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20장 《구음진경》을 찾아서
산꼭대기에 이르니 아주 오래 된 가파른 길이 나타났다. 힘들게 오랫동안 걸어서야 중양궁에 당도했다. 중양궁 앞에는 수많은 요새들이 늘어서 있고 그 뒤에 큰 암석 두 개가 서 있었다. 바로 중양궁의 출입구였다.
몇몇 사람들이 이곳에서 파수를 보고 있고 그 가운데 한 젊은 도사가 우두머리 노릇을 하고 있었다. 그는 산 위로 오르는 세 사람을 발견했다. 그는 그들이 외지 사람임을 알아내고 한걸음 나서며 공손하게 말했다.
"이 후배는 중양 사부님 문하에 있는 큰 제자 마옥(馬鈺)이올시다. 여러분들께선 먼 길을 오신 듯한데 많이 가르쳐 주십시오."
구양적은 일속 스님이 먼저 말하게 하려고 입을 열지 않았다. 일속은 구양적이 가만히 있자 한걸음 나서며 예를 올리고 말했다.
"소승은 대리에 있는 천룡사(天龍寺)의 중 일속이라 합니다. 듣자니 중양 선생께서 천하의 무학 밀서인 《구음진경》을 얻었다고 하던데 그게 사실입니까?"
이 마옥이란 사람은 비록 나이는 젊으나 정인 군자였으므로 일속 스님에게 공손하게 대답했다.
"사부님께서는 실제로 한 부의 무학밀서를 얻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얻게 될 때 실로 공교로운 일이 있었는데 말씀드리자면 자연히 이야기가 길어집니다. 사부님께서는 최근에 이 경서에 대해 늘 한탄해 마지않고 계신데 무슨 연고인지 모르겠습니다. 고승께서는 운남 대리 사람인데, 사부님 말씀에 의하면 천하의 무학 가운데 한 갈래는 대리에 있으며 그들의 무학이 아주 깊어 우리 중원이
그에 미치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고승께서 먼 곳에서 오셨는데 우리 제자들을 가까이 대해 주시기 바랍니다."
구양적은 한켠에 서서 마옥이 하는 말을 듣고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이 사람 말하는 품이 도리가 있고 시원시원하긴 한데 그의 무공도 말하는 것만큼 훌륭한 것일까? 만일 중양궁이 잘생긴 이 사람처럼 말만 번지르르하다면 그 《구음진경》은 꼭 내 손에 들어오고 말 거다.'
일속은 구양적이 한쪽에서 웃고 있는 것을 보곤 그를 무시한 듯한 느낌이 들어 급히 말머리를 돌렸다.
"이분은 서역 대사막에서 온 고수 구양적이라는 분인데 역시 《구음진경》을 보고자 먼 길을 왔소이다. 한데 전진교에서 우리한테 이 경서를 보여 줄 것인지 알 수 없구려."
마옥이 대답했다.
"사부님께서 어떻게 생각하실지는 모르겠으나 사부님의 인품에 대해서는 저희들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분께서 굳이 그것을 숨기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마옥은 읍을 하며 세 사람에게 산으로 올라가자고 공손하게 청했다.
산은 오를수록 험준해졌다. 발 아래의 봉우리들은 운무에 휩싸여 보이지 않았다. 뭉게뭉게 피어 오르는 운무는 내달리는 괴물처럼 사뭇 두려움을 안겨 주었다. 세 사람은 그러한 정경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오로지 마옥을 따라 걸음을 재촉하여 커다란 궁전 앞에 도착했다.
바로 말로만 듣던 중양궁이었다. 가까이 가서 보니 이 궁전은 꽤나 웅위로워서 수십 칸이나 되는 길다란 집에 용마루가 높이 솟은 것이 실로 장관이었다. 하지만 기와를 얹은 지붕은 그다지 호화스러운 편이 아니었다. 창문은 크기는 했지만 문창호도 평범한 것이었다. 다만 궁전 앞에 있는 명종정단(明鍾淨壇)만이 이곳이 도사들이 수신 양성을 하는 장소임을 알 수 있게 해 주었다.
마옥은 문앞에 이르자 세 사람에게 그곳에서 기다려 줄 것을 부탁하고는 안에 들어가서 소식을 알렸다.
세 사람은 조용히 기다렸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다소 지루함을 느낄 무렵 갑자기 커다란 웃음 소리가 들려 왔다. 소리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어느 틈엔지 남자 한 사람이 나와 섰는데 아주 괴상한 차림새를 하고 있었다. 나이는 스무 살 남짓 되었을까? 어린애 같은 차림에다 머리는 더욱 희한하게 백세변자(百歲 子)를 길다랗게 땋아 늘인 모습이었다. 송나라 사람들은 아직도 머리를
외가닥으로 땋아 위에 틀어 얹어서 어른이 되었다는 표시를 했다. 어른이 되면 남녀는 성례(成禮)하여 가정을 이루고 가실대도(家室大道)를 행하게 된다. 이 사람은 완연한 성인임에도 불구하고 꾸민 모양은 어린애와도 같았던 것이다.
구양적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당신은 누구요? 이곳에서 무얼 하고 있소?"
구양적의 물음에 그는 묘한 소리로 웃었다.
'히히, 이 사람 봐, 히히."
그는 히히거리기만 할 뿐 구양적이 묻는 말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우스꽝스러운 그의 모습에 가까스로 웃음을 참고 있던 모용쟁이 구양적과 똑같이 물었다.
"당신은 누구예요? 이곳에서 뭘 해요?"
젊은이는 말없이 눈까풀을 까뒤집어 보였다. 그러자 눈에 흰자위만 남고 검은 눈동자가 보이지 않게 되었다. 이 괴상한 추태에 구양적과 일속도 참지 못하고 눈물까지 찔끔거리며 한참이나 웃었다. 그들이 웃음을 그치자 젊은이가 비로소 입을 열었다.
"실컷들 웃었소? 그래 그렇게도 우습단 말이지요?"
구양적과 일속 스님은 더는 웃지 않았다. 일속 스님이 그에게 예를 갖추며 입을 열었다.
"소승이 실례를 했소이다."
그러자 젊은이가 대답했다.
"됐소. 실례면 실례지, 누군들 실례가 없겠소? 나도 늘 사람들한테 실례를 저지르고 있소. 이번 일도 그렇소. 한데 당신들은 무엇하러 왔소?"
"소승은 중양 진인을 뵈러 왔소이다."
