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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170
10월2일 [수호천사 기념일/연중 제26주간 수요일]
※수호천사는 사람을 선으로 이끌며 악으로부터 보호하는 천사다. 교회의 전승에 따르면, 주님께서는 누구에게나 천사 한 분을 정해 주시어 그를 지키고 도와주게 하신다. 하느님의 사랑이다. 다음은 수호천사에 관한 『성경』의 표현들이다. “그분께서 당신 천사들에게 명령하시어, 네 모든 길에서 너를 지키게 하시리라.”(시편 91〔90〕,11) “저를 모든 불행에서 구해 주신 천사께서는 이 아이들에게 복을 내려 주소서”(창세 48,16).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마태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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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영적인 눈을 뜨게 될 때 우리는, 그간 한번도 맛보지 못했던 은총과 축복을 선물로 받게 될 것입니다!>
연세 지긋하신 한 할머님께서 백내장·녹내장이 동시에 와서 큰 고생을 하셨습니다. 사람 얼굴이나 사물이 부옇게 보이고, 촛점도 안 맞춰지니, 너무나 답답하셨던 나머지, 큰 마음 먹고 수술을 하셨습니다.
수술 결과는 대성공이었습니다. “이렇게 잘 보이는 걸, 진작에 할걸!”하는 후회가 막심했습니다. 흐릿하게 보이던 손주·손녀들 얼굴도 또렷하게 보이니 너무 좋았습니다. TV 드라마 보는 재미도 훨씬 커졌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화장실로 들어가신 할머님께서 세면을 하고 난 후, 거울에 비춰진 자신의 얼굴을 본 순간, 깜짝 놀란 나머지 뒤로 넘어질 뻔 하셨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처음에는 너무나 낯설어 도둑이 들어왔나? 하는 생각까지 하셨답니다.
수술전 모든 게 흐릿하게 보일때만 해도, 그런데로 봐줄 만한 얼굴이었는데,
수술 후 눈이 밝아진 후 바라본 자신의 얼굴 위에는, 깜짝 놀랄 정도로 세월의 흔적이 얹혀져 있었던 것입니다.
너무나 크게 상심하신 할머님께서는 수술을 집도하신 의사 선생님을 찾아가 원상복구해 주시기를 부탁드려야 하나, 고민까지 하셨다는 슬픈 이야기입니다. ^^
적합한 비유인지 모르겠지만, 우리 역시 영적인 눈을 뜨면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영적인 눈을 뜨게 될 때, 그간 죽었다 깨어나도 보지 못했던 것들, 내 주변에 지천으로 널려있던 다양한 주님 은총의 손길, 그분으로부터 오는 축복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동시에 영적인 눈이 밝혀지면, 그간 보지 못했던 우리 자신의 철저한 나약함과 큰 결핍, 짙은 어둠과 숱한 죄들도 보게 될 것입니다.
영적인 눈을 뜨게 될 때, 얻게 될 유익함이란 상상을 초월할 것입니다. 그간 아니 계시는 듯, 너무 멀리 계시는 듯 느껴지던 주님께서 늘 내 지척에 현존하고 계심을 알게 될 것입니다. 성령과 성모님께서 내 인생길을 동반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영적인 시각이 회복되는 날, 또 한 가지 큰 축복이 우리에게 다가올 것입니다. 이 고되고 혹독한 지상에서의 여행길을 나 혼자 걷는 것이 아니라, 나의 수호천사가 늘 함께 걷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미처 의식하지 못하지만 우리의 수호천사는 마치 내가 직접 고용한 사설 경호원처럼 언제나 적극적으로 나를 밀착 수행하고 있습니다. 나를 갖은 위험에서 지켜주고 있으며, 그의 시선을 늘 나를 향해 있습니다.
우리는 자주 육적인 삶에 너무 푹 빠져 살아가다보니, 영적인 삶, 영적인 존재, 우리의 수호천사들을 도외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 영적인 삶, 영적인 존재, 영적인 세계는 존재합니다.
지금 우리가 너무 커져버린 나머지, 너무 높이 올라간 나머지, 너무 인간적·지상적 삶의 방식에만 몰두한 나머지, 또 다른 방식의 세계와 존재, 삶에 대한 감을 상실해버린 것입니다.
영적인 삶의 방식을 회복할 수 있는 방법은?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을 통해 그 길을 명확하게 제시하고 계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마태오 복음 18장 3~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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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늘 혼자라고 생각했었는데...>
험난한 이 세상, 혼자서 살아가기란 정녕 힘겹습니다. 다른 사람의 손길이 필요합니다. 곤경 중에 누군가의 손길을 청할 필요가 있습니다.
때로 아프면 누군가로부터 따뜻한 간호도 받을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런 것이 죽어도 싫습니다. 남한테 싫은 소리 죽어도 하기 싫고, 남한테 민폐 끼치기 죽어도 싫어하는 성격도 문제인 듯합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자기중심적이 되고, 자기 안에 갇히게 됩니다. 지속적으로 성장해야 할 자아나 관계성이 정체 혹은 답보 상태에 빠집니다.
나이가 들어가도 관계맺음방식이나 정신세계가 별로 확장되지 않습니다. 지나친 자기중심적 세계에서 헤어나지를 못합니다.
“세상에 믿을 사람은 없습니다! 나 자신밖에는. 보세요! 지금 이 모든 것 지금까지 끌고 오는 동안 그 누구도 내게 도움을 주지 않았습니다. 이 모든 것 내 힘으로 다 이뤘습니다. 나 혼자 다 했습니다!”
“내 인생이니만큼 나 혼자 모든 것을 책임지고 싶습니다. 제발 내 인생에 개입하지 마십시오. 부탁이니 날 좀 가만히 놔두세요!”
많은 시간 저도 이렇게 살아왔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상당히 위험한 생활방식인 것 같습니다. 어쩌면 크게 잘못된 사고방식인 듯합니다. 저도 한때 지나온 길을 돌아보며 나 혼자 걸어왔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무도 동반해주지 않는 외로운 길을 쓸쓸히 걸어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있습니다. 삶의 한 구비 한 구비 가만히 돌아보니 그 누군가의 소리 없는 배려 속에 지금까지 살아왔더군요. 생의 한 순간 한 순간을 되짚어보니 그 누군가의 열렬한 기도로 뒷받침되어 있더군요. 지나온 나날들 나 혼자 힘으로 버텨왔다고 생각했었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누군가가 늘 제 등 뒤에서 저를 받쳐주고 있었습니다.
그는 바로 하느님께서 제게 붙여주신 수호천사였습니다. 뒤돌아본 제 나날들, 그 어느 순간도 수호천사가 함께 하지 않은 걸음이 없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천사들에게 명령을 내리셔서 제가 가는 길목마다 지키게 하셨습니다. 죽음의 세력이 달려들 때면 어느새 주님의 천사들이 달려와 제 앞을 막아주었습니다. 사는 게 너무 고달파 주저앉고 싶을 때마다 든든하고 따뜻한 천사의 손길을 보내주셨습니다. 행여 돌부리에 넘어질세라 주님의 천사들이 절 떠받들어 주었습니다.
오늘은 수호천사 기념일입니다. 교회의 가르침에 따르면 수호천사는 우리 각자의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위해 하느님께서 우리 각자에 보내시어 짝을 맺어주신 영적 존재입니다. 본질상 나약하고 부서지기 쉬운 존재인 우리들, 유혹 앞에서 심하게 흔들리는 우리들을 위해 하느님께서 보내신 선물이자 친구가 수호천사입니다.
그들은 우리 일생 내내 우리와 함께 걸어갈 동반자이자 수호자입니다. 늘 우리 지척에서 생생하게 현존합니다. 우리와 함께 길을 같이 걸어왔고, 앞으로도 같이 걸어갈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 품에 영원히 안기는 순간까지 우리의 영적 도우미로 살아갈 고마운 존재입니다. 성 베르나르도 아빠스의 가르침에 따르면 수호천사는 이런 존재입니다.
