인식하게 된다. 범부의 미망한 소견으로 말미암아 실체가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잘못 생각하고 분별하여 집착을 일으키는 것이다. 아래서는 인간의 언어와 목탁소리, 예식장의 팡파레 소리 등을 통하여 소리종자의 현행인 변계소집화를 살펴보겠다.
첫째, 언어를 예를 들면 언어가 자의성(恣意性)을 지니는 부분에서도 분별의 변계소집성을 살필 수 있다. 언어의 자의성은 곧 관념 형성의 근원이 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자의성이란 언어에서 소리와 의미의 관계가 사회적 약속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즉, '사과'와 'apple'은 발음이나 모양에서 실제적으로 아무런 공통점이 없다. 그러나 이 두 단어는 특정 문화권에서 같은 사물을 지칭하는 명사가 되었다. 이것이 언어가 가진 자의성이다. 언어는 그 단어 자체가 그 자체의 특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마치 우리가 태어난 아이에게 이름을 만들어서 붙이는 것과 유사하다. 그러면 우리는 그 아이를 보면 그 이름을 연관해서 떠올린다. 이것이 언어와 감각의 연결이다. 이처럼 어떤 상황과 감정일 때 어떤 맥락에서 사용되는지를 여러 번 경험하고 익혀가면서 서서히 형성하고 익혀가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게 감각들과 단어들, 표현들을 연관시키면서 언어를 학습하다 보면 세상을 인식하는 틀이 새롭게 구성된 것이다.
또한 언어화되지 못하는 것은 기억되지 않는다. 그래서 언어로 표현되기 애매한 소리는 의성어와 의태어로 표현한다. 소리를 흉내 내거나 움직임을 흉내 내는 소리를 만들어야 그 소리의 의미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의성어와 의태어는 소리를 자의적으로 끼워 맞춘 것으로, 언어권마다 의성어와 의태어에 차이가 나타난다. 개가 짖는 소리는 누가 들어도 명확하게 알 수 있는 소리이다. 그런데도 한국 개는 '멍멍' 짖고 미국 개는 '바우바우' 짖는다. 이러한 차이는 소리에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속한 언어권에서 통용되는 소리로 듣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언어는 인간의 분별작용을 외부로 표현하는 도구가 됨과 동시에 사를 제한, 관념을 형성하는 도구가 되기도 한다. 따라서 동일한 주제에 대해서도 느끼고 표현하는 것이 달라진다. 언어로 표현되는 세계는 실제 세계와 차이가 있다. 예를 들면 일반적으로 무지개의 색은 빨주노초파남보 일곱 가지로 표현하지만 실제로 무지개는 일곱 가지 색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 무지개는 일곱 가지 색이라는 관념이 아뢰야식에 고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목탁소리를 예를 들면, 동일한 목탁 소리를 듣고도 대개의 불자들은 마음의 평화 내지 발심하는 이가 있는 반면에, 불자가 아닌 경우에는 심지어 사탄의 소리라며 분노하는 이도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마지막 또 한 가지 예를 들면, 결혼 예식장에서 울려 퍼지는 팡파레 소리의 경우에도 이 소리에서 대다수는 축하나 행복, 기쁨을 연상하겠지만 전쟁의 트라우마에 시달린 참전 퇴역 군인의 경유는 이 소리에서 공포와 불안을 느끼는 이도 있을 것이다.
이렇듯 동일한 목탁소리와 팡파레 소리 등 동일한 소리를 들음에도 각자의 인식은 상이한 것은 과거의 경험의 훈습이 식에 의타기(依他起)하여 변계소집성의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즉, 소리 인식은 소리 자체의 본질과는 별개로서 작용한다. 마음의 작용인 인식이 작동되는 것이기에 수 많은 소리의 인식은 수많은 변수가 작용하는 것이다.
<불교에서 소리의 공능에 관한 연구/ 이태영 동국대학교 대학원 불교학과 박사학위논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