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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샘의 나들이 길-3 태화산 마곡사와 세조가 쓴 영산전 현판
일주문 현판 해강(海剛) 김규진/대광보전 현판 표암 강세황
영산전 현판은 조선임금 세조/심검당 현판 송하 조윤형
충청남도(忠淸南道) 공주시(公州市) 사곡면(寺谷面) 운암리(雲岩里)의 태화산(泰華山) 동쪽 산허리에 자리 잡은 마곡사는 대한불교 조계종의 제6교구본사(本寺)이다.
‘春마곡’이란 별칭에서 알 수 있듯이 봄볕에 생기가 움트는 태화산 마곡사의 석가님 오신날은 사진전,시화전과 작은 음악회도 열리고 있다.
마곡사 사적입안(事蹟立案)의 기록에 '마곡사는 640년(백제(百濟) 무왕(武王) 41년) 신라의 고승 자장율사가 창건하고 고려 명종(明宗) 때인 1172년 보조국사(普照國師)가 중수하고 범일(梵日) 대사가 재건하였으며 도선국사(道詵國師)가 다시 중수하고 각순 (覺淳) 대사가 보수한 것으로 전해오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세조가 ‘영산전(靈山殿)’이란 사액(賜額)을 한 일이 있다.
신라의 고승 자장 율사가 창건할 당시만 하더라도 30여 칸에 이르는 대사찰이었으나 현재 마곡사는 대웅보전(보물 제801호)을 비롯한 대광보전(大光寶殿:보물 제802호), 영산전(보물 제800호), 사천왕문, 해탈문(解脫門) 등의 전각들이 가람을 이루고 있다.
이 밖에도 도량의 성보(聖寶)로는 5층 석탑(보물 제799호)과 범종(梵鐘:지방유형문화재 제62호), 괘불(掛佛) 1폭, 목패(木牌), 세조가 타던 연(輦), 청동 향로(지방유형문화재 제20호), 감지금니묘볍연화경(紺紙金泥妙法蓮華經) 제6권(보물 제270호) 과 감지은니묘법연화경 제1권(보물 제269호)이 보존되어 있다.
마곡사의 편액과 현판에서 본 서체-해강(海剛) 김규진
마곡사 일주문 현판은 근대 서화가인 해강(海剛) 김규진(金圭鎭. 1868~1933) 의 글씨이다.
해강은 모든 서법에 자유로왔으며 특히 대필서(代筆書)가 당대 에 독보적이었다. 현판 양족을 초화와 화훼로 꾸미고 초서로 썼다. 김규진의 본관은 남평(南平), 자는 용삼(容三), 호는 해강(海岡)이며, 그 외 백운거사(白雲居士) 취옹(醉翁) 만이천봉주인(萬二千奉主人) 등 10여 개가 있다. 평남 중화 출생으로 8세부터 장인 이소남(李小南) 에게 글씨를 배우고 18세 때 청(淸)나라에 유학하여 서화(書畵)의 명적(名蹟)을 연구하였다.
전서(專書), 예서(隸書), 해서(骸書), 행서(行書), 초서(草書)에 모두 묘경(妙境)을 이루었고, 산수화 화조화 (花鳥畵)를 잘 그렸으며 특히 난죽(蘭竹)은 절묘하였다. 그는 사군자(四君子)도 즐겨 그렸고 글씨는 대자(大字)를 특히 잘 썼다. 영친왕이은(英親王李垠)에게 서법(書法)을 가르쳤다. 한국 최초로 사진술을 도입하고 어전(御前)사진사가 되었다. 한편, 안중식(安仲植) 조석진(趙錫眞)과 함께 서화협회를 창설하여 후진을 양성하는 한편, 경향 각지에서 화전을 개최하여 서화 예술의 계몽에도 진력하였다. 저서에 <해강난죽보><육체필론><서법진결><금강유람가> 작품으로는 글씨에 <기법보살><천하기절><금수강산><대웅전><백마장강><촉석루><가야산해인사><보신각><희정당대조전><태극전> 그림에 <외금강만물상도><소상대죽도><대부귀길상도> 등이 있다.
해강 김규진 서체는 가야산 해인사 일주문,대방광전, 백양사 ,발본산 영월 금몽암 , 영월 우화루,송광사 현판, 운달산 김룡사, 정족산 전등사 등에서 만날 수 있다.