“하느님 앞에, 험난한 세파 앞에 우리는 언제나 어린이와 같은 존재들입니다. 우리 앞에 가로놓인 길은 매우 멀고 또 먼 것만이 아니라 위험하기까지 하지만, 하느님께서 보내주신 수호천사들의 보호아래 있는 동안에야 아무것도 두려워 할 것이 없습니다. 수호천사들은 충실하고 슬기로우며 능력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두려워할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는 다만 그들을 뒤따르고 그들에게 매달리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보호 밑에 머물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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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 나를 수호천사로 만드는 ‘바라봄의 법칙’>
선조 16년 율곡 이이는 외세의 침입에 대비해 십만 명의 군사를 양성야 한다는 개혁안을 내었습니다. 선조가 이를 묵살한 탓에 임진왜란이 발발하였을 때 수많은 인명과 재산 피해를 고스란히 받아야 했습니다. 물론 자신은 도망 다니기 급급하였습니다.
선조는 조선건국 이래 처음으로 적통 출신이 아닌 왕이었습니다. 중종의 후궁인 창빈 안씨가 낳은 덕흥대원군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러니 끊임없이 자신의 불안한 왕권을 지키기에 급급하였습니다.
선조는 자신의 왕권을 위협할 수 있는 모든 이들을 제거하려 했습니다. 우선 선조는 임진왜란 때의 영웅 이순신을 역사에서 지우려고 하였습니다.
이순신만이 아니라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류성룡 등도 은근히 미워하였습니다. 전라도의 탁월한 의병장 김덕령 장군도 미운 털이었습니다.
어쩌면 이순신이 전쟁에서 죽지 않았어도 선조에게 죽었을 것입니다. 선조가 육전의 영웅 김덕령을 이몽학의 역모에 엮어 사형에 처해 버린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왜 나라를 보호하고 이끌어야 하는 왕이 오히려 그런 도움을 주는 사람들을 제거하려 했을까요? 자기 걱정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불안하면 누구도 도울 수 없습니다. 자신도 바로 서지 못하는 아기가 어떻게 남을 잡아줄 수 있겠습니까? 비틀거리면 잡히는 무엇이나 자신이 설 수 있게 만드는 도구로 만듭니다. 이런 사람은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오늘은 우리 각자를 지켜주시는 수호천사님들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안위를 잊고 우리 안위를 위해 희생 봉사하는 이들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작고 힘없는 사람들을 업신여기지 않도록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
여기서 관심을 가져야하는 것은 수호천사들의 시선입니다. 수호천사의 시선은 자기 자신에게 있지 않고, 또 자신이 보호해주어야 하는 사람들에게 있지도 않습니다.
수호천사들의 눈은 하느님의 얼굴을 향해있습니다. 우리도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려면 이와 같아야합니다.
카나의 혼인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졌을 때 성모님은 누구를 바라보고 있었을까요? 포도주가 떨어져 쩔쩔매는 혼인잔치를 준비한 이들을 바라보고 있었을까요?
아닙니다. 그것은 흘깃 보는 것으로 족합니다. 그 포도주를 채워줄 분을 바라보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을 보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러니 부족한 포도주가 채워졌습니다.
마찬가지로 가족을 지키고 싶다면 가장은 가족의 부족한 것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 부족한 부분을 채워줄 수 있는 하느님을 한없이 바라봐야 합니다. 참으로 가족을 보호하고 싶다면 누구에게서 도움이 올 수 있는지를 알아야합니다.
선조처럼 정작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들을 내쳐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바라봄의 법칙’의 저자 주대준씨는 거제도 섬 소년이었다가 청와대경호실 차장을 지낸 인물입니다. 정보화 불모지였던 청와대에 들어가 경호 시스템을 IT로 변화시켰고, 탁월한 리더십으로 경호실 사람들의 학업 수준을 엘리트로 바꾸어 놓은 업적이 있습니다.
그가 이런 꿈을 이루게 된 것에는 ‘바라봄의 법칙’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경남 산청군 산골마을에서 태어나 부모님의 갑작스런 사업실패로 거제도로 가게 된 저자는, 아버지의 병치레와 죽음으로 초등학교 때부터 고학을 해야만 하는 처지에서도 결코 좌절하지 않고 긍정의 모터를 단 사람처럼 늘 탱크같이 전진했습니다.
그가 그렇게 전진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바로 ‘주 씨 아저씨’가 있었습니다. 저자는 처음 교회에 갔을 때 교회 문 위에 걸려 있는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는 현판을 보고 예수님의 성이 자신과 같은 주 씨인 줄 알고 단번에 친근감을 느꼈고, 주 씨 아저씨를 평생의 멘토로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평생의 멘토를 만난 저자는 늘 하느님을 바라보고 전진해, 마침내 바라보고 바라봤던 청와대에 입성하게 된 것입니다.
선조는 자신만 바라봤습니다. 그 이유는 누구도 자신을 지켜줄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바라보면 자신에 대해 걱정하지 않게 되고 그 에너지를 이웃을 위해 쏟을 수 있게 됩니다.
주대준 씨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분을 바라보며 기도하면, 내 안에 있는 ‘안 된다’, ‘어렵다’, ‘불가능하다’, ‘포기하고 싶다’는 부정적인 생각들이 달아났다. 그분은 사막에서도 강을 내시고 광야에서도 물을 내시는 분이 아니던가. 내가 요행을 바라지 않고 그분의 뜻대로 한 걸음 한 걸음 살아갈 수만 있다면, 내 가 품은 꿈도 반드시 이루어지도록 그분이 도와주실 것이라는 확신이 찾아왔다.
그리고 그 확신은 현실로 이루어져 나갔다. 이른바 ‘입을 벌려 기도하고 바라보면 바라보는 만큼 채워주시는 하느님’을 체험을 통해 ‘바라봄의 법칙’을 확립하게 된 것이다.”
주님만을 오로지 신뢰하는 마음으로 바라봅시다. 그러면 나에 대한 걱정이 사라집니다. 나에 대한 걱정이 사라질 때 이웃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누군가의 수호천사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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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8,1-5.10: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라
오늘 교회는 수호천사 기념일을 지내고 있다. 수호천사는 하느님의 뜻에 따라 각 사람에게 파견되어 그를 악으로부터 보호해주고 선을 행하도록 이끌어주는 사명을 가지고 있는 천사이다. 예수께서는 그러므로 아무도 업신여기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하시는 것이다. “너희는 이 보잘것없는 사람들 가운데 누구 하나라도 업신여기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하늘에 있는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를 항상 모시고 있다는 것을 알아두어라.”(10절)
제자들은 예수님께 “하늘 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위대합니까?”(1절)라고 묻는다. 이 ‘하늘나라’가 하느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교회를 말하는 것이냐, 아니면 어린이들처럼 처신할 때 장차 들어갈 수 있는 하느님의 나라인지는 굳이 구분할 필요는 없다. 둘 다 해당되는 것이다. 이때에 예수께서는 어린이 하나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는, 제자들처럼 자신을 높이지 말고 어린이들처럼 자신을 낮추어야만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신다. 오직 일정한 자격을 갖춘 사람만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말씀이다.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겸손을 촉구하신다. “하늘 나라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은 자신을 낮추어 이 어린이와 같이 되는 사람이다.”(4절)
그러면서 또한 예수께서는 사회로부터 버림받고 소외된 자들을 예수님의 처신과 명령, 즉 ‘예수님의 이름으로’(5절) 불쌍한 어린이, 도움을 필요로 하는 고아 같은 어린이를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것이 바로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신다. 예수께서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한 선행이 바로 당신 자신에게 베푼 선행으로 간주하신 ‘최후의 심판 설교’(마태 25,31-46)를 연상케 한다. 물론 이 구절이 앞의 내용, 즉 겸손과는 별로 상관이 없는 것 같아도 마태오는 여기에 수록을 하고 있다. 아마 그것은 이러한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것도 자기 자신을 그만큼 낮추지 못하면 진정한 사랑을 줄 수 없기 때문에 여기에 수록하고 있을 것이다.