일속의 말에 젊은이는 펄쩍 놀랐다.
"아니, 안됐구려, 안됐어. 그대들도 그분을 찾아왔단 말씀이오?"
세 사람은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러자 그는 미간을 찌푸리면서 말했다.
"다 됐구려, 다 됐어. 당신들은 그분을 찾아 뭘 하려는 거요? 나도 벌써부터 와서 그 사람을 찾고 있었소. 내가 그 사람을 3년이나 찾았다는 걸 당신들은 알고 있소? 사람들은 정성이면 돌 위에도 꽃이 핀다고 말들을 합니다만, 내 보기에 왕중양이란 사람은 돌도 아니고 나무토막일 따름이오."
구양적은 그의 입에서 왕중양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이 거푸 쏟아져 나오는 것을 보자 은근히 기뻤다.
'왕중양이란 사람은 그다지 좋은 사람이 아닌 모양이다. 우리가 종남산까지 오면서 길에서 만난 사람들은 입만 벌리면 칭찬이 자자했었고 모두가 좋은 말만 하려고 했지. 완전무결한 사람이 없고 순금이란 없는 법인데 그 사람이라고 그렇게 좋을 수가 있겠는가? 만일 그가 세상 사람들이 모두 칭송하는 그런 사람이라면 우리가 어떻게 그에게서 《구음진경》을 빼앗아 낼 수 있단 말인가? 하
지만 드디어 이런 사람도 만나게 되었구나. 저 사람은 왕중양에 대해 탄복하기는커녕 나무라기까지 하지 않는가.'
구양적이 입을 열었다.
"맞아요. 왕중양이란 사람은 결코 대단한 사람이 아닐 겁니다."
그런데 젊은이는 이 말을 듣자 펄쩍 뛰더니 삿대질을 하며 소리쳤다.
"넌 웬 놈이기에 감히 그분한테 불경스런 말을 하는 거냐? 그래 네 놈이 그분보다 더 낫단 말이냐? 만일 네 놈이 그분보다 더 낫다면 내가 네 놈을 사부님으로 모실 테다. 어떤가? 허나 만일 네가 그분보다 못하다면 내가 네 놈을 땅바닥에 넘어뜨려 놓고 용서를 빌게 할 테다."
이렇게 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한 구양적은 난감해졌다. 이 사람은 기실 왕중양을 대단히 숭배하고 있기 때문에 일부러 이곳에 와서 그를 사부로 모시려고 떼를 쓰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왕중양은 그가 3년 동안이나 애를 썼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제자로 받아 주지 않았던 것이다.
모용쟁이 입을 열었다.
"현형(賢兄)께서는 함자가 어떻게 되시나요?"
그가 웃었다. 하지만 그 웃음은 그다지 자연스럽지 못했다. 그는 모용쟁을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
"낭자께선 훌륭한 분이오. 얼핏 보아도 그런 인상입니다. 그런데 낭자께서는 나더러…… 이……."
그는 갑자기 머쓱해 하며 더 말을 잇지 못했다. 모용쟁이 이상하게 생각되어 물었다.
"함자를 어떻게 쓰시나요. 그걸 왜 말 못하시나요? 말씀해 보세요."
그 사람은 히히 하고 웃더니 모용쟁을 바라보며 머리를 긁적였다.
"정말 이름을 말하라는 것이오?"
모용쟁이 머리를 끄덕여 보이자 그가 입을 열었다.
"그러지요. 저의 이름은……."
그는 우물우물 이름 석 자를 알려 주었다. 하지만 그 자리에 있던 세 사람은 누구도 알아듣지 못했다. 모용쟁이 답답한 듯 소리쳤다.
"좀 큰소리로 말씀해 보세요. 도대체 이름이 뭔데요?"
그는 비로소 세 사람을 둘러보더니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말씀드리겠소. 난 주백통(周伯通)이라고 부르오. 이런 이름을 들은 적이 있소?"
세 사람은 물론 그런 이름을 들은 적이 없었다.
이 주백통이란 사람은 그들 세 사람 다 자기 이름을 처음 듣는 듯하자 아주 기뻐하면서 큰소리로 웃었다.
"아니야, 아냐. 왕중양님의 말씀은 옳지 않아. 그분은 나를 천하에 이름난 괴물이라고 하셨소. 천하에 이름이 났다면 사람들마다 다 나를 알아야 되지 않겠소? 그런데 아무도 나를 모르고 있잖소."
그는 이렇게 말하더니 몇십 번이나 곤두박질을 치다가 일어나서 다시 입을 열었다.
"당신들도 왕중양님께 무공을 배우려고 그러시오?"
구양적은 머리를 가로 저었다. 그러자 주백통은 모용쟁과 일속에게 눈길을 주었다. 두 사람 역시 머리를 가로 저었다. 주백통은 매우 기뻐하면서 말했다.
"그럼 잘됐소. 나는 당신들이 모두 왕중양한테 무공을 배우러 온 줄만 알았소. 당신들이 왕중양한테 무공을 배우러 왔다면 그분은 나에게 영영 가르쳐 주지 않을 것이오. 안 그렇소? 내가 보기에 당신들은 그분한테서 무공을 배울 필요가 없을 거요. 당신들의 재주로는 그분한테서 무공을 배워 낼 수 없을 게요. 그분의 재주는 천하에서 으뜸인데 당신들 공력으로는 배운다고 해도 저보다 못할
테니까요. 당신들이 그걸 배워서 뭘 하겠소. 안 그렇소?"
일속은 출가한 몸이라 남과 경쟁하려는 생각이 없었으므로 그저 피식 웃었다. 하지만 구양적은 성격상 참지 못하고 주백통에게 말했다.
"여보시오, 주 형, 그대는 왕중양의 무공이 천하에 으뜸이란 걸 어떻게 아시오? 그대는 하늘 위에 또 하늘이 있다는 도리를 알고 있기나 하오?"
주백통이 대답했다.
"아니, 당신은 그것도 모르시오? 사람들이 하늘 위에 또 하늘이 있다고 말하는 건 모두 허튼소리요. 그건 당신이 하늘 끝까지 가보지 못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당신한테 하는 소리지요. 나도 한 번은 보름 동안이나 올라갔지만 하늘 끝까지는 이르지 못했소. 당신은 하늘 위에 또 하늘이 있다고 말하지만 그건 당신이 종남산에 와보지 못했기 때문이오. 당신이 만일 왕중양이란 분을 만나 보았
더라면 하늘 위에 하늘이 있다는 그런 말은 하지 못할 것이오. 사람이 무공을 배우려면 처음부터 훌륭한 사부님을 모시고 배워야 한다고 생각되오. 내가 왕중양을 사부로 모시려는 것은 그분이 천하에 으뜸가는 고수이기 때문이오. 말씀해 보시오. 내가 천하에서 으뜸가는 고수한테서 무공을 배우게 되면 나의 무공도 남다르지 않겠소?"
