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원의 농지경영과 상업활동
이병희(목포대 교수)
사원은 승려들이 수행하며 생활하는 공간이자, 신자들이 찾는 장소이다. 불교의 종교행사도 이곳에서 주로 열린다. 사원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경제력이 필요하다. 이것은 주로 사원의 건물을 보수하거나 증축하는 데, 종교행사를 치루는 데, 승려들을 부양하는 데, 그리고 사회사업을 수행하는 데 사용되었다.
현재 사원이나 승려는 대부분 생산활동에 직접 종사하지 않고 종교활동에 필요한 경비를 외부로부터 조달한다. 이러한 경비는 주로 신자의 시주, 입장료. 임대료의 수입, 기타 불교행사 때의 수입 등으로 조성된다. 그런데 사원이 경제기반을 마련하는 방법이나 운영하는 형태는 시대에 따라 커다란 차이가 있다.
불교가 사회적으로 큰 구실을 하고 정치세력의 지원을 받았던 고려시대에도 사원은 상당한 경제력을 가지고 있었다. 든든한 경제적 뒷받침이 있었기에 사원의 승려는 생산활동에 직접 종사하지 않고, 종교생활에 몰두할 수 있었으며 사회적인 영향력을 크게 행사할 수 있었다. 고려시대에는 농업이 주요 생산업이고 경제의 핵심을 이루었기 때문에, 사원의 가장 중요한 경제기반은 농지경영이었다. 사원을 이를 통해 농민을 지배하였으며, 획득한 부를 기초로 상업활동이나 고리대에 종사하는 것이 가능하였다.
사원의 대토지 경영
사원의 농지는 시납, 개간, 매득 그리고 국가의 사급 등 다양한 계기에 의해 형성되었다. 고려는 불교사회로 국왕이나 귀족 및 일반 농민들은 불교를 신봉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이 토지를 사원에 시납하는 일은 흔하였다. 그런데 토지를 시납할 수 있는 층은 토지를 소유하고 있는 왕실이나 중앙의 고관, 지방의 토호가 중심이었다. 농지를 소규모 소유하거나 혹은 소유하지 못한 농민들이 토지를 시납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였다.
사원은 또한 매득이나 개간에 의해서도 농지를 확보할 수 있었다. 사원은 인력이나 재력 양면에서 우월하며, 소를 소유하고 있는 예가 많았기 때문에 소농민보다 개간을 통해 농지를 확대하는데 유리하였다. 이와 달리 사원은 때때로 권세가 사이에 성행하고 있던 토지의 탈점, 겸병을 통해서도 농지를 확대하였다.
그리고 국가 내지 국왕의 토지 사급을 통해서도 사찰은 농지를 마련하고 확대하는 것이 가능하였다.
이렇게 마련한 사원의 농지는 그 규모가 상당하였지만, 일정한 지역 특히 사원 주위에 집중되어 있지는 않았다. 금강산에 위치한 장안사의 경우, 성종 때에 1,050결의 토지가 지급되었는데, 전라도, 양광도, 서해도 일원에 분포하고 있었다.
고종 때 송광사의 토지는 전남 일원에 산재하고 있었다. 대개의 경우 사원의 농지는 이처럼 여러 지역에 분산되어 있었다. 그러나 장생표가 설치된 경우는 예외적으로 토지가 집중되어 있었다. 뿐만 아니라 지배의 내용에 있어서도 상이하였다. 곧 사원은 장생표내의 농지만이 아니라 산림농민에 대해 배타적인 지배를 할 수 있었다. 그러한 예를 통도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 통도사에는 국가의 허락을 받아 12개의 장생표가 세워져 있었는데, 장생표 내에는 공사의 다른 토지가 없었으며, 표내의 농지 산림 농민은 통도사의 지배를 받았다.
사원은 농업생산에 필요한 것들을 소유하고 있으면서 경작농민에게 그것을 대여하기도 하였다. 예를 들어 현화사, 왕륜사, 석방사는 소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 소는 사원전의 경작에 사역되었을 것이다. 또한 종자를 대여하여 농민의 영농을 돕기도 하였다.
사원전을 경작하는 농민은 양인농민, 노비, 하급승려 등 다양하였다. 사원전을 경작하는 핵심적인 부류는 양인농민이었다. 사원 노비는 사원 소속의 토지를 경작하는 수도 있었지만, 그것이 주임무는 아니었다. 송광사의 경우 농지는 240여 결인데 반해 노비는 17명에 불과하여, 그들이 모두 경작할 수는 없었다. 사원노비는 주로 음식을 준비하고 땔나무를 마련하며, 사원의 유지를 위한 여러 가지 잡역에도 동원되었다. 그리고 수공업품을 만들기도 하였다.