“이 보잘것없는 사람들”(10절)은 마르코 복음에서는 예수님을 가까이 따르던 제자들이었다. 그러나 여기서는 마태오 교회의 미천한 교우들을 가리킨다. 그들의 그리스도 신앙을 무너뜨려서도 안 되고 그들을 업신여겨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바로 그러한 사람들을 염려하는 천사들이(토비 5,6-7.22; 사도 12,15)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를 항상 모시고 있기”(10절) 때문이다. 이 천사들은 하느님 가까이서 시중드는 매우 높은 천사들이다.
이 천사들은 보잘것없는 이들을 위해 하느님의 도움을 청하기도 하고 그들을 업신여기는 자들을 하느님께 고발하기도 하는 자들이다. 우리 자신을 우리 스스로 낮추어 겸손한 자세를 가지고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도록 하고, 또한 우리가 우리 형제를 업신여김으로써 또한 그들을 창조하신 하느님까지 멸시하는 결과를 초래해서는 안 될 것이다. 눈에 보이는 인간은 바로 보이는 하느님이라는 것을 생각하고 받아들이고 사랑할 수 있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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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오늘의 묵상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대구 대명성당 이성근 사바 신부님]
오늘 루카 복음은 예수님의 공생활 중 두 번째 단계인 예루살렘으로 가는 여행이 시작되는 단락입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래아에서 요르단강 지역을 거쳐 예루살렘으로 가신 것으로 전하는 마르코나 마태오와 달리, 루카 복음사가는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지방을 거쳐 가시는 것으로 묘사합니다.
그것은 루카 복음사가가 가지고 있던 선교에 대한 관심을 드러냅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지방을 거쳐 가시면서, 이방인 취급을 받던 사마리아인들에게 직접 복음을 선포하셨다고 전함으로써, 성령 강림 이후 초대 교회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될 이방인 선교의 근거를 마련하고 있습니다.
기원전 722년 아시리아가 북이스라엘 왕국을 패망시킨 다음, 사마리아로 사람들을 유배시키고, 이방 민족들을 그곳으로 이주시킴으로써, 사마리아는 민족적으로나 종교적으로 혼합 민족이 되었습니다. 유다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다른 이방인보다는 조금 더 가깝게 생각했어도, 절대 동족으로 여기지 않았고, 이방인으로 멸시하였습니다.
사마리아에 들어서신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가신다는 이유로 고을 사람들에게 냉대를 받습니다. 이에 화가 난 제자들은 하늘에서 불을 내려 그 사람들을 불살라 버리고자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꾸짖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심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용서하러 오셨고, 세상을 벌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구원하러 오셨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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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나의 수호천사는 어디에 있는가?>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마태 18,10)
여기서 ‘작은 이들’은 “나보다 힘이 약하고 낮은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고, ‘천사들’은 수호천사들입니다. 그리고 천사들이 하느님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는 말씀은, ‘작은 이들’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수호천사들이 곧바로 하느님께 보고를 드린다는 뜻인데, 하느님께서 언제나 항상 ‘작은 이들’을 보살펴 주신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 말씀이 가해자 쪽에 있는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이라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작은 이들을 괴롭히는 일은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일이고, 사실상 하느님을 거스르는 일이라는 경고 말씀입니다. (‘작은 이들’ 입장에서 생각하면, 하느님께서 항상 보호해 주신다는 격려와 위로 말씀이 됩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각자의 수호천사가 있다는 것이 우리 교회의 믿음입니다. 내가 ‘작은 이들’을 괴롭힐 때 그들의 수호천사는 그 일을 즉각 하느님께 보고 드리는데, 그때 나의 수호천사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그러면 안 된다고 나를 타이를 것입니다. 따라서 ‘작은 이들’을 괴롭히는 일은 하느님을 거스르는 일이면서 동시에 나의 수호천사를 거스르는 일이 됩니다. ‘작은 이들’을 괴롭히는 죄뿐만 아니라, 모든 죄가 다 그렇습니다. 무슨 죄든지 간에 수호천사는 내가 죄를 지을 때마다 그러지 말라고 타이를 것입니다. (수호천사가 죄 자체를 막아 주지는 않습니다. 선택은 내가 하고, 책임도 나에게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수호천사를 ‘보호자’로만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어떤 힘든 일을 만나면, “나의 수호천사는 어디에 있는가?” 라고 물으면서 찾습니다. 극적으로 위기를 피하면 수호천사가 도와주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냥 내가 운이 좋았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다가 위기를 피하지 못하고 불행한 일을 당하고 말았을 때에는 도와주지 않은 하느님과 수호천사를 탓하기도 합니다. 잘된 일은 내가 잘해서 그런 것이고, 잘못된 일은 수호천사가 직무 수행을 제대로 하지 않은 탓인가? (아슬아슬하게 교통사고를 피했을 때의 상황이 좋은 예입니다. 수호천사가 도와주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하느님께 감사드리면서 더욱 조심스럽게 운전하지만, 운이 좋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감사드리는 마음이 없으니 그 삶에 변화가 없습니다. 만일에 자기가 신호위반과 속도위반을 하고, 음주운전을 해서 사고가 났다면, 그래도 수호천사가 도와주지 않았다고 탓할 것인가?)
하느님께서는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민족에게, “보라, 내가 너희 앞에 천사를 보내어, 길에서 너희를 지키고 내가 마련한 곳으로 너희를 데려가게 하겠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탈출 23,20) 이 말씀은 사실상 “내가 너희를 항상 지켜 주겠다.”라는 약속입니다. 우리는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를 탈출한 뒤에 어떤 죄들을 지었는지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조금만 힘들어도 불평했고, 반항했고, 모세가 십계명을 받으려고 잠시 그들 곁을 떠나 있었을 때에는 우상숭배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그들이 그런 죄를 지은 것은 하느님의 보호를 거절한 일과 같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항상 지켜 주겠다는 약속의 말씀을 하신 다음에 바로 “너희는 그 앞에서 조심하고 그의 말을 들어라. 그가 너희 죄를 용서하지 않으리니, 그를 거역하지 마라.”라는 말씀도 하셨습니다.(탈출 23,21) 이 말씀은 사실상 “나를 거역하지 마라.”라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보호를 받고 싶다면, 또는 하느님께서 보내신 수호천사의 보호를 받고 싶다면, 하느님을 거역하면 안 됩니다. 항상 하느님 뜻에 합당하게 살 때에만 수호천사의 도움과 보호를 요청할 자격이 생깁니다.
물론 우리가 살면서 겪는 모든 고통과 불행이 항상 ‘죄 때문에’ 생기는 것만은 아니고, 죄와 상관없이 일어나는 일들도 많습니다. 살다보면 정말로 억울한 일들과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당할 때가 있는 것이 인간 세상의 현실입니다. 그런 ‘고통’도 하나의 ‘신비’(미스터리)입니다. 그래서 그런 고통 속에 들어 있는 하느님의 뜻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모른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그런 고통들을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숙제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서로 사랑을 실천하라는 숙제.
‘작은 이들’과 수호천사에 관한 예수님 말씀은, 최후의 심판 이야기에 있는 다음 말씀들에 연결됩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해 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마태 25,45)
이 말씀들을, “너희는 작은 이들에게 수호천사가 되어 주어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도와주고 보호해 주는 수호천사를 보내주셨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우리 각자가 서로에게 수호천사가 되어 주기를 바라신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어떤 일을 당한 사람이 “나의 수호천사는 어디에 있는가?”라고 묻는다면, 답은 “지금 네 곁에서 너를 도와주는 ‘그 사람’이 바로 너의 수호천사다.”입니다. 힘들고 어려운 어떤 일을 당했을 때 나를 도와주는 그 사람이 나의 수호천사이고, 내가 외롭고 슬플 때 내 곁을 지켜 준 그 사람도 나의 수호천사이고, 죄를 지을 때 그러면 안 된다고 나에게 충고하는 그 사람도 나의 수호천사입니다. 그것을 믿는다면, 우리가 할 일은 우리도 그렇게 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마태 7,12)
수호천사가 도와주기를 바란다면, 먼저 남에게 수호천사가 되어 주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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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김강정 시몬 신부님]
<나의 수호천사>
보좌시절, 주임 신부님으로부터 배운 기도문이 있습니다. 신부님은 가정방문을 나가시면 꼭 이 기도를 바치곤 하셨습니다.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천주여, 하늘로부터 주의 거룩한 천사를 보내주시어, 이 집에 사는 모든 이를 찾아주고, 지켜주고, 도와주고, 돌보게 하소서.”