구양적은 이 주백통을 사리에 밝지 못한 사람으로 보았는데 정작 하는 말을 듣고 보니 그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구양적은 그가 입만 벌리면 왕중양이 천하에 으뜸가는 고수라고 말하는데 도대체 왕중양의 무공을 보기나 하고 하는 소린지 의심스러웠다.
"당신은 왕중양의 무공을 본 적이 있소?"
구양적의 물음에 주백통은 안색이 어두워졌다.
"말도 마시오. 그분이 어디 나한테까지 자기의 무공을 보인답디까? 그분은, 자기는 나의 사부가 아니니까 나에게 가르쳐 주지 않겠다는 거지요. 그분은, 자기의 전진교에는 나 같은 제자가 있어선 안 된답니다. 그분의 규칙이 얼마나 엄한지 나로서는 당할 수 없었소. 나는, 난 참을 수 없었소. 그래서 그분의 규칙을 받아들이지 않았지요."
본래 이 사람은 왕중양이 아예 받아들이려고도 하지 않은 사람이었던 것이다.
모용쟁이 그 말을 듣곤 우스운 생각이 들어 농담삼아 물었다.
"왕중양이 당신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는데 그럼 내가 당신을 제자로 받아들이면 어떨까요?"
주백통은 모용쟁의 심사를 눈치채지 못하고 당장 큰절이라도 올릴 태세였다. 그러나 그는 곧 깨닫고 물었다.
"옳아, 서두를 것 없지. 서두를 것 없구말구. 서두르다간 차질이 생기는 거야. 내가 한 가지 묻겠소. 당신이 왕중양이란 분보다 훨씬 시원시원하기는 한데 그래 당신의 무공이 천하에서 으뜸이오?"
이 물음에 모용쟁은 말문이 막혔다.
'내가 천하에서 으뜸이냐구? 나는 천하에서 백 번째, 천 번째도 안 될 거다.'
모용쟁은 그 물음에는 대답하지 않고 말했다.
"그대가 왕중양을 사부로 모시려 하나 그가 받아 주지 않는다면서요. 내가 그대를 가련히 여겨 제자로 받아 주는 거예요. 나의 무공이 천하에서 몇 번째인가는 그대가 상관할 일이 아니지요."
주백통이 큰소리로 말했다.
"왜 관계가 없다는 거요? 보시면 알겠지만 나의 무공도 형편없진 않소이다. 내가 당신보다 더 나을지도 모르지요. 그렇다면 어떻게 당신이 나의 사부 노릇을 하면서 날 가르친단 말이오?"
그는 모용쟁이 답변할 틈도 주지 않고 장권(長拳)이란 무공 동작을 보여 주기 시작했다. 이 장권이란 무공은 구양적과 일속 스님같은 대가들이 보기에도 손색이 없었다. 그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주백통의 동작을 눈여겨보았다. 그의 동작은 힘도 있고 정확성도 높아서 결함 같은 것을 찾아낼 수가 없었다.
주백통은 모든 동작을 끝낸 뒤 세 사람을 향해 물었다.
"여러분들이 보기에 어떻소?"
모용쟁은 그에게 농담을 했던 것이지 정말 그를 제자로 받아들이겠다는 것은 아니었던 터라 두 손을 모아 쥐고 공손히 읍하면서 말했다.
"당신의 무공은 대단해요. 당신을 제자로 받지 않겠어요."
주백통이 기뻐하며 대꾸했다.
"그렇지, 그렇구말구. 다행이오. 난 사실 여인들과는 잘 어울리지 못하는데 당신이 나의 사부가 되신다면 난 어떻게 하겠소?"
이때 안으로 들어갔던 마옥이 나왔다.
"늦어 미안합니다. 사부님께서 세 분을 청하십니다."
구양적은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왕중양은 어떤 사람이며 그의 무공은 도대체 어느 수준일까? 내가 그 사람의 상대가 될 수 있을까?'
모용쟁도 호기심을 품고 걸어가면서, 입 가진 사람마다 왕중양을 칭송하는데 그는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하고 생각했다. 막상 그를 만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여간죄어 드는 게 아니었다.
일속은 달랐다. 그는 워낙 《구음진경》을 차지하려는 욕심이 없었으므로 구양적이나 모용쟁과는 달리 가벼운 마음이었다. 그는 마옥에게 예를 올리며 말했다.
"좋소이다. 시주께서 먼저 드시지요!"
구양적도 말없이 마옥의 뒤를 따라 중양궁으로 들어갔다.
말이 궁관(宮館)이지 그 안은 을씨년스럽기만 했다. 대청에 들어서니 사방에 흰 기들이 너풀거리고 있었다. 삼청수상(三淸 像)이 걸려 있는데 아주 멋진 그림이었다. 앞에 향안(香案)이 놓여있는데 그다지 정교하지는 못했고, 그 위에는 밀국수며 제철 과실 따위가 놓여 있었다. 한쪽에 줄지어 놓인 긴 걸상들에는 도인들이 앉을 수 있도록 방석이 깔려 있었다.
하지만 앉아 있는 것은 두 사람뿐으로, 한 사람은 서른 살쯤 되는 도인이었다. 우의도관(羽衣道冠) 차림을 한 그는 두 눈에 정기가 넘쳐 실로 선풍도꼴의 기품이 엿보였다. 그의 오른쪽에는 그보다 더 젊은 도사가 앉아 있다가 휘둥그래진 눈으로 들어온 네 사람을 바라보았다. 보아하니 그 젊은 도사는 뭔가 몹시 갑갑증을 느끼고 있는 듯했다.
마옥은 도사에게 예를 갖추며 말했다.
"사부님, 이분들이 알현을 청한 세 분입니다. 그리고 여기 이분은 바로 사부님을 스승으로 받들어 모시겠다고 몇 년째 드나들고 있는 주백통입니다."
복판에 앉은 도사가 바로 종남산의 새 전진교 교주 왕중양이었다. 그는 일어나서 숙연히 읍을 하더니 입을 열었다.