대광보전 현판-표암 강세황
시문서화 사절로 꼽히던 표암 강세황(姜世晃, 1712~1791)의 글씨로 흘림체로 힘이 있고 유려하다.
본관 진주(晋州). 자 광지(光之). 호 첨재(添齋)·표옹(豹翁)·노죽(路竹)·산향재(山響齋)·표암(豹菴). 시호 헌정(憲靖)이다. 어려서부터 재능이 뛰어나, 8세 때 시를 짓고, 13~14세 때는 글씨에 뛰어난 솜씨를 보여, 소년기에 쓴 글씨조차도 병풍을 만드는 사람이 있을 정도였다. 아버지의 사랑과 교육을 받았으며, 매형이었던 임정(任珽)의 영향도 크게 받았다. 처남 유경종 외에도 허필(許佖) ·이수봉(李壽鳳) 등 과 절친하게 지냈으며, 이익·강희언 등과도 교유하였다. 당대의 유명한 화가였던 김홍도·신위 등도 그의 제자들이다. 벼슬에 뜻이 없어 젊은 시절에는 주로 작품활동에만 전념하였다. 32세 때 가난 때문에 안산(安山)으로 이주한 뒤에도 오랫동안 학문과 서화에만 전념하였다. 처음 벼슬을 한 것은 61세로, 영조의 배려에 힘입어 관계에 진출하게 되었다. 이후 64세 때 기구과(耆耉科), 66세 때 문신정시에 장원급제하였으며, 영릉참봉·사포별제(司圃別提)·병조참의·한성부판윤 등을 역임하였다. 72세 때 북경사행(北京使行), 76세 때 금강산 유람을 하고, 기행문과 실경사생 등을 남겼다. 시·서·화의 삼절로 불렀으며, 식견과 안목이 뛰어난 사대부 화가였다. 그 자신은 그림제작과 화평(畵評)활동을 주로 하였는데, 이를 통해 당시 화단에서 ‘예원의 총수’로 한국적인 남종문인화풍을 정착시키는 데 공헌하였다. 이밖에도 진경산수화를 발전시켰고, 풍속화·인물화를 유행시켰으며, 새로운 서양화법을 수용하는 데도 기여하였다. 평생 동안 추구한 그의 서화의 세계는 궁극적으로 습기(習氣)도 속기(俗氣)도 없는 경지에 이르는 것이었다. 산수·화훼가 그림의 주소재였으며, 만년에는 묵죽으로 이름을 날렸다. 작품으로는 《첨재화보(添齋畵譜)》 《벽오청서도》 《표현연화첩》 《송도기행첩》 《삼청도》 《난죽도》 《피금정도》 《임왕서첩(臨王書帖)》 등이 있으며, 54세 때 쓴 《표옹자지(豹翁自誌)》에 있는 자화상을 비롯하여 7~8폭의 초상화를 남겼다.
심검당 현판-송하 조윤형
심검당 현판은 정조 연간에 청백한 관리로 이름난 송하 조윤형(曺允亨, 1725~1799)의 글씨이다.
청빈한 그의 인품으로 굵직하면서도 날카로운 느낌으로 '심검'이라는 의미와 상통하는 글씨체이다.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치행(穉行), 호는 송하옹(松下翁). 할아버지는 판결사 조하기(曺夏奇)이며, 아버지는 개성부유수 조명교(曺命敎)이다.
문음(門蔭)과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1766년(영조 42) 처음 벼슬길에 나간 뒤 1781년(정조 5) 선공감주부가 되었으며, 1784년 예조정랑을 역임하였다. 이어서 선공감부정(繕工監副正)을 거쳐 보덕(輔德)이 되어 책례도감상례(冊禮都監相禮)를 겸하였다.
그 뒤 안악군수·광주목사(廣州牧使) 등 3현·2군·1목의 수령을 역임하고 돌아와 1791년 호조참의가 되었으며, 1797년에는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가 되었다. 그림과 글씨에 능하였는데, 풀·대나무 등의 묵화를 잘 그렸다.
글씨는 초서·예서를 잘 써서 일찍이 서사관(書寫官)을 역임하였으며, 위로는 대신들로부터 아래로 조례(皁隷)에 이르기까지 누구나 그의 글을 얻으려 하였다.
작품으로는 「유점사풍악당대사비(楡岾寺楓嶽堂大師碑)」·「이보혁무신기공비(李普赫戊申紀功碑)」·「용흥잠저고정기(龍興潛邸古井)」 등을 썼다.