이 기도를 통해 신부님은 저로 하여금 까맣게 잊고 지내던 천사의 존재를 일깨워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을 세상에 보내실 제 영적인 짝을 맺어주셨다는 사실과, 그가 전령이 되어 하느님의 은총을 배분하고 우리의 바람을 전구하며, 죽는 날까지 곁에 머물러 함께한다는 신앙. 이 믿음 앞에 오래도록 행복한 이유는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이 더욱 크신 까닭에서입니다.
“인간이 무엇이기에 아니 잊으시옵고 그 종락 무엇이기에 따뜻이 돌보시나이까”라는 시편의 말씀을 곱씹으며, 또 한 번 하느님의 사랑에 깊은 감동을 받습니다.
오늘도 수호천사가 나를 지켜주고 있다는 믿음이 제 삶에 힘을 실어줍니다. 비록 보이지 않고 볼 수는 없어도, 그 손길이 내내 우리를 지켜주고 있다는 믿음만으로 행복합니다.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알뜰히 기도해줄 나의 수호자, 오늘은 그를 위해 조용히 기도하고 싶습니다.
지금 이 순간도 수호천사는 나와 함께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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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심수녀회(가톨릭대 종교학과 교수) 최혜영 수녀님]
<하느님의 천사>
일본의 저명한 철학자 이나가키 료스케 교수의 <천사론>(김산춘 역, 성바오로,1999)을 읽어 보면, 천사는 신화나 동화, 혹은 문학이나 예술의 영역에 속한다는 기존의 관념과는 달리 토마스 데 아퀴노의 천사론을 바탕으로 학문적으로 천사론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인간 이해를 위해 원숭이 연구가 버젓이 학문의 세계에 시민권을 취득했는데 천사에 대한 연구가 왜 학문의 대상이 될 수 없느냐는 것이 저자의 반박입니다.
저로서도 별로 생각한 바는 없었지만, ‘신체 없는 정신’ 곧 인간 지성보다는 상위의 지성적 존재로서 순수한 정신적 존재인 천사에 대한 연구가 원숭이에 대한 연구보다 중요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없는 것 같습니다.
성경에서는 천사의 존재가 종종 등장을 하는데, ‘천사’(그리스어로 ‘앙겔로스)라는 말은 ‘사자(使者)’ ‘고지자(告知者)’로 번역될 수 있으며, 하느님 말씀이나 뜻을 전하는 자, 곧 하느님께 봉사하고 하느님의 메시지를 인간에게 전하며 하느님의 명령을 실행에 옮기는 천상적 존재를 가리킵니다.
하느님에 의해 창조된 천사들은 그리스도에 의한 구원의 계획과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해 왔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가브리엘(하느님의 사람·영웅·힘이란 뜻) 천사는 루카 복음서 1장에서 요셉의 약혼녀 마리아에게 예수님의 탄생을 예고하는 역할을 하였고, 라파엘(하느님이 고쳐 주셨다는 뜻) 천사는 토비트 5장에서 늙은 아버지 토비트의 명을 받고 메디아로 여행을 떠나는 토비아에게 자청하여 동반자가 되어줍니다.
다니엘서 10장에는 미카엘(누가 하느님 같으랴는 뜻) 천사가 이스라엘인들의 수호자로 나타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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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당신과 나 – 나의 수호천사가 된 아버지를 느끼며>
마태오 18,1-5.10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 작은이들을 업신여기지 마라)
그때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하늘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큰 사람입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어린이 하나를 불러 그들 가운데에 세우시고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 또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
<당신과 나 – 나의 수호천사가 된 아버지를 느끼며>
당신은 이제
내 곁에 없어요
나는 이제
당신 곁에 없어요
하지만 당신은 단지
내 곁에는 있을 수 없을 뿐이에요
하지만 나는 단지
당신 곁에는 있을 수 없을 뿐이에요
왜냐하면 당신은 다만
내 안에만 있을 수 있으니까요
왜냐하면 나는 다만
당신 안에만 있을 수 있으니까요
그러니 당신은 이제
내 안에 있어요
그러니 나는 이제
당신 안에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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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조창현 클레멘스 신부님]
+ 조 두레박 신부의 영적일기
<사랑하는 일….>
태풍의 영향으로 비가 쏟아지는 이 새벽녘에...자비를 베푼 이와 자비를 기억하는 이, 두 사람이 그리운 날입니다. 나는 내가 받은 자비를 기억하고 있습니까? 그리고 자비를 베풀 기회를 놓치지 않았는지요? 그 기회는 많이 주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만나고 있는 그 사람에게 작은 자비라도 베푼다면 고운님들은 천사를 대접한 것입니다. 보고 싶은 두 사람이 그리운 날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어린이 하나를 불러 그들 가운데에 세우시고 이르셨습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예수님께서는 저희에게 “어린이처럼 되어라.”라는 것입니다. 분명히 주님의 이 말씀은 “저희가 나약하기에 귀찮을 정도로 하느님을 붙잡고 매달리면서 끊임없이 기도하며 하느님의 뜻을 찾아라.”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입을 크게 벌려 “하느님, 어찌해야 해야 합니까?”라고 하느님의 지혜를 청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야 만이 조금 더 좋은 것을 보고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하느님께서 어린이처럼 되어 살아가려고 애쓰는 고운님들을 위해 보내주신 수호천사 기념일입니다. 시편 91편 11-12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분께서 당신 천사들에게 명령하시어 네 모든 길에서 너를 지키게 하시리라. 행여 네 발이 돌에 차일세라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쳐 주리라.”
그러면 91편 10절에 같은 일이 온답니다.
“너에게는 불행이 닥치지 않고 재앙도 네 천막에는 다가오지 않으리라.”
이런 위대한 수호천사들의 보호 아래에 있는 동안 두려워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다만 우리는 수호천사들을 뒤따르고, 그들에게 매달리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보호 밑에 머무르는 은총이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고운님들!
일보다, 사람 만나는 일보다 힘든 것이 사랑하는 일입니다. 일할 때는 1번 기도하고, 사람 만날 때는 2번 기도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날 때는 3번 기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참아주고 배려하고. 자신은 낮추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사랑하고, 사랑받는 방법은 ‘섬기고 낮추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
결국, 예수님 십자가 곁에는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께 사랑받은 사람만 남아있었음을 기억합니다. 그래서 사랑하고, 사랑받으면 두려움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어느 시인이 고백한 시의 한 구절입니다.
“돌아보니 발자국, 자국마다 모두 하느님의 은총이었네.”
고운님들이 어렵고 고통스러울 때, 어떻게 헤쳐 나왔는지를 돌이켜보면, 신기하게도 누구의 도움을 받게 된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우리의 삶 안에서 수호천사들을 만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고운님들이 다른 사람의 수호천사 역할을 하며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기도 합니다. 이렇게 언제나 고운님들을 도와주시는 하느님께 대한 굳은 믿음으로 기쁘고 행복하게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 수호천사에게 바치는 기도*
언제나 저를 지켜주시는 수호천사님!
인자하신 주님께서 저를 당신께 맡기셨으니 오늘 저를 비추시고 인도하시며 다스리소서. 아멘
영적일기를 마무리하면서….
수호천사 기념일에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3번 기도하는 날이 되시고, 물처럼 살아가면서 못하실 것이 없으신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고운님들의 몸과 마음이 치유되는 은총이 있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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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를 단단해지게 하는 시편(272)
♧♧ 시편 52편 3절….
"하느님의 자애가 한결같은데 권세가야, 너는 어찌하여 악을 자랑하느냐?"
* 하느님의 자애가 한결같은데...