"세 분께서는 먼 길을 오셨는데 무슨 가르침이 있으신지요?"
왕중양을 본 구양적은 어쩐지 가슴이 써늘해져 옴을 느꼈다. 그는 묘한 기분이 되었다.
'저 사람은 중원 종남산에 있는 전진교의 교주이고 나는 서역 대사막에서 제일가는 고수이다. 그런데 어째서 이같이 두려운 마음이 생기는 걸까?'
구양적은 왕중양을 향해 예의를 갖추며 말했다.
"저 구양적은 집안 사부님의 명을 받들고 종남산 전진교의 교주님을 만나러 왔습니다. 듣건대 전진교에서 《구음진경》이란 기서를 얻었다고 하기에 읽어 보려고 왔습니다."
일속 스님도 예를 갖추며 말했다.
"소승도 무공을 배우는 사람이 온데 역시 《구음진경》을 읽어 보러 왔사오니 중양 진인의 배려를 바라옵니다."
그 뒤에 섰던 주백통이 급히 말을 가로챘다.
"저는 스승으로 모시러 왔습니다. 왕중양님, 저를 제자로 받아 주시겠습니까, 안 받아 주시겠습니까? 받아 주신다면야 별문제가 없겠으나 만일 안 받아 주신다면 소인이 날이면 날마다 찾아올 것이니 이 얼마나 시끄러운 일이겠습니까?"
중양 진인은 참을성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먼저 구양적 등 세 사람에게 예를 올리고 몇 마디 인사말을 주고받은 뒤 주백통을 향해 입을 열었다.
"내가 자네에게 벌써 몇 번이나 말했나? 자네와 나 사이엔 사제지간의 연분이 없다고 말이야."
그러자 주백통이 소리쳤다.
"왕중양, 당신은 무림의 제일가는 고수인데 당신이 날 제자로 받지 않으면 내가 어디 가서 당신과 같은 사부님을 모실 수 있겠습니까?"
그는 자기가 거부당하는 것이 분해서 펄펄 뛰었다. 왕중양은 그의 성미를 아는지라 더는 알은체하지 않고 고개를 돌려 구양적 등 세 사람에게 자리를 권했다.
왕중양이 입을 열었다.
"나는 우연히 《구음진경》이란 기서를 얻었는데 정말로 가짜가 아니었소. 출가한 사람은 이기심이 없는 법이니, 천천히 이것을 전파하여 언젠가는 천하 사람들이 누구나 다 이 《구음진경》을 알도록 할 생각이오. 나는 이 책을 숨길 마음이 없으므로 속히 이 경서를 베껴 내어 천하 무림의 사람들이 모두 다 알도록 하려고 했소. 그래서 난 지난달부터 문을 걸어 닫고 힘들여 이 《구음진경
》을 읽었는데, 무학을 정밀하게 서술한데다가 그 속의 지식이 해박하기가 실로 일구난설이올시다. 하지만 이 경서에서 다소의 문제점을 찾아내었는데……."
그는 말허리를 잠깐 끊고는 탄식하며 몹시 안타까운 기색을 보였다.
구양적이 급한 생각에서 물었다.
"교주님의 공력으로 그 책의 문제점을 발견했다고 하셨는데, 도대체 어떤 문제입니까?"
왕중양이 대답했다.
"이 경서는 앞머리에 총칙이 있고 상·하 두 권으로 되어 있으며 만여 자 가량 되오. 보노라면 실로 글자마다 주옥 같고 구절마다 정화(精華)인데, 지금의 무림인 가운덴 이 책을 깨우칠 인재가 없을 것이오. 이 책은 도종 황제 때 수서관원(修書官員)이었던 황상이 엮어 낸 것이오. 그분은 처음에는 이런 글을 엮을 생각이 없었으나, 천하에 널려 있는 밀서 사본들을 두루 읽던 중에 《만수도
장(萬壽道藏)》을 수정해 내게 되었던 것이오. 도종 황제는 5천4백81권으로 된 《만수도장》을 수정하고 천하의 모든 도학 서적들을 모조리 정리하여 한 부의 《도학대관(道學大觀)》을 만들어 내려 했소. 황상은 책을 잘 만들지 못하면 목이 떨어질 판인지라 목숨을 걸고 이 일을 하였소. 그는 전전긍긍 갖은 힘을 다하여 한 권 한 권 자세히 읽으면서 책을 수정해 나갔소. 이와 같이 도가의
전진(全眞)을 전부 읽던 중에 무학 기재가 되었던 것이오. 그는 스승이 없이 자력으로 무학에 통달한 사람인데 강호의 사람들 중 고수 황상이란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하나라도 있었소? 하지만 후에 황제께서 그를 파견하여 명교(明敎)를 토벌하게 하였는데, 그가 손을 펴니 사람들이 죽었소. 무수한 강호의 호수(好手)들이 죽었지요. 다른 사람들이 불복하여 그와 겨루는데 무더기
로 덤벼들어서야 그에게 중상을 입혔을 정도요. 그는 도망가서 몸을 숨기고 있다가 적수들을 물리칠 수많은 모법들을 생각해 낸 후에야 다시 나타나 원수들을 찾았다고 하오. 그가 산속에 들어가 40년이란 세월이 유수같이 흐른 뒤 지난날의 원수들을 찾으니 모두들 황천객이 된 지 오래였다 하오. 그 당시 묘령의 소녀이던 한 여인만이 살아 남았는데, 그녀도 백발이 성성한 노파가 되어 있었
지요. 황상은 탄식하면서 자신이 있던 곳으로 돌아갔는데, 세월이란 흐르면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그 굴 속에 들어앉아 이 《구음진경》을 써내어 후세 사람들에게 남겨 준 것이오."
왕중양은 여기까지 이야기하고 잠시 말을 끊었다.
그의 말을 듣는 동안 사람들은 그윽한 감회에 잠겨 황상이 걸은 길을 따라 인간의 삶과 죽음을 음미했다. 그러고 보면 사상이니 불가의 열반이니 도가의 단사(丹砂)니 하는 것들이 모두 눈앞에 지나가는 운무처럼 속절없었다.
잠시 후 왕중양은 다시 입을 열었다.