사원에 소속된 하급승려가 사원전을 경작하기도 하였다. 그 예는 문종 때에 피역을 꾀하여 사문이 된 자가 경축을 업으로 하고 있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고려 초 이래 역을 피해 승려가 된 자들이 대개 하급승려로서 사원전을 경작하기도 하였다. 고려 전기에 수원 승도, 재가화상이라 불리는 자들도 이러한 하급승려의 한 부류였다. 재가화상의 모습을<고려도경>은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그들은 가사를 입지 않고 계율을 지키지 않으며 흰 모시의 좁은 옷에 검정색 깁으로 허리를 묶고 맨발로 다니는데 간혹 신발을 신은 자도 있다. 거차할 집을 자신이 만들며 아내를 얻고 자식을 기른다. 그들은 관청에서 기물을 져 나르고, 도로를 쓸고, 도랑을 내고, 성과 집을 수축하는 일들에 모두 종사한다. 또한 변경에 경보가 있으면 단결해서 나가는데 비록 달리는 데 익숙하지는 않으나 자못 씩씩하고 용감하다.
후기에 가면서 토지제도의 문란, 농민의 동요로 출가하는 자도 더욱 늘어갔다. 고려말 조선 초기에 승려가 10만을 상회한다거나 민의 1/3에 이른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는 것이다.
산업과 유통망을 관장하는 사원
사원은 다량의 물품 구매자임과 동시에 판매자이기도 하였다. 사원은 건축시의 자재, 불구제작을 위한 재료, 불교행사에 필요한 물품, 승려들의 생필품 가운데 상당한 양을 구매하여 조달하였다. 그리고 사원이 생산한 잉여물품, 가공품을 판매하였다.
사원이 이렇게 상업활동에 적극적이었던 것은 불교의 교리와도 연관이 있다. 불교는 성립할 당시부터 상업활동이나 대부 행위에 대해 매우 호의적이었다. 불교가 인도에서 성립할 당시부터 또 중국에 들어온 후에도, 사원은 그러한 활동에 적극적이었다. 불교의 교리 자체가 상업활동이나 고리대에 참여하는 것을 죄악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원이 교역활동을 통해 판매하고 있는 품목은 다양하였다. 그중 파와 마늘을 판매한 것이 주목된다. 파나 마늘은 승려가 가까이 해서는 안되는 작물인데도 재배하고 나아가 판매까지 하고 있어 자주 문제시 되었다. 파나 마늘보다는 곡물이 일반적인 교역물이었을 것이다. 사원은 농지경영을 통해 지대나 지세로 곡물을 확보하였는데 소비되고 남는 것은 직접 팔거나 가공하여 판매하였다. 곡물이 가공되어 판매된 사례로 술을 들 수 있다. 현종 때 경기도 양주의 장의사, 삼천사, 청연사 등의 승려들이 금령을 어기고 양조한 쌀이 360여 석에 이르러 문제가 된 적이 있었다.
사원은 수공업제품의 생산에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사원은 불상이나 불구의 제작을 위해 목공과 금속가공 기술자를 다수 거느리고 있었다. 전영보는 제석원의 노비로서 금박기술을 가지고 있었고, 충렬왕 때의 어떤 비구니는 직조기술이 뛰어난 여자노비를 두고 있었다. 그리고 유리기와를 훌륭하게 구워 만드는 육연이라는 승려도 있었다. 이들이 생산한 물품은 자체 소비하고 남을 경우 판매하였을 것이다. 때로는 판매를 겨냥하고 생산하는 수도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사원이 판매해서 잉여를 축적할 수 있는 또 다른 계기는 염분이었다. 소금은 생필품이기 때문에 이것을 판매하여 부를 증대할 수 있었다. 그 밖에 사원은 기름과 벌꿀을 생산 판매하기도 하였다.
사원은 이처럼 물품을 판매하는 것만 아니라 필요한 물품을 구매하기도 하였다. 정혜사에서는 쌀이 떨어져가자 구입을 논의하였고, 흥왕사에서는 흥교원을 중수하면서 재목을 구입하였다. 그 밖에도 필요한 물품을 구매하는 일은 흔히 있었다. 이처럼 사원은 잉여생산물의 판매와 필요한 물품의 구매를 통해서 상업활동에 활발하게 참여하고 있었다.
또한 사원은 교역의 중요한 장소였다. 불교행사에는 많은 사람이 모여 들었으며, 상호간에 자연스럽게 교역이 이루어졌다. 예컨대 전주의 보광사 낙성회 때 모인 대중이 3천 명에 달하는데 그 행사가 50일간 지속하였다. 이때에 모인 사람 사이에 교역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개경의 팔관회 행사에는 외국 상인까지 참여해서 물품을 거래하였다.
지방 사찰이 개경의 거래에 참여하는 경우도 있었다. 금강산 장안사가 개경에 점포를 가지고 있으면서 이곳을 통해 수취한 물품이나 교역에서 확보한 물품을 처분하거나 필요한 물품을 조당하였다.
사원은 공물납부와 관련해서도 상행위를 하였다. 대납이 그것이다. 이는 국가 권력과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또한 사원은 중국에서 경전이나 단청 원료를 구입하기 위해서 국제교역에 종사하였다.
교역에는 원거리수송도 있었는데 이때에는 말이 필요하였다. 사원이 말을 가지고 있거나 승려가 말을 타고 다니는 사례가 많이 보인다. 우리나라는 산이 많고 도로가 좁기 때문에 수레는 적합하지 않았다. 또 운송수단으로는 소보다 말이 적합하여 널리 활용되었다. 말에 짐을 싣는 방식은 두 개의 용기를 말등 좌우에 걸쳐 놓고 그 속에 물건을 넣는 것이었다.