악인의 악한 행위를 문책하는 구절 속에서 갑자기 나타나는 이 문장에 대해 의견이 분분합니다. 대부분 이 문장을 ‘왜 하느님의 자애하심을 거역하여 악을 행하는가?’로...또한 ‘왜 항상 악만 행하는가?’ 라는 의미로 옮기고 있습니다. 이로 볼 때, ‘하느님의 자애가 한결같은데...’라는 말은 하느님의 자애(히브리어, 헤세드)로 오래 참으시어 당장 악을 징벌하지 않으시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끝내 악한 행위를 그치지 않는 악인을 향한 질책의 뜻을 담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 권세가야...
이는 구체적으로 사울의 목자들 가운데 우두머리(牧者長)이요 신하인 도엑을 말합니다.(사무엘 상권 21장 8절, 22장 9절. 참조) ‘권세가...’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기보르’는 본래 ‘영웅’을 뜻하는데, 이 구절에서 이 말을 도엑에게 적용한 것은 일종의 조소적(비웃는)인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편 시편 52편은 다윗이 사울에게 박해를 받을 때 쓴 8편의 시편들(7, 34, 52, 54, 56, 57, 59, 142편)중의 하나입니다. 그리고 이 시편의 배경이 되는 성경은 사무엘 상권 21장 1-7절과 22장 9-19절입니다. 다윗은 사울의 핍박을 피하여 떠돌아다니던 중 놉의 사제 아히멜렉을 찾아가 도움을 받습니다. 그때 아히멜렉은 사울 임금의 사위인 다윗에게 거룩한 빵과 성전에 보관하고 있던 필리스티아 사람 골리앗의 칼을 주었습니다. 아마도 아히멜렉의 생각에는 임금의 사위인 다윗을 후하게 대접하는 것이 사울을 후하게 대접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입니다.(사무엘 상권 22장 14절. 참조) 하지만 사울의 신하 중 도엑이 이 일을 사울에게 일러 바쳤습니다. 그러자 사울은 아히멜렉을 반역죄로 몰라 그와 놉의 사제들을 죽이게 했으며, 이에 도엑은 85명의 사제들을 죽였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다윗은 도엑을 가리켜 ‘권세가야’라고 부른 것입니다.
* 너는 어찌하여 악을 자랑하느냐?
‘악...’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라아’는 ‘악한 계획’ 또는 ‘재앙’을 뜻합니다. 이는 구체적으로 도엑이 사울에게 아히멜렉이 다윗을 도운 사실을 고발하고 놉의 사제들을 죽인 죄악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자랑하느냐?’ 라는 말은 ‘말’과 ‘행동’을 통하여 자신을 드높이는 행위를 말합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도엑이 불의한 혀를 놀려 다윗을 친절하게 잘 대접한 이를 죽게 만든(4절) 자신의 죄악 된 행위를 회개하기 보다는 오히려 자랑스럽게 여길 정도였음을 강조하기 위하여 반대되는 말을 쓴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 시편 52편 4절….
"거짓을 일삼는 자야 너는 파멸을 꾸미고 네 혀는 날카로운 칼과 같구나."
* 거짓을 일삼는 자야 너는 파멸을 꾸미고...
악인의 혀는 악에 사로잡혀 파멸을 꾸미기에 바쁘다.(시편 51편 19절. 참조) 도엑은 불의하게 혀를 놀려 다윗을 친절하게 잘 대접한 아히멜렉의 선을 반역이라는 악으로 바꾸어 사울에게 고해 바쳤습니다.(사무엘 상권 22장 9-10절. 참조) 이처럼 같은 혀를 가지고서 사람들은 선한 말을 하며 하느님을 찬양할 수도 있지만, 정반대로 악을 꾀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기에 야고보 사도는 “혀도 불입니다. 또 불의의 세계입니다. 이러한 혀가 우리의 지체 가운데에 들어앉아 온몸을 더럽히고 인생행로를 불태우며, 그 자체도 지옥 불로 타오르고 있습니다."(야고보서 3장 6절)라고 조심하고 경계하였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사실을 깨닫는 우리는 삼가 조심하고 경계하여 항상 선한 마음에서 나오는 선한 말만을 할 수 있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 네 혀는 날카로운 칼과 같구나...
날카로운 칼은 머리를 깎는 데 쓰는 예리한 칼입니다.
다윗은 사람의 혀도 불의하게 놀릴 경우 날카로운 날을 가진 날카로운 칼와 같아서 죄 없는 의인을 해치는 위험한 무기(시편 57편 5절. 참조)와 같은 것이 될 수 있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말에 실수가 없는 자가 되기 위해 무릇 제어할 것보다 먼저 자신의 마음과 입술을 제어해야 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야고보서 3장 2절.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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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소위 벼락부자가 된 사람들을 매스컴에서 종종 봅니다. 복권 당첨, 주식 투자, 땅값 상승 등의 이유로 벼락부자가 되었다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 중 90% 이상이 망해서 그전보다 더 안 좋은 생활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학자들은 이들의 공통점을 연구했습니다. 그 공통점은 교육수준이 낮고, 책을 잘 읽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교육은 앎을 통해 세상에 대한 견문을 넓혀줍니다. 그런데 교육수준이 낮으면 좁은 시각으로 인해 더 높은 이상을 추구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모험을 즐기게 됩니다. 물론 모험정신이 나쁜 것은 아니지요. 하지만 견문이 좁아서 무모한 모험을 하더라는 것입니다. 교육의 목적은 단순히 좋은 성적을 받아 좋은 대학이나 회사에 들어가는 것만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사회에 온전히 설 힘을 기르고 세상에 유용한 사람이 되는 것이 교육의 목적입니다.
따라서 학교에 가고 학원에 가서 교육을 받는 것만이 그 목적에 부합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요. 이웃과 만남 그리고 지금 하는 일 등에서 의미를 찾는 것 역시 나의 견문을 넓히는 또 다른 훌륭한 교육이 될 수 있습니다. 내 삶의 자리는 이렇게 훌륭한 교육의 장입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곳에 이웃이 있고, 내가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자리를 소홀히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부정적인 생각을 내세워서 미워하고 단죄한다면 어떨까요? 이웃이 아니라 원수가 될 것이며, 기쁜 일이 아니라 짜증 나고 힘든 일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은 사람을 선으로 이끌며 악으로부터 보호하는 수호천사 기념일입니다. 주님께서는 누구에게나 천사들을 보내시어 그를 지키고 도와주도록 명령을 내리셨지요. 그 천사가 바로 내가 만나는 사람입니다. 나의 부정적인 생각들이 그 천사를 못 만나게 하고 내 삶을 엉망진창으로 만드는 것이 아닐까요? 자신이 만난 많은 사람을 떠올려 보십시오. 하루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을 만납니까? 나를 웃게 해주었고, 기쁘고 행복한 의미 있는 하루를 만들어 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사람을 부정적인 생각으로 받아들이면 어떨까요? 의미 있는 하루가 아닌 최악의 하루를 만들게 될 것입니다. 사람과의 만남을 허투루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 수호천사를 만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그 만남의 의미를 넓혀야 합니다. 그런 만남 안에서 나의 견문이 넓어지면서 이 세상의 삶을 더 큰 기쁨과 행복의 장으로 만들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오늘, 천사를 만나는 기쁨의 날로 만드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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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의 사랑}
여러분의 자녀가 국어 95점, 사회 90점, 생물 70점, 수학 30점인 성적표를 받아왔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과목에 가장 먼저 눈이 가세요? 그리고 어떤 과목에 대해서 자녀와 오랫동안 대화를 나누시겠습니까? 실제로 미국에서 이런 문제에 관해서 연구했습니다. 77%의 부모들은 가장 먼저 눈이 가고 또 가장 오래 대화할 수밖에 없는 과목으로 성적이 좋지 않은 수학을 선택했습니다.
반면에 최고점을 받은 국어의 성적에 주목한 부모는 단 6%에 불과했습니다. 그렇다면 77%의 부모는 왜 수학을 선택했을까요? 자기 자녀의 약점을 보완해야 성적이 올라가고 좋은 대학에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6%의 부모는 자녀의 장점을 또 자녀의 긍정적인 모습을 사랑으로 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떤 부모가 자녀와의 관계가 좋을까요? 77%의 부모가 아닌, 6%의 부모가 자녀들과의 관계가 너무나도 좋았습니다. 정작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다시금 생각해 봅니다.