"나는 이 《구음진경》을 보면서 실로 탄복하였소. 분명히 말씀드린다면, 나 같은 재주로도 천하의 영웅들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소. 이 경서는 실로 전인미답의 내용을 가지고 있소. 한데 이 경서에는 큰 폐단도 있는데, 책 가운데 있는 일부 기공사술(奇功邪術)은 사람들에게 주는 해가 적지 않소. 이 책이 무림에 유입된다고 할 때 다행히 정착의 인물이 그것을 얻는다면 천하의 창생들에
게 행복이 되겠지만 만일 사악한 인물이 그것을 얻을 경우 화근 덩어리가 될 것이오. 나는 고민 끝에 몇 번이나 이 책을 불태워 버릴 생각까지 했었소. 하지만 차마 그럴 수가 없어 번번이 그만두곤 했지요."
왕중양은 이야기를 끝내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는데 낭패한 기색이 역력했다.
구양적은 왕중양의 말이 진정인지 아니면 거짓인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가 의기소침해진 것을 보고 속으로 생각했다.
'저 사람이 이처럼 고뇌에 잠긴 것은 마치 많은 재물을 가진 사람이 그것을 어떻게 간수해야 좋을지 몰라 전전긍긍 밤잠을 설치는 것과 같구나. 인간이란 역시 욕심을 부려서는 안 되는가 보다. 욕심이 많을수록 근심도 많아지는 법. 하지만 저 사람이 하는 말이 진실일까? 혹시 자기는 《구음진경》에 있는 술법을 다 배워 놓고 그 책을 불태워 버린 후 그 무적의 무공을 혼자 장악하기 위해
저렇듯 꾀를 쓰는 게 아닐까?'
그러나 일속은 구양적과 생각이 달랐다. 그는 왕중양이 상모(相貌)가 청수(淸秀)하고 선풍도골을 갖춘 것으로 보아 절대로 간교한 인간이 아니라고 인정하였으며 그가 한 말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일속이 입을 열었다.
"나무아미타불……. 불조는 자비하고 진인(眞人)은 일념이거니, 천하의 무림 인사들을 무수히 구할 수 있을진저……."
모용쟁은 무심한 척 앉아 있었으나 왕중양의 말을 전혀 믿지 않았다. 그녀가 불쑥 질문을 던졌다.
"그렇다면 중양 진인께서는 이미 그 《구음진경》을 읽으셨겠군요?"
왕중양은 그렇다고 대답했다.
모용쟁이 다시 물었다.
"중양 진인의 말씀에 의하면 지금 당신 한 사람만이 이 《구음진경》의 무공을 알고 있는 셈이 되는데, 그런가요?"
모용쟁은 대수롭지 않은 듯 물었지만 태도만은 사뭇 공손했다. 왕중양은 모용쟁의 성격도 모르거니와 그녀가 묻는 용의도 모르는지라 고지식하게 대답했다.
"그러하오."
모용쟁이 입가에 웃음을 베어 물고 물었다.
"중양 진인께서 《구음진경》에 있는 무공을 익히졌다니 천하의 무림에선 좋은 일만 생기겠군요? 이제부터 소동이 일어나게 될 거고 끝없이 어지러운 세상이 올 테니까요."
멍해진 왕중양은 이 처녀의 날카로운 질문에 말문이 막혔다.
모용쟁은 웃으면서 기막힌 언변으로 말을 이었다.
"중양 진인께서 《구음진경》을 습득하셨으니 천하의 무림에 난이 일어나진 않을 거예요. 하지만 그걸 다른 사람이 배웠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중양 진인은 일속 대사와 마찬가지로 모두 방외지인(方外之人)이니 인생인세(人生人世)에 대하여 이해가 있을 줄로 알아요. 인간의 선악이란 일념지간(一念之間)에 따라 뒤바뀌는 것이지요. 불조께서도 일찍이 세 차례나 미오(迷誤)에 빠지셨으
니, 범인이야 더 말할 것이 있겠어요? 중양 진인께서 손에 《구음진경》을 들고 보물을 가졌다고 여기신다면 이건 하늘을 탐하는 것이며 사람들을 속이는 일이에요. 하지만 중양 진인의 사람됨으로 보아 그러시진 않으리라고 믿어요."
왕중양은 범속한 인간이 아니었다. 지난날 그는 중원의 무림 인물들에게 요청하여 의병을 모아 금에 맞서 용감히 싸웠던 사람이다. 그가 어떤 인물인들 만나보지 않았겠는가? 그는 곧 모용쟁의 말뜻을 알아듣고 가벼운 웃음을 띄우며 말했다.
"대단한 건 아니오. 천하의 물건이란 덕이 있는 자의 손에 들어가게 마련이고 재능 있는 자도 그걸 손에 넣을 수 있지요. 음식을 예로 들어 설명한다면, 그 음식을 즐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싫어하는 사람도 있는 법이오. 그걸 즐기는 사람에겐 그것이 중한 것이 되지만 그걸 싫어하는 사람에겐 아무것도 아닌 게 되지요. 하나의 보물이 진짜 보물인가 아닌가 하는 것은 전적으로 누구든지
그것을 볼 줄 아는가 모르는가에 달려 있소. 《구음진경》은 비록 보물이지만 내가 보기에는……."
왕중양은 잠깐 말을 멈추고 일속 스님, 구양적, 모용쟁과 자기의 두 제자(큰 제자 마옥과 둘째 제자 구처기), 그리고 그들의 뒤 편에 서 있는 주백통 등을 차례로 살펴보고 나서 말했다.
"함부로 단언할 일은 아니지만 이곳에 모인 분들 가운데서 다만 두 사람만이 이 《구음진경》과 인연을 갖고 있소."
모두들 그 말을 듣고 왕중양이 자기를 두고 말하고 있다고 여겼다. 마옥과 구처기는 사부가 자기들을 두고 하시는 말씀이라고 내심 기뻐했고, 구양적은 자기와 모용쟁 낭자를 두고 한 말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주백통의 생각은 달랐다.
'저자가 나를 제자로도 받아들이지 않는 판에 그 책을 나한테 보여 줄 리가 없지. 나하고는 무관한 일이야.'
그러나 이곳에 모인 여러 사람들 가운데서 오로지 그만이 이 《구음진경》의 덕을 톡톡히 보게 되리라는 것을 누가 알았으랴? 그저 어리숙하기만 하던 주백통이 훗날 이 《구음진경》의 무공을 가장 익숙하게 익히게 되었던 것이다.
주백통은 그렇다치고, 일속 스님만이 아무런 욕심이 없었다. 그는 중양 진인이 이 경서에 있는 무공은 배워 둘 바가 못 된다고 하니 안 배우면 그만이고 유념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중양 진인이 말하는, 그 경서와 인연을 가졌다는 사람 속에 자기가 끼여있으리라고는 더더욱 생각하지 않았다.
