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치원은 어린 나이에 당나라에 건너가 6년만에 빈공과를 합격하고 관리생활을 하였으며, 토황소격문이라는 명문을 써서 이름을 날렸으며, 당에서 배운 학문을 펼쳐보고 싶은 마음에 다시 신라로 돌아와서 정치개혁을 하려고 애썼으나 실현되지 못하자 벼슬을 버리고 은둔했던 인물이었다. 신라 말기의 인물인데 최익한은 그가 태조 왕건과 동시대인이라는 점을 강조하였다. 최치원은 857년에서 적어도 908년까지 살았으며 왕건은 877년에서 943년까지 살았으니 겨우 20년 위였으며, 앞서 강조하였듯이 태조왕건이 창업의 출발로서 송악 성주가 되었던 20세는 최치원은 41세의 완숙한 나이였으며, 그로부터 적어도 10여년은 함께 활동하였다. 태조가 왕위에 올랐던 918년은 최치원이 살았다면 60세를 갓 넘은 나이였다. 최치원의 몰년을 알 수 없지만 결국 신라의 쇠란과 고려의 흥륭을 지켜봤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 때문에 최치원이 태조의 왕업을 가만히 도왔다는 전설까지 있다. 『삼국사기』의 최치원전에 의하면 최치원은 태조가 나라를 세울 것을 알고 글로서 묻는 가운데 “鷄林黃葉, 鵠嶺靑松” 라는 글귀가 있었다고 한다. 곧 계림은 신라요 곡령은 고려도성의 주산인 송악이며 황엽은 쇠락한다는 뜻이요 청송은 바야흐로 흥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최익한은 이 글이 태조에게 준 문구가 아니라고 보았다. 도선道詵 전설과 같이 필요에 의해 태조의 건국을 신성화하기 위해 꾸몄다고 보았다. 신라가 아직 존재하는데 새로운 왕조에 절절하여 어용서기의 일을 취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설령 그들의 주장과 같은 공이 있었다면 이는 문묘에 배향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최치원이 일종의 개국공신으로서 홍유, 신숭겸 등으로 더불어 태조의 묘정에 배향되었을 것으로 보았다.
최치원은 쓰러져가는 신라, 한편으로는 북방 변두리에서 성장하는 왕건을 지켜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참고로 흔히 최치원은 최승우, 최언위와 함께 일대삼최(一代三崔)라 불리었으며, 최치원은 끝까지 신라를 섬겼고 최승우는 후백제 견훤의 책사가 된 반면에 최언위는 고려의 문한관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최언위는 868년생이어서 최치원보다 10년 밑이고, 최승우는 생몰년대는 모르지만 당나라 유학을 떠난 것이 최치원보다 20년 이상 뒤여서 연배도 그정도 아래로 보인다. 당시 후삼국간의 급박한 정세로 봐서 10년, 20년은 큰 차이가 있으므로 이들과 곧바로 비교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