살다 보니 성적보다 더 좋은 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 사랑의 관계가 아닌가 싶습니다. 즉, 좋은 관계가 유지되지 않은 상태에서 성적이니 재물이니 지위니 하는 모든 것들은 별 것 아닙니다. 77%의 눈에 보이는 문제에만 급급한 우리가 아닌, 6%의 사랑을 먼저 생각하는 우리가 되기를 소망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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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신학생들을 위해서 30일 피정을 함께 했었습니다. 지금은 멀리 있어서 하지 않지만 제게는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신학생들과 면담을 하고, 피정에 집중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습니다. 피정하는 주체는 신학생이고, 피정을 이끄시는 분은 하느님이시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했습니다. 제가 힘을 주고, 제 뜻대로 신학생을 이끌려고 하면 저도 힘들었고, 신학생도 능동적으로 참여하지 못했습니다. 신학생들을 믿고, 격려하고, 피정에 집중할 수 있도록 기도하면 저도 힘이 덜 들었고, 신학생들이 변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30일 피정을 마친 신학생들은 부제 서품을 받습니다. 부제님들은 외부 사제들에게 영적 지도를 청할 수 있었습니다. 저와 함께 피정했던 부제님들이 저를 찾아온 곤 했습니다. 저도 선배로서 편하게 부제님들을 만났습니다. 책을 소개하기도 했고, 맛있는 식사를 하기도 했습니다. 부제님들도 피정 때보다 훨씬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논문에 관한 이야기, 사목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고백성사를 청하면 성사를 주었습니다. 제게 도움을 받으러 온 부제님들이었지만 저도 보람 있었고, 도움을 받았던 시간이었습니다.
오늘 제1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보라, 내가 너희 앞에 천사를 보내어, 길에서 너희를 지키고 내가 마련한 곳으로 너희를 데려가게 하겠다. 너희는 그 앞에서 조심하고 그의 말을 들어라. 그는 내 이름을 지니고 있다."
돌아보면 제게 하느님께서 보내 주신 천사와 같은 분이 많았습니다. 고등학교 때 신학교에 갈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신 본당 신부님이 계십니다. 신부님께서는 고집이 세신 아버님이 신앙에 충실할 수 있도록 설득하셨습니다. 오랜 시간 성당에 오지 않으셨던 아버님은 아들이 신학교에 가기 위해서는 성당에 와야 한다는 본당 신부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아버님은 이유를 불문하고, 다시금 신앙에 충실하셨습니다. 아버님은 저의 가장 든든한 후원자가 되셨습니다. 영적인 아버님이셨던 본당 신부님과 저를 낳아 주신 부모님께 감사드립니다.
2005년 캐나다에서 지낼 때입니다. 겨울은 길고 추웠습니다. 갑자기 찾아온 통풍으로 힘이 들었습니다. 14년이 지난 이야기입니다. 토론토의 추운 겨울을 따뜻하게 보낼 수 있도록 하느님께서는 천사 같은 분들을 보내 주셨습니다. 한인 성당 신부님은 매주 미사를 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습니다. 사제는 신자들과 함께 미사할 때 힘을 얻습니다. 차량 봉사를 해 주었던 부부도 있었고, 엠이 모임에 초대한 부부도 있었고, 필요한 반찬을 주신 부부도 있었습니다. 가장 고마웠던 건 1년 6개월 함께 지냈던 동창 신부님이었습니다. 서로 성격이 다르기에 힘든 점도 있었지만, 함께 했기에 즐거운 시간이 많았습니다.
2019년 뉴욕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신문사 옆에 있는 한인 성당 신부님께서는 식사에 초대해 주시고, 매주 미사를 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셨습니다. 길을 알려 주시는 분도 계시고, 법률적인 문제에 도움을 주시는 분도 계십니다. 미주 가톨릭 평화신문을 사랑하시고, 구독하시는 분은 모두 제게는 천사 같은 분입니다. 광고를 통해서 도움을 주시는 분, 후원 회원으로 도움을 주시는 분도 제게는 천사 같은 분입니다. 제가 잘 적응할 수 있도록 세심하게 배려해 주고, 안내해 주는 직원들도 제게는 천사 같은 분입니다.
저는 가브리엘 세례명을 좋아합니다. 가브리엘 천사는 하느님의 뜻을 전하였기 때문입니다. 천사는 하얀 옷을 입고, 날개를 달아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서에서 보면 천사는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야곱에게 나타나서 씨름하였습니다. 토비야에게 나타나서 길을 안내하였습니다. 마리아에게 나타나서 아이를 잉태할 것이라는 하느님의 뜻을 전하였습니다.
오늘 내가 전하는 따뜻한 말과 친절은 고통 중에 있는 이웃에게, 절망 중인 친구에게 위로와 힘을 줄 것입니다. 천사는 눈에 보이지 않는 모습으로 우리를 위해 기도하지만, 우리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기도할 수 있고,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바로 그런 우리들의 모습이 천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천사는 이렇게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뜻을 전하고, 하느님의 사랑을 나누고,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입니다. 어쩌다 한번, 잠시 천사의 모습으로 보일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항상 천사의 모습으로 사는 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 역시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영적인 사람, 천사가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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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1)
<이탈의 여정>
-사랑의 이탈, 이탈의 자유-
우리 믿는 이들의 삶은 집착에서의 이탈의 여정입니다. 끊임없이 자발적 사랑으로 비우고 버리고 내려놓고 오매불망 그리는 우리의 영원한 목적지 예루살렘을 향한 이탈의 순례여정입니다. 물로 여기서 말하는 바, 예루살렘은 우리의 영적 여정의 궁극 목적지 하느님의 집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을 비롯한 우리의 모든 성인들이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리워하듯 예루살렘을 사랑하고 그리워했습니다. 매일 미사를 통해 실현되는 새 예루살렘을 찾아 성전 미사에 참석하는 우리들입니다. 오늘부터 새롭게 시작되는 제1독서 느헤미야기입니다.
오늘 느헤미야기 상황은 기원전 445년전 일이니 무려 거의 2500년 일입니다. 느헤미야 예언자는 당시 유배자로 페르시아에 궁궐에서 임금의 신뢰를 받는 중요한 인물이었습니다. 흡사 창세기 이집트의 요셉을 연상 시키는 참 호감이 가는 훌륭한 신앙에 인품의 사람이었음을 봅니다.
“주님께서 위로하신다”는 느헤미야의 이름 뜻도 참 좋습니다. 이런 좋은 이름만 들어도 위로가 됩니다. 얼마전 어느 자매의 두 아들의 이름이 참 좋아 감탄한 적이 있습니다. 부부가 같이 의논하여 지은 이름, ‘고요한’, ‘고귀한’ 이름의 아들들인데 이름 뜻대로 잘 되었다는 이야기도 생각납니다.
오늘 느헤미야기에 앞선 이야기는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으로부터의 슬픈 소식을 듣고 여러 날을 주저앉아 울었다는 일화에 이어 느헤미야의 긴 감동적인 기도가 나오고 오늘 독서는 페르시아 임금의 허락을 얻어 예루살렘으로 잠시 귀향하는 일화가 펼쳐집니다.
유배지에서도 예루살렘은 예언자는 물론 유배자들인 이스라엘인들의 영원한 꿈이자 비전이요 희망이었음을 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듯 예루살렘을 사랑했던 느헤미야 예언자는 역시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얼마나 절박하고 진정성 가득한 느헤미아의 기도인지요. 이런 하느님 향한 열렬한 사랑의 기도가 이탈의 삶을 가능하게 함을 깨닫습니다.
“아, 하늘의 하느님, 위대하고 경외로우신 하느님,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과 당신의 계명을 지키는 이들에게 계약을 지키시고 자애를 베푸시는 분! 귀를 기울이시고 눈을 뜨시어 당신의 이 종이 올리는 기도를 들어 주십시오.”