구양적이 참지 못하고 넌지시 왕중양을 떠보았다.
"중양 진인의 말씀대로라면 우리는 먼 곳에서 찾아왔음에 도 불구하고 《구음진경》과는 인연이 없겠군요."
왕중양이 대답했다.
"그렇소."
생각이 빗나가자 구양적은 발끈해서 말했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걸로 보아 중양 진인은 실로 오만한 분이로군요? 내가 중양 진인께 몇 수 배워야겠소. 그러면 이 《구음진경》의 무공이 해명을 날리고 있는 건지 아닌지도 알 수 있을 것이오."
이렇게 말하고 나서 그는 길다란 자루에서 사두장을 꺼냈다. 그러자 왕중양이 웃으며 말했다.
"나는 비록 세상과 단절되어 소식에 어두운 사람이긴 해도 구양 선생의 크나큰 명성은 익히 들어 왔소. 선생은 서역 대사막의 으뜸 가는 고수로 알고 있는데 그러한 선생과 무예를 겨루어 보게 됨을 기쁘게 생각하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구양적도 따라 일어났다.
사람들을 모두 중양궁에서 나와 전진교 교주와 구양적 간의 시합을 지켜 보았다.
두 사람이 마주섰다. 왕중양은 신선 같은 풍채로 바람을 마주보고 섰는데 긴 소매가 펄펄 나부끼는 품에 서릿발 같은 정기가 엿보였다. 구양적은 어두운 낯빛으로 사두장을 들고 무심한 듯이 서 있었다. 옆에 서 있는 사람들은 숨소리마저 죽이고 이 두 사람을 지켜 보았다.
주백통은 한가롭게 속으로 생각했다.
'왕중양, 내가 당신을 찾아와 제자로 받아 달라고 그렇게 사정했건만 당신은 끝까지 승낙하지 않았소. 하지만 당신이 진짜로 재주가 있는지 없는지 어찌 알겠소? 당신이 정말 재주가 있다면 이 주백통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스승으로 모실 테요. 하지만 당신이 경요화병(景 花甁)처럼 겉모양뿐이라면 당신을 스승으로 모실 이유가 없지.'
한편 모용쟁은 바짝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여인들 중 호걸에 속하지만, 서역의 대사막을 지나 중원의 종남산에 이르기까지 수천 리 길을 몇 달 동안 구양적과 동행해 오는 동안 무척 정이 들어 있었다. 그런데 그러한 구양적이 왕중양과 자웅을 가리겠다고 하니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듯했다. 구양적이 이길 가능성보다는 질 가능성이 더 커 보였던 것이다. 그녀는 몹시 불안해졌다
. 그가 만일 패한다면 《구음진경》을 얻지 못하게 됨은 물론이고 무슨 낯으로 사부님을 뵙는단 말인가?
왕중양이 입을 열었다.
"구양 선생, 나의 전진교는 나름의 무공이 있지만 구양 선생이 먼 곳에서 오신 것은 《구음진경》의 기공을 보기 위한 것이니《구음진경》에서 배운 무공을 써 보겠소."
왕중양은 두 손을 모아 합장을 하고 하늘과 땅에 번갈아 읍한 뒤 덧붙였다.
"나는 《구음진경》으로부터 일종의 연기공부(練氣功夫)를 깨우쳤는데 그것을 '선천공(先天功)'이라고 부릅니다. 이 선천 공으로 당신의 독장(毒杖)을 막아내겠소."
구양적은 서릿발 같은 위엄을 떨치며 서 있는 왕중양을 보고 내심 불안을 느꼈다. 백타산군 임일천과 싸울 때에도 이렇게 긴장하지는 않았었다.
구양적은 마음을 다잡은 뒤 소리쳤다.
"왕중양, 조심하시오!"
구양적의 지팡이가 윙윙 소리를 내며 빗발처럼 날았다. 왕중양은 지팡이가 날아오는 것을 보고도 꼼짝하지 않고 침착하게 서 있었다. 독장은 왕중양의 머리를 향해 날아갔다. 그러나 왕중양의 주위엔 무쇠와도 같이 단단한 호신 강기가 둘러싸여 있어서 지팡이는 그의 몸에 가 닿지 못했다. 왕중양이 한 발짝 옮겨 딛자 독장은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한 채 그대로 떨어져 버렸던 것이다.
왕중양은 느릿느릿 기문(奇門)으로 걸어 나가 공초(空招)로 들어가면서 구양적이 독장으로 얼마든지 공격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었다.
구양적은 잽싸게 왕중양의 허리에 일격을 가했다. 이번에는 적중을 한 듯 '팍!' 하는 소리가 났다. 힘껏 타격을 가했다고 생각한 구양적은 속으로 탄성을 질렀다.
'나의 이 독장은 단번에 서역의 들소를 요절낸 적이 있다. 서역의 들소란 중원의 밭갈이 소와는 달라서 몽둥이는 고사하고 칼로도 죽이기가 쉽지 않아. 하지만 이 구양적의 지팡이 한 방에 곤죽이 되어 나가떨어졌단 말이다.'
그는 왕중양이 자기의 지팡이에 맞은 이상 죽지는 않더라도 중상을 입었으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그의 생각일 뿐, 날아간 독장이 갑자기 딱 멎더니 잡아당겨도 끌려 오지 않았다. 구양적이 놀라 바라보니 왕중양은 웃음 띤 얼굴로 왼손의 장지와 식지로 대수롭지 않게 그 지팡이를 잡고 있었다. 구양적이 온 힘을 다하여 독사장을 당겨 보았으나 헛 일이었다.
구양적은 몹시 참담한 기분이 되었다. 자신의 무공이 이렇듯 하잘것없는 것인 줄은 미처 몰랐었다. 구양적의 표정을 지켜 보던 왕중양은 지팡이를 놓아준 뒤 말없이 미소를 떠올렸다.
구양적은 마음을 가라앉힌 뒤 비로소 입을 열었다.
"중양 진인께서는 과연 놀라운 수법을 갖고 계십니다. 한데 이것은 무슨 수법인지요?"
왕중양이 웃으며 대답했다.
"기에 속하는 것들로는 일휘일수(一揮一收), 일탄일구(一彈一句)가 있는데 이 모두가 묘기를 이루는 것들이오. 이것은 《구음진경》에서 파악한 것이기는 하나 거기에 기재된 것은 아니오."