휴게소 역할의 원 운영
승려들은 원거리 교역에 종사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대개 하루 만에 목적지까지 도착할 수 없어서 숙박을 해야 했다. 이에 사원이나 승려들은 원이라는 독특한 숙박시설을 설치하여 운영하였다. 원은 사람의 통행이 잦지만 거주지역과는 떨어져 있어 맹수가 나타나거나 도적이 출몰하기 쉬운 곳에 세웠다. 원을 활용하여 피곤한 사람은 쉬어가고, 자야 할 사람은 자고, 비를 피하고 그늘을 얻고, 도둑의 근심을 덜고 짐승의 해를 없앨 수 있었다. 원에서는 숙박은 물론 음식과 우마의 꼴을 제공하였다. 불교계는 원을 관장함으로써 고려사회의 유통망을 장악하고 있었다. 원을 중심으로 한 고려의 유통망은 조선 건국 후 국가가 장악하였다.
사원이 하는 대부활동
사원의 농지경영을 통해 확보한 잉여물이 양식이나 종자로 농민에게 대부되기도 하였다. 당시 농민은 부족한 양식과 종자를 빌리곤 하였다. 농민이 홍수, 가뭄, 병충해 등으로 흉년이 들었을 때, 의창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었지만 사원의 미곡을 빌리는 경우가 많았다. 이 경우 빈민구제의 성격을 강하게 띠었다. 사원의 미곡대부에는 또 다른 의미가 포함되어 있었다. 사원은 대부행위를 통해서 농민들에게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사원에서 운영하는 고리대의 규모는 상당하여서, 보통 수백에서 수천 석에 달했는데, 송광사는 만여 석을 11개 말사를 통해 운영하였다. 최우의 아들 만종과 만전은 승려로서 무려 50여 만석이나 되는 고리대를 운영하였다. 이러한 고리대는 보라는 이름으로 설치. 운영되었다. 보는 존본취식(存本取息), 즉 본전은 두고 이자만 가지고 특정 용도에 사용하기 위한 기금이었다. 불법을 배우는 것을 돕기 위한 광학보, 종의 유지를 위한 금종보, 그리고 부모의 제사비용을 위한 부모기일보 등 다양한 명목의 보가 있었다.
법정 이자율은 연간 3.34리로 쌀 15두에 5두, 포 15필에 5필이었다. 그런데 사원과 농민 사이에는 경제적 예속관계가 있었기 때문에 속인이 운영하는 고리대보다 고율이 되는 수도 있었으며, 강제성마저 띠어 백성들에게 피해를 주기도 하였다. 예컨대 명종 때 어떤 승려는 질이 나쁜 종이와 포를 강제로 백성에게 떠맡겨 이익을 챙겼다고 한다. 만종과 만전도 50여 만석을 대여한 후 재촉하는 바람에, 백성들이 남은 곡식이 없어 국가에 조세를 바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한다. 고리대를 통해서 사찰이나 승려가 백성의 잉여물을 철저히 흡수하고 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양인농민의 고리대를 갚지 못해 이자가 계속 늘어갈 경우, 토지나 노비를 팔아 변제하거나 처자를 팔아서 해결하였다. 심한 경우에는 도망가거나 노비가 되었다. 송광사 주지인 진각국사 혜심은 지나친 고리대 행위로 인해 부자는 더욱 부자가 되고 가난한 자는 더욱 가난한 자가 된다고 보았다. 그렇지만 그는 고리대 자체를 죄악시하지는 않았다. 다만 탈법적인 고율의 고리대를 문제 삼았을 뿐이었다.
경제력에 바탕한 사회적 영향력
사찰은 이러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조형미가 뛰어난 불상과 불탑을 조성하였고, 화려한 불화를 남길 수 있었다. 또한 승려들은 생산활동에 직접 참여하지 않고 종교적 수행에 몰두할 수 있었다.
사원과 승려는 백성을 동원할 수 있는 능력과 자위조직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외침이 있을 때 크게 활약할 수 있었다. 거란 침입을 막는 데 승려들의 활약이 컸고, 여진정벌시에는 별무반의 항마군으로 참전하였다. 또 몽고와의 항쟁 때는 승려 출신 김윤후가 몽고 장수를 사살하기도 하였다. 역사상 이런 사례는 허다하다.
그러나 모든 사찰의 경제기반이 같은 것은 아니었다. 규모가 작고 낮은 신분출신의 승려가 거처하는 사찰은 사정이 달랐다. 이들은 생계를 위해 직조와 농경에 종사하였으며, 직접 상업에 종사하기도 하였다. 처자를 거느리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당시 불교계는 상당한 재력을 소유한 사원이나 그 소속 승려가 주도하고 있었다. 이처럼 고려시대 사원은 상당한 경제력을 가지고, 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는 사원의 경제력은 크게 축소되었고, 승려의 지위나 사회적 영향력도 크게 위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