바로 간절한 기도후 전개되는 오늘의 제1독서입니다. 마침내 페르시아 임금은 느헤미야의 진정성에 감동하여 그에게 예루살렘 도성을 다시 세울수 있도록 잠정적으로 허락을 내리니 기도의 응답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의 사람은 언제 어디서나 모든 이의 사랑과 신뢰를 받음을 봅니다. 느헤미야의 고백입니다.
“내 하느님의 너그러우신 손길이 나를 보살펴 주셨으므로, 임금님께서는 내 청을 들어주셨다.”
유배지 페르시아에서도 하느님의 도성, 예루살렘을 오매불망 그리며 사랑하던 느헤미야의 심정이 바로 화답송 시편에서도 아름답게 표현됩니다.
“우리 어찌 남의 나라 낯선 땅에서 주님의 노래를 부를 수 있으랴? 예루살렘아, 너를 잊는다면 내 오른손이 굳어 버리리라. 내가 예루살렘 너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너를 가장 큰 기쁨으로 삼지 않는다면 내 혀가 입천장에 달라 붙으리라.”
바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우리 믿는 이들에게 예루살렘은 이런 곳입니다. 저에게는 매일 미사가 봉헌되는 여기 요셉수도원 성전이 영적 예루살렘입니다. 사실 많은 이들이 예루살렘을 찾듯이 끊임없이 수도원 하늘길을 걸어 영적 예루살렘 성전에 옵니다.
바로 이런 예루살렘을 향해 십자가의 길, 순례길에 오른 오늘 복음의 예수님이십니다. 십자가의 죽음과 승천과 부활의 파스카의 장소가 될 최종의 목적지인 예루살렘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은 이 예루살렘을 향한 도상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세 사람이 제자가 되길 청하나 예수님의 반응은 다 다릅니다.
1.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
과연 이런 예수님을 따를 수 있겠는가, 장소로부터의 애착이나 집착에서 이탈하여 참으로 자유롭게 예수님을 따를 수 있겠는가 묻습니다. 참으로 하느님의 도성 예루살렘을, 하느님을, 예수님을 사랑할 때 저절로 장소로부터의 자발적 이탈입니다.
2. 두번째는 예수님의 명령이 선행하며 대화가 전개됩니다.
“나를 따라라.”
-“주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주십시오.”-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
하느님, 하느님의 나라, 예루살렘이 예수님께는 동의어입니다. 참으로 냉혹한 주님의 말씀처럼 들립니다만 하느님의 나라 선포의 사명이 이렇도록 절박하다는 것입니다. 역시 가족애에 대한 집착에서 이탈할 것을 명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참으로 하느님의 나라를, 영원한 하느님의 도성 천상 예루살렘을 사랑하여 삶의 궁극의 희망으로 삼을 때 저절로 가족으로부터의 자발적 이탈일 것입니다. 철저한 이탈의 자세만 갖춰졌다면 아마 예수님은 잠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도록 허락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예전 법정 스님의 일화도 생각납니다.
“예전 서슬이 퍼렇던 수행자 시절, 사랑하는 할머님의 부음을 듣고도 장례에 참석치 못한 것이 지금은 후회가 됩니다. 그까짓 수행이 뭐라고---, 지금 같았으면 만사 제쳐 놓고 갈 것입니다.”
저 또한 수도원 초창기 어머님 팔순 잔치에 참석하지 못했던 것, 사랑하는 어머님이 또 형님들이 벼르고 별러 몇차례 수도원을 방문했을 때 밥한끼 사들이지 못하고 그냥 보내 드린 것이 내내 회한悔恨의 마음으로 남아 있습니다. 지금은 다 고인들이 되셨는데 지금 같다면 밥도 사들이고 대화도 나눴을 것입니다. 이건 분별의 지혜에 이탈의 사랑에 속합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할 때 분별의 지혜요, 집착없는 이탈의 깨끗한 사랑, 아가페 사랑임을 깨닫습니다.
또 하나 생각나는 일화가 있습니다. 지금은 고인이 된 한약방을 했던 베드로 형제의 친형님이 예전 저명한 학승으로 조계종 총무원장이었는데 베드로 형제가 형 큰 스님을 방문했을 때, 도움을 받으러 간 것이 아니라 형님이 보고 싶어 방문했는데 그런 동생 없다며 한 번도 만나지 못했고 그렇게 형제는 둘 다 고인이 되었다는 일화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예수님에게서 얼핏 이런 인상을 받습니다만 역시 사랑의 분별의 지혜가 절실한 상황입니다.
3.“주님, 저는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먼저 가족들에게 작별인사를 하게 해 주십시오.”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가족은 물론 과거로부터의 철저한 이탈을 명하시는 주님이십니다. 하느님 나라의 선포가 참으로 엄중한 사명임을 각성시키기 위함입니다. 이 또한 주님 사랑의 자발적 열매인 이탈임을 깨닫습니다. 과거는 지났고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하느님 나라의 선포와 삶에 갈림없는 단순한 마음으로 투신하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 환호송에서도 바오로 사도의 이탈의 자유의 비밀이 환히 드러납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얻고 그분 안에 머물려고, 모든 것을 쓰레기로 여겼노라.” 참으로 그리스도가 우리의 전부가 될수록 저절로 모든 지상 사물로부터의 집착에서 이탈하여 초연한 자유를 누릴 것이며 복음 선포와 섬김의 삶에 전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불가에 등따뜻하고 배부르면 도닦기 힘들다는 말도 있고, 또 인정이 많으면 도심이 성글다는 말도 있습니다. 참으로 분별의 지혜가 중요한 대목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할 때 자발적 이탈의 수행에 초연한 자유요, 겸손한 사랑의 실천에 분별의 지혜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에게 이탈의 사랑과 자유를, 또 분별의 지혜를 선사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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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오늘 복음 말씀은 바로 수호천사 신심의 근거가 되는 구절입니다. 수호천사라는 말마디가 참 정겹게 느껴집니다. 예전에 써놓은 시 중에 ‘별’이란 시가 있습니다.
“그리움이 깊어지면
병이 된다 하지만
당신 향한 내 그리움은
기도가 되고 별이 됩니다
당신 영혼의 하늘에
빛나는 별이 되어
‘수호천사 별’이 되어
언제나 당신을 비출 것입니다.”
나를 위해 언제나 기도하는 이런 수호천사 별 같은 이들이 있는지요? 과연 나는 누구의 수호천사 역할을 하고 있는지요?
우리들 눈에 비록 작고 보잘것 없는 이들이더라도 하느님 눈엔 다 똑 같이 귀한 자녀들입니다. 아무리 못난 사람도 그 어머니에겐 소중한 자식이듯 말입니다. 그러니 누구를 소홀히 대하거나 업신여길 수 있겠습니까?
수호천사의 존재 유무를 따지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수호천사는 바로 자비하신 하느님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자비가 모든 이들 하나하나에게 미친다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자비의 화신과도 같은 수호천사와 수호성인이 나를 보호하고 있다고 믿는다면 얼마나 든든하겠는지요.