구양적은 더 할 말이 없었다.
갑자기 불호(佛號)를 외치는 소리가 났다.
"나무아미타불……, 훌륭하시오. 중양 진인의 무공은 과연 묘기 중의 묘기외다. 소승이 친히 목도하지 않았던들 어찌 천하에 이런 기막힌 수법이 있는 걸 알 수 있었겠소? 중양 진인의 정채로운 묘기를 보고 소승도 손이 가려워졌소이다. 소승이 진인에게서 한 수 배울까 하오."
이렇게 말하더니 일속 대사가 긴 소매를 걷지도 않고 승의를 펄펄 날리며 달려가는데, 마치 구름 위에 있는 진불(眞佛)이 서서히 왕중양한테 떠가는 것 같았다.
왕중양이 예를 갖추며 말했다.
"대리의 단씨네는 천하 무학의 대가로서 천룡사 귀지(貴地)는 더군다나 사람들이 우러러보는 곳이지요. 일속 대사님과 겨루게 된 것은 중양의 행운이라 하겠소."
하지만 두 사람은 무림의 다른 사람들처럼 칼과 창, 피와 땀의 겨룸으로 살점이 떨어져 나가고 병장기가 부서져 나가는 그런 싸움은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마치 다년간 사귀어 온 벗이기나 한 듯이 일단 손을 맞잡고 인사를 나누며 정을 주고받았다.
잠시 후 두 사람은 거리를 두고 마주섰다. 일속 대사 쪽에서 먼저 합장한 후 천천히 오른손을 들어 식지로 왕중양을 가리켰다. 순간 사람들은 믿을 수 없는 상황을 목격했다. 그의 손가락에서 한줄기의 질풍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왕중양에게로 뻗쳐 나갔던 것이다.
일속은 손가락으로는 왕중양을 가리키며 입으로는 다음과 같이 읊조렸다.
일지(一指)로 천하를 가리키고
일속(一谷)으로 자신을 약속하거니
일부러 오솔길을 걸으며
시름겨운 그림자 나 혼자라네.
왕중양은 조금도 당황하는 기색 없이 역시 두 손으로 합장을 한 뒤 가볍게 밖으로 내밀었다. 그러자 양 옷소매가 돌풍처럼 날리며 일속 대사의 손가락에서 나오는 기를 없애 버리는 것이 아닌가. 왕중양도 뒤질세라 맞받아 읊조렸다.
기묘하고 가벼울손 천지요
음험하고 무서울손 귀신이로다
하건만 능히 이 마음 알아주니
역시 도(道) 중의 인간이라네.
지켜 보는 사람들 가운데서 구양적만이 그 뜻을 잘 알아듣지 못 했는데, 이 두 사람은 모두 자신이 겪은 일을 말하고 있었다.
일속은 지난날을 한시도 잊을 수가 없었고 과거를 떠올릴 때마다 몹시 불안을 느껴야 했다. 그래서 그는 입만 벌리면 게(偈 ; 불경의 노래 가사)를 읊어 댔던 것인데, 자기는 비록 기막힌 무공을 익혔건만 속세의 일념을 털어 버릴 수 없고 늘 자신을 돌이켜보게 되는 바 결국 자기는 한 인간에 불과하다는 뜻이 담겨져 있었다.
왕중양도 게로써 화답하였는데, 자기는 비록 《구음진경》을 얻었고 《구음진경》은 하늘 땅을 다스릴 만한 술법과 귀신도 부릴 수 있는 기공을 알려 주고 있지만 그것은 결코 왕중양이 차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다. 만일 그의 쓰라린 마음을 알아준다면 자기는 아주 큰 안위를 느끼겠다는 것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 마주보며 웃었는데, 초면이기는 해도 서로의 마음을 알게 된 것이 매우 기뻤다.
일속 대사가 말했다.
"소승에겐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수법이 있어서 그것으로 귀신도 쫓아 버릴 수 있지요. 그런데 진인께서는 신선이어서 나로서도 어찌할 수 없소이다."
그는 이렇게 말하더니 손가락으로 묘기를 부렸다. 그가 무엇인가를 가리키는 시늉을 할 때마다 그 손가락은 칼도 되고 검도 되고 창도 되었다. 그 무수한 변화를 한 손가락으로 이루어 내는 것이었다.
그것을 보는 구양적의 등골에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나는 대사막에서 태어나 지금껏 적수다운 적수를 만나지 못했다. 그저 백타산군 임일천 정도가 내게는 고수였다. 하지만 이 일속이나 왕중양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 않는가? 왕중양은 대체 무학의 도가 얼마나 깊은 사람일까? 또한 일속 대사는 무학에 그처럼 정통하였지만 그것은 살상을 위한 것이 아니다. 두 사람이 보여 준 법수와 동작은 절묘하기 그지없고 천하에 드문 독보적인 것들
이다.'
두 사람이 한창 싸움에 열을 올리고 있는 판이라 사람들은 모두 구경에 열을 올렸다. 그들은 하나같이 두 사람에 대해 탄복했다. 천하의 절세 무학이 바로 이 자리에서 펼쳐지고 있는 것이었다.
이때 아주 맑고 우렁찬 목소리가 산 뒤에서 들려 왔다. 소리가 어찌나 큰지 귀청이 찢어지는 듯하여 모두들 깜짝 놀랐다.
"더러운 도사 놈과 개 같은 중 놈이 사내가 할 일을 하지 않고 이곳에서 쓸데없는 짓을 하고 있군 그래. 폼만 잡고 흉내만 내니 우습지 않은가요?"
모두들 소리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으나 아무도 눈에 띄지 않았다.
비록 폭언을 퍼부었지만 소리가 맑고 부드러운 것이 아리따운 여인의 음성이었다.
이윽고 목소리의 주인공이 나타났다.
그 여인은 중양궁의 대경석(大頸石) 위에 서 있었는데 마치 바람을 타고 온 나뭇잎이 가볍게 얹혀 있는 듯했다. 가만히 눈여겨보니 치렁치렁한 검은 머리칼이며 반달 같은 눈썹 등이 대단히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나이는 25, 6세쯤 되어 보였는데 아름다운 눈동자에는 어쩐지 약간의 살기가 엿보였다.