마곡사 영산전 현판-조선임금 세조
영산전 현판은 세조가 1465년에서 1487년 사이에 마곡사에 들러 쓴 현판이라고 '마곡사 사적입안'에 기록되어 있으며 실제 현판에는 '세조어필 '이라고 쓰여져 있다.
재위 1455년(세조 1)∼1468년(세조 14). 본관은 전주(全州). 이름은 이유(李瑈). 자는 수지(粹之). 세종의 둘째 아들이고 문종의 아우이며, 어머니는 소헌왕후 심씨(昭憲王后沈氏)이다. 왕비는 정희왕후 윤씨(貞熹王后尹氏)이다.
편액과 현판
편액(扁額)과 현판(懸板), 편액은 한 개이고 현판은 여러 개이다. 편액이 제목이라면, 현판은 내용이다. 그러므로 대웅전 등 전각과 일주문 등에 붙이는 것은 편액이 정확한 표현이다. 편액의 사전적 개념은 ‘널빤지나 종이·비단에 글씨를 쓰거나 그림을 그려 문 위에 거는 액자’이다. 대부분이 가로로 걸기 때문에 횡액(橫額)이라고도 하지만, 숭례문 글씨와 같이 세로로 쓰기도 한다. 흔히 현판으로 통칭한다.
우리나라의 옛 건축물에는 대부분 건물의 이름, 성격, 품위를 나타내는 편액이 걸려있다. 편액은 '건물의 문 위 이마 부분에 써 놓은 글씨'라는 뜻인데, 편액은 건물마다 딱 하나뿐이다. 편(扁)은 글씨를 쓴다는 뜻이고, 액(額)은 '건물 앞부분 높은 곳', 사람으로 치면 이마에 해당하는 곳이다. 한 건물에 현판은 여러 개가 있을 수 있지만, 편액은 입구의 한가운데에만 하나 있는 것이 다른 점이다.
전국사찰에 남긴 서예 현판
추사,일중,벽하,차우,해사,초정,여초의 서체
어필 서체 세조,순조,고려 공민왕,박정희 그리고 이순신
추사 김정희(1786-1856,서예가,금석학자,고증학자,화가,실학자)의 서체로 현판과 편액을 남긴 사찰은 여주 신륵사(예서),해남 대흥사 무량수각(예서)과 대웅보전,조계산 선암사 무량수각, 부산 금정산 원효암 무량수각, 진관사 대웅전, 서울 강남 봉은사 일주문은 진관사 대웅전 편액을 다시 모각한 글씨이다.
해강 김규진(1868-1933,저서 서범진결,육체필론,해강난죽보,궁내부 시종) 서체는 마곡사를 비롯하여 가야산 해인사 일주문,대방광전, 백양사 ,발본산 영월 금몽암 , 영월 우화루,송광사 현판, 운달산 김룡사, 정족산 전등사,쌍계사 일주문 등에서 만날 수 있다.
현대 서예가로 일중 김충현선생(1921-2006)의 글이 전국 사찰에 많이 등장하는 것은 현대 사회에서 많은 사찰들이 복원이나 중수등을 하면서 당시의 유명 서예가의 글을 받았기 때문이다.
부안능가산 내소사의 일주문,천왕문, 경북 문경 운달산 김룡사, 양평 용문사 일주문,관음전, 대구팔공산 파계사 일주문-일중 김충현.양산 천성산 홍룡사 요사채 ,내장산 내장사 범종각,송광사 승보 일주문과 경복궁 영추문과 건춘문 현판 등이다.
일중 김충현과 현대 서예의 한 획을 긋고 있는 여초 김응현선생(1927-2007,육조사의 대가)의 글로는 대구팔공산 파계사 범종각, 강화 보문사 일주문(전서)직지사 현판, 하동 칠불사 현판,강릉 낙산사 보타전 현판과 경복궁 강령전, 경북 김천의 영남제일문 현판,공초 오상순 시비등이 있다.
초정 권창륜(1943-현,한국서예가협회장 역임,)의 글로는 문경 운달산 김룡사의 해운암,설선당,절하당,치악산 구룡사등과 숭레문 상량문, 청와대 춘추문,연수문,남산한옥마을,삼청각등에서 만나게 된다,
해사 김성근(1835-1919,문신,성리학자,정치가,친일인명사전 등재,궁내부 특진관)의 서체는 부산 금정산 선찰대본산 범어사 조계문,해남 두륜산 대흥사의 현판과 명부전,팔공산 동화사 영산전과 산신각이다.