“언제나 나를 지켜주시는 수호천사여, 인자하신 주님께서 나를 당신께 맡기셨으니, 오늘 나를 비추시고 인도하시며 다스리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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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누가 가장 큰 사람인가?>
“천사”라는 말은 어떤 존재의 본성이 아니라 기능을 가리키는 명칭입니다. “하느님의 심부름꾼”입니다. 천사는“모두 구원을 상속받을 사람들에게 봉사하도록 파견된 시중드는 영들”(히브 1,14)입니다. 그리스도의 협조자들이 된 인간을 보호합니다.(마태18,10)
그들은 하느님께 성도들의 기도를 전달하고, 의인들의 영혼을 천국으로 인도합니다.(루카16,22) 그리고 자기들의 지휘자인 미카엘과 더불어 교회를 보호하기 위하여 태초부터 사탄과의 사움을 계속합니다.(묵시12,1-9)
모든 천사들은 그리스도께 복종함으로써 하느님의 계획안에서 하나의 자리를 차지합니다. 우리를 보호하는 천사가 있어서 감사합니다. 특별히 각 개인의 인생여정을 지켜 주고 보살펴 주는 역할을 하도록 지정하신 영적존재를 수호천사라고 합니다. 수호천사가 있어서 행복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하늘나라에서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어린이 하나를 불러 세워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사람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늘나라의 주인공은 어린이가 아니라 어린이같이 된 사람입니다. 어린이가 지닌 가장 큰 특성은 의존성입니다. 어린이는 어리면 어릴수록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특별히 부모의 품에 있어야 합니다. 부모가 주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아이처럼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은 하느님께 온전히 의탁하는 사람입니다. 그 무엇에 앞서 하느님의 품에 안겨 있는 사람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많이 가진 사람, 높은 지위에 있고, 권력을 가진 사람을 높은 사람이라고 하지만 하늘나라에서는 가진 것이 없는 사람이 위대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너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어라. 그러면 하늘에서 보화를 얻게 될 것이다.”(마르10,21), “나를 따르려고 제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백배의 상을 받을 것이며, 또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마태19,27)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 관념, 틀, 명예욕, 지배욕, 물질에 대한 애착을 버리고 주님께로 향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하늘나라의 주인이 어린이가 아니라 ‘회개하여 어린같이 된 사람’이라는 의미가 바로 이것입니다.
다른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고 주님께만 의지하는 사람은 복됩니다. 워즈워드는 ‘어린이를 어른의 아버지’라고 말했습니다. 어린이의 솔직함과 겸손, 단순함, 신뢰, 특별히 의존성 안에서 한수 배우시기 바랍니다.
키가 커서 큰사람이 아니라 주님을 차지해서 큰 사람 되시기 바랍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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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은 사람을 든 사람, 난 사람, 된 사람으로 구별해 봅니다. 든 사람은 배운 것이 많아서 학식이 뛰어난 사람입니다. 당해 분야에서 보다 많이 알고 있다는 것이다!
난 사람은 이름이 알려져서 누구나 아는 사람입니다. 당해 실무 분야에서 뛰어나게 실무처리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된 사람은 이름이 알려지지 않아도 배운 것이 없어도 인간으로서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사람입니다. 꼼수보다는 원칙을 살아갑니다. 곧 하늘을 두려워하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주님 앞에서 큰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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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셔서 지상 삶을 살아가게 하시면서, 각자에게 수호 천사를 붙여 주셨습니다. 이는 험하고 거친 지상 순례길을 걷는 약하고 가련한 우리에게 필요할 순간마다 힘과 용기가 되어 주라는 그분의 섬세한 배려라 할 수 있지요.
"그는 내 이름을 지니고 있다."(탈출 23,21)
이름이 곧 현존입니다. 하느님의 이름을 지닌 존재는 하느님을 품고 있고 그분의 뜻과 마음으로 움직입니다. 우리에게 보내 주신 천사는 그 자체로 하느님의 현존이고, 하느님 사랑의 증표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존재인 천사뿐 아니라 눈에 보이는 천사들도 보내주십니다. 가족, 이웃, 친지, 그리고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선한 영향력의 주인공들... 그런데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도움을 주는 이들만 천사가 아닙니다.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이들, 우리의 관심과 손길이 절실한 이들도 우리를 하느님 닮은 존재로 형성되어가도록 기회를 부여하는 천사들이지요.
"하늘 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큰 사람입니까?"(마태 18,1)
그런데 제자들의 관심사는 여전히 크고 강하고 우월한 존재와 그런 자리에 쏠려 있습니다. 세속적 질서에 발을 파묻은 채 하늘 나라에 대해 이해하려니 자꾸 예수님 가르침과 엇나갑니다. 이에 예수님은 사랑으로 통치되는 하느님 현존 상태에서 누가 더 큰지에 대해 어린이를 들어 인내롭게 설명하십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마태 18.3)
우선 자기 안에서 하느님의 뜻과 합치되지 않는 부분을 돌이켜 하느님을 향하도록 돌려놓아야 합니다. 회개자는 옛 삶은 하느님 자비에, 미래는 하느님 섭리에 맡긴 채 현재를 철저히 의탁해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보호자가 꼭 필요한 어린이처럼 말이죠.
"자신을 낮추는 이"(마태 18,4)
진정으로 부서지고 낮추인 영혼이 된다는 것은 인위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느님의 크신 자비와 죄인인 자신의 작음이 이루는 극적인 대비를 받아안고 자기 자리를 찾게 되는 질서입니다. 그런데 무능하고 약해서 누군가 들어올려 주지 않으면 낮은 곳에 자리할 수밖에 없는 어린이같은 이가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크다니 하늘 나라에서의 크기는 곧 "작음"의 크기인가 봅니다.
"이 작은 이들"(마태 18,10)
이제 큰 사람에 관한 화제는 작은 이에 대한 관심으로 넘어갑니다. 설령 인간의 세속적 눈에 보잘것없는 이라도 그의 천사가 그와 하느님 곁을 오가며 그를 위해 애쓰고 있기에, 우리는 하느님 곁에서 그분 얼굴을 뵙고 있는 우리 각자의 수호천사를 통해 하느님의 시야 안에, 마음의 사정거리 안에 들어 있는 겁니다. 크고 작음을 가늠할 필요없이, 감출 것 없이 아버지 품에 안긴 어린이처럼 말입니다.
인위적으로 무엇이 되려 하기보다 그런 회개자, 그런 어린이, 그런 작은 이, 그렇게 낮추어진 이를 바라보시는 주님의 눈길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그들은 하느님 자비와 사랑이 꼭 필요한 존재이기에 하느님께서 당신 눈동자처럼 보호하고 돌볼 수 밖에 없는 이들이니까요.
이것이 바로 하늘 나라에서 통용되는 도량형의 비밀입니다. 바로 하느님의 큰 사랑과 자비가 더 절실한 이들이 큰 사람이라는 것! 그러니 무엇을 망설이십니까? 자기 기만과 착각과 허세만 살짝 내려놓으면 우리는 이미 하늘 나라에서 충분히 "큰 사람"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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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소보둥지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천사의 마음>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 늘 지켜보고 있다."
천사가 늘 나를 따라다니고
악마가 늘 나를 따라다니고
누가 나를 선으로 이끌고
누가 나를 악으로 이끄나?
머리로는 다 알고 있지만 때때로
뿔달린 천사가 되기도 하는 우리들이기에
주님께서 수호천사를 붙여주신 것입니다.
악마의 힘이 어떤때는
천사보다 쌔다는것 아시죠?
악을 눌러 꺾기 어려우면
악을 피하는 지혜를 살고,
피부 건강 유지하려 노력하듯이
천사의 마음 쭈욱 유지 발전시킵시다.
수호천사는 양심의 소리를 따르게 하며,
요란하지 않고 조용히 움직입니다.
'천사의 마음 찍는 CCTV 작동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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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마태 18, 10)
수호 천사는
용서와 사랑을
일깨워줍니다.
고된 우리의
삶에 수호천사를
하느님께서
주셨습니다.
아끼고 품어주는
사랑의 하느님께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하느님의
천사를 통해
우리의 삶은
수호하고 수호받는
소중한 여정을
걸어갑니다.
삶의 시작도
삶의 마침에도
하느님의 천사는
늘 함께합니다.
수호 천사가 있기에
삶의 이아픔도
견딜 수 있습니다.
깊이깊이
삶의 신비를
느끼게 합니다.
끊임없이 하느님을
믿도록 우리를
도와줍니다.
저마다의
수호 천사를 통해
차별없는 하느님
사랑을 만납니다.
하늘의 은총은
천사를 통해
드러납니다.
사람을 살리시는
하느님을 깨닫습니다.
수호천사가 있기에
외롭지 않습니다.
신앙의 기쁨을
누리게 합니다.
일상에서 만나는
평범한 모습이
가장 빛나는
수호천사의
모습입니다.
우리의 참모습을
일깨워주는
수호천사와 함께
우리의 삶이
사랑하는 삶으로
나가길 기도드립니다.
수호천사가 있기에
살 만한 세상이 됩니다.
모든 삶은
수호천사와
함께하는 하느님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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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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