손님들은 이 여인을 알지 못했으나 중양궁 사람들은 그녀를 보자 두려워하는 눈치였다. 마옥과 구처기는 급히 고개를 떨구고 감히 쳐다보지도 못했다. 그렇게 대범하던 왕중양도 그 여인을 보자 역시 당황하는 눈치였다.
여인이 소리쳤다.
"왕중양, 당신이 중양궁 안에 숨어서 한 달 남짓 머리를 내밀지 않더니 그새 무슨 대단한 무예라도 배운 모양이죠?"
왕중양이 그녀를 향해 공손히 읍하며 말했다.
"임 시주(施主), 중양궁에 오셨는데 무슨 가르침이 있으신지요?"
모용쟁은 이들 두 사람이 하는 말을 듣고 내심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중양궁 사람들의 기색을 보면 이 여인이 중양궁과 극히 깊은 연원(淵源)을 가진 것이 분명했고, 왕중양 또한 이 여인과 아주 잘 아는 사이임에 틀림없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이 두 사람은 마치 원수지간처럼 보이는 것일까? 왕중양은 이 여인이 나타나기 전에는 기백과 풍도가 있어 무공이고 이야기고 간에 누구한테도
꿀리는 점이 없었는데 지금은 왜 이 모양인가?
여인은 구양적과 일속 스님을 번갈아 보고 나서 나무라듯 말했다.
"왕중양, 그대도 이 시대의 영웅인데 무엇 때문에 늘 혼탁한 세속 사람들의 교란을 받나요?"
그녀는 애석한 일이라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왕중양이 일속 대사에게 말했다.
"이분은 임 시주님이십니다. 만일 구양 선생이 임 시주님과 겨룰 수만 있다면 천하의 무공에는 누가 으뜸이라 말하기 어렵다는 임시주님의 말을 더는 믿지 않게 될 것이오. 임 시주님의 무공은 저보다 강한데 이것은 이 중양이 진심으로 인정하는 바올시다."
손님들은 모두 놀랐다. 왕중양 같은 인물이 이런 말을 할 때에는 임씨(임조영) 성을 가진 이 여인의 무예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가고도 남았다. 방금 보았다시피 왕중양은 눈 깜짝할 사이에 구양적을 패배시켰고 일속과 싸운 그 무예도 기막혔는데, 그런 그가 이렇듯 추어올리는 여인의 무예는 얼마나 대단한 것이겠는가?
모두들 말없이 지켜 보고 있는데 갑자기 주백통이 임조영 앞으로 달려나갔다. 그는 굽신 인사를 하고는 흥미롭다는 듯이 물었다.
"이봐요, 우린 당신의 이름을 모르오. 이름이 뭐요?"
임조영은 주백통의 행색을 훑어보고는 불쾌한 낯으로 쌀쌀하게 대답했다.
"내 이름이 뭐든 당신이 무슨 상관이지?"
주백통이 히히덕거리며 말을 받았다.
"중양 어른 말씀이 당신의 무예가 자기보다 더 강하다고 하는데 그게 사실이오?"
사람들은 왕중양이 방금 한 말은 겸손의 말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여인은 주백통의 물음에 엷은 미소를 띄우며 대답했다.
"저 중양 진인의 무예는 평범하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내뱉는 그녀의 말에 모두들 깜짝 놀라 왕중양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왕중양이 입을 열었다.
"임 시주님의 무예는 매우 훌륭해서 저는 그에 이치지 못하지 요."
왕중양의 말 속에는 진정으로 존경하는 마음이 깃들어 있었다.
주백통이 기쁜 기색으로 손뼉을 쳐대면서 지껄였다.
"잘됐어, 잘됐다니까. 난 바로 이 중양 진인 때문에 근신하고 있던 사람이오. 저분은 날 제자로 삼고 싶어하지 않는데, 저분보다 무예가 나은 당신이 나를 제자로 받아 주는 게 어떻겠소? 제가 당신께 절을 올리겠소. 내 이름은 주백통인데 사람들은 그저 장난꾸러기라고 불러요. 난 훌륭한 무예를 보기만 하면 기뻐서 잠도 자지 못하죠. 그런 내가 무예를 배우지 않으면 뭘 하겠소? 한데 저
사람들은 정말 둔해요. 그런데 당신은 내가 배울 만한 훌륭한 수법을 얼마나 갖고 있소? 스승이 지닌 게 몇 가지 수법뿐이라면 하루 이틀 사이에 다 배우고 말지 않겠소? 그래서는 안 되지요. 단번에 다 배워 버려 사부님이란 사람이 나보다도 못하게 되면 이 얼마나 골치 아픈 일이겠소?"
그는 임조영이 말할 새도 없이 혼자서 떠들어댔다.
임조영이 입을 열었다.
"난 너를 제자로 받지 않겠다."
주백통이 말했다.
"당신은 왜 제자를 받지 않겠다는 거요? 당신은 제자를 받은 적이 없소? 당신의 무예가 왕중양보다 더 높은데도 제자를 받지 않는다면 애석한 일이 아니오?"
그는 거듭 한탄하면서 임조영한테 굽신굽신 절을 해댔다.
임조영이 속으로 생각했다.
'이 사람의 행동거지로 보아 천성이 순박한 사람임에 틀림없다. 간계를 피우거나 이기심을 드러내는 일은 없겠어. 만일 저 사람이 여자라면 제자로 받아들여 큰 그릇을 만들 텐데 사내라서 곤란하구나.'
그녀는 쾌활한 목소리로 말했다.
"왕중양, 나의 새 무공 '옥녀심경(玉女心經)'을 다 만들었어요. 당신이 한번 시험해 보지 않을래요? 듣자니 당신이 문을 걸어 닫고 그 기경에 있는 무예를 배웠다고 하던데, 생각이 있으면 나와 한 번 겨루어 보지요."
왕중양은 공손한 태도로 임조영에게 예를 올린 뒤 말했다.
"임 시주님께서 만드신 새 무공은 필시 훌륭할 것이오. 하지만 오늘은 손님이 많아서 임 시주님과 무예를 겨루지 못하겠구려, 날짜를 정하여 다시 오셔서 가르쳐 주시는 게 어떻겠소?"
임조영은 냉소했다.
"좋아요. 그럼 다음에 봐요."
그녀는 말을 끝내기가 무섭게 몸을 솟구쳐 바위에서 훌쩍 날아올랐다. 그리고 산 아래로 내려가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종적이 묘연해졌다.
|
첫댓글 감사합니다.
즐감~~~~~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굿,,,,
감사합니다 .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즐독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