염재 송태희(1872-1941,시,서,화 삼절) 서체는 구례 방장산 천은사,수홍루,순천 조계산 선암사 장경각,영암 월충산 도갑사 해탈문, 고흥 팔영산 능가사 대웅전등이다.
원교 이광사(1705-1777) 서체는 강진 백련사 대웅보전, 지리산 천은사와 해남 대흥사 대응보전 현판을 썼지만 추사 김정희의 글씨로 교체됐다.
성당 김동희의 서체는 태고총림 선암사 강선루,선암사 일주문 후면편액은 풍관안택희 (1761,전서),방장산 천은사는 학정 이돈흥(1947-2020),천은사 회승당,경남 하동 칠불암 편액과 전주 옥류동(교동)월당지반 바위의 창암 암각서의 창암 이삼만(1770-1847,조선의 삼대명필,초서 창암체),양평 모악산 불갑사는 일광당 남재철, 법주사 일주문(해서) 벽하 조주승(1854-1905),설악산 신흥사 사천왕문,부여 만수산 무량사,부산 태종대 태종사,통영 미륵산 관음암 강성대 보광루,통영 미륵산 관음암,여주 봉미산 신륵사,양산 영축산 통도사 현판, 수정사 대광전은 차우 김찬균(1910-?), 순천 조계산 선암사 삼성각과 허백련 묘비의 근원 구철우(1904-1989),마곡사 대광보전은 표암 강세황(1713-1791,조선의 문신,서화가,표암집,송도기행첩), 강진 만덕산 백련사,이차돈 비는 김생(711-?,예,행,초서,신라서예가),안동 천등산 봉정사의 현판과 덕취루,독립문 현판은 동농 김가진(1846-1922,주일공사,대한민보발행,독립운동가) 영주 봉황산 부석사 안양루,예천 용문사 일주문,중국 절강성 하진무의 영봉정사, 일본 진충사등은 소남 김종호(석당,1901-1985)등의 서체이다.
임금의 글씨로는 순조(1790-1834,조선 23대 국왕,아내 순원왕후) 어필로는 선암사 원통전 대복전, 세조(1417-1468,조선 7대국왕)의 마곡사 영산전 편액,상원사 어첩,의창군 이광(1589-1645,선조의 8째 서자)의 지리산 화엄사 대웅전(인조 14년) ,송광사 대웅전,수덕사 대웅전이 있으며 이순신(1545-1598,난중일기)친필로는 여수 영취산 흥국사 공북루, 고려말의 임금 공민왕(1330-1374,고려 31대 국왕,호 이재,익당)의 서체는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안동군청 청사 안동웅부의 현판, 청량사 유리본전 현판, 영호루 현판,강릉 임영관 현판과 작품으로 천산대렵도,이양도,아방궁도등의 작품이 있다.
사찰이외의 현판글씨는 경회루 현판은 신헌1811-1884,조선 무신,본명 신관호,추사 김정희의 제자),동대문 흥인지문은 이황1502-1571,시호 문순,호 퇴계,천원지폐인물),광화문 현판,무악재 기념비,진해탑,진해공성운동장, 언양-울산고속도로,태를국제스케이트장,농협중앙회,전매청,문화공보부,재무부의 ‘저축은 국력’,공화당 중앙훈련원,광화문 현판,현충사 현판등은 박정희대통령(1917-1979,새마을 운동 휘호 ‘자조정신’ 경매 4천4백40만원), 도산서원현판,지리산 화엄사 편액은 석봉 한호(1543-1605,조선문신,서예가,자는 경홍,호는 석봉,청사,국가문서의 표준 서체),숭례문 편액은 양녕대군(1394-1462,세종의 큰형,화가,시인,정치인,16대 손 이승만)의 글씨이다.
정조대왕(1752-1800,시호 선황제, 호는 홍재,아버지 사도세자,조선 22대 왕)의 어필로 수원 화성행궁 현판,황성장대, 장남현,장락당,득중정,복내당, 남한산성 온조왕사 숭렬전 편액이 있으며 화성행궁 장안문,부여 궁남지 포룡정,성흥산성 봉화제단 현판은 정치인 김종필(1926-2018)의 서체이다.
(환경경영신문 www.ionestop.kr 환경국제전략연구소장, 시인, 문화평론가 김동환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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